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요. 시기 질투 욕심이 줄지 않습니다. 겉으론 표현 못하면서 속으론 무지 힘들어 합니다. 저 좀 도와주세요. 바뀌고 싶어요. 시기질투 안하고 싶어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 아픈 것, 그 배 아픈 마음 그 마음이 나라고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합니다. 누구나 사촌이 땅을 사고, 남이 잘 되면 배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그 배 아프고 질투 나는 그 마음은 내가 아니란 사실입니다. 다만 그 마음이 ‘나’인 것으로 착각해서 거기에 집착하고 실망스러워하고 그러면서 부정적이고, 혼탁한 에너지와 업을 끊임없이 발산하며 살고 있는 것이 문제지요.
질투 나는 마음 그것은 ‘내 마음’이 아니라 내가 나라고 착각하는 모양, 착각하는 상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인 줄로 착각해서 거기에 힘을 실어 주는 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아상은 더욱 강화되어 결국 나를 지배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상이 하는 것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저 가만히 지켜보면 어떨까요? '내가' 질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거기에 힘을 실어주지 말고, 그저 그 질투심이 오고 가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라는 말입니다. 마음이 질투심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질투가 나는 마음을 한 발자국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면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영화 보듯 내 존재가 만들어내는 흥미로운 영화를 그저 지켜보세요. 그랬을 때 질투심은 힘을 받지 못하고, 양분을 얻지 못해서 제 스스로 풀이 죽어 꺾이고 말 것입니다.
질투심은 나에게 양분을 빨아먹고 싶어 합니다. 내가 질투심과 하나가 되어, 그 질투심이 나인 것으로 착각해서, 흥분하고 질투하고 짜증스러워함으로써 우리의 그 에너지를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투심에 아상을 개입시켜서 밥을 주게 되면 질투심의 그 에너지는 그 밥을 먹고 더 커져서 내 존재를 완전히 장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질투심 때문에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기도 하고, 생각지 못한 잘못을 저지르기도 하고, 뒤에 가서는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했지 싶은 나도 알 수 없는 그런 결과가 벌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아상을 키우는 일이예요. 그러니까 이제부터 질투심이 일어나더라도 그 마음이 '나다'라고 착각하는 일을 당장에 그만 둬야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 밥주고 에너지를 주는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그 마음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세요. 힘을 빼고 이완하시면서 그 질투가 올라온 그 상황을 탓하지 말고 그저 수용하고 받아들이세요. 받아들이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흥미롭게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하루가 다르게 TV에서는 온갖 다양한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문, 라디오, 영화, 드라마, 뉴스, 잡지 등에서 우리는 무수한 정보를 끌어당겨 흡수함으로써 정보들을 자기화하고 있다. 내가 접한 정보들은 그냥 흘러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부분 나를 형성시킨다. 부정적인 정보를 많이 흡수했다면 그것은 내 존재의 부정적인 부분을 그만큼 키웠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인 정보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만으로도 우리는 부정적인 주파수와 파장을 흡수시키고, 자기화함으로써 내 존재에 부정적인 파장을 깃들게 한다. 그러면 머지않아 부정적인 파장으로 길들여진 내 안의 세포 하나 하나가 내 외부에 있는 부정적인 또 다른 정보들과 공명하고 유유상종으로 끌어당겨 내 인생은 부정적인 일들로 넘쳐나게 될 것이다. 반대로 긍정적인 정보와 사실들을 많이 접하게 되면 저절로 나의 삶이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이루고 일치를 이루어 점점 더 삶 속에 긍정적인 일이 일어날 확률이 커진다.
요즘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라. 그 폭력성과 잔인성을 보고 있자면 도대체 어디에서 저런 상상력이 나왔는지 도무지 헤아릴 수조차 없어진다. 이제 어지간한 폭력성과 잔인성을 가지고서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어렵게 되었다. 보다 획기적이고도 광적이며 무지막지하게 잔인한 장면들을 위해 작가들은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맨 정신으로 저런 장면을 만들어내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힘들 만큼, 정신분열과 강박과 공황으로 얼룩진 참담한 폭력과 잔인, 살인과 전쟁... 등등 이런 고심참담한 세상을 살고 있고, 이런 세상과 어쩔 수 없이 공명하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게 된다.
