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12강-

멸성제와 도성제

(3) 멸성제 -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멸이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하며, 흔히 ‘열반’이라 표현합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의 원인인 온갖 번뇌의 불길이 모두 꺼진 상태, 즉, 고가 소멸된 상태입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한다면, ‘최고의 행복’, ‘절대적 행복’ 의 경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멸성제는 사성제의 집성제와 반대되는 경지입니다. 집성제는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을 고찰해 십이지분을 거슬러 올라가 보니, 그 근본원인이 무명(無明)이라고 관찰한 것입니다. 이를 차례 차례로 바른 방향으로 관찰하는 것을 순관(順觀)이라 합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도 없고[無無明], 나아가 늙고 죽음도 없다[無老死]’고 한 것은 바로 이 유전문의 이치에 대한 부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근본불교에서 이렇게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설명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에서는 이것도 없다고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멸성제)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불교는 현상계가 ‘괴롭다’ 라고 하여, 그 원인을 밝히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을 두지는 않습니다. 즉, 괴로움의 원인을 밝힌 것은, 그 원인을 제거하여 괴로움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작업일 뿐입니다. 어쨌든 괴로움의 원인을 십이연기의 유전문을 통해 살펴보면, 그 근본 원인인 무명에서부터 차례로 하나씩 지분을 소멸시켜 나가는 환멸문[역관(逆觀)]을 통해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노병사의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생(生)을 멸해야 하고, 생을 멸하기 위해 그 원인인 유(有)를 멸해야 하고, 유를 멸하기 위해 취(取)를 멸해야 하고……. 이렇게 해서, 결국에는 무명(無明)을 멸하면 괴로움의 모든 고리가 풀려서 괴로움의 소멸인 열반의 상태까지 다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십이연기의 환멸문(還滅門)’이라 하며, 이렇게 관찰하여 열반의 상태로 다다르는 관법이 바로 역관(逆觀)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어리석음이 다함도 없고, 나아가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다’란 말은 바로 이 ‘십이연기의 환멸문도 사실은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멸성제에 대해 조금 더 부연합니다.

열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고,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합니다. 후자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하는데,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苦)가 모두 소멸된 열반의 경지입니다.

(4) 도성제 - 괴로움 소멸의 실천에 대한 진리

도성제는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로서, 열반에 이르는 길입니다. 이 도성제는 괴로움을 멸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그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이것은 ‘중도(中道)’라고도 부르는 것으로, 양극단을 떠난 길입니다. 즉, 지나치게 쾌락적인 생활도 아니고, 반대로 극단적인 고행 생활도 아닌, 몸과 마음의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상태의 길을 말합니다. 『소나경』은 이러한 중도에 대한 좋은 비유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소나야, 너는 집에 있을 때 비파를 잘 타지 않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파 줄을 너무 강하게 죄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면 비파 줄을 아주 느슨하게 하면 소리가 잘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그와 마찬가지로 노력도 너무 지나치면 마음의 동요를 가져오고, 너무 느슨하면 나태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군형을 유지해야 한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소나 존자는 세존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마침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거문고 줄이 지나치게 팽팽하거나, 지나치게 느슨하면 좋은 소리가 날 수 없고, 가장 좋은 소리를 위해서는 그 줄이 적당한 상태를 유지해야 하듯이, 열반을 얻기 위한 수행의 길 또한 극단적인 상태를 피하고, 중도를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중도를 구체적으로 말한 것이 바로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의 ‘정(正)’이 바로 중도의 ‘중(中)’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팔정도의 ‘정’과 중도의 ‘중’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덟가지 바른 길’이라고 할 때의 ‘바른’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 또 중도의 중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중도라고 하여 그저 단순히 ‘중간’ 정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한 ‘바른 길’이라고 했을 때도 도대체 무엇이 바른 길이냐 하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중’과 ‘정’의 의미는 앞서 설명했던, 불교 근본 교설인 연기와 공, 삼법인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중도란 적당히 중간의 길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 모든 대상은 고정된 실체 없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며 다만 인연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존재이므로 텅 비어 있다는 온전한 자각에서 오는 실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인연 따라 잠시 모였다 흩어지는 텅 빈 존재라면 어느 한 쪽을 택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좋다거나 싫다거나, 선하다거나 악하다거나 하는 치우친 견해를 내세울 수 없게 됩니다. 팔정도에서 바른 길이라는 것도 연기와 무아, 공에 입각한 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견이라고 했을 때 어떻게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인가 하면, 보되 실체적인 어떤 것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다만 인연 따라 생겼다가 흩어지는 것임을 바로 보라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는 것으로 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도와 팔정도의 실천은 곧 연기와 공과 삼법인의 실천인 것입니다. 뒤에서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고 『잡아함경』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리불의 옛 친구가 물었다.

“사리불이여, 왜 세존과 함께 청정한 수행을 하는가?”

“벗이여,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이다.”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는가?”

“길은 있다. 그 길은 팔정도이니, 정견・정사・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이 그것이다.”

1) 팔정도(八正道)

① 정견(正見) - 바른 견해

정견은,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나다’ 하는 아상 없이,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없이 사물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불교의 진리인 연기의 진리를 올바로 깨달아 사성제의 진리를 여실히 보는 것을 말합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견해이며, 연기적으로 보는 견해이고,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텅 빈 시선으로 보는 견해이며,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견해로 보는 것입니다. 정견은 나머지 일곱 가지 정도의 실천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궁극인 지혜의 견해라 하겠습니다.

② 정사(正思) - 바른 생각

정사는 바른 생각, 사유, 즉, 바르게 마음먹는다는 뜻입니다.

생각할 바와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을 마음에 잘 분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가 미리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그 생각이 바르게 되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른 생각을 통해, 바른 행동, 바른 말, 그리고 바른 생활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정어(正語) - 바른 말

바른 구업을 의미하는 것으로,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을 행하지 않고, 진실되고 부드러워 화합하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으로 짓는 네 가지 악업이란, 거짓말・잘못된 말인 망어(妄語), 아부・아첨하는 말인 기어(綺語), 이간질하는 말인 양설(兩舌), 욕설 등의 험악한 말인 악구(惡口)를 말합니다. 요컨대, 삼업(三業) 중 구업을 올바로 짓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 정업(正業) - 바른 행동

바른 신업(身業)을 말하는 것으로, 몸으로 짓는 세 가지 선한 행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등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 업에도 유루(有漏)와 무루(無漏)가 있습니다. 유루의 업은 번뇌가 있는 행위라는 뜻으로, 아상에 기초한 행동이며 탐, 진, 치 삼독심에 의하여 형성되는 것이므로 그 과보를 반드시 받게 되는 업을 말합니다. 무루의 업은 아상이 모두 사라져, 번뇌가 소멸되고 탐진치 삼독심을 벗어난 행위이므로, 이것은 과보를 받지 않는 수승한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⑤ 정명(正命) - 바른 생활

정명은 몸으로는 청정한 행위를 하고, 입으로는 청정한 말을 하고, 뜻으로 청정한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십선업을 닦는 생활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정사유, 정어, 정업이 삶 속에서 드러나는 생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바른 직업을 가지고, 올바른 생활을 통해 올바른 의, 식, 주를 영위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⑥ 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

정진은 ‘노력한다’는 의미로, ‘끊임없이 노력하여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연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목표를 향해 쉬지 않고 부지런히 실천해 가는 힘입니다. 물론, 나쁜 방향으로 정진해서는 안 되며, 정진은 항상 선한 것을 바르고 둥글게 키워나가기를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⑦ 정념(正念) - 바른 관찰

올바른 통찰, 관찰이라는 의미로서, 신체의 움직임, 좋고 싫은 느낌, 마음의 온갖 분별,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놓치지 않고 잘 관(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근본불교의 핵심적 수행방법인 사념처(四念處) 수행이며, 요즈음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위빠사나 수행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따로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⑧ 정정(正定) - 바른 선정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키는 것으로, 평상시 산란하고 복잡한 번뇌・망상・분별심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집중력을 말합니다.

마음을 순일하게 하여 삼매(三昧)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키는 정신집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定)을 닦는 구체적인 방법이 선(禪)이므로, 이 둘을 합해 선정(禪定)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의 참선도 이 정정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삼학(三學)

이상에서 살펴본 팔정도는 불교 수행의 세 가지 핵심인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발전시키고 완성하는 것을 돕습니다. 따라서,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을 중도설에 입각하여 세분하여 구체화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를 의미하며, 이러한 계행을 통한 올바른 생활을 바탕으로 올바른 수행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정(定)으로,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수행을 통하여 밝은 지혜를 증득할 수 있으니, 이것이 혜(慧)이며, 정견(正見)과 정사(正思)가 여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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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강해 -11강-

사성제와 십이연기(2)

 

 

1) 무명(無明)

 

말 그대로, ‘밝음이 없는 상태’를 이르는 것입니다. 지혜가 밝음이라면 밝음이 없는 상태인 어둠은 바로 ‘무지하여 어리석은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자세히 말하면, 연기의 진리를 모르기에 실재하지 않는[無我] 일시적[無常]인 존재에 대해 실재한다고 상을 짓고,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제법의 일시적인 형체를 ‘나다’, ‘너다’ 라고 집착하여 괴로워하는 상태가 바로 무명입니다. 한 마디로 ‘진리에 대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명은 번뇌를 낳는 근본 원인이며, 이로 인해 갖은 악업을 짓고, 그로 인해 괴로움의 업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2) 행(行)

 

이상과 같은 근본무명으로 인해, 그것을 연하여 ‘행(行)’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명에 의해 집착된 대상을 실재화(實在化) 하려는 작용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행은, ‘행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것은 또한 업(業)이라고도 합니다. 업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신업(身業), 구업(口業), 의업(意業)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날이 우리가 하는 생각, 말, 행위 하나 하나가 모두 그저 흘러가서 없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나를 형성하는 힘이 되어 나 자신에게 뿐 아니라 모두에게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파불교에서는, 이 연기설에 업(業) 사상을 결합하여, 삼세양중인과설을 제시하고, 업감연기설(業感緣起說)을 전개하였습니다. 업감연기설에 의해서 보면, 무명(無明)과 행(行)은 과거세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즉, 과거에 어리석은 마음[無明]으로 인해 행(行)을 지어, 그 행위, 업력에 의해 이번 생에 윤회를 하여 몸을 받아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3) 식(識)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습니다. 식은 인식작용으로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의 여섯 가지 식(識)이 있습니다.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제각각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을 느끼고, 촉감하고, 생각하는 것에 따라 인식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예전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 경험, 행위(行)로 인해 지금 그 음식을 보면 그 음식에 대한 각종의 인식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즉, 전에 보고[眼], 먹고[舌], 냄새 맡았던[鼻] 행이 아직도 잠재의식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지금 그 음식을 보면 예전에 보았던 것에 대해 인식(眼識)하며, 냄새 맡았던 식[鼻識], 먹어보고 느낀 식[舌識]을 떠올려, 식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행을 조건으로 해서 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부파불교의 업감연기의 해석으로 살펴봅시다. 앞에서 과거세의 무명과 행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행위에 의해 개체(個體), 즉 우리의 몸이 형성되면 그곳에 식(識)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식별’, ‘인식’이라고 해석됩니다. 몸이 형성되자 우리는 무의식적인 습(習)으로 그곳에 ‘나다’ 하는 아상(我相)을 짓고, 따라서 ‘나다’ 라는 생각으로 인해 거기에 분별하는 인식작용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업감연기의 설에서 보면, 인간이 이 생에서 몸을 받자마자 그 업력으로 인하여 인간의 몸에 여섯 가지 기관[六根]이 생기고, 그 기관에서 제각각의 식별[六識]을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안, 이, 비, 설, 신, 의식의 여섯 가지 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러한 여섯 가지 식이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 몸에 인식할 수 있는 감각기관과, 인식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 의근의 육근(六根)과,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경(六境)이며, 이것을 표현한 것이 십이연기의 네 번째인 명색[육경]과 다섯 번째의 육입[육근]인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식, 명색, 육입은 따로 따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 항목은 시간적으로 선후 관계가 아닌 동시적인 것입니다.

 

4) 명색(名色)

 

색은 물질적인 것을 가리키고, 명은 비물질적인 것을 가리킵니다. 인식의 대상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도 포함합니다. 명색이란 우리의 주관적인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색, 성, 향, 미, 촉, 법의 육경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육경 중 정신적인 것이라 함은, 여섯 번째 의식의 대상인 법경(法境)을 말하는 것인데, 의식의 대상인 정신적인 생각 등을 말합니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명색을 오온이라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색은 물질적인 것이고 수상행식은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이연기에서는, 오히려 오온보다는 육경을 명색으로 정의하는 것이 세 번째 식(識)과 다섯 번째 육입(六入)과 연관지어 설명할 때 더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육입(六入)

 

육입은 육처(六處)라고도 하며, 눈, 귀, 코, 혀, 몸, 뜻의 여섯 가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을 말합니다. 앞의 장에서 일체의 구성을 십팔계로 살펴보았습니다. 앞의 식, 명색, 육입은 바로 이 십팔계(十八界)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체의 구성요소인 십팔계는, 어느 것이 먼저이고 나중이라고 할 것 없이, 인간의 주관인 감관[육근 = 육입]과, 그 감관에 대응하는 대상[육경 = 명색], 그리고 그 두 가지가 만날 때 필연적으로 생기는 인식작용[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6) 촉(觸)

 

육입을 연하여 촉이 있게 되는데, 이 촉(觸)은 ‘접촉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촉은, 여섯 감각 기관인 안이비설신의의 육근과, 그 대상인 색성향미촉법의 육경이 만나는 것이지만, 단순히 육입이 육경과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접촉으로 인해 육식이 일어나는 것까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식, 명색, 육입이 서로 화합하는 작용을 바로 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성유경』에서는 “근(根), 경(境), 식(識)의 세 가지 요소가 모여서 촉(触)을 만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삼화성촉(三和成觸)이라고 합니다.

