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개발과 발전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되는 시대에서, 또 온갖 기상이변과 환경적 문제들이 전 세계적으로 재앙적인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이 때에 자연과의 조화로운 공존을 바탕으로 하는 불교의 연기법이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현재의 이러한 환경 문제의 바탕에는 유대 기독교적인 자연관과 근대 기계론적인 자연관이 그 배경이 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역사학자 린 화이트는 사이언스에 게재한 그의 논문에서 우리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기독교적 태도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즉, 자연과는 달리 인간은 신의 형상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유대 기독교의 교리가 인간은 자연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우월감을 낳았고, 나아가 인간은 신으로부터 피조물인 자연을 지배하고 다스릴 권한을 부여받았으므로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야말로 가장 인간 중심적인 종교이며 그것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소외와 착취를 의미하는 것이다.

특히 프란시스 쉐퍼는 창세기 제1장 28절의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다스려라”에서 보이듯이, 기독교는 고대의 이교와 아시아의 종교들과는 달리 대조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이원론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의 목적에 따라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였다고 역설했다.

또한 과학혁명을 주도한 17세기의 자연과학자들은 자연을 완전히 기계화된 대상으로 만들었다. 갈릴레이, 베이컨, 데카르트, 뉴턴 등에 의해서 체계화된 기계론적 자연관은 근대 이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철저히 이원론적으로 규정하고 근대 과학문명을 산출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철학 제1원리로 삼았던 방법적 회의 즉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유추해 보면 인간은 생각하고 사유하기 때문에 단순히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물질과 자연과는 분명하게 분리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자연은 생명이 없는 기계이기 때문에 생명을 갖는 인간이 그 기계의 조합을 마음대로 조작하는 일은 오히려 인간의 우월성을 표현해 주는 일이 되고, 자연을 파헤쳐 가공하는 데에 그 어떤 주저도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베이컨은 과학의 목적은 인간의 이익 증진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천을 거친 기계론적 자연관의 결과 기술과 과학은 오늘날 인간에게 봉사토록 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는 도구로 이해되고 있다. 이상에서와 같이 유대 기독교적 자연관과 기계론적 자연관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에 의한 자연의 지배라는 윤리를 정당화시키는 배경의 사상이 되고 있다.

조금은 장황하게 살펴 보았는데, 현재의 온갖 환경문제의 배경과 원인을 살펴보는 일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현대의 환경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답을 도출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현대의 환경문제와 기상이변 등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고,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인간중심주의에 따라 인간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하는 것이 정당화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유대 기독교적 자연관이나 근대 기계론적 자연관은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와 가공과 훼손을 정당화 해 주는 사상적인 배경이 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발전해 온 현대의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의 발달, 도시화 등은 이제 온갖 문제를 양산해 내고 있음이 분명해 졌다. 온갖 환경위기와 기상이변을 가져왔고, 우리의 몸을 이루고 지구를 이루는 지수화풍 사대(四大)의 오염을 가져왔다. 지대(地大)와 관련하여 토양오염과 토지사막화를, 수대(水大)는 수질오염과 물부족 문제를, 화대(火大)에서는 에너지오염과 오존층 파괴, 지구온난화와 그로인한 각종의 기상이변을, 풍대(風大)는 대기오염과 황사 등의 문제를 가져왔다. 그로인해 전 지구가 앓고 있으며,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생명들이 앓고 있고 죽어가고 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해졌다. 인간과 자연을 둘로 나누고 인간에 의한 자연의 파괴를 정당화하는 그 어떤 사상이나 종교도 작금의 현실을 극복해 낼 수 없다. 현재의 재앙적인 환경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사상은 인간과 자연이 둘이 아니요, 물질과 정신이 둘이 아니며, 신과 인간, 붓다와 인간, 그리고 나와 너,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이 둘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보살펴주는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존중하는 동체대비의 존재로써 다르지 않다는 자각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또한 인간과 자연, 또 이 지구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들이 재각기 떨어져 있는 이원론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자각이 필요한 때다. 그러한 사상이 바로 연기법이요, 상의상관성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면 저것도 소멸한다’는 연기적이고 상의상관적인 가르침 안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소외시키거나 파괴시킬 수 없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곧 인간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동체적이고 상의상관적인 지혜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연기법에 의하면 온 우주의 모든 존재는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서로 다른 모든 것과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소멸되면 저것이 소멸된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바로 그 행위가 곧 인간이 인간 자신을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연기법의 실천은 자연과의 공존이요 교감이고, 자연의 변화에 맞춰 함께 따라 흐르는 조화로운 삶이요 친환경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자연이야말로 부처님 진리가 고스란히 펼쳐져 있는 진리의 세계 곧 법계(法系)다.

‘자연(自然)’이라는 이 한마디 말 속에 온 우주의 진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은 ‘스스로 그러한’ 성품으로써 인위적이지 않고 억지스럽지 않은 말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연을 다른 말로 무위(無爲)라고 풀어 쓸 수 있다. 함이 없이 행하는 것, 머무는 바 없이 행하는 것, 집착 없이 행하는 것,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연의 이치요 진리를 따르는 삶이다.

온 우주의 모든 존재는 무위로써 자연으로써 저마다 ‘스스로 그러한’ 성품으로써 자연스럽게 온 우주의 다르마적 장엄한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자연이라는 말 속에는 생명 있고 없는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다 포함되며 그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그러한 성품으로써 자연스럽게, 진리답게 자기 자신의 삶을 자기답게 꽃피우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존재는 저마다의 성품을 거스르지 않고, 자기답게 피어남으로써 온 우주의 장엄한 오케스트라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제각기 모든 존재들이 모두가 서로 다른 존재요, 서로 다른 모양이며, 서로 다른 삶의 모습으로써 살아가고 있지만

그 모든 존재들은 서로 부딪치거나, 다투거나, 흐트러지지 않고 저마다의 삶을 꽃피움으로써 우주적인 조화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자연은 독자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며, 자신만의 독창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우주적인 조화와 공존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자연의 일부분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연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고 살아갈 때 이 세상은 참된 아름다움, 참된 지혜로움의 온전하고도 평화로운 깨끗한 땅, 정토(淨土)를 이루는 것이다.

예로부터 절들이 산 속에 자리 잡고 있고, 역대의 조사스님들께서 자연과 대화하며, 우거진 숲에서 법신의 조화를 보고, 지저귀는 새소리에서 부처님의 법문을 들었다는 것이 모두 자연과의 공존과 교감을 통한 조화로운 삶의 모습을 노래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불교를 공부하고, 참선 수행을 실천하며, 마음을 비우고 번뇌와 욕망의 흐름을 거스르는 삶을 살게 되면 저절로 자연에 대한 찬탄과 경외의 탄성을 쏟아내지 않을 수 없다.

마음의 온갖 때와 집착을 비우면 그 텅 빈 공간에 대자연의 아름다운 조화가 깃든다. 공부하는 수행자에게 있어 욕심과 명예는 더 이상 자연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내 공부가 아름답게 익어가고 있는가를 보려면 산과 숲과 나무와 꽃들이 내 안에서도 아름답게 만개하고 있는가를 보면 된다.

이 청명한 자연과 숲과 하늘과 바람이 내 존재 위를 보드랍게 스치우며 진리의 소식을 항시 전해주고 있다. 그 소식을 들으며 자연과의 조화와 교감과 공존과 공명을 이루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길벗이요 좋은 도반이다.

계절의 변화에 깊숙이 교감하라. 자연의 소리에 내면의 소리가 공명하는 것을 지켜보라. 새 소리, 풀벌레 소리, 바람 소리, 파도 소리, 계곡의 물소리와 나뭇잎 서걱이는 소리가 내게 전해주는 진리의 소식에 흠뻑 젖어들라.

겨울 들녘을 뚫고 올라오는 봄꽃 한 송이에서, 봄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수액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수런 수런 녹빛의 여름 숲 속에서, 쏟아지는 가을 밤의 별빛 아래에서, 한 여름을 아름답게 수놓고 막바지 생명을 불태우는 가을 단풍나무 아래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텅 빔으로 돌아가는 겨울 숲 속에서 자연불(自然佛)이 내리는 준엄한 법문을 들으라. 자연과의 조화를 깨지 말고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함부로 꺾지 말라.

자연의 모든 생명과 공존하라.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이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를 때 내가 곧 자연이 되고, 내가 곧 연기(緣起)가 되며, 내가 곧 진리였음이 소리 없이 찾아 들 것이다. 자연을 내 몸처럼 아끼고, 나와 자연이 둘이 아님을 알며, 자연의 소리 없는 법문을 듣는 자연과의 조화와 공존이야말로 연기법을 실천하며 사는 수행자의 길이다.
저작자 표시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19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방하착(放下着), 놓아버림

연기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이거나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도 존재가 만들어내는 현실도 모두가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졌다, 머물고 변화하며 결국에는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존재는 생주이멸하며, 인간 또한 생노병사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붙잡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내게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는다. 내 것이라고 붙잡아 집착하고 나서는 인연이 다해 그것이 소멸될 때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언젠가 떠날 것이 분명하다면 붙잡아 집착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붙잡는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어쩌면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아 집착함으로써 ‘내 소유’를 늘려 나가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붙잡을 것이 없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붙잡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괴롭다. 붙잡는 것은 결국 괴로움을 남길 뿐이다. 그렇지만 도저히 붙잡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집착에서 온다. 허망하여 꿈같고, 신기루 같으며, 환영 같은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데서 모든 인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집착을 놓으라.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모든 소유와 집착의 대상을 해방시켜 주라. 행복은 집착을 놓아버리는데서 온다.

연기법이 끊임없이 설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집착할 것이 없다는 자각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을 내 것이라고 붙잡으면 남는 것은 괴로움 뿐이다. 연기적인 삶이란 방하착이요, 집착을 버리는 삶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니, 오면 오는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대로 받아들이되,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인연 따라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인연 따라 가면 가는 대로 받아들이라. 온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간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것일 뿐이다.

오고 가는 모든 것을 허용하라. 내 존재 위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두되 어떻게 오고 어떻게 머물다가 어떻게 가는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지켜보았을 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지켜보았을 때 본래 머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 흘러갈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주라. 세상의 모든 여행자들이 잠시 왔다가 몸을 쉬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자비로운 객사(客舍)가 되어 주라. 세상 모든 존재가 잠시 들러 쉬었다 떠날 수 있는 간이역이 되라. 내게 와서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말라. 종착역으로써 나에게 오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 그 어떤 존재도 나에게 종착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모든 것은 잠시 머물다가 떠날 뿐이다. 그것을 거역하지 말라. 잠시 왔다가 가야할 때가 되면 떠나게 내버려 두라. 수행자에게 방하착, 놓아버림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을 여의는 축복 같은 선물이다.




관, 깨어있는 관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연기법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셨는가. 이 세상이 상의상관적으로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셨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 관조(觀照)에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치우침 없는 관찰에 있다. 이 세상의 이치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관행(觀行)이 필요하다. 뒤에서 팔정도와 사념처에서 별도의 설명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한 소개만을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기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지만 설명만으로는 연기법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연기법이 그대로 내 삶의 방식이 되고, 내 삶이 고스란히 연기법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알음알이나 지식만을 가지고는 부족하다. 연기법에 관한 몇 백 권의 책을 낸다고 해도 읽는다고 해도 연기법을 깨닫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철저한 수행이 필수적이다. 불교적인 깨달음, 연기의 깨달음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 수행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말라.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능력이 있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실천되어질 수 있는 고난이도의 고행이나 묘기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지식인들이라도 한 발조차 내딛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자일지라도 성큼 성큼 앞서갈 수도 있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한, 지혜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바로 관(觀)에 있다. 관 수행이야말로 나와 내 밖의 우주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식대로 왜곡해서 보고 편견과 선입견을 투영해서 본다. 똑똑한 지식인일수록 오히려 현실을 바라볼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온갖 지식과 견해라는 색안경으로 투영해서 보기 쉽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사람, 순수한 사람일수록 왜곡해서 볼 내 안의 견해와 판단이 없다. 옳고 그른 것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자기만의 가치관이 뚜렷하거나, 세상 일을 판단해 낼 수 있는 가치판단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에 빠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편견과 선입견, 지식과 아집이야말로 이 공부에서 버려야 할 첫 번째 것들이다.

아무런 편견과 선입견도 없이, 순수하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난생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옳고 그르다거나, 선악이라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을 비워버리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한 번도 지켜본 적이 없는 것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내 마음과 느낌, 감정들을 지켜보라. 세상에 처음 태어나 첫 호흡을 내쉬는 갓난아이처럼 천진한 비춤으로 호흡을 지켜보라. 나와 내 밖의 세상이 어떻게 마주치며, 접촉하고, 느끼고, 흘러가는지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바라보는 것에 그 어떤 이름도 붙이지 말라. 관 수행이라거나, 위빠싸나라거나, 지관이니 정혜(定慧)니 하는 모든 이름을 지워버려라. 관 수행을 통해 연기법을 깨닫겠다는 생각도 놓아버리라.

내가 수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 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람, 수행이 잘 되고 있다는 혹은 잘 안 된다는 모든 착각을 버리라. 그리고 다만 분별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라보기만 하라. 바라봄, 깨어있는 관찰, 알아차림, 지켜봄, 비추어 봄, 관, 주의집중, 마음모음, 그 어떤 용어에도 걸리지 말고 다만 바라볼 때, 연기가 드러난다. 온 존재가 연기를 이해하게 된다.

