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좋지 않다는 생각,
건강하지 못하다는 생각,
바로 그 생각이 건강을 망치는 가장 큰 주범이다.

우리의 건강은 언제나 완전하다.
물론 '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자신의 바람일 뿐,
근원에서는 충분히 건강하다.

술을 매일 마시면서
'이 술 때문에 내 몸은 망가지고 말거야'
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술' 때문에 몸이 조금 망가지고,
연이어 그 '생각' 때문에
더 많이 몸이 망가지게 될 것이다.

그 영향력은 언제나 술 그 자체보다
'술에 대한 생각'이 더 크다.

평생 술을 마시면서도
건강한 사람도 분명히 있지 않은가.

이 말은 술을 마셔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어쩔수 없이 마시더라도 가볍게 마셔야지,
술에 대한 온갖 좋지 않은
무거운 생각에 빠져 마시지 말라는 것이다.

당신의 몸을 신뢰하라.
당신은 완벽히 아름답고 건강하다.
공연한 생각으로 자신의 몸을 두 번 죽이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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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060209-184910

 

실제 수많은 민족지 조사 연구 결과
고대사회, 원시사회는 최초의 풍요사회였다.

그들 원시인들은 하루에 서너시간만 일하고도 먹고 남는,
연간 필요소비량 이상의 잉여를 생산했을 뿐만 아니라
남는 시간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문화활동을 발달시켰다.

원시사회는 생계경제가 아니라
풍요의 잉여경제였다.

그것도 잉여를 끔찍한 대규모 전쟁이나 쓰레기로 낭비하는
현대 산업문명과는 달리
잉여를 이웃 공동체와 서로 나누고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최적의 생계순환형 경제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본주의 초기의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생계경제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오늘날 한국의 대다수 노동자들과 농민들,
전세계 대다수 인민들이야말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침략 아래 생계경제에 허덕이고 있다.

[왜 자립경제인가]박승옥 중에서...

 

오늘날 TV며 언론 어디에서도
부자되기 열풍을 좀 자제하자는 논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골 골짜기에도
요 몇 년 사이에 땅값이 오른다고
부동산이 몇 배가 많아졌다는 얘기가 있다.

어디를 가든
얼마를 어디에 투자를 하면
몇 년 뒤에는 얼마로 부풀려 진다는 내용의 유혹들이 쏟아진다.

아마도 인류 역사 이래로
요즘처럼 이렇게 새벽부터 일을 시작해
밤 늦도록 아니 주말까지 반납해 가면서까지
일, 일, 일에 중독되며 살던 사회가 없지 싶다.

사회는 점점 더 발달되고,
컴퓨터도 날로 발전되며,
일을 도와주는 온갖 기계들도 넘쳐나고,
목적지까지 빠르게 이동시켜주는 운송수단도 날로 발전되고 있지만,
오히려 사람의 사회는
점점 더 빠르게 더욱 바빠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하루 일 할 것을
요즘에는 10분도 안 되어 다 끝낼 수 있는 기계가 나왔다면
나머지 하루의 시간 동안 우리는
조금 더 휴식하고 명상하며 여유를 즐겨야 하지 않겠나.

계산으로 따진다면 그게 맞는 말이겠지만,
오히려 요즘의 세상은
사람의 일을 훨씬 빠르게 단축시켜주는 기계가 나오면 나올수록
사람들은 훨씬 더 바빠지고, 일도 훨씬 더 많아지고 있다.
그야말로 기형적인 경제구조다.

옛날에는
하루에 서너시간만 일하고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었고,
때문에 남은 시간 동안
여가활동, 문화생활, 정신적 휴식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차도 없고, 기계도 없고, 컴퓨터도 없었는데,
그래서 오직 사람의 힘으로 밭도 갈고, 땅도 파고,
물도 나르고, 씨앗도 뿌리고, 거두고
이 모든 것을 사람의 두 손, 두 발로 다 해야 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옛날에는
서너시간 일 함으로써 충분히 자급할 수 있었다는 말이
언뜻 보아서는 억지같고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욕심이 많지도 않았고,
처리해야 할 일들이
지금처럼 산더미 처럼 쌓여 있지도 않았다.

지금 대도시 괴물같은 도시를 움직이는
수많은 온갖 종류의 직업들이
그 때는 있지 않았다.

지금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누리고 있지만,
그 소유를 벌어들이기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하고, 더 많이 정신을 놓고 살아야 하며,
그야말로 정신없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일이 생겨났다.

생존을 위한 거의 전쟁과도 같은 수준의
복잡 다단한 삶을 살아내야 한다.

핸리 데이빗 소로우는 말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부(富)라고 하는 것,
다시 말해 전에 소유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는 것만큼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다른 사람들의 부와 비교할 때 나의 부란 기껏해야
아직도 여전히 대수롭지 않은 것이지만
부자가 되면 될 수록
불가피하게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생계 습관을 지니게 되어,
몇몇 필수품과 편리한 생활도구 장만에 전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이게 된다."

그렇다.
우리가 돈이 많아지고, 부자가 되면서,
우리 집에는 그 돈으로 사 나른
온갖 생활용품들이 넘쳐나고 있다.

아마도 우리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부유함을 얻게 된다면
우리에게 달라지는 것은
더 많은 비싼 생필품과 생활도구를 사 들이는 것일 것이며,
더 비싼 옷을 사고, 더 좋은 메이커의 구두를 사고,
더 좋은 식당에서 더 많이 가공된 비싼 음식을 먹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면서 생활수준이 더 높아졌다고 행복해하겠지.

어쩌면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갈 수도 있고,
더 좋은 차를 사서 몰고 다닐 수도 있겠고,
노후를 위한 자금을 많이 만들어 놓거나,
땅을 사고, 아파트 몇 채를 사 놓을 수도 있겠고,
또 사업을 더욱 확장하여 새로운 사업에 손을 댈 수도 있을 것이다.

와~ 그러면 얼만 행복하겠나.
그렇게 부자가 되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

그런데 그런게 어쨌단 말인가.
그래서 그렇게 행복한가.

조금 가난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비싼 신발, 비싼 옷은 못 입겠지만,
때때로 시장에 나가 돈 만원 하는 신발과 옷가지들을
사 입을 수도 있고,
그걸 빨아서 입고, 기워서 입고, 고쳐서 입으면서
그 옷이 가져다 주는 고마움도 알 수 있고,
또 필요하다고 다 사지 않고 아끼고 아껴서
정말 필요하다 싶을 때 어렵게 구입 해 입었을 때 오는
그 짠한 행복감까지 덤으로 얻을 수 있다.

부자들에게 옷을 사 입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지 모르겠지만,
가난한이에게 옷을 사 입는 일은
아주 행복한 일이고, 설레는 일이 될 것이다.

부자들은 먹고 싶은 게 있을 때 마다
외식도 자주 하고, 배달 시켜 먹기도 쉽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경치 좋은 식당이나 카페가 있으면
돈 걱정 없이 사 먹기도 쉬울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돈 걱정 없이 먹고 싶은 것 다 먹을 수 있으니까.

부자들이 그러는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은
재래시장에 나아가 백원 이백원 주고
파도 사고, 양파도 사고, 감자도 몇 개 사고,
돈 만원만 가지고도 비닐봉지 한 보따리 장을 봐 와 가지고는
어머님의 따뜻한 손길로 따뜻한 마음까지 음식에 담아
소박하지만 맛깔스런 음식을
아들을 위해, 남편을 위해 차려 줄 것이다.

때때로 외식도 하겠지만,
돈 때문이라도 잦은 외식은 할 수 없겠지.
어쩌다가 아이들이 먹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 때 그 때 휙 사 주는 것이 아니라,
아빠 월급날 되면 그 때 함께 기념으로 외식을 하거나,
또 조금 더 유머와 지혜가 있는 부모님이라면
좋은 책을 한 권 도서관에서 빌려주고는
이 책을 다 읽고 함께 느낌을 나누고 나면
그 기념으로 외식을 시켜주겠노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전자의 경우보다는
후자의 경우에 더욱 음식에도 정성이 더하고,
몸 건강에도 훨씬 좋을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나, 지혜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더욱
삶을 진지하고 독립적이며 직접적으로 살아나가는 것이 아닐까.

차가 꼭 필요하면 차를 사면 되는데,
굳이 몇 천 cc 이상 가는 몇 천만원 이상 가는
기름도 많이 먹고 고장나면 부품값도 비싸고
외양만 크고 번드르르한 그런 차가 왜 필요한걸까.

가만 마음을 지켜보면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안의 '욕망'이 하는 일이다.
부자가 되기 보다는
조금 더 가난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더욱 행복해지고, 자유로와질 수 있다.

소로우의 말처럼
더 많은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오히려 사람을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부자가 될수록
불가피하게 비용이 더 많이 드는 생활습관을 가지게 되기 쉽고,
그랬을 때 우리의 정신은 피폐해지고 만다.

인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가난의 정신이며,
일이 아니라
마음의 휴식이다.

돈을 벌어야 할 것 같고,
그러려면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그 생각이야말로 우리를 얼마나 얽어매고 있는가.

물론 사회가 전체적으로 그러하다 보니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완전히 일도 버리고, 돈도 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일을 하면서도
우리 마음 속에서는
언제든 가난하게 내적으로 휴식하면서
소박하고 진지한 삶을 살 수도 있다는
그런 용기와 지혜가 있기만 하다면
지금 이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집착하거나
중독되거나, 그 일로 인해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려면 먼저 집착이 없어야 하고,
가난과 청빈의 정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도 옛날 원시시대 사람들이 누려왔던
그런 풍요사회, 잉여경제의  삶을 왜 살지 못하겠는가.

본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풍요롭고 행복한 것이다.
다만 우리가 더 얻고자 하니까,
더 벌어야 하고, 더 집착하고자 하니까 괴로워 진 것일 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더 벌려고, 더 소유하려고,
더 집착하고, 더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가.

지혜가 부족해서다.
만족과 나눔과 가난과 비움의 정신이 부족해서다.

삶에 대한 지혜가 생겨나면
저절로 실천과 용기는 뒤따를 것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지혜가 참된 지혜가 아직은 못 되기 때문에,
참된 앎이 못 되기 때문에,
'아마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정도에 머무니까
아직은 도저히 버리지 못하겠는 것일 뿐이다.

일단 버리고 나면
자유롭다.

마음에서는 버리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버리지 않아도 좋다.
그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 내는 도리이니까.

옛날에 아무것도 없었던 원시인들도
저 깊은 행복과 평화를 느끼고 살았는데,
이토록 많은 것을 소유한 우리들이
여전히 부족하고 괴로울 이유가 무엇인가.

비우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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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가을 날씨가 계속되네요.


하늘은 더없이 푸르르고
들녘의 벼는 노오랗게 익어가는 달콤한 오후입니다.


아직 햇살은 따갑지만
그늘로 들어오면 시원한 가을 바람이
온몸을 씻어주는 듯 합니다.


나갔다 들어오는 길에
누런 논과 파아란 하늘 그리고 멀리 바다색까지
너무나 감격스러운 풍경에 흠뻑 빠져들어 봅니다.


