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에 비하여 앞의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 또는 그 어떤 산술적 비교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복지무비란 복과 지혜를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복과 지혜는 함께 닦아가야 할 중요한 수행의 요소지만 세속적인 복을 짓는 일을 출세간의 지혜를 닦는 것에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의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 대천 세계에서 제일 큰 산인 수미산왕만한 칠보들을 가지고 널리 보시한다 하더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이 복덕에 비하여 앞의 복덕은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고, 백천만억분의 일 또는 그 어떤 산술적 비교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여기에서 네 글귀로 된 한 게송이란 금강경의 사구게를 말할 수도 있겠고 나아가 부처님 진리 말씀 가운데 진실로 어느 한 구절 만이라도 라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이라는 것이 다 다른 듯 보이고, 경전도 수없이 많으며, 교리도 수없이 많고, 수행법도 복잡 다단하게 느껴지며, 스님들의 설법을 듣고 수많은 절에 다녀 보더라도 처음에는 다 다른 얘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다 보니 불교를 배우려면 공부할 것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방편이 많은 것이지 그 근본은 복잡하지가 않다. 그 근본은 하나다. 그래서 불교 공부를 하다보면 처음에는 너무 힘들고 어렵고 복잡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고 정리도 안 되고 하다가 어느 순간 그 근본을 비춰보게 되면 일순간 그 모든 복잡하던 것들이 하나로 정리가 되고 귀일이 된다. 그 본질은 서로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구게라는 것의 상징적인 의미도 바로 그 근본, 본질을 꿰뚫고 있는 부처님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사구게, 즉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이 담긴 사구게를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남을 위해 설해 준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사구게를 받아서 그 말만을 읽고 외우고 남에게 전달해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이해도 없이 깨달음도 없이 공허한 말만 골백번을 외우면서 남에게 전달해 준다면 그것이 어찌 큰 공덕이 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말하는 사구게를 받아 지닌다는 뜻은 부처님 가르침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구게의 진리를 온전히 내 깊은 정신 안에서 깨달아 환히 체득이 된 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야 단순히 받는 것이 아닌 받아 내 존재 안에 지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온 존재로써 받아 지녀 깨달아 알고 입으로는 늘 읽고 외우며 남에게 그 깊은 의미를 온전히 전달해 줄 수 있다면 그 공덕이야말로 온 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내 존재 안에서 깊은 깨달음으로 받아 지닐 수 있어야만 다른 사람들에게 온전히 전해 줄 수 있다. 내 스스로 사구게의 깊은 이해와 깨달음이 없다면 어찌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수 있겠는가. 이렇듯 내 스스로 깊이 깨닫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사구게의 본질적인 진리를 깨닫게 해 줄 수 있다면 이 공덕이야말로 한량 없이 크다. 크고 작은 분별을 넘어서서 대 평등으로 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삼천대천세계에서 가장 큰 산인 산중의 왕, 수미산왕 만큼 큰 칠보를 가지고 널리 보시한들, 그런 물질적인 보시가 어찌 깨달음을 가져다 주는 사구게 법의 보시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보라. 세계 1등 가는 기업 회장이 수천억의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며, 그 물질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시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이 얼마나 큰 보시이겠는가. 그로인해 수많은 사람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며, 물질적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공덕이란 말인가. 그러한 보시의 공덕으로 그 사람은 앞으로 있을 수많은 윤회의 기간 동안 끊임없이 부유하게 태어날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과보를 누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유위의 공덕은 반드시 좋은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물질적으로 부유하면 그만큼 가난했을 때 느낄 수 있는 삶의 의미들을 얻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게 되면 그만큼 스스로 우쭐해지거나 교만해지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계속해서 대 그룹의 회장으로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고통을 모두 소멸시켜 주는 것은 아니다. 세상의 많은 부자들을 보라. 그들이 돈이 많고 가진 것이 많을 지언정 가진 물질의 양만큼 마음도 풍요로운가. 오히려 물질이 많아지면 그 물질에 휘둘리는 일이 많아지고 되려 소유당하는 측면이 많아진다. 그 재산을 계속 유지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 재산에 이끌리면서 일평생을 재산을 지키는데 에너지를 써야 할 것인가. 가까운 우리의 재벌들을 보더라도 그들의 삶이 행복과 평화와 여유와 고요함이라는 본질적인 삶의 미덕과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는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수행을 한다거나, 기도를 한다거나, 홀로 고요한 시간을 가진다거나,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다거나, 집착과 욕망을 지켜보고 비운다거나 하는 그런 본질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을 것이다. 그 시간을 가진 재산을 지키는데 다 소비해야 할 지 모른다.
설령 백 번 양보 해 그렇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스스로 윤리와 정신을 잘 지켜나간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나고 죽고 병드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면할 수는 없다. 그러니 어떠한가. 물질적인 부유함, 물질적인 보시의 과보는 이렇듯 유위의 복에 불과한 것이다. 물질적인 보시의 공덕이 우리를 생사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참다운 내면의 깨어있는 정신을 세워주지는 못한다. 물질적인 보시의 과보는 물질적인 풍요일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앞서 말했듯이 물질적인 과보는 오히려 우리에게 정신의 풍요를 앗아가게 하는 빌미를 제공할지언정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적인 풍요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어떠한가. 아무리 칠보로써 삼천대천세계의 가장 큰 산인 수미산왕만큼을 보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깨달음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혜가 구족되어 있는 사구게를 온전히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그 공덕은 나와 남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완전한 내적인 평화로 이끌어 줄 수 있다. 그러한 사구게의 깨달음은 물질적인 풍요보다도 더 큰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 준다. 사구게의 깨달음과 정신적인 풍요는 곧 내 것과 네 것이라는 분별을 없애주기 때문에 ‘내 것’이 많아지는 물질적인 풍요 정도가 아니라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가 전부 나와 둘이 아니요, 전부 내 것일 수 있는 무한한 절대 풍요를 가져다 준다. 그 사람에게 물질적인 많고 적음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나고 죽는 것이며, 내 것을 늘리는 것이며, 세속의 그 모든 욕망과 집착 그리고 괴로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 어찌 물질적인 보시를 사구게를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연설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정심행선이란 깨끗한 마음이란 선을 행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앞서 6분 정신희유분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선법이란 악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선한 법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 즉 ‘지혜로운 마음 집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심이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고 있다. 무상정등정각의 완전한 깨달음이야말로 깨끗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심행선은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진리의 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발 붙일 틈이 없다. 높고 낮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선하고 악하다거나, 크고 작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나아가 어리석고 지혜롭다거나, 중생과 부처라거나, 생사와 열반이라는 개념조차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개념일 뿐 진실한 법의 바탕에서는 그 모든 차별이 대 평등의 용광로 속에 녹아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보라. 모든 것이 차별과 나뉨이 세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높고 낮은 구분을 두어 차별하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능시험을 보더라도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등부터 꼴지까지 등수로써 높낮이를 매겨 차별하고, 기업도 대학들도 무슨 무슨 평가의 틀에 따라 등수를 매겨 세계에서 몇 위의 기업인지, 대학인지를 가늠하곤 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차별된 어리석은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 모두가 직장에서 서열에 의해 등수가 매겨지고, 점수화되어 관리되고, 나아가 먹거리들 또한 어떤 틀에 맞춰 몇 등급인지가 정해진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수많은 잣대와 기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따라 높고 낮은 차별을 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높고 낮은 틀을 정해두고 그 결정에 따라 사람들의 등수가 정해진다. 또 그 등수에 따라 사람들 서로간에 차별이 일어나고 불화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 높고 낮은 차별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흔들고 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투쟁하고 싸우고 심지어 국가간 인종간에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이 사회는 사랑과 자비의 장이 아닌 무한 경쟁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곳 낮은 계층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만 보다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할 것인가에 달려있고, 반대로 괴로움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열등에 놓여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이란 무엇인가. 바로 높고 낮음을 나누는 차별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이 차별이 모든 세상의 괴로움을 몰고 왔고, 세상의 모든 사랑과 자비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여기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자. 법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그렇듯 높고 낮음을 차별하는 거기에 있지 않고 대평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는 만인, 만생명 대평등의 가르침 속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은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차별 뿐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사람과 자연간의 높고 낮은 차별의 마음이 지금 이 세상을 극단적인 환경 악화로 인한 멸망 위기까지 몰고 왔다. 신과 인간도 차별되어선 안 되고, 인간과 동식물도, 인간과 자연도 차별되어선 안 된다.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이 세상은 완전한 하나의 생명이요, 온전한 법이고 불이고 신으로써 대평등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 평등의 가르침,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을 완전한 평화의 땅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를 완전한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 대 평등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 존재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기 때문에 너와의 차별이 생겨난다. 나와 너의 차별이 생겨남으로써 나아가 우리나라와 남의나라,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 등의 모든 부가적인 차별들이 연이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차별의 원인은 바로 아상에 있다. 아상을 타파하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높고 낮은 차별도 생길 수 없다. 내가 있어야 나를 더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으며, 내가 높아졌을 때 오는 기쁨도 누릴 수가 있는 것인데, 나라는 아상이 소멸되고 나면 내가 남보다 더 높아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와 남이란 차별이 없다면, 그래서 나와 남이 서로 둘이 아닌 한생명이란 자각이 있다면 나와 남 사이를 높고 낮게 나눌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높고 낮은 차별 없이 일체만유, 만생명이 대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구마라집의 한역의 의미로 보자면 착한 법을 닦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지만 이를 착한 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악한 법에 상대되고 차별되는 선한 법이기에 이 또한 높고 낮은 차별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법의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의 가르침’ 즉 ‘마음 집중’의 수행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이 일체의 마음 집중 수행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이해해 보면, 이 법 즉 진리의 가르침은 높고 낮음도 없이 대 평등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높고 낮음 없는 대 평등의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에서 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체 상의 타파는 마음 집중의 수행을 통해 온다. 그러니 다시 돌려 말하면, 높고 낮음 없는 대평등의 진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집중의 수행을 통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왜 불교의 가르침이 무차별이요 무분별인지, 무아이며 무아상인지, 왜 대평등인지, 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분명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분이 바로 정심행선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부처님은 자비로운 우려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났더니 ‘아! 그러면 마음 집중의 수행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집중’의 수행에 집착하고 있을 중생들을 위해 선법 즉 마음집중의 수행 또한 그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 거기에 집착할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마음집중의 수행, 구체적으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이라는 수행을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하여 그 어떤 정해진 ‘수행법’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도 이름 뿐인 것이지 거기에도 빠지면 안 된다. 요즘 위빠사나니 관수행이니 정념, 사띠, 알아차림, 비추어 봄, 깨어있음 등 마음 집중의 수행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칫 그 말에도 집착하여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주고 있는 부분이다.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과 간화선을 공부하는 수행자 혹은 염불이나 진언, 독경이나 절 수행 등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요즘도 많이 있는데 때때로 어떤 수행법이 더 우수한가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자신의 수행법이 더 우수함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이런 다툼도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대평등의 법을 거스르는, 높고 낮은 차별심에서 나왔으며, 나아가 어떤 한 수행법에 집착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우려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해 금강경에서 말하고 계신 것이다. 선법도 선법이 아니니 이름이 선법일 따름이다. 즉 마음집중이란 수행도 마음집중 수행이 아니니 다만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2천 5백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처럼 분명하고 자비롭다.
