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정 원하는 일, 나다운 일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해야 하는 삶의 몫이 무엇일까요? 애써 찾아야 되는건지요?
내가 진정 원하는 일, 나다운 일이 무엇일까요? 나다운 일은 어디에 가서 애써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나로써 살아가는 문제입니다. 즉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삶을 말합니다. 내가 나다운 삶을 찾으려고 애쓰는 순간 이미 그 마음은 자연스러움을 잃게 되고, 곧 나다움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인연 따라 나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거부하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사는 것입니다.
또한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내 안의 생각이나 감정을 나라고 착각하고 생각과 감정에 끄달려 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자'로써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생각이나 감정을 우리는 '나'라고 착각하며 살기 쉬운데, 그것은 자연스러운 내가 아닙니다. 그저 그 생각은 끊임없이 무의미하고 불규칙적이고 뜬금없고 체계도 없이 마구잡이로 올라오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올라오는 생각이나 감정을 나라고 착각하며 살지 말고 '지켜보는 자'로 살게 되면 내가 나의 근원을 향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생각과 감정과 아상에 휩쓸리지 않고 근원이 향하고자 하는 길, 근원의 내가 나답게 살고자 하는 바로 그 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갈 수 있게 됩니다. 그랬을 때 생각이 나를 지배하지 않고 직관적이고도 영감 어린 본질적인 판단들이 나를 이끌고 가며 전체적이고도 이타적인 길로 나를 이끌게 될 것입니다.
어제가 길일이라고, 차를 산 친구는 차에다 고사를 지내고 사무실을 낸 언니는 사무실에서 고사를 지내데요. 제 생각엔 왜 고사를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고사 안 지내도 차사고 한 번 안 났거든요. 돼지 머리를 올려놓고 입에 지폐를 집어놓고 절을 하고 축원하는 것도 올바른 것일까요?
고사를 지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본질에서 본다면 그게 다 필요 없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사라는 말의 의미나 고사를 지내는 방식이나 그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면 고사를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즉 고사를 지내는데, 돼지 머리를 사다 놓고 돈 코에 쑤셔 넣고 뭐 그러면서 절을 하는 것 보다는, 차를 샀거나, 집을 샀거나 간에 차에서, 집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 독송을 몇 독이고 해 주거나, 처음 산 날로부터 3.7일이 되었든, 100일이 되었든 독송이나 진언, 다라니, 염불 등을 해 주겠다 하고 수행을 한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방편입니다. 또 고사를 지내는 마음도 ‘사고 없게 해 주세요’ 하는 기복적인 마음 보다는 ‘이런 차를 얻게 되어 감사합니다.’ 라는 감사의 기도를 하세요. ‘사고 없게 해 달라’는 말에는 사고를 향한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 있지만,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긍정과 감사와 자족의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절 수행 중에 기도의 내용이 매일 바뀌고 어떤 때는 절 하는 중에도 계속 바뀝니다. 오히려 번뇌가 더해가는 느낌이랄까요? 어떤 마음으로 절을 해야 하는지요. 아무 생각 없이 절만 해도 되는지요?
절 하는 도중에 무슨 기도를 한다거나, 무슨 발원을 생각한다거나 그러지 마시고, 그저 절만 하세요. 생각, 바람, 기원 등의 마음도 다 놓아버리고 다만 절만 하면서 절하는 나 자신을 관하시기 바랍니다. 다만 발원 할 내용이 있으면 마음을 비우는 기도를 한 뒤에 기도 끝에 하면 됩니다. 마음이 비워진 뒤에 그 텅 빈 마음에서 이타적인 발원이 나오면 거기에 힘이 붙습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계속 발원을 하면 오히려 생각이 많아지고 그 발원에 힘도 안 붙어요. 오직 무념으로 생각 없이 관하며 절하시기 바랍니다.
또 어제 오늘 절을 하면서 가슴이 너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증상이 있는데 왜 그럴까요?