지금 이 순간,
더 무엇이 필요하겠어요.
그저 행복하고 자유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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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 푸른 자연, 깨끗한 물을 원치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히말라야의 감동스런 풍경과 세계 도처에 존재하는 자연의 천진함과

무한함을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지켜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이 엄청난 파괴의 일에

모두가 동참하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이 모든 모순을 깨고 나부터 이 지구 행성을 살리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아주 작은 곳에서부터 시작할지라도 그 작은 것이 우주 전체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윽하고도 강력한 공명의 힘을 가지고 주위로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 불편함을 감수하고 오히려 불편함이 주는 이익과

즐거움을 누리는 차원으로까지 되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지구 환경을 지키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될 수 있다면 차로 갈 것을 걷거나 자전거를 탈 수도 있고,

에어컨 대신 선풍기나 부채를 들 수도 있으며,

물론 더 작게는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데서 출발해도 좋다.

온풍기나 보일러를 줄이는 대신 내복을 끼어 입을 수도 있고,

빨래를 너무 자주하지 않고, 비누 없이 세수를 해 볼 수도 있으며,

구멍 난 양말을 기워 신을 수도 있다.

이런 작은 '불편의 즐거움' 속에 지구를 살리는

엄첨난 계획이 담길 수 있는 것이다.

 

나만 환경을 살린다고 되겠느냐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가 시작할 때 그 겉모습은 작고 소박할지언정

그 힘은 무한한 공명과 울림을 싣고 전 우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순수 지혜의 실천의 힘은

곧 우주 전체의 힘과 연결되고, 전파되며,

강력한 동력의 단초가 된다.

내가 시작하는 것이 곧 우주가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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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갖 기상이변들이 전 세계적으로 속출하고 있다. 이건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가히 재앙적 수준이다. 그리고 이런 이변과 재앙은 앞으로도 더욱 빠른 속도로 더욱 거대한 크기로 계속해서 우리를 위협할 것이다. 어쩌면 이 지구라는 별이 지금까지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이 엄청난 경고를 그다지 깊이 느끼지 못하는 듯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발과 발전에 목숨을 걸고 있다. 자연을 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시키며 그 대신 돈과 욕심을 채우는 쪽에 완전히 인생을 걸었다. 어떤 사람은 그렇고 또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마도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살고 싶어 하며, 또 우리 아이들은 그렇게 살도록 교육받고 있다. 

  가히 세상이 완전히 미쳐가고 있다는 말이 맞지 싶다. 정치인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지도자로 있을 때 보다 완전히 또 폭넓게 자연을 훼손시켜 개발시킬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고, 또 국민들 또한 얼마나 많이 개발시키고 발전시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을 평가하고 있다. 경제인들은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자연을 파괴시켜 자연 속에서 인간이 필요한 것만을 쏙쏙 뽑아냄으로써 얼마나 많은 돈을 벌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제3세계 국가들은 조금씩 조금씩 개발과 발전으로 인해 국토가 파괴되는 현장을 지켜보며, 이제 비로소 서구사회를 조금씩이나마 따라가고 있다고 행복해하고 있다. 소위 선진국에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 자연은 가만히 놔두고 저 못 사는 나라 자연과 환경을 오염시키고 파괴시킬 것인가만 생각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우리나라가 불과 2~30년 만에 자동차 왕국으로 바뀌었는데, 13억 중국인과 11억 인도인들이 앞으로 2~30년 후에 너도나도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그 큰 땅에 산과 숲을 밀어버리고 빌딩숲으로 주차장으로 만든다고 상상해보라. 어디 인도, 중국 뿐인가. 전 세계가 그나마 숲이 남아있고, 생명의 정신이 남아있는 수많은 나라들 덕분에 살고 있는데 그마저도 몇 십년 안에 다 파괴되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소름이 끼친다. 

  우리나라만 해도 벌써 소나무 제선충이 큰 문제가 되고 있는데, 가만 생각해보라, 이 한반도에 백두대간에 소나무 한 그루 남아있지 않다면 그건 더 이상 우리가 살 터전이 아니다.

  모르긴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까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려 할 것이고, 지구가 아닌 달나라에도 개발과 오염, 공해라는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산들은 아무 잘못도 없이 눈물을 흘릴 것이며, 모든 숲들은 시름시름 앓게 될 것이다. 물론 뒤늦게 그 눈물과 시름은 인간에게 고스란히 전파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다 멸망하고 지구의 아름다움이 남아있지 않은 그 때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그럼에도 여전히 방관자로 지켜보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 여전히 나서서 자연을 파괴하고, 이 어머니 대지를 죽이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인가. 이제 그야말로 정신을 차릴 때다. 대자연의 생명이 곧 나의 생명이라는 가르침을 입으로만 떠들어 댈 때가 아니다. 이 아름다운 땅 지구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사사로운 욕심 충족이 다 무엇이란 말인가. 지구에 풀과 나무와 숲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우리의 생명의 끈도 끊어지고 만다.

  나 한 사람이 자각하고 생명 살림을 시작한다고 세계를 살려낼 수 있겠는가 하고 미리부터 포기할 것인가. 나 한 사람의 깨어남은 이 우주의 깨어남이고, 나 한 사람의 시작은 곧 법계를 감동시킬 것이다. 우리 모두가 내 앞의 작은 생명 하나를 살릴 때 이 지구는 다시 꽃피어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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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벼 베기가 한창일 무렵 경기도 가평의 한 공동체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일은 두고 두고 내 가슴을 짠하게 만들었다. 마을이라고 해 봐야 한 20여 명의 젊은 사람들이 소박하게 모여 살면서 함께 농사를 짓고 함께 마음을 나누고 먹을거리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는 아직은 거의 초보 단계의 공동체마을이다.

 

마을의 주민 대부분이 주로 20, 30대의 젊은 사람들이라는 점이 다른 여느 마을과는 다른 점이다. 그러다 보니 아직은 농사일도 많이 서툴고 농사로 밥벌이를 하고 자급자족을 이어가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한 점이 있다. 그래도 이 마을 젊은이들은 완전한 자급자족을 꿈꾸고 있다. 스스로 자식들 교육까지도 시키려고 대안학교도 준비하고 있고 앞으로의 삶에 대해 활기찬 꿈과 희망으로 이 마을은 얼마나 생기가 넘쳐흐르는지 모른다.

 

물론 어려운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예전에 해 보지 않던 농사를 짓고 또 그 농사일로 버는 돈이 생계유지를 위한 경제수단의 전부이다 보니 남들이 보기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또 사실 아직은 경제적으로 조금 힘에 겹다.

 

그러나 이들은 힘주어 말한다. 경제적으로 예전 보다 많이 어려워 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이들의 자연과 함께 하고 농사와 함께하는 그 여유와 즐거움을 빼앗을 만큼은 아니라고,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욕심을 줄이면 되는 문제라고 자신있게 말하면서 밥 세 끼 먹고, 밭에 나가 일하고, 막걸리 한 잔 하며, 함께 모여 즐겁게 살 수 있는데 더 이상 욕심 부릴 게 뭐가 있겠냐고 오히려 반문한다.

예전에 서울에서 직장 다니면서 매일 스트레스 받고, 자동차 공해며 매연에 시달리고,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고생하고, 온갖 소음과 과로에 시달리던 것 생각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기있게 말한다.

 

 

이런 이 마을에도 빈부의 격차는 존재한다. 마을의 가장 큰 부자가 한 분 있는데 그 분은 부자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스스로 종종 술도 사고, 밥도 사고, 필요하면 돈도 빌려주고 그런다고 한다.

 

어느 정도 부자인고 하니, 사무국장의 일을 맡아 하고 있는 분인데 물론 그 일은 돌아가면서 맡는 것이지만 그 일을 맡아 할 때는 한 달에 50만원씩 월급이 나온다고 하는데 그 돈 때문에 이 마을 제일가는 부자가 된 것이다.

 

그 50만원이면 이 마을에서는 정말이지 부유한 생활, 아니 조금은 사치한 생활까지 영위할 수 있다고 한다. 요즈음 같은 이러한 삭막한 세상에 월 50만원의 월급으로 부자가 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이 마을 사람들은 참 행복이 어떤 것인지 소욕지족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인 듯 보인다. 작은 것으로 만족할 수 있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더할 수 없는 행복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월급 100만원, 200만원, 아니 그 이상을 받으면서도 얼마나 경제적인 생활고에 찌들어 살고 있는가. 또한 이웃과 비교하면서 우리집은 가난하다고 열등에 빠져 있지는 않았는가. 문제는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만족하고 사느냐에 있다. 내 행복의 지수는 그대로 내 만족의 지수이지 소유의 지수가 아니다. 소유를 줄이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야 말로 더없는 행복의 비결이다.

 

어떤가. 아직도 삶이 가난한가. 최소한의 의식주를 갖추었는데도 여전히 가난하다고 느낀다면 그 가난은 물질의 가난이 아닌 마음의 가난이다. 마음이 부유하다면 설사 땅바닥에 누워 자더라도 풍족하지만 마음이 가난하면 온 천하를 손 안에 넣었더라도 궁핍을 면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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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밝은도량에는
온갖 나무와 야생화들
그리고 산나물과 약초들
하늘거리는 바람소리
바람에 낙엽 서걱이는 소리까지
가만히 앉아 느껴보면
온갖 대자연의 소리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새소리가 얼마나 경쾌하게 들리는지 몰라요.
내가 가만히 들어 본 새소리만 해도
한 10가지는 족히 넘을 것 같습니다.
그 울음소리들도 얼마나 신기하고 독특한지...

또 작년 가을까지 도량 주위에서 놀던
꿩 가족들도 겨우내 자취를 감추었는데
여름이 되면서 다시 도량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어디로 다녀 온 건지,
아니면 겨울잠을 자고 온 건지는 몰라도
얼마나 반가운지 모릅니다.

좀 야속한 건
이녀석들이 예뻐서 다가가는데
조금만 인기척이 들리면 냅다 꼬리를 빼고
도망쳐 버리는 것이 몹시 서운해요.

요즘에는
이제 본격적인 여름꽃들 나물들 산야초들이
한창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고마리, 며느리배꼽, 닭의장풀
괭이밥, 수영, 소리쟁이,엉겅퀴, 며느리배꼽, 메꽃,
망초꽃, 고들빼기꽃, 원추리꽃, 괭이밥꽃, 씀바귀꽃,
수영, 소리쟁이, 별꽃, 돌나물꽃, 뱀딸기열매,

다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고
이렇게 내가 알 수 있는 것들 외에도
아직까지 그 이름도 쓰임도 알 수 없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관심을 가지고 산야초들
산나물이며 약초 꽃들을 바라보고 공부하다 보면
정말 한도 끝도 없기도 하고
그 신비로움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즘 한참 농사지은 것을 수확하고 있는데
법당에서 지은 농사는
거의 수확이랄 게 없을 정도입니다.

산 중턱인데다
낙엽 떨어져 썩은 부엽토가 충분하지 않을까 싶어
그냥 조금 개간해 씨만 뿌렸더니
이 녀석들이 처음에 조금 고개를 내미는가 싶더니
기운이 달리는지 영 올라오지를 못하데요.