 



저작자 표시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196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연기법의 세계에서 일체 모든 존재는 우연이나 운명론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현상들은 모두가 그럴만한 인과 연에 의해 인연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원인에 따른 분명한 과보를 받게 마련이다. 인과응보, 업인과보의 법칙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은 움직인다. 원인이 있으면 그에 따른 분명한 결과가 있게 마련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나에게 주어진 현실은 어떠할까. 나에게 주어진 현실 또한 엄연한 인과응보의 결과일 뿐이다. 현실이라는 결과 또한 과거의 내 인연들이 원인이 되어 현재에 받는 것이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내 스스로 받는 것이다. 업인과보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다. 그것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분명한 인과의 흐름을 타고 내 앞에 놓여있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는 억울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고,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일지라도 그것은 엄연한 인과의 법칙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한다. 부자들은 계속해서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도 가난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오히려 정직하고 노력하는 자는 가난해 지기 쉽고, 오히려 열심히 살지 않더라도 머리만 잘 쓰고, 이기적인 사람이 성공하기 쉬운 현실을 한탄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기질에도 불만이 많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을 잘 만나 행복하게 부유하게 자라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가난한 가정에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란다. 그 뿐인가. 어떤 사람은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지만, 또 다른 사람은 척박한 땅에서 가난과 기아와 질병과 전쟁 속에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은 세상을 한탄하고, 신을 원망하며, 진리가 과연 있는 것이냐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세상은 왜 이리도 불공평하단 말인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이야말로 완전한 평등의 진리가 꽃피어나는 곳이다. 다만 우리의 눈에는 일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불공평한 것 처럼 보일 뿐이다. 전생과 이번생, 그리고 다음 생으로까지 이어지는 시간을 뛰어넘어 볼 수 있는 눈이 없으며, 공간적으로도 볼 수 있는 시야는 한정되어 있다.

인과라는 엄연한 진리의 흐름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정견의 시야가 없으며, 연기적이고 상호연관되어 일어나는 현상들을 전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지혜가 부족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눈에는 모든 것이 불평등하고 조화롭지 못하게 보인다.

그러나 인과응보의 세상, 인연과보, 연기의 세상은 완전한 대평등의 세계다. 어떤 이들에게는 인과가 적용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적용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인과의 진리는 적용되고 있다. 지혜로운 이는 인과를 보고 알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인과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불평등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인과를 전체적으로 볼 수 없더라도 이 세상이 연기법, 인과응보라는 진리로써 운행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연기라는, 인과라는 진리를 온전히 믿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믿든 안 믿든 연기와 인과의 진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연기와 인과의 법칙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것들을 통째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연기와 인과는 분명하다. 내 앞에 펼쳐진 그 어떤 괴로움일지라도, 그 어떤 상황일지라도 모든 것은 인연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인과응보의 분명한 법칙에 따라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어떤 현실도 원인 없이, 이유 없이 나타날 수는 없다.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이 내가 그 결과를 받아야 할 순간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괴로운 일이 벌어지더라도, 조금은 불평등해 보이는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꼭 필요한 일이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너무 괴로워 받아들이기 싫은 현실일지라도 그것은 바로 지금이라는 이 시기에 내가 받을 수밖에 없는 연기적인 현실이다.

그 현실은 누가 만들어냈는가. 그것은 바로 나다. 내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에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지을 때는 복도 짓고 죄도 짓지 않았는가. 그동안 우리는 살면서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하며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안에는 선업과 악업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 언제든 현실에서 발현되기만을 기다리다가 인연에 맞는 때가 오면 바로 그 순간에 선업이든 악업이든 현실로써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을 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게 마련인 것이다. 지을 때는 선행과 악행을 함께 지어 놓고 받을 때는 선행의 결과만 받고자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스스로 만든 현실을 내가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앞에 펼쳐진 그 모든 현실을 받아들이라. 거부하지 말라. 받아들인다는 것, 섭수한다는 것이야말로 연기를 이해하는 모든 수행자들의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다. 즐거운 일은 과거에 지어 놓은 선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즐겁게 받아들이고, 괴로운 현실은 과거에 지어 놓은 악업의 결과를 받는 것이니 이 또한 받아들임으로써 악업을 녹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는 것이다. 업이 올라오는 순간에 완전한 긍정으로써 크게 받아들이고 섭수하면 올라오는 대로 녹아내린다. 눈부신 햇살에 겨울눈이 녹아내리듯 현실에서 나타나는 그 모든 인연들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여 녹이라.

받아들임에는 좋고 나쁜 분별이 없다. 좋고 나쁜 것이 있으면, 좋은 것은 받아들임을 넘어 집착이 붙게 마련이고, 나쁜 것은 거부와 배척이 뒤따른다. 받아들인다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좋고 나쁨, 옳고 그름, 선과 악 등의 이분법적인 분별이 붙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절대적인 선과 절대적인 악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인간의 분별이 온갖 극단을 스스로 만들어 낼 뿐이다. 모든 경계를 다만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바라보면 받아들임의 지혜가 생겨난다. 좋고 나쁜 것이 없으니 좋다고 집착할 것도, 싫다고 거부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받아들임이야말로 곧 무분별과 무집착과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실천이며, 연기의 실천인 것이다.

이처럼 받아들임, 섭수야말로 연기와 중도, 공에 대한, 이 우주적인 진리에 대한 수용이며 존중이고 실천이다. 우주적인 진리를 진리로써 인정하며 그 앞에 나를 굴복시키고 복종시키는 진리의 숭고한 실천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상황을 전체적으로 수용하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 현실을 통째로 인정하라. 좋은 현실이든 나쁜 현실이든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섭수하라.

순간순간의 모든 삶과 삶 속에서 피어나는 모든 경계들을 흔쾌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에는 평화가 깃든다. 삶을 대상으로 투쟁해 온 모든 다툼과 전쟁은 종식되고 지고의 안온과 평화와 자유로움이 깃든다. 모든 선악과 좋고 나쁨과 옳고 그름과 맞고 틀림이라는 극단적인 분별이 소멸되고 중도의 지혜와 텅빈 고요함이 드러난다. 섭수는 삶을 인정하는 것이고,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며, 부처님과 부처님의 진리를 고스란히 내 품에 끌어안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195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와 같이 일체 모든 존재들이 바로 나를 키워주었고, 자비로운 보살핌으로 나를 살려주었다면 그들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들로 인해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되었고, 보살핌을 받게 되었으며, 먹고 자고 살아갈 자양분을 얻게 되었다면 우리가 이 우주와 세상의 모든 존재들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되겠는가.

감사를 실천하는 것이다. 감사의 마음만 보낼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온 마음으로 감사의 실천을 행할 일이다. 이 우주 법계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 바로 보시며 나눔이다.

사실 우주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지만, 사실 엄격히 따진다면 보답이라는 말도 필요 없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그들이 있으며, 이 우주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우주가 있다면, 또한 그들이 소멸되면 나도 소멸되고, 우주가 소멸되면 나도 소멸된다면 이 연기적인 삶에 나와 너라는 분별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이며,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가 곧 나일 수밖에 없는 동체(同體)적인 한생명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되어진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는 한 몸, 한 생명인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 만유가 모두 한 몸이요, 한 생명이라면 어찌 나와 너라는 나뉨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나와 너가 없다면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분별도 사라진다. 네가 아픈 것이 곧 내가 아픈 것이며, 네가 굶는 것이 곧 내가 굶는 것일 수밖에 없다.

연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이 기아와 가난에 허덕인다면 그것은 곧 내가 기아와 가난에 허덕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너의 가난이 곧 나의 가난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나누고 보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동체적인 보시는 보시나 나눔이라는 말조차 필요치 않는다. 내가 배고플 때 내가 먹는 것을 가지고 내가 내게 보시한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에게 베풀더라도 사실 그것은 베풂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동체대비의 참모습이다. 동체대비란 말 그대로 온 우주법계가 한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크나큰 자비를 말한다. 이러한 큰 자비는 자비라는 말조차 쓸 필요가 없는 자비이다.

이러한 동체대비야말로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꽃피어나는 상(相) 없는 자비이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 속에서 실천되어지는 자비는 아무런 상을 내세울 것도 없고, 티를 낼 것도 없다. 스스로의 자비를 자비라고 치켜세울 것도 없고, 자비를 행하고서 스스로 자비를 행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일 뿐이다.

내가 배고프면 내 밥을 먹듯이 누구라도 배고프면 내 밥을 먹여 주는 것이다. 내가 타인을 먹이는 것이지만, 연기법에서는 내가 나를 먹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찌 베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베풀면서 베풀었다는 상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베푸는 것은 동체대비요 베풀었다는데 머물지 않는 무주상보시이다.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으니 내 것을 너에게 준다는 관념 또한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연기의 세상에서는 어떤 것도 ‘내 것’이 될 수 없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나라는 존재 또한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났다가 인연이 다 하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공한 존재, 연기적인 존재일진데 내 소유가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나도 없고 내 소유도 없으며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연기로 바라본 이 세상의 본질에는 무아(無我), 무소득(無所得), 무소유(無所有)의 덕목이 있다. 나도 없고, 내가 얻을 바도 없으며,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인연 따라 다만 나라는 존재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존재일 뿐이며, 내 소유라는 것도 잠시 인연 따라 내게로 왔다가 잠시 머무른 뒤 어김없이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들이다. 연기되어진 모든 것들은 무아요, 무소득이며, 무소유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어찌 ‘내 것’이라고 가두어 둘 수 있겠는가. 내 소유를 늘려나가는데 집착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내 소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인연 따라 나에게로 잠시 온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잠시 내게 온 것들조차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며, 이 우주 전체의 것일 뿐이다.

우주의 것이 인연 따라 내게도 오고 너에게도 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연 따라 필요한 곳에 필요한 것이 있도록 하는 것 외에는 할 것이 없다. 상대에게 그것이 필요하면 그것을 내어줄 뿐이다. 그렇게 내어 주고 나서도 내가 상대에게 주었다는 상을 낼 이유가 없다. 그것은 다만 인연 따라 있어야 할 자리에 간 것일 뿐이다. 내가 네가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도록 다만 나는 도왔을 뿐이다.

그러니 이러한 연기의 세계에서 보시는 보시가 아니다. 보시를 하고서도 보시했다는 상이 생길 여지가 없다. 이러한 보시야말로 연기적인 보시요, 동체대비의 깨달음에 입각한 보시인 것이다.

연기를 깨달으면 이처럼 동체대비의 보시행이 저절로 삶의 방식이 된다. 그러나 연기를 깨닫지 못했더라도 반대로 상 없는 무주상보시를 끊임없이 행하면 보시의 실천행 속에서 연기적인 자각이 꽃피어난다. 그러니 보시행, 자비로운 나눔이야말로 연기법을 실천하고, 연기를 깨닫는데 있어 중요한 실천적인 요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11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사건도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이해를 보여준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입각해 보면, 쌀 한 톨이 존재하기 위해서도 좁게는 농부와 소매상, 도매상, 태양과 흙과 물과 바람과 각종의 영양분 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며, 넓게는 나아가 이 우주 만물,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직간접적으로 쌀 한 톨의 생명을 돕지 않으면 도저히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 작은 미생물, 곤충, 벌레, 짐승이며 사람에 이르기까지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 서로 도움을 주고 받지 않을 수 없고, 나아가 이 우주의 어머니와 같은 보살핌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모든 것은 서로 다른 모든 것에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는다. 모든 존재는 모든 존재를 살리기 위한 중요한 요인이 된다.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이 자리에 존재하기까지는 내 발 아래의 작은 꽃 한 송이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으며, 흙과 바람과 구름과 햇살이 어머니의 품이 되어 나를 보살펴 주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웃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내가 삶 속에서 마주치는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들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를 살려주고, 보살펴주고, 키워 준 소중한 어머니요 아버지인 것이다.

그들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다. 하찮게 여겼던 풀 한 포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고, 숲의 나무들 때문에 내가 살고 있으며,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직간접적인 도움 없이는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설 수 없다. 어디 그 뿐인가. 시간을 거슬러 옛 조상님들을 비롯하여 그야말로 ‘일체 모든 존재’들이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이 있기에 내가 있고, 또한 내가 있기에 그들이 있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상에서 우리들이 실천해야 할 첫 번째 실천의 덕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감사와 찬탄이다. 어찌 나를 이끌어준 이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들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이렇게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나를 살려주고 보살펴 준 우주 법계의 소식에 경외와 찬탄을 보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기법의 세계를 살아가는 모든 이의 삶의 방식은 찬탄과 감사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존재들이 나의 어머니요 아버지다. 대지와 태양과 바람과 구름이 나의 아버지이며, 이웃과 나무와 꽃과 풀들이 나의 어머니다.

내가 잘나서 이렇게 성장하고 잘 자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오만한 생각이 있을까. 내가 능력이 있어서, 내가 성격이 좋아서, 내가 잘나서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니다. 삼라만상 일체의 모든 존재들이 나를 돕고, 나를 살려주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어머니의 품처럼 나를 품어주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려지는 것이다’는 말이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의해 살려지는 것이라는 뜻이다. 산다고 생각하면 그 주체가 내가 되어 아만과 아집과 이기가 생겨나기 쉽지만, 살려진다는 말에는 연기와 감사와 겸손의 덕목이 숨 쉬고 있다. 온 우주의 크고 작은 모든 존재들에 의해 지금 이 순간도 우리는 매 순간순간 살려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어떠한가. 인간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아집과 오만이 하늘을 찌른다. 내가 잘난 줄 알고, 인간만이 우월한 줄 안다. 인본주의, 휴머니즘이라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것은 나를 키워 준 아버지 자연을 소외시키고, 어머니 대지를 짓밟으면서 인간만이 우월하다는,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도 좋다는 인간의 오만으로 치닫고 있다.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나누는 것은 연기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 모두는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 인간과 신이, 인간과 자연이 평등한 인연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상생과 조화의 관계다. 이것이 깨지면서부터 온갖 환경오염이 재앙적으로 출현하지 않았는가.

인간이 신을 찬탄하고 신에게 모든 감사를 돌리듯이, 연기적인 가르침에서는 인간이 신에게 한 것과 똑같은 신성함으로 자연을 찬탄하고 자연에게 감사를 돌리며, 또한 이웃을 찬탄하고 감사를 돌리는 삶으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 내는 일들은 모든 것이 찬탄과 감사의 대상이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공경스런 마음으로 찬탄하고 찬양하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에게 감사와 외경의 예를 올리라. 예를 올리는 대상은 부처님이거나 신에 한정되어서는 안 된다. 일체 모든 존재가 부처요 신이다. 부처님의 은혜, 신의 은총으로 인해 지금의 내가 있다고? 바로 그 부처님의 은혜와 신의 은총의 실체는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들의 은혜요 은총이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도움을 주고 받는다는 이 대 우주의 자비로운 오케스트라에 감사하고 찬탄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이 은혜와 은총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다.

새벽 정갈한 마음으로 감로의 천수를 공양 올리며 초와 향을 사르고 나아가 불전에 온 마음을 다해 지극정성으로 예를 올리는 바로 그 마음으로 온 우주에 예를 올리라.