절을 하면서 답답하고 숨막히는 증상이 있을 때는 거기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천천히 계속 하시면서 그 답답하고 숨막히는 느낌을 충분히 느껴주세요. 그것을 거부하려 하지 말고 그것 때문에 하던 절 수행을 그만두려 하지도 말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 느낌과 하나되어 계속 절을 하시기 바랍니다. 너무 힘들면 조금 천천히 절을 해 보세요. 특히 그 증상에 대해 이래 저래 내 판단으로 해석을 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충분히 느끼며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절을 하면 건강해진다는데 왜 절하기 전보다 더 체력이 약해지는 느낌인지요?
체력이 약해진다는 그 느낌에 집착하여 그 느낌을 강화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느낌이 나면 그저 그런 느낌이 난다고 관찰하면 되는 것이지, 그 느낌에 '약해진다'는 판단을 붙일 필요는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느낌일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무분별의 있는 그대로의 관찰이지만, 거기에 '약해지는 느낌'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은 분별의 소산입니다. 분별하면 분별한 것이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분별하지 않고 바라보면 그 모든 것이 나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법계의 배려라는 것을 뒤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지만 마음이 굳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간절한 마음으로 절할 수 있을지요? 또 애써 간절한 마음을 만들려고(?) 하면 통증이 느껴지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지곤 합니다.
애써 간절한 마음을 만들려 하지 마십시오. 애써 만들려는 마음은 오히려 수행을 그르칩니다. 다만 할 뿐! 하고 그냥 하세요. 그냥 하면 되는 것이지 거기에 '간절해야 하는데' '나는 왜 간절하지 못할까' 하고 분별을 붙일 것은 없습니다. 간절하다는 말이 좋은 말이긴 해도 어떤 실체가 있는 실체적인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말이지, 간절하다는 것에 특별히 메일 것은 못 됩니다.
마음이 굳어진 것 같고, 간절하지 못하고, 매마른 것 같다면 그것은 아주 좋은 수행의 재료가 됩니다. 그 현상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다만 그것에 이러니 저러니 간절하지 못하니 하고 분별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 현상 자체는 내버려 두고 바라본다면 아주 훌륭한 수행의 재료가 됩니다. 아니, 사실은 바로 그 현상을 통해 수행을 하기 위해 그 현상이 있는 것입니다.
'멍~' 하는 무기 상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정말 틈만 나면 정신이 '멍'해집니다. 버스를 기다릴 때나 앉아서 좌선을 할 때도 바로 '멍'해집니다. 다른 사람이 쉽게 알아챌 정도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멍'을 고칠 수 있을지요? 절을 많이 하면 '멍'도 고쳐지나요?
멍 한 그 상태를 느껴보고, 지켜보십시오. 멍 한 가운데 분명히 그것을 지켜볼 수 있다면 멍 하고 있는 것도 남들이 보기에는 멍 때린다 어쩌고 하겠지만 내 안에서는 아주 중요한 수행의 순간이 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멍하니 가만히 있는 상황일 때마다, 내 안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지, 어떤 것이 느껴지고 있는지를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살펴 보게 된다면 그 멍한 순간이 오히려 활짝 열려있고, 깨어나는 명상의 순간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혼자 조용히 절을 하노라면 두려움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특히 밤에 절할 때 무섬증이 생깁니다. 이것을 극복할 방법이 있을지요?
무섭고 두려운 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기에 사로잡히고 두려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내가 만들어 낸거지 본래 있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서움과 두려움을 잘 지켜보면 거기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습니다.
기도를 오래 하다보니 기도하는 중에 온갖 경계를 만납니다. 마장이라고 해야하는건지 모르겠네요.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때때로 두렵고 무서워 기도를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기도 중 생기는 마장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떤 수행을 하든 다양한 수행중의 경계를 만날 수 있게 되는데, 그 경계를 만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그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다만 그러한 경계가 수행 중에 나타나고 생활 중에 나타나고, 꿈 속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가만히 분별 없이 지켜보기만 하시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경계가 즐겁고 신비하다고 좋아하여 집착하려 하거나, 다시 한 번 느끼려고 하거나, 또 무섭고 두렵다고 해서 미워하고 밀쳐내려 하거나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되 거기에 마음을 붙잡아 메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입니다. 경계든, 마장이든, 신비한 체험이든 그것에 마음이 끄달려 거기에 따라가면 안 됩니다. 따라가면 그것이 수행을 방해하는 마장이 되고, 공부에 큰 방해가 되지만, 따라가지 않고 그저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분별 없이 지켜보기만 한다면 그 모든 것이 우리 공부의 아름다운 재료가 될 것입니다.