 

7) 수(受)

 

수는 감수작용(感受作用)으로, 달리 말해 ‘느낌’을 말합니다. 식, 명색, 육입이 서로 만나게[觸] 되면, 그 다음으로 느낌[受]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느낌이 있으니, 첫째는, 고수(苦受)라고 하여 대상과의 접촉을 통해 느끼는 괴로운 느낌이고, 둘째로, 낙수(樂受)라고 하여 즐거운 느낌을 말하며, 셋째로, 사수(捨受), 혹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라고 하여 괴로움과 즐거움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그런 느낌을 말합니다.

이쯤에서,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무명과 행이 과거세의 두 가지 원인이 되었음을 말했는데, 그러면, 그 과거세의 두 가지 인의 결과는 무엇일까? 바로, 현재세의 결과로, 식, 명색, 육입, 촉이 그것입니다. 다시 말해, 과거세에 어리석음[無明]으로 인해 업[行]을 지었고, 그로 인해 현세에 인간의 감각기관이 생기고[六入], 그에 따른 대상이 생기며[名色], 그 두 가지가 만나 인식작용[識]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지는 작용을 촉(觸)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네 가지는 현재세의 결과라고 합니다. 이를 시간적으로 따져 본다면, 식(識)이란, 처음으로 어머니의 태 속에 들어가는 단계이며, 명색(名色)은 아이가 어머니 태속에 있을 때 심신(心身)이 점차로 발육하기는 해도 아직 오관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와 같은 것이고, 육입(六入)은 심신이 완전해서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가 모두 갖추진 상태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촉(觸)은 어린 아기가 출생한 후 외계에 접촉함을 말한다고 합니다. 생후 두세 살까지는, 육근으로 육경과 접촉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 현생을 살아가며, 죽기 전까지는 항상 식, 명색, 육입, 촉의 작용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므로, 위에서의 동시적이란 설명과 함께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8) 애(愛)

 

수(受)를 연하여, 애(愛)가 발생합니다. 애(愛)란, 앞서 수(受)에서의 좋고 싫다는 느낌이 더욱 깊어진 상태로, 좋은 것을 취하려 하고, 싫은 것은 멀리하려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즐거움의 대상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려는 욕심이므로 욕망, 갈애(渴愛)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것에 대한 애착심 뿐 아니라, 싫어하는 것에 대한 증오심도 애(愛)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욕심의 욕망, 빛깔의 욕망, 빛깔이 없는 욕망”라고 하여 세 가지의 욕망을 이야기합니다. 그 첫째는, 욕심의 욕망[욕계(欲界)의 욕망]으로, 이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욕심을 다 충족시키려는 것이고, 둘째로, 빛깔의 욕망[색계(色界)의 욕망]이란 물질을 한없이 갖고 싶고, 이성을 한없이 사랑하고 싶은 욕망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해 취착(取着)하고자 하는 욕망이며, 셋째로, 빛깔이 없는 욕망[무색계(無色界)의 욕망]이란 물질도 갖고 싶지 않고, 이성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욕망으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 중에는, 죽을 때 본능적으로 나타나는 세 가지 애착심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체애(自體愛)라 해서, 자신의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고, 둘째로, 경계애(境界愛)라 하여, 사랑하는 사람, 자식, 부모, 재산, 명예 등 내 주위 경계에 대해서 애착을 나타내는 것이며, 셋째로, 당생애(當生愛)라 하여, 다음 생에 좋은 세상에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는 애착심입니다.

 

9) 취(取)

 

애(愛)를 연하여 취(取)가 일어나는데, 이는 취하고자 하는 행동으로, 욕망에 의해 추구된 대상을 완전히 자기 소유화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취착(取着)’이라고 하여, 취하여 집착하는, 올바르지 못한 집착을 말합니다. 앞의 욕망이 커지면서 발생하는, 강렬한 애착심을 말합니다. 즉,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감각 작용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아상(我相)이 극대화되는 것이지요.

취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취(欲取)로서, 다섯 가지 욕망, 즉, 재물욕, 성욕, 음식욕, 명예욕, 수면욕과, 색, 성, 향, 미, 촉의 다섯 가지 대상에 대하여 집착하여 갖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이로 인해, ‘내 것이다’ 라고 하는 소유욕의 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견취(見取)로, 그릇된 의견, 사상, 학설에 얽매여 고집하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쌓여 자기 주장만을 옳다고 내세우고 취하려는 욕망입니다. 이로 인해, ‘내가 옳다’ 라는 아상이 생기는 것입니다. 셋째는, 계금취(戒禁取)로, 사람들의 그릇된 행동을 청정하고 올바른 행위라고 생각하여 그들을 따르려는 것으로서, 올바른 계율을 범하려고 하는 욕구를 말합니다. 이것은 몸뚱이에 대한 착으로 인해 몸뚱이를 편하게 하고자 하는 욕구를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아어취(我語取)로, 내 견해, 내 말만 옳다고 집착하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총체적인 아상을 이르는 것이지요.

 

10) 유(有)

 

취를 연하여 유(有)가 있습니다. 유(有)라는 말은 생사하는 존재 그 자체가 형성되는 것으로, 이 또한 ‘업(業)’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착하여 취하려 하므로 그에 따른 행위, 즉 업이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지분에서 나온 행(行)도 업이라고 했으니, 이 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행은 그 원인이 무명으로, 어리석음으로 인해 생기는 보다 근본적이고 소극적인 업이라고 한다면, 이 유(有)는 애(愛)와 취(取)를 조건으로 해서 생기는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행은 태초에 처음 무명으로 인한 한 생각이 일으킨 근본 업(業)이며, 유(有)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보편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파불교의 삼세양중 업감연기에서는, 앞의 세 가지 애(愛), 취(取), 유(有)가 현재생의 세 가지 원인으로 작용하며, 이 결과로 미래의 두 가지 결과인 생(生), 노사(老死)를 초래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현재 살아가면서 애착하고 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업(有)을 낳고, 그 업력으로 인해 다음 생(生)을 받게 되며, 자연히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11) 생(生)

 

유(有)에 연하여 생(生)이 발생하는데, 생은 말 그대로 태어난다는 의미입니다. 유를 업이라고 했으니 그 업력에 의하여 생(生)을 받는 것은 당연한 귀결입니다. 앞에서 고(苦)를 설명할 때 노병사의 근본 원인이 바로 생에 있음을 언급하였습니다. 이처럼 생이 바로 노병사의 시발점인 것입니다.

 

12) 노사(老死)

 

생이 있으므로, 노(老), 사(死), 우(憂), 비(悲), 고(苦), 뇌(惱)가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집(集)’이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인생이 괴로움임을 여실히 보시고, 그 원인을 하나 하나 살펴보신 것입니다. 그 결과 궁극의 괴로움의 원인은 무명(無明)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 근본무명으로 인해 한 생각 잘못 일으킨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근본을 끊으려면 밝은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명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는 하지만 나머지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모두가 생로병사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이연기의 지분 중에서 괴로움의 가장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애(愛), 취(取), 유(有)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번뇌(煩惱)’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번뇌의 종류는 108 가지나 된다고 하지만, 그 근본원인은 무명에 있는 것임을 올바로 일러주는 교설이 바로 ‘십이연기설’의 교설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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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강해 -10강-

사성제와 십이연기(1)

 

 

부정의 논리에 대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앞서 근본불교의 중요한 교설인 오온과 십이처, 그리고 십팔계를 부정하여 공 사상을 천명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반야심경에서의, 부정을 통해 공을 드러내는 논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어 근본불교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교설을 차례로 모두 부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십이연기와 사성제를 부정하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일체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부정하고, 이어 현상계의 법칙인 연기법을 통해 현상계의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차례로 섭렵하는 내용인 십이연기를 부정하고 있으며, 마지막으로, 근본불교의 모든 교설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인 사성제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논리의 구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부처님께서는 오직 현상계의 올바른 중도적 관찰[조견]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십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교설은 모두가 현상계, 일체, 제법, 현실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앞에서 ‘조견’을 설명할 때 살펴본 바를 참고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 반야심경에서 오온과 십이처, 십팔계를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 현상계 일체제법의 법칙[연기]과 속성[삼법인], 존재방식[업과 윤회], 그리고 이 모든 교설의 총설인 사성제를 설명하기에 앞서, 당장 현상계, 일체, 제법이 무엇인가를 관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즉, 현실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아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하여, 그러한 구조로 이루어진 현상계에 대한 여타의 관찰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반야심경에서는 우선적으로 현상계의 구조인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먼저 부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 다른 모든 교설에 대해 각각을 부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십이연기, 사성제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십이연기를 먼저 다룬 것은 사성제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즉, 사성제의 두 번째 성스러운 진리이며,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한 원인의 진리인 집성제를 알기 위해서는, 십이연기를 알아야 하기에 우선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일체의 구조에 대한 관찰을 하고, 십이연기의 교설을 통해 기초 작업이 끝나면 본론격인 진리, 즉 사성제에 대한 부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 고리를 염두에 두고,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부정을 통한 참 진리의 드러냄에 대하여 살펴보아야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염두에 두고 지나갈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반야심경에 나온 부정은, 부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며,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언급하신 교설로의 진정한 회귀를 위하여 방편상 부정의 논리를 이용하고 있는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임은 물론입니다.

그러면, 십이연기, 사성제가 부정되는 반야심경의 경구를 살펴보기에 앞서, 근본불교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십이연기, 사성제의 이치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성제와 십이연기

 

부처님의 교설을 체계화시키고, 그 실천법에 대하여 설해놓은 교설이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입니다. 경전에서는,

비구들아, 모든 동물의 발자국은 다 코끼리의 발자국 안에 들어온다. 그와 같이 모든 법은 다 네 가지 진리에 포섭된다. 그 네 가지란 무엇인가?

괴로움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이다.

 

“마라가야,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다고 하자. 그때 이웃들은 급히 의사를 불러 왔다.

그런데, 그는, ‘나를 쏜 자는 누구일까? 나를 쏜 활은 어떤 활일까? 또 그 활은 어떤 모양일까?’

이런 것을 알기 전에는 화살을 뽑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는 어떻게 되겠는가?

마라가야, 그는 알기도 전에 죽고 말 것이다.

마라가야, 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인간은 죽은 다음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해결된다 하더라도 인생의 괴로움은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현재의 삶 속에서 괴로움을 소멸시켜야 한다.

마라가야, 내가 설하지 않은 것은 설하지 않은 대로, 설한 것은 설한대로 받아들여라.

그러면 내가 설한 것은 무엇인가?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라고 나는 설했다.

왜 나는 그것을 설했는가? 그것은 열반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은, 마치 코끼리의 발자국이 다른 모든 동물의 발자국을 포용하듯이, 불교의 다른 모든 가르침을 포괄하는 가르침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불교의 모든 교설은 이 사성제와 팔정도의 가르침에 포함되며, 이 가르침이야말로 부처님의 교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정리, 포괄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후, 다섯 사람의 수행자에게 처음 가르침을 펴신 초전법륜(初傳法輪)에서 처음으로 설하신 진리가 바로 사성제와 팔정도의 교설입니다. 이 가르침은, 진리를 설함에 있어, 상당히 논리적이며, 실천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성제의 구체적 내용은,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입니다.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는 연기(緣起)의 이치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중에도 십이연기의 가르침을 통해 괴로움의 원인인 집성제와, 괴로움의 소멸인 멸성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므로, 사성제는 곧 십이연기를 실천적으로 제조직한 교설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 부터는 사성제와 십이연기의 교설을 함께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고성제 - 괴로움에 대한 진리

 

불교는 지극히 현실적인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총설이라고 할 수 있는 사성제(四聖諦) 교설의 첫 번째 성스러운 진리는, 현실, 현상 세계에 대한 관찰과, 그 관찰을 토대로 한 현실의 판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가만히 관찰해 보고는, ‘괴롭다’ 라는 판단을 내린 것입니다. 이렇게 현상의 세계를 ‘괴롭다’ 라고 하니, 혹자는, 불교는 허무주의에 빠져 있다고 극단적인 결론을 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로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는,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얻어낸 결론인 것입니다.

다른 것은 제치고라도, 죽음의 고통을 봅시다. 우리는 마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들 모두는 반드시 죽게 마련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나의 주위에서 겪어 보지 않고서는, 절실히 느끼기가 힘듭니다.

내 부모님, 자식, 친구, 친지의 죽음을 직접 겪어 본 사람은, 죽음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죽음은 당연히 괴로움이라고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을 가정해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괴로워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음을 당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시한부 인생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한가지 절대불변의 현실만을 관찰하더라도, 우리의 현실은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음만을 놓고 보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괴로움은 죽음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드는 것도 괴로움입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 싫어하는 대상과 만나야 하는 것, 구하고자 하지만 얻지 못하는 것, ‘나다’ 하는 상에서 오는 것, 즉, 오온이 치성한데서 오는 괴로움 등이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사고팔고(四苦八苦)라고 합니다. 이러한 괴로움에 대해서는 이미 ‘도일체고액’을 살펴보면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좋을 것입니다.

 

(2) 집성제 -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진리(십이연기의 유전문)

 

앞에서 집성제는,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그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가르침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현실에 대한 여실한 통찰을 통해, 현실을 괴롭다고 파악했으면,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규명해 보아야 한다는 당연한 순서입니다.

