완벽한 도움을 주고 있다!

산방한담 2010/08/23 10:25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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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언제나

행복이며, 부, 지혜,

심지어 깨달음 조차

매 순간 우리에게 보내주고 있습니다.

우주는 언제나 최상의 도움과 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돕기 위한

최선의 준비를 마친 상태로 존재합니다.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문 앞에 서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초대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마음을 열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닫아걸고 틀어막지만 않으면

그 모든 지혜의 요소들이 줄지어 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는 언제나 그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에 방어벽을 치고

진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틀어막고 있습니다.

초대할지라도 전체적으로 다 받아들이지 못한 채

나에게 도움 되는 것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도움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싫은 것은 거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주적인 모든 도움을 받고, 진리를 받아들이려면

내 삶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을

선택적으로가 아닌 전체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일들은

나에게 깨우침을 주기 위해서,

업장소멸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우주법계가 자비로움으로써 계획해 낸 일이요

신의 섭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진리를 초대한다면,

문을 여는 순간 진리의 그 모든 것들이

활짝 웃으며 찾아 올 것입니다.

스스로 온갖 방어벽을 친 뒤

항상 선택하던 것만을 선택하고,

거부할 것은 거부하는

그런 비좁은 의식의 감옥에 갇히지 않기를 발원합니다.

자신이 친 방어벽에 스스로 갇혀 꼼짝달싹 못함으로써,

진리의 가능성, 업장소멸의 가능성,

행복과 깨어남의 가능성을

걷어차지 않을 수 있길 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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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이 외부로 드러난다

산방한담 2010/08/23 10:22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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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다툼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나의 탓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난 다툼일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결국에는 나의 탓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와 다투는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내 내면의 화가

외부적으로 드러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탓하거나,

힘으로 억누르면

잠시는 화가 잠재워진 것 같더라도

우리 안에는 더 큰 화가 또아리를 틀고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분명 훗날

다른 더 큰 화의 인연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다툼이나, 화는

그대로 내 내면의 표현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서 다툼이 사라지면

외부적인 다툼 또한 쉬어집니다.

부처님이나 예수님에게 다툼을 걸더라도

우리는 그분들과 싸울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그 분들은 내면에 화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툼 뿐 아니라,

나에게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문제들이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내 외부로부터 오는 듯 여겨지지만

그 모든 것은

내 안에 씨앗이 있기 때문에 오는 것일 뿐입니다.

내 안에 씨앗이 없다면

아무리 외부에서 문제를 일으키더라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똑같은 바이러스가 오더라도

내성이 강한 사람에게는

병이 들어오지 못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증지부경전에서는 말합니다.

‘네 가정 내에서 다툼이 일어난다면

다른 사람들을 탓하지 말라.

네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서 그 원인을 찾고,

해결책도 거기서 구하라.’

우리 모든 법우님들이

서로 상대방을 탓하기 보다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원인을 찾고

해결책도 거기에서 구할 수 있게 되길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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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게 하소서

산방한담 2010/08/23 10:16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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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수많은 영적인 스승들은

한결같이 상대방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미운 감정,

원한의 감정이 남아 있게 되면

그것은 상대방을 괴롭히는 것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파괴합니다.

용서 못한 감정, 원한의 감정은

상대방의 것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씻어내지 못한 감정은

내면의 세포 하나 하나에까지 쌓이게 되고,

그것이 내 몸과 마음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내 안에 탁한 에너지를 씻어내고,

그 자리를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로 대치시키는 것입니다.

로버트 뮬러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가 바로 용서’라고 하였습니다.

내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그동안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를

사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앞으로의 내 삶에

나를 용서해 주지 못할 사람을 준비해 두는 것과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질 삶의 미래를 파괴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용서는 단순히 남을 용서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성숙시키고 내 안에 사랑을 키우며

비움의 명상을 이어가는 영적 성장의 바탕이 됩니다.