정말이지 혹독하게 실패를 맛보고 있는 중입니다.
저 아래 마을 내려가면
누가 지은 농사고 할 거 없이
모두 다 잘 크고 싱싱한 채소들이 푸르른데
법당만 영 기척조차 없으니
신도님들께서 비료 조금만 뿌리자는 말이
왜 그리 혹하게 만들던지요.

내가 농사지어 팔아먹을 거였다면
아마도 당연히 비료를 주고 말았을 겁니다.

안 되겠다 싶어
인근 나무아래에서 부엽토를 긁어다가
한 몇 일 깔아주고,

인근 마을에 인심좋은 모종파는 할머님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조언을 구했더니
좋은 거름을 한 포대 주셔서
그놈을 조금 섞어 뿌려주고는
씨앗을 다시 뿌려 보았습니다.

좀 늦는 감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조금 힘을 쓰고 올라오는 듯도 해요.

또 감자 심은 것들도
나무들 사이에 햇빛 조금씩 비치는 곳에 심었다보니
이녀석들이 햇빛 서로 받으려고 위로만 자꾸 크다가 넘어져요.
아무리 북주기를 해 줘도 고개를 떨구데요.

게다가 거름도 얼마 없다보니
줄기가 굵지는 못하고 위로만 크니
감자 농사도 영 시원치 못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겁니다.
그나마 조금씩 큰 것들도 있거든요.
저 아래 땅콩도 몇 개 안 되지만 잘 살고 있고,
상추도 거름 하나 없어서 하나도 안 크나보다 했더니
아래 모종한 상추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커서 요즘 먹고 있습니다.

전에 강원도 영월에서 이모님댁 모종을 몇 개 얻어 온
배추도 처음에는 영 안 클것 같더니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크고 있습니다.

콩 심은 곳은
법당 있는 쪽에서 조금 먼 곳이라
아예 물도 주지 않고 심기만 했었어요.
물론 처음 심을 때는 그 날 저녁 비 오는 날을 택했지요.

그래도 올해에는 꼬박꼬박
비가 제 때 내려 주어서
아직까지는 콩도 제법 올라오고 있습니다.
물론 콩이 아직 달리지는 않았으니
좀 더 지켜봐야 겠지만요.

또 법당에서 한 100미터 떨어진 곳에
고추, 가지, 오이, 토마토, 방울토마토, 참외, 호박
심어 둔 곳에도 거름이 덜 하다 보니
그리 크고 실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더디게 크고는 있어요.

물론 모종 두세개가 이유없이 죽기는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요.
죽은 곳 주변에 개미가 많은 곳도 있고,
칡뿌리가 방해하는 곳도 있어서
그런 것이 이유일 수 있겠다 추측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내 농사는
모든 면에서 너무 게으르고
일반 상식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우리 신도님들이 성격이 좋아 말씀은 안 하셔도
속으로는 안타까운 마음 한창일겁니다.

아직 많이 모르지만
그래도 전 좀 더 연구해 볼까 합니다.
자연 그대로의 힘으로
농사도 자연이 지어줄 수 있도록 말입니다.

자연과 하나되는 농사법.

내가 뿌린 채소씨가 잘 안 크잖아요.
그런데 그 곁에서 잡초들은 정말 잘 자라고 있거든요.
잡초들은 거름 없어도 잘 자라고
비료 뿌려주지 않아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거름이 없어서가 아니고,
비료를 뿌리지 않아서가 아닌것 같습니다.
씨앗에 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전 생각해 봅니다.

씨앗을 그동안 너무 약하게 키웠던 거지요.
사람의 힘으로 돌보고 비료도 주고, 잡초도 뿌려주고 해서
끊임없이 스스로 클 수 있는 야생의, 자생의 힘을
사람들이 없애버리지 않았나 싶은 생각입니다.

요즘 나오는 무슨 종묘상에서 파는 씨앗들이
거의 그렇게 너무 약합니다.

자연의 것들은
따로 물 주지 않아도
하늘에서 내리는 물만 가지고도 잘 자라고,
거름이나 비료 주지 않아도
흙에 있는 것 만으로도 잘 자라고,
제초제나 농약 뿌리지 않아도
스스로 커가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뿌리는 씨앗만 안 그렇다면
그 이유는 사람들이 뿌리는 씨앗이 너무 약하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야생스럽지 않은
온실에서 조심스레 큰 여리디 여린 씨앗을
제 마음이나 신념만 가지고
야생의 잡초들과 경쟁을 시키다 보니
당연히 경쟁에서 지는 것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요즘 또 하나의 관찰이
어느정도 경쟁에서 지고 또 어느정도 이기는가
그것도 주 관심사 중에 하납니다.

아래 모종 심은 상추나 배추도
처음에는 시들시들하여 다 죽은 듯도 하고
영 거름이 없어 죽어가는 듯 하더니
그래도 크게는 아니지만 조금식 다시 되살아납니다.

상추는 힘없이 그래도
다른 야생초들과 어렵게 겨루고 있어서 대견합니다.

상추 심은 곳에 피어났던
민들레 두 송이를 그대로 놓아두었었습니다.
민들레 잎이 크게 자라면 상추잎만큼 자랍니다.
그리고 그 영양가도 못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은 오히려 상추보다
그 곁에서 더 힘있게 자라나는 민들레 잎을
뜯어다가 상추처럼 쌈 싸 먹고 있어요.
그런데 이 두 녀석만 봐도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상추는 힘겹게 커가고 있고
그 속도도 한참을 더디게 크는 반면에,
민들레는 그야말로 쑥쑥 커가고 있습니다.
똑같은 땅 똑같은 조건에서 이렇게 큰 차이가 나요.

요즘 같아서는
정말이지 농사지으려고 씨 뿌릴 것 없겠다 싶어요.
이렇게 민들레처럼 그냥 야생의 것들을
따먹을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아요.
아니 너무 많은 게 아니라
따 먹지 못하는 것이 거의 없다는 말이 더 맞을 정돕니다.

앞에서 조금 언급했지만
요즘 밥상에 오르는 것들만 해도
고마리, 며느리배꼽, 닭의장풀
괭이밥, 수영, 토끼풀, 소리쟁이,엉겅퀴, 며느리배꼽 등이 있어요.
여린 것은 먹을 수 있고
조금 크거나 꽃이 피면 못 먹는다는 것도
알고보면 못 먹는다는 게 아니고
좀 억새서 먹기 힘들다는 말이거든요.
다 먹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좀 게으르게 하고,
내 노력 좀 덜 들이면서
자연의 노력을 흠뻑 받을 수 있도록
대자연의 온전한 흐름에
턱 내맡기면서 자랄 수 있도록
참된 부처님의 농사가 꼭 있을 것입니다.

그런 농사를
발견했으면 하고
모든 이들이
그런 대자연의 부처님 농법으로
농사 지을 날이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완전 초보 농사꾼이
너무 말만 앞서는거 아닌지 부끄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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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마리]

요즈음은
내가 살고 있는 이 밝은도량 주위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나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 도량에
또다른 사랑이
마음 속에서 싹튼다.

봄이 오고
산에 도량에 꽃이 피니
그야말로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이래서 봄이란
사람들 마음을 생기롭게 움트게 하는 계절.

연한 초록의 산빛이
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냥... 어찌 할 수 없게 만든다.

정말이지
하루가 다르게 변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온갖 꽃들이
앞다투어 핀다는 말도 그냥 가슴에 팍팍 와 닿는다.

수많은 야생화들하고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들
그리고 새순이며 약초들 봄나물들이
얼마나 화알짝 신명나게 피어있는지
하루 종일 거닐며 바라만 보아도 도무지 질리지 않는다.

더구나
봄이 되고 보니
더욱 이 산의 멋스러움과 소중함이 더하다.

얼핏 보면
그냥 얕은 산이고
멋 없는 산일지 모르지만
이 산엔 그야말로 없는 것 없이 다 있다고 하면
조금 과정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러주고 싶을 정도.

온갖 작고 앙증맞은 야생화가
군락을 지어 피어오른 곳이 곳곳이고,
-이름을 명확하게 다 모르는 것이 너무 애석-

또한 작고 앙증맞은
우리꽃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꽃들로
주름잎, 꽃마리, 냉이꽃, 꽃다지, 민들레,
제비꽃, 하얀 각시제비꽃, 양지꽃,
뱀딸기꽃, 별꽃, 산괴불주머니...
등이 피어있고,

나무도 주로
참나무, 밤나무, 자작나무, 오동나무 정도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곳곳에 예쁜 꽃들을 피워내는
이름모를 나무들이 봄 연출에 한창이고,

봄 밥상을 풍성하게 해 주는
두릅나무 새순도 막 올라와 있고,
고사리도 막 올라오고 있으며,
참나물 원추리 돋나물 민들레 제비꽃 꼭두서니 쑥 고들빼기도
봄나물로 무쳐 먹으니 입맛이 돈다.

민들레나 고들빼기는
쓴 봄나물의 명성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는 듯
야생의 그것이라 그런지
시장에서 파는 재배된 봄나물에 비해
써도 너무 쓰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이란 계절에
너무 더워 수분이 많은
수박이나 참외 같은 것이 많이 나오듯,
봄에는
춘곤증 같은데 좋은
쓴 나물 들이 많이 나온다고,
봄에 쓴 나물들은
법계에서 내려 준 선물이라고 하더니 정말 그런가.

요즘 재배되는 나물이며 채소들은
그야말로 온실에서 고이 자라다 보니
모든 채소들이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맛이고,
거의가 연하고 질기지를 못하며,
저마다 특유의 쓴맛이라던가 특유의 향들이
많이 사라져 버렸다.

똑같은 비료주고, 똑같은 거름주고
늘 똑같은 땅에서 키워지니
맛도 다 똑같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온실이나 검은비닐 같은 것으로
경쟁할 수 있는 다른 풀들이 아주 자라지 못하게 막아 놓고,
심지어 재초제로 채소외의 다른 것들은 다 죽게 해 버리니
경쟁할 수 없어 생명력이 약화되고
연하고 당장 입에는 질기지 않고 달지 모르겠지만
그 내적인 생명력은 그냥 작살이 나고 마는 것이다.

사람도 저마다 특유의 삶이 있고, 향기가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만이 가지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자신의 삶을 살아갈 때
그는 그 자신의 모습으로써
부처님의 성품을 확연하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특이하게 보일 것은 없겠으나,
요즘같이 교육도 똑같이 시키고
똑같은 것들만 똑같이 머릿속에 주입을 시키고
똑같은 옷에, 똑같은 먹을거리에, 똑같은 주거환경이며
똑같은 TV를 보고, 책을 읽으며, 삶의 학습을 받아오고,
돈, 명예, 권력, 학벌, 등 똑같은 삶의 욕망을 삶의 제일가치로 알고
똑같은 삶의 방식을 따르다 보니
저마다의 색깔이 없어지고
'자기자신'의 모습으로 나툰
자신만의 화신불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가장 나답게 살 때
그것이 가장 진리답게 사는 것이고,
부처님의 성품을 드러내며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자연도 그러하지만
애석하게도 요즘의 대자연은 인위적인 힘으로 인해
자기자신의 삶의 모습을 훼손당하고 있어 안타깝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도량 주위에 돋아난 봄나물들만 캐어 먹어도
어지간한 채소는 농사지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지천으로 먹을 것이 널려있으니 말이다.