앞에서, 괴로움이란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항상하지 않고, 고정되지 않은 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서로 모이고 쌓여 일어나기에, 한 번 생겨난 것은 반드시 멸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노병사의 괴로움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하여 고요히 일체의 경계를 여실히 보시고는, 그 원인이 생(生)에 있음을 아셨습니다. 태어났기에 노병사(老病死)의 괴로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의 원인은 무엇인가를 살펴보니, 욕계, 색계, 무색계라는 삼계의 생사 윤회하는 테두리인 유(有)로 말미암는 것임을 아셨고, 그 원인은 다시 어떤 대상에 집착하는 취(取)에 있음을 아셨고, 또 그 원인은 애(愛), 그리고 그 원인은 수(受) ……. 이렇게 하나 하나 그 원인을 고찰해 올라가다 보니, 결국에는 무명(無明)이 생로병사의 근본 원인임을 여실히 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이연기이며, 십이연기의 유전문(流轉門)이라고 합니다.

집(集)이라는 말은 ‘집기(集起)’ 라고 번역할 수 있는데, 이는 ‘모여서 일어난다’ 는 뜻으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입니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로써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 하나 고찰해 본 것입니다.

십이연기설에서는, 무명으로 인해서 노병사의 괴로움이 생함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노병사라는 근본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씩 고찰해 들어가 보니 결국 근본 원인은 무명이라고 깨달은 바를 ‘십이연기의 유전문’이라고 부르며 이런 유전문을 관하는 것을 일어나는 대로 순차적으로 관한다고 하여 순관(順觀)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십이연기의 유전문이란 사성제의 고성제에 대한 원인을 살펴본 교설로써 고성제에 대한 원인인 집성제를 살펴보는데 사용된 교설이라 할 것입니다. 다시말해 십이연기의 유전문이 바로 사성제의 집성제의 바탕이 되는 교설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십이연기의 유전문[순관]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십이연기의 해석 방법은, 근본불교의 전통적인 해석법이 있으며, 부파불교로 오면 이러한 근본불교의 해석 방법에 업과 윤회 사상을 대입하여 해석한 삼세양중인과의 업감연기를 통한 해석법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우선 근본불교의 해석 방법을 경전을 토대로 하여 살펴보고, 그 뒤에 부파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차례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경의 설명을 보겠습니다.

그때, 세존은 우루벨라 마을 네란자라 강가의 보리수 아래서 비로소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한 번 가부좌를 하신 채 7일 동안 삼매에 잠겨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셨다.

그러던 중, 초저녁에 연기를, 일어나는 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대로 명료하게 사유하셨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행이 있고, 행으로 말미암아 식이 있고, 식으로 말미암아 명색이 있고, 명색으로 말미암아 육처가 있고, 육처로 말미암아 촉이 있고, 촉을 말미암아 수가 있고, 수로 말미암아 애가 있고, 애로 말미암아 취가 있고, 취로 말미암아 유가 있고, 유로 말미암아 생이 있고, 생으로 말미암아 노・사・우・비・고・뇌가 생긴다.

이리하여 모든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면 다음 장에서부터는 본격적으로 무명부터 노병사에 이르기까지의 십이연기의 유전문, 즉 순관을 구체적으로 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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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강해 -9강-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이 장에서부터는, 서두에서 다루었던 오온(五蘊)을 비롯하여, 십이처, 십팔계, 십이연기, 사성제 등 근본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교설에 대해, 대승의 공 사상이라는 큰 진리 속에서 모두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로 알아야 할 것은, 이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교설을 부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가르침의 본질적인 면에서 볼 때, 전체가 하나로 통일, 통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대와 상황이 바뀜에 따라 그 상황에 맞도록 방편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스승이 제자를 지도할 때, 제자의 근기(根器)에 따라, 성품에 따라 가르치는 방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예컨대, 비난을 들었을 때 기분 좋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제자에게는 잘못된 점을 지적하기보다는, 잘 하고 있는 점을 칭찬해 줌으로써 더욱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지도할 수 있을 것이며, 본인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줌으로써 올바르게 고쳐 나아갈 수 있는 제자라면 마땅히 잘못된 점을 하나 하나 지적해 주어 스스로 고쳐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전자의 방법이 긍정을 통한 교육이라면, 후자의 경우는 부정을 통한 지도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 진리를 나타내는 방법도 두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진리의 가르침에 대해서 하나 하나 자세하게 설명을 해 주어 진리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도록 하는 긍정적인 방법이 있고, 다른 방법은 공이라는 부정을 통해서 진리가 스스로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후자의 방법이 대승의 공 사상인 것입니다. 결국 추구하고자 하는 진리에로의 귀결은 한결같은 것입니다.

반야심경의 서두에서 핵심 사상을 나타낼 때, 이미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두에 나오는,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란, 공의 세계에서 오온[색수상행식]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금 부정의 논리로 나타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장에서부터 십이처와 십팔계의 부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십이처란, 안근(眼根)[눈], 이근(耳根)[귀], 비근(鼻根)[코], 설근(舌根)[혀], 신근(身根)[몸], 의근(意根)[뜻, 마음] 의 여섯 감각기관[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여섯 개의 대상[육경(六境)], 즉 색경(色境)[빛깔과 모양], 성경(聲境)[소리], 향경(香境)[냄새], 미경(味境)[맛], 촉경(觸境)[촉감], 법경(法境)[생각, 마음의 대상]을 합친 것을 말합니다.

이 십이처설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현상에 대한 인식의 구조와 한계를 제시한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관점입니다. 여기에서 근(根)이라 하면, 기관 이외에 그 기능까지를 포함합니다. 예를 들면, 안근은 눈과 눈의 보는 기능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눈[안근]으로 빛깔과 모양[색경]을 볼 수 있고, 귀로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느끼며,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이는 모든 정신 작용[식(識)]이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들 주관계의 감각기관과, 객관계의 대상이 서로 만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십이처의 분류법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분류법으로, 인간의 인식 능력을 대상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나’라고 하는 주관적 존재와, 내 외부에 나타나는 객관세계를 합쳐 일체(一切)라고 하는 것이며, 이것을 육근(六根), 육진(六塵)이라고도 합니다. 육근이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주관적 인식기관은 외부의 객관 대상을 인식하는 의지처가 되므로, 그 근본이 된다고 하여, ‘근(根)’이라 하였고, 빛과 소리, 냄새, 맛, 촉감, 생각 등의 객관 대상(六境)들은 우리의 깨끗한 마음을 더럽히고 미혹되게 하기에, ‘진(塵)’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이처’의 교설 또한 ‘오온무아’에서처럼, 근본불교 ‘무아’의 교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기에 항상 변화하며,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 또한 계속해서 들리지는 않습니다. 냄새도 마찬가지로 인과 연이 화합하여 잠시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맛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몸의 감촉 또한 항상하지 않으며, 우리의 생각들도 어디에선가 잠시 왔다가 잠시 후면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이렇듯 여섯 개의 대상, 육경은 항상하지 않으며, 우리 몸의 주관적 인식기관인 육근 자체도 우리가 죽으면 또한 사라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렇듯, 육근과 육경은 항상하지 않는 것이며, 항상하지 않아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의 모임인 일체, 즉 십이처도 또한 항상하지 않고, 그러므로 딱히 잡아, ‘나다’ 라고 할만한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근본불교 교설인 십이처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일체인 십이처는 항상하지도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인과 연이 모이면 존재를 형성하고, 인과 연이 다하면 존재를 파괴하도록 만드는 연기의 법칙에 지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으며, 차별의 세계를 초월하여 무분별(無分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공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라는 말로써 육근과 육경[육진(六塵)]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과 육경, 즉 십이처를 부정함으로써 공(空)의 참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는 근본불교에서 말하는 십팔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십팔계(十八界)란 인간의 주관적 감각기관의 요소인 안계, 이계, 비계, 설계, 신계, 의계와 객관적 대상의 요소인 색계, 성계, 향계, 미계, 촉계, 법계, 그리고 감각기관과 그 대상이 서로 만날 때 나타나는 인식작용인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란 십팔계의 첫 번째 안계에서부터 십팔계의 마지막 요소인 의식계까지의 열 여덟 가지 모든 요소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십팔계는, 앞에서 말한 십이처에 육식(六識)을 합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 기능을 가지고 있는 기관[육근]과, 인식의 대상[육경]과, 인식작용[육식]의 3가지 요소가 필요한 것입니다. 십이처와 십팔계가 다른 근본적인 차이는, 마음의 영역에 여섯 가지 인식을 하나로 합하여 하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가, 아니면 눈, 귀, 코, 혀, 몸, 뜻의 각각에 독자적인 인식작용을 내세우고 있는가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전자가 십이처의 의처(意處)이며, 후자가 십팔계의 여섯 가지 별개의 인식인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인 것입니다.

 

이처럼, 십팔계는 십이처에서 설명하였던 육근과 육경에 육식을 더하면 성립이 됩니다. 육근과 육경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육식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한 언급이 된다면 십팔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식을 설명하기 전에 잠시 부연한다면, 이러한 십팔계의 여섯 가지 식의 존재에 대한 연구와 함께, 마음에 대해 체계적인 연구를 거듭한 부파불교의 법에 대한 연구는 이후에 그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마음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낳았으니, 이것이 바로 유식(唯識) 사상인 것입니다. 여기서는 육식의 이해를 위해 유식 사상에 의거하여 육식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육식의 첫째는, 안근(眼根)으로 색경(色境)을 바라볼 때 나오는 마음인 안식(眼識)입니다. 불교 전문 용어를 사용하니 어려운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쉬운 말입니다. 눈[안근]으로 모양이나 빛깔[색]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좋고 싫고, 그저 그렇다고 분별하는 마음이 바로 안식입니다. 안식으로는 사물의 내면에 있는 오묘한 마음까지는 분별하지 못하며, 오직 현재 겉으로 드러나 있는 것만을 인식하는 기초적인 분별작용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안식에서는 꽃을 보면 직감적으로 좋아하고, 대변을 보면 흔연해 하지 않는 기초적인 인식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 이외에 이것이 꽃인가, 대변인가, 나아가 꽃이면 무슨 꽃인가, 그 꽃은 언제 피며, 어느 나라의 어느 지방에서 잘 자라는지 정도까지 유추해서 의식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기능을 위해서는 제6의식의 작용이 함께 해야 합니다. 이때 제6의식은 과거의 경험과 기억 등을 생각해 내고, 다른 것들과 비교 판단하며, 때로는 잘못 인식하기도 하는 등의 구체적인 인식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근(耳根)으로 성경(聲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이식(耳識)입니다. 이것은, 귀[이근]로 소리[성경]를 들을 때 느낄 수 있는, 좋고 싫은 마음의 분별[이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식의 대상은 오직 소리입니다. 소리를 유식의 용어로 하면 성경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비근(鼻根)으로 향경(香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비식(鼻識)입니다. 즉, 코로 냄새를 맡을 때 생기는 ‘좋은 냄새’, ‘나쁜 냄새’ 하는 즉각적인 마음의 분별입니다. 당연히 비근의 대상은 냄새입니다. 향이라고 하나, 향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우리가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넷째는, 설근(舌根)으로 미경(味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인 설식(舌識)입니다. 이것은 혀로 음식 등을 먹을 때 느끼는, 맛있고, 맛없고 등의 마음 작용입니다. 여기에는 다만 맛이 있고 없는 것 뿐 아니라 뜨겁고 찬 것, 달고 짠 맛, 맵고, 싱겁고, 신 맛 등, 혀로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합니다.

 

다섯째는, 신근(身根)으로 촉경(觸境)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의 작용인 신식(身識)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으로 물질을 접촉할 때 생기는 마음입니다. 신근의 대상은 촉경이라고 하여 물질계를 말하는데, 물질계란 단순히 딱딱한 물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地), 수(水), 화(火), 풍(風) 전체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근본불교 교설의 오온에서 물질인 색(色)을 설명할 때 지, 수, 화, 풍으로 설명한 것을 생각하면 쉬울 것입니다. 즉,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물질인 지(地)의 성질뿐만 아니라, 축축하거나 건조한 것 등의 수(水)의 성질도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신근의 대상이며, 무덥거나 춥고, 뜨겁거나 찬 것 등 화(火)의 성질, 그리고 호흡이나 불어오는 바람 등도 우리의 몸인 신근으로 느낄 수 있는 대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촉경의 범위는 대단히 넓습니다.

 

다시한번 정리하면, 이상 다섯 가지의 인식작용은 모두 선과 악, 좋고 나쁜 등의 직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에 대한 식별만이 가능합니다. 반면에 유식에서 말하는 제6의식은 십팔계의 의식으로서,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모두를 포함한 일체 유형무형의 모든 대상, 즉 법경(法境)을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이 6의식은 앞에서 말한 5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선 전오식은 의지처가 눈, 귀, 코, 혀, 몸 등 모두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 6의식은 순수한 정신적인 기관이 그 의지처입니다. 대상 또한 객관적인 물질계뿐만 아니라 정신적, 물질적인 모든 경계를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 여섯 가지 의식, 즉 6식이 공(空)인 연유에 대해서 살펴보는 일이 남았습니다. 앞에서 꾸준히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주관적인 감각기능은 반드시 객관적인 대상이 있어야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귀는 있지만 소리가 없다거나, 코는 있는데 대상인 냄새가 없어도 안되며, 반대로 객관계의 대상은 있지만 우리 주관계의 기관이 없다면 인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즉, 맹인이라면, 눈은 있지만 정확히 말해 안근(眼根)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안근이라는 것은 그 기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용까지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귀머거리나 벙어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육근과 육경은 항상 함께 작용하는 것이며,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해야만 육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앞에서, 육근과 육경은 항상하지 않아[무상], 고정된 실체가 없고[무아], 연기하는 존재로서, 무자성이며, 공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나아가 이 두 가지 육근과 육경이 합쳐졌을 때 일어나는 인식작용인 육식도 공하다는 것을 살펴보면, 십팔계 또한 공임이 밝혀질 것은 물론입니다.

