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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적과 원수가 서로 싸우고 죽이거나,
헐뜯으며 저주를 퍼 붓는다 한들
집착과 악에 물든
자신의 삿된 마음이 주는 재난에는 미치지 못한다.


부처님께서 코살라국의 한 마을에 계실 때, 소 키우는 목동인 난다는 가끔씩 부처님의 법문을 듣곤 했다. 한 번은 신심이 나 부처님을 집으로 초청하여 공양 올리고자 하였지만 부처님께서는 아직 시절인연의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셔서 그 청을 거절하셨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세월이 흐른 뒤 부처님께서는 이제 난다가 바른 불법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여 난다의 집을 직접 스스로 방문하시게 된다. 난다는 기쁜 나머지 온갖 음식으로 7일간 극진히 공양 올렸고, 마지막 날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수다원과를 증득하였다.


수다원과를 증득한 난다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을 먼 곳까지 배웅하였으나 집으로 돌아갈 때 원한을 맺었던 사냥꾼에게 화살에 맞아 죽게 된다. 이에 일부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께 ‘만약 부처님께서 난다에게 찾아가지 않으셨더라면 난다가 죽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하고 여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내가 가든 가지 않든, 그가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 자신에게 주어진 업에서 오는 죽음은 피할 수 없다’고 설법을 하시며, 그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행여 그가 죽기 전까지 집착과 타락과 악에 물든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죽는 것을 염려해야 할 것임을 설하셨다.


적이나 원수에게 원한으로 죽는 것 보다 타락되고 집착된 마음과 삿된 마음을 가진 채 죽는 것이 더 큰 재앙이다. 부처님께서는 난다가 수다원과를 증득할 것임을 간파해 보기도 하셨지만, 난다의 죽음을 미리 알고 계셨다. 그렇기에 난다의 죽음에 앞서 난다를 일깨워주기 위해 스스로 찾아 가셨던 것이다.


만약 생각과 판단, 이기적인 아집이 앞서는 사람이라면 난다의 죽음을 예견했을지라도 도저히 난다를 찾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난다를 찾아가 아무리 좋은 법문을 하고, 난다를 깨닫게 했을지언정 어리석은 중생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그 때문에 난다가 죽었다고 원망했을 것이 아닌가.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제자들과 일부 신도들은 위에서 보듯이 부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처님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은 사소한 한 가지 행위일지라도 그 모두가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 그 목적은 바로 그를, 중생들을 일깨워주고 깨닫게 해 주기 위한 ‘자비’의 일환이다. 부처님은 오직 난다를 죽기 전에 깨닫게 해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일 뿐, 그로 인해 당신에게 원망과 미움과 난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돌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로인해 부처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심지어 결국은 부처님께서 난다를 죽게 한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부처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다만 난다를 일깨우고자 하는 동체대비의 마음이 부처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일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이, 심지어 적과 원수가 아무리 헐뜯으며 저주를 퍼 붓는다 할지라도 집착과 악에 물든 삿된 마음이 주는 재난에는 미치지 못함을 설파하신다. 비록 난다는 원한을 가진 원수 사냥꾼에게 죽임을 당했지만, 그 죽음보다 더 큰 재앙은 난다의 마음에 물든 집착과 악의 삿된 마음이다. 만약 난다가 살아 있다고 한들 마음속에 집착과 악에 물든 사악한 마음으로 미워하고 헐뜯으며 산다면 그것은 차라리 부처님 법문을 듣고 깨달은 뒤에 죽음을 당하는 것만 못하다.


죽음은 전혀 재앙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를 살려주기 위한 우주법계의 계획일 뿐이다. 삶과 죽음이 둘이 아닌 경지에서 본다면 죽음은 하나의 자연스러운 변화일 뿐이다. 인간이 스스로 지어 낸 업장을 녹여주기 위한 우주법계의 자비로운 계획의 일환인 것이다. 그러니 더 큰 차원의 이치에서 본다면 죽음은 아주 사소한 우주적인 계획의 한 부분일 뿐이고, 그것은 우리를 고통 받게 하기 위한 목적이 아닌 우리를 돕고,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더욱이 그것은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나 자신과 우주가 합작해 낸 계획이며, 내 스스로 결정한 것이지 누가, 절대자나 부처가 억지로 나를 죽이려고 한 것은 아니다. 깊은 영혼의 차원에서 보면 내 삶의 모든 부분은 결국 내가 만들고, 내 스스로의 동의와 계획에 의해 창조된 것에 다름 아니다.


정말 위험한 재난은 죽음이 아니라, 마음 속의 원한과 싸움과 증오와 저주, 집착과 삿된 악에 물든 마음이다. 죽음은 아름다운 순리의 한 모습이지만, 원한과 싸움, 증오와 저주와 집착 등은 인간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순리를 거스르는 인위적인 악에 물든 삿된 마음이 아닌가. 어리석은 이라면 집착과 원한은 가지면서 죽음은 멀리하려 들겠지만, 지혜로운 이라면 죽음은 전혀 멀리할 것이 아님을 안다. 오히려 마음속의 삿된 재난의 씨앗들이야말로 나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임을 분명히 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대신에 매 순간의 삶을 죽이고 있는 마음속의 재앙을 살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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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몸은 내가 아니다 – 법구경 41게송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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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머지 않아 이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야 만다.
그 때 이 몸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 것이다.


한 스님이 좌선 수행 중에 몸에 부스럼이 생기더니 온 몸에 퍼졌고, 종기가 피고름이 되어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주위에서 스님들이 간호해 주고, 대소변도 가려주며 도움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이 점점 더 심해져, 대소변도 못 가리고, 움직이지도 못하자, 스님들의 간호도 줄어들더니 이내 헛간 땅바닥에 버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부처님께서 신통력으로 이를 보시고 직접 찾아가 물을 데워 목욕 시키시고, 옷을 직접 빨아 입히신 뒤 다음과 같이 설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몸이 이렇게 아프고 힘겹지만 이 몸은 결국 누구나 흙으로 돌아간다. 몸에 집착할 것 없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아픈 몸에 대한 집착을 여읜 이 비구는 결국 법문 끝에 아라한과를 성취하였지만 곧 열반에 들게 된다. 이에 제자들이 왜 ‘그런 고통을 당한 뒤에 열반에 들었는지’를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전생의 죄업 때문이라고 말하시며 전생담 들려주신다. 이 비구는 가섭불 당시 새를 잡아 왕실에 바치는 사람이었는데, 왕실을 속여 더 많은 새를 잡아 내다 팔아 이익을 챙기곤 했다. 그런데 많은 새를 잡다보니 보관이 문제가 되어 새의 날개쭉지를 부러뜨리고 다리를 꺾어 도망치지 못하게 해 놓고, 죽지만 않게 한 뒤 때마다 내다 팔거나 잡아먹곤 했는데 바로 이러한 죄업으로 인해 이번 생에 몸에 병이 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이 하루는 탁발을 온 아라한 수행자를 보고 공양하면서 감동을 받으며 마음이 평화로와지는 것을 보고 ‘저 또한 스님께서 성취하신 것 같은 위없는 진리를 성취하도록 발원합니다’ 라고 발원하였기에 비록 인과응보에 따라 병을 얻기는 했지만 지극한 발원으로 인해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된 것이다.


몸이란 결국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그 때 이 몸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썩은 나무토막처럼 버려져 뒹굴게 된다. 결국 이 몸은 내가 아니다. 항상하는 것이 아니며,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잠시 이번 생에 인연 따라 내가 돌보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은 이 몸이 ‘나’라고 하는 아상, 아집 때문에 생겨난다.
병으로 인해 괴로움을 느낄지라도 그 병든 몸이 내가 아님을 자각하게 된다면 병으로 인해 통증은 느낄지언정 마음까지 아프거나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몸이 내가 아니란 자각이 있다면 몸에 딱 붙어서 몸에 병 난 것을 가지고, 나에게 병이 났다고 착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병은 ‘몸’에 난 것이나 ‘나’에게 일어난 것은 아니다. 몸은 잠시 잠깐 내가 인연 따라 그리 길지도 않은 이 생에 관리해 주는 것일 뿐이지, 몸 자체가 나인 것은 아니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음에 대해 공포스러워하는 것은 다 ‘이 몸’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몸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죽음은 내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몸은 내가 아니다. 몸이 내가 아니라는 자각이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는 삶은 영원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매 순간순간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고, 지혜롭고도 자비롭게 살아내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지, 죽음이 올까봐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몸이 내가 아니라면 죽음은 그저 껍데기를 갈아입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유효기간이 다 된 늙고 병든 몸을 버리고 생생하고 새로운 어린 아이의 천진난만하고도 완전한 몸을 받는 것이 어찌 괴로운 일인가. 그것은 마치 여행을 떠나는 것 처럼 설레고도 즐거운 삶의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이 직장을 다니다가 또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정도라고 할까.
다만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삶을 올바로 살지 못한 사람이다. 올바른 선업을 짓지 못하고, 사악한 일들을 일삼으며, 화와 욕심으로 한 생을 점철한 사람에게 죽음은 두렵다. 다음에 갈아입을 육신의 옷이 무엇이 될지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은 결국,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삶이 두려운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나 병고가 아니다. 매 순간순간의 삶이다. 매 순간의 삶을 얼마만큼 깨어있게 살 것인가, 매 순간의 삶에서 얼마만큼 자비를 실천할 것인가 이 지혜와 자비의 정신이야말로 삶을 매 순간 온전히 살아있게 만든다.
이 비구는 병과 죽음이라는 괴로움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부처님의 법문을 통해 병이나 죽음이 괴로운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병이 내가 아님을 알았고, 이 몸이 내가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일체의 모든 욕망과 집착과 아상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병고에 찌든 육신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아픈 몸을 통찰하고, 삶의 이치를 철견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묻는다. 아라한과를 증득했는데 어떻게 바로 죽을 수가 있는가 하고.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그 자리에서 불사의 신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깨달음을 얻으면 영원히 죽지도 않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거슬러 자기 마음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능력 면에서 본다면. 그러나 깨달음을 얻고 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이치를 거스를 필요가 없고,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거스를 이유가 없어진다. 그저 편안히 쉰다. 우주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그 모든 법계의 이치에 온전히 내맡기고 완전히 휴식한다.
인간들은 병이 오면 기도를 한다.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아라한은 빨리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할 이유가 없다. 더 오래 살게 해 달라고 조를 필요가 없다. 아라한은 죽음도 병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수용한다. 그러한 대자연의 이치, 인과응보의 이치를 거스르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아라한과를 증득하면 증득한 그 생에 남은 모든 업을 청산하고 말끔히 정리하고 간다고 한다. 이 비구는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지만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업이 있음을 알았고, 물론 어쩌면 그것을 거슬러 더 오래 살아 남아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가장 지혜로운 흐름을 타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생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 죄업에 대한 과보를 그 자리에서 받고 열반에 든 것이다.
지혜로운 삶은 이처럼 걸림이 없다. 그 어떤 흐름도 거스르지 않는다. 이 몸이 나라는 생각이 있으면 이 몸이 죽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겠지만, 이 몸이 내가 아니란 온전한 자각이 있는 자에게 죽음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몸도 내가 아니며, 병도 내가 아니고, 죽는다고 한들 그것이 나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처럼 몸을 나라고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병, 죽음, 늙음 등 그 어떤 자연 현상에 대해 괴롭다고 느끼지 않는다.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중생에게는 고통이지만 수행자에게는 고통이 아니다. 병들고 늙고 죽는다는 사실 앞에 우리가 왜 고통 받아야 하고, 두려워해야 하는가. 이 몸은 내가 아니라는 이 진실 앞에 두려움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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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있는데,
사진은 벌써 가을 단풍이네요...]