용서할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을 사랑하게 되고,

또한 삶이 나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로써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나를 욕하고 괴롭혔던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우리 모든 법우님들의

마음 속에 미움의 씨앗이 사라지고,

용서와 화합과 화해가 어우러진

큰 사랑이 싹틀 수 있길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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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으라

산방한담 2010/08/23 10:13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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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이는

어떤 소유물이 있으면 있기 때문에 괴롭고,

없으면 없기 때문에 괴로움을 느낍니다.

있으면 있는데 집착해

잃지 않으려고 애쓰느라 괴롭고,

없으면 박탈감에 빠져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있고 없음의 집착을 놓으면

있으면 있어서 즐겁고,

없으면 없어서 즐거울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이는

집이 있으면 있어서 괴롭고

없으면 없어서 괴롭지만,

지혜로운 이는 집이 있으면 있어서 좋고,

없으면 없어서 집값 떨어질 걱정 안 해도 되니 속편해서 좋습니다.

‘아미타경’에서도 말합니다.

‘부자들은 돈 걱정, 땅 걱정, 집 걱정 등

많은 소유로 인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가난한 사람도

집이 없어 걱정, 돈이 없어 걱정, 땅이 없어 걱정하는 등

가난에 찌들려 걱정한다.

있으면 있어서 걱정이고 없으면 없어서 걱정이다.’

이처럼 세상 그 어떤 일도

좋고 나쁜 양 면은 있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내가 어느 쪽을 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소유하고 있지만 그 소유에 집착하면

그로인한 온갖 괴로움이 뒤따르고,

소유하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 소유에 온갖 지혜와 복덕이 깃듭니다.

지혜로운 이는 나에게 주어진 일체 모든 상황에 대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완전긍정의 무한한 받아들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랬을 때 우리는 우주법계를 향해

긍정의 에너지를 내보내는 것이고,

그것은 곧 우주로부터

대긍정의 일들을 끌어당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모든 도반들이

이래도 괴롭고 저래도 괴로운 것이 아닌,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무한긍정의 받아들임으로 살아갈 수 있길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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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를 받아들이라

산방한담 2010/08/23 10:10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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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제행무상으로,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로 흐릅니다.

어느 한 순간도 변화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를 수 있어야 합니다.

변화를 받아들이며

그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합니다.

변화는 진리의 모습이니

어떤 것도 멈추어 세워 집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데서 옵니다.

변화하는 것은 두렵고

변하면 안 될 것 같이 느끼곤 합니다.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라고,

이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지위, 가족, 친구,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지속되길 바랍니다.

그처럼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지속'과 '안주'를 바라곤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변화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온전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집착하지 말고, 다만 흐르도록 놓아두면

이 세상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알아서 흐릅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라고 합니다.

명확한 진리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는 뜻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고 하여,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말합니다.

노자의 무위자연의 가르침도

그와 같은 함이 없는 행, 집착이 없는 무위행을 설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든 수행의 도반들이

우주적인 변화의 흐름을 타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며,

그 어떤 것도 집착해 붙잡는 것 없는

무위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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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은 날뛰는 원숭이와 같아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이리 저리 옮겨 다니길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 붙었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가 붙었다가,

돈에 가 붙고, 지위에 가 붙고,

대학생들은 취직에 가 붙고,

직장인들은 진급에 가 붙고,

부모가 되면 자식에 가 붙곤 합니다.

욕을 얻어 먹으면 욕한 사람에게 가 붙었다가,

칭찬을 들으면 칭찬한 사람에게로 옮겨가고,

이미 지나간 과거에 가 붙기도 하고,

오지도 않은 미래에 가 붙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는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비추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마음 어디에 있나' 하고 늘 관찰 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이란 놈의 특성이 붙잡아 집착하기를 좋아하다 보니

마음은 밖으로 외출만하고 돌아오면

혼자 오지를 않고 온갖 번뇌며 애욕이며

집착꺼리를 잔뜩 짊어지고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늘 마음이 무겁고,

늘 혼란스럽고 정리가 안 되고 그러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내 안에, 중심 잡고 딱 버티고 있어서

몸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있어야 합니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늘 다른 곳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몸과 마음의 균형이 자꾸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내 안에 중심을 딱 잡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곳에 가 있을 때,