제가 처음 다니던 절에서는 관음경을 독송했는데요, 이사를 와서 나가게 된 절에서는 대비주 기도를 합니다. 또 요즘은 어떤 인연이 되어 금강경 독송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때때로 직장생활 중에는 관세음보살 염불을 합니다.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기도가 맞는지요?
우선 수행의 인연이 처음에는 관음경이 되어다가, 다라니가 되고, 또 금강경 독송으로, 관음정근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그것은 그렇게 인연 따라 이 절 저 절 다니다보면 수행법도 바뀌게 될 수도 있습니다. 수행법이 바뀌는 것은 전혀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런 모든 수행법의 그 이면에는 깊은 바탕과도 같은 지관(止觀)의 수행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가 불교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지관의 수행 때문입니다. 기도니, 보시니, 진언이니, 하는 다양한 불교적 전통의 가르침들이 사실은 다른 종교에도 많이 있는 내용들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 지관수행이 불교 수행의 핵심이면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핵심의 수행법입니다. 즉 염불을 하든, 다라니를 하든, 보문품을 하든, 금강경을 하든 그 이면에 번뇌망상을 ‘그치고’, 마음을 ‘관하는’ 그 수행이 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망상을 그쳐라, 마음을 비우라, 집착을 놓으라 하는 것이 다 지관에서 ‘지(止)’의 수행이며, 알아차리라, 관하라, 깨어있으라, 지켜보라는 것이 다 ‘관(觀)’의 수행인 것입니다. 그 둘 중 핵심은 관입니다. 금강경, 관음경, 대비주를 독송하며 마음을 관하고, 관음정근을 하면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마음을 관하고, 또 일상 생활 속에서도 늘 마음과 생각과 느낌 등을 매 순간 관찰 해 나가십시오. 그런다면 인연 따라, 사찰 따라, 스님 따라 또 도반 따라 다양한 수행법을 만나게 될지라도 그 근본은 흔들리지 않게 될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남편하는 일이 너무 힘이 듭니다 .부처님 앞에 일 잘되게 해달라고 하기가 죄송스럽지만 집에 와서 남편과 아이들 얼굴을 보면 부처님께 내 욕심을 담은 기도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바라는 기도, 기복적인 기도를 해도 될까요?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언가 세속적인 빌 것이 있다는 말인데, 사실은 빌게 되면 오히려 그것을 얻지 못하게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 하는 일이 잘 되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다면 사실 마음의 이면에 무엇이 연습되고 있는지를 보세요. 그 이면에는 '지금 남편 하는 일이 잘 안 됩니다. 그러니 앞으로 미래에는 더 잘 되게 해 주세요' 하는 것입니다. 즉 잘 되게 해 달라는 말 이면에 우리는 사실 '남편 일이 잘 안 된다'는 말을 법계를 향해 계속해서 뿜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복적인 기도의 이면에는 ‘잘 된다’가 아니라 ‘잘 안 됩니다’라는 부정적 마음의 에너지를 우주법계에 계속 보내고 있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기도의 정신은 감사에 있습니다. 감사는 지금 현재 남편의 상황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감사해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더 많이 벌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나마 돈이라도 벌어오니 그것으로 밥 먹고 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하고 지금 이대로의 현재 모습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이면에 무엇이 연습되느냐 하면, 남편의 현재 사업에 대해 감사하고 있으니까 우주법계에 남편의 현재 사업에 대한 만족을 보내는 것입니다. 만족함을 느끼고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은 우주법계를 향해 풍요로움과 만족과 감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우주법계는 내가 마음에서 연습한 대로 고스란히 가져다 줍니다. 일체유심조, 마음에서 그린 것을 그대로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 남편 사업 잘 되게 해 주세요, 함으로써 부족, 결핍, 가난, 실패를 연습하면 그것이 나에게 올 것이고, 현재의 상황에 대해 긍정하고, 감사하며, 만족하게 된다면 우주법계는 내가 누리고 있는 그 감정을 좀 더 획기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계속해서 그것의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니 세속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할지라도 잘 알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 만족의 기도, 긍정의 기도를 통해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것을 해야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거꾸로 된 기도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어릴적부터 벌레를 너무 많이 무서워합니다. 새벽 좌선 중에 갑자기 벌레를 보고 놀라 너무 무서워서 살충제를 쏘아 죽였습니다. 벌레에 대한 혐오감과 두려움을 극복하기가 너무 어려워요. 어떻게 하면 좋지요?