6시간을 어렵게 올라 봉정암의 부처님께 공양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 발 아래 힘겹게 피어오른 민들레 한 송이에 찬탄과 감사의 예경을 보내라.

어렵게 어렵게 모처럼 큰스님을 친견하는 마음으로 아내와 남편을, 자식과 이웃을 매일매일 친견하라.

어머님과 아버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라.

하루 동안 내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나를 살려주어 감사하다’는 찬탄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라

저작자 표시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11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인과 - 인과응보

연기법을 원인과 결과의 상관성의 측면에서 살펴본 말로 인과, 인과율 혹은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결과가 있다는 것은 곧 그에 대한 원인이 있게 마련이라는 의미다. 또한 선을 행하면 선의 결과를 받고 악을 행하면 악의 결과를 받는다고 하여 선인선과 악인악과(善因善果 惡因惡果)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인과법이 그대로 연기법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인과율이 연기법에 포함되기는 하지만 연기와 인과가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설명은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있고, 또한 ‘저것’으로 인해 ‘이것’이 있다는 상의상관적인 관계이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의지해 있고 도움을 주고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반해, 인과라는 것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을 수 있다는 직선적이고 시간적인 인과율을 의미하는 것이다.

앞에서 씨앗이라는 ‘인’에 다양한 ‘연’이 화합함으로써 열매라는 ‘과’를 맺을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인과법칙의 좋은 비유가 될 수 있다. 씨앗이라는 인(因)과 흙과 거름과 물 등의 연(緣)이 화합하여 열매를 맺고[果] 그 열매를 우리가 먹음으로써 생명을 유지시켜 나갈 수 있다. 이처럼 인연이 화합하면 그에 따른 결과인 과(果)를 맺는다. 인과에서 본다면 직접적인 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이 모두 어떤 한 결과를 맺는 원인으로 작용했으므로 이 두 가지를 다 ‘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씨앗이라는 ‘인’으로 인해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이며, 농부의 노력이라는 ‘인’으로 열매라는 ‘과’를 맺은 것도 인과인 것이다. 이처럼 인과는 인간과 사물 간에도 작용하고, 존재와 존재 간, 존재와 사물 간 등 모든 생명 있고 없는 존재들에게 해당되는 자연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특별히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과 그에 따른 결과라는 인과를 별도로 업보(業報)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즉 인간의 의지적인 행위라는 원인[인]을 ‘업’이라고 부르며, 그러한 의지적인 업에 따른 필연적인 대상의 반응을 ‘보’라고 한다. 이것을 업인과보(業因果報)라고도 부른다.

이것이 바로 뒤에서 설명될 십이처 교리에 입각한 주체적인 인간의 육근과 객관적인 대상이라는 육경 사이의 법칙인데, 인간이 눈귀코혀몸뜻으로 능동적이고 의지적인 작용을 일으키면[인]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은 필연적으로 그에 따른 반응[과]을 보인다는 것이다. 즉 인간과 대상 사이에는 인과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간과 대상 사이에 인과의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 대상은 일반적으로 자연물을 말하고 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인과의 관계는 성립된다. 선인선과 악인악과가 말해주듯이 내가 상대방에게 선으로 대하면 선의 결과가 돌아오지만, 악한 행위를 하면 악의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다. 이 업보에 대해서는 뒤에 업과 윤회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법계 - 법주법계

이상의 연기, 인연, 인과에 대한 설명에서처럼 이 우주의 근저에는 연기라는 법칙이 전제되어 있다. 이 우주의 기본 법칙이기도 하면서, 인간과 모든 존재들의 기본적인 운행 법칙이 바로 연기법인 것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것들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벗어날 수는 없다.

즉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연기법이라는 법칙에 머물고 있으며[法住], 연기법이라는 진리의 세계[法界]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잡아함경』 12권 296에서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出現)하시건 혹은 세상에 출현하시지 않으시건 이 법은 항상 머무르나니(法住), 법이 항상 머무르는 곳을 법계(法界)라고 한다.”고 설하고 있다. 즉 부처님께서 출현하시건 출현하지 않으시건 일체 모든 존재는 항상 연기라는 법 안에 머물러 있으며, 이 세상은 항상 진리가 머무르는 곳이기 때문에 진리의 세계 곧 법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잡아함경』12권 299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법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다만 여래는 이 법을 스스로 깨달아 정각을 이루어 중생들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고 드러내 보이신다.”고 함으로써 연기법이라는 진리가 법계에 상주함을 드러내고 있다.

이와 같은 법주 법계의 이치에 따르면,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저 우연히 생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존재일지라도 저마다 완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며, 진리의 몫을 해 내기 위해 진리로써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일체 모든 것들을 ‘제법’이라는 말로 표현하곤 한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제각기 진리로써 존재하고 있는 ‘법’이라는 의미다.

사람만 진리로써 나툰 것이 아니라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도, 저 하늘의 구름이며, 바람이며, 별들도, 아무리 작은 풀벌레며 곤충과 심지어 미생물들 또한 제각기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진리로써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진리의 법계에 법으로써 법주하는 것이다. 즉 진리의 세계에 진리로써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인간만을 우월하다 하고, 자연이나 자연물들을 열등하다 할 수 있겠는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어찌 높고 낮은 우월감이 발붙일 수 있겠는가.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계에 법주하고 있는 법으로써 정확히 필요한 곳에 정확히 필요한 이유를 가지고 정확히 필요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견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존재이유는 분명한 진리의 몫을 띄고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이 세상을 원망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부자이고 좋은 가문에 태어나고, 능력과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데 반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먹고 살 걱정, 의식주 걱정으로 허덕이며 근근이 살아간다. 또 어떤 사람은 간교한 계략과 이기적인 술수로써 살아가는데도 성공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성실하고 소박하게 베풀며 살아가는데도 가난을 면치 못하기도 한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더욱 더 이런 불만과 불평등의 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신을 욕하고 부처를 탓하며 이같이 불평등한 세상에 무슨 진리가 있겠느냐고 자조 섞인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연기법에 기반한 법주 법계의 진리에서 본다면 이 모든 불평등해 보이는 세상이 사실은 분명한 진리로써 진리의 모습에 하나도 어긋남 없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좁은 소견에서 본다면 당장에 이번 한 생 밖에 볼 수 없으며, 당장에 눈 앞에 보여지는 것에만 연연하지만 우주적인 진리의 시야는 시공을 초월하며 전체적이고 전 우주적인 툭 트인 정견(正見)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언뜻 보기에는 불평등해 보이고, 진리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사실은 그 이면에 분명하고도 정확한 인연, 인과, 연기의 진리가 일체 모든 존재의 저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진리가 머물러 있는 진리의 세계, 법계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좁은 소견으로 이 법계를 판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시선이 전체적인 법계를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의 견해를 정견으로 바꾸어 나가야지, 현재의 갇혀 있는 좁은 소견으로 이 법주법계를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수행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치우쳐 있고, 갇혀 있는 좁은 소견을 온전하고도 전체적인 치우침 없는 정견으로 바꾸어 가기 위해, 그래서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열반을 증득하려면 먼저 법에 머무를 줄 알아야 한다. 즉 법주를 알아야 한다. 『잡아함경』14권 347에서는 “그들은 먼저 법에 머무를 줄을 알고 뒤에 열반을 알았느니라. 그 모든 선남자(善男子)들은 홀로 어느 고요한 곳에서 분명하게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으며, 나라는 소견[我見]을 여의고 모든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 마음이 잘 해탈하였느니라.”라고 설하고 있듯이, 법에 머무를 줄 알고 난 뒤에야 열반을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법주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이 곧 법이 머물러 있는 곳임을 분명하게 믿고 맡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이 우주는 그대로 법신불(法身佛)이요, 낱낱의 존재는 모두가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하는 말도 바로 법주법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이 우주 법계를 법신불이라고 하며, 나라는 존재 또한 사실은 진리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진리의 몸이기 때문에 자성불이라고 한 것이다.

법신불이니 자성불이니 하는 말이 어떤 실체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진리로써의 몸 없는 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먼저 열반을 구하려는 수행자는 이러한 법주를 바로 알아 내 안에, 또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우주에 언제나 법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그러한 법신불과 자성불의 진리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의 첫째는 나를 완전히 내던져 맡기는 것에 있다. 경전의 말씀처럼 법주를 분명히 알아야 열반이 있는데, 법주를 분명히 알아 실천한다는 것은 곧 ‘홀로 고요한 곳에서 분명히 사유하기를 게으르지 않고, 나라는 소견을 여의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에 있다. 나를 완전히 진리에 내맡기고 진리의 흐름에 들어 완전히 힘을 빼고 함께 따라 흐를 때, ‘나’라는 소견을 벗어날 수 있으며, 번뇌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즉, 법에 머무른다는 말은 곧 ‘나’라는 소견을 놓아버리고 모든 생각과 번뇌를 다 내맡기고 다만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바라보기를 게으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법에 모든 것을 맡겨야 ‘나’를 내세우지 않을 수 있고, 법이 머무르고 있음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홀로 고요히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나에게도, 내 주변의 세계에도 진리가 항상 머물러 있음을 바로 알고 믿어 법에 모든 것을 맡기고, 나의 소견을 내세우지 않으며, 고요히 법을 사유하고 지켜보는 수행을 했을 때 법에 머무르는 지혜[法住智]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주지(法住智)를 얻으면 ‘나’라는 소견이 사라지고, 일체 모든 것을 법에 내맡기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의 평화가 깃들고 지혜가 생겨난다. 『잡아함경』14권 345에 보면 “저 사리불 비구는 실로 내가 하루 내지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묻는 이치에 대해, 7일 밤낮 동안 다른 글귀와 다른 맛으로 그것을 해설할 수 있다. 왜냐 하면 사리불 비구는 법계(法界)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니라.”라는 대목이 보인다.

즉 부처님께서 몇 일 밤낮 동안 다양한 가르침을 행하시더라도 사리불은 그 모든 법을 해설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데, 그것은 사리불이 법계에 잘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리불 비구는 법계에 잘 들어가 진리의 세계를 완전히 깨닫고 진리와 하나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부처님의 말씀이라도 다 이해하고 해설해 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부처님 가르침을 이해하는 핵심은 바로 이 세계가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진리로 이루어진 법계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아 아는 것이다.

이러한 법주법계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법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법계가 곧 진리의 세계이며, 나라는 존재 또한 진리가 머물고 있는 법신임을 믿어 ‘나’를 내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살아갈 수 있도록 일체 모든 것을 진리에 내맡기고 살아가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산다고 하면 아상에 빠지게 되고, 이기와 아집에 빠지고 말지만, ‘진리’가 산다고 믿고 맡기며, 부처님이 산다고 믿고 맡기고 살게 되면, 괴로움에 허덕일 것도 없고, 삶을 헐떡거리며 살아갈 것도 없어진다. 그 때부터는 삶이 고요해지고, 이기와 아집이 소멸하며, 평화와 안식이 깃들게 된다.

괴롭기 위해서는 괴로운 ‘나’가 있어야 하는데, 모든 것을 법주법계에 맡기고 살게 되니 ‘나’가 사라지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진리’만이 남아 진리답게 법답게 저절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주법계로 사는 수행자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사는 것이며,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주 법계의 수많은 진리의 인연에 의해 살려지게 되는 것이다.

이 법주법계에서 알아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 법주나 법계를 주체적인 어떤 상으로 실체화시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법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진리로써의 이치를 설하는 것이지 별도의 상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중생계와 별도로 실체적인 어떤 법계가 있다거나, 내가 머물고 있는 이 현상계와 별도로 법주가 있다고 이해한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서 한참 벗어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무아에서는 그 어떤 실체도 발붙일 틈이 없다. 심지어 그것이 진리일지라도, 부처일지라도 거기에 집착하고 머물러 실체화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를 벗어나고 만다.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89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008/08/13 09:20





연기법과 흔히 혼용하여 쓰고 있거나, 함께 쓰고 있는 것으로 인연(因緣)이란 말이 있는데, 사실 연기는 인연생기(因緣生起), 혹은 인연소기(因緣所起)의 줄인 말이다. 인과 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 인과 연이 화합함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연기법인 것이다.

여기에서 ‘인’은 결과를 발생케 하는 직접적인 원인을 의미하고, ‘연’은 간접적이며 보조적인 원인을 뜻한다. 그래서 인은 직접적이고 연은 간접적이라는 뜻으로 친인소연(親因疏緣)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식물에서 본다면 식물의 직접원인인 ‘인’은 씨앗이 될 것이고, 간접적인 원인인 ‘연’은 거름과 흙과 태양과 공기와 물과 농부의 노력 등 식물을 싹틔우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간접적인 일체의 원인을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한 존재가 생겨나는데는 그것이 아무리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한 가지 원인만을 가지고 생겨날 수는 없으며, 인과 함께 수많은 보조적이고 간접적인 연들이 무수하게 도움을 주어야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인과 연이 화합한다고 해서 인연화합이라고 한다.

식물 하나를 싹틔우고 꽃피우는데 만도 이 우주의 지수화풍의 모든 요소와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모든 멀고 가까운 온갖 조건과 원인들이 수도 없이 많은 보조적인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연이라는 것은 다만 몇몇가지 간접 원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형성시키는데 도움을 준 일체 모든 것들의 크고 작은 모든 원인을 의미하며, 나아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식물 한 그루를 싹틔우는 보조적인 연으로써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일체 모든 생겨난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른다. 앞의 연기의 설명에서 보았듯이 이 세상에 생겨난 모든 것들은 저홀로 독자적으로 생겼거나, 어떤 특정한 한 가지 원인에 의해 한 가지 결과가 도출한다는 직선적이고 단일적인 인과가 아니라 인연법에서 보듯이 인과 연의 무수한 원인과 조건들이 조화를 이루어 화합하였을 때 결국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인연법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인과 연이라는 것이 확정적으로 어떤 것이 ‘인’이고, 어떤 것이 ‘연’이라고 딱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또한 어떻게 보느냐의 관점에 따라, 시간과 공간적인 차이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인과 연이 바뀔 수도 있다.