뉴스는 또 어떤가? 왜 세상의 뉴스에는 ‘착한 뉴스’ ‘선행 뉴스’가 자주 등장하지 못하는 것일까? 요즘을 뉴스를 보라. 폭력, 절망, 기상이변, 전쟁, 살인, 강도, 강간, 부정부패... 끊임없는 부정적인 뉴스 일변도로 치닫고 있다.
정말이지, 뉴스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영화를 찍고,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 언론 매체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도대체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본연의 사랑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이런 난해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부정적인 정보에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세상일수록 그런 세상 속에서 살짝 비켜 설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 부정적인 정보에 대해, 또 부정적인 정보를 만들어내는 사람에 대해, 욕하고, 미워하며, 비판만 할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욕하고 비판하며 증오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를 돕는 것에 불과하다.
좋은 쪽으로 폭력성에 열광하든, 나쁜 쪽으로 폭력성을 욕하든, 그 두 가지 모두 결국 우리 안의 폭력성을 일깨운다. 결국은 그 폭력성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이다. 폭력성은 그것에 열광하는 사람의 에너지도 먹고 살지만, 오히려 그것을 미워하는 사람의 에너지를 먹고 더 덩치를 키우기도 하기 때문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우리가 거기에 붙박히고, 관심을 가지고, 중요성을 부과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에너지를 키우게 되는 것이다.
연예인들은 악플을 두려워한다고 하던데, 악플이 많은 것 보다 더 두려운 것은 무플이라고 하지 않던가. 악플이라도 있다는 것은 그 만큼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그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에너지가 붙고, 인기나 유명세가 붙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폭력성을 좋아할 필요가 없는 것 처럼 폭력적인 것을 미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폭력적인 것을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많이 쏟는다는 것 자체가 폭력적인 것에 그만큼 신경을 많이 쓴다는 것이고, 우리가 좋든 나쁘든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신경을 많이 쓸 때 우리 안의 폭력성은 더욱더 비중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폭력성을 과도하게 거부하면 바로 그 거부하는 것이 지속되는 것이다. 과도하게 좋아하지도 말고, 과도하게 미워하지도 말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폭력성, 잔혹성, 퇴폐성, 선정성, 부정성 등을 대상으로 싸우거나 열광하는 양 극단에서 벗어나 그저 살짝 옆으로 비껴 서는 것이다. 욕하지도 말고, 열광하지도 말고 그저 무관심하는 것이다. 무시하는 것이다. 그저 무심하게 그것들이 흘러가도록 잠시 비껴선 채 내버려 두는 것이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욕하거나 열광하거나, 그 어떤 판단도 내려 놓은 채 다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폭력성, 잔혹성 등에 대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관심을 두기 보다 오히려 선행, 자비, 사랑, 나눔, 평화, 명상, 영성 등의 아름다운 덕목에 더 많이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을 택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실천 덕목이다.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 아예 우리 안의 스위치를 끄는 것이다. 부정적인 것을 미워하느라 에너지를 낭비할 것도 없고, 거기에 열광하면서 부정적 에너지를 키울 것도 없다. 다만 부정적인 대상에 대한 우리의 모든 관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대신에 긍정적인 부분에 대한 관심으로
마음의 초점을 바꾸는 것이다.
영화를 한 편 보더라도 아무거나 재미있다고, 유명하다고, 스케일이 크다고,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고, 그런 이유로 보지는 말라. 그 영화 한 편에서 내 안의 사랑, 자비, 나눔, 지혜, 용서, 평화, 명상, 선행, 비폭력, 아름다움, 따뜻함 등을 일깨울 수 있는지 아닌지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게 하라.