삶의 에너지는 조금씩 쇠잔해 가며,

중심이 없으니 허한 마음만 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지금 여기'에

온전히 집중하여 중심을 잡고 있을 때,

속 뜰의 본래 향기는 조금씩 빛을 놓게 될 것이며

힘있는 삶의 에너지가 고동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법우님들의 마음이

혼란스럽고 잡되지 않아

매 순간의 현재에 중심을 잡고 서서

‘이 마음 어디에 있나’ 하고 잘 지켜봄으로써

모든 이들의 삶에 지혜로운 중심이 서기를 발원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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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부체 가는 길]

고도가 오르면 물가도 오른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고락샵에 도미토리를 미리 잡아 놓았으니 서두를 것 없이 로부체에서 천천히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출발을 하기로 한다.

로부체 음식값은 고락샵과 함께 이 에베레스트 지역 일대에서 가장 높다. 150~250루피(70루피=1천원)면 먹던 음식 값이 300~400루피까지 상승을 했고, 양동이 2개를 주는 더운 물 샤워도 남체에서는 200루피 하던 것이 여기에서는 400루피로 뛰는 등 다른 모든 가격들도 두 배 이상씩 뛰었다. 특히 전기는 히말라야 고지대의 열악한 전기 사정상 어쩔 수 없어 카메라 베터리 충전도 남체에서는 100루피 하던 것이 무려 400루피로 네 배나 뛰었고, 각종 따뜻한 음료들도 한 잔에 20~30루피 하던 것들이 죄다 70~90루피로 뛰었다.

[로부체 롯지, 트레커들의 걸망, 이것 하나면 2주간의 트레킹도 충분하다]

그렇다고 한들 이것을 가지고 비싸다고 투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접 여기까지 올라온 사람들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이 나오겠는가. 여행자들은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만으로도 제 몸 가누기 힘들 정도이고, 그나마 올라온 사람은 행운이며, 많은 사람들이 여기까지도 못 오고 고산병에 서둘러 내려가기 바쁜 사정을 생각했을 때, 이곳까지 그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올라오는 짐꾼들의 노고에 비한다면 그리 비싸다고 할 수 없는 가격이다. 5,000고지가 넘는 이 척박한 곳에서 몸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때때로 맛깔스런 달밧(네팔의 주식, 한국의 백반처럼 밥과 커리, 반찬 등이 나와 손으로 비벼먹는 음식)을 만날 때면 이 높은 곳에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로부체 롯지 풍경]

딩보체 이후로 모든 전기는 완전히 태양전지에 의존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롯지며 식당이 늘 어둡다. 롯지 방에는 당연히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저녁을 먹고 나면 방에 돌아와 그윽한 어둠을 즐기기 제격이다. 이곳에서의 밤은 그야말로 밤 같고 밤답다. 밤이 밤 같아야 하는데, 우리들의 밤은 오히려 낮보다 더 현란한 빛의 소음으로 굉굉하다. 두 눈도, 온 몸의 감각도 밤에는 깊은 어둠 속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어야 한다. 어둔 밤, 소리와 빛이 사라지는 순간, 비로소 우리는 자연의 연유한 내성과 달빛 별빛의 또글또글한 깊이를 명상하듯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가뭇가뭇 잊고 지냈던 무수한 밤의 이야기를 비로소 여기에서 새록새록 떠올리며 깊은 어둠과 만귀잠잠의 침묵을 호사롭게 누리고 있다.

마을들도 밤이면 모두 최소한의 불만을 밝히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허영거리며 산책을 나가 하늘에 별을 보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다. 인위적인 전깃불이며 가로등이 많은 곳에서는 별들이 이처럼 정채롭게 반짝일 수가 없다.

