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존재도, 어떤 사건도 따로 떨어져 일어나지 않는다. 그 모든 존재며 생명들도 서로 깊은 연관이 되어 만나며 그 모든 사건들 또한 서로 깊은 연관을 가지고 일어난다. 모두가 그럴만한 인연 따라 정확한 필요에 의해 일어난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필요를 가지고 그 자리에 그렇게 진리로써 여여(如如)하게 있는 것이다.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전체로써의 하나’인 법계의 진리 인연으로 그 자리에 진여로써 있는 것이다. 산하대지현진광(山河大地現眞光)이란 말처럼 산하대지 모든 것이 참 진리 빛의 나툼이요,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쓰일 곳이 있다’는 성경의 말씀처럼 모든 존재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법계의 진리의 사명을 띠고 그 자리에 존재한다.
모든 일, 모든 사건도 마찬가지다. 우리 삶의 그 어떤 일이나 사건도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일어난다. 외따로 떨어져 아무런 연관관계 없이,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모두가 전체성이다. 모든 것이 전체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진다. 외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분명한 존재의 이유를 가지고 나타난다. 온 우주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에 정확히 맞춰 일어나고 사라진다. 우리를 괴롭히는 일, 아프고 슬픈 일들까지도, 심지어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일어나는 우연 같은 것들조차 정확한 법계 진리의 흐름을 타고 분명하게 흐른다. 분명한 전체적 진리의 본질의 화신으로써 구체적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진급에서 떨어졌다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원하던 대학에 떨어졌다고? 사고를 당해 불구자가 되었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고? 사람 잘못만나 결혼을 잘못했다고? 그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지 않다. 우연히 일어난 일은 없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운이 좋아 진급을 했다거나, 운이 좋아 사고에서 조금만 다쳤다거나, 운이 좋아서 이런 사람을 만났다거나, 혹은 운이 나빠서 대학에 떨어졌다거나, 그런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운이 좋거나, 운이 나빠서가 아니다. 모든 것은 정확한 필요에 의해 등장한다. 분명하게 짜여진 인과의 연극, 법계의 연극 각본에 따라 꼭 그 때, 그 장소에 그 일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이를테면 사고로 다리를 다쳤다고 생각해 보라. 보통 사람들은 그것은 내가 운이 나빠서 그랬다고 느끼거나, 그 사람이 졸음운전을 해서 그랬다거나, 정부에서 신호등을 애매하게 만들어 놓아서 그랬다거나 하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그 사고는 그 사람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더 복잡하게 얽혀 있는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단순히 둘 사이의 관계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차와 내 몸이 부딪쳐 사고가 난 것은 그 차와 나와, 그 차 운전자와 나와의 관계에서 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 법계와 나와의 관계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우주 전체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전체적인 얽히고설킨 인다라망의 관계 속에서 사고가 난 것이다. 그것은 운이 없거나, 조심을 안 했거나 하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 모든 일은 삼라만상의 일체 모든 존재와 나와의 관계에서 난 사고다.
예를 들어 어느 날 갑자기 몸에 큰 병이 왔다고 생각해 보라. 그것은 그냥 내 몸에 병이 온 것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냥 내 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온 우주 법계 전체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병이 난 것이다. 온 우주의 허락 없이 몸에 병이 오는 일은 없다. 어머니 대지의 허락 없이, 대자연의 허락 없이, 부처님의 하느님의 허락 없이, 진리의 허락 없이, 내 안의 자성불의 허락 없이, 법계의 허락 없이 그냥 어쩌다 보니 우연하게 병이 내게로 온 것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좀 심한 비유지만,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2층에서 떨어뜨린 화분에 맞아 죽었다고 치자.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이 맞았으며, 왜 하필이면 그 시간에 그 공간에 정확히 그 화분을 떨어뜨릴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화분을 떨어뜨린 사람과 화분에 맞은 두 사람만의 문제에서 멈추지 않는다. 거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우주적이고 전체적인 인과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온 우주 법계에서 내린, 부처님께서 내린 인과법의 명령, 다르마의 명령이다. 아직 죽음의 업을 받을 때가 아닌 자에게 그런 우연은 일어날 수 없다. 분명히 그 사람은 그 때에 그러한 인연으로 죽게 되어 있었던 업보, 인과에 놓여 있었다.
왜 어떤 사람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로운 출근길에 다리가 끊어져 죽으며, 왜 어떤 사람은 총알이 마침 그 작은 목걸이에 비껴 맞아 죽지 않고 또 어떤 사람은 평화로운 오후 지하철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가. 그 모든 사건은, 크고 작은 모든 사건을 불구하고 법계의 전체성 속에서, 전체적인 인과 속에서 수많은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난다.
모든 일은 따로 떨어져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말을 잘 사유해 보라. 그 어떤 일도 외따로 떨어져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나와 내 가족이 부부싸움을 했다는 것을 단 둘 사이의 관계로만 한정짓지 말라. 그것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거기에는 무수히 많은 인과가 얽매여 있다. 이를테면 내가 아내에게 화를 낼 때, 아이들 마음속에서 화로인한 아픈 상처가 남을 것이고, 내 화는 그대로 내 주변의 모든 생명 있고 없는 존재에게 그 영향을 남길 것이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란 책에서 그랬듯이 내 주위의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 것이며, ‘식물의 정신세계’란 책에서 그랬듯이 내 주변의 모든 식물들이 아픈 파장을 내보낼 것이고, 내 몸의, 또 그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생명들의 세포 하나하나가 극심한 공포로 떨고 있고 죽어갈 것이다. 또한 전생 또 그 전생 수많은 전생을 이어오며 아내와 나 사이의, 또한 나와 아이들 사이의 여러 화에 얽힌 인연들이 지금 이 순간 나타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뿐 아니다. 내 안에서 일으킨 화의 기운은 그대로 우주 법계로 어두운 파장이 되어 퍼져 나갈 것이다.
『법성게』에서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했다.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 온 우주 법계를 그대로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어찌 그 일을 나와 내 아내 단 둘의 문제라고 하겠는가. 그것은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한 필요를 가지고 내 인생의 바로 그 자리에 그렇게 등장하는 것이다.
우연이란 없다. 그 사람과 나와의 단순한 문제란 있을 수 없다. 내가 나무 한 그루를 자를 때에도 그것은 단순히 나무 한 그루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 법계의 생명을 잘라내는 것이다. 나무 한 그루가 잘려나갈 때 이 우주의 생명의 기운 또한 그만큼 스러져간다. 내가 생각하는 그 모든 일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 전체의 일이다. 우주 법계의 전체적인 진리의 흐름 속에서 정확히 필요한 일들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다가온다. 우연은 없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될 수는 없다.
내가 탄 차가 산길에서 미끄러져 낭떠러지로 떨어졌는데 마침 낭떠러지 중턱에 한 그루 있던 나무 한 그루에 걸려 목숨을 구했다면,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나무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을 돕기 위해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하수구에 빠져 다리가 부러졌다고 재수 없게 하수구에 빠진 것이 아니다. 여전히 하수구에 빠지는 순간에도 우리 두 눈은 멀쩡했으며, 다른 때처럼 그것을 보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와 비슷한 평범한 다른 사람은 다 돌아갔는데 왜 나면 그곳에 빠지게 되었는가. 그 순간 우리 눈은 한눈을 파느라 다른 무엇을 보았을 수도 있고, 그 순간 머릿속에서 다른 어떤 것을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때, 뚜껑 열린 하수구 앞을 지날 때 그 때 한눈을 팔았으며 다른 생각이 떠올랐느냔 말이다. 바로 그 순간 내 눈을 멀게 한 법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는가. 왜 그러한 일들이 우리를 괴롭히는가. 그것은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더 큰 관점’ ‘전체적인 법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사건은, 그것이 너무나도 아프고 괴로운 일일지라도 그것이 그 순간 최선이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 괴로운 일일 지라도, 우리를 돕기 위한 법계의 배려다. 즉, 지금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다음에 더 큰 일로써 우리를 괴롭혔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법계의 일이고 진리의 일이며 정확한 인연법이라는 진리의 나툼이라 하는 것이다.
우주는, 법계(法界)는 결코 우리를 해치는 일을 하지 않는다. 늘 법계는 어머님의 품처럼 우리를 돕고 있다. 한없는 사랑으로, 끝없는 자비로써 우리를 품고 있다. 다만 나쁜 일, 괴로운 일, 아픈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 만들 뿐인 것이다.