모를 때는 그냥 다 잡초라고 치부해 버리고 지나치지만
조금만 알고 나면 봄들녁의 새싹들은
그야말로 다 먹을거리가 된다는 것이 신비로울 정도다.
무슨 무슨 대형 마트에 가서 에어콘 바람 쐬가며 쇼핑도 하고
카트를 끌고다니며 채소를 고르는 것 보다
조금 덥더라도 차라리 산으로 들로 호미 하나 들고 뛰어들어
자기 자신의 무한한 생명력을 드러내는 것은 어떨지.

사실 올바른 농사란 그런 것이 아닐까.
사람의 노력을 들여
심고 물주고 뿌리고 가꾸고
나아가 농약주고 풀 뽑아주고 비료에 재초까지 해야 하는
고된 노동을 생각했을 때,
또 반환경적이고 반생태적인 현재의 농사법을 생각했을 때,

그저 대자연에서
제 스스로 씨앗 뿌리고 가꾸고 만들어 내는
그런 것들이야말로 가장 온전한 먹거리일 것이고,
그렇게 있는 그대로의 것을 필요한 만큼 가져다 먹는 것이야말로
가장 온전하고 깨어있는 농사고 농부의 일이 아닐까.

그랬을 때
인간의 노력과 욕심, 또 반환경적인 어리석음을 투여해서 일구어낸 먹거리 보다
더 생명력이 강할 것이고,
더 온전한 영양이 깃든 먹거리가 될 것이며
온전한 삶과 건강의 토대가 되어 줄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법계에서 내려 준 선물이고,
부처님의 음식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산은,
대자연은
가만히 두어도
날마다 비옥해 지지 않나.

물주고 가꾸고 비료주고
농약이며 재초재 비료 뿌려주고
갈아주고 잡초 뽑아주고 북주고
그러기 위해 온갖 것들을 돈들여 사야하고
노동력을 탕진해야 하며
많이 수확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뭐 그런 것 하나도 하지 않더라도
산은 항상 비옥하며
항상 그 자리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숲을 가꾸고
모든 생명들을 품어내고 있다.

그것이
참된 법계의 모습이고, 진리의 모습인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
우리 사람들도 자연을 가까이 할수록
진리와 가까워지고
행복해지며
평화로움이 내면에 깃드는 것이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다.

자연을 닮아가는 것이
법신 부처님을 닮아가는 것.

봄 따스한 햇살에
앞다투어 하루가 다르게 피어나는 봄의 생명을 보며
내 안의 생명도 한없이 피어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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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벌써 아랫지방에서는
씨앗을 뿌리고 있을 것 같다.
한 2-3주만 지나면 이 곳에서도
씨앗을 뿌리고 한 해의 농사일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지난 가을부터 겨우내 조금 조금씩
일구어 놓은 도무지 밭 같지 않은 야생의 밭이
이제 새봄을 기다리고
새로운 생명의 움틈을 기다리고 있다.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에
하루에도 몇 번이고 밭을 찾는다.
물론 말이 밭이고, 내 생각에서나 밭이지
다른 사람들은 아마 아무도 그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것이다.
남들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그냥 야생의 땅일 뿐일테니까.

칡이 크고 작은 나무들을 타고 올라가서
오랜 세월 그 아래 나무들을 다 죽여 놓았고
작년 처음 이 도량에 왔을 때는
이미 칡들의 세상이 되어 있던 곳이니까.
나 또한 그 때는 이 곳을 밭으로 쓸 생각을
도무지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저 내가 겨우내 행한 일이라고는
칡 줄기들을 좀 잘라내주고
그 아래에서 햇볕한 번 못 보고 그냥 죽어버린
툭 치면 뿌리쪽 줄기가 그냥 픽 쓰러지는
썩은 나무들을 치워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아래 땅은 참 기름지고 푹신푹신하다.
모르긴 해도 이 곳에 씨앗을 뿌리고
온갖 채소며 먹을거리를 심고 나면
아무런 거름 없이도 충분히 잘 자랄 것 같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솟아오를 칡넝굴이며
온갖 야생의 풀들을 어느정도 뽑아줘야 하는 힘은 들겠지만.
그런데 풀을 뽑는 일도 될 수 있다면
너무 고생스레 하지 않을 생각이다.

풀도 제 생명이 있는데
함께 살아야 하고 공생해야지
채소도 함께 경쟁하며 건강해 질 테니까.

너무 키가 자라 채소를 완전히 덮을 정도거나
채소가 햇볕을 못 받을 정도까지 그냥 놔두면 안되겠지만
어느정도는 함께 살아가도록 해 둘 참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잡초에게 양분을 다 빼앗겨서
채소는 잘 자라지 않는다고 할 사람이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욕심부려 밭을 일굴 생각은 아니니까 괜찮다.

사실은 하나의 연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니 연구라고 하기 보다는 관찰을 하고 있다.
자연에 대한 관찰
또 농사짓는 일에 대한 관찰
식물과 생물 그리고 대자연의 모든 생명에 대한 관찰
그러한 관찰을 통해
어떻게 하면 좀 더 법신 부처님의 숨결인
대자연에 가까이 다가가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자연을 헤치지 않으면서도 우리 인간이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부분에 대해서 작은 관찰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지금 전지구적으로 현행되고 있는 농사라는 것은
이미 농사로써의 의미를 잃었다고 본다.
농사는 생명을 가꾸는 일이고,
참된 삶의 본질로 다가서는 일이며,
우리의 본래자리로 되돌아가는 숭고한 수행의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농사라는 것은
생명을 죽이고, 자연을 파괴하며,
더불어 인간의 몸과 마음까지도 함께 파괴하고 있고,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은 양을 생산해 내야 하는
인간 욕심의 극도한 결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현대 농사의 문제는 너무나도 많다 보니
다 열거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우리가 꼭 알고 넘어가야 하는 점이 몇 가지 있다.

물론 이 말은 농사 뿐 아니라
현대인들의 개발논리며 경제논리,
산업화 과학화 기계화 정보화 등등을 비롯하여
현대인들의 의식주에 관련된 그 모든 삶의 실상에 대한
전반적이고, 거시적인 문제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은 농사문제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지금의 나와는 너무 동떨어진 문제라고 생각하겠지만
오히려 이것은 나와 너무나도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올바로 온전히 알게 되면
내 삶이 조화롭고 평화롭게 변화할 것이고,
내 주위의 대자연과의 영적인 내밀한 교감을 나눌 수 있게 되며,
내 몸과 마음도 자연의 그것처럼이나 진리와 하나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첫째는 지금 우리가 행하고 있는 농사나
의식주의 생활을 비롯한 모든 경제활동들이
자연환경의 엄청난 파괴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사회가 발전을 하고, 개발을 하고,
도시화 과학화 기계화 세계화 등의 모토에서 빚어진
엄청난 개발이념들과
그러한 개발로 인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편리함들은
그 이면에 우리 삶의 터전이자 우리 생명의 터전이고
모든 생명의 근원자리인 불성이자 법신인
대자연의 파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개발로 인해 편리를 누리는 만큼
대자연은 파괴로 인해 죽어가고 있다.

우리가 보다 많은 먹거리를 생산해 내려고,
또 보다 적은 노동력을 소비하기 위해
농약이며 비료 제초제를 뿌리고 있을 때,
우리 생명의 터전인 땅은 몸살을 앓고 있다.

인간의 욕심은
그대로 자연을 죽이고 있으며
자연이 죽게 되면
머지 않아 우리 인간 또한 함께 죽고 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간들은
그 욕심의 달콤한 유혹에서 도무지 벗어나려고 하지를 않는다.

도시를 만들어 빌딩을 세우고,
온갖 편리한 시설물들이 늘어갈 때,
이 지구상의 또다른 곳에서는
산이 파헤쳐지고, 나무가 잘려나가고
이 산하대지 법계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리를 희생양으로
대자연은 모조리 몰살될 위기에 처해있다.
그리고 그 위기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의 위기인 것이다.

요즘 들어 사회적으로 환경 환경 하는 말이 유명해진 이유도
바로 이러한 자각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환경을 파괴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파괴하는 일이라는 것을 어리석은 이들은 여전히 모르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벌써 2,500여 년 전부터
온 우주 법계의 모든 존재들이
인간에서부터 하찮은 미물이며 식물 동물 할 것 없이
모두가 동등한 불성을 지니고 있고
모두가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였음을 외치고 계셨지만,
아직까지도 그 외침은 철저히 현대인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다.

이러한 요즘의 농사나 요즘의 개발 논리는
불을 보듯 뻔한 결과를 준비하고 있다.
분명 이렇게 나가다가는
개발로 인해 이 지구가 완전히 폐허가 될 것은 뻔하다.

자연의 파괴에 기초한 인간의 편리와 행복은
언제까지도 유지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흡사
대자연 법신이신 부처님을 죽여
내가 편리하게 살아보겠다고 하는 생각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한 재앙은 벌써 눈에 보이고 있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지구온난화로 남극 북극의 빙하고 녹아내리고 있고,
해수면이 상승하여 얼마 안 가 유럽의 많은 나라는
바다 속으로 잠길 것이란 예고도 있으며,
인간의 파괴로 인해 자연이 몸살을 앓고 있는 징조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각종의 기상이변을 통해서도 나타나고 있는 중이다.

전 세계가 과거에는 일찍이 보지 못했던
이상한파, 폭설, 폭우, 최악의 태풍, 기록적인 더위와 기록적인 추위 등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는 중이며,
벌써 92년도에 [월드워치]라는 환경감시기구에서는
‘지구의 온실효과 저지에 나서기 위한 최후의 시간은 이미 지났으며,
다음 세기에는 광범위한 생태계 파괴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라고 경고하고 있다.

기상이변이며 지구온난화는 그대로 농사에 영향을 주어
먹을거리의 생산에 재앙적인 규모로 큰 차질을 가져올 것이며,
삼림 황폐화, 사막화, 물부족 현상이며, 자연생태계의 파괴등의
그 밖에도 엄청난 재앙을 가져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아니 벌써부터 그런 재앙은 여러 곳에서 심각하게 감지되고 있다.

지구의 허파인 삼림이 80년도 10년 간
전체의 8%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이는 1초에 축구장 1~2개의 넓이가 사라지는 것이고,
1년에 남한 면적의 숲이 사라진다는 계산이 된다고 한다.
80년대에 그러하였으니 지금 이 시간은 몇 배 이상이 될 것이다.

개발과 발전으로 인해 온갖 환경오염이 일어나고 있고,
온갖 환경병들이 우리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광우병의 소나 조류독감이나 사스도 마찬가지고
요즘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에게도 유행하는 아토피도
그 증세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과거에는 있지도 않았던
온갖 기이한 질병이 발생하고 있고,
환경호르몬으로 인해 생물들은 암수의 성 구분조차 불분명해 지고 있으며,
하루에도 몇 백종 가량의 생물이 멸종되고 있고,
도시인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크고 작은 환경으로 인한 건강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한 것들은 너무 많아서
도무지 하나 하나 열거할 수도 없는 지경이다.
얼마 못 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행복이라는 것은
다 파괴될 것이고, 재앙이 오게 될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한 현실이다.