높고 낮은 일체의 차별심을 거두어 대평등으로 향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찌 수행법의 높고 낮음을 논할 것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수행법은 다만 방편에 있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높고 낮음이 없는 대평등의 마음 집중 수행법에 다름 아니다. 즉 위빠사나도 간화선도 염불도 참선도 진언도 독경도 절 수행도 그 모든 수행도 모두 그 중심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에 있다. 염불하는 수행자가 마음을 염불에 모아 주의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과 번뇌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어찌 염불수행일 수 있겠으며, 절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지 않고 몸만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면 그것이 어찌 수행이 될 수 있겠는가. 절을 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 수행이 아니라 단순한 다리운동에 불과할 것이고, 염불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입 운동이고 소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간화선도 마찬가지다. 화두를 의심하며 그 의심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분별하고 따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어찌 그 사람을 화두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든 수행법의 본질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색이상이라는 것은 형상과 모습을 여읜 자리에 부처님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부처님을 형상과 모습으로써 생각하곤 한다. 전국의 어느 사찰을 가 보더라도 부처님의 모습이 형상으로써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당의 형상불에 예배한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잘못되었으니 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임을 완전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법당에 모셔진 형상의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색이고 상일 뿐이다. 본질은 색과 상을 떠나 있다. 법당에서 절하고 예불을 올리면서도 항상 이 참된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분에서는 부처님을 또 진리를 형상이나 모습으로써 바라보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구족한 색신의 몸을 갖추었으며 32상 80종호를 구족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의 상호를 말로 표현하는 순간 사실은 그것과는 멀어지고 만다. 그 말이 부처님을 그대로 나타내 줄 수는 없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로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에게 어떻게 부처님과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성을 표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말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구족한 몸이고 구족한 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구족한 상이나 구족한 몸이라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구족되었다는 이름일 뿐 ‘구족’이라는 언어 자체가 구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족은 곧 구족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구족일 뿐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형상과 모습을 떠나서 계신다. 부처님을 어떤 모습을 가지신, 어떤 형상을 구족하신 존재로써 생각지 말라. ‘부처님은 어떤 분이실까?’ ‘부처님은 인자하신 할아버지 같은 분이실거야?’ ‘부처님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부처님의 몸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도 형상과 모습으로써 부처를 구하고 있는가? 부처님은 형상이나 모습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이란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 그 자체이고, 우주 그 자체이며, 허공 그 자체이고, 완전한 무(無)요, 공(空) 그 자체이다. 크고 작은 것도 아니고, 잘나고 못난 것도 아니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 어떤 한정이나 표현으로도 나타낼 수 없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들이 부처님을 나타낼 수는 없다. 다만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 이 표현은 더 이상 부처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부처를 틀 속에 가두느라고 애를 쓰고 있다. 법당에 계신 부처님의 모습을 보라. 대부분이 비슷비슷하다. 비슷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법당의 부처님의 모습을 부처님이라고 믿고 있다. 은연중에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법당의 부처님 형상 안에만 부처님이 담겨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교의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을 생각해 보라. 그 상은 부처가 아닌가? 왜 그 상을 보면 거부감을 느끼고 불상을 보면 흡족한 마음을 가지는가.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탱화를 보면 편안한 느낌인데 교회의 예배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를 색과 상으로 관념화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색과 상에 갇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색상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다. 법당의 불상도 부처요,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 또한 부처일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저 하늘의 구름도 부처요, 바람도, 흙도, 자연도, 저 산과 바다 또한 부처의 몸이다. 나무와 풀꽃들과 새와 들짐승에서부터 곤충이나 미생물들에 이르기까지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 형상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은 그대로 부처를 담고 있다.
부처는 형상이 아니다. 불상 안에만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는 불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불경 안에만 부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만 부처가 있다거나, 진리가 있는 것일 수 없다. 불교는 다만 온 우주의 진리를, 법을, 도를, 참을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이 불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불교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불교의 특성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불교 신자들의 자유로움이요 유연함이다. 그것이 진리의 전일성(全一性)이요, 전체성이다. 불교는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불경만을 진리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바로 불교다. 불교이기 때문에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진리를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 신자들은 ‘불교’ 속에 갇혀 있고, ‘부처’ 속에 갇혀 있다. 불교라는 이름에 갇혀 있고, 부처라는 형상에 갇혀 있다. 갇혀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할 때 대립과 갈등이 일어난다. 타종교 신자들과 갈등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만이 진리이고 다른 가르침은 불교보다 열등하다는 상을 만들어 낼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는 불교를 종교로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진리를 종교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 속에, 혹은 ‘조계종’이라는 교단 속에, ‘불경’이라는 경전 속에만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속에 혹은 코란 속에 혹은 도덕책 속이나 소설책 속에, 혹은 할머니 할아버님의 말씀 속에, 노자나 장자의 고전 속에, 인디언들의 말들 속에, 어린 아이의 행동 속에, 목사님과 신부님들의 말씀 속에도 진리는 담겨있다. 불교는 담겨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말들이, 모든 고전들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모두 다 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의 핵심은 ‘불교’ 속에서만 진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불교는 순수한 진리의 보고라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다른 가르침 속에도 불교는 담겨있다. 어떤 종교는, 어떤 사상은 다른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그대로가 진리를 담고 있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니 불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목적이 오직 ‘불교’에 가 있다는 말이고 그랬을 때 ‘불교’ 그 자체에 갇히거나 집착되기 쉽다. 그러나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불교’라는 이름이나 틀을 믿는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리성을 믿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믿는자는 거기에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그것이 진리를 대변하고 있다면 마땅히 믿을 수 있는 열려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노자나 장자를 공부해도 좋고, 성경을 공부해도 좋으며, 인디언의 가르침이나, 옛 어르신의 가르침이라도 전혀 편견이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말에 갇히고, ‘불교’에 갇히고, 어떤 틀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일단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오면 일단 내 안의 문을 자물쇠로 콱 틀어 잠그고 본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한 마디 했다고 치자.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왜 우리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그것이 부처님이 아닌 것에 왜 서운함을 느껴야 하는가. 참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부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을 온전하게 지혜로써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성경 안에서 불경을 진리를 이해한 사람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라고 했을 때 그 하느님을 잘못 믿고 잘못 이해하며 하느님이란 상에 갇혀서, ‘기독교’란 상에 갇혀서 믿는 사람을 측은한 자비심으로 바라봐야 한다.
물론 성경 특히 구약 속에 수많은 오해의 구절들이 있고, 말 그대로 이해했을 때 진리를 무색하게 할 만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코란도 마찬가지다. 그 가르침을 잘못이해하거나, 근본적으로 그 경전들이 만들어질 때의 시대적 상황, 편집한 사람들의 잘못 등이 후대에 큰 악영향을 끼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많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들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끌어 갔는가. 그러나 문자의 틀에 갇히지 않고, 문자라는 방편, 언어라는 방편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들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그 종교의 그 경전의 언어 이전에 담긴 참 진리를 온전하게 이해했던 수많은 성인들, 종교인들은 여전히 그 모든 종교들의 순수성과 진리성의 전통을 이어왔다. 바로 그들은 성경을 문자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성경의 수많은 말들이 말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말이었음을 온전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언어가 가지는, 형상이 가지는 모순과 오류들을 이해한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몸이나 상에 치우치지 않고, ‘성경’이라는 상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물론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참된 불교의 정신을 이끌어 온 사람들은 ‘불교’라는 틀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그 틀을 뛰어넘은 사람들이다. 불교가 불교가 아님을 바로 보고, 부처의 형색이 형색이 아님을 바로 본 사람들이 바로 그 진리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바로 그 정신, 그 진리의 참된 정신을 있는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보배요, 불교 정신을 이어 온 요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금강경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금강경인 이 금강경을 받아들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동관(一切同觀)이란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관찰하여 본다는 뜻이다. 그렇게 차별하여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보는 눈이 바로 부처님의 오안(五眼)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오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또 중생들의 마음을 차별하여 나누어 보지 않고 한바탕, 한생명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오안으로 일체를 동관하여 알 수 있는 이유는,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의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며, 즉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라는 삼세의 어떤 마음도 고정된 실체가 없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오안의 눈으로 일체를 동관함으로써 모든 중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육안이란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을 말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과거나 미래의 것도 보지 못하고, 공간적으로 다른 장소의 것 또한 보지 못하며, 눈을 가리기만 해도 보지 못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다만 빛의 도움을 통해 내 눈 앞 사물의 모양과 색깔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 평범한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눈은 오안 가운데 바로 첫 번째 눈인 이 육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모든 갈등과 시비와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생겨나곤 한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이 육안 뿐 아니라 천안, 혜안, 법안, 불안 등의 또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여기에서는 오안 가운데 첫 번째인 육안을 모든 중생들처럼 부처님 또한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두 번째 눈, 천안에서부터는 평범한 인간계의 사람이나 축생들이 가지지 않고 있는 눈이다. 천안은 말 그대로 하늘의 눈, 천상세계 신들의 눈으로 인간의 육안을 넘어 시공을 초월하는 눈의 기능이 있다. 천상 신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걸리지 않는다. 육신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막힘이 없다. 그러니 천안이란 공간에 걸림이 없는 눈이며, 이 곳에서 어느 곳이든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또한 천상 신들은 그 종류에 따라 인간계의 몇 백년이 그 하늘의 하루인 경우가 있는 것 처럼 시간적으로도 인간계에서와 같은 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천안은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어 과거와 미래에 있을 생사의 모양을 미리 알 수 있는 눈이기도 하다.