어떤 괴로운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사실 그건 ‘괴로운 일’이 아니라 다만 그건 그냥 ‘한 사건’일 뿐이다. 법계의 필요에 의한 진리의 사건일 뿐이다. 그건 좋고 싫은 어떤 사건이라거나, 괴롭거나 즐거운 어떤 사건이 아니라 다만 한 사건일 뿐이다. ‘한 사건’에 대해 분별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사건에 대해 온갖 생각과 분별, 판단, 해석을 가함으로써 그 사건을 좋은 사건, 혹은 나쁜 사건으로 나누어 놓고 스스로 그 분별에 빠져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고 있다.
문제는 ‘사건’이 아니라 ‘생각’이다. 내 생각이 괴로움을 만드는 것이지, 그 사건 자체에 어떤 ‘괴로운 성품’이 있는 것은 아니다. 돈 1만원을 도둑맞았다면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것은 그냥 만원을 도둑맞았다는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그것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천만 원 백만 원을 훔쳐가지 않고 단 만원만 훔쳐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다행스런 좋은 일일 것이지만, 하필이면 내 돈을 훔쳐 가느냐고 한다면 그건 재수 없는 나쁜 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괴롭다거나 즐겁다는 것은 내 판단이고 생각일 뿐이다.
이 세상 그 어떤 일도 좋거나 나쁜 것은 아니다. 심지어 목숨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고정된 괴로움인 것은 아니다. 태어남의 반대가 죽음이지 삶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삶은 영원하다. 육신이 사라졌다고 그것이 영원한 소멸은 아니며 육신이 살아났다고 그것이 영원한 탄생도 아니다. 나고 죽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마치 빈 가지에 봄이 되면 잎이 피고 여름이면 녹음이 우거졌다가 가을이 되면 단풍을 물들이다가 겨우내 떨어져 흙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이 왜 괴로움이거나 즐거움이어야 하는가. 그것이 왜 비극적인 죽음이고 신비로운 태어남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법계의 모습일 뿐이다. 거기에 좋고 나쁘다거나 괴롭고 행복하다는 분별을 붙일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완전한 전환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평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이 아주 자연스러우며 꼭 필요한 법계의 일이고, 따로 떨어져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전체성의 틀 속에서, 진리의 틀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삶 속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들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대 긍정, 대 수용의 마음이 생겨날 것이다. 좋고 나쁘다고 나누지 않는 무분별의 열린 가슴이 생겨날 것이다. 지금 내 앞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 좋거나 나쁜 어떤 것이 아니며,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이미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내 삶 속의 그 어떤 존재도, 사람도, 상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싫어하는 사람이든, 좋아하는 사람이든 그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내 삶 속의 그 어떤 사건도, 일도, 괴로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괴로운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그 사건이 내 앞에 나타난 것은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내가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다. 좋고 싫은 것이 아닐진대 붙잡거나 거부해야 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이러한 우연 같은 사건이 어떻게 법계의 전체적인 진리 안에서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온 우주 법계의 전체적인 진리 안에서,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 간의 인과 관계 안에서 그 사건은 그렇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이제 그 사람은 우주 법계의 진리와 하나 될 수 있는 소중한 진리의 첫 단추를 꿰게 될 것이다. 삼라만상 우주 법계와 둘로 나뉘지 않는, 이 세상 그 어떤 사람들과도 그 어떤 사건들과도 둘로 나뉘지 않는 대 조화와 대 평화의 걸림 없는 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내가 삶 속에서 만나는 그 모든 사람들이 분명히 그 때 나와 꼭 만나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 어떤 사건들이 분명히 내게 일어나야 하는 사건이다.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것도 나를 돕기 위한 대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내 앞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도, 그 사건도 모두가 법계의 진리를 품고 있는 내 안에서 스스로 선택한 일인 것이다. 나라는 진리성, 나라는 전체성의 법신이 그 존재를 만나게 했으며, 그 사건을 만나게 했다. 즉 내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 남이 대신해서 선택해 준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혹은 하느님이 무작위로, 혹은 아무런 기준도 없이, 내 안의 진리의 허락도 없이 그런 선택을 대신한 것이 아니다. 결국 그 모든 일은 다 내 깊은 영혼의 선택이다. 그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 어떤 존재를 만나든지, 그 어떤 사건을 접하든지, 그 어떤 일을 만나든지 그 모든 것은 내 깊은 내면에서 대 긍정을 위해, 진리와의 합일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언제나 옳다. 그러니 우리가 할 일은 완전히 받아들이는 일이다.
내 삶 속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모든 사건을, 모든 일들을, 모든 아픔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완전히 수용하라. 대 긍정, 무한 긍정의 관점에서 한 점 의혹도 없이 받아들이라.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내 삶에는 기적과도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 경이로운 삶의 신비에 눈뜨게 된다. 그것이 모든 수행자의 길이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의 길이며, 모든 신의 길이요, 도(道)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일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 즉 무상無常의 진리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끊임없이 변한다.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 찰나로 흐른다. 어느 한 순간도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니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르라. 그러면 어떻게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를 수 있는가. 변화한다는 진리, 무상이라는 진리와 하나 되어 흐르면 된다. 변화를 받아들이며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그 흐름을 벗어나려 하지 말라. 변화는 진리이다. 그러니 변화를 붙잡으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은 두렵다. 변하면 안 될 것 같다.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지위, 가족, 친구,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지속'과 '안주'를 바란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변화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온전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끊임없이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언젠가는 변하고 만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의 본연의 모습이다.
함께 변화하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이란 오직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대로 두라. 붙잡아 두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냥 변한다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냥 놓아두라. 그 흐름에 들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이 '변치 않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다만 흐르도록 놓아두라. 이 세상은 그냥 놓아두면 스스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라는 뜻이다. 법계는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깨달음 또한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항상 하지 않는 것을 이름 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깨달음은 잡았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놓았을 때 온다. 깨달음 속에도 안주하려 들지 말라. 안주하는 순간 깨달음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다만 놓아두라. 어느 것도 붙잡아 집착하지 말라. 마음을 어느 한 곳에 머물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대로 놔두라. 붙잡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낼 때, 함이 없이 모든 것을 할 때 이 세상은 본래의 자리를 제 스스로 찾아갈 것이다. 모든 것은 진리대로 여여하게 그 자리에 놓여 있을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것이 불법이다. 그저 푹 쉬기만 하라. 푹 쉬면서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라. 그리고 함께 따라 흐르라.
42. 적과 원수가 서로 싸우고 죽이거나, 헐뜯으며 저주를 퍼 붓는다 한들 집착과 악에 물든 자신의 삿된 마음이 주는 재난에는 미치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코살라국의 한 마을에 계실 때, 소 키우는 목동인 난다는 가끔씩 부처님의 법문을 듣곤 했다. 한 번은 신심이 나 부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공양 올리고자 하였지만 부처님께서는 아직 시절인연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셔서 그 청을 거절하셨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 부처님께서는 이제 난다가 바른 불법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난다의 집을 직접 스스로 방문하시게 된다. 난다는 기쁜 나머지 온갖 음식으로 7일간 극진히 공양 올렸고, 마지막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다원과를 증득하였다.
수다원과를 증득한 난다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을 먼 곳까지 배웅하였으나 집으로 돌아갈 때 원한을 맺었던 사냥꾼에게 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 이에 일부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께 ‘만약 부처님께서 난다에게 찾아가지 않으셨더라면 난다가 죽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고 여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내가 가든 가지 않든, 그가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 자신에게 주어진 업에서 오는 죽음은 피할 수 없다’고 설법을 하시며, 그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행여 그가 죽기 전까지 집착과 타락과 악에 물든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것을 염려해야 할 것임을 설하셨다.
적이나 원수에게 원한으로 죽는 것 보다 타락되고 집착된 마음과 삿된 마음을 가진 채 죽는 것이 더 큰 재앙이다. 부처님께서는 난다가 수다원과를 증득할 것임을 간파해 보기도 하셨지만, 난다의 죽음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렇기에 난다의 죽음에 앞서 난다를 일깨워주기 위해 스스로 찾아 가셨던 것이다.