그런데도 왜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인가.
왜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가 가장 중요시 해야 하는 것은
언젠가 다 파괴되고 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고 누릴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농사를 지을 때도
농사짓는 일이 환경 파괴에 기초하여
언젠가는 재앙을 불러 올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조화를 유지하면서
언제까지고 지속 가능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환경과 대자연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발논리로 무조건 발전시키고 개발시키기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개발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고 있는가의 여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은 개발이라면,
환경 파괴를 기초로 하는 개발이라면,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몸을 파헤치고 하는 개발이라면,
차라리 우리는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편이 낫다.

옛날로 돌아가는 것,
조금 불편한 삶을 감내하는 것은
곧죽어도 싫다고 하고,
이제와서 어떻게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냐고 탓하기 전에
우리 앞에 뻔하게 펼쳐질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람답게 사느냐,
얼마나 개발을 시켜 편리하게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존 그 자체가 될 것이다.
얼마나 더 편리하게 잘 살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살 수가 있기는 한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인 것이다.

이제 우리 인간은
대자연의 주변인이 아닌, 대자연의 군림자가 아닌
바로 대자연 그 자체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우리 모든 인간은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동등하게 모든 식물이며 대자연의 모든 요소들도
똑같이 불성을 지니고 있다.
온 우주법계의 모든 존재는 불성의 나툼이라는 점에서
어느 하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대자연은 그대로 불성의 나툼이기에
진리의 모습 그대로를 삶 속에서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진리답게 사는 모습이
바로 대자연의 운행인 것이다.

풀 한포기며, 나무 한 그루,
산과 계곡, 바다와 강,
바람과 구름, 햇빛과 흙과 하늘과 별
숲 속을 떠도는 모든 동물, 모든 생명들
이러한 대자연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흐름에 맞춰
아무런 욕심도 없이 그저 조화롭게 살아갈 뿐이다.
진리답게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이
대자연의 운행에 거스르며
부처님의 숨결인 대자연을 파괴하고 산다.
불성의 씨앗을 다 죽이고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업을 짓는다.
육도 윤회 중에서 인간세계가 업을 짓는 세계고,
나머지 세계인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천상에서는
그대로 업을 받으며 대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때인 것이다.

대자연의 순리에 따르니
따로 업을 지을 것이 없는 것이다.
대자연이 그러하고,
온갖 꽃들이며 풀과 나무, 구름과 하늘, 태양과 바다,
우리가 흔히 짐승만도 못한 인간 운운하던
그 짐승들조차 실은 대자연의 운행을 따르고 진리답게 살고 있다.

깨달음을 얻고 싶고,
부처님을 닮고 싶다면 대자연을 닮으면 된다.
다자연을 가까이 하고,
자연의 순리를 받아들이며 살고,
자연 속에서 우리도 부처님의 삶의 모습을 배워야 한다.

가장 수행자 다운 것은
가장 대자연 다운 것이다.

어린 아이의 천진함과
큰스님들의 천진함은 그대로 자연을 닮는 법이다.
닮는다기 보다는 자연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때
그 깨달음이란 것은
‘나’라는 상을 깨고,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며
내가 곧 우주가 되고 대자연이 되는
그 숭고한 ‘하나’의 깨우침의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진리를 실천하고,
수행자의 길을 걷고자 한다면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봄이 와서 꽃이 피면
내 마음에서 새봄의 꽃이 피어야 하고,
한여름 녹음이 우거지면
함께 내 속 뜰도 푸르러 져야 하며,
가을 단풍이 산천을 수놓을 때
내 마음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하고,
겨울이 되어 모든 낙옆을 떨구고 침묵을 할 때면
내 마음도 내적인 침묵의 수련의 시간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수행자의 삶이다.
자연을 닮은 수행자,
한 송이 꽃을 닮고, 한 그루 나무를 닮고,
저 고고한 산을 닮으며, 광활한 바다를 닮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나아갈 길이 아닐까.

이야기가 조금 길어졌는데 다시 정리하자면,
농업이며 인간 의식주의 경제활동의 모든 기초는
첫째, 지속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지속가능한 것만이
우리 뿐 아니라 우리 후세들에게까지,
또 우리의 몸과 마음에 이르기까지
온전한 삶의 양분을 심어줄 수 있는 것이다.

대자연 환경의 파괴에 기초한 개발이 아닌
어느것도 파괴하지 않는
그래서 땅을 살리고, 환경을 살리며, 생명을 살리는
지속가능한 농사, 지속가능한 의식주, 지속가능한 경제활동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또 하나 그러한 삶을 위해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할 점이기도 하면서,
이 문제 때문에 농사 문제를 비롯한 수많은 경제활동들이
근원적인 파괴의 길을 걷고 있음을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먹을거리를 만드는 사람(생산자)과
먹거리를 사 먹는 사람(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좀 단순한 듯 싶지만
이 단순한 문제로 인해 수많은 문제가 벌어지고 있다.

이로 인해 모든 경제규모가 커지고,
거대한 자본가 기업가들이 이 세상의 경제를 쥐고 휘두르면서
엄청난 자본 권력으로 세상을 망가뜨리고 있으며,
요즘 유행하는 세계화라는 정말 없어져야 할 말들이
활개를 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가 너무 멀다.
거리가 멀면 멀수록 ‘먹을거리(생산품)’는 더욱 포장이 되고,
저장이 되고, 운반이 되고, 선전이 되고, 광고가 되며,
방부제가 투입되고, 가공되어지는데 필요한 돈이 늘어나게 된다.

예를 들어 감자를 심은 농부와
감자를 사 먹는 사람이 있을 때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우면
별다른 지출이나 돈 쓸 일이 줄어들게 마련이다.
쓸데없는 낭비가 없어지게 된다.

그런데 미국에서 생산한 감자를
한국에까지 수입하여 팔아 먹기 위해서는
수많은 중간과정에서의 쓸데없는 부수적인 것들이 추가되는 것이다.
감자를 수송하는데 드는 비용,
오래 보관하기 위해 방부제 같은 것들을 투여해야 하고,
포장하거나 광고해야 하고,
그냥 감자만 으론 잘 안 팔리니
페스트푸드점의 감자나, 과자 등의 새로운 먹거리로
몇 단계의 가공을 거쳐야 하는 등 수많은 부수비용이 들어간다.

가공을 많이 하게 되면
단가가 100원이었던 감자는
새로운 상품이 되어 1,000원도 넘게 팔려나간다.
그러나 그 감자 본연의 영양이나 생명력은
이미 다 죽어 있고,
설탕이나 온갖 조미료 등으로 입맛에만 맞추어
비싼 가격으로 팔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래된 미래’를 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이번에 한국에 와서 사상강연을 하였는데,
특별히 이 점을 많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글에 의하면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
수퍼마켓에서 지불하는 식품값의 5퍼센트 만이 식품 그 자체 값이고,
나머지 95퍼센트가 부수적인 돈으로 나간다고 한다.

감자 하나를 그냥 사면 500원이라면
가공하고 운반하여 상품을 만들어 팔면 9500을 받고 판다는 말이다.
바로 이 95%에 해당되는 것이
요즘의 산업사회, 개발과 발전,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눈부신 변화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눈부신 변화라는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철저한 환경파괴와 자연파괴를 가져온다.

예전 같으면 500원짜리를
500원 어치 영양가 그대로 싱싱하게 그냥 500원에 살 수 있었는데,
이제는 500원짜리를
가공하는 기술, 운반하는 수송비, 포장하고 광고하는 비용 등으로
돈을 더 붙이고,
거기에 영양가과 신선도 등은 완전히 바닥이 나 버린 것을
9,500원에 사 먹으며 행복해 한고,
개발이 가져온 이익에 흐뭇해 하고 있다는 말이다.

참 말도 안 되는 계산이 아닐 수 없다.
도무지 이제와서는 대책이 안 선다.
모든 사람들이 개발주의자가 되어 버렸고,
그러한 개발의 달콤한 이익에 이미 맛을 들여 버렸으며,
그나마 개발이 덜 된 나라, 그래서 행복한 나라조차
죄다 개발을 해야 한다고 강제로 파괴를 일삼고 있으니
이제 머지 않아 이 지구의 미래, 인류의 미래는 뻔해 보인다.

오래된 미래라는 책에서 보면
티베트의 라다크라는 작은 나라에서
서양문물이 들어야 개발이 되기 이전과 개발 된 뒤에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고,
얼마나 많은 행복을 빼앗겨 버렸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져다 주었는지를
너무나도 실감나게 현실적으로 가르쳐 주고 있다.

또한 여기에서 한 가지 더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이러한 어리석은 일들은 세계화라는 허울좋은 말의 결과이며,
대량생산 대량수송 대량소비 등 ‘대량’적으로 만들어 내는
대기업이나 소위 선진국이라고 하는 큰나라에서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는 점이다.

500원짜리를 500원에 사 먹기 위해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이 있어야 한다.
신토불이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내 몸이 태어난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들어낸
가장 가까운 음식을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자연환경의 파괴도 없어지고,
먹을거리며 생산품의 생명력도 더욱 왕성할 뿐 아니라,
보다 욕심을 줄일 수 있고,
소박하고 살뜰하며 정직한 농부며 사람들이
모두 함께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터전이 된다.

또한 그렇게 되면
지금같은 거대기업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거대 기업은 나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부자가 되는데
소농들이나 소규모 생산자며 사업자들은
날이 갈수록 가난해 지는
빈익빈 부익부 현상 또한 없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가면
벌써 수많은 부수적인 돈이 붙고,
생산물을 돈을 가진 거대기업들이
요란하고 거창한 과학기술, 식품기술로 몇 단계씩 가공하면
거기에 엄청난 쓸데없는 돈이 붙게 된다는 것이다.
쓸데없고 필요없는 재화가 낭비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되었을 때,
그런 거대한 생산과 소비의 체계가 만들어졌을 때는
거대 기업들만 살아남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 놓고 국가에서는
국가 경제의 튼튼한 바탕이 되고,
나라 전체의 재정 규모가 커지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이러한 거대 기업의 수출 등을 장려할뿐더러 도와주고 있다.

정부에서야 어떤 한 사람이 집권하고 있을 때
전체 경제규모가 커지고,
수출이 커지고
그러면 자연스레 경제대통령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대통령 잘 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당연하겠지...

이 모든 것이 대량생산, 대량소비...
등등 ‘대량’이 만들어 낸 욕망의 결과인 것이다.
‘대량’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이다.

대량으로 생산하기 때문에
소비도 대량으로 시켜야 하고
지역사회에서 대량으로 만들어 낸 것을 다 소비할 수 없으니까
다른 나라에까지 수출해야 하고,
더 잘 팔리게 하기 위해 광고하고, 포장하고, 가공하고
온갖 쓸데없는 비용이 지출되는 것이란 말이다.

단순한 예로 농산물의 대량생산의 폐해를 살펴보자.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 때문에 농사도 대량으로 짓게 된다.
농사를 대량으로 지어야 돈을 많이 버니까,
한 가지 작물을 대량으로 심게 되었고,
한 가지 작물만 대량으로 심으니까 그 작물을 좋아하는 곤충들이 많이 모이고,
그러다 보니 그 곤충을 죽이려고 농약도 쓰고 그러는 것 아닌가.