부정적인 영화, 드라마, 정보들을 많이 접할수록 우리는 바로 그 부정성을 자기화하는 것이고, 나아가 그 부정성을 내 삶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반대로 사랑, 나눔, 지혜, 아름다움이 깃든 영화나 드라마나 책이나 정보를 듣게 됨과 동시에 우리는 삶의 진보, 성찰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며, 명상의 행위이고, 삶을 일깨우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폭력적이고 잔혹성이 깃든 영화를 보면서 재미를 느끼는 대신 우리 내부의 세포와 존재 전체를 부정적 에너지로 물들일 것인가, 아니면 조금 재미는 없을지라도 사랑스러운 영화를 보면서 평화와 행복, 자비와 사랑을 키워 갈 것인가.
잠들기 직전 끔찍한 영화를 보거나, 잔혹한 뉴스 기사를 보다가 잠이 들어 보라. 잠자는 내내 꿈 속에서 악몽에 휩쓸린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보는 것, 내가 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형성한다는 것을 안다면, 아무거나 보고, 아무거나 듣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보는 것, 듣는 것, 먹는 것, 오감으로 받아들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바로 우리를 형성해 간다는 점을 잊지 말라.
부정적인 정보에 노출되는 순간 이미 내 의지와는 상관 없이 내 안의 잠재의식과 세포와 업식의 차원은 엄청난 부정적 에너지와 하나가 되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라. 부정적인 정보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긍정적인 정보를 받아들이라.
언제 어느 때든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고통이나 근심도 없다.
만약 어떤 문제나 걱정거리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겉에 드러난, 나를 치장하고 있는
껍데기에 문제가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갑옷처럼 단단하며, 특정한 유니폼처럼
그것을 입고 있는 나를 규정짓고
내가 바로 그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내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나
겉옷 같은 껍데기에 속지 말라.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 껍데기는 이를테면 내 성격이라고 해도 좋고
내 몸, 육신이라고 해도 좋다.
혹은 내 느낌, 욕구, 생각, 견해, 집착일 수도 있다.
나아가 내 직업, 외모, 경제력, 지위, 학력 등일 수도 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나'라고 규정짓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모든 문제와 근심, 걱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점을 바로 알아야 한다.
나 자신의 본질에 있어서는
언제나 아무런 문제도 걱정도 없다.
다만 문제와 근심, 걱정이 있다면
언제나 내 성격, 몸, 느낌, 생각,
외모, 돈, 욕구 따위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이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문제들이
곧 '나의 괴로움'이라고 착각하고,
괴로움들에 일일이 관여하고 결박당해
꼼짝달싹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인연과 조건,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면서 생성소멸을 반복할 뿐이다.
변치 않는 결정적인 '나'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그 껍데기들을 '나'라고 굳게 믿으면서
죽고 살며, 내 삶의 모든 것을 건다.
그것이 근심 걱정에 시달리면
나도 따라서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그것에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문제가 생긴 것인 양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나에게는 스스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삶의 몫이 있다.
모든 존재들에게는 존재에게 주어진 본연의 물음이 있고
해결해야 할 자신만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찾는 일이다.
그 일을 풀 수 있는 해결책은 관찰자가 되는 일밖에 없다.
인격과 소유, 몸이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다 놓아버리고 다만 관찰자가 되어 주시하고 지켜보는 일이
본연의 나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근본 목적이며
모든 수행의 시작이자 끝인 지관(止觀), 정혜(定慧)의 두 축이다.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문제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라고 가면을 쓴
가짜들이 만들어낸 것일 뿐이다.
가짜에 속지 말라.
껍데기에 속지 말라.
나의 몸, 성격, 느낌, 생각, 관념, 욕구, 소유, 직업, 돈..........
이 모든 것들에서 '나'라는 수식을 빠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문제들에 휩쓸리지 말라.
모든 문제와 근심, 걱정 들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가짜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들은 다만 내가 바라볼 것들이지
나 자신의 실체가 아니다.