만약 생각과 판단, 이기적인 아집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난다의 죽음을 예견했을지라도 도저히 난다를 찾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난다를 찾아가 아무리 좋은 법문을 하고, 난다를 깨닫게 했을지언정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 때문에 난다가 죽었다고 원망했을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제자들과 일부 신도들은 위에서 보듯이 부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은 사소한 한 가지 행위일지라도 그 모두가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 목적은 바로 그를, 중생들을 일깨워주고 깨닫게 해 주기 위한 ‘자비’의 일환이다. 부처님은 오직 난다를 죽기 전에 깨닫게 해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일 뿐, 그로 인해 당신에게 원망과 미움과 난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돌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로인해 부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결국은 부처님께서 난다를 죽게 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난다를 일깨우고자 하는 동체대비의 마음이 부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심지어 적과 원수가 아무리 헐뜯으며 저주를 퍼 붓는다 할지라도 집착과 악에 물든 삿된 마음이 주는 재난에는 미치지 못함을 설파하신다. 비록 난다는 원한을 가진 원수 사냥꾼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 죽음보다 더 큰 재앙은 난다의 마음에 물든 집착과 악의 삿된 마음이다. 만약 난다가 살아 있다고 한들 마음속에 집착과 악에 물든 사악한 마음으로 미워하고 헐뜯으며 산다면 그것은 차라리 부처님 법문을 듣고 깨달은 뒤에 죽음을 당하는 것만 못하다.
죽음은 전혀 재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려주기 위한 우주법계의 계획일 뿐이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경지에서 본다면 죽음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 지어 낸 업장을 녹여주기 위한 우주법계의 자비로운 계획의 일환인 것이다. 그러니 더 큰 차원의 이치에서 본다면 죽음은 아주 사소한 우주적인 계획의 한 부분일 뿐이고, 그것은 우리를 고통 받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우리를 돕고,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그것은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나 자신과 우주가 합작해 낸 계획이며, 내 스스로 결정한 것이지 누가, 절대자나 부처가 억지로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깊은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내 삶의 모든 부분은 결국 내가 만들고, 내 스스로의 동의와 계획에 의해 창조된 것에 다름 아니다.
정말 위험한 재난은 죽음이 아니라, 마음 속의 원한과 싸움과 증오와 저주, 집착과 삿된 악에 물든 마음이다. 죽음은 아름다운 순리의 한 모습이지만, 원한과 싸움, 증오와 저주와 집착 등은 인간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순리를 거스르는 인위적인 악에 물든 삿된 마음이 아닌가. 어리석은 이라면 집착과 원한은 가지면서 죽음은 멀리하려 들겠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죽음은 전혀 멀리할 것이 아님을 안다. 오히려 마음속의 삿된 재난의 씨앗들이야말로 나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임을 분명히 안다.
41. 머지 않아 이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야 만다. 그 때 이 몸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 것이다.
한 스님이 좌선 수행 중에 몸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온 몸에 퍼졌고, 종기가 피고름이 되어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스님들이 간호해 주고, 대소변도 가려주며 도움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이 점점 더 심해져, 대소변도 못 가리고, 움직이지도 못하자, 스님들의 간호도 줄어들더니 이내 헛간 땅바닥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이를 보시고 직접 찾아가 물을 데워 목욕 시키시고, 옷을 직접 빨아 입히신 뒤 다음과 같이 설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몸이 이렇게 아프고 힘겹지만 이 몸은 결국 누구나 흙으로 돌아간다. 몸에 집착할 것 없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아픈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읜 이 비구는 결국 법문 끝에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지만 곧 열반에 들게 된다. 이에 제자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한 뒤에 열반에 들었는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고 말하시며 전생담 들려주신다. 이 비구는 가섭불 당시 새를 잡아 왕실에 바치는 사람이었는데, 왕실을 속여 더 많은 새를 잡아 내다 팔아 이익을 챙기곤 했다. 그런데 많은 새를 잡다보니 보관이 문제가 되어 새의 날개쭉지를 부러뜨리고 다리를 꺾어 도망치지 못하게 해 놓고, 죽지만 않게 한 뒤 때마다 내다 팔거나 잡아먹곤 했는데 바로 이러한 죄업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에 병이 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하루는 탁발을 온 아라한 수행자를 보고 공양하면서 감동을 받으며 마음이 평화로와지는 것을 보고 ‘저 또한 스님께서 성취하신 것 같은 위없는 진리를 성취하도록 발원합니다’ 라고 발원하였기에 비록 인과응보에 따라 병을 얻기는 했지만 지극한 발원으로 인해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된 것이다.
몸이란 결국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 때 이 몸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게 된다. 결국 이 몸은 내가 아니다. 항상하는 것이 아니며,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잠시 이번 생에 인연 따라 내가 돌보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이 몸이 ‘나’라고 하는 아상, 아집 때문에 생겨난다. 병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낄지라도 그 병든 몸이 내가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면 병으로 인해 통증은 느낄지언정 마음까지 아프거나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몸이 내가 아니란 자각이 있다면 몸에 딱 붙어서 몸에 병 난 것을 가지고, 나에게 병이 났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병은 ‘몸’에 난 것이나 ‘나’에게 일어난 것은 아니다. 몸은 잠시 잠깐 내가 인연 따라 그리 길지도 않은 이 생에 관리해 주는 것일 뿐이지, 몸 자체가 나인 것은 아니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대해 공포스러워하는 것은 다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몸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내가 아니다. 몸이 내가 아니라는 자각이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삶은 영원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매 순간순간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지혜롭고도 자비롭게 살아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지, 죽음이 올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몸이 내가 아니라면 죽음은 그저 껍데기를 갈아입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유효기간이 다 된 늙고 병든 몸을 버리고 생생하고 새로운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하고도 완전한 몸을 받는 것이 어찌 괴로운 일인가. 그것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 처럼 설레고도 즐거운 삶의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이 직장을 다니다가 또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정도라고 할까. 다만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삶을 올바로 살지 못한 사람이다. 올바른 선업을 짓지 못하고, 사악한 일들을 일삼으며, 화와 욕심으로 한 생을 점철한 사람에게 죽음은 두렵다. 다음에 갈아입을 육신의 옷이 무엇이 될지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나 병고가 아니다. 매 순간순간의 삶이다. 매 순간의 삶을 얼마만큼 깨어있게 살 것인가, 매 순간의 삶에서 얼마만큼 자비를 실천할 것인가 이 지혜와 자비의 정신이야말로 삶을 매 순간 온전히 살아있게 만든다. 이 비구는 병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 병이나 죽음이 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병이 내가 아님을 알았고, 이 몸이 내가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일체의 모든 욕망과 집착과 아상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병고에 찌든 육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아픈 몸을 통찰하고, 삶의 이치를 철견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묻는다. 아라한과를 증득했는데 어떻게 바로 죽을 수가 있는가 하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그 자리에서 불사의 신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깨달음을 얻으면 영원히 죽지도 않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본다면.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이치를 거스를 필요가 없고,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거스를 이유가 없어진다. 그저 편안히 쉰다. 우주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그 모든 법계의 이치에 온전히 내맡기고 완전히 휴식한다. 인간들은 병이 오면 기도를 한다.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아라한은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다. 더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조를 필요가 없다. 아라한은 죽음도 병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수용한다. 그러한 대자연의 이치, 인과응보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증득한 그 생에 남은 모든 업을 청산하고 말끔히 정리하고 간다고 한다. 이 비구는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지만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업이 있음을 알았고, 물론 어쩌면 그것을 거슬러 더 오래 살아 남아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가장 지혜로운 흐름을 타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생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 죄업에 대한 과보를 그 자리에서 받고 열반에 든 것이다. 지혜로운 삶은 이처럼 걸림이 없다. 그 어떤 흐름도 거스르지 않는다. 이 몸이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이 몸이 죽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겠지만, 이 몸이 내가 아니란 온전한 자각이 있는 자에게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몸도 내가 아니며, 병도 내가 아니고, 죽는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처럼 몸을 나라고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병, 죽음, 늙음 등 그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해 괴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중생에게는 고통이지만 수행자에게는 고통이 아니다.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사실 앞에 우리가 왜 고통 받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 몸은 내가 아니라는 이 진실 앞에 두려움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는다.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내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늘 불안정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삶은 아름답다. 삶이 안전하고 확실하게 정해져 있고, 안정적인 분명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면 그 삶은 얼마나 생기를 잃고 말 것인가. 그런 삶은 언뜻 보기에는 안정되어 보이고 행복해 보이겠지만 그런 삶을 사는 자는 나약하고 속박되어 있으며 틀에 박혀 있고 생기가 없다. 모든 것이 정해져 있고, 그것도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다면 거기에 나만의 자유의지를 펼칠 공간이 없다. 확실한 삶에 틀어박히고 구속된 채 자유를 잃고 해맬 수밖에 없다. 그런 삶은 얼마나 희뿌옇고 재미가 없는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한 달 뒤, 일 년 뒤, 십년 뒤 머언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그것처럼 따분하고 기계적인 밍숭맹숭한 삶이 또 있을까. 그것은 삶이 아니다. 그저 기계의 움직임일 뿐. 그것이 아무리 부유한 미래일지라도 그것은 구속이요 속박이다. 돈과 재물로 가득 찬 부유한 노후라고 할지라도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런 삶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삶에 지쳐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고, 노후를 준비하려 들지 말라. 내 삶의 미래며 노후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가장 분명하고 알찬 미래며 노후준비는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고 살아내는 일이다. 노후자금을 은행에 넣어두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삶으로써 시공(時空)의 법계에 무량한 공덕을 저축하는 일이다. 