한 마리의 벌레가 있습니다. 그 벌레는 그저 벌레일 뿐입니다. 나무처럼, 구름처럼, 한 송이의 꽃처럼, 혹은 강아지나 예쁜 토끼처럼 하나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것은 무분별이고, 무차별입니다. 좋을 것도 없고 나쁠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그렇다고 애착할 것도 없고, 그저 그렇게 거기에 있을 뿐입니다. 문제는 곤충이나 벌레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내 안의 해석, 분별, 판단, 경험 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법우님께서 느끼는 그 공포나 무서움은 벌레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벌레에 대해서 벌레를 보면서 내 안에서 해석하고, 생각하며, 또 느끼는 그것에 문제가 있는 것이겠지요. 즉 그것은 벌레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입니다. 그것도 벌레를 보는 내 안의 '보는 문제'인 것입니다. 보는 문제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를 무섭고 보는 데서 문제가 생겨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면 그런 문제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아주 단순합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벌레를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내 식대로 해석하거나, 좋다 나쁘다, 무섭다 안 무섭다, 징그럽다 예쁘다 하는 그런 판단 분별의 시선에 걸러서 그 대상을 해설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벌레를 보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온갖 생각, 분별, 판단, 두려움, 무서움 등을 그저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 보십시오. 무서운 벌레는 아주 좋은 공부의 재료가 됩니다. 벌레를 지켜보면서 내 안에서 어떤 것이 일어나는지, 어떤 느낌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생각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의 어떤 부분이 공포와 무서움을 느끼고 있는지를 가만히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런 분별없는 지켜봄을 통해서 아주 근원적인 벌레에 대한 통찰이 생겨나게 됩니다.
무엇을 위해 공부하는 걸까요? 수행한다고 하면서 그 외의 일들에 무심해지고 주위 인연들에 소홀해졌습니다. 이 공부는 어쩔수 없이 주위와 멀어지면서 홀로 가는 것인가요?
이 마음을 관찰하는 공부는 바로 내 삶을 관찰하는 공부이고, 매 순간 순간의 삶에서 충실해 지는 것입니다. 앉아 있는 것만이 좌선이고 공부가 아닙니다. 삶의 현장 속에서 생생하게 깨어있는 것이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 공부는 세상과 동떨어진 공부이거나, 주변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공부가 아닙니다. 내 바로 앞에 나타난 사람과 말 한 마디며,(정어) 행동 하나 하나를 할 때며,(정업) 또 생각을 하나 일으킬 때 조차(정사유) 온전히 깨어있는 것이 불교 공부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가장 핵심이 되는 수행법인 팔정도에 정념, 정정진, 정정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수행덕목은 뒤쪽에 있고, 그 앞에 먼저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이 와 있는 것입니다. 삶을 바로 보아야 하고, 바르게 생각을 관해야 하고, 타인과의 대화 중에 말을 관하며, 행동을 관하고, 자신의 직업과 생계라는 생활을 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과, 타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갈 것인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가르침이지요.
불교는 매 순간 순간의 삶에서 분명히 깨어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세상과의 관계를 조화롭고도 평화롭게 가꾸어가는 길입니다. 자비희사의 덕목이나, 보시, 애어, 이행, 동사라는 사섭법과 사무량심의 덕목을 보더라도 얼마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써야 하는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수행법들이지요.
불교에서는 무상과 무아라고 합니다. 항상 하는 것이 없고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 해탈을 하는지요?