[지도론]에서는 ‘천안으로 보면 땅에서부터 하지(下地)의 육도와 중생 제물(諸物)을 본다. 가까운 것이나 먼 것이나 큰 것이나 작은 것 등 모든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천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수행(修)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인간계에 태어나 선정을 닦고 수행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천안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보(報)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색계의 하늘에 태어나 스스로 천안을 얻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세 번째는 혜안으로 말 그대로 지혜의 눈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고, 법안은 법의 눈이며, 불안은 부처님의 눈이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끝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일체 모든 존재의 본바탕에 있는 본질, 불성, 참성품을 깨달아 아는 지혜로, 삼독심 등 일체 모든 번뇌가 사라져 근본불교에서 말했던 무상, 무아, 고, 중도, 연기의 이치를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눈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같은 근본불교 아라한들이 지니고 있는 눈이다.
성문은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 수행하는 수행자를 뜻하며,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를 말한다. 이에 비해 연각은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며, 성문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한다. 이 두 수행자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서 대승불교에서 강조되고 있는 보살은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자신의 깨달음 보다 중생구제에 더 큰 원력을 세움으로써 원력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성불도 뒤로 미룰 정도의 굳은 서원을 가진 수행자를 말한다.
혜안은 바로 성문과 연각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이들의 지혜의 눈을 말하고, 법안은 보살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 보다는 중생구제에 원력을 세운 이들의 눈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그동안 성문과 연각 등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하면서 법안을 구족한 대승의 보살승을 완전한 이상적 수행자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사상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생사와 열반을 나누지 않으며, 중생과 부처를 차별하여 나누지 않는 가르침을 볼 때 자신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라한의 입장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곧 온 우주 법계의 깨달음과 둘이 아니다. 나라는 한 생명은 곧 온 우주 법계의 전체 생명과 둘이 아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며[一卽一切多卽一], 한 티끌 속에서도 시방세계를 담을 수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한 법성게(法性偈)의 게송을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소승이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법계의 깨달음이며, 전체 생명이 함께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모든 생명의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실현해 보인 사람이다. 아라한의 지혜인 혜안을 통해 일체 모든 생명과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금강경 해설에서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능히 삼세의 일체법을 낸다고 여기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고 했다. 즉 하나의 진리가 삼세의 일체법을 내기 때문에 애써 삼세 일체법을 다 깨닫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진리 그 하나를 깨닫게 되면 일체 모든 법을 깨닫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혜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혜안이란, 지혜의 눈으로써,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중생들이 결국 하나임을 보는 것이며, 무분별의 세계에서 모든 분별상들을 하나로 회통하는 것이고, 하나가 곧 전체임을 깨닫는 것이며[一卽一切], 이치가 곧 현상계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理事無碍法界], 공의 세계에서 색이 하나임[空不異色]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반대로 법안을 구족한 대자대비의 보살은 일체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을 통해 자신 또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다. 일체 모든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곧 내가 깨닫지 못한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일체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도 완전한 깨달음의 향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보살은 법안을 통해 일체 모든 존재의 깨달음이 곧 나의 깨달음임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육조스님의 해설에 보면 ‘일체 불법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을 법안이라고 한다’고 했다. 즉 일체 불법은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들 내면에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살은 그 모든 중생들의 본래 갖추어진 불법을 일깨워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대자대비의 법안을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안은, 자비의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에서 곧 진리를 보는 것이며, 분별상의 세계에서 무분별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전체가 곧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며[多卽一], 현상계와 현상계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事事無碍法界], 색의 세계에서 공이 하나임[色不異空]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불안은 말 그대로 부처님의 눈이다. 부처님의 눈은 소승에도 대승에도 치우침이 없으며, 하나에도 전체에도 치우치지 않고, 부처에도 중생에도, 아라한과 보살에도, 생사에도 열반에도, 색에도 공에도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무차별, 무분별의 눈이다.
불안은 모든 중생들 개개인 속에서도 깨달음을 보며 깨달음 속에서 다시 중생들의 삶을 본다. 그렇기에 깨달아 부처가 되어도 구제할 중생이 없고, 중생을 다 구제하면서도 하나도 구제하는 바가 없다. 차별상 속에 무차별이 있고, 또한 무차별 속에 차별로써 무한히 나툴 수 있다. 전체가 곧 하나이며 하나가 다시 전체를 품고, 현상계와 진리계라는 나뉨을 뛰어넘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임을 동관한다. 일체 모든 나뉨들을 거두어들여 동관하는 눈이 바로 일체동관의 부처님의 눈, 불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항하의 모래의 비유는 법계의 세계가 한량없이 많으며, 그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그 많은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드신 것이다.
여래는 모든 국토의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다 안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중생들과 그 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부처에서 나왔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마음과 중생 이 셋은 다르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그 나온 곳이 서로 다르지 않다. 일체를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관해 본다는 것, 일체동관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일체가 둘로 셋으로 천으로 만으로 갖가지로 나누어 볼 수 없으며, 돌이켜 관해보면 한성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한량없이 많고, 그 많은 사람들이 쓰고 사는 마음 또한 팔만사천을 넘을 것이지만 그 모든 마음, 그 모든 중생은 모두 한바탕에서 나왔다. 나뭇가지며 잎사귀들은 한없이 많고 다양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다 뿌리가 근원이 되어 나왔듯이, 이 세상의 모든 중생과 중생의 마음 또한 나온 곳은 하나다. 그 하나를 이름하여 부처라고도 하고, 불성, 신성, 하늘, 주인공, 일심, 본래면목, 어머니 대지, 도, 깨달음 이라고도 하는 것일 뿐, 그러나 어느 하나를 고정지어 이름을 명명해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그 모든 곳은 하나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중생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많고 다양하고 복잡하며 상황따라 경계따라 인연따라 끊임없이 오고 가는가. 그러나 그 모든 마음이 저마다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인연이 오느냐에 따라 그 인연에 응하여 한 마음이 일어나고, 하나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그 인연이 다함에 따라 자연스레 그 마음은 소멸되는 것이다. 육신도, 마음도, 생각도, 번뇌도, 업(業)도 모두 인연따라 잠시 왔다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것에도 고정된 실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듯 실체가 없이 인연따라 오고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인 것이다. 마음이라고 명명한 이름이 있을 뿐이지 마음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일체 모든 마음도, 물질도, 업도 수도 없이 내고 들이지만 그것을 내고 들이는 본 바탕은 허공과도 같은 한성품이요, 여래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여래가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모를 수 있겠는가.
바다가 물결을 모를 수는 없다. 물결은 제각기 인연따라 다 다르지만 결국 물결 또한 바다의 한 모습일 뿐인 것과 같다. 물결은 수도 없이 많은 인연을 만나 수도 없이 다양한 물결의 모습을 만들어내지만 그 물결의 바탕은 바다이지 별도로 물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별도로 물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물결의 성품은 바다일 뿐이다. 물결은 실체가 아니다. 다만 물결이라 이름 지었을 뿐, 그 근본은 바다다. 그러니 어찌 바다가 물결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라고 했다. 마음은 그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두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 까닭은 바로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과거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온 적이 없고, 또한 미래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 온 적도 없다. 오직 우리가 쓸 수 있는 마음은 순간 순간이었을 뿐이다. 즉 과거라고 생각하고 미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만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과거나 미래의 마음은 본 적도 직접 써본 적도 없다. 과거에 쓴 마음도 사실 그 때는 그 순간이었지 결코 그것이 과거의 마음이 아니었다. 과거나 미래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다. 다만 우리가 과거다, 미래다, 현재다 하고 이름지어 놓았을 뿐이지 우리는 늘 순간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을 만들어 놓고는 우리 스스로 그 개념에 얽매여 과거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미래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할 뿐인 것이지 본디 시간이란 개념 또한 텅 비어 공할 뿐이다. 오직 순간 순간 즉(卽)한 상황만이 있을 뿐 우리에게 시간은 없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그건 그냥 지어놓은 이름일 뿐이다.
과거라고 애써 이름지어 놓았지만 그 실체가 있는가. 과거를 살아 본 적이 있는가. 과거는 지나가지 않았다. 과거가 내 앞에 지나갔던 그 때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를 살아와 지금이라는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순간 순간을 살아왔을 뿐 과거를 살아온 적은 없다. 과거는 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 백 번 양보 해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과거는 지나갔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마음을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는 없다. 과거라는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개념이고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과거의 마음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말장난일 뿐이다.
미래 또한 실체가 없다. 미래라는 이름이 있을 뿐. 도대체 그 누가 미래를 본 적이 있단 말인가. 미래에 가 본 적도 미래를 살아 본 적도 없다. 백 번 양보해 아마도 언젠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한들 그것은 언젠가 있을 예정일 뿐 현존인 것은 아니다. 예정이라는 것은 꿈이라는 말이고 환영이라는 말이며 물거품이란 말과 무엇이 다른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오지 않은 것이다. 실존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오는 순간은 이미 그것은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일이 있을 지 없을 지 그걸 어찌 알겠는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를 살게 한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이었지 결코 과거도 미래도 아니었다. 그렇듯 미래라는 것이 텅 빈 환상일 뿐인데, 어디에서 미래의 마음을 찾을 것인가. 미래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이렇듯 과거도 미래도 텅 빈 비실체적 관념일 뿐, 다만 이름일 뿐이다. 그러니 과거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거나 미래를 살 수 없고 오직 순간의 현재를 살 뿐이니 현재의 마음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마음이 무엇인가. 현재의 마음은 순간 순간 인연따라 상황따라 조건따라 찰나로 생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찰나로 멸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 저 혼자 실체가 있어 만들고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재라는 찰나 또한 마음은 없다. 본 바탕은 오직 무심(無心)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 인연의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면 인연에 따라 마음이 잠시 움직일 뿐이다.