삶은 불확실하기 때문에, 불안정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단 한 순간의 미래도 보장되어 있지 않고 언제나 변하기 때문에 경이롭다. 우리는 그 불확실한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흐름에 나를 얹어 놓은 채 다만 따라 흐를 수 있을 뿐이다. 물론 불확실하고 정해진 바가 없다면 불안할 수는 있다. 그러나 불안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 삶에서 때때로 마주하게 될 혼란과 위험을 거부하지 말라. 괴로움, 아픔, 상처, 좌절, 패배, 슬픔, 공포 이런 것들로 아파하지 말라. 삶이라는 것은 우리 생각처럼 그렇게 좋은 일만 일어나는 곳은 아니다.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는 곳이 아니다. 원하는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삶도 없다. 좋은 일만 일어나며, 원하는 대로 다 하고 살 수 있는 인생이 있다면 그 인생처럼 따분하고 심심하며 불행한 삶은 없을 것이다. 그런 삶에는 생기가 없고 지혜가 없으며 자유가 없다. 삶은 누구에게나 때로는 힘겹고 때로는 눈물겹다. 지나 온 삶을 돌이켜 보라.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내 존재를 스쳐 간 수많은 아픔과 고통과 좌절들이야말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지금의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감로였고 동반자였다. 그 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아픔들, 모든 고통과 좌절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 삶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장을 가져다 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에서는 도저히 그 아픔 속에서 무슨 깨달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져다 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기억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분명한 기여를 했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인생의 어느 때가 되고, 내적으로 어느 정도 삶의 통찰이 깊어지게 되면 그 때의 그 아픔이 나에게 어떤 성장을 가져다주었는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 순탄한 삶, 우리가 꿈꾸는 삶은 그런 삶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런 삶 속에는 깨우침도, 성숙도, 지혜도, 자비도 꽃피어나기 어렵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어리석음과 얕은 정신과 공허한 내면을 가져다 줄 뿐이다. ‘자녀를 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 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어지간히 피가 나더라도 ‘일어나자. 일어날 수 있어.’ 하고 응원을 해 주셨을지언정 호들갑스레 달려와서는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주지는 않으셨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빠듯한 용돈을 쥐어 주시며 알아서 잘 쓰라는 말 외에는 어디에 무엇을 썼느냐고 묻지도 않고 맡겨주셨다. 대학 때는 될 수 있으면 알아서 학비며 용돈도 벌어 쓰고 정 힘들 때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에는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손 벌릴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못하도록 늘 말씀해 오셨다. 괴로운 상황에서, 혹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나 좌절 속에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는 것은, 그것은 무관심이나 냉정 그 이상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배려이다. 수행자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영적인 삶, 명상적이고 선(禪)적인 삶이란 것은 그 어떤 삶의 고난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그 문제의 뒤뜰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삶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상황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좌절하며, 괴로워 할 뿐이지만, 보다 영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사는 이는 그 문제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나는 의미를 지혜롭게 관찰하곤 한다. 언제나 문제는 그 이면에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이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노크를 한다. 때때로 어떤 경우에는 극단적인 좌절과 고통이 도리어 저 반대편의 극적인 기쁨 혹은 삶의 대 전환이 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최악의 상황에서 인생을 포기하려고 하던 사람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는가. 인생의 최저의 나락에 빠져 있는 이들일수록 그것에서 빠져나오려는 에너지는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단번에 그 상황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극과 극은 언제나 가깝다. 그 둘은 서로 다른 극단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의 다른 흐름일 뿐이다. 에너지의 흐름만 살짝 바꾸어 놓는 순간 그 삶은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최악의 괴로운 삶은 곧 최고의 행복과 가깝다. 그 둘은 극단의 먼발치가 아니라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길벗이다. 살짝 고개만 돌리면 언제나 눈빛을 나눌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이 삶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향해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피이며 둘째는 투쟁이다. 회피는 괴로움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다른 관심사나 일을 찾아 나서면 잠시는 그 문제를 잊은 듯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되살아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괴로운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 괴로운 문제와의 투쟁을 선포한다. 괴로움을 향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물론 전자보다는 조금 더 낳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기도나 수행은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그 문제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부분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부분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수련단체에서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며 무아를 증득하려면 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몸을 칼로 자르고 폭탄으로 터치는 등 몸을 헤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상상으로 몸을 죽여 없애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지혜로운 중도의 길이 아니다. 부정하면서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나 그 문제와의 투쟁을 통해 이겨내려는 것 모두 극단의 방법일 뿐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다만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스쳐지나 가는지를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 놓고 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의 하나로써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울 필요도 도망 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인생이 자꾸만 꼬이고, 괴롭고, 답답하다고? 인생에서 지금이 최악의 순간이라고? 괴로운 일들이 몇 가지고 겹쳐서 나를 미치게 한다고? 잘 되었다. 지금이 바로 삶의 경이로운 반전이 시작될 시점이다. 내 생에 가장 큰 공부가 곧 시작될 것이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 깊게 삶을 지켜보라.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고민만 하지 말고 주의 깊게 마음을 지켜보라.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을 해석하거나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지켜보라. 지켜보는 관조(觀照)가 예민해지고 깊어지는 순간 마음의 메시지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기도를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절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를 저질러 볼까 하는 생각이 일어 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만 그것을 하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다만 매 순간순간 주어진 삶을 살라. 운이 좋다면 삶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챌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기적은 아주 사소하게 우리 삶에 등장한다. 진리도 그렇고, 변화도 그렇고, 깨달음도 그렇고, 언제나 정점을 지나는 일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고 미세하게 다가온다. 아니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 삶에 엄청난 진리가, 부처가, 신이 봄바람이 불듯 그렇게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몇 번이고 우리 존재를 스쳤을 터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깊은 관찰로 삶을 지켜보아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삶의 역경과 혼란을 타고 진리는 온다. 삶이 비탈진 내리막에서 뒤집혀 막 내동댕이쳐지고 있을 때 도리어 삶의 획기적인 변화가 소리 없이 찾아온다. 이처럼 불안과 혼란과 위험과 역경은 모두 우리를 더욱 더 내면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하고, 존재의 깊은 심연(深淵)에 이르게 해 주는 영적인 동반자요 도반 같은 것이다. 역경(逆境)이 없고 순경(順境)만 있는 삶이란 그것이 곧 가장 큰 역경이다. 우리의 삶이 역경과 순경, 편안과 불안,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다. 또한 여간 당연한 일이 아니다. 그것이 삶의 속성이요, 진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좋고 싫게 받아들이고, 집착과 미움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다만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대로 그저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지 않고 불안과 위험을 버리려 애쓰고, 행복과 편안과 순탄한 삶만을 바라기 위해 애쓴다면 그 때부터 삶은 그대를 외면하고 심지어 파멸시켜 버릴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살아 낼 수가 없다. 온전한 삶이 그대를 비켜가기 때문이다. 사실 수행의 길, 명상의 길, 영적인 구도의 길이라는 것 또한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움만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괴로운 일이 사라지고, 장애가 사라지고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도의 길 위에는 온갖 가시밭길이 놓여 질 수도 있고, 일반인들 보다 더 큰 아픔과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아픔과 괴로움을 대항해 싸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그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도의 길을 돕기 위한 법계의 배려요, 신의 사랑이고, 붓다의 자비이다. 지혜로운 이는 문제 속에서, 아픔과 좌절 속에서 붓다의 자비로운 이끎을 보고 신의 사랑스런 도우심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공부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자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괴로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지켜본다. 실제로 티베트에서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괴로움을 청하는 축원을 암송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와 인내와 정진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럴 진데 우리의 삶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이 생겼다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회피하고 투쟁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오히려 그 때를 소중한 공부의 기회로 알아야 한다. 내 삶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내 정신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알아야 한다. 물론 즐거운 일도 마찬가지다. 괴로움이 공부의 재료이듯 즐거움 또한 공부의 재료가 된다. 즐거움이 오더라도 거기에 집착해 더 많은 즐거움을 쟁취하려 애쓸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고행을 위해 즐거움을 죄다 내다버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다만 중립적인 무분별의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없고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이 모든 ‘어떤 일’들은 항상 부처님의 자비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내 존재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살며시 돌아 갈 뿐이다. 내 삶에는 괴로운 일도 없고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인 것이다.