[로부체 롯지, 이불을 따스한 햇살에 널어 말리고 있다]

하나의 방식일 뿐, 더 나은 방식은 아니다

점심을 먹고 나오니 기분이 한결 상쾌하다. 지텐은 밥을 먹자마자 먼저 가서 방을 잡고 기다리겠다고 고락샵으로 서둘러 출발을 했고, 나는 천천히 이 시간을 즐기며 슬겅슬겅 걸어 오른다. 걷기 위해, 혹은 도착하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매 순간 그 자리에서 현존하기 위해 걷다 보니 걷다 서다 앉기도 하고 때로는 물가 풀섶에 드러눕기도 하며 걷는 듯 마는 듯 제자리걸음의 속도로 저어간다. 어차피 빨리 도착해 봐야 거기서 또 오후 시간을 산책하게 될 터이니 그저 가볍게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고락샵을 향해 다박거리며 걷는다.

[로부체 롯지의 풍경, 한 무리의 순례자들이 로부체를 지나고 있다]

이 텅 빈 길 위로 때때로 짐꾼들과 야크가 뒤섞여 한가로운 오후를 거닐고 있다. 맑은 물이 흐르고, 구름도 유유한한하게 흘러가고, 내 발걸음도 마음도 함께 따라 흐른다. 모든 것이 흐르고 흐르고 흘러간다. 잠시도 머물러 주저앉아 있는 것은 없다. 또 언제까지고 머물러 있을 수 있는 것도 이 지구별에는 없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가운데 놓여 있을 뿐!

그 어떤 것도 언제까지고 멈춰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유난히 그 흐름을 멈추려 하고 붙잡아 두려 애쓰는 것이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역동적으로 흐르며 변해가는 세월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은 모든 것을 멈추고 싶어 안달이다. 내 사랑도, 내 소유도, 내 생명도, 내 젊음도, 내 자식도, 내 돈과 명예, 이 모든 것들을 어디로 달아나지 못하도록 꽉 움켜쥔 채 도무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 이치가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고 변화의 이치를 거부할 수는 없으니 언젠가 그 모든 것들은 내 곁을 떠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꽉 붙잡고 내게서 멈춰 서도록 하고 싶어도 그 어떤 것 하나 영원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그저 그렇게 표연히 흘러갈 뿐이다. 그래서 수많은 성인들의 말씀은 공통적으로 ‘집착하지 말라’ ‘붙잡지 말라’ ‘마음을 비워라’ ‘욕심을 버려라’ ‘변화를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고 현실을 수용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변화의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 삶에 매우 의미 있는 중대한 변화와 성숙이 깃드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몸담고 살아가던 세상에서 뚝 떨어져 보니 그 속에 살면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보게 된다. 놓고 산다, 비우고 산다 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붙잡게 되는 것들, 집착하고 있던 것들, 수많은 욕심의 실체들이 미세하게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가만 생각해 보면 비운다고 하고 어느 한 가지 집착을 비우면 그 비워진 자리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미묘한 또 다른 것들이 들어 차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집착과 소유를 비우고 살자’ 하는 생각을 실천하는 순간 물질적인 소유를 어느 정도 버린 그 틈으로 ‘나는 잘 비우고 사는 사람이다’ ‘청빈과 가난의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나아가 그래서 ‘나는 너희들 꽉 채우고 욕심 부리며 사는 사람들과는 달라’ 하는 일종의 우월감 같은 또 다른 채움과 욕심과 아집이 깃드는 것이다. 또한 ‘마음을 비우고 명상을 실천하자’ 하는 생각과 실천의 바탕에는 나는 잘난 수행자라는, 명상가라는 그렇기에 번뇌와 망상으로 물든 일반인들과는 다르다는 또 다른 번뇌 망상이 자리 잡곤 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어쩌면 더 큰 욕심이며, 더 큰 아상일 뿐, 전혀 수행과 비움이라는 아름다운 전통에는 완전히 반하는 일이 아닌가. 이런 어리석음들이 그 동안 내 삶에서 벌어진 무명(無明)의 연극이었다는 것이 생생하게 드러나면서 나 자신을 발가벗기고 있다.