28.
깨어있는 명상으로써 마음을 관하는 수행자는
방일과 근심에서 벗어나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본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듯이



어느 날 삡팔리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마하가섭이 아침에 탁발을 하고 돌아와 공양을 드시고 자리에 앉아 천안으로 사람과 짐승들을 포함한 일체 중생들이 어떻게 업에 따라 나고 죽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을 닦아 밝아졌는지, 또 어떤 사람은 얼마나 나태하고 산만한 마음으로 생을 허비하고 있는지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이번 생에 이렇게 부유하게 태어났으며, 또 어떤 사람은 어떤 과거생의 인연으로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지, 또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인연과 업은 어떤 과거생의 수많은 인연으로 얽혀있었는지 등에 대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연을 환히 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가섭을 관찰하시고는 가섭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어 말씀하신다.

“가섭이여, 일체 중생들이 각자의 업에 따라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를 환히 깨달아 아는 것은 오직 붓다의 지혜에만 한계가 없다. 다른 이의 지혜로서는 중생들이 여기 저기에서 업에 따라 부모를 만나며 나고 죽는지를 다 알 수 없다.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네 능력 밖이다. 붓다만이 이 모든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있느니라.”

물론 가섭 또한 아라한이기 때문에 전생과 업에 대해 볼 수는 있을지라도 일체 모든 중생들의 심지어 축생들과 곤충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어떤 업 때문에 저 두 사람이 원수 지간이 되었는지, 어떤 업 때문에 저 아이들이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업 때문에 저들은 이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거나, 이별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인연이기에 이번 생에 함께 결혼하게 되었는지, 또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며, 주인과 하인이 되었는지 일체 모든 중생의 일체 모든 업연을 하나 하나 낱낱이 환히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업과 인과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스승들은 무수히 많이 있었지만 부처님처럼 일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과 윤회의 사실을 분명하고도 환히 알고 보는 분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부처님처럼 그 무수히 많은 출재가의 재자들에게 그것도 분명한 대기설법을 통해 때로는 말 한마디로, 때로는 지속적인 수행의 주제를 내어 주고 법을 설해 줌으로써 아라한으로 이끈 이는 없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과거 전생의 수많은 인과와 윤회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어떤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인과 이야기를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또한 믿기 힘들 정도로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 하나만을 가지고 수많은 이들이 때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과를 증득하거나 또 어떤 경우는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심지어는 수십, 수백명이 동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능력은 인류 역사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영적인 스승일지라도 가능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스승이 등장하고, 성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능력은 우리의 생각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러나 부처님 같은 이런 능력은 그 어떤 이에게도 없었다.

바로 이 가섭에게 한 설법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가섭이 어떤 제자인가. 마하가섭이라는 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처님의 상수 제자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제자요, 선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물려받은 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가섭 정도의 지혜라면 인류의 수많은 성자와 영적 스승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분 가운데 한 분이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는 이토록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지혜야말로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것인가.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접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전생부터의 선근 공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공부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태어나 우리도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부처님의 법문 한 자락 끝에 저마다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선근 공덕을 지어야 하고, 바로 그 선근이란 것이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다름 아니다.

방일함이 없이 깨어있는 관찰의 수행을 닦는 수행자는 언젠가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려다 볼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한 단계 아래로 깔본다거나,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의 대지와 사람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듯이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붓다는 모든 중생들의 인과와 업과 근기 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근기와 업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걸맞는 수행재료를 줄 수도 있고,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처님만 유독 수많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깨어있는 명상이라는 마음 관찰의 수행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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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인도의 홀리 축제, 델리 기차역 앞에서]

26.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게으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값진 보물처럼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한다.

27.
언제나 깨어있으라.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값진 보물을 지키듯 깨어있음의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방일하지 않는다. 매 순간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깨어있으며 명상의 힘을 키우는 자,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않는 자, 그런 수행자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깨어있음의 유무에서 온다. 지혜롭게 깨어있는 이는 매 순간 순간 세상을 향해 온 존재를 열어두고,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활짝 깨어 지켜본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의 잣대는 무의미하다. 과거의 판단과 기억과 고정된 관념으로 현재를 걸러서 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어 볼 뿐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의 눈은 언제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놀랍고도 신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난생 처음 만난 것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내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든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마주한다. 그에게 모든 대상은 ‘다만 그러할 뿐’,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치우친 견해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으며, 다만 중도적인 열린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항상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 온갖 판단 분별을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재단하려 든다. 그에게 보여지는 모든 대상은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 양자 택일의 것일 뿐이다. 극단의 두 가지 판단 속에는 언제나 괴로움과 집착이 내포되어 있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이고, 진부하고도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가 보는 시선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을 보더라도 과거의 비슷했던 기억과 분별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과거의 틀 속에 가둔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고, 눅눅하며, 과거와 미래로 생각을 끄집고 다니느라 늘 힘이 없고, 빨리 지친다.

어느 날 사위성에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라 불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 몸에 똥과 재를 바르고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해 대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이 축제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인도의 홀리 축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의 홀리 축제는 약간 성격이 달라진 듯 한데, 각종의 물감과 진흙으로 범벅하여 온몸에 뒤집어 쓰거나 바르고,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홀리는 남자에게 눌려 살던 여성이나, 낮은 계급의 지위에서 항상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을 위한 날로, 평소 눈엣가시이던 상층 카스트나 남성들에게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그 공격이란 것도 흉악한 것이 아니라 물감을 푼 물이나 물풍선 따위를 던지면서 장난을 치는 수준으로, 대부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간 계급에 짓눌려 있던 이들이 모처럼의 일탈을 즐기는 수준이다.

부처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가 지금의 홀리축제처럼 이어져 내려온 것이 맞다면 아마도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축제의 성격이 순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부처님 당시의 그 축제는 주로 쌍스러운 욕설과 온갖 악담을 하는 등 그 부작용이 더 많았던 듯 하다.

이 축제 때인 일주일 동안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스님들일지라도 어김없이 소똥과 재를 맞으며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던 듯 하다. 그러다보니 부처님과 승단에 늘 공양을 올리던 재가신도들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일주일 동안은 음식을 준비해 사원으로 미리 보내고 절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주일 간의 축제가 끝나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한 재가신자들이 부처님께 그동안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에 대해 말씀드리며 부처님을 공양에 초청하지 못했던 연유를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며, 지혜로운 사람들은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깨어있음이라는 관 수행을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축제에서처럼 악담과 욕설의 업을 지으며 깨어있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설법하셨다.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고,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며 언제나 깨어있으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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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마음을 잘 절제하고 게으름 없이 노력하며
주의 깊은 마음 관찰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지혜로운 이는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다.



마음을 잘 절제하고 게으름 없이 노력하라. 마음에서는 온갖 것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온갖 생각들, 온갖 욕망과 성냄과 과거의 잔재들이 끊임없이 올라온다. 이 올라오는 생각, 느낌, 욕구들을 잘 절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렇게 올라오는 생각들에 나 자신을 빼앗기고 휘둘려 그 생각과 감정, 욕망과 화에 나의 주인자리를 내 주고 말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마음을 잘 절제할 수 있는가? 주의 깊은 마음 관찰을 통해 그 마음을 잘 절제할 수 있다. 게으름 없이 주의 깊은 마음 관찰 수행을 지속시키며 노력해 갈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을 수 있다.

주의 깊은 마음 관찰을 통해 마음을 잘 절제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는 지혜로운 이는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다. 여기서 홍수란 네 가지 거센 폭류를 말하는 것으로 우리를 생사윤회의 바다로 거칠게 몰아 넣는 거센 흐름을 말한다. 즉 윤회 바다의 거친 흐름과 폭류, 홍수 속에서 헤매다가 안전한 의지처인 섬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지혜로운 이는 마음 관찰 수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의지처로 삼아 안전한 섬에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홍수라고 표현한 네 가지 거센 흐름인 사폭류(四暴流)는 감각적 쾌락이라는 욕망의 거센 흐름(欲流), 그릇된 믿음과 견해라는 거센 흐름(見流), 자아의 집착에서 오는 존재의 거센 흐름(有流),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오는 거센 흐름(無明流)을 말한다. 이 네 가지 거센 흐름 때문에 우리는 생사 윤회라는 바다로 거센 흐름의 폭류에 휩쓸려 떠내려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감각적 쾌락을 즐기고 욕망에 빠지게 되면 그것은 거센 폭류가 되어 우리를 홍수가 휩쓸고 가듯 순간 생사윤회의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그릇된 믿음과 삿된 견해 또한 우리를 생사 윤회의 폭류에 휩쓸리게 하며, 아상의 집착에서 오는 아집과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음 역시 거센 흐름이 되어 우리를 생사 윤회의 고해바다에 빠지게 한다.

이렇듯 거센 격류에 휩쓸려 생사 윤회의 고통 바다로 떠내려가 바닥을 발견하지 못하고 헤매다가 섬을 발견한다면 얼마나 안전하고 평안할 것인가. 바로 그러한 안전한 섬을 쌓는 일이 바로 주의 깊게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이다. 생사 윤회의 모든 고통 바다에서 격류에 휩쓸리는 것을 막아주고, 안전한 섬으로 이끄는 것이 바로 마음관찰 수행이요, 이것이야말로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고, 깨달음에 이르는 오롯한 길인 것이다.  


라자가하에 부유한 은행가의 딸이 성숙해지자 부모는 그녀를 너무 심하게 감시하며 칠층 꼭대기 방에 가두었다. 인도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여인의 순결과 순종을 집착적으로 지키려는 습관이 있다보니 이런 일들이 다반사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남녀간의 사랑이란 보호하고 떨어뜨리려 애쓰면 애쓸수록 더 불타오른다는 것 또한 이치이고 보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그 때도 유효했던가 보다.

그런 보호와 감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하인과 사랑을 나누고 도망쳤다. 도망쳐서 살다가 아이를 낳을 때가 되어 아내가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정으로 가려다가 길 위에서 아이를 낳아 이름을 빤타카(길)라고 지었다. 이 첫째 아이가 마하빤타카이고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 둘째도 길 위에서 낳았으니 둘째 이름이 우리가 주리반특으로 잘 알고 있는 쭐라빤타카였다.