서로 사귄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그 사랑과 그리움으로 괴로움이 따른다. 사랑과 그리움에서 걱정 근심이 생기는 것을 알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진흙탕에 물들지 않는 연꽃과 같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파타(經集)]
수행자는 번잡한 저잣거리로 나가기를 즐기기 보다, 고요한 아란나*에서 내면을 마주하는 시간을 자주 가져야 합니다. 자주 혼자 있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고요한 삶, 조금 외로운 삶과 벗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음’, 외로움에 익숙치 않은 이를 중생이라 합니다. 외로움에 익숙하다는 것은 이미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란 수행자의 영원한 길동무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움과 마땅히 벗을 하고자 마음 낼 수 있어야 참된 수행자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므로 외롭지 않은 것은 외로움을 극복한 것이 아닙니다. 내 옆에 누군가가 있더라도 아무리 많은 이들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에 우린 모두가 혼자입니다.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일 수 없는 ‘전체로서 혼자’인 것입니다.
혼자임을, 외로움을 이겨내는 일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수행자의 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혼자 있음에 불안해하며, 외로운 것을 참지 못합니다. 혼자 있으면 뭔지 모를 답답과 무기력을 느끼곤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린 지금껏 함께 있을 때 세상을 사는 방법만을 익히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보니 혼자일 때 더 자유로운 도리, 더 행복할 수 있는 도리를 거의 생각조차 해 보지 못 한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살아오며 추구하던 그 모든 것들은 내 혼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다른 누군가와 견주어 질 때만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됩니다.
나와 견줄만한 누군가가 있을 때, 내가 (그 보다) 잘생겼을 수도 있고, 똑똑할수도 있 고, 명예로울 수 있으며, 부자일 수 있고, 학벌이 좋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혼자서는 잘나고 못나고도 없으며, 부자와 가난도 없고 아름다움과 추함도, 뚱뚱함과 가냘픔도 학벌이나 명예, 지위가 높고 낮음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정 혼자일 때 그 어떤 시비분별도 다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시말해 혼자일 때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잘나고 못남에, 높고 낮음, 크고 작음 이 모든 양극단의 판단 분별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혼자일 때 답답하고 무기력한 이유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혼자서는 도저히 이루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며, 혼자라는 것은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 줄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잘 살고, 남들에게 인정받는지 남들에게 잘 보일 수 있으며, 남들에게 승리할 수 있는지를 교육 받아왔습니다.
그것이 삶을 살아가는 행과 불행을 좌우해 왔습니다. 돈이 남보다 많으면 행복, 그렇지 않으면 불행, 권력이나 지위, 계급이 남보다 높으면 행복, 그렇지 않으면 불행, 얼굴이며 몸매가 남들보다 잘 빠지면 행복, 그렇지 않으면 불행, 학벌이 남들보다 좋으면 행복, 그렇지 않으면 불행, 남들보다 커야하고, 남들보다 잘나야 하고, 남들보다 똑똑해야 세상 살아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듯 남들에 비해 어떠어떠한 상대적인 행복을 찾는 대에만 익숙해 왔습니다. 남들과 함께 있음으로 ‘나’를 느끼고 맛볼 수 있었습니다. 나는 착하다, 잘생겼다, 똑똑하다, 키가 크다 등 등... 이 모든 ‘나’를 규정하는 판단 분별은 상대가 있어야만 가능 한 것들이었습니다.
홀로 있음이란 나를 내세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나’를 내세울 수 없기 때문에 혼자는 괴로운 것입니다. 나를 내세우는 일만 배우고, 그것만을 하며 살아왔는데 그 일에서 한번 떨어져 보라고 하니 무기력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혼자있음’의 공부는 상대적인 모든 시비분별을 떠 나는 공부입니다. 그러기에 ‘혼자있음’ ‘외로움’이란 가장 빨리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체험적인 공부, 생생한 공부 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나’라는 놈 때문입니다. ‘나’가 남아 있는 이상 여전히 시비분별은 닦이지 않을 것입니다.