지혜로운 이는 옳거나 그른 것이 없다. 자신이 가는 길이 다른 길 보다 더 옳거나 더 나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남들보다 더 잘 수행해 나간다거나, 더 영적으로 성숙했다거나, 더 지혜롭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오히려 그 생각은 곧 영적인 미숙함을 드러내는 생각일 뿐이다. 아무리 타인들보다 더 옳고 바르고 청정한 길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로인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폄하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면 그것은 참된 길이 아니다. 선각자는 자신이 선택한 길이 하나의 선택일 뿐임을 아는 것일 뿐이지, 남들이 선택한 것보다 더 나은 길이거나, 옳은 길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무소유와 청빈을 선택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그것이 옳고 부유하게 사는 것은 그르다거나, 청빈하게 사는 나는 잘 사는 것이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못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전혀 청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무소유와 청빈을 선택하되 그것만이 옳은 길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집착하지 않으며 살되 무집착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집착을 버리고, 욕망을 버리고 살되 그렇게 사는 것을 우월하다거나, 영적이라거나, 으쓱한 마음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더욱이 그런 삶이 남들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롭다고 여김으로써 그렇게 살지 못하는 상대방을 낮출 이유는 없는 것이다.

어떤 길도 전적으로 옳거나 그른 길은 없다. 어떤 직업도, 어떤 삶의 방식도, 어떤 종교도, 어떤 가르침이나 이념도 전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내 것만이 옳다는 생각이야말로 가장 틀린 생각이다. 내 생각이란 그저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 더 옳은 생각인 것은 아니다. 내 종교 또한 그저 하나의 종교일 뿐이지, 유일한 진리인 것은 아니다. 내 삶의 방식 또한 수많은 삶의 방식 가운데 하나일 뿐이지, 가장 우월한 방식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일지라도 그것만이 절대라고 생각하고, 그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어긋난다.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도 그것은 그저 하나의 훌륭한 가르침일 뿐이지, 가장 훌륭한 가르침인 것은 아니다.

만약 우리가 부처님을 유일무이한 가장 우월한 성인으로 생각한다면, 그럼으로써 다른 많은 영적 스승들을 그 아래로 깔아뭉개기를 서슴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부처는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을 모른다. 비교를 모르고, 판단을 모르고, 선악을 모르며, 높고 낮음을 모른다. 부처는 판단하거나 평가하거나 비교하는 분이 아니라 다만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분이다.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모든 것을 전체적으로 관찰하실 뿐이다. 관찰에는 분별이 붙지 않는다. 모든 분별과 차별과 평가와 심판을 놓아버린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가르침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세상은 온통 분열되고, 나뉘어 있다. 종교간, 이념간, 국가간, 인종간, 계층간에 온통 차이와 차별과 분열로 치닫고 있다. 이 모든 다툼과 나뉨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것은 바로 ‘내가 옳다’는 데서 생겨났다. 이 세상 사람들은 ‘옳은 것’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을 희생시킬지라도 끝까지 쟁취하려는 성향이 있다. 정의를 위해서, 선을 위해서, 옳은 것을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이고, 행복과 풍요와 심지어 목숨을 포기할지라도 끝까지 고수해야 한다고 여긴다.

쉬운 예로 종교전쟁을 보라. 내 종교가 옳다는 생각, 그 하나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다른 종교를 향해 총을 겨누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면서까지 그 ‘옳은’ 것을 위해 싸운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옳은 것을 위해 싸우고, 옳은 것을 위해 싸우다 죽고, 옳은 것을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옳은 것을 절대적으로 반드시 지켜내려는 생각은 틀렸다. 전적으로 옳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전적으로 틀린 것도 없다. 두 나라의 전쟁은 자신의 나라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옳다. 양 쪽이 다 자신만이 옳다. 종교전쟁 또한 자신의 종교 입장에서는 언제나 자신이 옳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결코 우리를 평화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진리는, 옳고 그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옳고 그르며, 맞고 틀리다는 그 판단 너머에, 무분별의 지켜봄 속에 참된 진리는 움튼다.