이후에 친정 부모는 마하빤타카와 쭐라빤타카를 키우게 되었고, 할아버지를 따라 부처님께 가서 자주 법문을 듣곤 했다. 그러던 중 먼저 마하빤타카가 출가하여 무색계 선정에까지 이르른 뒤에 동생도 출가를 시켜 이런 행복을 경험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동생을 출가시키게 되었다. 그러나 쭐라빤타카는 머리가 둔해 4개월 동안 단 한 구절의 가르침도 외우지 못했다. 쭐라빤타카는 전생에 가섭불 시절에 둔한 스님을 보고 바보라고 놀린 과보로 이번 생에 아둔한 인물로 태어난 것이다.

어느 날 부처님과 스님들의 주치의이자 유명한 의사였던 지바카가 스님들을 공양에 초청하자, 공양 배정의 소임을 맡고 있던 마하빤타카가 쭐라빤타카는 아직 공양을 받을 만한 수행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공양초청에서 제외했다. 이에 서운함을 느낀 동생 쭐라빤타카는 환속을 결심하고 절을 떠나다가 이러한 정황을 아신 부처님께서 쭐라빤타카에게 그의 근기에 맞는 특별한 수행법을 알려주게 된다.

그것은 ‘라조 하라낭’으로 이는 ‘때를 닦다’ ‘더러운 것을 닦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인데, 라조 하라낭을 염하며 마루를 닦도록 수행의 재료를 주셨다. 이에 고무된 쭐라빤타카는 마루의 때를 닦으며 수건이 때에 물드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은 변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광명을 놓아 쭐라빤타카에게 ‘수건이 때로 물드는 것처럼 사람 마음도 때로 물든다. 탐욕의 때, 성냄의 때, 무지의 때가 그것이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진리를 보지 못한다. 바로 그러한 때를 완전히 제거하면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라는 법을 설해 주시고, 이에 더욱 용기를 얻은 쭐라빤타카는 더욱 마음을 모아 관찰함으로써 머지않아 아라한을 성취하였을 뿐 아니라 둔함이 사라지고 지혜가 증장되는 공덕을 얻었다.

쭐라빤타카는 과거생 왕이었을 때도 수건에 얽힌 인연 이야기가 있었다. 왕이었을 때 성을 순회하면서 이마에 땀이 흘렀고, 깨끗한 수건으로 닦자 수건이 더러워지는 것을 보고 ‘모든 것은 인연 따라 변해가는 것이구나’ 하는 무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졌던 것이다. 수건이 때로 물들고 변해가는 그 단순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며 마음을 모은 것이 무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져왔고, 그러한 이해가 선근의 공부 인연으로 쌓여 이번 생 쭐라빤타카는 라조하라낭을 통해 아라한에 이르게 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과거 전생의 작고 사소한 깨달음의 선근까지도 환히 알고 보시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시기에,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모든 이들의 영겁 전생까지를 살펴본 뒤 저마다의 근기에 맞는 수행의 재료를 내려 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수행이란 것, 해탈이란 것은 크고 대단하며 웅장한 어떤 것 속에서만 얻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다 보면 아주 작고 사소하게 느껴지는 것들을 부처님은 수행의 재료로 주시고,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일화를 많이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촛불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거나, 산불이 나는 것을 보고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거나, 흐르는 물을 관하거나, 마음 속에서 올라오는 생각을 관하거나, 느낌을 관하거나, 욕망을 관하는 등의 다양한 수행 재료로써 저마다의 근기와 그릇에 맞는 수행을 닦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했을 때 그 대상은 결코 작지 않다. 우주법계의 진리가 수미산 보다 더 큰 우주 속에도 담겨 있듯이 티끌보다도 작은 데에도 똑같은 무게의 진리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을 보면 크고 웅장하며, 감각을 자극하는 대단한 것들에만 관심이 있고, 무엇을 하더라도 세계 최대, 동양 최대, 최고, 최초 같은 것만을 관심 있어 하지만 사실은 봄에 나지막이 피어나는 소박하고 작은 꽃 한 송이 속에서도 우주의 진리는 연주되고 있는 것이며, 집안을 수건으로 닦거나, 비질을 하거나, 설거지를 하는 그 사소한 일과 속에도 마음만 모아 집중하고 관찰할 수 있다면 그 안에서 우주의 진리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쭐라빤타카가 아라한을 성취한 것을 아시고는 부처님께서 지바카의 공양에 초청하여 많은 대중 앞에서 부처님을 대신해 법을 설하도록 하셨다. 후에 비구들이 쭐라빤타카에 대한 이야기로 법담을 나누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위의 게송을 읊으셨다.

아무리 어리석고 바보 같은 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지식이 없고 공부를 못하며 명석하지 못한 이라 할지라도, 다만 마음을 절제하고 게으르지 않은 노력으로 주의 깊게 대상을 관찰하는 수행자는 그 어떤 홍수로도 휩쓸리지 않는 섬을 쌓은 것과 같이 안전하고 평안한 곳에 결국에는 이르게 된다. 아무리 모자라고 어리석다고 할지라도 자기 안에는 자기 스스로 의지처로 삼을 만한 지혜의 소식이 금강과도 같이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찾는 것은 지식이나 똑똑한 것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게으름 없는 마음 집중의 힘으로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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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축서사]

24.
누구든 마음을 모아 깨어있음을 실천하고
그 행동이 순수하고 진중하며
자신을 잘 다스려 법다운 생활을 하면
그의 이름은 빛나고 축복과 존경은 늘어갈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예와 권력과 지위를 탐하고, 자신에게 축복과 존경이 늘어가기를 원하고 있는가. 우린 누구나 사회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를 원하고, 축복스런 일들이 내게 많이 일어나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노력하고 애쓴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노력하고 애를 쓰는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존경받기 위해 우리는 더 나를 드러내야 하고, 더 돈을 많이 벌어야 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만한 자리에 올라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높은 지위나 권력, 그리고 부와 명성은 그대로 우리를 실질적으로 높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준다고 착각하고 있다. 높은 자리가 곧 높은 인격과 높은 존경과 높은 축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완전히 핵심을 벗어난 것이다. 어떤 높은 자리가 그 사람을 높게 만드는 것이 아니며, 어떤 명성이 그 사람을 드높이는 것이 아니고, 많은 부귀영화가 그 사람을 축복해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재산과 명성과 부와 권력을 쥐게 되면 그로인해 우리 마음은 더 많은 욕심과 우월감과 자기가 잘났다는 아상(我相)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다. 그리고 그런 아상과 아집은 결국 내면의 정신적인 타락을 가져온다.

핵심은 외부적인 것에 있지 않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오름으로써 나 자신도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더 많은 욕구를 채우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자리에 올랐다고 해서 그것이 나라는 존재 자체를 존귀하게 드높여 주는 것이 아니다. 물론 겉모습은 그럴싸해 보인다. 남들도 나를 칭찬하며, 나에게 잘 보이고자 애를 쓰기도 한다. 점점 더 나라는 존재는 타인들과는 다른 월등한 높은 존재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판단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진짜 자신의 본 모습과 겉에 드러난 모습 사이의 거리감이 생겨나고, 그 간격만큼 정신은 중심을 못 잡은 채 이리저리 휘둘리게 된다.

참된 존경과 축복은 그런 껍데기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존경 받을만한 자리에 올라가야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경 받을만한 행동을 함으로써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존경은 그 행동에서 나오지, 어떤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축복 또한 축복받을 만한 위치에 올라갔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과 생활이 축복받을 만 할 때 따라온다. ]

누구든 그 행동이 순수하고 진중하며 자신을 잘 다스려 법다운 생활을 하면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을만하다. 누구든 마음을 모아 깨어있음을 실천함으로써 매 순간순간의 행동이 법다워 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축복된 삶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행동과 삶에 있지 어떤 자리나 위치나 상황에 있지 않다. 부처님께서는 ‘행위에 의해 도둑이 되고, 행위에 의해 무사가 되며, 행위에 의해 신하가 되고, 행위에 의해 왕이 된다. 현자는 이와 같이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본다. 세상은 행위에 의해 존재하며, 사람들도 행위에 의해서 존재한다. 수레바퀴가 축에 매여 있듯 세상 모든 것은 행위에 매여 있다.’고 하심으로써, 우리 삶에서 나를 규정짓는 것은 그 ‘자리’나 ‘지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라고 하셨다.

어떤 행위를 통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펼쳐진다. 도둑질하는 행위와 남의 것을 탐내는 마음은 곧 우리를 도둑으로 만들고, 수행자다운 행위와 생각은 곧 우리를 거룩한 수행자로 만든다. 몸과 말과 생각으로 한 행위야말로 우리의 삶을 결정한다.

인간으로써 행할 수 있는 가장 성스럽고 법다운 행위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깨어있는 행위다. 순간순간 몸과 마음을 관찰하고, 몸과 말과 뜻의 삼업이 어떤 행위를 이어가는지를 온전히 관찰하는 것만이 우리의 행을 축복되게 만든다. 깨어있는 행위에는 이처럼 축복이 깃들며, 세상 사람들의 존경이 뒤따른다. 마음을 모아 깨어있는 이의 행동은 가볍지 않아 진중하고, 이해타산과 높고 낮은 차별을 따지지 않아 순수하다. 깨어있는 마음 관찰로써 매 순간 자신을 잘 다스리는 법다운 생활이야말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고의 성스러운 행위요 축복의 행위다. 우리의 평범한 행위가 비범해질 수 있고, 밥 한 끼 먹는 행위조차도 성스러워질 수 있고, 일상적인 말 한마디에도 축복과 진중함이 담기며, 삶 자체가 법다워질 수 있는 그 실천수행의 정점에 ‘깨어있는 마음관찰’이 있다.


부처님 당시 한번은 라자가하에 유행병이 퍼졌다. 한 은행가의 주인도 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자 아들인 꿈바고사까에게 숨겨둔 모든 황금과 보석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고 아들을 먼 친척집으로 대피시켰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아들이 돌아와 황금과 보석을 찾았지만 갑자기 이것을 꺼내어 쓰면 사람들에게 의심도 받고 절도 혐의를 받을 것을 염려하여 우선 평범한 일꾼이 되어 성실히 일하기 시작했다. 물론 황금과 보석을 가져다가 자유롭게 쓰면서 풍족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삶을 포기하고 평범하고 성실한 일꾼으로 살았으며,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깨어있는 삶을 살았다. 또한 그는 지혜로웠으며 순수했고, 행동에 있어서도 진중하여 자신을 잘 다스려 나갔다.