인연법에서 중요한 것은 결정론적으로 ‘인’이 무엇이고, ‘연’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겨나는 것들은 그 생성과 소멸에 직접적인 원인과 간접적인 원인들이 무한하게 중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연계되면서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인연화합의 가장 대표적인 경전의 비유는 우유와 치즈의 비유를 들 수 있다. 우유를 발효하여 치즈를 만든다고 했을 때 우유가 직접적인 원인인 인이 되고, 발효과정이나 발효에 들어가는 간접적인 모든 조건들이 연이 되는 것이다. 우유만 있어도 발효라는 연이 있지 않으면 치즈를 만들 수 없고, 발효라는 연의 조건이 있더라도 우유라는 인이 없으면 치즈라는 과를 가져올 수 없으므로 인과 연은 어느 하나가 빠지더라도 과를 생성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다른 비유로 물의 순환을 들 수 있는데, 물이라는 것이 인연 따라 여름철 장마를 만나면 비로도 내렸다가, 겨울에 추운 조건이 형성되면 눈으로도 내리고, 또 때로는 우박으로도 내린다. 특정하게 물이 어떤 실체가 있었다면 그렇지 않겠지만 물 또한 실체 없이 다만 인연 따라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대지 위를 내린 비는 산과 숲을 만나 인연 따라 나무의 수액도 되었다가, 사람의 몸을 구성하는 피나 땀이 되기도 하고, 지하수도 되었다가, 호수나 계곡물로도 되고, 나아가 강이나 바다로도 흘러든다. 또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면 수증기로도 증발하고 다시금 하늘에 구름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름이 다시 인연을 만나면 비나 우박이나 눈 등으로 다시 쏟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인연 따라 물은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로 변화에 변화를 거듭한다.

이름도 비, 눈, 우박, 서리, 이슬, 구름, 수증기, 수액, 피, 땀, 강, 바다, 계곡물 등 어떤 인연을 만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바뀐다. 이처럼 물이라는 근본 원인(因)이 어떤 조건, 어떤 연(緣)을 만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돌고 돌며 순환한다.

물론 그 물이라는 분자 또한 수소원자와 산소원자로 나뉘면서 변화해 가고, 수소나 산소 또한 그것을 쪼개면 원자핵과 전자로 나뉘는 등 어떤 실체적인 것 없이 끊임없이 인연따라 변화해 갈 뿐인 것이다. 이처럼 그 모든 것은 인연화합의 이치를 따르며 변화해 간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바뀌어 갈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고, 공이며, 무상이고, 그 모든 것을 연기 혹은 인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공이며, 무아이고, 무상이며, 연기이다.

인간의 생노병사(生老病死)도 마찬가지고, 존재의 생주이멸(生住異滅)도 마찬가지이며,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이 다만 인과 연의 화합에 의해 생성되고 머물며 변해가고 소멸되는 단계를 밟고 있는 것이다.

작게는 나라는 존재도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인과 그 두 분의 사랑, 결혼 등이라는 연에 의해 생겨나고,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과 우주적인 도움을 받아 인연 따라 성장하고 늙어 가다가 죽는 것이며, 모든 존재의 생주이멸도 그러하고, 우주의 성주괴공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별의 탄생이라는 것도 독자적으로 어느 순간 탄생된 것이 아니라, 별과 별 사이의 성간물질이라고 하는 ‘인’이, 빛과 탄소와 그로인한 수축 등의 다양한 ‘연’을 만나면서 빛을 발하고 핵융합 반응을 하면서 인연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그러한 모든 별들은 만들어졌다가 머무는 단계를 거친 뒤에는 어김없이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쓰게 되어 소멸될 수밖에 없다.

태양만 보더라도 과학에서는 현재 50억 년 정도 핵융합 반응을 통해 성주(成住)의 과정을 거쳤고, 앞으로 50억 년 쯤 후가 되면 수소 핵융합 반응의 원료인 수소를 다 소모하게 되어 태양의 일생도 괴공(壞空)의 단계로 갈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처럼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생성된 것들은 크든 작든 모두가 인연화합의 법칙에 적용을 받는다. 누군가가 창조한 것도 아니고, 우연처럼 생겨난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이 인과 연의 화합에 따라 만들어지고 소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은 본래 텅 비어 있는 공이었지만, 인과 연을 만나면 생성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의심한다. 아무것도 없는 것이 어떻게 인과 연을 만난다고 해서 결과를 발생케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이지만, 무이지만, 인연을 만나면 결과를 이룬다는 이 사실에 대해 단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비유로 불의 비유가 있다.

여기에 나무와 나무가 있다고 했을 때, 이 나무와 나무[因]를 인위적으로 비벼줌[緣]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불[果]을 얻을 수 있다. 본래 나무와 나무 사이에 불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공기 중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비벼주는 손에 불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무라는 인(因)에 힘을 가하여 비벼 주는 연(緣)으로 인해 결과인 불[과(果)]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불이 만들어 진 것은 나무 때문만도 아니고, 공기 때문도 아니며, 비벼주는 손 때문만도 아니다. 다만 나무와 공기와 손, 그리고 습도며 주변여건 일체가 인연 화합하여 모일 때에만 불이란 결과를 생(生)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젖은 나무를 아무리 비벼도 불을 얻을 수 없으며, 공기가 없는 곳에서는 아무리 나무를 비벼도 불을 얻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또한 일정한 시간이 지나 나무가 모두 타게 되면, 인과 연이 소멸하였기에 불은 자연히 스스로 꺼지게 된다. 모든 존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인연생기(因緣生起)하여 인연소멸(消滅)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 비유는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귀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이와 같이 인연 따라 만들어지고 인연 따라 소멸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흔히 생명의 탄생에 대해 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를 가지고 논쟁하지만, 불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와 같은 인연론, 연기론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존재는 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나고 인연이 다하면 소멸된다는 이치이다. 불이라는 것은 본래 어디에도 없었다. 손에도, 공기 중에도, 나무 안에도 불은 없었지만, 그 모든 인과 연의 조건이 화합하는 순간 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불이 창조되었다거나 진화되었다거나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인연 따라 생겨났을 뿐이다. 세상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모든 것은 다만 인연이 모이면 생성되고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인연법,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생성과 소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유(有)는 원래 스스로 무(無)인데, 인연의 이룬 바이다’라고 했다. 본래부터 존재가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모든 것이 텅 빈 무이며, 공이었고, 무아였지만, 다만 인연이 화합하는 순간 인연따라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體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이라고 하여 일체의 모든 만들어지고 소멸되는 것들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하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본래의 모습은 텅 비어 있는 공이지만, 다만 인연의 화합으로 인해 잠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이러한 인연법은 존재와 사물의 생멸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삶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아무리 태어나면서부터 부자로 태어나는 ‘인’을 부여 받았더라도 모두가 다 성공하고 그 부유함을 계속 유지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나는 ‘인’을 부여받았더라도 스스로 그 현실을 받아들이며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등의 연을 쌓는다면 오히려 성공적인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본인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더욱 좋은 연들을 많이 만날 수도 있지만, 좋지 않은 연들을 만남으로써 실패를 맛보게 될 수도 있다.

보통 사람들은 똑같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혹은 더 많은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남보다 더 못살고, 더 잘 살지 못했을 때 세상을 원망하고 부처를 원망하며 이 세상에는 진리가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이는 인연법이라는 진리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탓이다.

인연법에서는 똑같이 시험 성적을 90점 맞았다고 그 90점을 맞은 사람들이 똑같이 잘 살며, 똑같은 부유함을 유지하며, 똑같이 대학에 합격하고, 똑같이 사회에서 상류층에 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시험 성적을 90점을 맞았다는 그 근본 원인인 ‘인’에 내 적성과 취향과 꿈,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조언 등 무수히 많은 ‘연’이 함께 화합함으로써 어떤 사람은 A라는 대학 a과에 진학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은 B라는 대학 b라는 과에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며, 또 다른 많은 연들로 인해 두 사람의 인생은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한 사람은 무조건 회사도 좋은 곳에 들어가고 잘 진급하며, 못 한 사람은 나쁜 회사에 들어가 진급도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공부를 잘 한 사람은 공부만 한 대신 인간관계를 잘 못 지었지만, 공부를 못한 어떤 사람이 대신에 인간관계를 잘 지었다면 오히려 공부를 못 했던 사람이 또 다른 ‘연’으로 인해 진급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연을 잘 지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이든 내 삶에 있어 수많은 원인과 조건으로써 나의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그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맑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람 사람들이 하나같이 인이 되고 연이 되어 내 삶의 아름다운 인연으로 성숙되어 가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세상은 A라는 근본 원인이 그대로 a라는 결과만을 똑같이 가져다 주는 곳이 아니다. 그 근본 원인에 또 다른 무수한 어떤 연이 화합되느냐에 따라 수많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똑같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오고, 똑같은 과목으로 공부를 했지만 저마다의 적성과 취향과 직업과 능력과 가치관이 다른 것 아닌가.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열심히만 살면 똑같이 성공해야 한다거나, 똑같이 노력했는데 왜 저 사람은 되고 나는 안 되는가 생각한다거나, 저 사람은 이기적으로 사는데도 성공하고, 나는 이타적으로 살아도 실패를 맛보아야 하는가 하는 점들이 단순하게 원인과 결과에 대한 단일적이고 일차원적인 결과만을 놓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인’과 ‘연’이라는 수많은 복잡다단한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연까지 전체적이게 연기적이게 보아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A는 a가 되는데, 나에게는 왜 A가 c가 되느냐고 억울해 할 것이 아니라, 그 A라는 근본원인에 타인과 내가 어떤 부수적이고 간접적인 연들에 대한 차이가 있었는가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같은 A라는 원인을 지었어도 선업이 많고, 복이 많으며, 인간관계에서 선한 인연을 많이 심어 놓은 사람의 결과는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전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8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진 : 해인사]

절 수행은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이며,
지금 현재에도 간화선, 위빠사나, 염불, 간경, 진언 등의 수행등에 비해
일반인들에게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실천되고 있는 수행방법이다.

그야말로 절 하러 절에 간다고 할 정도로
절 수행은 불교 안에서 불교라는 단어, 사찰이라는 단어와
동일하게 느껴질 만큼
우리에게 친근하며 가까운 수행법이기도 하다.

이러한 절 수행이 예전에는 주로 불교 안에서 실천되어졌고,
또한 주로 불교적인 수행과 신행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지곤 했는데,
요즘 들어 절 수행의 운동적 측면에서의 효과와 공능 등이 점차 알려지면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실천되어 지게 되었고,
거기에 공중파 방송사에서 절 운동에 대한 집중조명이 방영된 뒤로
더욱 종교를 초월하여 운동으로, 기도 방법으로 더욱 보편화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절 수행을 통해
다양한 질병을 이겨낸 이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성철스님과 백련암을 중심으로 절 수행이 좀 더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로인해 뇌성마비를 극복한 한 동양화가의 생생한 이야기와 책을 통해 알려졌으며
또한 본격적으로 청견스님을 비롯하여 절 수행을 집중으로 행하는 수행자가 드러났고,
아울러 절 수행에 대한 주목할 만한 책들이 함께 출간되어 나옴으로써
그야말로 요즈음에는 가히 절 수행이 붐을 타고 있다고 할 만하다.

더욱이 웰빙의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유행하고 있는 다양한 명상의 흐름과
몸과 마음의 건강을 함께 챙기고자 하는 이들의 바람 등이 합쳐지면서
육체와 정신의 건강과 웰빙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절 수행은 더없이 좋은 수행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갑자기 절 수행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일까.
그동안 나왔던 책들이나, 스님들의 법문이나,
또 공중파에서 방영되었던 TV에서나
다양한 절 수행의 효과와 공능들이 설명되고 있는 바,
여기에서는 그러한 것들을 조금 더 정리하고 결집하여 보완해 보고자 한다.

첫째,
절 수행은 수승화강(水昇火降), 두한족열(頭寒足熱)의 효과를 가져온다.

옛날부터 동양의학에서는
건강의 가장 기본이 되는 원리로 수승화강을 꼽아왔다.
수승화강이란
차가운 성질인 신장의 수기(水氣)가 위로 올라가 머리를 식혀주고,
반대로 뜨거운 성질인 심장의 화기(火氣)는
아래로 내려가 복부와 손발을 따뜻하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한의학에서도 두한족열이라고 하여
‘머리는 차게 발은 따뜻하게’하는 것이야말로 만병의 근원을 막는 것이라 했다.

다시말해 ‘머리는 차고 발은 따뜻하게’ 혹은
‘가슴은 서늘하고 아랫배는 따뜻하게’ 해 주었을 때
우리의 몸은 가장 이상적인 상태가 되며, 마음도 평안을 찾고,
특히 몸이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극대화되어
자연치유능력 또한 높아진다고 한다.

본래 모든 자연현상은 뜨거운 것이 위에 있고, 차가운 것이 아래에 있는데
그러한 자연현상에서 생명이 생성되게 되면
모든 생명들은 조화롭게 위아래의 순환을 이루어야만
온전한 생명활동을 건강하게 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즉 뜨거운 것이 위에 있고, 차가운 것이 아래에 있는 것은 자연상태이고,
이러한 자연상태에서 생명활동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위의 뜨거운 것이 아래로 내려가고, 아래의 차가운 것이 위로 올라가는
순환을 이루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식물도 뿌리와 줄기를 통해 물의 찬 기운을 위로 올리고,
광합성을 통해 태양의 따뜻한 빛을 뿌리로 내리는 순환을 이어가는 것이며,
뿐만아니라 태양열도 땅을 비춤으로써 지상의 물을 수증기로 올려
하늘로 보냈을 때 구름과 비가 되어 자연이 순환하며, 생태환경도
온전한 순환의 체계를 갖출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 몸 또한 위쪽의 심장의 뜨거운 성질을 아래로 내리고[화강]
신장의 차가운 성질을 위로 올려주었을 때[수승]
비로소 생명의 온전한 순환시스템이 완성될 수 있고, 기의 순환이 완전해지며,
건강하고 조화로우며 자연스러운 생명력이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18세기 네델란드의 명의 헤르만 블하페도 죽기 전에 밀봉하여 남긴
‘의학에서 오직 한 가지 심오한 방법’이라는 그의 글에서
“머리를 차게 하고 발을 덥게 하라.
그러면 당신은 모든 의사를 비웃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 한 마디만를 남겼다고 한다.