자 이 사람의 일상을 보라. 아침에 동이 틈과 동시에 자연스레 일어나 자연스럽게 씻고 밥 먹고 출근을 한다. 그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해가 뜨니 내 눈도 떠졌고 눈이 떠지니 일어나 씻었으며 배가 출출하니 밥을 먹었을 뿐이다. 그건 애써 억지로 마음을 찍어 눌러 한 행위가 아니다. 다만 무심에서 무위(無爲)로 한 것일 뿐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한 것이다. 그런데 출근을 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차를 몰고 출근을 하는데 앞에 차가 끼어드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안에서 화가 치민다. 불같이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화나는 마음으로 욕도 하고 싸움도 건다. 분한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출근해서도 마찬가지다. 쌓인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괴로운 마음이 생겨난다. 그로인해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하고 답답하다.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진다. 그러다가 또다시 직장 상사에게 칭찬을 받고 일에 대한 포상을 받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심은 사라지고 즐거운 마음이 생겨난다. 진심은 더 이상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이제 남은 마음은 행복감이다. 그러다가 또 다른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괴롭고 즐겁고, 외롭고 들뜨고, 수도 없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우리 마음이 이와 같다. 일상에서는 다만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일반적일 때, 별 일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은 없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본래 마음이고 본성이다. 본래 우리의 최초는 텅 빈 무심이었고 무위였으며 무작(無作)이고 무주(無住)였다. 그러나 조건이 생겨날 때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도 함께 일어난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독자적이지 않고 조건적이다. 평상심은 조건과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온갖 마음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조건이고 상황이다. 마음 안에서 스스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상황에 따라 잠깐 그 상황에 맞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그렇듯 마음엔 실체가 없다. 현재에 일어나는 이 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황과 조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 상황이 지나고 나면 그 마음도 사라지고, 다음 상황이 올 때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난다. 그렇게 조건에 따라,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현재의 마음을 찾겠는가. 그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환영처럼, 꿈처럼, 물거품처럼 파도쳤다가 사라져갈 뿐인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과거의 마음에도 현재의 마음에도 미래의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마음이 없는데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집착할 주체도 없고 집착의 대상도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집착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마음에 집착한다. 그러니 우리가 괴롭다, 혹은 즐겁다, 외롭다, 슬프다 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또한 그런 마음에 스스로 얽매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지금까지 붙잡고서는 그 과거의 마음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일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먼저 분별하고 계획하고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거기에 울고 웃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한 현재에 주변 상황에 따라 실체없이 찰나생 찰나멸하는 마음에 휘둘리는 것은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 모두가 마음 없음, 무심의 도리를 어기는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모두가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금강경의 이치에 어두운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공연히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공연히 스스로 그 마음에 빠지고 집착하며, 또한 공연히 그 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다가 그 마음이 다하면 아쉬워하고 서글퍼하는 이런 어리석고도 공허한 일들이 우리 삶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아니 일어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러니 우리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금강경에서는 바로 그 점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마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은 다 개시허망일 뿐이며, 마음 그 자체도 없다. 오직 무심만이 이 허공같은 세상에서 환히 빛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마음 없음. 무심의 이 도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무심하게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무심하여 걸림 없을 수 있어야 한다. 본래 없던 마음을 애써 만들어내어 그 만들어 낸 것에 한껏 휘둘리다가 수행을 통해 그 마음을 없애고 비워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무심이었음을 보면 된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닦을 것이 없다고 했다. 본래불이라고 했다. 깨닫고자 하거든 공연히 수행하고 마음을 닦고자 할 것이 아니라 본래 마음 없는 도리를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까닭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17분 구경무아분은 금강경의 가르침이 구경에는 무아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임을 지금까지 앞서 설했던 예들을 들어가며 설하고 있다. 발심한 보살들은 마음을 항복받고 수행하며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에도 ‘나’라는 상에 머물지 말아야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한 법도 얻은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것도 실은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가면서 그 어떤 경계에도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되고, ‘나’라는 상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래는 ‘무아법’ 즉 ‘내가 없다’는 법에 완전히 통달하였을 때 그 사람을 보살이라 부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내가 깨달았다’ 혹은 ‘내가 법을 얻었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는 등 일체의 ‘내가’라고 하는 감옥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 분에서 끊임없이 설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내가 한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보살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금강경에서 지금까지 설해 온 가르침은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된다. 아상을 타파하라는 그 한 가지의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아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항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는 것이 항상하고 실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온 존재를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항상하지 않는다. 즉 무아(無我)이며 무상(無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동반한다. 다시말해 ‘나’의 실체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삼법인(三法印)의 법칙을 따른다. 나는 항상하지 않고[諸行無常],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으며[諸法無我], 그렇기에 나라는 것은 곧 괴로움[一切皆苦]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바로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나’ 이외의 것들에서 괴로움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를 근원으로 하고 있다. ‘나’라는 집착에서 ‘너’라는 상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주관의 성품이 삼법인으로 공(空)하기 때문에, ‘너’라는 상대 또한 삼법인의 성품으로 똑같이 공한 것일 뿐이다. ‘나’도 삼법인이며, ‘너’도 삼법인이고, ‘일체제법’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모두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괴로움인 삼법인의 성품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는 주관도, ‘상대’라는 객관도 모두 삼법인으로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렇기에 ‘나’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엔 괴로움을 가져오며, ‘상대’에 집착하는 것도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이나 명예, 지위, 권력, 이성, 사랑, 학벌, 소유물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의미한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항상하거나 실체적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깨달음, 멸도, 해탈,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 까지도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내가 수행한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내가 법을 얻었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거나 하는 등의 말에도 ‘내가’라고 하는 아상이 전제되어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며 무아법의 통달이 아니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내가’라는 상도 붙어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아(無我)’라는 진리를 깨닫는 데 있다. 무아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은 삼법인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공성(空性)을 깨닫는다는 말이고, 연기법, 중도(中道)를 깨닫는다는 말과도 같다. 또한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무소득(無所得)’을 깨닫는다는 말이기도 하며, 화엄경의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諸法宗本來 常自寂滅相)’, 열반경의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가르침과도 같으며, 조주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나, 무소유(無所有), 무분별(無分別), 무자성(無自性), 무소득(無所得)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의 가르침,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등의 사구게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이 말을 간단하게 풀어보자.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인 것이 없으며 그렇기에 일체가 괴로움이라는 삼법인의 가르침 때문에 무아인 것이고, 공인 것이다. ‘나’와 ‘세상’을 비롯한 일체의 삼라만상(森羅萬象) 오온(五蘊)이 결국에는 다 항상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공이다.[照見五蘊皆空] ‘나’라는 실체가 있으려면 항상해야 하고 고정되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하니 ‘나’가 아닌 ‘나 없음’ 즉 무아(無我)인 것이다. 항상하고 실체적인 것이 없으니 집착할 것이 없고[無執着, 放下着], 얻을 것이 없으며[無所得], 언제까지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無所有] 집착이란 언제까지고 항상하길 바라는 마음인데 존재의 본질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집착은 결국 괴로움을 부를 뿐이다.
그러면 그렇게 일체가 다 공(空)이고,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렇게 움직이는 ‘나’는 무엇이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무아라면 내가 없다는 말인데, 분명 우리 눈앞에는 내가 있고 상대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다 인연[緣起法]의 나툼일 뿐이다. 수많은 크고 작은 인연들로 인해 잠시 ‘나’도 만들어지고, ‘대상’도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이 다 하면 누구든 사라지고 또한 다시 인연이 모이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생사와 윤회 또 이 모든 존재들과 그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으며 환영과 같은 것일 뿐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모든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앞서 말했듯 그 허망한 상이 여러 모양으로 나투는 법칙이 바로 연기법, 인연법, 인과응보인 것이다. 바로 이 점, 일체 모든 존재는 다 환영과 같이 허망한 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을 바로 관(觀)하는 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상이 허망하며 무아이고 공하여 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이와같이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인연따라 잠시 모였다가 흩어질 뿐이다. 고정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인연따라 많이 베풀었다면 부자로 태어나는 것이고 인색하게 살았다면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인연따라 생사가 벌어지고, 아름다움과 추함, 크고 작음, 옳고 그름이 생겨날 뿐이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아름다움도 영원하지 않고 추함도 영원하지 않다. 크고 작다는 것도 옳고 그르다는 것도 다만 인연따라 그렇게 보일 뿐이지 고정된 것은 없다. 그렇기에 연기법의 세계, 무아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분별할 것이 없다.[無分別] 그렇기에 어느 한 쪽으로 고정 짓는 극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극단은 어리석은 견해일 뿐이다. 그렇기에 연기법, 무아의 세계에서는 어디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오직 중도만이 지혜를 전해 줄 뿐이다.[中道]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따라 잠시 변화하는 것 뿐이지 영원한 마지막과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사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사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생사는 껍데기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 본질에는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나고 죽지 않는 영원한 안식처가 있다.[生死卽涅槃] 일체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적멸의 모습이다.[諸法宗本來 常自寂滅相] 그렇기에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生滅滅已 寂滅爲樂] 바다는 항상 고요하지만 물결은 날씨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 처럼, 우리의 본질에는 대 열반의 적요가 있지만 우리의 껍데기는 항상 울고 웃고 변화한다. 우리의 저 깊은 존재의 심연(深淵)에 있는 바다와 같이 고요한 그것을 열반(涅槃)이라고도 하고 해탈(解脫)이라고도 하며 적멸(寂滅), 혹은 깨달음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즉 삼법인(三法印)이지만 그 본질, 근원에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를 완전히 여윈 대 열반의 적멸이 있는 것이다.[涅槃寂靜]
바다의 물결은 인연따라 거세게 몰아쳤다가 잔잔해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우리의 삶과 같이 인연따라 울고 웃고, 행복하고 불행하고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물결도 결국에는 바다 그 자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울고 웃으며 중생으로써 살고 있는 듯 보여도 사실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바로 참부처인 것이다.[自性佛] 본래부터 부처인 것이다. 물결이 바다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물결도 본래는 바다와 하나이듯, 우리도 중생이니 부처가 되겠다고 애쓸 것 없는 본래부처인 것이다.[本來佛] 그런데 전도된 몽상[顚倒夢想] 때문에 우리는 물결의 움직임에 울고 웃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물결이 곧 바다인 것을, 중생이 바로 부처이며, 생사가 곧 열반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은 오직 잘 지켜보는 길[觀] 밖에 없다. 물결이 바다가 되겠다고 자꾸만 애쓰고 고생하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다만 물결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잘 관찰해 보기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 인연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잘 관찰했을 때 결국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이면에는 본래부터 고요했던 대 적멸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결이 곧 바다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일체 모든 존재들은 대 적멸이라는 본 바탕 위에 잠시 인연따라 나고 죽고, 울고 웃으며, 온갖 행복과 불행의 연장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인연에 따른 변화가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에 순응해야지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應無所住 而生其心] 즉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無執着, 放下着] 그렇기 때문에 그 변화를 타고 흘러야 한다. 그 흐름을 타야 한다.[須陀洹] 변화[諸行無常]야 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니 그 인연의 변화에 일체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고 순응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攝受] 일체의 인연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곳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放下着], 오직 순간 순간 비추어 보고[觀照], ‘나’라는 고정된 집착을 놓아버려 본래 자성부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自性佛]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가르침과 경전의 핵심 경구들을 풀어 보았는데,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경전이든, 어떤 교리든, 또 어떤 선지식의 말씀이건 모두가 하나로 회통(回通)되는 가르침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다 따로 따로 떨어져 다른 가르침이거나, 팔만사천의 수많은 경전이 다 다른 가르침이거나, 스님들의 온갖 다양한 방편설법이 다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로 회통되는 가르침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수많은 방편과 경전과 교리가 나오게 된 것은 모두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근기와 다양한 수준에 맞게 방편의 설법을 하다보니 그렇게 복잡 다단해 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불교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과 생각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불교는 아주 단순한데 사람들이 너무 복잡하고 정신 없으며 어렵게 살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도 그 복잡한 사람들의 근기에 일일이 맞추어 법을 설하시다 보니 불교가 어렵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쨌거나 불교를 공부하는 수행자는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잘 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한 가지 가르침을 붙잡고 그 안에서 일체 모든 경전과 교리가 다 나온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 경전이 더 좋으냐 저 경전이 좋으냐라고 따진다거나, 이 교리가 더 훌륭한지 저 교리가 더 훌륭한 지를 따진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수행법이 더 좋은가 저 수행법이 더 좋은가를 따질 것도 없다. 모든 수행법도 다 방편일 뿐 결국에는 그 궁극의 한 곳으로 가는 수많은 길일 뿐이다.