농토에 여러 가지 자신이 먹을만큼의 작물을
다양하게 심어 놓으면
다양한 작물이 있다 보니
다양한 해충과 익충들이 함께 모여들고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생태계의 균형이 잡혀
조금 해충의 피해를 입는다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선에서 균형이 잡히게 마련이다.

또한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니
직접 손으로 풀을 뽑을 수 없게 되어
손쉬운 방법으로 제초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량생산의 주 목적이
많이 생산하는 것이다 보니 비료를 많이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대량으로 생산되니까
그 지역에서 다 소비할 수 없고,
-물론 다른 지역에 내다 팔기 위해 대량으로 생산되는 것이지만-
다른 지역으로 이동시켜야 하고,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냉장고 같은 기계를 필요로 하고,
또 많이 팔아야 하다보니 광고도 포장도 해야 되며,
너무 많은 것이 다 소비가 어려운데다
사람들 입맛에 달고 유혹하기 쉬운 방법을 동원하기 위해
몇 차례에 걸쳐 가공한 제품을 만들게도 되는 것이다.

이렇게 대량생산의 폐해는 심각하다.
아마도 모든 문제가 ‘대량’에서 시작되는게 아닌가 한다.

그러면 이상에서 말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이
이젠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것일까.

참 어려운 대답이 아닐 수 없다.
정말이지 엄청난 속도로 빨리 달려오는 기관차를
눈앞에 보이는 탈선에서 구한다는 것이
좀처럼 쉽지 않은 대답이다.
또한 혼자만 바꾼다고 다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모든 국가를 짊어지는 사람들이나
국가의 경제를 짊어지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온전히 깨달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현실의 어리석은 달콤한 임시 행복은
그들에게 가장 행복한 꿀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 지역 더 개발시켜 달라고 국회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뽑지,
개발논리를 이제 좀 버리고
환경을 지켜나가며, 지속가능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뽑지 않았다는 점도 큰 문제다.

다시말해 세상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모든 이들이
개발 논리의 달콤한 유혹에 모두 빠져들어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과학의 발달이 가져온
전문화 되고, 심화된 분별 지식의 찬양을 이제 버리고,
거시적이며, 전체적인 안목으로
온 우주 법계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주 작은 하나의 해답을 내려본다면,
우리 모든 개개인이 지혜로워져야 하겠고,
지금 우리에게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작은 공동체들을 이루면 좋겠고,
그 작은 공동체 속에서 자연을 오염시키지 않고,
환경을 파괴시키지 않으며
지속가능한 농사를 짓고 살 수 있다면 좋겠다.

또한 그 안에서
최대한의 자급자족을 하고 살 수 있다면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간격이 없어질 거고,
그러면 쓸데없이 낭비되는 재화를 줄일 수 있으며
보다 소박하고 단순하며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 이 시점에서는
엄청난 규모로 성장해 버려
성장논리, 개발논리를 바꾸기 힘들고,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를 세울 수 없으며,
나라를 바꾸고, 세계를 바꾸기가 많이 어려워 졌다.

그렇다고 전혀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갑자기 정부를 바꾸고,
거대 기업들을 바꾸기 어렵다 보니,
우리가 사는 곳에서
나 스스로가, 또 우리 스스로가
작은 공동체, 작은 경제활동, 작은 욕망을 통해
그러한 삶이 얼마나 조화롭고 평화로우며
온전한 삶의 모습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대자연 속에서 농사를 지으며
우리 마음의 농사도 함께 지으며
세계로 세계로 대량적으로 뻗어나갈 것이 아니라
안으로 안으로 가꾸어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어렵다면
당장에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스스로 작은 농토라도 일구는 것이 아닐까.
요즘은 주말농장이라는 것이 많이 생겨나
스스로 안전한 먹거리를 만들어 먹는 분위기가 한창이다.

스스로 농토를 가꾸는 일을 통해
환경파괴를 스스로 막고, 좀 더 지속가능한 먹거리를 생산할 수 있고,
내 스스로가 생산자이자 소비자가 되는 길
그래서 그 간격이 ‘0’으로 하는 일이 중요할 것 같다.

내 스스로, 혹은 그것이 어렵다면
지역적인 작은 공동체 같은 곳에서라도
될 수 있다면 최대한 욕심을 줄이고, 자급자족할 수 있을 때,
그런 참된 농부들, 참된 공동체들이 많아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좀 더 조화롭고 평화로운 부처님의 땅이 되지 않을까.

나부터, 개개인부터, 참된 농사꾼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생명을 가꾸고, 마음을 가꾸며
대자연의 순리와 하나되어 물 흐르듯 자연스레 삶을 흘러가는
그런 자연을 닮은 수행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너무 말이 많고 거창해 졌다.
무언가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세상이 너무 많이 복잡해 지고,
현재의 문제가 너무 많이 얽혀 있다보니
그 문제를 몇 글자로써 풀어낸다는 것도 많이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세상을 바꾸려 하고,
내 바깥을 바꾸려 하기 보다는,
그러한 문제를 자각하고,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먼저 바뀌고,
내가 먼저 대자연과 교감을 이루며,
내가 먼저 조화롭고 평화롭게 살아야 하겠다는 그냥 그런 말이다.

내가 먼저 변해야
세상이 따라 변하는 거니까.

내가 변하고
내 가족이 변하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변하고
우리 공동체가 변했을 때
우리 사회가 함께 변할 수 있고
이 나라가 이 세상이 변하는 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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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적멸보궁이 올려다 보이는
겨울숲에서
한참을 바라보며 서 있었습니다.
겨울숲의 또다른 아름다움이
내 안으로 포근히 들어와 안깁니다.]


한여름
짙은 녹음으로
화사한 꽃과 열매를 틔우던 산숲도
단풍으로 막바지 제 몫을 해내고는
후두둑 후두둑 다 떨어져버렸다.

숲은 또 다시
침묵의 시간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한껏 피어오르던 숲은
이제 모든 집착과 욕망을 다 떨쳐버리고
무거운 침묵으로
내적인 자기 수련의 길을 걷는다.

한겨울 숲의 침묵이 없다면
봄이 오더라도
새로운 꽃을 피워내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

삶의 길 위에서
한참 물이 오르며 꽃망울을 틔우고
훨훨 날갯짓할 때가 있어야 하겠지만,
이따금 침묵으로 안을 비추는
내적인 자기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창 잘 나갈 때가 있으면
그것을 끝까지 몰아갈 것이 아니라
한번쯤 돌이켜 멈출 줄도, 쉴 줄도 알아야 한다.

삶에도
속도 조절이 필요한 것.

그래야 안으로 비추는 깊은 침잠을 통해
또 다시 봄이 오면
새로운 생명의 꽃을 피워낼 수 있다.

참된 지혜는
전진과 소유보다는
멈춤과 비움을 통해서 안으로부터 움트는 것이다.

저 고요한
겨울 숲의 침묵을 보면서
한 스님의 뒷모습이 떠오른다.

오랜 선방 스님께서
어떻게 인연이 되어
도심 사찰의 주지 소임을 맡아 살다가

세속적인 시선에서 보면
한창 잘 나가고 명성을 드날릴 때
홀연히 다 놓아버리고
눈 내리는 겨울 숲속으로
걸망 하나 걸머지고 떠나시던 모습.

그 뒷모습은
참 자유인의 모습이었다.
스님의 삶에도
한겨울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영원하지 않고
잠시 피었다가 사라지는데 있는 것처럼,

우리들 삶도
오직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때때로 멈추고 비우며,
안으로 묵연히 침잠할 수 있는
겨울 숲의 침묵과 지혜를 배워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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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면 서  
이 작은 마을에서도  
소박하지만 생기로운 불탄 의 잔치가 벌어졌다.  
  
손끝을 빨갛게 물들이면 서 연등도 만들어 달고,  
한 달여에 걸쳐 장엄물도 몇 가지 선 보여  
마을 제등행렬과 연등축제 의 장을 열고  
북녘땅이 바라다 보이는 산위에  
부처님 오심을 알리는 봉 축 점등식도 치루었다.  
  
연중 이맘때가  
절집에서는 가장 바쁘고 활기찰 때다보니  
자칫 몸과 마음이 행사를 위한 행사에 휘둘려  
내면의 자취를 놓치고 살 기 쉬운 때이기도 하다.  
  
법요식이 끝나고  
가만히 되돌아 보면서  
나에게 있어 불탄의 의미 가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내 안에 물음을 던 지고 나면  
조용히 내면의 뜰을 거닐 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마도 동안의 바쁜 일정 에 치여  
밋밋해지고 퇴색해 가는 내면이  
맑은 샘을 기다리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럴 때면 그길로 길을 나 선다.  
이것 저것 생각하고 따지 고  
다음 일정을 짜맞추다 보 면  
쉽게 저지르지 못하게 되 고 그렇게 반복되다 보면  
내면은 정체되어 이내 빛 이 바래진다.  
  
사실은  
눈이 녹고  
촉촉한 봄비가 처음 내릴 때부터 시작된  
이 산하의 봄의 향연을  
이 두 발로 성큼성큼 걸으 면서  
온몸으로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일찍부터 있던 터.  
  
불탄을 즈음하여  
산숲은 절정으로 치닫는 다.  
수런수런 초록이 물들고  
법당 앞 야생화들이며 봄 나물들이 앞다투어 피어올라  
부처님 맞이를 모두 함께 치르고 있다.  
  
그런 산과들의 푸른 생명 의 연주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마음으 로 이번 만행길에 오른다.  
  
언제나 그렇듯  
자연은 늘 그 자리에서  
저마다 자기만의 온전한 빛을 피우면서  
우리의 내면을 생기롭게 채워주고 있다.  
  
길 떠나는 여행자의 가슴 에  
푸르른 설레임과 맑은 외 로움을  
또 깊은 사유의 뜰을 제공 해 준다.  
  
몇 일 되지 않는 창연한 만행길.  
그러나 이 산천 어디를 가 나 만나게 되는 한 가지 아쉬움은  
늘 그렇듯 사람들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이 작은 나라 어디를 가든  
공사 소음으로부터 해방 될 수 있는 곳은 없다.  
어디에서건 항상 자르고 파헤치고 고치고 짓고 또 무너뜨리고,  
발전과 개발이라는 이름하 에  
너무나도 흉측한 모습들 이 눈과 귀를 얼룩지게 만든다.  
  
이 아름다운 산천을  
얼마만큼 더 못살게 파헤 쳐야  
우리의 개발은 끝날 것인 가.  
  
모르긴해도 전 국토에  
시골이 다 사라지 고,  
숲이 사라지고,  
논밭에 길과 건물이 들어 서며,  
전 국토가 서울같은 기괴 한 괴물의 도시가 되더라도  
우리의 개발과 공사는 끝 나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땅이 모자라면  
바닷속이나 구름위 나아 가 저 우주까지 개발하려 들 것이고  
물론 이 일은 이미 진행중 에 있는 터다.  
  
발길을 내딛으며  
파헤쳐져 맨살이 그대로 드러난 흙을 보면  
가슴이 탁탁 막힌 다.  
  