어느 날 평소처럼 꿈바고사까는 큰 소리로 일꾼들을 깨워 일을 나가려고 하는데, 그 소리를 빔비사라왕이 들었다. 빔비사라왕은 목소리를 듣고 그 주인공의 운명을 알아내는 재능이 있었는데, 그 목소리는 분명 대단한 재산가여야 하는데, 저런 일꾼이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아 그의 신분을 조사케 한 결과 모든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꿈바고사까도 모든 것을 고백했다. 이에 왕은 지혜가 빛나며 생각이 깊고 생활 속에서 늘 깨어있음을 실천하는 주의력에 감탄하여 그의 딸을 꿈바고사까에게 시집보내기로 결정하고 부처님께 데리고 갔다.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면서, 꿈바고사까는 많은 재산과 황금이 있었지만 거기에 얽매이거나 집착하지 않고, 성실하고도 깨어있는 삶을 통해 지혜로운 삶을 살고 있음을 설하시면서, 그 황금과 보석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큰 집을 짓거나, 그 재산을 뽐내고 누리며 사는 삶이 축복되고 존경 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고 법다우며 지혜로운 깨어있음의 삶이야말로 가장 존경받을 만하고 축복스런 삶이라고 설하셨다.

불교는 부유한 재산가 자체를 부정하는 종교는 아니다. 모두가 가난을 위해 재산을 내다 버릴 필요는 없다. 또한 명예와 권력을 죄다 버리고 은둔해 살기만을 바라는 종교도 아니다. 불교는 부자와 가난, 높고 낮음, 귀함과 천함 이 모든 두 가지 분별을 다 여의는 가르침이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부처님의 재가 재자들 가운데는 거지도 있었고, 불가촉천민도 있었으며, 왕도 있고, 재산가들도 많았다. 그들 모두에게 무소유를 주장함으로써 가진 재산과 권력을 다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겉에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행위요, 마음이다.

참된 무소유는 물질적인 소유를 다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 얽매이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도 무소유를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가난해서 소유한 것이 없는 사람도 무소유를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다. 가난한 자가 소유하지 못함을 부러워하고, 자신의 없음을 비통해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소유욕에 휘둘린 사람이다. 부유한 자가 자신의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며 소유한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소유하면서도 무소유를 실천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꿈바고사까 처럼 재산을 많이 소유했더라도 그것에 의지해 자신을 재산의 노예로 만들지 않으며, 재산이 없는 것처럼 하루 하루를 성실함으로 살고, 모든 행위에 있어 깨어있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면 이런 사람에게는 우주의 축복과 사람들의 존경이 뒤따르는 것이다. 부자이되 아름다운 부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부자, 부자에 집착하지 않는 부자, 부자이지만 그 삶이 간소하고 청빈을 실천하는 부자, 이 부유함이 내것이 아니라 법계에서 잠시 빌려 온 것임을 알고 인연 따라 베풀 줄 아는 부자가 되어야 한다.

부유한 재산을 내 것으로 쌓아두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우주적인 생명력이 정체되고 막히기 때문에 더 이상 재산이 쌓일 수가 없다. 그러나 나에게로 들어 온 재산을 꽉 붙잡아 정체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이웃에게로 회향하고 소통시키는 사람에게 이 우주의 모든 풍요로움은 찾아든다. 그런 사람에게 이 우주는 풍요로움을 세상 곳곳으로 균형 있게 나누어주는 막중한 임무를 부여하기 위해 계속해서 풍요로운 것들을 보내주는 것이다.

나 자신을 돌이켜 보라. 나는 과연 세상의 모든 풍요로움을 소통시키고 나누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것’만을 소유욕으로 가둠으로써 우주적인 에너지를 정체시키고 있는가. 이 한 생을 살면서 부처님을 대신해, 신을 대신해 우주법계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이기와 아집으로 온통 꽉 막힌 소인배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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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깨어있음

21.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이며
깨어있음에 나태한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바르게 마음을 관(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

22.
이러한 진리를 온전하게 깨달아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수행자는
그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法悅)을 누린다.
그는 언제나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 위에 서 있다.

23.
언제나 굳은 의지력으로 깨어있음의 명상을 수행하며
매사에 주의 깊은 자각으로 평화와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러한 현자는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어있음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요 영원한 동반자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 깨어있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삶을 100% 완전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깨어있는 순간은 영원히 사는 순간이지만, 깨어있지 못한 순간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 거창한 어떤 것이거나, 수행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어야만 하는 성취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모든 순간에 일어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이 완성된 순간만 깨달음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집중하여 현재를 관함으로써 깨어있는 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그는 순간 순간 깨어있음 속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린다.

삶은 매 순간 완성되어 있다. 모든 순간이 완벽하다. 그 어떤 깨달음의 달성과 성취를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 일은 수행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며, 깨어있음의 순간이 바로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이요, 완성된 순간임을 바로 아는 지혜가 깨달음을 찾는 불가의 오래된 방법이다.

깨어있음이란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혹은 다른 어떤 장소로 뛰어다니게 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몸과 마음을,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다만 관하되 분석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끊임없이 삶을 관하라. 몸과 마음을 관하라. 처음에는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관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마음이 이리저리 원숭이처럼 날뛸 것이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끊임없이 날뛰느라 한 순간도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더라도 굳은 의지력을 가지고 마음을 관하라.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아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의지력과 주의 깊은 자각으로 삶을 관하는 깨어있음의 순간이 길어지다보면 조금씩 깨어있는 순간의 평화와 고요를 나아가 선정과 삼매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모든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코삼비국의 왕비인 사마와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종을 통해 전해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다른 왕비인 마간디야가 사마와띠를 질투해 부처님과 불결한 내통을 한다거나, 왕을 독살하려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왕비의 궁에 불을 질러 사마와띠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세 번에 걸친 마간디야의 음모와 살해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죽기 직전까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집중의 관수행을 통해 깨어있음을 지켜나갔고, 죽음의 순간에도 불길에 휩싸인 궁 안에서 당황하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며 깨어있음의 좌선수행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결국 죽음 직전에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사마와띠의 죽음을 안 국왕은 마간디야의 짓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발뺌할 것을 알고 ‘아, 이제야 안심이다. 그동안 사마와띠가 나를 죽이려 하여 공포에 떨었는데, 누군가가 이런 왕의 근심을 알고 대신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이 일을 한 사람과 도운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큰 보상을 하겠다’고 묘수를 썼다. 이에 마간디야와 그의 친척들이 궁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소행임을 밝히자 왕은 그들을 모두 처참히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세상 뿐 아니라 비구스님들 간에도 화제가 되자 부처님께서 사마와띠와 그 궁녀들이 왜 불에 타 죽게 되었는지 그녀들의 전생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전생에 왕비와 궁녀로 물놀이를 갔다가 따뜻한 불을 쬐고 싶어 근처의 작고 허름한 초막에 불을 붙였는데, 마침 그 초막이 왕의 존경을 받는 빳쩨까붇다라는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있었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왕비와 궁녀는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면 큰 벌을 받을까봐 아예 빳쩨까붇다를 화장시켜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보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이번 생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의지력을 가지고 꾸준히 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와띠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이처럼 깨어있는 수행자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을 누리고, 마침내 저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열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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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경전을 아무리 많이 외우고 설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겨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소만 세고 있는 목동일 뿐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없다.

20.
경전을 아무리 적게 외우고, 적게 설하더라도
행동에 옮겨 법을 실천하며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와 평안을 얻고
생사를 비롯한 그 어떤 것에도 집착을 두지 않는 이는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다.



불교의 지혜공부와 세상의 지식공부는 똑같이 배운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은 전혀 다른 방향의 실천을 이끈다는 점에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불교의 지혜는 비우도록 이끄는 가르침이고, 세상의 지식은 쌓도록 이끄는 가르침이다. 불교의 경전에 담긴 지혜의 가르침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비우고, 놓도록 이끎으로써 마음이 평화로와지지만, 세상의 수많은 지식들은 배우면 배울수록 더 많이 벌고 싶고, 욕심을 채우도록 이끎으로써 우리의 욕망을 더욱 커지게 만든다.
그렇기에 불교 경전에 담긴 지혜를 공부하는 이는 공부하면 할수록 더 욕심이 비워지고, 집착이 놓여지며, 그에 따라 삶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와지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불교 공부를 세속의 지식 공부 하듯이 하는 이는 여전히 불교경전의 지혜를 통해 삶의 욕망을 도모하고자 할 뿐, 마음을 비우지는 못한다.

내가 아는 불교학과 교수님들 가운데 많은 분들은 불법을 공부함으로써 나날이 행복해지고, 마음이 평화로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몇몇 교수님들은 불법을 공부함으로써 좀 더 높은 교직에 오르고자 하거나, 더 유명한 교수가 되고자 하거나, 부업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팔아 더 부유해지기를 원하기도 한다. 이것은 불교의 목적을 완전히 망각한 일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후자의 교수님들, 후자의 수행자들, 후자의 불자들이 많이 있다. 비우는 가르침을 공부함으로써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한다는 것이야말로 아이러니다.
또 많은 불자들은 어떠한가. 경전 공부 한 것을, 교리 공부 한 것을, 기도나 수행 한 것을 어떤 실적인 듯, 자기 과시인 듯, 자랑인 듯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경전을 많이 본들 그것이 현실의 삶 속에서 실천되어지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경전 공부도 했고, 백일기도도 했고, 절에도 열심히 다닌다는 사람의 현실의 삶이 남들 보기에 전혀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도 못하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교를 욕되게 하는 것이며,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경전은 우리의 욕심과 집착과 헛된 야망을 놓아버리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우리 마음에 평안과 고요와 자비의 씨앗을 뿌린다. 우리가 경전을 대할 때는 오직 그 가르침에 나를 완전히 열어 놓고, 완전히 비우고 그것을 온전히 흡수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경전이 저절로 나를 이끌어 갈 것이다. 거기에 나를 완전히 비우고 맡기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 아상이 개입된다면, 경전을 공부하면서도 나를 드러내고야 만다. 경전 공부하는 것은 나를 비우기 위함인데, 경전을 얼마나 많이 공부했고 말고 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금강경도 공부했고, 반야심경도 공부했고, 지장경, 화엄경, 법화경까지 다 공부했으며, 어떤 스님 경전 강의는 재미있고, 또 다른 스님의 경전 강의는 너무 지루하고, 이런 판단과 분별이 앞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경전공부를 통해 내 아상을 강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왜 그 많은 경전을 다 보아야만 하는가. 단 하나의 짧은 경전을 보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평화로와질 수 있다. 백 권의 경전을 보고 그 많은 독서량에 스스로 흡족해 자랑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한 줄의 부처님 가르침을 직접 실천으로 옮기는 것이 더 근원적이다. 차라리 내 앞의 거지에게 내가 먹을 빵을 나누어 주는 것이 더 깊은 수행자다.