만약 이러한 수승화강, 두한족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몸의 전체적인 생명력이 흩어지고, 기의 순환이 깨지며,
몸도 마음도 총체적인 위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수승화강이 안 되면
피부는 건조해지고, 혈관이 확장되며,
눈동자가 불안하고 눈깜박임이 잦아지며 안구건조가 생기거나,
얼굴이 붉어져 안면홍조가 생기고, 기미 여드름도 생기고,
입이 마르고 머리가 아프며, 소화도 안 되고 속이 더부룩하며,
아토피나 설사, 변비 등도 나타난다.
또한 상기병이나 화병(울화병), 소화불량, 심한 만성 피로감으로 시달리고,
아랫배와 손발이 차고, 목이 뻣뻣해지며, 목과 코가 아프고,
면역력이 떨어져 감기에도 자주 걸리며,
나아가 고혈압, 당뇨, 불면증, 디스크와 각종 암, 중풍, 위장병,
정신불안, 집착증, 노이로제, 우울증까지 나타난다고 한다.
그야말로 몸의 균형이 총체적으로 깨지고
병에 대한 몸의 저항력과 자연치유력이 약해져 그야말로 종합병원이 되는 셈이다.

이뿐 아니라 머리가 뜨거워지면 탈모를 유발시키기도 한다고 하는데,
청견스님에게 찾아 왔던 여성 탈모환자가 절 수행을 통해
2개월만에 다시 새까만 머리카락이 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더라도
절 수행의 수승화강의 효과와 그로인한 치유의 예를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암 환자나, 치매, 중풍환자, 정신병자들 또한
뱃속이 차갑다고 하며, 병이 많아지는 노인들의 배도 차갑다고 한다.
이처럼 대부분의 환자는 수승화강이 제대로 되지 않아 배와 손발이 차다.
그러나 환자가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은 주로 머리를 많이 쓰고
반면에 몸을 적게 움직이기 때문에 수승화강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옛 사람들은 온돌방 생활을 주로 했기에 자연스런 족열이 가능했는데,
요즘은 서양식 난방법으로 난방기가 도입되면서
바닥은 차고 위의 공기만 더워져 두한족열을 거스르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수승화강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한 때 반신욕이 유행했었고, 마사지 같은 방법을 써 오기도 했으나
요즘 새롭게 수승화강의 효과가 강력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이 바로
절 수행인 것이다.

절 수행은 머리가 땅까지 반복해서 닿는 유일한 운동으로
요가 동작의 왕으로 불리우는 물구나무 서기의 동작에서와 같이
자연스럽게 수승화강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실제 SBS 스페셜 ‘0.2평의 기적, 절하는 사람들’에서는
108배 후 체열측정에서 얼굴과 가슴의 온도는 하강하는 반면
하반신의 온도가 상승되는 수승화강을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으며,
KBS 생노병사의 비밀 ‘108배의 수수께끼’에서도 걷기 운동군과 절 운동군의 비교에서
걷기 운동군은 똑같은 운동 후에도 체열의 변화가 없는데 반해,
절 운동군은 108배 후 안면의 온도가 평균 2도가 떨어지고
하체는 따뜻하며 상체의 열이 없어진 것이 뚜렷하게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그동안 수승화강이나 두한족열은
인간의 건강을 설명하는 핵심 원리로 알려져 왔으면서도
어떻게 수승화강이 되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는
뚜렷한 방법으로 내세울 만한 것들이 많지 않았는데
최근의 과학적인 증명이나 방송들을 통해서
불가에서 내려오던 절 수행이 수승화강에 특별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82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기본 법칙을 다른 관점에서 조금 더 확장해 보자. 이 법칙은 나아가 큰 것이 있으므로 작은 것이 있고, 옳은 것이 있으므로 틀린 것이 있고, 남자가 있으므로 여자가 있고, 깨끗한 것이 있으므로 더러운 것이 있고, 이 생각이 있으므로 저 생각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고, 중생이 있으므로 부처가 있고, 생사가 있으므로 열반이 있고, 이런 식으로 우리가 분별하고 있는 일체의 이원론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즉 크다 작다는 분별은 사실 고정적으로 크고 작은 것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큰 것이 있으므로 그것과 견주어 비교되는 작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이 키가 큰지 작은지는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연관관계 속에서 결정되어지는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무인도에서 홀로 자라났다면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사람이라는 분별도 없었을 것이며,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똑똑한지 어리석은지 라는 일체의 분별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체의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무언가 비교되고 견주어지는 다른 인연이 있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 여자라는 분별이 있기 위해서는 나 혼자서는 안 되고, 나라는 남자와 비교될 여자라는 타인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키가 작다는 것도 나보다 키가 큰 타인‘을 말미암아’ 작다는 분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양 극단의 분별은 나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연기되어진 타인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렇기에 사실 크다 작다거나, 남자다 여자다거나, 잘생겼다 못생겼다거나, 똑똑하다 어리석다거나 하는 두 가지 극단의 분별은 절대적이거나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 의지할 때에만 연기적으로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므로 공(空)하다고 한다.

또한 이런 양 극단의 분별은 끊임없이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 변하는 것이므로 무상(無常)이고, 그러므로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고정적인 자아적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키가 큰 사람도 농구 선수들 앞에 가면 작게 느껴지고, 키 작은 사람들 앞에서 있을 때 크게 느껴지는 것이듯이 인연따라 상황따라 변하는 것(무상)이며 그렇기에 ‘큰 사람’이라고 고정적으로 말 할 수 없다(무아)는 뜻이다.

이와 같이 양 극단의 분별로써 고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중도(中道)라고 한다. 즉 연기된 모든 것은 무상하고 무아이며 공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한 극단으로 판단해서는 안 되며 항상 중도적인 치우치지 않은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한 사람을 보고 크다거나, 잘났다거나, 옳다거나, 혹은 작다거나, 못났다거나, 그르다거나, 그 어떤 한 쪽으로 치우친 견해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도 인연따라 크거나 작을 뿐이고, 인연따라 선하거나 악할 뿐이며, 인연 따라 변해 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세상을 볼 때, 사람들을 볼 때 중도적인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뒤에서 다시 언급하게 될 팔정도의 정견(正見)이다. 연기적인 시선이 바로 정견이며, 중도이고, 공과 무아, 무상의 바라봄인 것이다.

이처럼 연기적인 시각에서는 일체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하며, 차별이 없어 높은 사람이라거나 낮은 사람이라거나, 능력 있고 없다거나, 나에게 도움이 되고 되지 않다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연기적인 시선에서, 또 깨달음을 얻으신 큰스님들의 시선에서 우리 모든 중생들은 똑같이 평등하고, 똑같이 사랑스러우며, 똑같은 존재감으로써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연기적인 치우침 없는 대 평등의 시선이 가능한 것이다.

옳고 그르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연기법의 세상에서는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절대적으로 틀렸다거나 할 것이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며, 연기적인 것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옳은 견해가 다른 나라에서는 그르게 나타날 수도 있고, 우리나라에서는 선이 다른 나라에서는 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여인이 한 남자만을 사랑하고 결혼하게 되어있고 그것이 옳은 이성관이지만, 예를 들어 무슬림은 한 남자가 네 명의 부인을 얻을 수 있고, 아프리카의 마사이족, 바쿠족, 간다족 등도 여러 아내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일부다처제와는 반대로 일처다부제인 곳으로는 티베트가 있는데, 티베트는 한 여성이 한 집안의 장남과 결혼하면 그 집안의 다른 형제들과도 결혼할 수 있고,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 또한 자가(Zaga)혼인이라고 하여 남편과의 이혼 없이도 다른 남자와의 결혼이 가능하다.

이처럼 시대와 나라가 다르면 그곳의 문화나 풍습도 다르고, 성적인 윤리의식도 다를 수 있다. 옳고 그르다는, 선과 악이라는 것이 고정적으로 정해져 있다면 어느 나라건 어느 시대건 상관없이 다 똑같아야 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점에서 불교의 연기적 세계관에서 보는 선악의 시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상호의존적이고, 상호규정적이며, 상황따라 달라질 수 있고, 시대나 나라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즉 선악은 연기적인 것이며 상의상관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진 것이 아니라 선이 있으므로 악이 있고 악이 있으므로 선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의존적이고 연속적으로 연결된 하나이다. 절대적인 선악의 차별이 있다면 거기에는 선에 대해 악을 배제하고, 강압하며, 미워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동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남게 되지만 연기된 것으로 볼 때 선악은 유연하고 자율적이며 서로가 서로를 포용하고 포섭할 수 있는 화합과 평화적인 윤리의 실천이 가능하게 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오랜 전쟁을 볼 때 그 두 나라가 보기에는 서로가 극단적인 적이며 악이기 때문에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에 젖어 있음을 본다. 유대인들이 볼 때는 팔레스타인이 적이고 악이며, 팔레스타인들이 볼 때는 유대인들이 악이다. 그러나 한 발 떨어져 바라본다면 유대인이 있으므로 팔레스타인이 있고, 팔레스타인이 있으므로 유대인이 있는 것이지, 그 어느 한 나라가 선이고 다른 나라는 악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어느 한 쪽에서 자신을 선이라고 생각하니까 상대방이 악이 되는 것이지 본래 선악이 정해 져 있지는 않은 것이다. 조금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인류 역사에서 이어져 왔던 종교전쟁들을 보더라도 내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나라는 절대선이고 타종교를 믿는 사람과 나라는 절대악인 것 처럼 규정하면서 전쟁을 일으키곤 했지만, 사실 그러한 두 종교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 현대에 와서는 그 두 종교가 모두 올바른 종교로써, 이 세상을 대표하는 종교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과연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르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모호해진다.

이것을 보더라도 본래부터 어느 종교가 선이고 다른 종교는 악이라고 정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상의상관적이며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난 것에 불과하다. 내 종교를 선이라고 규정하면서부터 타종교는 악이라는 규정이 생긴 것이니 상호규정적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 시공간의 제약 속에서, 혹은 어떤 특정한 상황과 믿음 속에서 연기되어 발생한 것이라면 선악은 구체적인 상황을 떠나서 고정되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선악은 연기된 것이고, 공(空)한 것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므로 무아(無我)인 것이다.

이처럼 선악이라는 분별이 연기된 것이기에 공하고 무상하며 무아라면 선악이라는 양 극단을 나누어 놓고 서로 어느 것이 옳은 것이냐 그른 것이냐를 따질 것도 없고,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선악의 양 극단으로 몰고 가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알게 된다. 이처럼 연기된 것이기에 양 극단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적인 실천에서 본다면 선악으로 나눌 것도 없고, 어느 한 쪽은 옳다거나 다른 쪽은 그르다거나 하고 극단적으로 규정지을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상황 따라 연기되어진 것이므로 사실은 고정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선이라고 혹은 악이라고 낙인찍어 놓고 선이 악을 없애기 위해 폭력을 저지르는 것 또한 발붙일 수 없게 된다. 연기와 중도적인 관점에서는 세상 모든 것이 상호의존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네가 없으면 내가 없고, 네가 존재함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전체적이며 동체로써의 자비로운 통찰이 진흙 속에 연꽃이 피어나듯 피어오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지구에서 벌어지는 부유함과 가난의 양 극단의 삶은 양쪽 모두에게 온갖 사회적인 문제를 가져다 주고 있다. 이 세상 어느 한 쪽에서는 기아와 가난과 굶주림과 전염병으로 허덕이며 하루에도 5살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3만 5천 명씩 죽어가는 마당에 또 다른 곳에서는 너무 많이 먹어 비만으로 고민하고, 넘쳐나는 음식물 쓰레기로 고민을 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남한에서는 한 해 음식물쓰레기가 14조원에 달하는데 그 정도면 북한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리고도 남는 양이라고 한다. 부자 나라는 부유해서 괴롭고, 가난한 나라는 가난해서 괴롭다. 선진국들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온갖 환경문제들 때문에 괴롭고, 후진국들은 최소한의 의식주조차 해결할 수 없어서 괴롭다. 양 극단은 언제나 고(苦)를 가져온다.

이러한 양 극단의 문제는 연기적인 자각과 중도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양 극단의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음으로써 극단을 지양하고 중도적인 삶을 실천할 수 있다면 양 극단의 고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부유한 나라는 스스로 만족과 청빈과 소욕을 바탕으로 한 동체대비의 자비사상으로써 가난한 나라에 나눔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남아도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비용만도 연간 15조원이상이 든다고 하고, 그 쓰레기로 인한 악취며 처리시 환경문제 등 온갖 부수적인 문제들도 만만치 않은 것을 생각했을 때, 스스로 조금씩 적게 가지고 적게 먹으며 쓰레기로 해치울 것들을 미리 가난한 나라들과 나누어 쓸 수 있다면 부유함의 괴로움도 가난함의 괴로움도 모두 함께 소멸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스스로의 자각과 깨달음 그리고 소욕과 나눔의 실천적인 정신에 달려 있다. 이러한 소욕과 나눔의 정신의 바탕이 바로 가난한 나라가 없으면 부자 나라도 없고, 굶주리는 아이를 살리지 않으면 나 또한 사라지고 만다는 연기적인 철저한 자각인 것이다. 연기 중도적인 시선에서는 그들과 우리는 서로 의존하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고, 그들이 살아나야만 우리도 함께 살 수 있는 것이다.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58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우주적이고 다차원적인 연기 - 상의상관성

이상에서와 같이 연기법에 의하면 어떠한 존재도 우연히 생겨나거나 또는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다.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다른 모든 존재와 여러 원인, 조건에 의해 생겨난다. 그렇기에 정신적, 물질적 모든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서로 서로에게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으로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법을 ‘관계성의 법칙’, ‘상의성의 법칙’ 혹은 ‘상의상관성’ 이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연기법에 대해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텐데, 부처님 당시에도 코티카라는 제자가 연기에 대해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고 하며 사리푸타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해 달라고 하자 다음과 같이 답변하는 장면이 『상응부경전』12:67에 나온다.

벗이여! 여기 두 묶음의 갈대단이 있다고 하자.
이 갈대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것이며, 저것이 있기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묶음의 갈대단 중 어느 하나를 치운다면 다른 갈대단도 쓰러지고 만다.
이처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는 것이며,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없는 것이다.