어디를 가나  
뚝딱거리는 소리, 기계 굉 음 소리,  
온갖 쇳소리가 들리지 않 는 곳을 이젠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이런 문제는 비단 세속의 일만이 아니다.  
깊은 산 물 좋은 산사에도  
개발에 민감한 우리의 습 성은 버려지지 않고 있다.  
  
고즈넉한 산사의 풍경소리 는  
공사하고 짓고 부수는 기 계소리에 파뭍혀 있다.  
시끄러운 불사의 굉음만이  
산숲의 물소리 바람소리 를 대신한다.  
  
어지간한 절 치고  
공사중이지 않은 절, 불사 중이지 않은 절은 보기가 드물다.  
  
언제부터 이렇게 절에 불 사가 많아졌는지.  
과연 이런 대량의 불사, 대형의 불사,  
또 지속적인 불사가 필요 한 것인지 스스로 물어봐야 할 것이다.  
  
10년 전 절에서  
불사 관계로 흉측하고 시 끄럽던 모습에 적잖이 실망을 하면서도  
그래도 이 불사가 끝나면  
고즈넉한 산사의 바람소리 를 들을 수 있을거란 어릴적 소박한 기대는  
1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또다른 불사를 마주하며  
생각이 복잡해 지고 만 다.  
  
길을 걷다가 아직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산이 있고 우거진 숲이 있 고  
행여 졸졸 개울이 흐르는 훤한 터를 만나면  
작은 오두막 하나 짓고 텃 밭 일구며 소박하게 자연과 벗하며  
그 속에서 내면의 뜰을 비 추며 소박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 진다.  
  
그러다가도 주변의 개발 여건을 따져보면  
얼마안가 이 곳도 개발되 어 파헤쳐지겠지 생각하면  
내 작은 희망은 이내 물거 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들의 개발 욕구를 살펴볼 때,  
우리나라 거의 모든 땅이 개발 예정지역이다.  
이 작은 땅 어디에도 개발 과 훼손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은 없어 보인다.  
  
그러면,  
소박한 꿈을 가진 자연벗 맑은 도반들은 어디로 가야하는가.  
  
고요한 아란야를 찾는  
청정한 수행자들이 가야 할 곳은 과연 어디인가.  
  
물소리 대숲소리  
언제까지고 마음편히 들 을 수 있는 그곳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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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는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이나 구성요소로
네 가지를 꼽습니다.
지수화풍 사대(四大)라고 하는데,
이 사대에 맞춰 현재의 파괴의 문제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地)의 요소와 관련된 오염에는 토양 오염이 있습니다.
폐수나 농약 때문에 토양이 중금속으로 오염되고,
산림 벌채를 통해 대지에 침식작용이 이루어집니다.
과다 방목도 문제가 되는데,
땅을 딱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사막화하고도 관련이 깊습니다.

그 다음에 수(水)의 요소와 관련해서는 수질오염이 있습니다.
산업폐수나 생활하수 때문에 수질이 악화되고,
전 지구적으로 물이 부족해지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풍(風)의 요소와 관련해 대기오염을 들 수 있는데,
스모그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자주 겪고 있고, 또 산성비도 있습니다.
화석 연료를 사용해서 나오게 되는 아황산가스가
산성비가 되어 내리게 되면,
그것이 석회암층을 용해시키기도 하고
건물을 부식시키고 호흡기에도 큰 지장을 줍니다.

그 다음으로 화(火)의 요소는 지구온난화라고 볼 수 있는데,
저는 이것이 가장 심각하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전 지스템, 지구 전체가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온실효과가스라는 것이 있는데
이산화탄소 층이 지구를 온실처럼 감싸주고 있어서 지구가 따뜻해지고,
그렇기 때문에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지나치느까 너무 더워져서,
빙산이 녹고 해수면의 높이가 높아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연안지역의 항구들이 잠기게 되는데,
예를 들어 4도씨 정도가 증가한다면
상해, 방콕, 카이로, 방글라데시는 다 잠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것이고 기후에도 심각한 변화를 줍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사대가 합쳐저서
색신(色身)을 이룬다고 보는데,
색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몸 또는 생명체에도 문제가 됩니다.
생물종의 다양성이 크게 감소된다는 것이죠.
특히 생명의 보고라고 할 수 있는 열대 우림 지역이
아주 급속도로 붕괴되어가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의 생물종 숫자가 엄청나게 감소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짚어 볼 수 있는
생태계 오염의 실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종욱 [불교생태철학] 중에서...

우리 몸도
나무며 풀 그리고 동물들의 몸도
일체 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지수화풍 사대로 이루어 져 있습니다.

지구의 지수화풍 사대가 오염되면
곧 우리 몸의 지수화풍도 오염되고
지구의 사대가 깨끗해질 때
우리 몸도 모든 생명도 청명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이 지구의 지수화풍 사대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지수화풍을 인연따로 조합하여 살고 있는
우리 몸이 오염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옛날에 지구의 지수화풍 사대가 오염되지 않았을 때는
병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지구가 오염됨과 동시에
우리 몸 또한 얼마나 오염되고 있어요.

아토피 문제며, 성인병, 피부병, 먹거리 오염문제 등
이 모든 것들이 지구의 사대가 오염됨으로써
우리 몸 또한 오염되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몸이 오염되면
곧 그 몸에 깃들어 있는 마음도 오염되고 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근원인
이 지구상의 사대를
내 몸처럼 생각하고 내 마음처럼, 내 정신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를 오염시키는 것이
바로 내 몸과 마음을 오염시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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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나그네 비둘기는 한 때
북미 대륙에서 가장 흔한 들새였다.
나그네 비둘기의 큰 떼가 지나가면 하늘이 어두워질 정도였으므로,
아무도 이 새가 멸종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던 것이 미국 개척시대가 시작되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난은 시작되었다.
이 새는 아주 고기 맛이 좋고
대평원에서 큰 무리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서부 개척자들의 식탁에서 아주 인기있는 메뉴가 되었다.

미대륙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철도가 놓이면서
이 새는 철도 건설 노동자를 위한 식사 뿐만이 아니라,
상품화되어 이웃 여러 마을로 신속하게 공급되었다.

이 나그네 비둘기의 포획을 위해 수천의 전문 사냥꾼이 고용되어
기관총을 비롯한 여러 화기를 사용하여 남획하기 시작했다.
이 새는 큰 나무에 수십 또는 수백씩 무리를 지어
새끼를 치는 생태적 특성을 가지고 있어
더욱 남획하기 쉬웠다.

사냥꾼들은 어린 새나 늙은 새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포획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1855년 뉴욕의 한 거래처에서
한 사람이 하루에 18,000마리의 비둘기를 매매한 사실이 있고,
1869년 한 해 동안 한 지역에서
750만 마리의 나그네 비둘기가 포획된 기록도 있다.

이러한 남획으로 인해서 나그네 비둘기의 수는 격감하여
19세기 후반에는 큰 번식 집단을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으며,
희귀한 종이 되어 버렸다.

1894년 마지막 둥지가 발견되었으며,
1914년 신시네티 동물원에서 최후의 한 마리가 죽음으로써
이 새는 멸종되었다.

[지속가능한 사회와 생태학] 중에서...

지구는 공룡을 포함해 식물과 동물 수천종이 절멸한 6천500만년 전
소행성 충돌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생물 종들을 잃어가고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전 세계 포유류의 약 4분의 1, 양서류의 3분의 1,
조류의 10분의 1 이상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기후변화 요인 한 가지만으로
앞으로 50년 안에 추가로 생물종 15-37%가
멸종 직전으로 몰릴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추산한다.

세계환경보존연맹은 지난 5월 멸종 위협에 처한 생물 종의 수가
1만6천119종에 달한다고 발표했다.
백상아리는 지난 50년 동안 최대 95%까지 감소했다.
북극곰은 앞으로 45년 간 개체 수가 30%쯤 감소할 전망이다.

사하라사막 지대에서는 무분별한 사냥과 서식지 파괴로
다마가젤의 수가 80%나 줄었다.
아프리카 민물고기의 4분의 1도 인류의 활동으로 위협을 받고 있다.

과학자들은
"중대한 생물다양성 위기 상황으로 몰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생물다양성은 여전히 저평가되고 있고,
민간과 공공정책 결정시 적절한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며
"생물다양성 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적인 조직을 창설함으로써
과학과 정책 사이 간격을 시급히 메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겨레 신문]

지금도 매일 70~150여 종의 생물이
소리없이 아무도 모르게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일 년이나 한 달이 아니라
하루에 말이지요.

생물이 멸종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내 몸이 꺼져가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아요.

위에서 나그네 비둘기가 없어진
그런 방식으로, 혹은 그보다 더 잔혹하거나, 미묘한 방법으로
수많은 종의 생물들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고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늘 하루,
2만 헥타르(약 6천5십만평)의 사막을 만들어내고,
8,600만 톤의 비옥한 땅을 침식시켜 파괴하고,
1억 톤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브라질 아마존강 유역의 열대우림은
우리가 좋아하는 햄버거 등의 패스트푸드용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한 목초지를 만드느라
매년 미국의 테네시 주보다 더 넓은 삼림지역이
차례 차례 불태워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4번째로 큰 아랄해는 목화재배를 위한 관계용수로 인해
빠르게 사막화 현상을 보이고 있어
해안선이 하루가 다르게 멀어져 가고 있고,

뭐 이런 예를 말로 일일이 다 적으려면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년이 지나고,
내 평생 해도 모자랄 판이니
가슴도 아프고 그만 적도록 합니다.

우리의 집착, 욕심이 얼마나 무서운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우리들의, 인간들의 집착과 욕심이
이 모든 무서운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훗날 우리가 받아야 할
공업일 것입니다.

그렇다고 공업이니까
나 혼자만 환경 보존하고, 절약하고, 아끼고,
자연을 사랑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
그냥 대충 살겠다고 한다면
그 공업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지만,

나 먼저 아끼고 절약하고 나누고
보존하며 자연을, 생명을 내 몸 아끼듯 사랑하고
동체의 자비로써 대한다면
내 업은 내 업대로 청정함을 유지할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상 이변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업이 청정한 사람은 그것을 빗겨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재지변이 일어난다고, 폭풍우가 몰아친다고
다 죽는 것은 아니고, 다 과보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업에 따라 죽기도 살기도 하고,
업에 따라 자연의 갚음을 받기도 하고 안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업이란 분명하기 때문이지요.
자연과 나와의 업이 청정하면
내가 자연을 어쩌지 않은 것 처럼
자연도 나를 어쩌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자연을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펑펑 써대며,
개발과 발전을 이유로 파헤치고 꺾고 뚫고 해 버린다면
자연 또한 그 업을 기억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업을 청정히 한다면
그래서 모든 사람들의 자연과의 업이 청정해 진다면
그것이 바로 청정한 자연, 청정하고 지속가능한 지구를 만드는데
더없이 중요한 실천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숫타니파타]의 게송이 떠오릅니다.

악마가 말했다.
"자식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기쁘고,
소가 있는 자는 소로 인해 기뻐한다.
인간이 소유하고 집착하는 것은 기쁨이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기뻐할 것도 없다."