 

왜 육식은 공(空)한 것일까? 육근과 육경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온갖 마음 작용의 뿌리는 과연 무엇일까? 육식은 육근이라는 인간의 기관에 숨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육경이라는 대상 속에 숨어 있는 것일까? 육식은 육근에도, 육경에도 숨어 있는 작용이 아닙니다. 다만 ‘접촉’, ‘결합’, ‘연관’, ‘인연’ 속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육근에도 없고, 육경에도 없는 것이 어떻게 연관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한다면, 좀 더 쉬운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는가? 절대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은 있을 수 없으며,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와 나무를 서로 연관지어 접촉을 가하면 그 인연 관계 속에서 불이 일어납니다. 나무와 나무를 서로 비벼주면 불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불은 있지 않으며, 다만 연관, 인연 속에서 불이 성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육식도 이와 같습니다. 육근에도 그렇다고 육경에도 육식은 없지만, 서로 ‘연관’되고 ‘접촉’ 됨으로 인해 육식이 연하여 일어나는(緣起)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가지고 딱히, ‘육식이다’ 라고 고정되게 말할 수 없는 것[무아]입니다. 또한, 나무를 비벼 불을 냈지만, 그 불도 인연이 다하면 꺼지게 마련이듯, 육식 또한 인연이 바뀌게 되면 사라지는 것[무상]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어떤 고정된 자아라고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의식도 항상하여 고정된 것이 아니며, 주위의 상황, 경계에 의해, 즉 인과 연에 의해 항상 바뀌는 것입니다. 이처럼 육식에도 스스로의 자성이 없기에, 무아, 무자성이며, 항상하지 않기에 무상이고, 인과 연에 의해서 생멸을 반복하므로 연기이며, 이러한 사실을 통틀어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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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심경 강해 -8강-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사리자 시제법공상

 

앞에서 반야경의 핵심 사상인 공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를 하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공(空)이란, 존재 본질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현상계에 나타나는 모든 존재의 본질을 공상(空相)이라고 하는 것이며, 그렇기에 금강경에서도 일체의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즉 공임을 올바로 본다면 여래(如來)를 보리라고 한 것입니다[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이 장에서, 일체제법은 공상이기에 불생불멸이며, 불구부정, 부증불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공의 모양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정의 논리를 통해 공의 모양을 살펴보기에 앞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법(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법이라고 하면 ‘진리’를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법에는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가 ‘진리, 최고의 실재(實在)’라는 의미이고, 두 번째가 ‘존재’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불교를 공부할 때, 언제나 법의 개념 정리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에서 ‘법(法)’도 역시 ‘존재’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해석하면, ‘이 모든 존재의 공한 모양은’이 되는 것입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태어남과 죽음, 만들어짐과 사라짐의 양극단을 부정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존재는 연기의 법칙에 의해 인과 연이 화합하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인연이 다하면 스스로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예컨대,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果]을 얻을 수 있습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물론 아닙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 화합하여 모일 때에만 불이란 결과를 생하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 소멸(消滅)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 범부의 눈으로 보면 모든 존재가 실재적 생멸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도록 가르치기 위해 가장 먼저, 생과 멸에 대해서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은 부정이 아니라 생멸이란 고정된 실체적 관념을 타파하기 위해 ‘불(不)’이란 부정의 개념을 도입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불’이란 부정의 의미라기 보다는 ‘연기’의 의미로 이해함이 옳을 것입니다. 인연생기하여 인연소멸하기 때문에 고정된 실체가 없다[不]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 ‘불생불멸’은 우리에게 존재 본성의 영원성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떠한 고정된 것이 아니며, 멸해 없어졌다고 해도 완전한 단멸(斷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인연 따라 다른 모습으로 겉모양을 바꾸었을 뿐인 것입니다. 누군가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는 슬퍼하며 인생이 허무함을 한탄하게 됩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것은 이 육체가 인연이 다해 쇠해졌기에 겉껍데기를 갈아치우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새롭고, 보다 젊고, 건강한 몸을 받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나름대로의 업에 걸맞은 껍데기를 찾아 다시 태어나는 것일 뿐입니다. 선업의 과보는 천상이요, 악업의 과보는 지옥이며, 탐욕의 과보는 아귀, 성냄의 과보는 수라, 어리석음의 과보는 축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것일 뿐이지 그 본성에 있어서는 죽고 사는 것이 아니며, 영원성을 지닌 것입니다.

좀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들은 매 순간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반복하는데, 일본 동경대학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인간은 약 7년 사이에 몸의 전체 세포가 바뀐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몸과 7년 후 내 몸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같은 ‘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렇듯 세포는 죽고 살지만, 좀 더 크게 인간을 놓고 보면 생사가 없는 것입니다.

현대물리학자들은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자를 소립자(素粒子)라 일컬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들 소립자들은 다시 수많은(300여개) 소립자들로 상호 형성되어 서로 의존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는 우주의 신비를 밝혀 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을 구성하는 실체적인 기본 입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 어떤 존재라도 고정된 실체는 아무것도 없으며 단지 수많은 인과 연들이 상호 의존함으로써, 즉 인연 화합함으로써 비로소 생멸이 결정지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를 바라볼 때, 생과 사, 유와 무를 초월하여 인연 따라 다만 흐르는 것이라는 것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바로 공성의 올바른 이해인 것입니다. 즉, 연기된 존재이기에 불생불멸이며, 그렇기에 공인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 모든 존재의 본성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하고, 무한하여 본래 생과 사가 없는 것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공의 두 번째 모양은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분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모든 존재의 본성은 절대 청정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청정’이라는 것은 더러움의 반대 개념으로서 청정이 아니라, 어느 것에도 비견될 수 없는 절대적인 청정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깨끗하다, 더럽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분별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을 할 때에는 작업복을 입으며, 의례 옷이 더럽혀질 것을 알고 있기에 어느 정도 더러워지더라도 더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맞선을 보려고 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양복을 입고 나갔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작은 잡티가 있어도 신경이 쓰이고, 더럽게 느껴집니다. 우리 마음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작업복을 입고 일을 할 때 훨씬 더 더러운 데도 말이지요. 이처럼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도 상황 따라, 인연 따라 다른 것이지, 본래 더럽고 깨끗한 고정됨이 있지 않은 법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하다는 상을 내며, 더럽다는 상을 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분별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수련대회를 진행하다 보면 초심자이신 분들이 발우공양을 하기 싫어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여쭈었더니 한마디로 ‘더럽다’는 것입니다. 음식 찌꺼기를 김치를 휘휘 둘러 숭늉으로 씻고는 다시 마시는 것에 대해 더럽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몸 안으로 들어가면 다 똑같은 음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밥상을 차려 놓고 밥을 먹고 나서 김치를 먹고 숭늉을 마시면 깨끗하고, 이것을 발우에 놓고 함께 먹으면 더럽다는 것이지요. 다만, 시간적으로 선후가 정해지면 깨끗하고, 함께 먹으면 더럽다는 것은 우리의 분별이지, 실제로 더럽고 깨끗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무언가를 판단할 때 이것과 저것을 비교하는 상대적인 분별심이 있기에, 더럽고 깨끗하다는 분별도 있는 것입니다. 더럽다고 했을 때 그것은 상대적으로 다른 것에 비해서 더러운 것이고, 깨끗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아가 이러한 더럽고 깨끗한 가치의 분별은 좀 더 넓게 확대하여 해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불구부정이란 공성의 이해는, 어떤 사물에만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있다고 분별하는 것을 없애려는 사상이 아니라, 사람의 인품이라든가, 인종, 학력, 재산, 명예 등에 있어서도 불구부정임을 올바로 깨닫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대할 때 순수하게 다가서기보다는, 온갖 편견의 색안경을 쓰고 다가서게 마련입니다. 인간의 가치를 출신 성분이나, 사회적 신분, 재산의 유무, 학력의 고저 등에 의해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태어나면서부터 못나고 잘난 것이 어디 있을 수 있으며, 청정하고 더러운 사람이 어떻게 나뉘어 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공의 바탕, 연기법의 바탕에서는 스스로 존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본래 더럽다거나 청정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 사상이야말로 영원하고 절대적인 인간 청정성의 회복이며, 인간 무죄의 엄숙한 선언인 것입니다. 존재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더러워질래야 더러워질 수 없는 절대 청정한 것입니다. 다만 현실에서 행위를 어떻게 하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인연가합(因緣加合)으로 잠시동안 귀천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숫타니파타에서는 “출생에 의해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출생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이 되고 바라문도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증불감

 

마지막으로 공의 모습은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다’는 부증불감의 속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현상계의 물질, 정신적 모든 존재는 양(量)적으로 상대적인 개념을 초월하여 무한한 존재로서 원만 구족한 성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면을 봅시다. 본래 물질에는 내 것, 네 것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이것은 내 것’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울타리를 치고 있기에, 그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 내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내 것을 누군가에게 보시하면 아깝고, 손해 보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무소유와 나눔이 오히려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라는 진리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삶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무소유를 통해 전체를 소유한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모든 존재가 가진 본성의 원만 구족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모두 행복하고, 부유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그를 부유하고 가난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과 소욕의 정신이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나다’, 혹은 ‘너다’ 하고, 너와 나를 갈라놓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아상(我相), 아집(我執) 때문에 ‘내 것’이라는 관념이 생긴 것입니다. 아상이 없는 곳에 네 것, 내 것은 없습니다. 내가 없는 마당에 어디 내 것이라는 소유 관념이 붙을 수 있겠습니까? 아상을 깨고 보면 ‘내 것’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사라졌을 때 이 우주 법계의 모든 것이 다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 백만 원의 돈이 있다고 합시다. 이 돈은 많은 돈입니까, 아니면 적은 돈입니까? 이 백만 원은 한없이 가난한 인도나 북한의 불쌍한 가정에서라면 수억 원과도 맞먹는 값어치가 있으며, 대재벌에게 있어서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몇천 원, 몇만 원과도 같은 돈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같은 백만 원이지만 인연 따라, 어떠한 이에게 주어지는가에 따라 한없는 양의 돈이 되어 늘어날 수도 있으며 반면에 줄어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의 마음에 따라, 그리고 상황에 따라 늘고 주는 것이지, 백 만원이라는 돈 자체에 어떤 증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공성의 세계에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이렇듯, ‘내 것’이라는 소유도 부증불감의 세계에서, 공의 측면에서 보면 증감이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좀 더 넓게 보아 내 것이 사라진다는 것은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좀 더 쉬운 비유를 든다면, 내가 돈 만 원을 가지고 있을 때, 오천 원을 배우자에게 준다면 내 돈은 줄어들었지만, 배우자의 입장에서는 돈이 늘어난 것입니다. 즉 ,우리 가족 전체로 본다면 부증불감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나와 배우자를 가르는 마음이 있다면 당연히 증감이 있게 마련이며, 배우자에게 오천 원을 주었을 때 괴롭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배우자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습니다. 둘은 하나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이 ‘하나’라는 생각이 있다면 부증불감이며, 내것이 없어져도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내 것이 곧 배우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하여 우리 사회 전반에 관련지어 보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회 전체를 우리의 가족처럼 ‘하나’라고 생각했을 때 , 즉 사회와 ‘나’를 가르는 마음이 없고 ‘하나’라는, ‘동체(同體)’라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에게는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사라집니다. 내 것이 바로 사회의 것이고, 사회의 것이 바로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너라는 분별심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지향점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끊어버리는 것을 수행의 궁극으로 보는 것입니다. 금강경에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상이 상이 아님을 본다면 여래를 볼 것’이라고 한 부분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이란, 바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네 가지 상을 말합니다.

사상(四相)의 기본은 아상에 있으며, 아상이 있기에 인상이 있는 것입니다. 즉, ‘나다’ 하는 상이 있기에 ‘너다’ 하고 가르는 상이 생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마음, 즉, 우리 전체가 일체로서의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늘어나고 줄어드는 개념은 사라집니다. 내 것이 줄어들면 다른 이의 것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가 나와 다르지 않거늘 무엇이 줄어들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하나’의 가르침이 바로 불교의 핵심입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했을 때, 지혜는 ‘하나’의 진리를 통찰할 수 있는 지혜를 말하며, 자비는 너와 내가 진정 ‘하나’가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실천행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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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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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리자(舍利子)