아주 단순한 비유지만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연기법을 아주 쉽게 비유해 주고 있다. 두 묶음의 갈대단이 서로 의지해 있을 때 그 중 하나를 치우면 나머지 갈대단도 쓰러지는 것과 같이 이것과 저것 사이의 관계는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도움을 주면서 상의상관적으로, 관계성으로 서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는 말은‘이것’이 원인이 되어서 그 결과로 ‘저것’이 있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도, ‘이것’이 사라지는 결과로서 ‘저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즉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 생성 및 소멸되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가 서로를 돕고 도움 받는 긴밀한 연기적, 상의상관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결국 ‘이것’과 ‘저것’은 따로 따로 떼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동체이며, 한생명이고, ‘이것’은 ‘저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고, ‘저것’은 ‘이것’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으므로 ‘이것’과 ‘저것’ 그 어느 것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닌, 인연따라 생겨난 무아(無我)인 것이다. 무아이면서 인연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無常)이고, 고정적인 실체가 아니기에 공(空)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A와 B 사이의 연기성은 곧 B와 C 사이의 연기에서도 발견되며, 다시 C와 D 사이에서도, 또한 C와 A, D와 A, D와 B 사이에서도 발견되고 이러한 관계는 E, F, G... 등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에게로까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퍼져간다.

이처럼 온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시간적 공간적으로 다른 모든 존재의 생성을 돕고 소멸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물론 어떤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좁게는 근본적인 원인과 직간접적인 다양한 원인들이 있을 것이지만 조금 더 연기의 시야를 넓혀 시공간으로 확장시켜 보면 이 우주 법계 전체가 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관여되어 있다. 즉 이 우주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내가 있으므로 이 우주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한 가지 원인이 한 가지 결과를 발생케 하는 것만이 아니라 전체적이고 우주적인 다차원적인 원인으로 인해 하나의 존재가 생기며, 하나의 상황이 생겨나는 것이다. 서양 과학은 단일한 원인이 단일한 결과를 일으킨다고 믿었지만, 동양적인 불교적인 사고방식은 이처럼 전체적이고 우주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다른 존재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다른 존재의 영향도 받고 있는 것, 나아가 인간이 우주에 영향을 끼치면서 동시에 우주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 이러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서로 의존하고, 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을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이라고 하는 것이다.



운명도 우연도 신의 뜻도 아니다

이러한 연기법에서 본다면, 어떤 한 존재가 생겼다거나, 어떤 한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은 단순한 존재의 발생이나 사건이 아니라, 온 우주적이고도 전체적인 무한한 인연관계 속의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인 인생관에 반해 보통 세상의 또 다른 견해로는 모든 것이 운명이나 숙명이라는 운명론이나, 모든 일이나 존재는 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으며 그저 우연일 뿐이라는 우연론이나, 일체 모든 것은 신이나 브라만이 만들었다는 유신론적인 사고방식이 공존하고 있다. 부처님 당시에도 가장 주목을 끌었던 인생관이 바로 운명론과 유신론, 그리고 우연론이었다. 『중아함경』제3권을 살펴보자.

세상에는 극복해야 할 세 가지 그릇된 견해가 있다. 지혜 있는 사람들이 파벌을 만들어 서로 주장을 달리 하지만 인생에 있어 아무런 소득이 없다. 어떤 것이 셋인가. 첫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숙명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이요, 둘째는 ‘사람의 모든 일은 일체가 다 신이 만든 것이다’는 주장이며, 셋째는 ‘모든 일은 아무런 인연도 없는 우연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만약 사람의 모든 일을 일체가 다 숙명에 의한다거나, 신이 만든다거나, 아무 인연도 없는 우연이라면,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분별하며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현실의 어떤 일이나 사건에 대해 인간이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고, 선악의 구별도 없게 된다. 저들의 주장에 맞서 나는 연기법(緣起法)을 깨닫고 중생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지혜로운 선택에 의해 자기를 만들어 가는 길이다.

이러한 세 가지 주장은 시대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종교며 사상, 철학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요한 인생관들이다. 그러나 숙명론이나 운명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 내 자신이 스스로 내 운명을 개척해 갈 수도 없고, 내 삶을 바꾸어 갈 수도 없으며, 무조건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숙명이라 생각하고 체념하고 포기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대한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이런 사람들이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내 운명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무슨 일만 생기면 사주팔자를 보러 점집에 가고, 무속인들을 찾아 가 운명을 점치는 일 밖에 없다. 그것 외에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것 한 가지도 내 스스로의 의지대로 해 나갈 수 없다. 오늘날도 툭 하면 연례행사처럼 점집을 찾아다니고 무당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바로 숙명론이나 운명론에 갇혀 스스로의 주체적인 삶을 포기하고 내 정신을 점쟁이에게 바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내 안의 오롯한 중심이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지 점이나 사주팔자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사람이 점쟁이가 되어서 많은 사람을 그릇되게 꾀어 재물을 구한다면, 이 죄로 말미암아 지옥 속에서 한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고, 지옥 생활이 끝난 다음에는 그 죄로 인해 악업의 몸을 얻고 태어나 계속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고 했고, 『숫타니파타』에서는 ‘온갖 점을 치는 일이나 해몽, 관상 보는 일을 완전히 버리고, 길흉화복의 판단을 버린 수행자는 세상에서 바르게 살아갈 것이다’라고 했다.

운명이나 숙명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은 어차피 잘 되도 숙명이고 못 되도 숙명이기 때문에 삶을 개척해 나가고 발전시키려는 의지가 없다. 이런 사람일수록 게으르고 나약한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기 쉬우며, 스스로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숙명 탓이나 남 탓, 나라 탓, 정치인 탓, 부모 탓만 하지 자기 스스로의 삶에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아무런 인연도 없고 원인이나 조건도 없이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는 사람 또한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어떻게 이 세상이 단순한 우연일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선도 악도 다 소용없고, 선하게 사는 사람과 악하게 사는 사람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말인가. 잘 살고 못 하는 것도 다 단순한 우연이란 말인가.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우연이라면 사람을 죽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음행을 하는 등의 삿된 행위들 또한 우연일 뿐 잘못된 행위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우연론을 믿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그 어떤 윤리적인 의식도 없을 것이고, 막행막식을 하면서도 아무런 인과응보가 없다고 생각할 것 아닌가. 또한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만다. 모든 것이 우연이니 의지를 일으킬 것도 없고, 세상을 선하고 살고자 애쓸 것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의 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면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 오직 신의 가호나 은총만을 바라게 될 것이 아닌가. 이 또한 도둑질이나 살생이나 음행 등의 악행을 하더라도 그 또한 신의 뜻이라고 믿을 것이 아닌가. 여기에도 인간의 자유의지는 없고 오직 신의 뜻만 있다고 믿는다면 이런 신관은 위험하다.

이러한 세 가지 잘못된 견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설하고 계신다. 이러한 세 가지 견해와는 달리 연기법에서는 인간의 자유의지의 가능성이 100% 보장되고, 자신 스스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으며, 행복에의 가능성, 깨달음에의 가능성을 스스로 성취시켜 나갈 수 있다. 또한 자신의 행위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인과응보의 윤리적 가르침으로도 손색이 없다.

또한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저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상의상관으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너와 나의 차별이 없고, 너를 의지하여 내가 있고, 너로 인해 내가 있으며, 너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으로 연결된다는 동체대비의 자비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러한 자비정신은 곧 보시와 나눔의 정신으로 이어져 모두 함께 풍요로운 세상의 밑거름이 된다.

이처럼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평등하며, 둘이 아니게 연결되어 있다. 또한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한다는 바탕에는 ‘나’라고 내세울 그 어떤 실체성을 부여하지 않으므로 ‘나’중심의 이기적이고 아집에 물든 삶에서 벗어나도록 이끈다.

이상에서 본 것 처럼 불교의 연기법은 우연론도 아니요, 신의 뜻도 아니며, 숙명론도 아니다. 연기법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 모든 존재며 사건들이 서로 서로 깊은 연관관계 속에서 꽃피어나는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다. 그 어떤 존재도 외따로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 어떤 존재도 진리에서 떨어진 채 홀로 소외를 느끼지 않는다. 진리는 결코 사람을 버리지 않고, 소외시키지 않는다. 누구나 이 한바탕 신명나는 잔치에서 자기답게 자신의 몫으로 아름답게 꽃피어나도록 되어 있다. 이 연기의 장에서 모두는 한 가족이며, 벗이고 정겨운 친구다.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5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세상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 연기법 강의(3)
2007/12/11 - [불교교리강좌]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연기법 강의(2)
2007/11/09 - [불교교리강좌] -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 연기법 강의(1)
세계는 한 송이 꽃 - 우주가 나를 돕는다

『지구를 치료하는 법』이라는 책에 보면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한 가지 예를 볼 수 있다. 책에 의하면 1950년대 보르네오 섬의 어떤 마을에 말라리아가 크게 유행했을 때 말라리아 모기를 없애기 위해 세계보건기구(WHO)에서 DDT를 뿌렸다고 한다. 모기는 모두 죽고 말라리아는 사라졌다. 그런데 그 후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우선 민가의 지붕이 너덜너덜 떨어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민가의 지붕에 살던 말벌이 DDT로 인해 모두 죽고 굼벵이를 먹이로 하던 말벌이 사라지자 굼벵이가 크게 번식하여 갈대로 이엉을 엮은 지붕을 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양철판 지붕으로 바꾸었지만 열대지방의 맹렬한 소나기인 스콜이 양철지붕을 때리는 소리에 주민들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DDT로 인해 수많은 벌레가 죽고 죽은 벌레를 먹은 엄청난 양의 뱀 또한 죽었다.

그 뱀을 고양이가 먹었는데 먹이사슬이 올라갈 때마다 DDT 농도가 농축되어 고농도 DDT를 섭취한 고양이들도 잇따라 죽어갔다. 고양이가 사라지자 쥐들이 극성을 부렸고, 쥐가 증가하자 다른 전염병들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곤경에 빠진 WHO에서는 그 해결책으로 14,000마리의 고양이를 낙하산에 매달아 하늘에서 뿌렸다는 다소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이치에 따라 자연스럽게 먹이사슬 전체에 혼란이 일어났는데 그 근본원인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 보다는 당장에 쥐를 없애기 위해 고양이를 뿌렸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단편적인 견해이며, 일차원적인 접근이고,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일어나고 소멸된다는 연기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결과인가.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 의존적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일어나면 그로인한 다양한 ‘저것’들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어 있고, 또 그 ‘저것’들은 또 다른 제2, 제3의 ‘저것’들을 무수히 만들어 낸다. 연기를 모르면 그 근본 원인이 ‘이것’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제3, 제4의 ‘저것’들에서만 문제를 밝혀내고자 애쓰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지구나 우리 생활 속의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다른 일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의 작은 한 가지 구성원이 사라지면 곧 그것과 연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수많은 존재들이 사라지거나 직간접적으로 위험에 놓이게 되며, 결국 그것은 사람의 목숨까지 위협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세계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에게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존, 공생의 상호의존 관계에 있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자연과 자연, 개인과 전체가 서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조건이 되기도 하면서 상호의존적인 관계로써 공생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자연의 한 개체가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 언젠가는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연의 한 부분을 오염시킨다는 것은 결국 인간 자신의 몸을 오염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이 세상의 그 어떤 현상일지라도 A의 결과는 B라고 하는 단편적이고 직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접근하면 그 현상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어렵다. 모든 존재며 현상들은 어느 것 하나 전체적이며 우주적이고 연기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이 중층적이고 무량하게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그 한 가지 일에는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관여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데에도 온 우주가 동참하고 있다. 한 겨울의 얼어붙은 땅을 뚫고 피어나는 봄 꽃 한 송이에도, 한여름 우거진 녹음이며 쏟아지는 장대비에도, 가을철 아름다운 단풍과 이어지는 첫 눈의 설레임에도 크고 작은 온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연기적인 대 화합의 오케스트라를 장엄하게 연주해 줌으로써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밀물과 썰물이 오고 가면서 내 발을 씻어주는 생생한 현실 속에도 달의 인력이며 수 억 광년 떨어진 별의 인력이 작용하고 있다.

꽃 한 송이는 그저 단순한 꽃 한 송이가 아니라, 연기적으로 온 우주가 함께 피워낸 꽃이요, 온 우주의 숨결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도 단순히 내가 아니라 온 우주의 반영이며, 우주적인 진리가 나로써 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낱낱이 온 우주로 퍼져나가고 있고, 온 우주와 끊임없이 에너지를 주고 받으며 공존 공생하고 있다. 온 우주가 더불어 나를 살려주고 있고, 나를 돕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너’를 돕고 있다. 이처럼 온 우주가 한 송이 연꽃이요 평화로운 한 가족이다.



세계일화(世界一花)라는 만공스님의 일갈도 이 같은 연기적인 자각 속에서 나온 깨침의 언어인 것이다.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다.

중생심에서 보면 나와 너, 남편과 아내, 이웃과 이웃, 나라와 나라, 내 종교와 네 종교, 인간과 자연 등 수많은 분별이 작용하여 ‘나’, ‘내 것’ 이라는 이기와 아집을 형성하지만, 연기적으로 보면 너가, 이웃이, 타인이, 다른 나라가, 다른 종교가, 자연이, ‘나 아닌 것들’이 모두 ‘나’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나’‘내 것’‘내 종교’‘내 나라’ 때문에 온갖 시비와 분별, 욕심과 전쟁 등을 초래하지만 연기적 시각에서는 그 모든 것이 동체적인 모습으로 한 뿌리, 한 몸, 한 가족일 뿐이다. 거기에서 온 우주와 나를 다르게 보지 않는 동체대비의 자비가 싹튼다. 이기는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움튼다.

이러한 연기법의 상호의존관계에서 볼 때, 그 모든 것들은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있어 필수적인 조건이 되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그 말을 잘 살펴보면 이 속에는 그 어떤 존재도 실체적인 자아가 있지 않다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인간도 인간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자연도 자연만 따로 떨어져 홀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인간과 자연은 공존, 공생의 관계이며, 그 둘은 모두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비실체적인 것이다. 즉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는 무아(無我)인 것이며, 공(空)인 것이다.