반짝이는 삶을 엿보다

맑게 흐르는 빙하 개울을 따라 완만한 오르막을 터벅터벅 천천히 한 시간 남짓 걸어 오르다 보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산을 타고 오르게 된다. 사실 산이랄 것도 없이 언덕을 몇 개 넘으면 되는데 눈에 보이는 사실과 온몸으로 느끼는 느낌이 완전 다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야트막한 언덕 몇 개이지만 몸이 느끼는 느낌으로 따진다면 지리산 가파른 노고단을 화엄사부터 걸어 오르는, 혹은 설악산의 오색온천에서부터 대청봉까지 걸어 오를 법한 그런 무게감이 허벅지와 종아리, 그리고 벅찬 호흡에서 느껴진다. 한 무리의 중무장한 트레커들이 줄지어 언덕길을 따라 오르고 있다.

가쁜 발걸음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드니,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오르는 나와는 전혀 다르게 묵직한 야크들이 평화로이 이 설산과 조화를 이루며 한적하게 풀을 뜯고 있다.

히말라야의 짐꾼들은 여전히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언덕 위에 오르니 시야가 툭 터지며 장쾌한 풍경이 펼쳐진다. 일찌감치 오르던 트레커들도 힘에 부치는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지도에서 보면 빙하지대라고 표시되어 있는 부분들이 빙하는 다 녹아버리고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것이 높은 곳에서는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한참을 여유작작하게 길 위에서 흘쩍이다 보니 순례자들의 행렬도 눈에 띄게 뜸해졌다. 거의 모든 여행자들이 새벽 일찍부터 서둘러 점심 전에 그 날의 목적지까지 도착하고 점심 이후에는 롯지에서 가벼운 산책이나 독서를 하며 쉬다보니 이런 늦은 시간에 히말라야의 모든 길은 유벽해진다. 덕분에 이 소적하고 너른 산길을 아무런 간섭도 받지 않은 채 덩그러니 홀로 누리고 있다. 아무리 걸어도 인적이 없다보니 문득 이 적막공산 음음한 행성 위에 나 혼자만 삶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독존적 외로움이 가슴 한 켠을 스친다. 말 그대로 산공야정(山空野靜). 순간 허우룩하면서도 텅 빈 고독이 내면에 낮게 깔리며 가슴벽을 두드린다.

이 순간의 걸음 걸음이 나를 깊이 깨어나게 하고, 살아있게 만든다. 삶을 진하게 경험한다. 루소는 걷는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애를 통해 그토록 깊이 생각하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본연의 내 모습을 되찾았던 적은 없었다. 감히 말하건대, 오로지 내 발로 직접 걸었던 여행을 통해서만이 그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루소의 말처럼 두 발로 직접 걷는 여행, 그것이야말로 비로소 삶을 진하게 경험하게 해 주며 본연의 자기 자신에게 다가서게 만든다.

언덕길을 따라 걷고 걸어 드디어 칼라파타르 바로 아래 작은 마을 고락샵이 보인다. 서너 개의 롯지가 옹기종기 모여 있고 거대한 산군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도미토리 한켠에 배낭을 풀고 롯지 주변을 유보한다.

[고락샵, 롯지의 저녁식당 풍경]

[칼라파타르 아래 고락샵 한 롯지의 메뉴판]

한 발 한 발 명상 수행을 하듯 저절로 명징함이 발걸음에 묻어난다. 활짝 깨어있다는 표현, 혹은 명징한 알아차림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그러고 보면 이곳까지 올라오는 동안 하루하루의 발걸음은 점차 높은 곳으로 고도를 높일수록 점점 느려지곤 했고, 생각 또한 걸음과 같은 속도로 느려져 갔다. 평소 같았으면 생각이 자리 잡고 틀어 앉아 온갖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을 내면의 공간이 분주함과 번잡함 대신 깨끗이 비질을 막 끝낸 도량의 뒤뜰처럼 투명해지곤 했다. 그러면서 알 수 없는 깊은 내면의 향기가 감도는 듯한 지미한 단서들이 감지된다. 이번 만행과 순례는 분명 진담한 어떤 것이 아니다.

어둑어둑한 불빛 아래에서 여행자들은 저마다의 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볍게 저녁 식사를 마치고 뜰로 나온다. 한 겨울 살을 엘 것 같은 추위가 내면의 저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오는 것만 같다. 초저녁 도미토리는 기척이 없다. 가방만 던져 놓고 모두들 식당으로 향한다. 덕분에 호젓하고 어두운 매트리스 위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는다.