그러자 붓다가 대답했다.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 때문에 근심하고,
소 있는 자는 소 때문에 근심한다.
실로 인간의 근심은 무엇인가에 집착하는데서 생겨난다.
집착할 것이 없는 자는 근심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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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온다. 방안 널찍한 창문을 활짝 열고 빗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있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기 힘든데 오늘은 아침부터 우울한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거친 파도처럼 밀려오다 밀려가다 그러고 있다. 이른 아침 저 숲 위로, 나무 위로, 들풀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 한 잔 생각도 나고 감성이 더 여리고 새록해 진다. 저렇게 떨어지는 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나무들은, 저 숲의 생명들은 참 의연도 하다.

  절 주위는 얕은 산이라 온갖 나무들이며 들풀, 꽃들이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잠시도 쉬지 않고 너가 지면 또 내가 피어나고 핀 꽃이 지면 또 다른 꽃이 피고 그런다. 풀들도 처음 여린 잎의 생김새와 한참 물이 올라 피어오른 모습은 전혀 다르다. 처음엔 작은 풀이거니 했는데 비 한 번 오고 나면 꼭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나를 당황케 하는 녀석도 있고, 처음엔 예쁘고 귀엽던 것들이 얼마나 생명력이 강하고 번식력이 강한지 무서울 정도로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기도 한다.

  채소밭에 너무 큰 풀들은 뽑아 주는데 한참 풀들을 뽑아주다 보면 뿌리가 얼마나 깊고 굵은지 세상 위로 올라온 것의 몇 배 이상은 됨직한 뿌리를 보면 섬뜩 이네들의 생명력에 놀라게 될 때가 있다. 이렇게 뽑아낸다는 것이 어떨 때는 참 미안하기도 하고 저 녀석들도 다 이유가 있어 피어오르는 것인데 하고 생각하면 풀 뽑는 일도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그래서 될 수 있다면 풀도 그대로 함께 자랄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다. 너무 커서 채소들 키를 웃자랄 때가 되면 그런 녀석들만 뽑아서 옆에 놓아둘 뿐 될 수 있다면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저 채소들에게도 살아남기 위한 경쟁력도 될 것이고, 그 경쟁력이 더욱 채소들을 생명력 있게 가꿀 것이며, 또한 함께 자라주는 따뜻한 이웃이 될 수도 안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풀들이 함께 자라고 이웃 풀들과 함께 경쟁도 하고 또 서로 도와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라난 채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실하고 열매가 적을지 몰라도 그 생명력은 더욱 강인하며 실제로 병해충으로부터의 예방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채소도 생명인데 우리 사람들하고 사는 것이 다를 리야 있겠나!

  사람도 늘상 온실 속에서 자란 채소들처럼 온갖 시련과 힘겨운 경계를 당해 보지 못하고 늘 풍족하게만, 늘 보호 속에서만 자란다면 그 사람의 내적인 생명력은 빛을 잃고 말 것이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실패도 맛보면서 주춤주춤 거리다가 그래도 딱 버티며 일어서기를 몇 번이고 반복할수록 우리들의 내적인 삶의 빛은 더 생기를 띨 수 있는 법이다. 본래부터 아무리 큰 시련이며 역경이라도 꼭 우리가 이겨낼 수 있는 만큼만 오고, 또 꼭 필요한 바로 그 때 오지 내가 이겨내지도 못할 일이 도저히 이겨내지 못할 때 찾아오는 법은 없다고 한다.

  채소도 키워 보니까 우리하고 똑같다. 처음에 자랄 때 오이에 진딧물이 자꾸 붙기에 손으로 떼어 줘도 보고 담뱃재를 모아 우린 물도 줘 보고 했는데 그래도 끊임없이 생기는게 아닌가. 그래서 그래 너도 먹고 살아야지 싶어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진딧물도 양심은 있는지 전체 오이를 다 괴롭히는 건 아니고 그 중에 몇몇 오이에만 가서 붙어 있으니 그래도 다행한 일이구나 싶었다.

  우리 사람들이야 어디 그런가. 될 수 있으면 좋은 것, 많은 것 더 가지려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최대한 많은 양을 모아 축적하려고 안달이지 양심이란 것이 우리들 욕심 앞에 맥을 못 추지 않는가. 진딧물에게도 배울 점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보니까 진딧물이 많이 붙은 오이에만 무당벌레들이 모여 진딧물을 처리 해 줌으로써 내 일손을 덜어주고 있다. 가만히 보니까 내가 할 일을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잘 해 주고 있다. 그런데 여기다가 진딧물 싫다고 농약을 막 쳐 놓았다면 그 농약에 무당벌레도 또 다른 익충들도 모두 함께 전멸했을 것이다.

  사람의 일도 마찬가지다. 시련과 역경이, 힘겨운 일이 생기면 그걸 이겨내려고 발버둥 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때 그냥 주저 않아 버리지만, 그 상황이 아무리 최악이다 싶더라도 대자연 법신 부처님의 숨결에, 또 신성神性 충만한 하느님의 뜻에, 어머니 대지에 일체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다면 분명 이 우주 어딘가에서는 해답을 내려 줄 것이다. 아무리 관찰해 보아도 자연은 참으로 신비롭고 또 정확하다는 걸 느낀다.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 생겨나고 있다.

  우리들 머리로 그 위대한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려고만 하지 않고, 자연과 함께 그 이치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저 숲 속의 생기어린 생명력과 포근함을 우리 사람들 내면에서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산다는 것은 곧 삼라만상인 법신 부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이고, 하느님의 신성한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는 말과 같다. 대자연 우주가 그대로 법신불이요 신성의 피어남이기 때문이다.

  이 대자연의 숨결에 일체 우리의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면, 그래서 내 일로 ‘잡고’ 살지 말고 대자연의 진리 성품에 ‘놓고’ 살면 우리 사람들에게서도 저 대자연의, 저 청청한 숲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이다.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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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소리를 들으라

자연에 깃들어 살라 2009/08/21 06:39 Posted by 법상

 

 

          세상엔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고 평생가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고 여리기 때문에 아무나 들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면 그 살뜰한 소리는 고요한 법계法界의 울림과 모든 존재 내면의 쩌렁쩌렁한 깨우침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통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사람은 세상사에 찌든 온갖 소음들만 귀 고막이 터져라 듣고 산다. 세상의 소음에 익숙해지다 보면 작고 여린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존재 본래의 청음 능력을 상실한다.

  내 삶 속에 자연이라는 경이와 축복이 들어오게 된 것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매 년 반복되는 계절을 그냥 저냥 흘려보내다가 어느 순간인가 자연 속에 깃들어 자연 그 자체가 되는 듯한 심연深淵의 떨림을 느끼면서부터 내 삶에 자연은 더없는 신비요 스승이며 벗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지리산 종주길에 올라 하염없이 떨어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아무도 없는 산길을 걷다가 문득, 아주 문득 자연의 가녀린 그러나 청청한 소식을 들었다. 그 작은 자연의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니 마치 지리산 전체가 아니 이 우주가 그대로 내게 속삭이는 듯, 침묵 속에서 쩌렁쩌렁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그러면서 자연은 둘도 없는 내 벗이요 도반이 되었다.

  우리들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六根이라는 것이 본래는 세상의 작고 여린 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고 우주와 자연의 작지만 커다란 울림과 공명할 수 있었지만, 감각적이고 자극적인데 서서히 익숙해지다 보니 그 본래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고 한다.

  동물과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공인까지 받았다는 호주의 트리샤 맥카라는 분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 그녀의 말을 빌자면 ‘인간은 원래 텔레파시 능력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언어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이 능력은 퇴화돼 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무탄트 메시지』에서도 참사람 부족 사람들은 ‘인간은 본래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하며 실제 생활에서 자신의 마음을 감추지 않고 거짓을 없앰으로써 부족 사람들은 텔레파시로 의사소통을 자유로이 하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그뿐인가. 『물은 답을 알고 있다』나, 『식물의 정신세계』같은 책에서는 물이나 식물 또한 인간의 마음을 그대로 전달받고 영향을 받는다는 기록과 과학적인 증명을 담고 있다.

  그 뿐인가. 얼마 전에 지진해일이 있었을 때 동물들은 미리 알고 피했다고 했고,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원시적으로 사는 원시 부족인들 또한 미리 피함으로써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동물들이나 원시 부족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며, 자연의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현자들이다. 분명 대자연은 그러한 큰 피해에 앞서 그 어떤 힌트를 보냈을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자들은 몸을 피했지만 듣지 못한 자들은 고스란히 그 아픔을 감당해야 했다. 자연에 깃들어 삶을 살 때 대자연은 어머님 품처럼 우리를 품어준다.

  이처럼 사람들은 본래부터 사람들 서로간 뿐만 아니라 동식물이나 자연의 무정물과도 미세한 마음의 공감과 대화를 텔레파시로써 나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마음을 나눌 수 있을 만큼 감성적인 예민한 감각이 발달되어 있었고, 자연 속에서 신의 소리,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순수하고 청명했다. 그러나 인류역사 속에서 어느 때부터인가 그 모든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건 우리 스스로 작고 미세한 감각의 소중함을 버린 채 외부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마음을 돌이켜 정신을 내면의 미세한 느낌에 집중하고, 외부의 소박한 자연에 집중하며 관찰할 수 있다면 다시금 그 본래의 능력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봄이 오니 한겨울 얼어붙었던 땅이 녹고 그러면서 봄나물이며 봄꽃들이 얼마나 신이 나 있는지 모른다. 나도 처음엔 수필가들이 얘기하는 눈 녹는 소리며 바람 스치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서걱이며 온산을 놀라게 한다는 그런 표현들을 그저 시적인 표현 정도로만 여겼다. 그런데 그동안 우리가 귀를 닫아 놓고 살아서 그렇지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정말 그 소리가 성성한 깨우침으로 귓전을 맑게 스치운다.

  조용한 가을 낙엽이 떨어지면 뒷산 전체가 서걱이고, 산 속 나무 그늘에 덥석 누워있다 보면 바람 지나가는 소리가 사람들 지나가는 소리만큼이나 선명하게 들리고, 초봄의 산사에는 눈 녹는 소리가 꿈틀거리듯 세속에 찌든 귀를 맑게 씻어준다.

  이러한 자연의 소리는 아주 작은 것이라 사소하게 여길지 모르지만 그건 결코 작은 소리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런 작은 것도 느낄 수 있을 만큼 깨어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그만큼 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가 자연의 맑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유는 내 안에 복잡한 소음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해야 할 일들로 마음이 꽉 차 있기 때문이며, 또 머리 속은 정신없는 일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내 안이 맑게 비어 있어야 비로소 이 법계의 작지만 우주를 울리는 이 진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들만 듣고 사는 우리이고,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들만 보고 사는 우리이며, 먹어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지 말아야 할 것들만 먹고사는 우리들이다. 그러니 우리의 육근六根인들 어디 좀처럼 온전할 수 있겠는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잘 다스려야 몸도 마음도 경쾌하게 추스릴 수 있다.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육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대상인 육경六境에 집착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작고 소박한 데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하고, 자연이 가져다주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고요하게 앉으면 내 안에서 울려나오는 쩌렁쩌렁한 속 뜰의 메아리를 들을 수도 있고, 이 우주의 작은 한 켠에서도 전 법계의 소리 없는 거대한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 마음을 맑게 비우고, 속 뜰의 소리며 대자연이 전해주는 맑고 밝은 소식을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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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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