그렇듯 일체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는 뗄 수 없는 연기적 동체(同體)의 존재요, 서로가 독자적으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비실체적 공생의 존재이며, 그렇기에 모든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자기 몸처럼 아껴주고 도와주며 존중해주는 자비를 실천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따라서 연기적인 삶의 기본 원칙은 서로 의존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상의상관의 연기법과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실체적 자아를 내세워 이기심을 축적할 수 없다는 공과 무아와 아집의 소멸, 그리고 이러한 자각을 바탕으로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원인이 되고 조건이 되는 필수불가결한 한생명이므로 서로가 서로에게 한 가족과 같은 따뜻한 사랑과 자비로써 대해야 한다는 자비사상이 되는 것이다.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37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셋째,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에서 살펴보았듯이 존재의 생성에 모든 존재들의 상호의존과 관계성이 담겨 있듯이 존재의 소멸에도 마찬가지로 모든 존재들의 상호연관의 연기법은 적용된다.

앞에서 자동차를 예로 들었는데, 만약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도 엔진이 고장 나 버렸다면 그 자동차는 더 이상 굴러갈 수 없을 것이다. 타이어가 펑크가 나도 마찬가지고, 타이어휠이 고장 나도 마찬가지며, 미션이나 기어가 고장 나도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써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하다못해 기름이 없어도 자동차는 무용지물이 되 버리며, 그 자동차를 운전할 사람이 없어도 자동차는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이처럼 자동차를 구성하고 있는 어느 한 요소만 없어지거나 고장이 난다고 하더라도 자동차는 더 이상 자동차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린다. 그렇기에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소멸에 대한 연기법의 공간적인 표현을 볼 때 엔진이 없으면 자동차도 없고, 타이어가 없으면 자동차도 없고, 기름이 없으면 자동차가 없고, 운전자가 없으면 자동차도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소멸은 저홀로 독자적인 소멸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함께 하고 있던 수많은 연기되어진 원인과 조건들이 소멸 될 때 ‘~로 말미암아’소멸되는 것이다.

상황의 소멸도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거처하고 있는 절은 규모가 작고 강원도의 산골에 위치 해 있다 보니 처음에는 법회나 기도가 있는 날인데도 신도님들이 한 분도 오시지 않아 법회를 열지 못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낙심 아닌 낙심이 되었지만, 이것도 다 인연이구나 하고 마음을 돌리니 오히려 그 시간에 미루었던 다른 일들을 할 수 있었다.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인연이 화합하여 모였을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한 쪽에서 응해 주지 않으면 그 법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소멸의 법칙에서 보듯이 신도가 없으면 법회도 없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일들은 인연화합을 통해 만들어지고 인연화합이 되지 않으면 소멸되는 것이니 이러한 연기의 법칙을 거스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인연을 거스르게 되면 거기에는 고통이 따른다. 신도가 없으면 법회가 없다는 연기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투덜투덜 거리면서 마음에 고통이 뒤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신도가 없어 법회가 없었지만 또 다른 새로운 포교의 방법을 모색하거나 그 시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였다면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라는 소멸의 법칙을 받아들여 새롭게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는 생성의 법칙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연기의 법칙은 온 우주를 운행하는 근원이 되는 이치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거스르는 순간 괴로움이 시작되지만 받아들이는 순간 평화가 깃들게 되고 또 다른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래서 연기법에서 보았을 때 모든 생성은 곧 소멸을 의미하고, 소멸은 또 다른 새로운 생성을 의미한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닌 한바탕에서 이루어지는 연극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니 생성을 즐거워하며 집착하고 소멸을 괴로워하며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생성과 소멸에 대한 이치를 받아들이면 생과 사도 자유롭고, 성공과 실패에도 그렇게 연연해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있고 없음, 소유와 무소유, 부와 가난 등의 분별 속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의 원칙과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존재의 소멸에 대한 원칙은 모두 공간적인 연기의 해석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은 지금 여기에서 더불어 존재하는 것들이며, 서로 서로 의존관계를 이루었을 때만 존재의 의미를 얻을 수 있으며, 어느 한 가지 원인이나 조건이 소멸되면 다른 의존관계를 이루었던 모든 것들도 도미노처럼 차례로 소멸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원칙은 나아가 이 우주적인 한 공간에서 이 우주, 이 세계, 이 나라를 이루고 있는 일체 모든 존재들은 서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들로써, 서로가 서로의 생성과 소멸에 영향을 주고 받으며, 상의상관하고, 상호의존하는 결코 따로 따로 떼어낼 수 없는 한생명이며 한몸, 한마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불교적 자비사상이 움트는 것이다. 온 우주가 둘이 아닌 한 몸으로 동체이며, 그렇기에 네가 있기에 내가 있고, 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며, 네가 사라질 때 나도 사라지고, 네가 괴로울 때 나 또한 괴로울 수 밖에 없는 생명공동체로써 하나인 것이다. 나라는 실체가 있어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곧 우주이며, 내가 곧 일체 모든 존재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들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더불어 살아가는 이 우주의 모든 생명을 내 몸처럼 아끼지 않을 것인가. 내 행복이 곧 일체 모든 존재의 행복에 전적으로 달려있다면 나를 돌보는 것 처럼 남을 돌보고, 나를 돌보는 것 처럼 자연을 돌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연기를 바탕으로 하는 자비인 것이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넷째,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소멸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소멸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의 소멸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사라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소멸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하고, 조상들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 것 처럼 나의 탄생은 앞으로 있을 미래의 수많은 내 자손의 탄생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가 사라지면 앞으로 있을 자손들 또한 사라지고 만다. 이와 같이 어떤 한 존재의 소멸은 또 다른 존재의 소멸로 이어진다. 여왕벌이나 여왕개미의 소멸은 곧 엄청난 자손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동안의 온갖 산업화며 도시화, 기계화, 인구의 도시집중 등을 비롯한 개발과 발전이 자연을 파괴와 그로인한 환경의 오염을 가져왔고, 그러한 환경오염은 이제 전 세계적으로 퍼져 전체 생태계의 파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환경오염으로 인해 예전에는 많았던 수많은 동식물들이 사라지고 있다. 생물종이 아예 사라진 것들도 많다. 생태계에서 어느 한 단계의 생물종이 사라지게 되면 연이어 먹이사슬로 이어지는 다른 종도 함께 사라지고, 또 다시 그 종은 또 다른 종의 소멸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야말로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이치가 환경생태에서는 극명하게 드러난다.

과학자들은 앞으로 50년 이내에 지구상 생물종의 1/4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고 있으며, 현재 매일 적어도 140종 이상의 동식물이 사라지고 있고, 1년에 최소한 5만종의 생물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한다. 그 원인은 주로 숲과 열대우림 등의 서식처의 파괴에 있다고 하는데, 현재 전 세계적으로 1분에 29ha, 즉 축구 경기장 40개에 달하는 면적의 열대우림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생물종이 멸종되어 가고 지구온난화 또한 가속화된다고 한다. 이런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물종이 소멸되고 지구온난화가 계속되게 되면 머지않아 우리 인간들 또한 멸종되게 될지 모른다.

실제로 세계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환경오염으로 인해 남성의 정자수가 급감하고 불임이 늘어 인간의 자체능력만으로 임신을 계속할 수 없어 이런 상태로 2017년까지 가면 결국 인간도 멸종에 이르게 될 것임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에 입각해 보더라도 자연이 사라지면 생물종이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 곧 인간도 사라진다는 결론이 도출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자연이 있기 때문에 인간이 있다”는 말은 자연과 인간이 동시에 서로를 존재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자연이 사라지기 때문에 인간이 사라진다”는 말도 자연이 사라짐과 동시에 인간 또한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자연의 모든 존재 하나 하나는 곧 우리 인간 한 사람 한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인연관계에 놓여 있다. 연기법에서 보면, 자연의 작은 한 개체가 소멸되거나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곧 머지않아 인간 또한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기적인 상의상관성의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현재 지구상에서 끊임없이 증명되고 있다. 세계적으로 기상이변이 심각하게 전개되고 있으며, 한국만 해도 장마 대신 우기 개념을 도입한다고 할 정도로 아열대 기후에 접근하고 있다. 엘리뇨, 라니냐, 지진해일 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생명과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이것을 지켜냈을 때 저것도 지켜진다’라고 볼 수 있다. 나무와 숲과 열대우림이 사라지면 생물종도 사라지고, 생물종이 사라지면서 인간의 종까지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면 거꾸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무와 숲을 보호하고, 열대우림을 지켜내며, 나부터 나무를 심고, 환경을 보호하며, 개발지상주의적인 모든 발전사업들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친환경적인 발전이라는 말 자체가 문제가 있는 개념이다. 될 수 있다면 발전과 개발을 늦추거나 최소한도로 줄이면서 자연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가고, 최소한의 자연 파괴와 최대한의 자연 살림을 실천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부유함과 욕망의 충족과 돈 있는 노후를 꿈꾸고자 하는 거대한 욕망의 흐름을 끊고 거슬러 만족하고, 청빈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조화로운 삶을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모든 교육, 제도, 정책 등을 바꾸어 나가야 한다. 지금 이대로 가다가는 결국 이것이 사라짐으로 저것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사라질 수 밖에 없다.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33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첫째,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공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자동차 한 대를 놓고 보면 차는 차로써의 이름이 있고, 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그것은 차의 낱낱의 모든 부품들이 인연 따라 잘 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만약에 인연 따라 잘 조합되어 있지 못하고 바퀴 따로, 운전대 따로, 엔진 따로, 모든 것이 따로 따로 다른 공간에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을 보고 ‘자동차’라고 이름붙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한 공간에 그것도 반드시 있어야 할 바로 그 자리에 낱낱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를 의지하고 연하여 잘 모여 있을 때에만 자동차로써의 존재 가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동차는 각각의 부품들이 서로 서로 의지하여 너트는 볼트에 의지하고, 볼트는 너트로 말미암아 함께 붙어 있게 되고 그런 수많은 상의상관적인 의존관계 속에서만 자동차는 이 한 공간에 조화롭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공간적인 연기의 표현으로 본다면,‘볼트가 있으므로 너트가 있고’‘너트가 있으므로 볼트가 있으며’, ‘타이어가 있으므로 타이어휠이 있고’‘타이어휠이 있으므로 타이어가 있고’, ‘엔진이 있으므로 미션이 있고’‘미션이 있으므로 기어가 있고’,

이와 같은 자동차를 이루는 모든 부품들이 서로 서로 ‘~말미암아 일어나는’연기의 모습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동차의 모든 부품 하나 하나는 서로 떼어내려고 해도 떼어낼 수 없는 관계이고, 서로가 서로를 의지함으로써만이 한 공간에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동차는 자동차라는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부품 하나하나가 연기로써 모여 인연화합을 이루어야지만 자동차로써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형성이 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연기에 의해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바른 관계성을 유지해야지만 존재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 뿐 아니라 존재가 이루어내는 상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을 흉 보고 뒷담화를 하게 될 때 A라는 사람은 전혀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A라는 사람이 없는 줄 알고 화장실에 가서 험담을 했는데 알고 보니 화장실 안에서 우연히 엿듣게 되었다면 A라는 사람은 몹시 기분이 상할 것이다. 똑같이 A라는 사람에게 욕을 했지만 그 공간이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껄끄러운 인연관계가 될 수도 있고, 원수 같은 앙숙이 될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공간이었느냐에 따라서 그 험담이 아무런 영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수도 있다. 또 같은 험담이더라도 친한 친구끼리의 허물없는 자리에서 하는 것과 맞선을 보는 자리나, 사업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과는 크게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이처럼 모든 상황도 공간적으로 어떤 조건과 원인을 만나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교통사고가 나는 상황을 보더라도, 졸음운전으로 중앙선 침범을 했을 때 마침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없었다면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겠지만, 만약 그 순간에 그 공간에 상대 차선에서 달려오는 차가 있었다면 큰 사고가 나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을 연기의 공간적 이해로 본다면 ‘졸음운전이 있으므로 중앙선 침범이 있고’‘중앙선 침범이 있으므로 사고가 있고’‘사고가 있으므로 죽음이 있다’그러나 상대 차선에서 오는 차가 없었다면 이 연기는 이런 비극까지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저홀로 독자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공간을 함께 하고 있는 수많은 원인과 조건들의 상호작용에 의해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은 같은 공간을 살아가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의 존재방식이 상호의존적이며 상의상관적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은 숨을 쉬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만약에 공기가 없다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기가 있으므로 내가 있다. 공기는 숲과 나무가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숲과 나무가 없다면 머지않아 생명은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나무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숲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공간적인 연기법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 뿐인가. 태양이 없어도 살 수 없으며, 물이 없어도, 흙이 없어도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 태양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물과 흙이 있으므로 내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쌀이 있으므로 내가 있고, 농부가 있으므로 내가 있고, 논과 밭이, 과일과 채소가, 시내와 강이, 호수와 구름이, 정치인과 경제인이, 도매상인과 소매상인이, 옷과 집이, 옷 만드는 사람과 집 짓는 사람이, 나아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것들이 있으므로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우주의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존재가 있기에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서로가 서로를 키워내며,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는 상호의존적인 연기의 법칙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이 긴밀한 상호의존과 상의상관 속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인간들은 인간과 자연을 마치 서로 다른 존재인 것 처럼,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처럼 자연에 대한 대대적인 훼손과 파괴를 자행해 왔다. 자연의 파괴와 훼손 위에 기초한 개발과 발전, 산업화와 도시화가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인간이 자연을 파괴한 만큼 자연은 고스란히 인과응보를 인간에게 되돌려 주고 있음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오늘날의 전세계적인 환경오염 아니 환경재앙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그것이 모두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자연이 있으므로 인간이 있다’는 연기의 법칙을 모르는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유럽이며 선진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연환경은 그대로 두고 후진국의 자연을 파괴시켜 온 그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행복을 세우려고 했지만, 결국 환경재앙은 후진국만이 아닌 전세계적인 대재앙이 되고 있다. 자신들의 숲은 살려두고 저 브라질이나 아프리카의 밀림을 대규모로 파괴하고 있지만 결국 지구 전체의 살림부족으로 나타나 지구온난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는 연기법의 세계에서 본다면 전 세계는 모두가 한생명이며 공동운명이기 때문에, 아프리가의 밀림이 있어야 우리의 숲이 있고, 숲과 자연이 있어야 우리가 마실 공기가 있고, 맑은 환경이 있어야 우리의 생명의 터전이 지켜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서로 다른 남남이 아니고, 적이 아니며, 서로가 서로를 키워주고 도움을 주고 받는 상호의존, 상의상관이기 때문이다.