이 분에서는 그 가운데에도 ‘무아법’을 가지고 지금까지 설했던 금강경의 가르침을 회통시키고 있다. ‘무아’ 이 하나에서 일체 모든 가르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앞서 본문에서 나온 바이다. 앞서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하신 무아의 도리를 펴기 위해 수보리의 이심전심 염화미소의 질문이 시작되었고, 그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앞서 설했던 가르침 가운데 몇 가지의 비유로써 무아의 가르침을 펴고 계신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상(相)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본래 고정된 상이란 없기 때문이다. 즉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상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체 상의 근본은 바로 ‘나다’하는 아상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금강경은 끊임없이 아상 타파를 위한 법문을 내리고 있다. 아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아이기 때문이다. 본래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의 ‘나’라는 상이라도 생겨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보살이 되기에는 거리가 멀다.
이 분에서 부처님께서는 3가지 비유로써 무아를 통달하도록 이끌고 있다. 첫 번째 비유는 수보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수보리가 처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데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다.
똑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된다면 그것은 그저 무의미한 같은 말의 두 번의 반복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같은 말을 열 번, 아니 스무 번, 백천만 번을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다. 말은 같은 말일 지 몰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전해 새로운 말이다. 내 안에 과거가 꽉 들어 차 있고, 과거의 기억과 판단이 꽉 들어 차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다만 같은 말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같은 말을 듣는 순간 벌써 내 안의 과거는 말할 것이다. ‘저 말은 이미 들었던 말이야. 나도 다 아는 말이야.’ 그러나 과거의 견해나 분별로써 지금의 말을 판단하려 들지 말라. 지금의 말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고 설법이다. 이유가 있고 제 몫을 가지고 그 말들은 반복된다. 그러나 내 안이 과거의 분별로 꽉 차 있다면 그 말의 이유를 한 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3가지 비유가 이 분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아법의 깨달음을 위함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선남자 선녀인은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한 명도 제도한 자가 없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참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보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내가 제도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그것은 벌써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이다. 보리심을 발한 수행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상이 바로 ‘내가 제도한다’는 상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가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참된 수행자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면서도 스스로 제도한다는 생각이 없다. 일어나더라도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수행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 또한 제도하고 포교하며 주변 사람들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이끌더라도 ‘내가 포교한다’ ‘내가 제도한다’ ‘내가 복을 짓는다’ ‘내가 보시했다’ 는 상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스스로 ‘나는 수행한다’거나, ‘나는 깨달았다’거나, ‘내가 제도한다’ ‘내가 보시한다’ 거나 하는 등의 ‘내가한다’는 상을 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아의 가르침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혹 요즈음의 세상을 보면 스스로 견성을 했다거나 깨달았다는 사람도 많이 등장하고, 또 어떤 단체에서는 돈 얼마를 내면 몇 일 안에 부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얼마를 더 내면 부처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옛 말씀에, 이번 생에 한 번 얼핏 자신의 성품을 본 사람, 그것을 초견성이라고 하거나 수다원이라고 하거나, 견도라고 하거나 그렇게 어떤 이름을 지어 놓고 스스로 그 지위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번 생 공부의 진척은 더 나아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스스로 ‘나는 견성을 했다’거나, ‘나는 이만큼의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혹은 ‘나는 이만큼 깨달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구나’ 하는 등의 스스로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분별심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돈이 많다’ ‘내가 잘났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매혹적인 큰 상일진데,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아상이야 얼마나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목표인가. 그러나 ‘내가 깨달았다’는 미세한 아상은 곧 상대방과의 차별을 가져오고 그 차별은 나를 더욱 어리석은 아상의 나락으로 몰고 갈 것이다. ‘나는 어리석다’는 아상이나, ‘나는 깨달았다’는 아상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아상임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깨달았다’는 아상이 더 큰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수보리의 질문과 이어지는 부처님의 답변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아상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마음이라도 그 마음은 여전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반증일 뿐이다. ‘내가’ ‘깨달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없다. ‘내가’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얻을 그 어떤 법도 없다. 얻을 깨달음도 없으며, 얻을 주체인 ‘나’ 또한 없다. 완전한 무아, 완전한 텅 빔, 완전한 공만이 있음과 없음을 초월해서 있다. 보통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고 못 얻고 하는 어떤 법으로 착각을 하곤 한다. 법을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이분법으로 진리를 나누고 있다. 그 어떤 나뉨도, 그 어떤 이분법도 진리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깨달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깨달은 나’에 대한 환상은 쓰레기 통에 집어 넣는 편이 낳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도무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깨달음에는 ‘나’가 없다. 깨달을 ‘나’가 없었을 때, 얻어야 할 어떤 ‘깨달음’이 없었을 때 참된 깨달음은 드러남도 없이 드러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환상을 버리라. 이것이 첫 번째 부처님의 무아 법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고 서원하며 실천해야겠지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했더라도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고 설하신 것이다.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어 깨달음에 이르게 했으면서도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수행을 하는 많은 이들은 ‘내가 깨달았다’ 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는 수행자다’ ‘나는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나는 수행력이 높다’ ‘나는 수행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 비해 우월하다’ 하는 등의 비교, 판단, 분별이 끊임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올라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탓할 것은 없다. 다만 그런 생각에 스스로 빠지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런 모습이다. 다만 그런 생각이 일어났음을 놓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휘둘리지 말라. 다만 깨어있는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잘 살피라.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다만 잘 살피기만 하라. 잘 살피고 관해야 거기에 속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그 우월감에 기뻐하거나, 열등감에 고개 숙이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필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하며 자문해 보자. 스스로 ‘나는 금강경을 공부했다’ ‘불법의 지혜를 요달했다’고 하는 등의 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금강경을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금강경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글로써만 받아들일 뿐 내 안에 그 의미가 온 존재로써 와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오직 불성(佛性) 밖에 없다. 모든 것이 부처님 마음의 나툼일 뿐이다. 불성이라고 이름짓는 것도 그저 이름을 붙이자니 그렇게 붙여 놓은 것일 뿐이지, 불성이라는 말 또한 어디에 붙을 데가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어떤 실체적인 ‘깨달음’의 모양이 있어서 깨달음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또 깨달았다고 하는 큰스님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잘생겼을까 못생겼을까? 마른체형일까 아니면 통통하실까? 눈은 어떤 모습이고, 귀와 코, 입은 어떻게 생겼을까? 키는 클까 작을까? 몇 cm 정도가 되실까? 옷은 어떤 옷을 입으시고, 신발은 어떤 메이커의 신발을 신고 다니실까? 밥은 무엇을 드실까? 햄버거나 콜라, 커피도 드실까? 과연 어떤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깨달은 자의 모습인가?