‘나는 경전을 많이 공부한 사람이다’라는 아상이야말로 얼마나 대단해 보이는가. 얼마나 지혜로와 보이고, 얼마나 마음공부를 많이 한 것 같아 보이며, 얼마나 비움과 평온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러나 왜 경전을 많이 보았다는 것이 우리의 실적이 되어야 하는가. 경전 공부의 실적은 얼마나 더 비워졌고, 고요해졌고, 놓여졌느냐에 있지, 얼마나 더 쌓았으며, 더 배웠고, 더 많이 아느냐에 있지 않다. 참된 경전은 글자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보는 것이요, 참된 수행은 경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여실하게 관찰하여 보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귀족 가문 출신의 절친한 두 친구가 함께 출가를 했다. 젊은 수행자는 경전을 통달해 강사스님이 되었으며 온갖 절의 책임을 맡아 사무를 돌보느라 바쁜 시간을 보냈다. 반면 나이 많은 수행자는 오직 수행에 매진하여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깨달음을 얻은 자는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아라한과를 증득한 것을 자랑하거나, 위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수행의 실천 없이 경전만을 공부한 자에게 수많은 경전공부는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아주 좋은 아상이 된다. ‘나는 위대한 강사스님이다’ ‘나는 모든 경전에 통달했다’ ‘그로인해 나는 절의 높은 직위의 스님이 되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자랑스럽고 스스로의 모습에 흡족하다. 이렇듯 아상이 커질수록 상대방에 대한 우월의식도 커지게 마련이다.

어느날 모처럼 함께 출가한 도반인 두 스님이 만나게 되었는데, 젊은 강사 스님이 도반이 아라한이 된 줄도 모르고 자신의 학문을 자랑하려고 했다. 아라한인 도반은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이를 알고 부처님께서 두 스님께 경전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던지신다. 젊은 스님은 대답을 하지 못하였으나, 늙은 아라한은 명확한 답변을 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두 게송을 설하셨다.

단 하나의 가르침이라도 듣고 실천하는 것이, 백 가지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 오래된 이 불가의 아름다운 전통이다. 아무리 법랍(法臘)이 높을지라도, 아무리 출가 년수가 오래 된 노승일지라도 갓 깨달음을 얻은 사미에게, 혹은 깨달음을 얻은 신도님께 가르침을 하심하는 마음으로 배워야 한다. 그렇기에 이 불법문중에서는 많이 배우고 적게 배웠다거나, 더 나이가 많고 적다거나 하는 일체의 차별이 없다. 오직 실천 행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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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

18.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


한 번 악행을 하고 나면 그 악행은 업습(業習)으로 자리잡는다. 업이 되어 언젠가 갚음인 보(報)를 가져오지만, 보를 가져 오기 이전에 습(習)으로 먼저 자리잡으면서 나를 따라다닌다. 한 번 악행을 하면 그것은 악한 습, 악한 습관의 흔적을 남긴다. 습관이라는 것이 한 번 할 때는 어려워도 한 번 습관이 들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저절로 그 습관대로 행동하게 되지 않는가. 악행이 바로 그렇다. 악행의 습은 또 다른 악행을 부르고 그 다음부터는 아주 쉽게 습관적으로 악행을 범하게 된다. 그 뿐 아니라 그렇게 습관들어진 악행은 이번 생을 넘어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냥 잠재되어 있다가 다음 생이나 그 다음 생 어느 때인가 그 갚음인 결과만 남기면 좋겠지만 이 악행은 결과를 남기기 이전에 우리 몸과 마음에 습으로 베이고 스며드는 것이다.

데바닷다의 반역사건은 부처님의 생애에서도 눈여겨 볼 아주 유명한 대목이다.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사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을 세 번이나 살해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악인의 전형이다. 데바닷다는 마가다국의 태자인 아자타삿투를 부추겨 아버지인 빔비사라왕의 왕위를 찬탈하게 할 뿐 아니라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이렇게 왕의 권위를 등에 업은 데바닷다는 부처님께 이제 불교의 승가를 자신에게 맡기라고 요구하기에 이르지만 부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럴 수 없다고 하신다. 이에 수치심과 복수심을 느낀 데바닷다는 부처님을 세 번 해치려고 한다. 첫 번째는 자객을 보내어 살해를 시도하였지만 오히려 자객은 부처님께 감화되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며, 두 번째는 영취산에서 지나가는 부처님께 바위를 굴림으로써 부처님의 엄지 발가락에 상처를 입힌다. 세 번째로 코끼리에서 술을 먹여 부처님께 돌진케 하지만 달려오던 코끼리들은 부처님의 앞에 이르자 고개를 조아리며 무릎을 꿇게 된다.

이뿐 아니라 데바닷다는 부처님의 제자들에게 자신이 더욱 훌륭한 스승임을 드러내기 위해 부처님의 계율보다 훨씬 강화된 다섯 가지 계율을 제시한다. 비구는 숲에서만 생활하며, 신도의 공양 초청해 응해서도 안 되고, 쓰레기로 버려진 천으로만 가사를 만들어 입어야 하고, 나무뿌리나 무덤 사이에서만 생활할 수 있으며, 생선이나 고기는 전적으로 못 먹도록 해야 한다는 다섯 가지의 계율을 제시하였지만, 부처님은 이에 반대를 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데바닷다는 자신의 강화된 계율에 찬동하는 몇몇 젊은 비구를 이끌고 떠나 새로운 교단을 만들고자 했으나 이들 또한 사리불과 목건련의 교화에 다시 승가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를 안 데바닷다는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뒤늦게 부처님을 만나고자 부처님께로 향했으나 결국 부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길가 연못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뿐 아니라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져 더 큰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괴로워한다. 이생에서 ‘악한 짓을 했구나’ 하고 괴로워하며 내생에서 지옥에 떨어져 그 괴로움은 더욱 커진다.”라고 설법하셨다.

이에 반해 재산가의 셋째 딸로 태어난 수마나는 부모님께 배운대로 스님들께 정성스럽게 탁발 공양을 올려 드리면서 수행에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틈나는 대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는데, 결국 수마나도 결혼도 못 한 채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러나 수마나는 죽음을 앞두고도 정신을 흩어지지 않게 하였으며, 사대 오온에 마음을 잘 집중시킴으로써 죽음 직전에도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을 지녔고, 죽은 뒤에도 천상에 태어날 수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이생에서 ‘착한 일을 했구나’ 하고 기뻐하며 내생에서 좋은 곳으로 가고 그 기쁨은 더욱 커진다.”고 설법하셨다.

악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을 살면서 온통 악행으로 인한 업습에 이끌려 계속해서 악업을 짓게 되며, 죽음에 이르러서도 평안하지 않으며, 죽은 뒤에도 계속해서 업에 따라 고통의 지옥에 빠질 수밖에 없으나, 선행을 한 사람은 이번 생에도 즐겁고 죽음 직전에도 평화로우며 죽은 뒤에도 항상 즐거운 곳에 난다.
그래서 처음 한 번의 악행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처음 한 번의 선행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의 악행은 연이어 악행을 불러오지만, 초심의 선행은 연이어 계속되는 선행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에게 이익이 될 지라도 그것이 악행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행하지 말 것이며, 아무리 나에게 손해가 되고 이익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이 선행이라면 반드시 저질러 실천해야 할 것이다. 선을 행하고 악을 놓아버리는 것, 이것이야말로 모든 지혜와 복덕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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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근심한다.
그는 두 생에서 모두 근심 걱정한다.
악행은 늘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16.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기뻐한다.
그는 두 생에서 모두 기뻐한다.
선행은 늘 그를 따라다니며 평안을 준다.


악을 행하면 악의 흔적이 남고 악의 업장이 남고 악의 습관이 남는다. 악한 행위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악의 기운을 남기게 된다. 그렇기에 악을 행하게 되면 내 안에 악의 기억과 악의 습관이 남아 있으므로 그 다음에도 선보다 악을 행할 확률이 높아진다. 한 번 해 본 것은 그 다음에는 더 쉽기 때문이다. 더 쉽고 때로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튀어나온다.

똑같은 상황에서 선으로 반응을 하거나 악으로 반응을 하는 것은 내 의지이지만, 한 번 반응한 것은 고스란히 내 안에 어떤 흔적을 남기고 만다. 그러한 선악의 반응들이 하나 둘씩 계속 이어지게 되면 그 흔적은 습관처럼 굳어지고 만다. 습관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선의 습관은 계속해서 선을 만들어내고 악의 습관은 계속해서 악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잘난 척 하기 좋아하는 사람,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을 만났다고 치자. 그 때 우리의 반응은 둘 중 하나이기 쉽다. 첫째는 그 자랑을 받아주며 칭찬해 줄 수 있고, 둘째는 잘난 척 하는 모습이 보기 싫어 쏘아붙일 수도 있다. 전자의 반응을 보인 사람은 이제 뒷날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넓은 마음으로 그 자랑을 받아주며 칭찬해주기 쉽다. 아니 그것이 더 쉽다. 몸에 한 번 기억되었고, 습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로 기분 나쁘게 반응한 사람은 다음에 똑같은 상황을 만나더라도 그런 사람이 꼴보기 싫고 밉상으로 느껴지기 쉽다. 그리고 또 다시 그런 상황을 만난다면 그 때부터는 자동적으로 반응이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선은 또 다시 수많은 선을 불러오고, 악은 또 다시 수많은 악을 불러오게 된다. 전자의 반응을 한 사람은 끊임없이 칭찬해 줄 일이 생기고, 후자의 반응을 한 사람에게는 끊임없이 꼴보기 싫은 사람이 생겨난다.

화나 성냄도 마찬가지다. 내가 시킨 일을 잘 못하는 아랫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잘 다독이면서 오히려 격려해 주고 자비롭게 가르쳐 줄 수도 있고, 화를 내며 이것 밖에 못 하느냐고 면박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반응들은 고스란히 우리 안에 흔적을 남기고 업습(業習)을 남긴다. 전자의 사람은 그 다음에도 화나는 상황에서 자비롭게 대처하는 것이 더 편해지고, 후자의 사람은 그 다음에 비슷한 상황을 만나더라도 화를 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업습이다. 업은 이처럼 습관처럼 굳어져 선은 더 큰 선을 부르고, 악은 더 큰 악을 부른다.

그래서 선을 행한 자는 이번 생에서도 기뻐하지만 다음 생에서도 기뻐하고, 악을 행한 자는 이번 생과 다음 생에서 모두 근심 걱정에 시달린다. 선행과 악행은 언제나 그를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 선행과 악행은 고스란히 내 안에 흔적을 남기고 업습을 남기기 때문이다.

선업은 선의 과보를 남기고 악업은 악의 과보를 남기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선업을 한 번 짓고 나면 그 다음에도 습관적으로 선업을 지을 확률이 높아지고, 악업을 짓고 나면 그 다음에서 악업을 짓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데 있다. 한 번 지은 과보를 한 번 받으면 그만이지만, 업습이라는 것은 고스란히 우리 안에 습관처럼 흔적을 남기니 그것이 문제다. 그 습관은 이번 생 뿐 아니라,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선업은 이생에서 내생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평안과 기쁨을 주지만, 악업은 이생에서 내생까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며 근심 걱정을 불러온다.