이제 중국의 숲이 사라자고 사막이 늘어나는 일이 결코 중국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곧 황사로써 한국과 일본 그리고 많은 나라에 직접적인 피해를 가져오고 있다. 중국의 숲이 있어야 한국의 맑은 자연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이 밥을 먹을 수 있어야 내가 굶지 않을 수 있고, 중동에 평화가 있어야 우리나라에도, 내 안에도 평화가 깃들 수 있으며, 브라질의 아마존이 있어야 나에게 맑은 공기가 있고, 전 세계적인 자연환경의 보호가 있어야 우리의 아름다운 미래가 있을 수 있다.

연기법에서는 온 우주가 이와 같이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 놓여 있으며, 나비효과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우주의 어느 한 구석진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 그대로 다른 모든 이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둘째,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존재와 상황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표현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어떤 한 가지도 우연히 만들어지거나 홀로 독자적으로 생겨나는 법은 없으며 시간적인 연관관계에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공간적인 자동차의 연관관계를 살펴보았는데, 시간적인 의존성과 관계성을 살펴본다면 자동차의 역사를 거슬러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앞에 자동차가 있고, 그 자동차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공간적인 부속들의 인연화합의 결합에 따라 자동차로써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 그 자동차가 이렇게 만들어지기까지는 단순한 공간적인 결합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동차 기술의 발전을 토대로 하여 지금의 자동차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누군가가 둥근 바퀴를 만들었을 것이고, 연이어 수레가 만들어 졌을 것이며, 처음에는 소나 말 등의 가축이 끌기도 했을 것이고, 이윽고 증기 자동차를 거쳐 가솔린 자동차 등의 단계별로 발전을 이루어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적인 연관관계를 볼 때, 지금의 자동차는 어느 날 갑자기 저홀로 생겨난 것이 아니며, 오랜 역사를 두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탈 것으로 발전해 결국 오늘날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연기의 법칙에 따라 둥근 바퀴가 생함으로 수레가 생했고, 수레가 생함으로 우마차가 생했고, 우마차가 생함으로 증기 자동차가, 증기자동차가 생함으로 가솔린 자동차가, 가솔린 자동차가 생함으로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가 생겨난 것이다. 이처럼 모든 존재가 발생하는데는 오랜 세월 그것이 발생하기까지의 수많은 다양한 노력과 조건과 원인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듯이 모든 존재는 그 존재를 성립시키는 시간적인 여러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도 마찬가지다. 시간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나는 나 홀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어머님과 아버님이 있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부모님도 마찬가지로 당신들의 아버님과 어머님이 계셨기에 존재할 수 있었고, 또 그 부모님의 부모님, 그 부모님의 부모님까지 계속해서 거슬러 가다 보면 수없이 많은 조상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나로부터 20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09만 명, 30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약 21억이 넘는 조상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니, 엄밀히 말하면 이 수많은 조상님들 가운데 단 한 사람만 빠진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나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사람도 그 사람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느 때인가 저 위의 조상님들 대에서는 부부였을 수도 있고, 형제나 부자지간이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한 뿌리요, 한 가족, 한 생명이 아닌가. 이렇게 보았을 때 역사의 모든 인물들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씨줄 날줄로 서로 서로 얽혀 있을 것이고, 그 모든 이들의 삶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도,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지금의 나란 존재는 시간을 거슬러 일체 모든 과거의 조상들과 서로 연관되어 있다. 부모님이 생함으로 내가 생했고, 할아버님이 생함으로 부모님이 생했고, 증조 고조 할아버지가 생함으로 할아버님이 생했으며, 나아가 수많은 조상님들이 생함으로 지금의 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현대 자연과학의 진화론에서 보면 수많은 포유류가 있지만 그들의 두개골을 이루는 뼈의 수나 기능과 구조 등이 모두 같으며, 목뼈를 놓고 보더라도 그 개수가 기린과 같이 목이 긴 동물이나 사람을 비롯한 목이 짧은 동물이나 모두 같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고래의 앞지느러미나 포유류의 앞발, 그리고 새의 날개 등도 지금은 서로 다른 기능과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그 기본형은 같다고 한다. 이것은 이 모든 생명체들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적응하며 살다보니 자신의 신체 구조와 기능이 바뀌었을 뿐이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모두 같은 조상에서 유래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상의상관적인 시간적 연관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모든 존재들과 인간 사이에도 시간적인 연기의 관계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존재의 발생에 대한 시간적인 연기법의 측면에서 볼 때, ‘조상이 생함으로 내가 생한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조상 안에는 온갖 동물들의 조상도 포함되며, 나아가 인간과 동물들의 조상이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조상이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나라는 존재는 독자적으로 홀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시간적으로 수많은 생명들의 긴밀한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환경문제라는 것도 과거의 수많은 개발과 발전으로 인한 자연의 파괴가 결국 오늘날의 환경재앙과 기상이변 등으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산업혁명으로 인해 촉발된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각종의 개발과 발전이 생겨남으로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기고, 자연환경의 파괴가 생김으로 기상이변이며 지구온난화 등의 환경재앙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며 상황은 시간적으로 수많은 다른 존재와 상황들과의 상호작용과 연관관계 속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13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기를 보면 진리를 본다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기법이다. 부처님이 해탈, 열반을 성취하셨다고 했을 때 그것은 곧 진리를 깨달았다는 말이고 바로 그 진리가 연기법인 것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있고, 불교 경전이 있으며,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로, 또 인도에서 중국, 한국, 일본, 그리고 현재 전 세계로 불교가 전파되면서 수많은 논서와 강론 등을 낳아왔지만 그 모든 이치를 한 마디로 하자면 연기법이라고 정리 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중아함경』상적유경에서는 ‘연기를 보면 곧 진리를 본 것이요, 진리를 보면 곧 연기를 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연기를 보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를 보는 것이다.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무상, 고, 공, 무아, 자비, 일체법, 12연기, 업과 윤회 등의 근본불교 교리에서부터 부파, 대승불교 교리에 이르기까지 연기법을 벗어나는 교리나 사상은 없다. 모두가 연기법의 각론이며, 연기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방편들에 불과하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연기법을 깨닫게 되면 온 우주의 모든 이치를 확연히 깨닫게 되어 더 이상 그 어떤 의혹도 남아있지 않고 환히 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다나』에서는 ‘성자가 참으로 진중하게 사유하여 일체의 존재가 밝혀졌을 때, 모든 의혹은 씻은 듯 사라졌다. 그것은 연기의 진리를 알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계와 우주에 대한, 또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그리고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이치에 대한 그 모든 의심과 의혹들은 비로소 연기법의 진리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이 확연해진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부처님께서도 연기법이라는 진리를 깨달으신 것이지 부처님께서 별도로 연기법을 만든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연기법은 부처님이 오기 전에도 있었고 설령 오지 않으셨더라도 언제나 이 우주의 법칙이요 진리로써 항상 하고 있는 진리란 의미다.

『잡아함경』12권에서는 ‘연기법은 내가 만든 것도 아니며,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연기법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지 안 하든지 항상 존재한다. 여래는 이 법을 깨달아 해탈을 성취해서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설하며 깨우칠 뿐이다.’라고 하셨다. 이처럼 연기법은 부처님께서 만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교설이 아니라 이 우주를 운행하는 법칙으로써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단지 부처님은 이러한 우주적인 진리를 바로 보고 깨달아, 중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연기법’이라고 편의상 이름 붙여 주신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연기법은 다만 방편으로 설해진 말에 불과한 것이지 연기법이라는 언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아 아셨고, 연기법을 실천하는 분이며, 이러한 연기법을 중생을 위해 수많은 교리로써 분별하여 설하고 깨우쳐 주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연기법이란 무엇인가. 연기법이 무엇이기에 부처님께서 이토록 역설하셨으며, 그 가르침이 2,500여 년을 이어왔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 세계의 모든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종교요 가르침이 되고 있는가. 물론 연기법을 간단하게 ‘이것이다’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수많은 교리 해설서를 보더라도 경전의 말씀을 풀어 놓으면서 주석을 달고는 있지만 그것을 읽는다고 연기법을 확연하게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연기법적인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그러한 가르침을 읽고 나더라도 연기법에 대한 어떤 확연한 답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나 또한 대학 다닐 때 처음 접해 보았던 불교교리서나 경전해설서를 보면서 연기법이 진리라는 것은 알겠는데, 도대체 왜 이 연기법이 불교를 대표하는 교리이며, 이것이 진리의 핵심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좋은 말씀이기는 한데, 불교를 대표할 정도로, 이 세계와 우주를 운행하는 근본 원리요 법칙으로써의 깊은 뜻을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것은 풀리지 않는 숙제처럼 내 안에 화두로써 자리잡고 있었고, 아마도 그 의심이 지금까지 이렇게 불교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준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아마도 이 생각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이 아닐까 싶다. 아마도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고민을 하던 제자들이 많았던가 보다. 『증일아함경』권46에 보면 아난 존자가 연기와 십이연기에 대한 법문을 듣고는 부처님께 여쭙는다. ‘제가 보기에는 연기법이 그리 깊은 뜻이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라고 한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아난아,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십이연기는 매우 깊고 깊은 것이니 보통 사람이 능히 깨칠 수 있는 법이 아니다.’라고 답변하고 계신다. 이처럼 연기법은 언뜻 보기에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법처럼 보인다.

여기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의 공통된 어려움이 있다. 연기법을 과연 어떻게 설명해야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명하고도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으며, 그 깊이와 통찰력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야말로 역사 이래로 수많은 스님들께서, 또 수많은 수행자며 학자들이 고민해 온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사실 불교를 잘 모르는 수많은 이들이, 혹은 불교를 믿고 신행하는 초심 불자들이라도 ‘불교는 이것이다’라고 분명하게 설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불교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교리들도 다양하며, 경전도 수없이 많아서 어떤 것이 불교를 단적으로 선명하게 드러내 주는 것인지 막연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불자들은 ‘불교가 어떤 종교인가?’하는 질문을 받고 주저하게 된다. 도대체 어떤 교리를 어떻게 설명해 주어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뿐 아니라 스스로도 막연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못하다.



연기의 의미

그러면 이제부터 연기법이 과연 어떤 법인가를 차근 차근 공부 해 보자. 연기법에서 보는 관점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아무렇게나 제 멋대로 존재하는 것 같은 것들도 모두 다 일정한 법칙 속에 존재한다. 이 세상을 보면 불확실한 일들이 많고, 불확정적인 것들이 많으며, 복잡다단하고, 언뜻 보기에는 정신없어 보일 정도다. 이런 복잡한 세상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불합리한 것 같고, 불평등한 것 같으며, 진리는 없는 것 같은 자괴감을 느낄 법한 일들도 벌어지곤 한다. 어떤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일하지 않고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아가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못 사는 나라에 가난한 이로 태어나 기아와 전쟁으로 아귀다툼을 벌이다 죽어가는 이들도 있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 살더라도 어떤 이는 교묘한 술수와 이기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는 사람이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에 진리는 없는 것인가. 진리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평등이 벌어지고, 불합리한 일들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또 다른 이치가 숨어 있다. 이 모든 존재며 상황들을 가능케 하는 우주적인 법칙이 숨어 있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먼저 ‘연기’란 말의 의미를 정리해 보자. 연기의 어원은 팔리어에서 온 것인데 이는‘Paticca Samuppada’라고 하여 ‘Paticca’는 ‘~때문에’, ‘~로 말미암아’라는 뜻이고, ‘Samuppada’는 ‘일어나다’는 의미이다. 즉 연기는 ‘~로 말미암아 일어나다’, ‘~때문에 생겨나다’는 의미이다.

연기의 산스크리트어 또한 ‘pratitya samutpada’로써 ‘pratitya’는 ‘~때문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ada’는 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마찬가지로 ‘~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자적으로 저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 말미암아 생기고, 무언가에 의해서 의존해서 생기는 것이란 뜻이다. 이는 그 어떤 원인이나 조건을 말미암아 생겨나는 것이란 의미다.

『잡아함경』13권 335에서 이 연기법의 전형으로 평가되는 경구를 볼 수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한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며 상황은 과연 어떻게 생겨나는가 하는 생성과 발생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일체 모든 존재와 상황은 어떻게 소멸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는 것은 연기의 공간적인 표현이며, ‘이것이 생함으로 저것이 생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것은 연기법의 시간적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TRACKBACK :: http://moktaksori.net/trackback/3 관련글 쓰기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Favicon of http://www.burberrywatchshop.com/BURBERRY-SPORT-CHRONOGRAPH-WATCH-p-74.html BlogIcon burberry sport  수정/삭제  댓글쓰기

    네트워크 정보의 좋은 소스셔서 감사합니다 ,내가이 기사를 읽고 오랫동안 귀하의 사이트를 추적 유지되었습니다, 내가 더 관심을 지불할 것입니다 흥미로운 읽을 수 있습니다,기사가 가장 고전적인 스타일 중 하나가, 내가 한 번 읽으면, 내가 그들과 사랑에 깊이되었습니다이며, 좀 더 완벽한 작품을 기대

    2012/01/06 15:18

BLOG main image
목탁소리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by 법상
누구나행복해질수있다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671)
삶과 명상 이야기 (238)
희말라야 명상순례 (27)
인도와 라닥기행 (2)
스님따라 만행길 (25)
산방한담 (127)
자연에 깃들어 살라 (23)
목탁소리 출간서적 (13)
강의듣기/ 녹취록 (8)
이것이 궁금하다 (68)
불교교리강좌 (14)
부처님말씀 산책 (60)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12)
금강경과 마음공부 (28)
법구경과 마음공부 (18)

달력

«   2012/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http://file.tattermedia.com/media/image/plugin/tnm_badge_white.gif
Statistics Graph
  • 113,351
  • 14106

목탁소리

법상'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atter & Media
Copyright by 법상 [ http://www.ringblog.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Tatter & Media DesignMyself!
법상's Blog is powered by Textcube. Designed by Qwer999. Supported by Tatter &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