정답은 없다. ‘어떤’ 모습일거라고 모양을 만들어 두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일 뿐이다. 우리의 바램일 뿐이다. 어떤 모양도 없기 때문에, 어떤 형식이나 틀에도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투실 수 있고, 자유자재하게 나투실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은 자’를 어떤 성격일거라고 규정짓지 말라. 어떤 외모일거라고 규정짓지 말라. 남자 혹은 여자일거라고 고정 짓지 말라. 그것은 깨달음의 본 모습이 아니다. 깨달음은 어떤 것에도 고정되게 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은 어때야 한다고 고정짓지 말라. 점잖아야 한다거나, 말도 느려야 한다거나, 외모가 자비롭게 생겨야 한다거나, 화도 내면 안 된다거나 하는 등의 고정된 관념으로 ‘스님’이라는 관념을 내 안에 만들어 두지 말라. 그것은 스님이 아니다. 어떤 틀에 갇힌 정형화된 스님은 스님이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어떤 틀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틀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란 ‘수행자다운’ 어떤 틀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운’ 사람이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자기 자신’만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수행자다. 획일적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자가 수행자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길은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길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어떤 ‘틀’에 가두지 말라. ‘누구’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부처님’처럼 살려고 애쓴다거나, ‘누구’처럼 돈 벌려고, 좋은 차 살려고, 좋은 직장에 다니려고, 혹은 ‘누구’처럼 예뻐지려고 온갖 노력을 쏟지 말라. 그것은 참된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법은 ‘어떤 틀’ 속에 갇히지 않는다. 어떤 한 법도 없는 것이 참된 법이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되는 것이고, 그랬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본래불의 모습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법신불(法身佛)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법신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법신불이 무엇인가. 산도 부처요, 강도 부처요, 나무며 풀에서부터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시내물과 짐승과 곤충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살인자에게도 부처의 본래 모습은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부처는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규정짓는다거나, 어떤 모습으로 만든다거나, 어떤 법으로 정한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부처는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경계를 말한다. 그러니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킬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다는 것도 표현이고 말일 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정해진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법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경계에서 그 모든 일체법을 다 나툴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지지 않아야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물은 그 모양이 정해지지 않았다 보니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어지고, 네모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며, 날이 추워지면 얼고, 너무 더워지면 수증기로 날아가지 않는가. 물의 모양이 이미 어떻게 정해져 있다면 그렇게 나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법도 마찬가지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정할 것인가. 이번 생에 사람이었다가 다음 생에 짐승으로 윤회를 했다면 짐승이 고정된 ‘나’인가, 아니면 사람이 고정된 ‘나’의 실체인가.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 ‘나’가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도 될 수 있고, 동물도 될 수 있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다. 무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연따라 그 어떤 것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이 말해주는 ‘정한 바 없는 법’이고, ‘한 법도 없는 법’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과거 인행시에, 연등부처님께서는 미래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의 법을 얻어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셨다. 연등부처님은 과연 석가모니부처님께 어떤 법을 전해 주셨던 것일까? 또 어떤 법을 전해 주었기에 미래에 깨달을 것을 그 먼 과거에 미리 알고 수기를 내려 주셨던 것일까? 그 ‘법’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답을 주고 계신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법을 받으셨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어떤 법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받았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석가모니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셨다는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이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라고 생각할만한 ‘어떤 법’을 생각하거나, 그 법에 갇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 수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어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있지 않은’ 경계에서 ‘법 아닌 법을 받음 없이 받으셨기에’ 훗날 석가모니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법을 말씀하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법문을 설해 주셨다.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 십이연기, 사념처 등 수도 세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을 설해 주셨다. 일평생 수많은 설법을 하시면서 수많은 중생에게 법을 설해 주셨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나는 단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평생을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셨지만 ‘단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신 바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한 법’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고정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다. 그런데 어떤 것을 진리라고, 법이라고 고정지을 것인가. 고정 지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항상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고 법일진데, ‘고정지을 것이 없다’는 진리를 고정화 할 것인가,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항상하는 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자아가 없다는 무아법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울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말씀에 집착할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하고, 머물고, 고정짓고, ‘진리’라고 이름짓고, ‘한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나다’하고 고정지을 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워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법도,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내세우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다. 그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법’이기 때문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결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없는데, 또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내가 없는데,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가 있겠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있지 않음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수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습니다.’라고 했다면 연등부처님은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 때문에,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그 어떤 법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래라 하는 것은, 부처라 하는 것은 모든 법에 있어 여여(如如)한 것을 말한다. 여여하다는 것은 어떤 법에도 집착함이 없고, 어떤 법에도 머물지 않지만 그 모든 법을 나투고 그 어떤 법도 자유자재하게 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툰 모습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툴 수 있지만, 늘 한결같이 본래의 바탕자리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본 바탕은 늘 여여하다. 여여한 불성 그대로이다. 우리 자신이 그대로 부처요, 자성불이며, 법신불인 것이다. 여래로써 늘 여여한 본래 그대로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모든 법에 있어 늘 여여하다. 어떤 모습에서도, 어떤 곳에서도, 어떤 법에서도 본바탕에서는 늘 한결같은 여여한 성품을 잃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이 언젠가 수행을 통해 깨달아 여여한 부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여여한 부처인 것이다. 본래불이고, 본래 자성이 청정하니 사실은 수행도 필요없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불가에서는 수많은 수행 방편을 이야기하면서, 참선, 염불, 간경, 주력, 절 등의 수행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본래불이라면 수행할 필요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가 본래부터 부처인 것을 모르고 있다. 스스로가 여여한 여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번뇌를 만들고, 욕심을 만들어 그 욕심과 번뇌에 스스로 얽매이는 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스스로 ‘나’라는 허상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나’라는 허상에 얽매여 ‘내가 잘나고 싶고’ ‘내가 돈 벌고 싶고’ ‘내가 유명해지고 싶고’ ‘내가 깨닫고 싶다’는 등의 온갖 욕심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나’라는 허상만 만들지 않는다면 ‘내 욕심’이 어디 붙을 자리가 있겠는가. ‘나’만 완전히 놓아버려 무아법을 깨닫고 나면 본래 여여한 여래가 목전에 당도해 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부처이고 여래라는 사실을 ‘나’라는 아상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구경무아분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 처럼 무아법을 구경에 바로 보게 되는 순간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여여한 여래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이렇게 ‘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다보니 부처님께서도 방편을 써서 ‘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있는 데서 벗어나도록 도와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며, ‘나’를 벗어나도록 하는 실천행을 일러주시니 그것이 수행이다. 본래부처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수행도 필요없고, 설법도 필요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에 갇혀 있고, 괴로워하고 있으며, 삶에 아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수행이 필요한 것이고, 법문이 필요한 것이다. 괴롭지 않다면,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어떤 법에도 걸림이 없다면 불교도 필요 없고, 수행도 필요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다 쓰잘데 없는 말일 뿐이다. 그 어떤 한 법도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구경에 무아법을 깨닫게 되면 모든 법에 여여한 여래임을 바로 보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라고.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금강경을 보라. 금강경에서는 이 당연한 말까지도 부정을 하고 있다. 금강경이야말로 일체 모든 방편을 거두어 들여 온전한 진리로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조금이라도 참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전부 부정하고 파하여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파사현정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던 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고 표현하며 사람들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려다 보니까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언어라는 것의 조악함 때문에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편을 버리고 진리의 편에서 이 명제를 관찰해 보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거나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 과연 여래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인가.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얻을 ‘여래’, ‘부처’가 없다. 깨달음을 얻은 ‘나’가 있다거나,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벌써 상대성에 빠진 생각이다. 깨달은 부처가 있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어서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은 불세계로 나가기 위해 수행한다는 생각은 벌써 부처와 중생을 둘로 나누어 놓은 생각이다. 부처는 그 어떤 분별의 세계에도 몸을 담고 있지 않다.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라는 두 가지 극단 어디에도 부처는 없다. 부처는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어떤 상태로’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깨달은 ‘자’라는 어떤 존재적인 틀에 부처를 가둘 수는 없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완전히 무아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즉 ‘내가 없음’을 온전히 자각한 것, 구경무아인 것이다. 무아가 곧 깨달음일진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나’가 없는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에게 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 깨어있는 순간 바로 부처인 것이다. 깨어있는 순간, 오직 깨어있음의 빛만이 있을 뿐 나와 너라는 상대개념도 사라지고 생사,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 또한 사라진다. 바로 그 것, 깨어있음, 그것이 바로 부처다.
만약 스스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나’에 갇혀 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아(我)는 깨닫지 못한다. 무아(無我)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아는 말 그대로 무아, 내가 없음이며 텅 비어 있음이고 무상과 무아, 무자성과 공이기 때문에 주체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깨달을 내가 없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일진데 스스로를 깨달음을 주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무명을 밝히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 여래라는 주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깨달음의 상태를 얻어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여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음’도 없다. 그렇기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은 완전한 거짓이다. 언어 자체에 큰 모순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며, ‘깨달은 자’에 집착해 있는 것이고, ‘얻음’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는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여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자’가 있다면 그는 여래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여래는 없다. 또한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떤 특정한 ‘법’이 아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없다. 여래가 얻은 법이라는 것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어떤 ‘법’을 얻었다면 그것이 참된 것, 실다운 것이라는 말인데,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헛된 것 또한 아니다. 실다운 법에 집착해도 안되고, 헛된 법에 집착해도 안 된다.