 사리자는 반야심경에서 관자재보살의 설법을 듣는 사람으로, 소승불교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즉, 사리자는 오온이 모두 공하여 실체가 없다는 참 의미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으며, 이러한 어리석음을 깨우치기 위해 관자재보살이 법을 설하고 있는 광경을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리자는 사리불(舍利弗)이라고도 하며, 범어로 사리푸트라(Sariputra)라고 하는데, 취자(鷲子)라고 번역합니다. 음을 그대로 옮기면, 사리불(舍利弗) 또는 사리자(舍利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리자는 부처님의 십대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지혜제일의 제자입니다. 최근 출판된 자이나 교의 옛 전승(傳承)인 『이시바샤임』이란 책에는, ‘붓다 아라핫트 선인인 사리불의 가르침’이라는 것이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자이나 교를 비롯한 다른 교단에서는 사리불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듯 합니다. 그만큼 사리불은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지혜가 뛰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처럼 교단에서 지혜가 가장 출중한 사리불이 반야심경에 등장하여 관자재보살로부터 반야 지혜에 대한 법문을 듣는 것은, 반야심경의 반야지혜야말로 사리불의 지혜보다 더 큰 대지혜를 의미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제부터 반야심경에 나타난 공(空) 사상의 본격적인 법문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부분,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서론의 핵심 사상인 ‘조견오온개공’의 이치를 보다 자세하고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과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는 어찌 보면 비슷한 의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말들이 만약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네 번이나 반복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앞의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모든 반야경에서 공의 이해를 위해 자주 사용되는, ‘불(不)’이라는 부정의 단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뒤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즉(卽)’을 통해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또한,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시간적 관점에서 색이 공하다는 무상을 설명했으며,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공간적 관점에서 무아를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논리의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화엄의 ‘사법계(四法界)’를 잠시 빌린다면, ‘색불이공 공불이색’은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를 그리고 있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와 그 내용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란, 지금은 물질들이 제각기의 인연으로 인해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고 이루어져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시간적으로 보면 언젠가는 인과 연이 다하여 반드시 멸하는 것이기에 공(空)하다고 결론짓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내 앞에 있는 시계, 책상, 혹은 내 사랑하는 연인 등의 물질적 색(色)의 존재도, 지금은 실재(實在)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시간이 흐르게 되면 반드시 인과 연이 다해 멸할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즉, 인연생이므로 인과 연이 다하면 공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의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물질적 개념도 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색으로서의 특성을 인정해야 하고, 지금 당장에는 공이 아니기 때문에, 부득이 부정의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색이 바로 공이라는 것은, 시계가 공(空)이고, 책상이 공이고, 애인이 공이라는 것이기에 자칫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표현에서는, 완전히 같다는 의미가 아니고 다만 다르지 않다는 것만을 의미하며, 언젠가는 다르지 않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언젠가는 공이 될 것이라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공이라는 것은, 이미 말했듯이, 연기하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스스로의 자성(自性)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다시 말한다면, 색이라는 것은 모두 연기되어진 존재로서, 스스로의 자성이 없으므로 공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색이란 우리의 사량으로 분별할 수 있는 현상계를 의미하는데, 이것을 화엄의 사법계(四法界)에서는 사법계(事法界)라고 하며, 공이라는 것은 그 현상계를 유지하고 있는 바탕으로서의 이치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법계(理法界)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색불이공 공불이색’이라는 것은,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통해, 이(理)와 사(事)가 서로 걸림이 없다는 화엄의 ‘이사무애법계’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이법계와 사법계가 나뉘어 보이지만, 즉, 공과 색이 다르게 보이지만, 사실은 이법계와 사법계가, 그리고, 공과 색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시간적인 개념에서 본 무상의 이치를 바탕에 깔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색불이공’만 이야기하면 될텐데, 다시한번 ‘공불이색’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반야심경에서는, 색, 다시 말해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에 대하여, 공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여 현상계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부정만으로는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고, 한 쪽으로 치우칠 우려가 있기에 다시한번 현실을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색이 공이라고 부정을 하고, 그 부정인 공이 다시 색과 다르지 않은 것이라고 긍정을 함으로써, 부정과 긍정 모두의 극단을 떠난 절대 긍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다음에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강한 긍정의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색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색’이라는 논리는 공간적인 무아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앞에서 설명하였으며, 강한 긍정의 논리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즉, 물질적 존재인 색은, 바로 지금 이 순간 여지없는 공이라는 것입니다. 이 공간 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공이라는 것입니다. 앞의 논리처럼 시간적으로 미래에는 공일 것이라는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이 공간에서의 공이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앞에서 공이란 것은 연기하는 것이며, 무자성(無自性)이고, 무아라는 것을 이야기 한 바 있습니다. 다시 말해, 공은 무아를 의미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색이 곧 무아(無我)라는 말입니다. 즉 시계, 책상, 사람 등의 물질적 존재인 색은, 미래에 인연이 다하여 흩어질 것이기에 공이기도 하지만, 바로 지금 그 모습이 공이라는 논리인 것입니다.

 시계라고 했을 때, 이 시계는 시계침, 플라스틱 케이스, 나사, 건전지 등이 인연화합으로 모여 만들어진 물질입니다. 그러나 각각의 부품들 하나 하나를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시계 케이스만을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도 없고, 시계침만을 가지고 시계라고 할 수고 없는 것이며, 시계라는 것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 모든 부속품들이 모여 인과 연이 맞는 부품들끼리 짜 맞추어 졌을 때, 비로소 시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각기 다른 모든 부품들을 잘 결합시켜 시계라는 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연기라는 법칙이 필요합니다. 요컨대, 공의 성질, 연기의 성질, 무자성의 성질이 바탕되어야만 비로소 시계가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 시계가 성립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공의 바탕 위에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화엄의 사법계(四法界)를 기준으로 본다면 사사무애법계와 연관지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공[理法界]과 공이 서로 걸림이 없이 무애한 것처럼, 색[事法界]과 색도 서로 걸림이 없이 무애하다는 논리입니다.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대긍정의 논리이며, ‘이 우주가 서로 걸림 없는 무애’라는 법계의 본래 성품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목인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가 좀더 발전되어 화엄에서는 ‘일즉일체다즉일’, ‘일미진중함시방’이라는 논리까지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색즉시공’의 논리를 말하고 나서 다시 ‘공즉시색’이라고 한 것은, 앞의 그것과 같이, ‘색이 곧 공’이라고 부정한 데서 한 걸음 나아가 ‘공은 바로 색’이라는 대긍정을 통해 절대 긍정의 논리를 펴기 위함입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상의 논리에서는 색에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지만, 여기에 오면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까지도 모두 포함하여 공이라고 설명합니다. 즉 수, 상, 행, 식 모두를 앞의 논리에서 색에 대비할 수 있으니, 다음과 같습니다.

수불이공(受不二空) 공불이수, 수즉시공(受卽是空) 공즉시수

상불이공(想不二空) 공불이상, 상즉시공(想卽是空) 공즉시상

행불이공(行不二空) 공불이행, 행즉시공(行卽是空) 공즉시행

식불이공(識不二空) 공불이식, 식즉시공(識卽是空) 공즉시식

 이것은, 다시 말하면, 오온, 즉 일체제법인 물질, 정신적 존재는 모두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또한 일체제법과 다르지 않으며, 일체제법이 곧 공이고, 공이 곧 일체제법이라는 논리와 같습니다. 이것은, 결국, 일체제법은 시간적으로 제행무상이며, 공간적으로 제법무아이고, 그렇기에 연기적 존재라는 말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연기법의 시간적 해석이 바로 제행무상이고, 공간적 이해가 바로 제법무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대승의 반야 공 사상이 바로 연기의 사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제법은 연기하는 존재로서, 모두가 공이며, 무자성이고, 무분별, 무아, 중도라는 중관(中觀) 사상도 이 반야경의 공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물질인 색에서 보았을 때,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며 정신인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곧 공이라는 말입니다. 이상 수상행식이 공한 논리에 대해서는 앞서 ''오온개공''에서 ''오온''을 설명할 때 자세히 살펴보았으며, 수행행식이 ''불이공''이고 ''즉시공''인 연유는 앞의 ''색''과 같은 논리로 설명할 수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넘어갈까 합니다.    5월 18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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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일체고액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2008/03/08 21:51 Posted by 법상
 

도일체고액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란 일체의 고액[고통과 액난, 괴로움]을 건너, 해탈, 열반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이란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 봄으로써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체의 고액이 과연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세 가지 괴로움, 그리고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괴롭다는 말은, 그 성격상 고고(苦苦)・행고(行苦)・괴고(壞苦)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고고란 괴로움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인간의 감각적인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즉,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맞아서 아프다던가, 병으로 아프다던가, 배고파서 겪는 괴로움, 그리고 추워서 느끼는 괴로움 등입니다.

 둘째로 행고란 행의 괴로움이란 의미로서, 변하기 때문에 겪는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삼법인 중 제행무상의 진리 때문에 오는 괴로움으로, 모든 것이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의미합니다. 이 괴로움이 바로 불교의 고성제에서 말하는 괴로움과 가장 가까운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를 생각하며 행복했던 때를 떠올리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괴로움이며, 늙고 병들어 예전처럼 한 십 년 정도 젊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에 속합니다. 또한 사랑하던 이와의 사랑이 늘 계속되길 바라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짐에서 오는 괴로움, 돈이 항상 할 것 같고, 명예나 권력이며, 지위, 계급, 사랑이 항상 할 것 같지만 그리고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 항상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변화하게 마련이라는 데서 오는 괴로움 등이 모두 행고입니다. 우리가 흔히 괴로움이라고 말하는 생, 노, 병, 사의 인생 사고(四苦)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 괴고(壞苦)는 부서짐의 괴로움이라는 의미로서, 항상하기를 바라지만 일체의 법은 항상하지 못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부서지게 되는, 인간으로 말하면 죽음의 괴로움입니다. 자연을 보면 성(成), 주(住), 괴(壞), 공(空)하여 반드시 변하여 부서지게 되고, 인간을 보더라도 생, 노, 병, 사하여 반드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니라, 현재에는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없어졌을 때 느끼는 괴로움도 괴고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재물, 지위, 혹은 명예 등을 상실했을 때 느끼는 괴로움입니다. 자세히 말해, 돈이나 나의 소유물 등이 인과 연이 다해 나에게서 멀어질 때 느끼는 괴로움도 바로 이 괴고에 속하는 것입니다.이러한 괴로움 등은 괴고이면서 동시에 행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괴로움의 성격상 세 가지로 나누고 있기도 하지만 그래도 불교에서 말하는 대표적인 고가 바로 사고와 팔고의 교설입니다. 사고(四苦)란 생노병사로 생(生)은 태어나는 괴로움이며, 노(老)는 늙는 괴로움 병(病)은 병드는 괴로움, 사(死)는 죽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여기에 다시 네 가지 괴로움을 더해 팔고(八苦)라 합니다. 그 네 가지란 원증회고(怨憎會苦)로 이는 미워하는 대상과 만나는 괴로움, 애별리고(愛別離苦)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求不得苦)는 원하지만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고, 오음성고(五蔭盛苦)는 오음 즉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오음성고란 ‘나다’라고 아상을 내세우는데서 오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좀 더 자세히 팔고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고팔고의 시발점은 생고(生苦)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나머지 일곱 가지의 괴로움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생기는 부수적인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태어나는 것이 무슨 고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사실은 팔고 중 가장 근본이 되는 괴로움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인데 물론 이 세 가지는 누구나 괴로움이라고 인정하겠지만, 혹 어떤 사람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 말고, 그와 반대의 개념, 즉, 젊고, 건강하고, 살아있다는 즐거움이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할 것입니다. 물론 불교가 그런 즐거움을 모두 없다라고 보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삶의 어느 한 단면만을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닌, 인생 전체를 보면 우리는 결국에 가서 ‘늙음과 병듦과 죽음’이라는 궁극적 고통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사고(四苦)에 네 가지를 더해 팔고(八苦)라고 한다 하였습니다. 그 첫째가 사랑하는 대상과 헤어지는 괴로움인 애별리고입니다. 한창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던 두 남녀가 언젠가 그 중 한 명이 죽는다던가, 다른 이성과 눈이 맞아 헤어지려 한다면 이 괴로움은 그야말로 죽는 괴로움보다 더 괴로울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부모, 형제, 친지, 친구들과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하는 괴로움도 애별리고입니다. 또한, 사람뿐아니라, 물건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물건에 집착이 클수록 그것이 사라졌을 때 오는 괴로움은 큽니다.

 다음은, 그와 반대인 원증회고인데, 원망스럽고 싫은 것과 만나야 하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보기 싫은 사람, 얼굴만 보아도 화가 나고 답답하고 혹은 두려운 사람들과 항상 만나야 한다면 그보다 괴로운 일이 있을까요? 특히나 군대에서 보기 싫고 두렵기 까지 한 선임병 때문에 너무 괴로운 나머지 자살까지 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군에서 자살하는 경우를 보면 첫째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짐에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고, 둘째가 미워하는 이와의 괴로움에서 오는 괴로움 때문이라 합니다. 그러니 이만하면 왜 생노병사라는 네 가지 괴로움 다음으로 애별리고, 원증회고를 언급하였을까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구부득고는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입니다. 이 세계의 생명 있는 중생들 중 과연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있을까요? 그러나,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쉽게 마냥 얻을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은, 심지어 축생들조차, 많든 적든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다가 구해지지 않으면 괴로워합니다.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좋은 성적을 원하고, 수행하는 이들은 깨달음을 얻으려 하고, 사업가는 사업이 번창하기를 원하며, 정치가는 최고의 권좌에 오르길 원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바라는 마음이 끝이 없고, 그것이 모두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괴로워합니다.