고락샵의 밤은 어둡다. 롯지 한켠 구석지고 눅눅한 매트리스 위에 한 존재가 그렇게 앉아 있다. 이곳이 그리고 이 순간이 그렇게 앉아 있는 한 존재에게 투명하게 부서지며 반짝임의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존재의 아름다움, 내가 지켜보며 함께 살아오던 한 존재의 진실이 조금 아주 조금 어젯밤에 보았던 푸른 달빛처럼이나 천천히 그리고 밝게 떠오른다.

모든 것은 한 순간! 바로 그 현존의 순간, 내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무엇인가가 스치고 지나간다. 선명한 무언가가 심연의 언덕에 가 닿는다. 무언지 알 수는 없지만 그 어떤 것이 지나간 뒤 그 선명하고 명징한 파장이 너무도 또렷하게 지속되어 도무지 누울 수도 없고, 누워도 잠 한 자락 잘 수가 없다. 몸은 피곤한데 잠을 잘 수가 없다. 밤이 새도록 계속된다.

도미토리 십여 명 남짓 자는 방이 얼추 10시가 넘도록 인기척이 오가고 이야기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오지만 그건 그냥 그렇게 들려 올 뿐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시간을 멈춰 세우고는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이 흐르고 뜬 눈으로 새벽을 맞는다.

새벽을 알려주는 부스럭거림들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도미토리 여기저기에서 플래시가 켜지고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하룻밤이 허허롭게 지났음을 안다. 그렇게 억겁 같은 혹은 찰나 같은 하룻밤이 투명하게 보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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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 푸른 자연, 깨끗한 물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히말라야의 감동스런 풍경과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자연의 천진함과

무한함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지켜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이 엄청난 파괴의 일에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 모든 모순을 깨고 나부터 이 지구 행성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할지라도 그 작은 것이 우주 전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윽하고도 강력한 공명의 힘을 가지고 주위로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히려 불편함이 주는 이익과

즐거움을 누리는 차원으로까지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지구 환경을 지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될 수 있다면 차로 갈 것을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도 있고,

에어컨 대신 선풍기나 부채를 들 수도 있으며,

물론 더 작게는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데서 출발해도 좋다.

온풍기나 보일러를 줄이는 대신 내복을 끼어 입을 수도 있고,

빨래를 너무 자주하지 않고, 비누 없이 세수를 해 볼 수도 있으며,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을 수도 있다.

이런 작은 '불편의 즐거움' 속에 지구를 살리는

엄첨난 계획이 담길 수 있는 것이다.

 

나만 환경을 살린다고 되겠느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시작할 때 그 겉모습은 작고 소박할지언정

그 힘은 무한한 공명과 울림을 싣고 전 우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순수 지혜의 실천의 힘은

곧 우주 전체의 힘과 연결되고, 전파되며,

강력한 동력의 단초가 된다.

내가 시작하는 것이 곧 우주가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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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를 늦추라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8/11 13:34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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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여여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
괴롭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고 올라올 때,
나태한 마음이나 급한 마음이 올라올 때,

마음의 고요를 방해하는
한 치의 움직임이라도 있을 때라면
그 때가 바로
업식의 불길이 치솟을 때입니다.

차를 몰고 가면서
급한 마음에 속도를 올리게 되고
빨간 신호등에 조바심과 성내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면
이미
우리 마음은 업식의 불길에 크게 휩싸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면서
떨리고 두근 두근 거린다거나,
부담을 느낀다거나
만나기 싫은 마음
혹은 너무 보고픈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업의 불길이 장난을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 나가면서
급한 마음이 앞선다거나,
꼭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거나,
가슴에서 뜨거운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다거나,
목표를 성취한 이후의 행복감에 빠져 있다거나
이런 것들 또한
내 안의 업의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급한 마음, 서두르는 마음은
가장 경계해야 할 수행의 재료라 생각하세요.