우린 누구나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얻을 깨달음이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떤 실체적인 것, 진리다운 어떤 것으로 생각지 말라. ‘어떤 것’으로 고정지어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깨달음이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그 어떤 ‘법’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왜 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깨달았다고 할 어떤 법도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일체법이 곧 불법’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것이 불법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것만이 불법이라면 어떤 깨달을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일체 모든 법이 다 불법이라면 거기에 어떤 것만을 정하고 택해 깨달아야 한다고 할 특정한 ‘법’이 없지 않겠는가. 진리 아닌 것이 따로 있고 진리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99%는 진리가 아니고 1%가 진리라고 한다면 그 1%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애써야 하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완전히 100% 전부가 다 진리이고 불법이라면 어떤 특정한 1%를 깨닫고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불법이란 그와 같다. 일체 모든 법이 다 불법이기 때문에 별도로 실다운 법과 헛된 법을 나눌 수가 없다. 100% 모두가 그대로 불법이다. 100% 모두가 그대로 실다운 법이다. 그러니 거기에 몇 %를 실답다고 나누고, 몇 %를 헛되다고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실다운 것을 찾는 노력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불필요한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주체가 없으며,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그 어떤 특정한 ‘법’이 없다면 어찌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분명 다시 ‘일체법’에 집착하는 이가 생겨날 것이다.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니 그 ‘일체법’에 집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일체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일체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일체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는 이유는 일체법이라는 것은 일체법이 아니며, 그 이름이 일체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도 같다.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둘을 나누어서 그 가운데 큰쪽을 택한 큰 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을 초월한 절대 큰 몸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한 사람의 몸집을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크고 작은 분별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의 육신이 아닌, 온 우주 법계를 다 담아낼 수 있는 삼라만상의 당체인 법신에서는 그 어떤 크고 작은 분별도 다 사라지고 만다. 온 우주의 어떤 한 부분을 차지하는 몸집을 가졌다면 크고 작다는 분별이 생기고 따라서 ‘어떤 한 몸’ ‘큰 몸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온 우주 법계 그대로인 법신은 따로 떼어 내어 얼마만한 몸의 법신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우주 법계의 크기를 100 이라고 보았을 때, 그 가운데 몸집이 1이나 2 정도의 크기라면 그것은 크다 작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법신의 몸은 그대로 우주 법계의 크기인 100이기 때문에 크다 작다고 분별할 수 없으며 별도로 얼마만큼 크냐 작으냐를 논할 수 없다. 어떤 한 큰 몸이 아니라 법신은 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는 말처럼, 일체 모든 법계가 그대로 법신으로서의 큰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큰 몸이라는 것도 이름을 큰 몸이라 이름 붙였을 뿐 따로 큰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큰 몸은 큰 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몸, 큰 몸 하고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큰 몸을 택하는 큰 몸은 참된 큰 몸일 수 없다. 그것은 상대적인 큰 것일 뿐, 절대로서의 큰 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무아의 설법은 계속되고 있다. 보살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깨닫게 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가’라는 아상에 빠져 있다면 그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보살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주체가 없다. ‘나’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어찌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내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보살은 한없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단 한 명의 중생도 멸도에 들게 한 적이 없다. 보살이란 어떤 한 법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자를 이름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멸도에 들게 했다’라는 상에 갇혀 있다면, ‘중생을 구제했다’는 법에 집착해 있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부처와 중생이 나누어져 있고, 생사와 열반이 나누어 져 있지만 이미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그 어떤 종류의 나뉨도 없다.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생사와 열반도 다 헛된 꿈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이미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이다.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의 씨앗 불성이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성을 싹틔워야 한다는 말은 다 방편일 뿐이다.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깨달음에 이르게 할 중생도 없으며, 이미 깨달음에 이른 부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의 증득이 가져다 주는 대 해탈, 대 자유의 깨달음이다. 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은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삶과 죽음 등의 그 어떤 나뉨도 용납하지 않는 진리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무아법을 체득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을 가질 수가 없다. 구제할 중생이 없고, 구제할 내가 없으며, 그렇기에 구제라는 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깨달음의 회향인 ‘중생구제’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상구보리에도 머물지 않고 하화중생에도 머물러 있는 않는 이가 보살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보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했는데 일체법, 즉 불법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 어떤 상도 용납되지 않는다. 즉 그 어떤 ‘나다’라고 하는 상도 용납지 않는다는 말이다. 깨달을 ‘나’도 없고, 중생을 구제할 ‘나’도 없다. 지혜를 증득할 ‘나’도 없으며, 자비를 베풀 ‘나’도 없다. 상구보리할 내가 없으며 하화중생할 내가 없는 이가 바로 보살이다. 일체법은 한 치의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한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다.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하는 말이 그대로 스스로 보살이 아님을 대변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없고, 장엄할 불국토가 없으며, 장엄할 것도 없는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상에 머무를 수 있단 말인가. 무아법을 깨달았다는 것은 ‘내가 없음’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체 모든 법, 일체 모든 존재에 고정된 실체적인 관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도 너도 없으며, 중생과 부처도 없고, 예토와 정토도 없다. 오염된 예토인 중생의 국토가 없고, 장엄된 불국토가 따로 없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분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깨달음일진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실질적인 그 어떤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엄인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경무아분의 핵심이며, 나아가 금강경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무아법의 통달이 바로 금강경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법의 이해를 위한 설명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 또한 무아법의 통달을 위한 사구게다.
반야 지혜를 증득한다는 말이 바로 무아법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무아법이 바로 무자성, 공, 중도, 연기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모두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모습을 보인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깊이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연기적인 현상으로 잠시 꿈과도 같이, 환영과도 같이, 그림자와도 같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인연을 만났느냐에 따라 물이 소를 만나면 우유를 이루고, 독사를 만나면 독을 만들 듯 그렇게 인연따라 겉모습이 끊임없이 변화될 뿐이지 결코 고정된 실체인 것은 아니다. 또한 물은 계곡에서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흘렀다가 수증기로 변하고 구름으로 변하고 또한 인연을 만나 비로도 우박으로도 눈으로도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내린 눈비가 또다시 계곡을 지나면서 나무도 되었다가 식물도 되었다가 사람 몸으로도 변했다가 또다시 시내로 계곡으로 강으로 흘러 흘러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럴진데 어떤 하나를 선택하여 ‘이것이 실체다’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연기법에 따라 겉모습을 바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다만 꿈처럼 신기루처럼 몸을 바꾸면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를 뿐인데, 어떤 하나를 붙잡고 집착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 ‘나다’라고 고집하여 내 몸에 혹은 내 생각에 집착할 것인가.
내 몸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수화풍의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 몸의 지수화풍의 구성원들은 흘러 흘러 바다고 되고 강물도 되고 산도 되었다가 나무도 풀도 되고, 또한 짐승도 되고 풀벌레도 되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 몸에 집착할 것인가.
내 생각이라는 것도 가만히 살펴보면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불변하지 않는 내 생각’이라고 할 것인가. 모든 생각은 변화한다. 흐를 뿐이다. 이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생각도 관념도 가치관도 고정된 실체로써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내 것’이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 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학벌도, 배경도, 사랑도, 가족도,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에 머물러 집착할 것인가. 집착은 곧 괴로움을 불러올 뿐이다. 돈에 집착하면 돈으로 인해 괴롭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 그로 인해 괴로울 뿐, 결국에는 괴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어디에 ‘내 것’을 붙일 것이며, 집착할 것인가. 이 구경무아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설하고 있다. 구경에는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무아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어떤 물질에도, 어떤 존재에도, 어떤 깨달음에도, 어떤 생각에도, 어떤 사상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말이다.
한 평생 잠시 왔다가 갈 뿐이다. 인연따라 잠시 어떤 한 몸으로 왔다가 갈 뿐이다. 죽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산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몸을 바꿀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하며 살겠는가. 집착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과연 어디에 집착하며 살 것인가. 다만 인연따라 법계의 몸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돌려줘야 할 일이고, 인연따라 법계의 돈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회향시켜 줘야 할 일이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랑도 모두가 잠시 인연따라 응해 줬다가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인연이 다 해 사라질 때 자연스럽게 놓아줄 수 있다. 붙잡고 조마조마 하며 살 것인가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살 것인가.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 바로 무아법의 터득이다.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업을 깨끗이 맑히는 법을 설해 놓은 이 분이야말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를 인과(因果)와 업보(業報)의 관점에서 쉽게 설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수행을 하고 금강경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이미 나는 깨끗해졌고 맑아졌으며 모든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수행과 기도를 하며, 절에도 다니고, 경전 공부도 하니까 나에게는 괴로움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해 놓고, 혹은 이제 겨우 몇 년에서 몇 십년 마음공부를 실천해 놓고 ‘이제 나는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바라지 말아야 한다. 절에 다니니까 나쁜 일은 모두 사라질 것이고 좋은 일만 올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은 새벽에 기도를 하고 출근했으니 오늘 하루 재앙은 말끔히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도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수행하고 있고, 마음을 관(觀)하고 있으며, 순간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영락없는 깨달음의 향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한 쪽으로 고정 지으면 안 된다. 내가 바라는 쪽으로, 좋은 일만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행 잘 하고, 마음 관찰 잘 하면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고정을 지으면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 깨어있음의 향기는 곳 사라지고 만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더라도 업(業)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지어 온 온갖 행위이기 때문에 그 업의 힘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을 비추어 보고, 수행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업의 문제까지 다 소멸시킬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이다.
경전을 통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 금강경을 열심히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한다고 하자. 금강경을 늘 수지독송하며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분명 이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진리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진리 안에서 환희심과 기쁨에 넘쳐 있을 것이다. 매일 금강경을 사경하고 7독씩 독경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금강경을 공부하고 수행하며 남을 위해 해설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내가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니까 좋은 일들만 많이 생길 것이다’ 라거나,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 나쁜 일이 설마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이만큼 수행하니까 그만한 보상은 따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 보상은 내 관점에서 내가 좋은 쪽의 일들이 많이 일어나 주고, 나에게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비켜가기를 바라는 쪽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내 생각에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일 뿐이지 법계(法界)의 생각이거나, 진리의 생각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돈도 잘 벌리고, 남들에게 칭찬도 많이 들으며,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견해가 항상 ‘내 생각’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지 말라. 진리의 생각은 다를 지 모른다. 물론 진리 또한 그러한 내 생각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도울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때때로 기꺼이 그렇게 해 주곤 한다. 기도하는 자의 밝고도 간절한 서원(誓願)은 법계를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분명 진리의 세계에서는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법계의 견해는 당장에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란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우며, 좋고 나쁜 두 가지를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선택하는 데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에서는 좋고 나쁨이 없는 대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계에서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들어주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쪽일 수도 있지만 나쁜 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분명 그것은 대긍정을 위한 일시적인 나쁨이란 말이다. 법계란 늘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무분별(無分別)의 진리만을 나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전을 독송하고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며 미워하고 심지어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길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런가’ 싶기도 할 것이고, ‘수행을 해도 별 소용 없구나’ 싶기도 할 것이며, 때때로 ‘이 수행이,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마음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당장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만 좋은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의 입장은 다르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좋은 일이 다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인과응보의 이치, 업보의 이치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좋은 일’ 다시 말해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의 진리를 나투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도 사람들이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에 대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을 언젠가는 받아야 할 터인데,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할 때 받음으로써 그 업은 금강경의 밝은 광명에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금강경 독경을 열심히 하는데도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것은 업이 녹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업장이 소멸되느라 그러는 것이란 말이다.
수행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면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할 것인데, 다행히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수행공덕으로 가볍게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악도에 떨어질 만한 업장을 과거에 지어 놓았다면 그 결과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업이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녹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업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수행하는 사람은 업보를 받지도 않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인과응보를 모르는 어리석은 이의 얄팍한 이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악도에 떨어질 만한 악업을 지었지만, 이렇게 금강경 밝은 가르침을 얻어 듣고 수지독송하게 되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로 그 과보를 받음으로써 업장을 말끔히 소멸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소멸될 것이고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어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업장이 무겁게 남아 있는데 어찌 깨달음과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진리는 항상 무량수 무량광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절대 긍정의 차원에서 모든 일을 진행시킨다. 당장에는 욕을 얻어먹거나,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듯 해 보여도 사실은 그것이 ‘능히 내 업을 맑히는’, ‘능정업장(能淨業障)’의 길임을 이 분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행을 시작하면서 더욱 마장(魔障)도 많이 생겨나고 자꾸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능정업장, 업장을 능히 맑히기 위한 법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0일 기도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기도하지 않을 때보다 더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도의 힘으로 업장을 녹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셈이다. 가만히 놔둔다면 지옥에 떨어질지 모르는 업장을 기도 중에 오는 온갖 마장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기도로써 녹임으로써 맑게 해탈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당당히 가야할 길만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사사로이 눈앞의 좋고 나쁨을 따져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란다면 대장부의 걸림 없는 지혜의 길이라 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좋고 나쁨을 초월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구도자는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좋고 나쁜 그 모든 일이 모두 다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당당해 진다. 완전히 내맡기면 자유로우며 걸림이 없다.