 다음으로 오음성고(五陰盛苦)는, 오온이라는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오는 괴로움으로,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이 치성하는 데서 비롯된 괴로움입니다. 다시 말해, 오온, 즉, ‘나다’ 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으로,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마음대로 한다’ 하는 상을 가지기 때문에 그만큼 괴로움이 오는 것입니다.  이 오음성고는 앞의 일곱 가지 괴로움을 포괄하고 있는 괴로움입니다. 오온, 즉 ‘나다’ 하는 데에서 모든 괴로움이 오는 것이지, ‘나다’ 하고 고정 지을 것이 없다면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타파된다는 말은 아상이 타파되고, 그렇기에 괴로움을 여의고 깨달음의 길로 갈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오온이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공하다는 사실을 올바로 조견할 때 이 괴로움은 소멸되는 것입니다.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소멸되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다는 것은 이미 살펴본 바입니다.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본 아상(我相), 아집(我執)에 대해서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나다’ 라는 상이 없다면 우리는 괴로울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주체는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 괴로움의 주체가 사라진다면 어디에 괴로움이 붙을 자리가 있겠습니까? 내 것이라는 상 때문에, 내 것을 빼앗겼을 때 괴롭고,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지 못하니 괴롭고, ‘내가 옳다’ 라는 상 때문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네 가지 괴로움 또한 이러한 아상, 오음성고의 괴로움이 근본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것이고,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상이 없다면, 일체가 ‘나’ 아님이 없기에 일체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한 대상에 대한 집착심으로의 사랑이나 증오의 감정이 있을 리 없으며, 그렇다면 애별리고나 원증회고가 있을 리 없는 것입니다. ‘나’ 라는 상이 없으니, 즉, 일체가 나 아님이 없으며 대상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으니, 돈, 재물, 명예, 지위, 나아가 깨달음에 대한 집착심을 여의게 되고, 그러기에 구부득고의 괴로움도 있을 리 만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에서 말한 인생팔고는, 덮어놓고 무조건 ‘인생은 괴로움’이라고 결론짓는 것만은 아닙니다. 아상이 있는 우리네 중생들에게 있어 인생은 괴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공부하는 수행자들에게 있어 인생은 고가 아닙니다. 일체의 경계는 인과 연이 화합하여 잠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항상하지 않는 경계일 뿐이지만, 우리네 중생들은 그것이 실재하는 줄로 착각을 하므로 그 경계에 집착하여 경계 따라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며 온갖 망상을 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은 여러 가지 실체가 없는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일어나는 것, 즉 연기하는 것입니다. 연기하는 것은 괴로움인 것입니다. 그 경계들이 연기로서 본래 공한 것임을 올바로 알아야 하고, 경계가 공하므로 나도 공한 것임을 올바로 알아, 모든 경계를 나온 자리에 놓고 생활한다면, 우리의 삶은 부처님의 삶에서처럼 향기가 묻어 날 것입니다. 거짓된 나를 붙들고, 거짓된 경계에 얽매여 괴롭게 살 것인가, 본래 공한 나의 본 성품을 올바로 믿고, 일체의 아집과 번뇌를 모두 놓고, 자연스럽고도 편안하게, 여여하게 살아갈 것인가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 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여실히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이 비실체적인 것임을 알아, 그것을 정면으로 부딪쳐 극복할 수 있기에 괴로움이 ‘성스러운 진리’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괴로움의 철저한 인식, 즉 인생이 괴로움임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고의 철저한 인식이 바로 깨달음으로 갈 수 있는 ‘발심(發心)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살펴본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을 되짚어보면, ‘조견오온개공’을 실천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이는 반드시 ‘도일체고액’할 수 있다는 실천적 가르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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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공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2008/03/08 21:48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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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러한 오온설이 대두된 것은 무아(無我)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오온 이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존재란 5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고, 이 각 요소들은 모두 비실체적인 것이므로 이와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인간 존재 역시 비실체적인 존재, 즉 무아란 것입니다. 이러한 각각의 오온에는 고정 불변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비유하기를, 색은 거품덩이 같고, 수는 거품방울 같고, 상은 신기루 같고, 행은 바나나줄기 같고, 식은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아, 무상한 색・수・상・행・식을 무상하다고 보면 올바른 견해를 얻는다. 색수상행식에는 실체도 없고 본질도 없다. 어떻게 오온에 실체와 본질이 있겠는가. 오온은 무상하다. 이것들이 일어나게 한 원인과 조건들 또한 무상하다. 비구들아, 무상한 것에서 일어난 것들이 어떻게 영원하겠는가? 모인 것은 모두 흩어지게 마련이다.” 라고 지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오온설은 무아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며, 이러한 오온무아설은 불교 가르침의 핵심인 고(苦)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해답이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은 욕망 때문에 생기고, 욕망은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다고 하셨습니다. 즉, ‘내가 존재한다는 생각’, ‘나다’라고 하는 생각이 괴로움의 근본 원인이라고 하셨습니다. ‘나다’라는 생각도 없고, ‘나의 것’이라는 생각, ‘내가 옳다’라는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한다면 우리들은 무엇에 집착할 것이며, 누구에게 화를 내고, 질투를 하고, 두려움을 느낄 것이겠습니까? 이렇듯 무아의 이론은 ‘나다’라는 생각을 깨기 위해서 대두된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면, 좀 더 쉽게 현대 과학을 예로 들어 공(空)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나의 나무, 돌, 아니 그보다 더 단단한 고철덩이가 있다고 해 봅니다. 이것은 꽉 차 있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미세한 전자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이것은 모두가 분자와 분자의 결합이며, 또한 그 분자도 자세히 쪼개 보면 원자와 원자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손가락 만한 물체도 사실은 10의 24 제곱 개, 즉, 억(億)의 억의 억 개 정도의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원자 또한 원자핵과 전자라는 것으로 쪼개집니다. 원자핵은 다시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되어 양의 전하를 띠게 되며, 전자는 음전하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물질은 바로 이처럼 분자, 전자, 그리고 더 미세하게는 원자핵과 전자라는 극히 작은 입자들이 모여 잠시 잠깐도 머무르지 않고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것 같은 나무나 돌들도 실제로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항상 변화하는 것, 무상(無常)한 것을 보고 어떻게 고정된 실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이러한 전자 따위의 입자들은, 질량을 가지는 작은 덩어리이지만, 이것은 파동이라는 작은 떨림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물질이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또한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정된 입자라고 생각한 것이 어느새 파동이라는 떨림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곧, 어느 것도 고정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공(空)한 것입니다.


오온개공의 실천 수행

 그러면 먼저 이상의 내용을 ‘아상’의 관점에서 좀 더 구체적 실천 수행의 방향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오온개공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아상 타파’가 수행의 관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상을 타파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 점이 불교 수행의 핵심임을 바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이 몸을 보고, ‘나다’ 라고 하는 것을 타파해야 합니다. 몸뚱이 집착심을 없애야 한다는 말입니다. 몸뚱이란 아상이 생기는 첫 번째 요인입니다. 내가 없다고, 공하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이렇게 몸뚱이가 있는 것을 보고 누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몸에 대한 애착 내지 집착을 여의려면 끊임없이 닦아가는 정진의 수행이 요구됩니다. ‘나’ 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인해 몸을 편하게 하려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은 우리를 게으름과 나태로 몰고 갑니다. 내 몸 하나 편해 보자고 하는 마음이야말로 몸에 대한 애착심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이 몸을 부지런히 움직여 아상을 거스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들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규칙적인 수행과 정진으로 매진하는 이유도 바로 이 몸뚱이 착심이란 아상을 닦기 위한 수행입니다.

 두 번째로 ‘내 것이다’라고 하는 물질적인 소유욕을 버려야 합니다. ‘아상’에 기초하여 나와 너를 가르는 마음이 있으니, 내 것, 네 것이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실 본래부터 내 것이고, 네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다만 인연을 좇아서 물처럼 잠시 오고, 잠시 가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마음이 중심이 되어 모든 행을 하게 됩니다. 돈을 많이 벌어 내 것으로 하고 싶고, 좀 더 높은 명예와 지위를 가지기를 바라며, 좋은 친구, 동료를 가지기를 바라고, 좋은 배우자를 선택하기를 바라기 마련입니다. 이러한 행위 자체가 모두 아상에 기초한 것이므로 버리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돈이나 명예, 그리고 사람들을 내 것으로 하고자 하는 소유욕이 있으니, 그것들이 무상한 줄을 올바로 알아 얽매여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기에 대한 집착을 놓으라는 것입니다. 바로 방하착하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다’라는 아상이 없다면, 그것을 가지고 있을 경우 인연 따라 온 것임을 알아 잘 활용할 수 있고, 없어지더라도 내 것이라는 집착이 없으므로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내 것이다’라는 상을 타파하기 위한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방법이 바로 무주상보시의 삶입니다. 상에 머무름 없이 보시를 한다는 말입니다. ‘남에게 보시만 하면 나는 무얼 먹고 사나?’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남에게 상없이 보시하여 내가 무소유가 되었을 때, 진정 우주 법계를 내가 소유하는 것이란 이치를 깨치게 될 것입니다. 저축을 하십시오. 저축을 하되, 나에게 하지 말고, 이 우주 법계에 상없이 저축을 하는 것입니다. 통장에 저축하면 그 액수만큼만 내 것이지만, 일체의 모든 대상에게 상없이 보시함으로써 저축을 삼으면, 그 사람은 법계를 품에 안은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무량대복(無量大福)이 따릅니다. 무량대복자란, 나에게 있는 재산만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필요할 때 언제고 필요한 만큼의 재산을 법계에서 끌어다 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 ‘내가 옳다’ 라는 나의 생각에 대한 고집, 고정관념, 선입견에 고집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해 놓거나, 혹은 사회가 정해놓은 고정된 관념의 사슬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옳고 그르다는 것이 본래로 없는데, 우리는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을 하여 내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고정관념에 빠져 그 관념대로 되지 않을 때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진정 대자유인이 되어 걸림없이 자유인으로 살려면 우선 고정된 틀 속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에 대한 집착심이 곧 고정관념[편견, 선입견]이며, 고정관념이 극단화된 것이 바로 아집입니다. 그러므로, ‘편견으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 正見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공 사상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연기의 사상, 무아의 사상에 철저히 충실한 사상입니다. 본래 연기의 존재이며 텅 비어 있는 공으로서 적정한 우리의 마음에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무언가를 자꾸만 집어넣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온갖 분별심을 가지고 편견과 고정관념의 벽을 만들어 놓고는 스스로 만든 벽에 부딪쳐 힘들어하고 괴로워해 온 것이 우리들의 삶입니다. 이러한 고정관념의 벽이 있기에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했고 괴로웠던 것을 이제 올바로 깨쳐야 합니다.

 좋고 나쁜 것, 선과 악, 자유와 부자유는 우리 스스로 만든 것일 뿐입니다. 이제 어떠한 극단적 편견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와 내가 서로 둘이 아닌 존재로서 연기의 존재라는 것을 올바로 알아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삶을 살고, 어떠한 분별심도 ‘턱’ 내려 놓을 수 있는 삶, 본래로 텅 비어 있기에 일체의 무거운 짐을 본래 자리에 내려놓고 가는 삶이야말로 공 사상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생활 속의 실천 수행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방하착(放下着)입니다.

 방하착(放下着)이란 무엇인가? ‘방(放)’은 ‘놓는다’는 뜻이며, 착(着)은 ‘집착, 걸림’을 말합니다. 즉, 공이라는 도리를 올바로 알지 못하고, 온갖 것들에 걸려 집착하는 것을 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下)라는 것은 ‘아래’라는 의미이지만, 그 아래는 보통 ‘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의 가장 깊은 곳, 그 ‘아래’에 있는 뿌리와도 같은 우리의 ‘불성, 한마음, 본래 면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방하착은 공이라는 이치를 올바로 모르고 있기에 저지를 수 있는 우리 마음속의 온갖 집착들을 모두 마음의 바탕 자리, 본래 면목의 한마음 자리에 놓아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체의 끄달림을 놓는 것입니다. 놓되 ‘몰록’ ‘온전히’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몽땅 놓아버리는 것입니다. 용광로 속에는 그 어떤 더럽고 녹슨 고철이라도 넣기만 하면 모두 용광로와 하나가 되어 녹게 마련입니다. 그렇듯, 우리의 마음자리, 본래 면목, 참 주인공도 그와 같아 우리의 수많은 번뇌와 업장들을 모두 녹이기 마련입니다. 문제는, 이 모두를 스스로 놓아버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놓으면 되지만 놓지를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 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면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붙잡기만 하는 삶이었습니다. 돈과 재물을 붙잡고, 지식을 붙잡고, 명예와 지위를 붙잡고, 이 모든 것들에 ‘내 것’이라는 상을 짓고,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살아왔습니다. 한 번도 ‘턱’ 놓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놓으면 큰일이 나고, 죽는 줄로만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내 것, 내 가족, 내 돈, 내 생각, 내 가치관 등등 ‘나’라는 의식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가지려는 삶을 살아온 것입니다. ‘가지고 붙들려는 삶’을 ‘놓는 삶’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정말이지 커다란 의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붙들었을 때 잘 되는 것이 아니라, 놓았을 때 진정 잘 되어 나가는 것이라는 의식의 전환 말입니다. 일체를 소유하지 않았을 때, 진정으로 무소유가 되었을 때 이 우주 전체를 소유하게 된다는 소중한 도리를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까짓 일체가 공(空)인 마당에 무엇이 아까울 것이 있겠습니까? 공과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리 마음속에 본래 자리잡고 있던 밝은 지혜가 환히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般若)’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 수행은 무소득(無所得), 무소유(無所有), 무집착(無執着), 방하착(放下着)의 수행이며, 공과 하나가 되는 수행인 것입니다. 이것이 반야심경이 우리에게 던지는 실천 수행의 길인 것입니다. 일체를 놓는 것,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입니다. 방하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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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온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2008/01/10 17:36 Posted by 법상
 

 오온(五蘊)이라고 하면 일체 현실의 세계를 다섯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또한, 인간을 다섯 가지 요소로 나눈 것이기도 합니다. 이 오온을 특별히 인간에 적용시켜 말할 경우 오취온(五趣蘊)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는 인간에 대하여 고정적인 자아[나]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집착[취]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오온개공에 대하여 살펴보기에 앞서 오온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근본불교에서의 오온무아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온의 ‘蘊(Skandha)’은 ‘모임’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음(陰)이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일체의 현상세계는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모임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온은 좁은 의미로 볼 때 인간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넓은 의미로 쓰일 때는 일체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일체의 구조를 다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는 말인데, 색은 현상계의 물질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며, 수상행식은 정신세계의 총체를 네 가지로 나눈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분류법은 물질보다는 정신에 중점을 두고 있는 분류법입니다. 특별히 오온설은 물질은 끊임없이 변하는 것으로서 무상한 것으로 이해하지만, 정신은 실체적이며, 영원하다고 믿고 그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법한 교설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은 물질보다 정신을 더 자세하게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오온을 하나하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색온(色蘊)

 색이란 빛과 모양을 가진 물질을 의미하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색은 네 가지의 요소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사대(四大)라고 하며,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를 말합니다. 지(地)라는 것은 우리의 몸에서 뼈, 손톱, 머리카락, 살 등 딱딱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우리가 죽을 때 모두 땅[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수억 겁을 윤회한 이 땅의 이 모든 자연, 흙, 나무, 등이 모두 과거, 또 그전 과거에는 나의 몸이었을 수 있는 것이며, 지금 나의 몸 또한 백 년 내지 이백 년 후면 다시 처음 나왔던 그 자리로 돌아갈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육신, 지(地)는 일체세간의 지가 인연을 만나 우리의 몸을 잠시 이루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내 앞에 떨어진 흙 한 줌, 나무 한 토막이 과거나 미래의 어느 순간 나의 몸을 이루는 내가 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 육신에 집착합니다. 그런 까닭에, 자신의 몸은 그렇게 아끼며 집착하지만, 자연에 대해서는 내 몸처럼 아끼고 잘 가꾸지 않는 것이 우리네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이루는 색(色)이 항상하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이 몸뚱이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몸 뿐 아니라 대지 위에 있는 나무, 돌, 광석들은 모두 항상하지 않습니다. 현대과학은, 모든 물질은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고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 하나가 모두 플러스, 마이너스의 스핀 운동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세포 하나하나가 죽고 새로 생기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우리의 몸이 전혀 새로운 세포로 변화되는데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처럼 색온은 무상한 것, 항상하지 않는 것입니다.