돼지잡이를 55년 동안 해 온 백정 춘다는 돼지를 평생동안 살생한 업을 지음은 물론, 성격도 잔인했으며 착한 일은 거의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그 결과 죽음에 이르러 손이 돼지발처럼 안으로 오그라들면서 죽기 전 7일 동안 지옥의 고통을 겪었다고 하고, 죽은 뒤에도 아비지옥에 떨어졌다고 한다.

반면에 담미까라라는 한 재가신자는 평소 계행(戒行)을 잘 지키고 덕이 많으며 늘 보시를 생활화하였고, 무엇보다도 수많은 비구스님들의 탁발을 위해 항상 공양 준비를 해 주었으며, 14명이나 되는 아들과 딸들 또한 부모님의 덕을 보고 배워 계행과 보시를 실천하였으며 늘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지혜로운 삶을 살았다. 이런 결과 대장장이 춘다의 죽음과 상반되게도 담미까라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는 밤낮으로 비구스님들이 찾아 와 독경해 주었고, 죽을 때도 천상의 신들이 내려와 마중해 주었고, 죽음 이후에도 도솔천에 태어났다고 한다.

이처럼 이번 생에 행한 선행과 악행은 고스란히 죽을 때까지 이어지고, 죽음 이후에도 그 결과가 다음생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선행이 중요한 것이고, 한 번의 악행이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그 한 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습관을 만들어내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내가 어떤 행을 하고 있는지를 늘 지켜보아야 한다. 어떤 상황에서 악업을 만들어내길 즐겨하는지, 선업을 만들어내길 즐겨하는지 잘 지켜보아야 한다. 한 번 만들어 낸 선업은 또 다른 선업의 씨앗이지만, 한 번 만들어낸 악업은 또 다른 악업을 부르기 때문이다.

화낼 상황에서, 악업을 지을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자비롭게 대해보라. 자비로운 방식으로 자비로운 말씨로 상대방을 향해 선업의 씨앗을 퍼뜨려 보라.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그래서 연습하고 습관화해 보라. 한 번, 두 번 선행과 자비가 이어지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훨씬 쉬워진다. 똑같은 화날 상황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또 그 다음으로 갈수록 훨씬 자비롭게 대응하기가 쉬워진다. 벌써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선행으로 이생과 내생에서 계속해서 기쁨을 누릴 것인가, 악행으로 이생과 내생에서 언제까지고 근심과 걱정을 안고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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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btscene.eu/verified-search/torrent/immortals/ BlogIcon immortals torrent  수정/삭제  댓글쓰기

    Man is neither good nor evil, these are human value judgments, and fundamentally based on the subjective evaluation of good and bad or I like, I do not like. There is nothing in the physical world that has meaning in the absence of a subject/consciousness. So, only in relation to consciousness/living subject does anything have meaning, thus meaning is applied to the world of object by a conscious subject. An old Buddhist master holding up a flower asks his pupils, " What is the meaning of a flower? The students fall silent for time. Then one pupil at the back indicates he knows what the master means, what the master meant was, the flower has no meaning, it just is. Nothing in and of itself has meaning, meaning arises as the result of a relation/relationship, it is the relation between an object and a subject and all meaning is the property of the subject, the object in and of itself has no meaning. So there is no good or evil, both of these things are meanings, and as we already understand the world as object has no meaning of its own, it is the value judgment of a subject that is meaning.

    2012/01/19 17:45




13.
지붕이 허술하면
비가 새듯이
수행하지 않는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14.
지붕이 튼튼하면
비가 새지 않듯이
수행이 잘 된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



탐욕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달콤하며 동시에 가장 두려운 경계다. 탐욕이 올라오지 않는 사람이 있으랴. 누구든 탐욕을 먹고 자란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탐욕을 끊임없이 채워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 삶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우리의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 탐욕을 만들어내고 그 탐욕을 채워나가고, 탐욕을 채우지 못해 좌절하거나, 탐욕을 채움으로써 행복해 하거나, 채우고 난 탐욕 뒤에 더 큰 탐욕을 만들어내는 이 끊임없는 탐욕의 연장이다. 그런데 이 탐욕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탐욕을 먹고 자란다. 탐욕한 것을 얻고 나면 이제 그 이상의 또 다른 탐욕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탐욕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설사 이 세상을 전부 준다고 해도 그의 탐욕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탐욕은 탐욕하는 바로 그 마음을 놓아버리는 것으로만 끝낼 수 있다. 탐욕을 줄이고 만족과 소욕을 통해서만 탐욕의 끝도 없는 식욕을 끝장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탐욕을 없앨 수 있단 말인가.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올라오는 이 탐욕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불교의 사성제의 방법을 대입해 본다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그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다. 원인을 알고 그 원인을 소멸하면 그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된다.

그러면 탐욕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탐욕은 끊이지 않고 올라오는 것일까. 그 원인은 바로 아상(我相)이다. ‘나다’ ‘내것이다’하는 아상으로 인해 내 것을 더 많이 늘려가고 싶은 탐욕이 생겨난다. 내가 있다는 생각이 있으니, 내 것을 더 많이 늘려가고 싶은 탐욕이 자동적으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상이 있는 이상 탐욕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근본원인을 닦으려고 하지 않고 현실적인 것만 탓하려고 한다. 아상을 없애려 하지 않고 탐욕만을 문제삼는다. 즉, 탐욕이 많은 사람을 욕하고, 내가 왜 이렇게 탐욕이 많은가 하며 한탄하면서, 탐욕을 줄이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자족, 만족의 게송을 읽으며, 탐욕을 줄이기 위해 보시하고, 나누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그런 노력도 어느 순간 뿐,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시 어김없이 탐욕은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 이유는 탐욕의 근본 원인인 아상을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탐욕을 소멸시키기 위해 소욕하라, 지족하라, 혹은 보시하라, 나누라는 방편을 설하고 있기도 하지만, 그 근본에서는 항상 ‘수행하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조금 당황할 지도 모른다. 탐욕이 많아서 문제라면 마땅히 소욕하라, 만족하라는 가르침이 더 쉽고 직접적이지만, 불가에서는 끊임없이 ‘수행하라’ ‘정진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불교는 겉에 드러난 현상만을 치유하고자 하는 종교가 아니라, 그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바로 보고 그 본질의 치유에 힘쓰는 종교다. 그렇기에 종종 불교의 가르침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때로는 동문서답을 하는 것처럼도 보이고, 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을 해 주지 않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탐욕을 놓아버리기를 원한다면 본직적인 길은 수행에 있다. 지붕이 허술하면 비가 새듯이 수행하지 않는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든다. 그러나 지붕이 튼튼하면 비가 새지 않듯이 수행이 잘 된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 수행을 통해 우리는 우리 내면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는 아상을 바로 보게 되고, 아상의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며, 무아(無我)를 깨닫게 된다. 무아상(無我相)의 깨달음에 탐욕은 발붙일 틈이 없다. 내가 없다면 나의 탐욕도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난다는 예쁜 아내와의 결혼식을 앞두고 아내와의 사랑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때, 그 설레는 마음을 접고 출가를 한 인물이다. 부처님께서 난다에게 출가를 권유할 것을 직감한 난다는 절대 출가하지 않겠노라고 단호히 답변하리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부처님께서 출가 권유가 있었을 때 난다는 불가항력적인 어떤 힘에 의해 출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출가 이후에도 끊임없이 사랑하는 예쁜 아내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는 출가 초기에 늘 불평불만이 많았고, 정진에도 게을렀으며, 늘 대중에서 겉돌고 있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신통을 보여 방편으로 난다를 천상세계로 데려간다. 천상에 다다랐을 때는 아내보다 몇 배는 아름답고 예쁜 천상 선녀들이 황홀하게 난다를 사로잡고 만다. 부처님께서는 ‘네가 만약 열심히 수행 정진한다면 이 천상의 오백 명의 선녀들이 너를 모시게 될 것을 여래가 보증한다’고 약속해 주셨다. 이에 난다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끊임없이 정진 수행한 끝에 아라한과에 이른다. 그러나 드높은 깨달음을 성취한 난다는 부처님을 찾아 뵙고 부처님께서 하셨던 천상선내에 대한 보증을 철회해 주실 것을 요청한다. 깨달음을 통해 모든 집착과 애욕에서 벗어난 아라한에게 더 이상 천상의 선녀는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방편을 통해 난다를 깨달음으로 이끌면서 모든 제자들에게 게송을 설하신다. ‘지붕이 허술하면 비가 새듯이 수행하지 않는 마음에 탐욕이 스며든다. 지붕이 튼튼하면 비가 새지 않듯이 수행이 잘 된 마음에는 탐욕이 스며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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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거짓을 진실이라 생각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기 때문에
끝내 진실에 이를 수 없다.

12.
거짓을 거짓인 줄 알고
진실을 진실이라 바로 아는 사람은
이러한 올바른 견해로 인해
마침내 진실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만의 생각에 빠져 산다. 자기만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이나 진리관을 정해 놓고 그 밖을 엿볼 생각 없이 오로지 자기 생각이 옳다는 확신 속에서 살곤 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지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그 사실 바로 그 사실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모든 생각이나 견해는 여기 저기에서 끌어모아 내 것으로 채택하여 받아들인 것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끌어모아 내 생각인 양 조합하여 받아들인 것들 조차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다.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사고방식 안에는 언제나 유대교적인 구약의 가르침들이 온전한 진리로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은 신에게 유일하게 선택받은 민족이며 자신들만이 신의 대변자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슬람교적인 문화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벗어나서는 생각할 수도 없다. 그 가르침만이 절대적인 진실성을 갖게 될 것이다. 물론 불교든 기독교든 마찬가지다. 한 가지 종교에 치우친 사람일수록 그 사람에게 그것은 절대불변의 진리이며 진실이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완전히 소멸된다. 도저히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거나 이해하거나 화합조차 하지 않으려 할 지 모른다. 심지어 자신의 종교를 믿지 않는 이들을 절대자의 이름으로 헤칠 수도 있고,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자신의 종교야말로 절대적인 진실이며 다른 종교는 절대적으로 거짓이라는 확신이 있다면 결코 다른 종교에 마음을 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바로 종교의 가장 큰 위험성이다. 절대적으로 ‘이것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옳지 않다.’ 어딘가에 완전히 치우쳐 있는 사람은 결코 진실을 만날 수 없다.

아무리 위대한 진리라도 그것을 절대화하는 순간 그 위대성은 소멸되고 만다. 절대화라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들과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사실은 ‘이것이 아닌 것은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옳고 그른 것이 확연히 나누어지고 나면 그 뒤에 나타나는 것은 편을 갈라 다투거나 분쟁을 일으키는 것밖에 없다.