삶을 조종하려 들지 말라. 삶을 내 방식대로 통제하려 들지 말라. 내가 원하는 삶만을 살고자 애쓰지 말라. 그런 삶은 없다. 내 앞에 일어나는 삶을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들이라.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전체적으로 통째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감사하라. 안정적이고 평탄한 삶만을 추구하려는 생각이 모든 문제를 부른다. 순탄한 삶만을 바라는 생각이 도리어 순탄하지 못한 삶을 만들어 낸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고 고정적으로 정해놓은 생각이 많을수록 ‘그런 삶’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이러 이러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그 모든 생각을 놓아버릴 때 삶은 저절로 삶 그 본연의 길을 걷게 된다. 편안함을 갈구할수록 더욱 불편해지고, 안정을 갈구할수록 삶은 더욱 불안해진다. 편안, 안정에 대한 욕구를 놓아버릴 때 삶은 순조롭다. 이 세상의 근본 이치는 언제나 변한다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이치와 고정된 것, 확정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를 따른다. 또한 그러므로 삶이란 언제나 불안전하고 불안정하며 괴로울 수밖에 없다는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이 삶의 기본 원칙이며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기초를 거스르려 애쓴다. 불안정하고 불확실하며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면서, 안정적이고 확실하며 불변하는 미래를 꿈꾼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어디까지는 꿈이고 환영이며 억지일 뿐, 그런 것은 없다. 없는 것을 찾아 나서봐야 찾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삶의 불확실성과 불안정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하라. 그랬을 때 삶은 아름답다. 아니 사실은 불안하고 불안정하며 삶의 곳곳에 내재된 위험과 혼돈이 있기 때문에 삶은 경이롭고 찬연히 빛날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삶의 복잡성과 혼란과 어느 때고 쉴 사이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위험과 근심과 역경들, 그것들이야말로 우리 삶에 가장 필요한 요소다. 그런 도전들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피폐하고 나약해지고 말 것인가.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라. 느긋하게 삶의 혼란을 즐기라. 아수라장처럼, 난장판같이 튀어나오는 삶의 모든 위험들을 그저 한발자국 떨어져 가만히 지켜보라. 다가오는 삶을 전체적으로 느끼고 만끽하고 수용하라. 그리고 그 모든 삶에 감사하라.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될 수도 있고, 저것이 될 수도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삶이란 얼마나 생기로우며 아름다운가. 삶의 모퉁이에서 역경을, 위험을, 좌절을 만나게 된다면 호흡을 가다듬고 반짝이는 눈으로 눈부시게 지켜보라. 혼란스런 삶도 깊이 바라보면 눈부시게 빛난다.
이제 막 연초록의 잎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고 연초록의 새순들이 나무위로 내려앉으며, 노오란 생강나무와 분홍빛 진달래가 외롭던 산에 생기로운 벗이 되어주고 있다. 순간 파도처럼 산야를 스쳐지나가는 거센 바람소리가 내 마음에 노크를 한다. 법당 풍경소리와 함께 바람에 부딪치는 낙엽소리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마음에 피어나는 봄을 느낀다.
산은, 나무는, 꽃들은, 또 지난 해 땅에 떨어졌던 썩어가는 낙엽들은 이렇게 때때로 내 안에 생기로운 도반처럼 다가와 노크를 하곤 한다. 바람의 소리, 낙엽 소리, 물소리, 풍경소리들은 모두 내 안의 관조(觀照)의 빛을 일깨우는 우주의 경책처럼 들린다. 바람이 불어 와 대지를 스치고, 낙엽과 나무를 스치며, 내 뺨을 스치는 그 상서로운 느낌, 소리, 그것들을 가만히 느껴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 내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고요와 평안이 깃든다.
아직 바람은 차다. 글을 쓰고 있는 중에 창밖으로 빗방울 소리가 대지를 적신다. 잠시 글쓰기를 멈추고 찬바람을 느끼며 조근조근 낙엽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아! 지금 이 순간 내 마음은 내 몸은 하늘하늘 미묘한 설렘과 알 수 없는 적요(寂寥), 가득함, 맑음, 밝음, 편안함, 차분함 같은 것들 속에 내맡겨져 있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여기’의 찰나로 돌아 와 보라.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어떤 순간, 어떤 상황,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 빛을 잃지 않고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며, 도반이며, 신이고 붓다 그 자체이다. 한번 내 존재를 가지고 실험 해 보라. 어떤 상황 속에서든 좋다.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존재를 깨어있는 알아차림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바로 그 상황이 신을 만나고, 붓다를 친견하며, 내 안의 깊은 존재를 만날 수 있는 때가 된다.
‘지금 여기’라는 순간이야말로 내 삶에 있어 얼마나 큰 축복인가. 잠시 답답한 일이 있거나, 복잡한 생각들이 있거나, 대인관계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이 있거나, 회사 일로 인한 괴로움이 있더라도 언제든 잠시 한 생각 돌이켜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한다면 우린 무엇을 기다릴 것도 없이 직접 평화로운 정원에 도달할 수 있다.
왜 절에 가서 다리를 꼬고 앉아 참선을 시작해야만 고요와 평온과 삼매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왜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아무런 괴로움이 없을 때만 우리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하는가. 우리 존재의 본래 속성은 지극한 평화로움과 고요함이며 깨어있음이다. 그러나 그 속성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과 만나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어려운 일인가. 그저 ‘지금 이 순간’에 있기만 하면 되는데.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그의 책 『고요함의 지혜』에서 말하고 있다.
“지금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것은 오직 한 순간밖에 없지 않은가? 삶은 언제나 '이 순간'이 아니던가? 이 한 순간, 즉 지금이 내가 도망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며, 나의 삶에 변함없이 존재하는 오직 하나이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는 나는 어디에 있든 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속에서 편안하지 않다면 나는 어디를 가든 마음속에 불안이라는 짐 보따리를 지고 간다.”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될 때 우리는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하든 편안하다. 그것이 회사 사무실이 될 수도 있고, 꽉 막힌 도시의 차 안이 될 수도 있고, 혹은 바쁜 업무 중에 잠시 만나게 되는 짧은 순간일 수도 있고, 일이 안 풀리는 순간, 회사를 살리느냐 망하게 하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에게 꾸중을 듣는 순간, 동료들과 대화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떤 순간이든 우리는 ‘지금 이 순간’과 친구가 되는, ‘지금 이 순간’을 100% 존재하며 살아나가는 것을 수행할 수 있다.
그것은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을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찰나 찰나로 순간만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바로 이 현실, 지금 여기의 이 삶만을 살아 나가는 것이다. 다른 시간을 다른 공간을 살 필요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왜 지금 여기라는 생생하고 직접적인 삶을 놔두고 다른 과거나 미래의 다른 공간의 삶을 피상적으로 뒤척이고 있는가. 물론 때로는 과거를 뒤척이는 것이 위안을 줄 때도 있고, 따뜻한 미소를 머금게 할 때도 있으며, 미래를 계획하는 것이 삶을 더욱 열심히 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거나 미래에 속게 되는 것이다. 분명 그것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꿈이 가져다주는 속임수. 간밤에 단꿈을 꾸었다면 우리는 그 꿈으로 인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꿈이요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지 않은가. 왜 우리가 직접적이고 생생한 깨어있는 현실을 놔두고 꿈에 얽매이고, 꿈의 달콤함에 젖어 현실의 삶을 덜 살아가야 하는가. 과거나 미래를 살아갈 시간에 현재라는 순간을 더 깊이 있게 진하게 사는 것이 모든 명상과 수행의 핵심이다.
책에서는 또 말하고 있다.
“지금에 감사하고 지금에 경의를 표하라.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중요한 구심점이 될 때 삶은 여유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의 그 어떤 현실에도 경의를 표하라. 부처님께 예경하고, 신께 나아가 기도하듯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신께, 붓다에게 감사와 찬탄과 찬양과 경의를 표하라. ‘지금 이 순간’의 신을, 부처를 우리는 언제나 ‘지금’ 만날 수 있다. 지금이 삶의 근본이 되고, 지금을 사는 것이 삶의 구심점이 될 때 삶의 모든 문제들은 부처의 방식대로, 신의 방식대로, 진리의 방식대로 여유롭고도 평화롭게 풀리기 시작한다. 모든 문제가 풀리는 그 진리의 열쇠가 바로 ‘지금 여기’다.