(2)수온(受蘊)

 수란 감수작용(感受作用)으로 느낌, 감정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고수(苦受)와 낙수(樂受), 그리고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입니다.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 그리고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감정을 말합니다. 우리의 주관적, 내적인 감각기관인 육근(六根)과 그것에 상응하는 외적인 대상인 육경(六境)이 서로 만날 때,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안근(眼根)[눈-모양]으로 색을 바라볼 때, 예컨대 우리가 아름다운 경치를 볼 때 좋다는 감정이 생기며, 징그러운 해골을 보던가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볼 때, 싫다는 감정이 생깁니다. 그러나 무심코 지나다니는 사람을 멍하니 지켜볼 때처럼 아무런 감정도 생기지 않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근(耳根)[귀-소리]으로 무언가를 들을 때, 즉, 욕을 듣던가 꾸지람을 들으면 싫은 감정이 생길 것이며, 칭찬을 들으면 좋다는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비근(鼻根)[코-냄새], 설근(舌根)[혀-맛], 신근(身根)[몸-접촉], 의근(意根)[뜻-생각]들도 이러한 세 가지의 감정을 나타내기 마련인 것입니다.

 이러한 수온(受蘊)의 감정은, 그때그때 인연이 생함에 의해 잠시 나타났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비근[코]으로 나쁜 냄새를 맡고 나서도 잠시 후, 혹은 다른 장소로 이동함으로써 다시 좋은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의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생각이 들다가도 과거의 좋지 않았던 일을 회상하며 순간 기분이 나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수온의 세 가지 감정도, 색온(色蘊)의 그것과 같이, 영원한 것이 아니고 순간순간 변해 가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수온의 감정이 무상한 것임을, 그리고, 그 감정에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아 거짓임을 안다면, 좋고 나쁜 감정에 얽매여 괴로워하는 우(愚)를 범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기분 나쁜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마음을 꽁꽁 묶어 두고 괴로워하며, 기분 좋은 일이 있으면 한없이 들뜬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게 마련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음을 알아 거기에 얽매이거나 회피하는 두 가지 모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수행자의 바른 행이라 하겠습니다. 기분 나쁜 마음과 좋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려면, 그 경계에 처했을 때, ‘이 감정은 실체가 아니다’라고 관(觀)함으로써 어느 정도 자유로와 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수온 또한 항상하지 않는 무상한 것입니다.


(3)상온(想蘊)

 상은 개념, 또는 표상(表象) 작용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대상에 대하여 식별하고, 그 대상들에 이름을 부여하는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당의 부처님을 뵙고, ‘아! 저 분은 부처님이시구나!’ 하고 개념을 만드는 작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에 대하여 상을 짓는 것을 말합니다. 무언가를 보면, 우리는 이전에 우리가 이름지어 놓은 것을 되살리어 기억 속에 개념지어 놓은 것을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예컨대, 머리를 깎고, 회색 먹물 옷을 입은 분은 스님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스님’이라고 이름짓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은 고정 불변한 것일까요? 우리들은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에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에 빠져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고,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상, 일체 대상에 대한 표상, 이름들은 우리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이지 그것이 전부인 것은 아닙니다. 한글을 만들 때, 하늘, 나무, 스님, 꽃, 집, 절, 아버지, 자식 등의 개념을 대상에 접목시켜 이름 붙인 것 뿐이란 말입니다.

 이렇듯 상을 짓는 것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사회의 환경과 조건에 따라 언제나 변할 수 있는 것이며, 실제로 항상 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면 언제까지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4)행온(行蘊)

 행이란 ‘형성하는 힘’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특히 인간의 의지작용이나 욕구 등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 행위로 인해 업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행은 수, 상, 식을 제외한 모든 정신작용을 총괄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기억, 상상, 추리 등의 정신작용을 말합니다.

 우리들은 몸으로, 입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정신적인 의지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온으로 인하여 우리들은 선한 행위, 악한 행위 - 여기에서 선하다, 악하다는 판단은 상온에 해당한다 -를 하며, 그러한 선, 악이라는 판단에 따라 윤리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업이 되는 것인데, 이렇게 업을 짓게 하는 것이 바로 행온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작용은 우리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상에 기초한 선악이라는 개념작용 등에 의지하여 생기게 마련입니다.

십이연기에서는 무명에 의해 행이 생긴다고 했는데, 상온에 대한 무명, 다시 말해 ‘항상한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행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온 또한 무상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기반인 상온이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5)식온(識蘊)

 식은 일반적으로 분별, 인식 및 그 작용을 말합니다. 그러나 직접 대상을 판단하고 인식하는 작용을 하는 것은 상온의 작용이고, 식온은 다만 대상을 상이 생겨나기 전(前) 단계까지 인식할 수 있을 뿐입니다. 주의(注意) 작용정도라 하면 될 것입니다. 쉽게 말해, 눈앞에 책 한 권이 있을 때 눈앞에 무언가가 나타난 것을 인식하는 작용을 말한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면 이상에서 이야기 했던 각각의 다섯 가지 온에 대하여 전체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컨대, 입안에 사탕이 하나 들어왔다고 할 때 무언가가 들어왔음을 아는 것이 바로 ‘식온’이며, 전의 기억, 사탕이라는 것에 대한 이전의 표상작용에 의해, ‘아하! 사탕이구나!’ 하고 느끼는 것이 ‘상온’이고, 달고 맛있다는, 다시 말해, 좋은 느낌이 바로 ‘수온’의 작용이고, 맛있으므로 빨아먹는 행위, 그리고 더 먹고 싶어서 다른 사탕을 찾는 행위, 다른 사탕을 찾아 먹는 행위 등이 바로 ‘행온’의 작용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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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재보살 행심바라밀다시 조견



관자재(觀自在)


 불교를 잘 모르는 이들도 ‘관세음보살’이라는 명칭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이들도, 어렵고 힘들 때면 의례히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명호(名號)를 부르는 염불이 우리 민족의 보편적인 신앙이 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의 의미는 ‘세간의 음성을 관하는 보살’이라는 뜻으로, 사바세계의 중생이 괴로움에 처해 있을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일심으로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곧 구제해 주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이 과연 어떤 분이기에 그렇게 많은 이들이 부르고 신앙하고 있는 것일까요?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이 바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입니다. 이 두 이름 모두 범어 ‘아바로키테 스바라 보디사트바’를 번역한 것으로, 이것이 중국에 들어와 번역되면서,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로 불리었으나, 이후에 관자재보살로 바꿔 일컬어졌다고 합니다. 원어를 살펴보면, ‘아바’는 지킨다는 뜻이고, ‘로키테’는 본다, 관조한다는 의미로, 이는 ‘지켜본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스바라’는 ‘자재하다, 자유롭다’는 의미이므로 이름 그대로 뜻을 새기면 ‘자유 자재하게 지켜본다’는 뜻이 됩니다. 이것은 ‘중생들의 온갖 괴로움과 액난에 대해 자유자재하게 지켜보고 살펴서 그들의 괴로움을 소멸시켜 주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린 관세음보살의 어원에 담긴 속뜻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관세음)’는 의미는 나라는 주관과 객관계의 일체의 경계를 온전히 바로 관함을 말하며, ‘보살’이라고 함은 우리 내면의 본래자리, 깨달음의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하는 의미는 나와 내 밖의 일체 경계를 관하여 본래면목 깨침의 자리에 온전히 방하착 하고, 경계를 닦아간다는 자기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 염불수행을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비롯한 일체 세간의 음성, 다시 말해 온갖 경계를 바로 관하고 그러한 모든 경계를 녹이고자 온전히 자기내면의 참나 본래자리에 놓을 수 있도록 하는 밝은 방편 수행인 것입니다. 세간의 음성, 즉 온전히 자신과 바깥 경계를 관하고 녹여 보살,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해 염불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염불(念佛)이라고 할 때, 염(念)이란, 우리네 마음속에서 경계 따라 일어나는 갖가지 생각, 마음의 조각들을 말하며 불(佛)이란, 우리네 마음속에 저마다 갖추고 있는 본래자리, 근본성품, 참나 주인공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염불은 우리마음 ‘염’과 부처님 마음 ‘불’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게 하는 밝은 수행인 것입니다.


보살(菩薩)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인데, 범어로 ‘보디사트바(Bodhisattva)’라고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나타내는 ‘보리’와, 중생을 뜻하는 ‘사트바’를 합한 단어로서,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수행자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즉, 깨달음을 완성한 부처와 미혹한 중생의 두 가지 속성을 갖춘 자가 바로 보살인 것입니다.

 이는 보살의 서원인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위로는 깨달음,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 교화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모든 보살의 한결같은 서원인 것입니다. 물론 아래다, 위다 하는 구분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선후(先後), 고하(高下)의 상대 개념이 아닌, 분별이 끊어진 개념입니다.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려는 적극적인 행이며, 보리를 구함이 바로 일체 모든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는 대비원력의 궁극적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의 행을 흔히 자리이타(自利利他)라고 하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이익 되게 함이 곧 타인, 이웃을 이익 되게 함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관자재보살[이후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보고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다’는 이것이야말로 반야심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뽑아놓은 부분입니다. 나머지 뒷부분은 이 사실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관세음보살의 주요 실천 덕목이 바로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야바라밀다를 실천함에 있어, 단순한 실천이 아니라 완벽하고도 치우침 없이, 그리고 온전히 실천하는 것이 바로 ‘깊은’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대승보살의 주요한 수행 덕목인 ‘반야바라밀다’라는 것은 어떠한 수행을 말하는 것일까요? 반야바라밀이란, 말 그대로 해석한다면,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깊고도 수승한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공의 도리, 연기의 이치, 무아, 무자성, 중도의 이치를 올바로 조견(照見)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진리를 밝게 깨칠 수 있는 지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 연기, 무아, 중도, 무자성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실천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것처럼, 공이고, 연기된 존재이어서 어떤 것에도 집착할 바가 없으므로 무집착(無執着)이며, 어떤 대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라고 하는 분별을 지을 필요가 없으므로 무분별(無分別)이고, 그러므로, 공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얻을 것이 없는 무소득(無所得)이며, 무소유(無所有)의 가르침이 여실히 녹아 있음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즉 우리의 삶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 무소유’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의 삶은 온갖 대상에 ‘집착’하고, 머리속으로 사량(思量)하고, ‘분별’하며, 보다 많이 얻으려는 ‘소유’의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는 바로 공의 이치, 연기의 도리를 모르는 데에서 오는 어리석음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공, 연기의 이치를 올바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우리는 확연한 지혜[반야]를 얻을 수 있고, 그로 인해,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생사가 없는 열반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바라밀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입니다. 즉, 반야바라밀다 실천 수행의 핵심은, ‘무집착, 무분별, 무소득’인 것입니다.


조견(照見)


 조견(照見)이란 ‘비추어 본다’는 의미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것을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면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나 어떤 상(相)을 짓지 않고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의 관찰이기도 합니다. 부처님도 바로 이 현실의 조견을 통해 확연한 깨달음을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견(正見)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어떤 형이상학적인 세계라든가, 절대자에 의해서 피동적으로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 아닙니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대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셨기에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의 깨달음은 전적으로 현실에 대한 비춤, 즉 조견의 결과라는 말입니다. 나’에 대한 조견, ‘현실’에 대한 조견이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수행자의 바른 길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 그리고 ‘현실’ 이외의 그 어떤 것에 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스스로 나와 내 밖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봄[조견]으로써 나와 내 밖의 현실이 어떠한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떠한 법칙성을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지, 어떠한 성질, 속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대한 온전한 깨침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근본불교 교설이라고 하는 연기법, 삼법인, 오온, 육근, 십이처, 십팔계, 업, 윤회, 사성제, 팔정도, 사념처 등 이 모든 교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고타마 싯다르타의, 현실[일체, 제법, 우주, 세계]에 대한 올바른 관찰이 있었기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가만히 관찰해 봄으로써 연기법이라는 현실의 법칙을 조견할 수 있었고, 그 연기법을 통해 현실의 속성, 성질인 삼법인의 교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또한 현실의 구성방식을 가만히 비추어 보니, 우리의 신, 구, 의 3가지로 행한 행위가 업이 되어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돈다는 것을 여실하게 보신 것입니다. 이렇게 현실의 법칙, 현실의 성질, 현실의 구성방식에 대하여 조견하시고는, 그렇다면 현실, 일체, 제법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비추어 보셨습니다. 오온, 십이처, 십팔계라는 교설이 바로 현실의 모습, 일체 제법, 다시 말해 불교의 우주관, 세계관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비추어 보신 결과,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셨습니다. 즉 조견의 결과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불교의 핵심 가르침인 무아(無我)의 교설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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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밀다 심경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2007/12/11 15:02 Posted by 법상
 

바라밀다 심경


바라밀다(波羅蜜多)


 바라밀다는 범어로 ‘파라미타(Paramita)’라고 합니다. 그 뜻은 ‘도피안(到彼岸)’, ‘도무극(到無極)’, ‘사구경(事究竟)'' 등으로 번역할 수 있으며, 자세하게는 ‘바라’가 ‘저 언덕[피안]’, ‘밀다’가 ‘건넌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풀이하면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요. 이를 앞의 ‘마하반야’와 함께 번역하면, ‘크나큰 지혜로 피안의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이 됩니다.