생(生)이 없다면 사(死)는 논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생이 있기 때문에 죽음 또한 생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남들 즉 상대가 없다면 나 즉 혼자라는 것 또한 혼자라고 이름 붙일 필요조차 없게 됩니다.
상대가 없는 ‘나’는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입니다. 조금 쉽게 말해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만 있다면 둘 셋이란 말 조차 필요 없을 것이고, 상대라는 말 조차 끊어진 개념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에 혼자있음이란 상대와의 시비분별이 끊어진 자리입니다. 그것을 배우는 일이다보니 혼자있음이 답답하고 무기력해지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배워 온 상대와의 분별 속에서 남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신념들을 송두리째 뽑아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이겨내야 합니다. 홀로있음에서 오는 그 고독감과 외로움에 당당히 맞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며 시비 분별을 끊어버리는 큰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는 혼자 있음을 배워야 합니다. 수행자는 외로워야 합니다. 아니 혼자있음, 외로움 속에서도 늘 자기 마음의 주인을 확고히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의 주장자 밝게 서 있다면 주장자로 살지 곁가지로 휘둘려 살지 않습니다. 혼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하나의 상황입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되면 단풍 지듯 그렇듯 상황 따라 잠시 일어난 인연일 뿐입니다. 결코 우리가 얽매여 외로움에 치를 떨어야 할 그런 경계는 아닙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 왔다가 혼자 가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사실은 혼자 살고 가는 것입니다. 잠시 부모, 부부, 친구, 친지, 형제, 이웃, 도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잠시 조건따라, 우리 업식따라 인연지어진 것에 불과합니다.
함께 하기 때문에 덜 외로운 것처럼 생각하지만 외로움의 근본을 살펴보면 함께 한다고 적어지거나 혼자라고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없어짓 듯 해도 조건이 맞으면 다시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런 사실을 바로 깨닫게 되면, 즉, 외로움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상황이라는 것을 바로 알게 되면 그 헛된 마음에 놀아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상황을 바꾸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갈 수 있어야 수행자 입니다. 수행자는 외로움과 즐거이 벗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로움이란 놈의 실체를 가만히 관해 벗겨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혼자인 것을 싫어하지만 어느 한 순간도 혼자이지 않은 때는 없습니다. 올 때도 그랬고 갈 때도 그럴 것이며 살아가는 매 순간 순간이 그러할 것입니다.
혼자 있음, 외로움과 벗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란나: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무쟁처(無諍處), 적 정처(寂靜處)라고도 하며, 시끄러움과 번 잡함 이 없는 숲이나 들판 같 이 수행하기 좋은 고요한 곳을 말한다.
법상스님의 글 감사드립니다. 수행하면서 느낀점인데요... 갈수록 더 혼자 있고 싶고 혼자 있을때 너무도 평화롭고 제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 볼수 있는 시간들이 참 감사하고 좋아요. 저는 사실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도 행복해요. 가족과 친구들, 이웃들.. 물론 사랑하지만 나에게 진정한 행복시간은 홀로 있는 시간...
다시금 일깨워주셔서 감사드려요. 스님께 두손 모아 합장 _()_
그렇게 그냥 그냥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순리에 내맡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체를 놓음 없이 놓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함이 없이 무엇이든 다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모습도 이와 같은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렇기에 애써 놓으려고 방하착, 방하착 하지 않아도 이미 다 놓고 가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크게 보았을 때 우리의 삶은 놓고 가는 삶입니다. 다만 사사로이 잡고 있는 것이 많으니 온갖 선악, 시비, 분별, 행과 불행을 제 스스로 만들어 그렇게 만든 틀 속에 빠지니 그것이 문제라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우리에게 문제처럼 보이 는 것일 뿐이지 마음자리에서 보면 그것 또한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 또한 크게 놓고 가는 모습일 뿐입니다.