톨레는 말한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삶에 대한 책임도 회피하는 것이다. 삶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그러함'에 마음으로 반대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의 지금과 싸우지 않겠다는 뜻이다. 삶과 조화를 이루겠다는 뜻이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매우 혁신적인 정신 수행이 있다. 바로 지금 일어나는 것을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는 것은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지지 않고 온전히 살아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인생 전체에 대한 직무유기이며 삶에 대한 회피이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오직 내게 주어진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일이지, 미래를 위한 준비도 아니며, 목표 달성도 아니고, 노후 준비도 아니며, 진급도, 합격도 아니다.
지금 이 순간을 책임진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받아들이며 온전히 느끼고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일체 모든 상황과 인연과 환경을 완전히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반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것을 관하는 것, 그것은 곧 지금 이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최선이며 언뜻 보기에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최고의 혁신적인 수행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금 이 순간과 다투려고 하지 말라.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상황을 통째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관하라. 내 앞의 삶과 투쟁하지 말고, 상황을 바꾸려 들지 말고, 지금 이 순간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라. 내면에서 일어나는 생각, 번뇌, 고민, 상황들일지라도 그것과 씨름하고 이겨내려 애쓰고 다투려 들지 말고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다만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가만히 비추어 보라.
신경 쓰지 말라. 왜 이렇게 생각이 많고 번뇌가 많은 것이냐고 탓할 필요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그 자연스러운 내면의 번뇌들을 나쁜 것으로 몰아붙이며 그것을 없애려고 애쓰는 내 다툼의 행이다. 내 안에서 혹은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에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탓할 것도 없다. 다만 안팎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고 다만 묵연히 지켜보라.
안팎에서 일어나는 경계에 내 마음을 포개지 말라. 안팎의 경계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판단치 말라. 그저 일어나는 것은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인연 따라 모든 것은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다.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가다듬고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매 순간 순간 밖으로 치닫는 마음을 매 순간 순간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 그것이 수행과 명상, 마음공부의 핵심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서는 순간, 삶이 성스러움을, 인생이 경이로움을, 존재가 신비스러움을 깨닫는다. ‘지금’에 머무를 때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에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이 부처요 신의 나툼이 된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는 순간 나도 세상도 우주도 바로 지금 그 자리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하루에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깨어있음의 빛을 지금 이 순간에 비추라. 그 빛이 지금을 비추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지, 언젠가 있을 성도(成道)의 때란 없다.
계속해서 톨레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존재의 심연에는 이미 지혜가 있다. 그것을 끌어다 쓰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저 앞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에 전념(專念)하면 된다. 전념은 원초적 지혜이며 순수의식 그 자체이다.”
우리 내면의 깊은 심연에서 나오는 고요함의 지혜는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주의집중을 통해서 나온다. 전념이란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알아차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내 눈 앞에 있는 현실을 살게 될 때 그저 현실만을 살아가면 된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다. 온갖 지식들과 생각들을 동원하는 것은 오히려 삶을 번거롭고 정신없게 만들 뿐이다.
다만 내 앞에 있는 그것만을 하라. 내일 일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라. 이미 지나간 일을 끄집어내어 생각하지 말라. 물론 꼭 생각을 써야 할 때가 있다면 생각을 사용할 수 있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말고 멍하니 살라는 말이 아니다. 아니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생각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말고 그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여기에서도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원칙이 통한다. 마땅히 생각을 일으키되 그 생각에 머물거나 집착함이 없이 생각을 일으키란 말이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라. 생각으로 살지 말고 온 존재로써 살라. 온 존재가 그대로 직접 삶과 부딪치라. 내 앞의 현실만을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살게 될 때 우리 내면에 숨겨져 있던 단순함과 명료함의 지혜는 비로소 깨어나게 된다. 우리의 삶이 한없이 단순해진다. 단순해지면서 또렷해진다. 삶을 사는 것 그 자체가 그대로 지혜의 움직임이 된다. 맑고 쾌청한 가을 하늘처럼 삶을 다만 살기만 하라.
또한 톨레는 불교의 연기법의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불자들은 늘 알고 있던 진리였지만 최근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이 있다. 이 세상에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이다. 겉모습 밑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만물은 다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각의 개체는 ‘지금 이 순간’이 취하는 특정한 형태를 준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긍정하는 순간 나는 생명의 지혜와 힘과 조화를 이룬다. 그 때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별도로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사건은 없다는 것, 그것이 바로 불교의 연기(緣起)요, 상의 상관성(相依相關性)이다. 이 세상에는 독자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사물도 없고, 아무 이유 없이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사건도 없다. 우주적인 전체의 진리성이 다만 ‘지금 이 순간’에 특정한 사물로 혹은 사건으로 우주적 전체의 일부로써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우주적인 진리성, 불성(佛性), 법신(法身), 영성(靈性), 진리의 당체가 ‘지금 이 순간’의 존재, ‘지금 이 순간’의 사건이라는 모습으로 끊임없이 내 앞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이며 번뇌들도 법신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이며, 내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며, 환경, 상황, 문제들 또한 불성의 일부로써 우주적인 관계성 속에서 연기적으로 ‘지금 이 순간’을 빌어 일어나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그 모든 일도, 사건도, 사물도, 사람도, 모두가 다 법신 진리의 나툼이며, 온 우주의 드러남이며, 부처의 시현(示現)이고, 신의 현현으로써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공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란 말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모든 상의 상관적인 연기법의 진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순간이며, 우주적인 전체성 속에서 법신불의 향기가 화신으로 나투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가는 것, ‘지금 이 순간’을 느끼며 관하고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생에서 행할 수 있는 가장 존귀하며,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행이요 수행이다.
‘지금 이 순간’이 부처이며 신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본질이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삶의 전체이다. 끊임없이 놓치겠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라. 그것이 수행자의 길이요 참된 삶의 길이다.
사람이 사는 데 돈이 없으면 불편하고 궁색합니다. 주위를 보면 부자가 되려고 혈안이 되어 돈을 쫓아다니는데도 항상 궁색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고, 별다른 노력도 하지 않는 것 같은데 돈이 굴러 들어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부자들은 전생에서든 현생에서든 물질적으로 남에게 많이 베푼 사람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스님!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부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답변]
좋은 질문 해 주셨어요. 그게 우리들 사람 사는 데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아무리 초월하고 산다고 해도 돈을 초월하고 산다는 게 어디 그리 쉽습니까. 누구나 돈을 좋아합니다. 저 또한 돈이 좋습니다. 수행자는 돈이 좋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돈에 대한 욕심과 바램, 집착들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지켜보는 사람이 수행자인 것입니다. '부자가 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하셨는데요,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희망 메시지는 우리 모두가 ‘부자를 버리는 것’에 있다고 봅니다. 부자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고 오히려 청빈한 가난의 정신을, 작은 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자족의 정신을 우리 존재 속에, 이 사회 속에 깃들게 하는 것만이 이 세상에 참된 부유함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부자가 되면 좋지요. 그러나 나만 부자가 되거나, 소수의 사람들만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이들이 함께 부자가 되는 길을 찾아 봐야 한다는 말인데, 그것은 가난의 정신과 자족의 정신 외에는 없습니다. 인구는 넘쳐나는데 이 많은 인구를 다 부유하게 해 줄 자원도, 음식도, 물도, 돈도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나 유럽 같은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이 소비하는 패턴으로 지구인들을 모두 살도록 하려면 지구 같은 행성이 몇 개가 되도 모자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한 부자가 되는 순간 아마도 모든 이들은 또 다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자, 남들보다 더 부자가 되고자 다툼을 벌이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의 부자라면 우리는 그 부자를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런 부자를 버릴 때 진정 부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돈이 많으면 그래서 그 돈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것 같지만, 더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되고 맙니다. 돈이 많아지면 그것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작고 소박한 행복을 놓치고 맙니다. 새벽 창으로 스미는 따스한 햇살, 봄에 피는 여린 꽃망울, 어린 아이의 맑은 눈동자, 눈 내린 겨울 산의 앙상한 가지가 주는 선연함들을 누리기 어려워집니다. 그것 말고도 돈으로 해야 할 좀 더 자극적이고 오감을 흥분시키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것 뿐이 아니예요. 돈이 많으면 작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작은 것들의 고마움 또한 놓치고 맙니다. 옛날에 사 두었던 싸고 낡은 장갑과 아버님께 물려받은 빛바랜 소품들에 대한 가치를 잊습니다. 