해탈을 하는 '나'도 없습니다. 해탈이라는 것은 '나'에 얽매여 있던 삶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음이 있을 뿐이지, 깨달은 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깨달은 자가 '자신이 깨달았다'는 상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아직 자아가 남아 있고, 아상이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이겠지요. 다시 말하면 '깨달은 자'가 없다는 것은 깨달은 자라는 육신이나 존재 자체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스스로 자아에 갇힌 생각이 없다는 말이고, 무아와 무상을 완전히 자각한 채 고정적인 실체관념을 비워버렸다는 뜻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나 무아는 '없다'는 말이라기 보다는, '연기한다'는 말입니다. 즉 있기는 있는데 그게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인연 따라 신기루처럼 환영처럼 잠시 있는 것 처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이겁니다. 바로 그러한 무아를 바로 깨닫는 것이 열반입니다. 그러니 ‘누가 있어서 열반을 하느냐?’ 하는 질문 자체가 오류를 품고 있어요. 열반을 하는 어떤 정해진 고정불변을 실체적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반한 자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실체가 없이 인연 따라 생겨난 존재라는 사실을 바로 깨달은 자란 말입니다. 무아를 바로 깨달은 자란 말이지요. 그러니 무아를 깨친 자에게 '나'라는 실체적 단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나’라는 단어를 쓰기보다는 육근, 오온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셨습니다. 즉, 열반도 실체가 아니고, 고정된 무언가가 아닙니다. 열반을 실체시 하는 것은, 진리를 실체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불교는 불교 그 자체도 놓아버렸을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다고 했는데, 한 편으로는 모든 것이 법계의 큰 계획과 질서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이 모순 아닌가요? 지금까지 제 맘대로 살아온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법계의 계획이었고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저의 삶도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아, 혼란스럽습니다.
업의 차원에서 조금 쉽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미 내가 지은 업이 있습니다. 그 업은 분명히 받아야 돼요. 그리고 남들이 지은 업도 분명히 그들이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지은 업을 받아야 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인연, 인과, 업보의 관계가 놓여있습니다. 그래서 법계란, 그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존재들의 다양한 인과와 업보를 조화롭게 질서 있게 운행시킴으로써 저마다의 업에 걸맞는 응보를 저마다의 인연에 맞는 사람들과 존재를 통해 받을 건 받고 줄 것 주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계예요. 그런데 그 업은 누가 지었어요? 내가 짓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업을 지어요. 다시말해, 이미 지은 업에 대해서는 법계의 질서대로 법계의 계획에 따라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법계의 인과적인 질서 이면에는 나의 자유의지가 바탕이 되어 있어요.
그 자유의지 속에는 복을 짓거나 수행을 하는 자유의지도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복과 지혜라는 자유의지가 모여서 나의 과거 업을 어떤 방식으로 받을 것인지를 법계는 충분히 감안하여 결정하게 됩니다. 그러니 업을 받아야 하는 건 분명하지만, 그 업을 받을 때, 현재의 삶에 따라, 예를 들면 얼마나 깨어있는 삶을 현재에 살고 있느냐, 얼마나 복을 짓고 베풀며 살고 있느냐, 즉 지혜와 복덕을 순간 순간에 얼마나 꽃피우며 살았느냐에 따라 법계에서는 과거의 업들을 현재에 받기는 받되 다른 방식으로 받게 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금물의 비유’입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됩니다. 나아가 그 그릇에 온갖 양념을 하고 나물을 넣어 국이나 찌게를 끓인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도리어 맛깔스런 음식이 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과거에 악업을 지어 놓았다고 하더라도 그 업을 기계론적이나 결정론적으로 반드시 나쁘게 받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업장소멸이라는 말이 이런 의미입니다. 업장이 받지도 않고 수행만 하면 그냥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행, 마음공부를 통해 업장을 받더라도 받지 않는 것 처럼 내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인 것이지요.
결론적으로, 자유의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또한 우주법계의 질서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서로 모순되지 않아요. 그 둘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없는 것이라면 참회해야 할 나도 없는 것 아닌지요? 모든 것이 공하다면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또 내가 없는 것이라면 무엇에 감사할 대상도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요? 업도 없는 것인지요?
만약 말씀하신대로 그렇게 결정짓고 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무기공에 떨어지는 거예요. 무애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참회도 안 하고, 감사도 안 하고, 악업도 마구 지으면서 업을 받을 나도 없다고 한단 말입니다. 주로 그런 경우는 무아, 공, 연기, 중도에 대한 이해가 올바르지 않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머리로만 이해해도 그렇습니다.