생사가 없는 자리에서는 생사의 겉모습을 보고 괴로워하지 않는 법입니다. 마치 관객들이 연극 속 주인공이 죽더라도 잠시는 눈물이 나지만 한생각 돌이켜 연극이라는 실상을 깨닫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연극 속의 주인공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 스스로 이것이 연극임을, 현실의 실상이 연극처럼 거짓된 환영임을 바로 알수 있다면 괴로움에 빠져 허덕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실체가 아닌 연극임을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는 괴로움도 괴로움이 아니고 즐거움도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연극은 어디까지나 주인공과 온갖 등장인물을 가진 엄연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 속에 괴로움의 모습, 즐거움의 모습들이 엄연히 등장합니다.
그러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전체의 입장이 되어, 마음 자리의 입장이 되어 가만히 관해 본다면, 우리의 인생이 똑 이런 모습 그대로입니다.
주인공이 괴로움을 연극하지만 괴로움에 빠 지지 않듯, 답답함에 빠져있지만 답답함을 잡지 않고 놓고 있듯, 그렇게 우리의 삶도 참나의 입장에서는 놓고 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사실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한생각 돌이켜 굳게 믿고 나면 이미 놓고 자유롭게 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놓는다' 한 생각 돌이킨 그 자리가 바로 본래자리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이 허허로운 세상 아웅다웅 하며 복잡하게 살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이미 놓고 가고 있으니 놓는다는 말도 필요없이 그저 턱 믿고 가면 그만입니다. 놓고 가는 그 큰 마음자리의 흐름에 일체를 내던지고 나면 그냥 그냥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잠시 우리 마음 속에서 괴롭고, 아프다, 우울하다, 질투난다 하고는 있지만 그게 다입니다. 그러고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 마음 일었다가 사라지면 없는 것입니다.
10년 전 배고팠던 일이 지금까지 배고픔으 로 남아 있지 않듯, 10년 전 오늘 있었던 일들을 지금 낱낱이 다 기억하여 남기고 있지 않듯, 그렇게 그렇게 놓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잠시 어리석어 잡고 있었던 것 또한 업식으 로 남는다고는 하지만 언젠가 인연따라 흘러 나오면 튀어나오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렇듯 잠시 잡았다 놓는 것을 어찌 잡음이라 하겠습니까. 생각의 차이일 뿐입니다. 잡는다고 하면 잡는 것이 되고 괴로운 것이 되겠지만 놓는다고 하면 그것 또한 놓고 가는 것입니다
수행자라는 자기확신만 있으면 됩니다. 수행자는 늘 넉넉합니다. 지음 없이 짓고 받음 없이 받고 사니 말입니다.
이미 다 놓고 사는 것을 굳게 믿고 가시길 바랍니다. 이미 다 놓았는데 무엇이 붙을 게 있겠습니까. 생사도 다 놓았는데 살아가며 느끼는 괴로움이 다 무엇이겠습니까. 그냥 그냥 물 흐르듯 허허로이 살아가는 수행자 됩시다.
생각이 없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만 그 생각에 고집을 하게 되면 문제가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내 생각이 옳다'라는 고집, 편견들로 인해 우리는 '내 옳은 생각'을 남들에게 주입시키려고 얼마나 노력을 하고 살아요.
그런데 생각하는 것 처럼 그렇게 쉽게 남들도 내 생각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참 이상하겠지요.
'내 생각'이 분명 맞는데 왜 이 옳은 생각을 따르지 않을까 싶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남들도 '자기들만의 옳은 생각'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물론 서로의 생각이 일치를 볼 때는 두 말 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참 많거든요.
그럴 때는 '너 참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요. 내 옳은 생각에 동조를 안 해주니 상대의 견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생각했을 때 옳은 일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큰 잘못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 '내가 생각 하기에 옳은 일'일 뿐이거든요.
상대는 상대 나름대로 '옳은 생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 또한 '자신의 옳은 생각'을 우리가 받아주지 않는다고 당황스러워할지 모릅니다.
내 생각을 상대가 받아들이면 즐거움이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괴로움을 느끼고 살아야 하는 그런 무한히 반복되는 어리석은 중생놀음은 이제 그만 둬야지요.