어제 먹다 남은 사과 반 조각이 오늘 아침 얼마나 맛있는지를 모르고, 지난 해 김장철에 해 놓았던 김치를 다음 해 여름, 가을까지 묵혀 먹는 묵은지의 맛을 모르며, 냉장고에서 썩어가는 음식물들을 버리는 일만 늘어갑니다. 이런 부자가 과연 얼마나 삶을 진하게 누릴 수 있을까요? 삶이 주는 작고 소담한 그러나 찐하고 짠한 행복을 어떻게 만끽해 볼 수 있겠습니까? 부자 되는 비법을 묻고 싶으셨다면 다소 실망감이 드실 수도 있겠는데요, 부언으로 조금 실질적인 답변을 드려 보지요. 이 세상 현상계는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마음으로 짓고 무너뜨리고 그럽니다. 내 마음이 내 삶의 현상세계를 만들어내는데 그 중에 가장 큰 힘으로 형성력을 가지는 것이 바로 믿음, 즉 신념(信念)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계속 가난해 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난한 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신념 속에 ‘나는 가난하다’는 ‘나 같은 사람이 부자가 될 수 있겠어?’하는 가난의 신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자들은 ‘나는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습니다. 바로 그 마음속에 자신의 삶에 대한 어떤 그림이 굳은 믿음으로 자리하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어느 한 순간이나 어떤 한 사건을 계기로 신념이 확연히 바뀌는 사람은 그 때부터 현실도 바뀌기 시작하는 것을 봅니다.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의 신념에 100% 힘을 실어 줍니다. 언제나 그 믿음이 현현되도록 도와주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부자가 되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분명히 될 수 있다고 믿지는 못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못 되는 거예요. 기대나 바람이 미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미래를 만듭니다. 다시말해 부자가 되기를 기대하거나, 기다리거나, 바라지만 말고 ‘나는 이미 부자가 되었다’고 굳게 믿어버리란 말입니다. 지금 이렇게 가난한데 어떻게 이미 부자가 되었다고 믿느냐고 항변하겠지요? 그런데 왜 나 자신의 가난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보고 가난하다고 낙인 찍는 것입니까. 가난한 부분도 물론 있겠지만 더 많은 부유한 부분이 우리 삶에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침 햇살의 따스함,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공기, 목마를 때 언제든 마실 수 있는 물,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 거기에 최소한의 청빈한 삶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의식주가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부유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살펴보면 우리 삶에는 가난한 부분보다 부유한 부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부자들과 비교를 하니 상대적인 가난을 느끼는 것일 뿐이지, 제가 인도나 네팔 등을 다녀보니 그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나라에서 너무 가난해서 나라의 보조금을 받고 사는 사람들조차 그들보다는 훨씬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부유함을 누리고 있더란 말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가난하다고 여기는 그 부족한 부분에 마음을 쏟으면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마음이 자꾸 가난한 부분, 부족한 부분을 보고 느끼니까 현실도 자꾸만 가난해지는 것이예요. 그런데 우리에게 이미 충분히 주어진 부유한 부분으로 시선을 돌리고, 마음의 관심을 돌려서 부유하고 행복한 그 부분을 충분히 삶 속에서 누리고 느끼고 지켜보아 보세요. 그러면 우리 마음에 부유함이 꽉 들어차게 되고 그러면 저절로 내 안에서 가난을 연습하기보다 부자를 연습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것이 그대로 내면에서 부자라는 믿음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면은 무한한 창조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데, 중요한 점은 그 내면의 공간은 물질적인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본다는 점입니다. 마음이 부유한 사람에게는 그 부유한 마음에 따라 부유함이 창조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그 가난한 마음에 따라 부족과 결핍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계속 가난해지고, 부자들만 계속 부자가 되는 것이 이유가 있는 거예요. 겉으로 보면 그게 불공평한 것 같지만, 사실은 부자들은 마음 속에서 부자라는 생각이 신념화되어 있다보니 계속 부유해지는 거란 말이지요. 그러니 부자가 되기 위해 정말 중요한 것은 돈을 버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작고 사소한 부유함일지라도 그것을 충분히 누리고 만끽함으로써 잊혀졌던 부유함의 감각을 우리 안에 살려 놓는데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희망의 메시지는 우리 삶에 이미 존재하는 작고 소박한 부유함을 누리고 느끼고 만끽해 보는 것에 있습니다. 결핍을 연습하지 말고 충만을 연습하는데 있는 것이지요.
스님을 만난 인연을 항상 감사해 하며 살고 있습니다. 스님의 모든 말씀이 다 좋지만 저는 특히 '관수행'에 관한 가르침이 가슴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다시한번 깊이 머리숙여 감사드리며 한가지 질문 올립니다. 연령상 관리자의 위치에서 일을 하다보니 일을 지시하고 보고를 받아 검토해서 결재를 하는 일들이 주를 이루는데, 직원이 일을 잘못했을 때 많은 경계를 만나게 됩니다. 물론 그때 반응하는 제 마음을 지켜보면서 쉽게 경계에 끄달리지는 않습니다만, 스님의 말씀중에 누구의 생각도 옳다 그르다고 할수는 없으므로 그것을 그냥 '다른생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말씀이 있더군요. 그런데 논쟁이 되거나 당장 판단할 수 없는 그런 일이라면 당연히 '다른생각'으로 수용할 수도 있겠지만 능력이 떨어지는 직원들이 해가지고 오는 일을 보면 틀리고 잘못한 것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까지 '다른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물론 잘못된 일에 대해서 그것에 반응하는 제 마음을 관하고 그결과 관용심을 내는 것은 별개로 하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답변]
안녕하세요. 늘 삶 속에서 마음을 관하고 계신다니 그 깨어있음을 깊이 찬탄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 수행이 어느 정도 되었구나 싶으면 일터나, 가정이나, 부모의 곁 같이 생생한 삶의 터전 안에서 자신의 수행 정도를 가늠해 보라고 하기도 합니다. 조용한 적정처에서 수행을 할 때는 마음 다스리기도 쉽고, 지켜보기도 쉽고, 조금씩 휘둘리는 마음도 마음을 관함으로써 잘 다스려 지곤 하는데, 생생한 삶의 터전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일들과, 또 가까운 인연들과 부딪치다 보면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일상에서 주로 '생각' '사고'라는 것을 쓰며 살아갑니다. 그 머릿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이나 상황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이 그저 불쑥 불쑥 튀어나오고, 실체 없이 오고 가며, 온전하지 못하고, 삶의 전체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다만 그 상황에서의 작고 좁은 판단만을 주로 하곤 합니다. 그 상황이 가지고 있는 전체성, 연기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모든 상황은 표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 그 이면에 더 깊은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나와 내 주변, 그리고 이 우주와의 전체적인 연기성에 의해 깊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우리의 생각과 사고, 판단이 어떻게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분명히 내가 옳다' '이 사실은 분명히 내 생각이 맞다'고 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도 사실은 '오직 모를 뿐'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눈앞의 현실에 대해서는 '옳고 그른 것'이 맞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전체성, 연기성에서 볼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완전히 알 수 없는 것이고,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모를 뿐' 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생각은 늘 그 자체의 상황만을 보고, 그 사람의 행위만을 보고,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라고 판단을 하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과 명상의 방식에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영역, 즉 '오직 모를 뿐'인 영역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 판단을 중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느 한 직원이 분명한 실수를 저질렀고, 또 그것이 한두번이 아니라 계속되며, 그러다가 결국에 회사에 결정적인 타격을 줄만한 실수를 했어요. 그것은 분명한 실수입니다. 회사에서 봐도 그렇고, 사회적인 기준에서 봐도 그렇고, 분명히 다른 직원에 비해 잘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상계의 모습이예요. 그런데 그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이면에는 이를테면 이런 것들, 이런 이유와 목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그 무능하게 보이는 직원이 우리 회사에, 그것도 내 부하직원으로 들어 오는 방식으로 나와 우리 회사가 가진 악업을 표면화시키게 되는 것이지요. 언젠가 있어야 할 나의 악업을 정화시켜 주기 위해서 그 부하직원이 바로 그 업을 녹이는 도반으로써 이 생에 나와 인연이 되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또 지금처럼 법우님께서 마음공부를 하고 있을 때 그런 부하직원을 만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엄청난 공부를 시켜주기 위한 매우 시의적절하고 반가운 공부재료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그 부하직원의 잘못된 행동들이 반드시 잘못된 것으로만 보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장에 눈앞의 판단으로 본다면 물론 잘못된 것이지만, 그것은 분명히 내 삶에서, 또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나야 하고, 만나야 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완전히 수용하는 것 그것이 위빠사나이고 관 수행입니다. 삶의 전체성, 연기성, 업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 타인의 옳고 그른 모든 것, 내 삶에 일어나는 좋고 나쁜 모든 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는 지혜의 정견이 열립니다. 물론 그것은 분별 없는 '바라봄'에 의해서 생기지요. 판단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삶을 살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옳다 그르다' '잘 했다 잘못했다'는 판단을 해야 하고, 그 판단을 토대로 삶의 현장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현실 속에서는 옳고 그른 것이 분명히 있고, 판단해야 할 일들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수행은 그것조차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판단을 하고, 잘못된 일을 지적해 주고, 할지라도 거기에 얽매이거나, 집착하거나, 화를 내거나, 그것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즉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것이고, '응무소주 이생기심,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치인 것입니다. 옳고 그른 생각이 없고 다만 다른 생각이 있다는 말은, 그저 그 모든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입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 볼 뿐 거기에 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만 판단을 하더라도(이생기심) 그 판단에 얽매이거나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음으로써(응무소주) 화와 성냄 등에 휘둘리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과 '사고'들을 너무 신뢰하지 마세요. 그것은 '지금 이 순간'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과거이거나, 미래일 뿐입니다. 생각과 사고는 똑똑할지는 몰라도 그다지 지혜롭지는 못합니다. 판단이 일어나는 순간 생각은 과거로 뛰어가 현실의 그것과 비슷한 과거의 어떤 것을 가져옴으로써 판단의 잣대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기준으로 현재를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 자체로만 보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은 '다만 있는 그대로' 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실수가 잦은 부하직원을 볼 때에도 '어제 실수했던 부하직원'으로 본다면 그것은 현재에 깨어있는 관이 아닙니다. 과거에 얽매인 시선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 사람은 '실수가 많은 부하직원'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 전혀 새로운 한 사람일 뿐입니다.