무아는 밑도 끝도 없이 그냥 '내가 없다'라고 하는게 아니예요. 이렇게 내가 있잖아요. 그런데 왜 없다고 했느냐? 그건 이런 내가 없어서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이고, 다만 인연따라 변해가는 인연가합의 존재라는 말입니다. 인연따라 변해가는 인연가합의 존재는 있어요. 다시말해, 악업을 많이 짓고 선업을 안 지으면 분명히 상황이 좋지 않은 곳에 나쁜 조건으로 태어나서 그 나쁜 업보를 다 받아야 합니다. 그 업보를 받더라도 아무 상관없다, 그런 정도는 넘어섰다고 한다면 그렇게 무애자재하게 살면 됩니다. 돈이 없어도 괜찮고, 그저 걸망 하나 달랑 들고 살아도 괜찮고, 심지어 전쟁의 공포 속에서 태어나도 괜찮고, 기아와 굶주림, 질병 속에 고통을 누려도 괜찮은 정도가 된다면이야 그 공부를 인정해 줍니다. 실제 깨달은 도인들은 그런 외적 환경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살곤 합니다. 그러나 아직 공부가 다 안 된 우리들 입장에서 그런 무애도인을 흉내내었다가는 큰일난다 이 말입니다.
근본법에서 본다면, 참회니 발원이니 감사니 수행이니 그 어떤 말도 붙을 것이 없어요. 삶 자체가 그냥 진리이기 때문에, 별도로 꾸며낼 일이 없고, 참회나 감사할 것이 없어요. 그냥 삶 그 자체가 아무런 티끌이나 흔적이 없단 말입니다.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를 않으니 그것을 다시 무너뜨릴 것도 없단 얘기예요. 그러나 우리는 마음 안에 티끌을 스스로 만들어 놓았으니, 스스로 만든 그 티끌, 죄업을 스스로 참회해서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예를 들면, 남이 나에게 욕을 하면 우리는 화가 나고 괴씸한 마음이 올라와요. 그런데 사실은 그건 그냥 말에 불과합니다. 그 말에 화를 낼 이유는 없어요. 그 욕도 공하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어때요? 누가 욕을 하던 아무 상관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그래서 방편 수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온갖 티끌을 만들었으니, 내 스스로 그것을 다시 돌이켜 놓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방편이 필요한거예요.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방편도 다 공해요. 그래서 환상으로 환상의 병을 치유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자신과의 약속을 매번 어깁니다. 특히 새벽기도 해야지 하는 결심만 할 뿐 제대로 실천을 못 합니다. 왜 저는 매번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기만 할까요. 이젠 저에게 화가 납니다.
수행은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기도를 해야겠다 싶으면 알람을 켜 놓고 일어나면 되고, 만약 도저히 못 일어나겠었다면 조금 더 노력해 보거나 아니면 그냥 자면 됩니다. 단순하게 사세요. 그냥 잤다고 해서 알람이 울렸는데 그냥 잤다는 그 단순한 상황에, '내가 졌다'고 하는 상을 만들어 놓고, 연이어 두번째 세번재 화살을 맞느라고 '나는 끈기가 부족하다'거나, '나는 왜 이렇게 못난 사람이지'라거나 하고 연이어 생각으로 전투를 이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생각이 많으면 그것이 중생이고, 생각을 놓아가면서 단순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하는 것도 물론 좋습니다. 해 보는데까지 해 보세요. 다만 정 못하겠다 한다면 왜 새벽만을 고집해요. 낮에 하면 되고, 저녁때도 하면 됩니다. 새벽이라는 어떤 때에 어떤 실체적인 '수행 잘 하는 때'라는 고정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이 행할 수 있는 최선을 닦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수행과의 투쟁에서 승자가 되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세요.
시어머니와 13년 동안 잘 지내다가 최근에 관계가 너무 안좋아졌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너무나 화가 나서 말도 하기 싫고 얼굴 보기도 싫으시다며 식사도 제가 출근후에 혼자서 따로 하십니다. 밥도 먹기 힘들고 잠도 잘 못자고 직장에서도 일을 하기가 힘드네요.