그렇게 인류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켜 왔는가. 세상 모든 종교가 ‘이것만이 진리다’는 고집을 버리고 어디에도 치우침 없는 완전한 중도적인 평화의 가르침을 따를 때 이 세상에 분쟁과 다툼과 나뉨은 사라지고 안온과 화합과 조화로움이 깃들 것이다.

불교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올바른 불교 신자라면 ‘불교가 절대적으로 옳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본 종교 가운데 가장 옳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전자와 후자는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큰 차이가 있다. 후자처럼 불교를 믿는 자는 언제고 더 옳다고 생각되는 종교가 나타난다면 그것을 믿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불교를 버리는 것이 아니다. 즉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실이고 진리라면 그것이 불교여도 좋고, 그 어떤 종교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 진리를 불교에만 한정시켜야 하는가. 세상 어디에도 진리는 숨시고 있다.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리는 깨어날 수 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하면 그는 더 이상 불교를 모른다고 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불교적인 수용의 가르침 때문에 불교의 역사에는 수많은 독각(獨覺)들이 있어왔다. 독각은 홀로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불교를 접하거나, 불교 경전을 공부했거나, 출가를 한 것도 아닌데 전혀 불교를 모르는 상태였더라도 홀로 깨닫는 것이 가능하다. 깨달음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린 본래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열린 정신이야말로 모든 진리의, 모든 종교의 본연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 그랬을 때 진리가 진리로 꽃피어날 수 있고, 모든 종교며 진리며 사상이 화합과 조화의 우주적인 연주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렇지 못한 종교인들이 역사 속에는 수도 없이 많았다. 내 종교만이 절대 진리라는 편협되고 치우친 생각들에 사로잡힌 이들, 그들은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으며 나아가 이 세상까지 파멸로 몰아간다. 끝끝내 거짓을 진실이라고 집착하며 참된 진실을 보고도 거짓이라 생각하는 이는 그러한 그릇된 소견에 집착하는 이들은 끝내 진실에 이를 수 없다.

여기에 그런 한 지도자가 있다. 그는 바로 산자야다. 산자야는 본래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목련과 가섭의 스승이었다. 목련과 가섭의 출가 전 이름은 꼴리따와 우빠띳사였는데, 이 둘은 산자야의 문하에서 수행을 하다가 더 이상 산자야에게는 배울 것이 없음을 깨닫고 서로의 길을 가게 된다. 그러면서 둘은 약속한다. 진리를 만나거나, 참된 스승을 만나거든 서로에게 알려 주어 함께 그 길을 가자고.

우빠띳사는 어느날 부처님의 제자였던 앗사지 비구의 위의에 감동하여 법을 듣고는 부처님을 찾아 귀의하기 위해 꼴리따를 찾아간다. 함께 출가를 결심하였지만 전 스승이었던 산자야가 마음에 걸렸다. 결국 둘은 산자야를 찾아 가 올바른 진리의 스승인 부처님을 찾았으니 함께 부처님께 귀의하기를 거듭 부탁하지만 계속해서 거절을 당하고 만다. 오히려 산자야는 위대한 두 제자를 부처에게 빼앗기는 것에 원망과 질투를 느껴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만다.

결국 부처님을 찾은 두 제자는 아라한을 성취하고 으뜸가는 두 상수제자가 되었지만 산자야는 끝까지 목련과 가섭의 청을 거절하고 말았다. 이를 본 부처님께서 위의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산자야처럼 거짓을 진실이라 생각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그러한 그릇된 소견으로 인해 끝내 진실에 이를 수 없다. 목련과 가섭처럼 자기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거짓을 거짓인 줄 바로 알며 진실을 진실이라고 바르게 아는 사람만이 그러한 치우침 없는 올바른 견해로 인해 마침내 진실한 깨달음에 도달하는 것이다.

요즘의 시대야말로 이러한 가르침이 얼마나 귀한가. 이념의 갈등, 세대의 갈등, 동서의 갈등, 종교의 갈등 등 수많은 갈등으로 나뉘어 있는 요즘의 시대에 이러한 화합과 열린 정신이야말로 이 시대를 치유하고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되지 않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 이념이나 사상이나 생각들에 치우치고 고집해 다른 이념과 사상을 가진 이들과 나뉘고 대립하며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치우친 생각들을 여의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참된 진실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거짓을 진실이라 고집하여 치우친 소견에 빠지는 것이 깊어지다 보면 후에는 그것이 거짓인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기기 위해 거짓을 택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전도된 뒤집혀진 생각이다. 중심에 진실을 두어야지 중심에 내가 이기고 지는 것, 내 입지가 강화되고 약해지는 것을 두어서는 안 된다. 나를 놓아버리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마침내 진실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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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마음에 번뇌가 많아 청정하지 못하고
무모한 욕심으로 자기를 다스리지도 못하면서
노란색 가사를 입으려는 자여,
그대는 수행자의 가사를 입을 자격이 없다.

10.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이 청정하고
계율을 지켜 절제됨이 있으며
감관을 잘 다스려 진실을 말하는 사람,
그대야말로 수행자의 노란색 가사가 어울리는 자다.



수행자의 옷, 가사는 일반인들이 보기에 아주 매력적이고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게 한다. 가사와 장삼을 수하고, 파르라니 머리를 깎고 앉아 있는 스님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마음 속에 존경과 혹은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회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걸망 하나 메고 만행을 떠나는 스님들의 뒷모습은 자유로움과 평화로움을 찾는 이들의 대명사처럼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함정은 있다. 사람들은 흔히들 외부적으로 비치는 모습에 속기 쉽다. 어떤 것이든 유니폼은 사람들에게 편견을 심어준다. 군복, 의사복, 경찰복, 승복, 수녀복 등 다양한 종류의 유니폼은 그것을 입은 사람이 어떤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그들을 만나게 한다. 하물며 그 가운데 불교 수행자의 옷과 삭발한 머리는 단연 독특하고 눈에 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수행자의 옷 속에 수행자는 없다. 수행자의 가사와 장삼 혹은 삭발한 머리모양이 불교의 수행자를 대변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껍데기에 불과하다. 만약 당신이 스님을 그 어떤 편견을 가지고 ‘스님들은 이래야 해’라는 편견을 가지고 다가선다면 그 스님의 참모습을 볼 수 없다.

아주 쉬운 것이 외모이고, 옷이며, 겉모습이지만, 더 깊고 중요한 것은 보여지는 모습을 넘어서 있다.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느니 차라리 그윽한 눈빛 속에서, 혹은 깊은 말투 속에서, 또 때로는 침묵 속에서 그의 내밀한 속뜻을 살펴보는 게 낫다.

수행자는 그 모든 바깥에서 오는 치장과 허식과 꾸밈을 내던진 사람이다. 요즘의 사회를 보면 속은 텅 비었어도 밖은 끊임없이 꾸미고 치장하고 고치며 외부로 비추어 지는데 모든 것을 투자하는 어리석은 단면을 본다. 그렇게 바깥으로 바깥으로 치달아 나갈수록 내면의 뜰은 사유와 평온을 잃고 해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수행자는 수더분하고 신경 쓸 필요 없는 누더기 옷 조각을 기워 입는다. 그것이 수행자의 옷, 가사에 담긴 의미다.

그것은 옷 그 자체에 어떤 권위를 담기 위함이 아니다. 수행자의 위엄과 권위와 차별성을 선입견처럼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써 ‘너와는 다른 차별된 나’라는 아상을 높이는 수단으로 입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로 치닫는 모든 관심과 치장과 꾸밈으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한다. 모든 바깥으로 치닫는 산란한 마음을 내 안 깊은 곳으로 되돌려 귀의토록 하기 위한 하나의 상징이요 약속에 불과하다.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옷이 있는 이유다.

그러니 아무리 수행자의 옷을 입고 있더라도 마음이 바깥으로 치닫고 온갖 욕심과 번뇌에 휩쓸리며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도 못한다면 그에게 수행자의 노란색 가사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수행자의 옷을 입었다고 다 수행자가 아니며, 세속의 옷을 입었다고 다 수행자가 아닌 것도 아니다. 핵심은 옷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보여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진실은 그 너머에 있다. 보여지지 않는 내밀한 속 뜻은 저마다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수행자의 옷을 입고 살면서도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 있는 반면에 세속적인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수행자의 행을 행하는 이가 있다. 이 문중에서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모습을 더욱 아름다운 수행자의 모습으로 기억한다.

부처님 당시에 왕사성에 머물던 데바닷다에게 한 재가신자가 비싼 고급 천으로 가사를 만들어 보시를 한 적이 있다. 고급스런 가사를 선물 받은 데바닷다는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은근히 돌아다니며 다른 스님들께 뽐내곤 했다. 이를 전해들은 부처님께서는 데바닷다가 전생 이야기를 하셨다.

전생에 데바닷다는 코끼리 사냥꾼이었는데 코끼리가 가사를 입은 수행자에게는 경계를 풀고 공손히 대하는 장면을 보고는 가사를 입고 코끼리를 유인하여 접근하는 코끼리를 사냥하곤 했다. 이를 본 코끼리왕이 데바닷다를 잡았지만 가사를 입고 있는 것을 보고는 살려준 적이 있는데 그 때 코끼리왕이 지금의 부처님이다.

데바닷다는 이처럼 전생에도 수행자의 옷을 입고 삿된 행동을 하였는바, 이렇게 수행자가 된 연유에도 자신에게 걸맞지 않는 가사를 입고도 부끄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뽐내고 자랑스레 여기는 것을 보고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신 것이다.

아무리 수행자의 노란색 가사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번뇌가 많고 욕심이 많아 자신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는 수행자의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 수행자의 본면목은 입은 옷이나 치장한 장식이나, 혹은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명예나 지위나 이름이나 심지어 법랍(法臘)과 무슨 학위 같은 것으로도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번뇌에서 벗어나 마음이 청정하고 계율을 잘 지켜 절제됨이 있으며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가지 감관을 잘 다스리는 데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이다.

재가자이든 출가 수행자이든 스스로 날마다 지켜보라. 나에게 과연 수행자의 옷이 어울리는가, 나는 과연 수행자의 옷을 입을 자격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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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쾌락만을 추구하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없고
게을러 정진하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려 마침내 쓰러진다.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8.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잘 다스리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있고
굳은 믿음으로 힘써 정진하면
그 어떤 삿된 마장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큰 바위산을 바람이 휘두를 수 없듯이.



수행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여기 모든 수행자가 반드시 지켜야 할 정진의 덕목이 있다. 먼저 이 게송이 나오게 된 연유를 살펴보자.

부처님 당시에 두 형제가 있었다. 형은 수행자다운 위의와 신념과 정진이 투철했지만 동생은 성실히 수행하기는커녕 오히려 형을 속세로 환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뒤따라 출가를 했다. 그러다보니 동생은 끊임없이 육체적인 쾌락과 물질적인 즐거움을 추구하며 음식에도 절제가 없고, 수행 정진은 뒤로한 채 게으름만 피우다가 하루는 속가의 가족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는데 따라갔다가 결국 출가 전 아내의 권유에 못 이겨 그 길로 속세로 돌아가고 말았다.