이제 '내가 옳다'는 그 관념부터 온전히 비울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전적으로 옳은 일'이란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옳은 생각'은 다만 어떤 상황에서는 '옳을 수도 있는' 생각일 뿐입니다. 완전히 '이것만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참 어리석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려 하지 마세요.
'내 옳은 생각'을 상대도 옳다고 맞장구 쳐야 된다고 생각지는 마세요.
모든 생각들을 모든 이들의 생각들을 다 받아들일 열린 마음을 가지세요.
'옳다', '그르다'라고 단정짓는 말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저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일입니다.
자식에게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에게 내 생각을 주입하려 해선 안됩니다. 내 방식대로 자식을 키우려고 하지 마세요. 자식들 또한 그들 나름대로의 삶이 분명 있습니다.
'내 자식'이니 내 방식대로 키운다고 하겠지만 다만 나를 인연으로 이 세상에 나온 온전한 한 분의 부처님이실 뿐입니다. '내 것'이 아니예요.
회사에서도 훌륭한 상사는 모든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저마다의 '옳은 생각'들을 '옳은 생각' '그른 생각'으로 나누어 '옳은 생각' 만을 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생각들을 다만 '다른 생각'으로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옳은 생각'을 취한다고 했을 때 그 옳은 생각이라는 것도 '자신의 옳은 생각'이라는 잣대를 기준으로 '옳은 생각'일 뿐이거든요. 결국엔 닫힌 마음으로 자기 생각만 내세우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니 어떻게 한 단계 넘어서고, 진화하고, 한 단계 뛰어넘는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겠어요.
모든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주입하려 하지 말고 서로 다름을 이해해 주고 받아들여 주어야 합니다.
서로 다르게 태어나서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으며 배움의 정도 또한 다 다를 진데 어찌 같음을 바라겠어요. 다른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이 당연한 것이라면 생각이 서로 다를 수 있음도 당연한 것이고, 저마다의 '옳은 생각'도 다 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런데 왜 '내 생각'만 옳다고 할 수 있겠느냐 말이지요. 그 말은 '내가 살아온 길'만이 옳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내가 태어난 것, 내가 자라온 환경, 내가 배워 온 익힘만이 올바른 것이고 남들이 배워 온 것들은 다 '거짓'이라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어요.
'내 생각이 옳다'는 관념이 그리고 '남들의 생각이 그르다'라는 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생각이고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 줄 잘 알아야 합니다.
옳고 그르다고 판단하지 말고 '하나의 다른 생각'으로써 받아들여 주도록 하세요. 내 생각 또한 '하나의 다른 생각'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엄마가 엄마생각을 저한테 강요할때는 뭐라고 해야하나요? 엄마말에 대꾸한다고 혼나는데.. 제가 엄마꺼라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하고 늘 엄마가 너무 불행하다는 듯 말하시는데..아빠도 크게 다르지 않아요. 제가 부모님께 마음공부에서 본 글들에 대한 얘기를 해드리면 저를 미친사람처럼 봅니다. 어떻게 해야하는지...질문하지 말고 그냥 지켜보다가는 제 결혼도 엄마 마음대로 할 것 같아서.. 말이지요. 로 하
욕심을 일으키지 말라고 하면서,
방하착 하라고 하면서
왜 서원을 세우라고 하는가 하고 질문하는 분이 계십니다.
다 놓으라면서 서원을 잡느냐고 말입니다.
집착을 놓으라면서 왜 또다시 원에 집착하느냐고 말입니다.
욕심과 서원은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우리들 중생들은 욕심과 집착 때문에
신구의로 온갖 업을 짓게 되며 그 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끊임없는 윤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살은 서원을 세움으로써
스스로 선택하여 중생계에 뛰어 든다고 합니다.
중생은 업생(業生)이라 하며,
보살은 원생(願生)이라 합니다.
중생은 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태어나지만,
보살은 스스로 원을 세워
불계(佛界)를 잠시 등지고 이땅 사바예토에 선택하여 오셨습니다.