 다시 말해, ‘저 언덕’이란, 피안(彼岸)으로 정토(淨土), 불국토(佛國土), 부처님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이 언덕’이라 함은 차안(此岸)으로 우리가 사는 이곳 사바세계를 말하며 다른 말로 예토[穢土]라고도 부릅니다. 조금 다른 의미로 살펴본다면 이 언덕과 저 언덕이 모두 내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곳, 저 곳 하여 나누어 놓은 듯 하지만 실은 이 언덕은 어리석어 무명에 휩싸인 ‘거짓 나’이고, 저 언덕은 깨달아 밝아진 ‘참나’를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라밀다의 뜻은 ‘이 사바세계에서 저 부처님의 세계로 가는 것’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거짓 나의 삶에서 참나를 깨쳐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다시말해 “‘나’ 중심의 삶[我執, 我相]에서 ‘나 없음’의 삶[無我, 眞我]을 깨쳐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조금 더 자세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예토’라고 하면,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말하는데 모든 것이 혼탁하고 오염되어 있는 탁한 세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봅시다. 우리는 육신[身]으로 살생을 하고, 도둑질을 하고, 청정하지 못한 음행을 하는 등의 온갖 악행을 저지르며, 입[口]으로는 온갖 거짓말과 이간질을 일삼고, 삿된 분별심에 빠져 진실치 못하여 꾸미는 말을 하며, 거친 욕설 등을 일삼고 살아갑니다. 또, 생각[意]으로는 탐욕에 빠져 오욕락을 즐기기 위하여 과다한 욕심을 부리고, 조그만 일에도 불끈 화를 내며, 어리석은 삿된 사량심으로 온갖 악한 행위를 하게 됩니다. 이처럼 신구의(身口意) 삼업을 짓고, 탐진치(貪瞋痴) 삼독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염된 이 땅을 ‘사바세계’ 즉 예토라 하여 『반야심경』에서는 ‘이 언덕[차안(此岸)]’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언덕[피안(彼岸)], 즉, 정토(淨土)란 어떤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정토란, 우리의 신구의(身口意) 삼업이 청정하여 모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 이상(理想) 세계를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부처님의 세계, 열반 해탈의 경지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 언덕으로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마하반야의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 큰 지혜의 배를 타야만 건너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배를 불가에서는 ‘반야용선(般若龍船)’으로 상징화하고 있습니다. 사십구재를 지낼 때, 오색 띠가 달린 작은 배를 들고 봉송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배가 바로 반야용선, 즉, 큰 지혜로 부처님의 세계로 영가를 데려다 줄 수 있는 배인 것입니다. 이 반야용선의 뱃머리에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타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야할 부처님의 세계까지 길을 인도해 주시므로, ‘길을 인도하는 왕’이라는 의미의 ‘인로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용선은 수많은 무명중생을 모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그래서, 대승(大乘), 즉, ‘큰 탈 것’이란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방편설법을 다시 정리해 보면, 육도윤회의 세계인 이 언덕이 있고, 부처님의 세계인 저 언덕이 있으며,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향하는 수행자의 세계가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십법계(十法界)라고 부르는데, 이는 우리들이 사는 인간계를 포함해 우리가 윤회하는 세계인 차안예토[차안-생사윤회의 경지]인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의 여섯 세계와[6], 피안정토[피안-해탈열반의 경지]의 세계인 부처님의 세계[1]가 있으며, 차안인 이 언덕에서 피안인 저 언덕에 이르기 위하여 수행하고, 반야용선을 타고 가는 수행 과정에 있는 세계, 즉,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세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3] 여기에서 성문, 연각, 보살에 승(乘)을 붙인 이유는, 반야용선을 타고[乘] 간다는 의미에서입니다. 성문이나 연각승은 소승의 수행방법이며, 보살승은 일체 중생을 함께 배에 태워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해 주는 대승의 수행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이르는 방법, 파라미타, 바라밀다의 방법에도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듯 바라밀다의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지라도, 공부하는 수행자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목적은 ‘바라밀다’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같다고 하겠습니다. 바라밀다를 향한 보리심의 횃불을 밝혀들고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바라밀다 공부를 시작합시다. 그 공부가 바로 반야심경의 공부입니다.


심경(心經) 


 마지막으로, ‘심경’은 ‘핵심이 되는 경전’이란 뜻입니다. 범어로 ‘흐릿다야 수트라(Hridaya-Sutra)’라고 하는데, 그 뜻은 ‘마음의 경’, ‘진수(眞髓)의 경’, ‘심장(心臟)의 경’이라고 풀이할 수 있습니다. 심경이라고 하면, 흔히 ‘마음의 경’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심(心)을 마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불교에서는 ‘진수(眞髓)’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모든 경 중에서 일체의 요의(要意)를 모은 것, 다시 말해, 핵심이 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반야부 경전에 속하는 하나의 경전이지만, 단순히 반야부 경전의 하나이기보다는, 반야부 경전 중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가르침만을 모아 간결하게 정리해 놓은 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경’ 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전체 제목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정리해 볼까 합니다. 전체의 뜻은, ‘위대한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길을 설한 핵심 되는 경전’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지혜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의 제목에서 가장 중심 되는 말은 바로 ‘반야’입니다. 지혜! 이것이야말로 괴로움 속에서 생사 윤회하는 우리들을 피안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만 ‘지혜, 반야’ 라고 하지 않고, ‘위대하고 크나큰 지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하반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하반야’를 통해서, 작게는 우리에게 당면한 일체의 모든 문제를 풀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의 저 언덕에 오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마하반야’를 통해서 일체 괴로움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가 바로 ‘바라밀다’입니다. 요컨대, 마하반야를 통해 바라밀다에 이르게 하는 소중하고도 핵심 되는 가르침이 바로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인 것입니다.


 이제부터 경전의 본격적인 내용이 시작됩니다. 『반야심경』은 다른 경전들에 비해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논문이나 사설, 또는 그저 간단한 글을 보더라도, 글이라면 보통 서론, 본론, 결론으로 그 구성이 나뉘어져 있게 마련입니다. 그처럼, 경전에도 대부분의 경전에 공통되는 나름대로의 구성 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라는 구조입니다.

 서분이라고 하면, 보통 ‘육성취(六成就)’라고 하여, 이 경이 설하여지게 된 연유를 여섯 가지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으로, 일반적인 글에서 본다면 서론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육성취는 신성취(信成就)[여시], 문성취(聞成就)[아문], 시성취(時成就)[일시], 주성취(主成就)[불], 처성취(處成就)[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등], 중성취(衆成就)[여대비구중천이백오십인 등]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사용하는 말로, 육하원칙(六何原則), 즉, 언제[When], 어디서[Where], 누가[Who], 무엇을[What], 어떻게[How], 왜[Why] 라고 하는, 소위 글 쓰는 5W-1H 원칙과도 흡사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으로 정종분이 있는데, 이 부분이 바로 본론으로서, 모든 부처님의 교설이 전개되는 부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유통분은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정종분에서 설하신 교법을 제자에게 부촉하여 후세에 널리 유전(流轉)되도록 하기 위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반야심경』은 다른 경전과는 그 구조가 약간 다릅니다. 『반야심경』은 앞뒤 서분과 유통분을 생략하고 바로 본론인 정종분이 시작됩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6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의 경을 260 자로 간추린 경전이기 때문에, 핵심만을 간추리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보면 좋을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심경』은 대승불교 ‘반야’의 진수만을 뽑아놓은 경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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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 반야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2007/12/11 15:01 Posted by 법상
 

마하 반야


 경전(經典)의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경의 제목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경의 제목에는 그 경이 설하고자 하는 중심 사상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는 경의 제목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하(摩訶)

 ‘마하’는 범어로 ‘Maha’라고 쓰는데, 이는 발음만 그대로 따온 것일 뿐, 한자로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마하’의 뜻은, ‘크다, 많다, 뛰어나다’는 의미로서,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크고 많다는 개념을 훨씬 초월하는 절대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 세계의 분별심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를 보고 ‘저 사람은 키가 크다’고 했을 때, 우리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의 키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70, 180, 혹은 190정도를 키가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어느 정도를 큰 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못 먹고 크던 때 큰 키와 지금 큰 키의 기준도 달라졌을뿐더러, 같은 180cm의 키라고 해도 일반적으로는 크다고 느끼겠지만 농구선수들 사이에서는 작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크다, 작다’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지 상대적인 분별심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크다, 작다' 혹은 '많다, 적다', '지혜롭다, 어리석다'라고 느끼는 등의 모든 분별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인연 따라 짧을 수도 길수도 있을 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크다, 작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고정된 것이 없기에 인식의 극단을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분별은 단지 주위의 환경[인연]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일 뿐인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 혼자 무인도에 살았다면, ‘내가 크다・작다, 잘났다・못났다, 똑똑하다・어리석다’분별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즉, 큰 사람이 있으니 그에 비교되는 작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연(緣)하여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법계는 바로 상대적인 세계, 연기의 세계입니다. 이처럼 일체가 상대적으로 돌아가는 상대의 세계에서, 이 경의 제목에는 재미있게도 ‘마하’라는 절대 개념이 붙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하’는, ‘절대적으로 크고 많고 뛰어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큰 것, 즉 일체를 초월하는 절대적으로 큰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크고, 많고, 뛰어나다는 것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기에 일체의 모든 상대 개념을 초월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일체의 모든 상대적인 것과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이 아니므로 대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상대이기 때문에 절대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하’라는 수식어가 경의 앞에 붙어 있는 것은 단순한 문자의 표현이 아니라, ‘최고의 경지, 부처님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하’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좀 더 자세하게 세 가지 의미로 나누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그 첫째는 ‘크다(大)’의 의미로 이는 우주, 허공, 삼천 대천 세계, 수미산 등을 부를 때 쓰여지는 공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으며, 둘째는 ‘많다(多)’로 팔만 사천, 항하사(恒河沙), 미진수(微塵數) 라는 불교 용어에서 지극히 많음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양적인 개념으로 쓰여지고 셋째는 ‘초월하다, 뛰어나다, 탁월하다’의 뜻으로 불변, 진실, 수승(殊勝)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마하’의 의미는, 감히 우리 범부의 눈으로 자로 재듯이 재어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처음 중국에 불경이 전해질 때, 그 뜻을 번역할 단어가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단어로 번역하면 의미가 변질될 것을 우려해 ‘마하’라는 말을 발음 그대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괜히 기존에 있던 어설픈 단어로 사용했다가는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의미가 한정되어질 수 있음을 경계한 까닭입니다


반야(般若)

 ‘반야(般若)’라는 말은 범어로 ‘프라즈냐(Prajna)’ 라고 하며, 팔리어로는 ‘판냐(panna)’라고 합니다. 반야는 바로 팔리어 ‘판냐’의 음역어로서, 마하와 같이 그 발음만 따서 옮긴 또 다른 예입니다. 이 또한 ‘마하’에서와 같이 그 의미가 퇴색됨을 우려해 따로 번역하지 않고 ‘반야’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야’ 또한 우리 범부의 사량(思量)으로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단어일 것입니다.

 반야를 굳이 번역한다면 ‘지혜(智慧)’라고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한 지혜가 아니라, ‘최고의 지혜, 즉 깨달음에 이르신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부처가 아닌 범부중생으로서 어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단어이겠습니까? ‘지혜’와 비슷한 단어로, ‘지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지혜’와는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들이 계산하고, 암기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능력이 극대화된 것이 ‘지식’이라 한다면, ‘지혜’는 이러한 범부중생의 사량분별(思量分別)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련의 행위에 대해서 오히려 버리고 비울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이 ‘머리 굴리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지혜’라고 하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관조반야(觀照般若)’인데, 이것은 일체의 현상계를 있는 그대로 정견(正見)하는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제법(諸法)의 실상, 즉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고정된 바 없이 비춰 보는 지혜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오직 현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아 현실 세계의 모습을 여실히 깨달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상반야(實相般若)’로 이는 제법의 실상 그 자체,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 세계의 모습 그 자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보는 자와 보여지는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보는 자가 보이는 현실 세계, 우주와 하나가 되어 버릴 때 이것이 바로 실상반야인 것입니다. 이러한 실상반야를 우리가 올바로 깨달아 바르게 비추어 보게 되면, 이것이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인 것입니다. 셋째는 ‘방편반야(方便般若)’로 이것은 문자반야(文字般若)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이상의 실상반야와 관조반야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체의 모든 경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반야는 아니지만, 반야지혜를 이끌어 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방편이 되는 것이므로 반야라고 합니다.

 이상 삼종의 반야는 부처님의 지혜인 깨달음의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한 세 가지 단계라고도 할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라고 일컫는 것은 진리의 당체(當體)인 실상반야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실상반야에 이르기 위해서, 실상반야를 체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계를 밟아가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경전을 읽고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방편반야, 즉 문자반야입니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공부를 한 뒤에는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 실천이 바로 관조반야입니다. 관조반야란 있는 그대로의 실상을 편견, 고정관념 없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는 실천 수행법입니다. 이렇게 방편반야로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그 후 관조반야를 실천했을 때 나타나는 진리의 실상이 바로 실상반야인 것입니다.

 ‘반야’의 힘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 힘은 평등, 절대, 무념(無念), 무분별(無分別), 비움의 경지일 뿐 아니라, 반드시 상대의 차별 현상을 관조(觀照)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현명함이나 지식이 높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모습에 대한 ‘눈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야’의 성취는 인생과 우주의 참다운 실상을 깨닫는 일이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행복을 성취하는 길이고, 사회의 제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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