반면에 형은 수행자다운 위의와 신념으로 마음집중 수행을 성실히 행하여 결국 삼법인을 깨닫고 아라한과를 성취하게 되었다. 후에 형 또한 출가 전 아내가 부처님과 제자들을 초청하여 공양을 올리려고 하자 많은 제자들이 동생처럼 형 또한 다시 환속하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형은 환속한 동생과는 같지 않음을 말하시면서 다음의 게송을 설하셨다.

“쾌락만을 추구하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다스리지 않으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없고 게을러 정진하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려 마침내 쓰러진다.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쓰러뜨리듯이. 그러나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다섯 가지 감각의 욕망을 잘 다스리며 음식의 때와 양에 절제가 있고 굳은 믿음으로 힘써 정진하면 그 어떤 삿된 마장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큰 바위산을 바람이 휘두를 수 없듯이.”

이것은 출가한 수행자 뿐 아니라 모든 진리를 찾고 참된 삶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 중요한 수행의 덕목이요 삶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지혜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 가장 조심하고 절제해야 할 부분이 육체적인 쾌락의 탐닉과 감각적인 욕망을 다스리는 일이다. 육체적인 쾌락을 탐닉하는 것이야말로 수행, 진리, 법과는 정 반대의 길이다. 수행자란 몸과 말과 뜻으로 청정행을 닦는 이를 말하는데, 육체적인 쾌락이야말로 순결한 청정행을 더럽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육체적인 쾌락은 곧 정신적인 쇄락을 가져오고 우리 몸도 마음도 녹슬게 만들어 청정한 수행자의 정신을 빼앗아간다.

다섯 가지 욕망이란 우리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의 욕망을 말한다. 눈으로는 더 좋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 귀로는 칭찬과 좋은 말을 듣고 싶은 욕망, 코로는 더 좋은 향기를 맡고자 하고, 혀로는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자 하며, 몸으로는 더 좋은 촉감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이 외부를 향해 치닫는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요 욕구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이 오관을 잘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핵심적인 수행법 중 하나다. 눈귀코혀몸이 대상을 향해 어떤 욕망을 일으키는지를 오관을 잘 관찰함으로써 깨닫게 되고 그 치닫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 번째로 수행자는 음식을 먹고 마시는 때를 가릴 줄 알아야 하고 그 양에 절제가 있어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입으로 먹을 것들이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원초적인 욕망에 패배하는 것이다. 마음을 깨달아 우주의 주인이 되겠다는 사람이 먹고 마시는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일에서부터 식욕이란 욕망에 쓰러지고 만다면 그는 더 이상 수행을 진전시킬 수 있는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식욕이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우리를 무너뜨리기 쉬운 욕망이다. 누구나 식욕 앞에서는 굴복당하기 쉽다. 가장 쉬운 것이 가장 높은 것이 될 수 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내 입으로 무엇이 들어가고 있는지를 잘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또한 한번이 되었든, 두 번이 되었든, 세 번이 되었든 음식을 먹는 때를 정하고 될 수 있다면 그 이외의 때에는 입과 위를 모두 쉬게 해 주어야 한다. 입과 식도와 위와 장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면 마음도 고요해지기 어렵다. 삶에 질서가 잡히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먹고 자는 때에 질서가 잡혀 있어야 한다.

또한 때에 맞춰 먹는 것 못지않게 먹는 양에도 절제가 있어야 한다. 많은 양을 허겁지겁 배부르게 먹고 나서 가만히 몸과 마음을 살펴보라. 몸도 무겁고 마음도 덥수룩한 것이 오래도록 마음 집중이 되지 않는다. 몸이 무거우면 정신도 무거워진다. 때때로 많은 양을 먹고 난 뒤에 무겁고 멍한 나 자신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노라면 부끄럽고도 부끄럽다. 먹을 수 있는 만큼의 반만, 혹은 60~70%만 채우고 나면 식후의 잠시의 휴식과 함께 몸도 마음도 새로운 에너지로 깨어난다. 먹고 마시는데 절제가 있다면 삶에도 다른 모든 욕망에도 절제와 균형이 생긴다.

이러한 쾌락적인 즐거움과 감각적인 욕망, 그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가 있게 되었다면 이제 수행의 절반은 이루었다. 그런 튼튼한 토대 위에 힘써 정진하기를 게으르지 않는다면 온갖 삿된 마장에 휘둘리는 일은 사라질 것이다. 마치 큰 바위산을 아무리 험한 바람도 휘두를 수 없듯이.

그러나 감각적인 욕망에 휩쓸리고 먹고 마시는 일에 절제가 없으며 게으르고 정진하지 않는다면 그 틈 사이로 온갖 마장이 스며들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방해했던 마왕 마라의 군대가 그대를 쓰러뜨릴 것이다. 마라의 군대가 쏜 불화살이 꽃비로 변해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 보리수를 수놓았듯이, 마라의 세 딸들이 쾌락과 감각적 욕망으로 유혹할 때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마라의 유혹임을 바로 보셨듯이 쾌락과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고, 먹고 마시는데 절제가 있으며, 힘써 정진하기를 게으르지 않는다면 그 어떤 마라의 군대가 오더라도 삿된 마장에 휘둘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그러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 길을 바로 보여주셨고 먼저 걸어가셨기 때문에, 뒤따라가는 우리들 또한 그 바른 수행의 길을 따라 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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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
는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계속 다투고 있다.
이것을 바로 아는 이들은
더 이상 서로 다투지 않고 마음을 쉰다.



사람들 사는 세상에 다툼은 끊이지 않는다. 크고 작은 다툼으로 나라와 나라, 이웃과 이웃, 가족들 간에도 끊임없이 다툼이 일고 있다. 다투고 다투고 또 다투다가 결국 우리의 삶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결국은 한순간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는 우리의 불안한 삶에서 다툼으로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 사람들은 이 소중한 시간을 허망한 다툼으로 소모한다.

당장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을 앞두고 작은 일로 허망하게 다툴 수 있겠는가. 누구나 죽음의 순간이 오면 비본질적이고, 근원적이지 않은 모든 행은 멈추어지고 본질적이고 근원을 향하는 행으로 전환하게 된다. 과연 무엇이 근원적인 행인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것을 모른다.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설해주더라도 그것은 머릿속으로만 이해될 뿐 본질적인 삶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죽음에 임박한 사람은 누구나 저절로 종교적이 되고, 본질적인 삶을 실천하고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내일 죽는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사소한 일로 싸우거나, 욕심을 채우거나, 돈을 벌거나, 명예나 지위를 얻으려 애쓰거나, 내 것을 늘리려 하겠는가. 죽음을 앞둔 모든 사람은 누구나 성인의 길을 따른다. 그것은 누가 알려주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죽음에 이르러 더 이상 쌓고 벌고 늘려 나갈 일이 없음을 깨닫게 될 때 저절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던 근원적인 지혜를 따르게 되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행하는 일은 살아 있을 때 행하는 일의 정 반대다. 살아있을 때는 내 것을 늘려나가려고 애쓰지만 죽음에 이르면 그동안 늘리고 쌓아왔던 모든 것을 나누는 일에 에너지를 쏟는다. 살아있을 때는 욕심과 번뇌와 집착을 끊임없이 키우고 살지만 죽음에 이르면 그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우리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왜 죽음에 임박해서야 뒤늦게 그것을 깨달아야 한단 말인가. 지혜로운 이는 그것이 늦다는 것을 안다. 죽음에 이르러서는 이미 늦다.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는 이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의 다툼은 계속된다. 무의미하고 비본질적인 다툼과 어리석음과 욕망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알고 바로 보는 이들은 더 이상 서로 다투지 않고 마음을 쉰다. 죽음에 이르러 마음을 쉬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모든 다툼을 종식시키고 평화 속으로 뛰어든다.

우리의 다툼은 얼마나 사소한 일인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벌이고 있는 다툼과 증오와 미움과 원망은 얼마나 가벼운가. 우리의 다툼은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된다. 오히려 큰 다툼은 분명히 보이기 때문에 다스리기 어렵지 않지만, 작은 다툼, 작은 분열이 우리 생의 남은 시간을 허망하게 소비하도록 만든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허망한 다툼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수행자들, 성직자들조차 사소한 다툼으로 무너진다.

부처님 당시에도 스님들 사이에 다툼이 종종 일어났다. 그런데 코삼비 마을에서는 아주 사소한 문제 하나 때문에 승가 전체의 화합이 깨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사건이 있었다.

코삼비 마을의 절에서 각각 계율과 법을 지도하는 율사(律師)와 강사(講師)스님이 화장실 사용에 대한 사소한 계율을 범한 일 때문에 크게 다투는 일이 벌어진 것. 강사스님이 화장실을 사용하고 물로 변기를 깨끗이 씻고 나와야 하는데 뒤처리가 조금 부족했던가 보다. 이 일 때문에 율사스님이 강사스님을 비난한 것이 계기가 되어 율사스님께 공부를 수학하는 스님들과 강사스님을 따르는 제자들 사이에 집단적인 다툼이 일어나고 승가의 화합이 깨어진 것이다.

이윽고 부처님께서 직접 코삼비로 와 양쪽의 비구들을 화합으로 이끌었지만 결국 부처님의 중재도 소용없게 되었고, 감정 싸움의 골은 더욱 깊어갔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깊은 숲으로 들어가셔서 홀로 석 달 동안 머무셨다. 이를 지켜본 재가 신자들은 승가의 화합이 깨어진 것에 실망하고 부처님을 뵐 수 없는 것에 실망하여 승단에 모든 보시와 공양을 금지했고,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국왕도 화합하지 않고 부처님의 말씀도 거역한 스님들을 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결국 양쪽의 스님들은 부처님 앞에 엎드려 울며 참회하고 용서를 간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들을 용서하시며 게송을 읊으셨다.

“‘결국 우리 모두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람들은 계속 다투고 있다. 이것을 바로 아는 이들은 더 이상 서로 다투지 않고 마음을 쉰다.”

살아가야 할 남은 생이 얼마나 된다고 정진하지 않고 다투며 삶을 소비하는가. 하기야 이처럼 스님들 또한 사소한 일로 다투고 화합을 깨뜨리는데 중생들의 삶이란 어떠하겠는가.

내 안의 모든 다툼을 종식시키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다툼이 종식될 때 마음에도 평화가 자리 잡기 쉬워진다. 수행이라는 것은 내 마음 안에서의 온갖 다툼을 쉬는 일일진데, 내 안에서의 다툼은커녕 타인과의 다툼조차 쉬지 못한다면 어찌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타인과의 인연이 맑아져야 내면 안에서도 텅 빈 하늘처럼 평화가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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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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