마음이 급하고, 서두르게 되는 이유는
바라는 바가 크기 때문이고,
바라는 바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크기 때문이며,
‘꼭 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미래로 먼저 가 있기 때문이며,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알아차림을 놓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이 나는 순간,
업의 불길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휩쓸어 버립니다.

급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가면
그 일은 자연스럽고 여여한 흐름이 되지를 못합니다.
여법한 일과가 되지를 못하고,
업의 불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이 앞서게 되면
빨리 빨리 성취하려는 섯부른 욕심 때문에
그 사이 삿된 마장이 끼기 쉽고,
그로인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삿된 쪽으로 흘러갑니다.

바라는 바 욕망이 없다면
아무런 서두를 일도 마음 급할 일도 없습니다.
그냥 한가로이 노닐 뿐입니다.
마음은 늘 휴식 중이며,
한낮 나른한 오후의 여유로움을 평화로이 즐기고 있음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언제나 여유롭고 한가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한가로이 온전히 일을 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조금 느리게 살면
느림, 그 자체만으로도 큰 공부가 됩니다.
느려지면 저절로 나를 비추어 볼 수 있게 되고,
일을 하는 순간 업의 불길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차를 타고 운전을 할 때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가 있지만,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 날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 급해
그리 바쁜 일이 없는데도 저도 모르게 차를 빨리 몰고 갑니다.

빨리 가려는 그 마음은
업의 불길입니다.

본래 자리 텅 빈 우리 마음은
바쁠 것도 없고, 성급할 것도 없습니다.
바쁘게 갈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속도를 조금 줄여 보세요.
그리고 가고 있음을 온전히 느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챙겨 보시란 말이지요.

속도를 늘이나 줄이나
삶의 속도는 늘고 주는 법이 없습니다.
진리의 속도는 빠르고 느리고가 없습니다.

마음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내 안에 어지러운 마음, 번잡한 마음,
그리고 바라는 마음, 욕심내는 마음만
자꾸 늘어갈 뿐입니다.

차 속도를 줄이듯
삶의 속도도 조금씩 줄여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수행의 속도도 조금 줄여 놓으세요.

오고 갈 곳이 없는 이 텅 빈 법계 속을
아무리 속도를 낸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우리의 감각에만 속도가 있는 것이지
내면의 본래 뜨락에는 속도가 있지 않습니다.

조금 느리게 여유로운 마음을 내면,
우리의 속 뜰은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여여해 질 수 있습니다.

급한 마음에 일을 하면
업의 불길에 휩쓸리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 쉽지만,
조금 바쁘더라도
느긋한 여유로움으로 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런 법계의 흐름을 타고
순리대로 일을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여유로우세요.
마음을 턱 놓고 살면
지금 이 순간 그리 바쁠 것이 없습니다.

바쁘고 급하다는 것은
바라는 것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욕심과 집착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며,
그만큼 놓고 비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 놓고 가는데
바쁠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지금 이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자성불 여여한 존재입니다.

자꾸 어디를 가려하고,
자꾸 무엇을 찾으려고 하시는지요.
그리 급하게 어디를 가고 계신가요?

우리가 바라는 일은
이미 다 이루어져 있으며,
찾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고,
급하게 가고 있는 그 목적지는
다름 아닌 ‘지금 여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가고 오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으며,
성취되고 말고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대로
여여하고 텅 비어 있거늘
바쁜 걸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빨리 걸어도 ‘그 자리’이며,
천천히 걷는다 해도 여전히 ‘그 자리’이고,
그냥 가만 있어도 언제나 ‘그 자리’일 뿐입니다.

지금 이 자리,
자성불 본래 자리
이 자리가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자리이며,
그렇게 찾으려고 애쓰던 자리이고,
급하게 뛰어 다다르려 했던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발걸음을 멈추세요.
조금 천천히 가도 늦지 않습니다.

우린 언제나
도착지에 여유로이 머물러 있거든요.
그런데 분별을 지어
또 다른 도착지를 자꾸 찾으려 하니 답답한거지요.

그만 가세요.
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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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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