중생이 업을 짓는 이유는
욕심과 집착이 끊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만들어 놓고 ‘내 것’으로 만들고자
욕심과 집착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나’의 틀을 이미 벗은 분들이십니다.
내가 없음을 깨치셨기에 욕심과 집착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언제라도 부처님이 되실 수 있는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보살은 부처님이 되지 않고
중생계에 남아 자리이타를 실천하고 계십니다.
보살과 부처가 동일하지 않은 이유는
서원의 유무에 그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일체의 모든 욕망과 집착을 다 끊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그 어떤 형태의 찌꺼기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텅 비어 도리어 꽉 찬 법계 그대로가 됩니다.
모양도 형태도 없는 공(空)이 됩니다.
그러나 보살은 아직 중생계에 머물러 계십니다.
중생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아직 욕심과 집착이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살을 부처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아직 부처가 되기에는 욕심이 남아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보살이 가진 욕심은
우리 중생들이 가진 욕심과는 다른 욕심입니다.
그 욕심은 애써 표현하자면 ‘승화된 욕심’이며,
‘이타적인 욕심’으로 서원을 의미합니다.
서원을 일러 ‘승화된 욕심’이라고 말합니다.
보살은 언제라도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되지 않고
스스로 선택하여 원을 세움으로써
보살의 자리에 남아 자리이타를 실천하십니다.
부처님이라면 일체가 딱 끊어진 자리입니다.
원이고 업이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텅 비어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보살은 그런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나와
원을 세움으로써 중생과 부처의 사이에 있기를 자청합니다.
보살은 원이 있기 때문에 아직 부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승화된 욕심''이 아직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업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원이라는 데서
중생과 다른 것이지요.
그렇듯 보살의 서원과 중생의 욕심은
지향하는 바가 다릅니다.
보살의 서원, 수행자의 승화된 욕심은
깨닫고자 하는 욕심이기에
일체를 놓으려는, 일체를 비우려는 욕심이지만,
중생들의 욕심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소유하려 하고 가지려 하고
채우려고 하는 욕심인 것입니다.
수행자의 서원은
그 근본이 ‘비움’이기에 업을 녹이는 수행이지만,
중생의 욕심은
그 근본이 ‘채움’이기에 업을 쌓는 원동력이 됩니다.
쉽게 말해 수행자의 서원, 즉 승화된 욕심이란
‘욕심을 버리려는 욕심’ ‘비우려는 욕심’이란 말입니다.
아상이 담긴 욕심은, 즉 나 잘 되자고 하는 욕심은
업력만을 증장시켜 끊임없는 윤회만을 가져오지만,
아상이 녹아 없어진 서원,
일체 만 중생이 모두 함께 잘 되자고 하는 서원은
업력을 녹이며 조금씩 윤회의 사슬을 끊게 만듭니다.
중생은 업을 자꾸 쌓아가지만,
보살은 원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수행자는
첫째가 업을 녹이고 비우며 사는 사람이고,
둘째가 원을 크게 세우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비우면서 채우는 도리입니다.
놓으면서 크게 잡는 도리입니다.
수행자는 업력으로 태어났지만(업생)
새롭게 원을 세움으로써 다시 태어나는 사람(원생)입니다.
그래서 출가한 수행자는 세상을 다시 태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란 대원을 품고
원생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란 말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라고 한다면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생명처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원력으로써 다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수행자가 되고자 초발심을 낸 사람이라면
업을 다스리고 원을 세우는데 게을러서는 안됩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리이타의 원력이 없으면 수행자가 아닙니다.
업력만 가지고 이 땅에 와서
욕심과 집착만을 키워 더 큰 업력만을 쌓고 가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수행자라면 나날이 원력으로 꽉 차야 할 것입니다.
순간 순간 원력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업이 올라오는 순간을 관하여 방하착 하고,
그 위에 원력의 밝은 씨앗을 심어야 할 것입니다.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by 법상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