모든 고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알라. 넉넉함을 알면 부유하고 즐거우며 평화롭다. 그런 사람은 비록 맨땅에 누워 있을지라도 편안하고 즐겁지만, 만족할 줄 모르면 설사 천상에 있을지라도 흡족하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가난한 듯 하여도 사실은 부유하다. 이것을 가리켜 지족(知足)이라 한다. 『아함경』
세상에는 자기의 욕심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주 적고 욕심을 벗어나려고 애쓰는 사람도 흔하지 않다. 그저 욕심을 채우려고 애쓰다가 목숨을 마치는 사람이 많다. 설사 하늘에서 보물이 비처럼 쏟아지더라도 욕심 많은 사람은 만족할 줄 모른다. 자기 집 창고에 황금이 태산처럼 쌓였다 한들 욕심 많은 사람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사주경(四洲經)』
욕심을 버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만족이다. 죽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고, 입을 수 있고, 잘 곳이 있다면, 최소한의 소유를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 바로 그 자리에서 행복할 수 있다. 사실 최소한의 소유만 보장이 된다면 누구에게나 행복의 가능성은 열려있다. 최소한의 의식주의 해결, 그 이상을 가지고도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의 불행은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사실 의식주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사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해야 할 몫은 보다 많이 벌고 쌓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마저도 소유하지 못한 수많은 이들을 위한 나눔과 자비를 실천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죽을 때 까지 욕심을 채우고 채우고 또 채우기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은 설사 하늘에서 보물을 비로 뿌려 주더라도, 창고에 황금이 태산처럼 쌓였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또 다른 욕심을 채우면서 죽어 갈 것이다. 이 말이 다른 미련한 사람들 이야기 같겠지만 사실 지금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이런 욕심충족의 삶을 끝장내고 만족과 청빈의 삶으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우리의 남은 생은 더욱 비참해지고 말 것이다. 참된 부자는 욕심을 많이 성취한 사람이 아니라 욕심을 많이 놓아버린 사람이며, 소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만족이 많은 사람이다. 만족할 줄 모르면 설사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준다 하더라도 흡족하지 않지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아무리 가난해도 사실은 부유하다. 만족함을 아는 것, 지족이야말로 행복의 지름길이요, 인류를 살아 온 모든 성인들의 어진 벗이다.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즐거움이요 욕심을 채우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은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니 진정한 즐거움은 마음에 바람이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구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바로 괴로움이다. 마음 속에 바라고 원하는 것을 다 놓아버리면 세상의 즐거운 마음 가운데 제일이다.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세상에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다. 하나는 바람의 성취에서 오는 즐거움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 그 자체를 놓아버리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다. 바람의 성취에서 오는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으며, 더욱이 이 세상에서 우리의 바람을 다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괴로움이다. 바람이란 지금 여기의 문제가 아닌 미래의 문제이다. 바라는 바가 있다는 말은 지금은 불완전하며 불만족스럽고, 바람이 성취된 미래의 어느 순간을 좇는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언젠가 성취해야 할 것이 있을 때 지금 이 순간은 그다지 소중하지 않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치면 삶 전체를 놓치는 것이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때는 오직 ‘지금 이 순간’ 밖에 없다. 마음에 바라는 바가 없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의 만족만이 있다. 바람이 없다면 성취할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하다. 바람의 성취에서 오는 즐거움을 구하지 말고, 바람 그 자체를 놓아버렸을 때 오는 즐거움을 찾으라. 세상에서는 바람과 꿈과 희망을 높이 품고 목표의식을 분명히 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세상과 거꾸로 가는 가르침이라 했다. 이 가르침은 미래보다는 현재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매 순간 순간이 목적지이며, 삶의 모든 순간이 내 바람이 성취 된 순간이다. ‘지금 여기’라는 생생하게 살아 꿈틀대는 현재를 투명하고 완전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희망이 현실이 되고, 꿈과 바람이 지금 이 자리에서 100% 실현되는 순간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재물 때문에 잠시도 편히 쉴 때가 없다. 논밭이 있으면 땅 걱정, 농사 걱정, 집이 있으면 가축 걱정, 의식 걱정, 돈 걱정, 집 걱정 등 소유하면 소유로 인해 걱정거리가 끊이지 않는다. 이렇듯 부자라고 하더라도 근심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또한 빈궁하고 못난 사람들도 늘 가난에 찌들려 걱정한다. 논밭이 없으면 땅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하고, 집이 없으면 집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하고, 가축이나 재물, 노비가 없으면 그것이 있었으면 하고 걱정한다. 이렇듯 하나가 있으면 다른 하나가 결여되고,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결여하여, 이같이 살아가므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온갖 재물과 욕망만을 탐하고 있다. 『아미타경』
있으면 있기 때문에 괴롭고, 없으면 없기 때문에 괴롭다. 그러나 있고 없음의 집착을 놓으면 있으면 있어서 즐겁고, 없으면 없어서 즐겁다. 어리석은 이는 집이 있으면 집 때문에 괴롭고, 자식이 있으면 자식 때문에 괴로우며, 돈이 있으면 돈 때문에 괴롭지만, 지혜로운 이는 집이 있으면 집이 있어서 좋고, 집이 없으면 집이 없어서 좋으며, 자식이 있으면 자식이 있어 좋고, 자식이 없으면 없어서 좋다. 이 세상 그 어떤 일도 좋고 나쁜 양 면은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어느 쪽을 보느냐에 달려 있다. 불교는 무조건 무소유에만 치우친다거나, 돈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자식도 버릴 것만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돈이 있고, 집이 있고, 자식이 있고, 소유한 바가 있다면 그것도 좋다. 다만 거기에 집착해 그로인한 번뇌에 시달리며, 쓸 때 쓸 줄 모르고, 나눌 때 나눌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소유하고 있지만 그 소유에 집착하면 그로인한 온갖 괴로움이 뒤따르고, 소유하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 소유에 온갖 지혜와 복덕이 깃든다. 불교는 있다면 있어서 좋고 없으면 없어서 좋을 수 있는, 어느 쪽이라도 자족으로써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다. 그러나 너무 있음에만 치우치는 사람들의 마음에 없음이라는 미덕, 공(空)과 무(無)의 지혜를 심어주기 위해 무소유를 가르치는 것일 뿐이다. 사고가 부정적인 사람은 늘 나쁜 것만 보기 때문에 항상 괴롭지만, 긍정적이며 밝은 사람은 좋은 면만 보기 때문에 항상 즐겁다. 그 어떤 상황도 거기에는 장점이 있고, 우리에게 도움 되는 면이 있다. 바로 그 점을 보라.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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