마음에서 문제가 완전히 풀리고 나면 현상 세계는 발맞추어 함께 따라 풀려집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마음이 투영되어 나오는 곳이기 때문에, 내 안에서 문제가 해결되면 나와 연결되어 있는 세상의 문제도 해결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들여다 보세요. 내 안에 어떤 원인이, 혹은 어떤 생각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는가! 하고.
그러나 도대체 어머님과 왜 이렇게 틀어지게 되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어쨌든 그 모든 원인은 나에게 있다고 인정하고 들어가세요.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문제거든요. 그러니 사실은 이 모든 것이 내 안의 문제고, 나 때문에 벌어진 문제라고 인정하고 참회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겨운 바깥 경계를 만나게 한 내 내면의 무언가에 대해 참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님 앞에 섰을 때 매 순간 깨어있으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져요. 그러나 어머님을 향한 참회와 자비의 마음으로 그 앞에서 깨어있게 되면 법우님의 깨어있음의 힘이 어머님의 마음을 녹일 것이고, 법우님의 마음 또한 평화롭게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어머님 때문에 일도 잘 안 잡히고, 불편한 그 마음도 잘 관찰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서 보니 '남에게서 보는 것은 내안에도 있다'는 말이 있데요. 모든 경계가 나의 과보로서 온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업의 나툼'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만, 그런 경계를 내안에도 가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잘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바깥 경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이 내 안에 비춰져서 내 안에 비춰진 바깥 경계를 우리는 인식하거든요. 그러니 사실은 바깥 경계를 인식하는게 아니라 내 안에 비춰진 경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바깥 경계는 좋거나 나쁘거나 하지 않지만 우린 그 경계를 가지고 좋다고 나쁘다고 분별하잖아요. 그 자체가 바깥 경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내면에 비춰진 바깥 경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즉 그게 바로 내 내면을 보고 있는 것이란 뜻입니다.
외부경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면의 거름망, 내면의 색안경으로 걸러 왜곡해서 받아들인다는 말을 이해하시겠지요? 남이 한 하나의 행동을 가지고, 그게 좋으니 나쁘니 판단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무엇이 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나 행동 자체는 아무런 분별도 없어요. 그래서 동일한 어떤 사람의 행위가 어떤 사람에게는 호의적으로 다가오고, 어떤 이에게는 나쁜 행위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에게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했다면 우리는 키가 작다고 욕을 하는군! 괘씸한 녀석! 너는 나보다 더 못생겨놓고! 정말 내가 그렇게 못 생겼나? 아이 짜증나! 수술을 해 볼까! 저 녀석 손좀 봐 줄까 하면서 온갖 생각, 분별, 시비, 판단 등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것을 나쁘게 받아들이겠지만, 부처님께 누가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했다면 부처님은 그저 아주 단순한 하나의 말로써 키가 작으니 작다고 했구나, 저 사람 기준(색안경)으로 내가 못생겨 보였구나 하고 아주 단순하게 받아들이고는 그것으로 끝이란 말입니다.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어때요? 어떤 경계든 우리는 그 경계가 아닌 내 안에 있는 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니 똑같은 경계를 부처님은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우리는 차별, 분별, 성냄 등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고등학생인데요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하지만 부모님께 불효인 것 같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 괴롭습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괴로워 하지 말고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세요. 출가를 꼭 해야 겠다 생각하면 하면 되는 것이고, 그래도 도저히 아직은 아니다 싶으면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직 분별이 생긴다면 그건 아직 출가할 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 고민들이 계속 일어나다가 진짜 가야될 인연이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구와 상의하지 않아도 그냥 저절로 제 발이 절로 향하게 됩니다. 아직 그 정도가 아니라면 고민하고 생각하고 분별하지 말고 그냥 주어진 삶에 완전히 최선을 다해 그 순간 순간을 100% 최선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본연으로 출가하는 길이란 걸 잊지 마십시오. 집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출가가 아니라, 집착과 욕망과 삼독에서 뛰쳐나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출가인 것입니다. 부모님께 죄가 될까봐 출가를 못 하겠다면 아직 때가 아닌 것입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면 괜히 미리부터 고민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주어진 삶을 최선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완전하게 살겠다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출가인 것입니다. 출가가 먼저고 그 다음에 깨어있음이 아니라, 깨어있음이 먼저고 그 다음에 출가가 있습니다.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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