사사로운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참나, 내 안의 자성 부처님께 일체 모든 것을 완전히 내맡기고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 놓인 그 어떤 경계나 그 어떤 역경과 괴로움 조차도 즐거운 대 긍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의 힘은 이와 같은 마음에서 온다. 이 같은 대 긍정의 마음, 대 수용의 마음, 대 신심의 마음에서 오며,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본래자리에 완전히 믿고 맡기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마음이 수행자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얼마나 걸림 없고 자유로울 것인가. 그 어떤 일이 우리를 휘두를 수 있으며,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이처럼 금강경 수행자의 길은 당당하고 훤칠하며 걸림 없는 지혜의 길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승지(阿僧祗)란 도무지 산수(算數)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한량없이 많은 수를 뜻하며, 겁(劫)이란 마찬가지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시간을 말한다. 나유타(那由他) 또한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숫자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승지처럼 무량한 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다시말해 부처님께서는 과거 연등부처님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수의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되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만큼 그 공덕이 무량하신 분이다. 한 부처님께만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더라도 그 공덕이 한량없을 터인데,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었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을 것인가. 이 비유는 그만큼 부처님의 공덕이 많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긴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산술적인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만큼의 더욱 무량한 공덕이 있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야말로 도무지 말이나 그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렇게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을 크게 말씀하시고 찬탄하는 이유는 금강경이라는 경전에 그 어떤 상을 두고 절대시하거나 금강경만 독송하면 모든 공덕을 다 얻는다는 등의 그런 단편적인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강경이란 ‘아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며, ‘완전히 아상을 깨고 참나를 발견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의 대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가르침을 수지하고 독송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지란 완전히 체득하여 그 가르침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며, 독송이란 그러한 깨달음의 바탕 위에서 그 가르침을 끊임없이 읽고 외움으로써 보다 완전히 체득하며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일은 곧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유위의 공덕도 깨달음이라는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무궁무진한 산술적인 비유로 그 공덕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유위의 공덕인 이상 그 어떤 수학자의 비유라도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아마도 금강경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금강경의 표현을 보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이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에 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또 앞서 말했듯,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이 동서남북과 네 간방과 위아래의 가히 생각할 수 없는 허공과도 같이 셀 수 없다고 하시는가. 처음 금강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똑같이 하는 말이 너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뿐인가. 금강경에서는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나’를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었던 욕심과 집착을 다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해 보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에 어찌 마음이 혼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여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위에서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모자란 것이 있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전부 다 말한다면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말이라는 것이 진리를 전부 담을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렇게까지 말로써 수지독송의 공덕을 표현하시고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다 말한다면’ 이라는 표현으로 여전히 말로써는 다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계신다. 무위(無爲)는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함이 없는’ 무위이기 때문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방편을 빌리지 않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속해서 부처님의 당부는 이어진다.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금강경을 해설하고는 있지만 이 해설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해설 속에 금강경의 뜻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어긋나고 만다. 이 경은 그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은 머릿속으로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수지독송이라는 수행을 통해, 즉 완전한 내적인 깨달음으로써 수지하고, 그러고 나서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완전히 가르침이 나와 하나가 될 수 있을 때만이 그저 체험되어지고, 하나되어지는 것이지, 이 경은 뜻을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실천과 수행만이 그 뜻과 하나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나를 놓아버리고 아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곧 전체가 되었을 때 그 때 이 뜻이 그대로 내가 되고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뜻을 헤아릴 ‘나’라는 주체가 완전히 소멸해야지만 이 뜻은 전체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뜻을 헤아리는 ‘나’가 있는 이상 이 뜻은 여전히 이해되지 못한다.
과보(果報)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지독송의 과보는 깨달음이라거나, 무량한 복덕이라거나 하는 등의 원인과 결과로써의 어떤 과보를 생각하겠지만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완전한 무(無)이다. 완전히 무이기 때문에 완전히 전체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많을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있다면 그것은 셀 수 있는 것이며, 있고 없음의 틀 안에 갇힌 과보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유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과보를 헤아리는 순간 이미 그 과보는 참된 과보일 수가 없다.
과보를 받을 ‘나’가 없어졌을 때,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완전히 공(空)하다. ‘나’가 없다면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어디에 붙여 둘 것인가. ‘나’만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항상 무량한 과보로써, 무량한 복덕으로써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은 항상 부처님의 무량한 광명으로 충만한 곳이며, 무량한 복덕이 넘치는 곳이다. 아니 광명 그 자체이며, 복덕 그 자체이고, 부처 그 자체인 것이다. 다만 거기에 광명을 받으려는 내가 있고, 복덕을 누리려는 내가 있으며, 부처가 되려는 내가 있는 이상 참된 광명도 복덕도 부처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상을 완전히 타파했을 때, 그 자리가 금강경 수지의 자리가 되며, 그 때 헤아릴 수 없는 뜻도, 헤아릴 수 없는 과보도 그대로 하나로 어우러져 광대한 법해(法海)를 이룰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이 분에서는 경을 베껴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데 대한 공덕을 설하고 있다. 경의 말씀을 아무리 설명해 주고 설해 주었더라도 훗날 경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경전을 참되게 수지독송하지 못한다면 그 경전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이 있는 경인가를 거듭 설명하시면서 진리의 길을 걷는 수행자들에게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다.
이 분에서 말씀하고 계신 금강경 수행법은 첫째 서사(書寫)이고, 둘째 수지독송(受持讀誦)이며 셋째 위인해설(爲人解說)이다. 다시 말해 첫째는 사경이며, 둘째는 독송이고, 셋째는 설법이요 법보시인 것이다. 이 세 가지 금강경 수행을 통해 금강경의 깊은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되고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글로 베껴 씀으로써 하나 하나의 의미를 더욱 면밀히 공부하며 공경하게 되고, 입으로 독송함으로써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며, 법을 전하는 설법과 법보시를 통해 진리가 널리 일체 중생에게 회향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 수행자가 있어 수도 없는 몸으로써 나고 죽고를 반복하며 백천만 억 겁을 윤회하면서 끊임없이 보시하기를 매일같이 한다 하더라도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 복이 더욱 수승하다. 하물며 이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법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는가.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써 아침과 낮 또 저녁으로 보시하기를 백천만억 겁 동안 하더라도, 아니 그 이상의 엄청난 보시를 행하더라도 자신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유위(有爲)의 공덕이 될 뿐이다. 즉 ‘내가 했다’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 어떤 보시를 행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중생의 유위복일 뿐이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누구에게 보시했다는 그러한 일체의 상을 다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아무리 셀 수 없는 무량한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깨달은 자가 숨 한 번 쉬는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일체의 상을 여의고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된다면 그 자체가 무량한 복덕이고 공덕이 된다. 일체의 상을 여의게 되면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법계가 그대로 내가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베풀 내가 없으며 베풀어 줄 대상도 없고 베풀 것도 없다. 베풀 주체인 ‘나’도, 베풀어 줄 대상인 ‘상대’도, 또한 베풀어 줄 ‘것’도 전부 공(空)했으며, 전부가 그대로 나와 둘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대로 나이고 그대로 우주인데, 주고받을 일이 무엇인가. 보시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공덕이란 말 또한 텅 비어 사라지고 만다.
그랬을 때,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되었을 때, 존재 자체가 그대로 공덕이 되고, 보시가 되며, 지혜가 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언설로도,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텅 빈 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할진데 어찌 물질적인 보시로써 상을 타파한 깨달음의 세계와 견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언설로써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만큼 보시를 한다고 표현할지라도 그것은 유위복 밖에 되지 못할 뿐이다.
유위복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양이 정해져 있을 뿐이지만, 무위복은 그 양이 없다. 그 양이 전체이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한 공덕이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러니 금강경을 올바로 수지하는 공덕은 도무지 그 양을 셀 수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 담긴 진리의 크기를 어찌 유위의 양으로써 셀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의 가르침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하는 공덕은 도무지 셀 수 없는 것이다. 몸으로써 백천만억 겁을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하더라도 유위의 공덕에 머물 뿐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무위의 공덕이기 때문이다. 유위의 공덕을 아무리 많이 쌓더라도 그 결과 육도 윤회 가운데 천상세계를 갈 수는 있겠지만, 육도 윤회 그 자체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금강경을 깨닫는 공부를 무위라고 하는 이유는 이 공부로써 윤회의 수레바퀴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천만 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그 결과는 고작 육도 가운데 천상세계에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육도 윤회 자체를 벗어나 대 해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그러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강경을 배우고 수행해야 하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달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대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통해 이를 수 있겠는가. 금강경에서는 서사와 수지독송 그리고 위인해설이라는 세 가지 수행법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해 오고 있지만 여전히 머리로써는 언뜻 이해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아직 내 안에서 금강경이 춤을 추고 흘러들어오고 흘러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금강경 자체가 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내 삶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할 것이다. 아상을 타파하고, 일체의 상을 타파한다는 것이 말로써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어려운 실천인가.
그래서 이 경에서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체험되어지도록 하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 세 가지 실천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실천 수행법을 하나 하나 알아보자.
첫째, 서사(書寫)라는 것은 베껴 쓴다는 말로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경(寫經)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하나 하나 베껴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가르침에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보통 사람들은 경전을 보더라도 소설책을 읽듯이 그저 읽어 내려가곤 한다. 그러나 경전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경전은 단순히 읽어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작업이다.
경전의 가르침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온 마음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이나 판단, 혹은 이전에 배워 온 것들로써 경전을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베껴야 하는 것이다. 책을 베낀다는 것은 똑같이 다시 쓴다는 말이다. 그처럼 우리가 경전을 볼 때도 마음에 똑같이 베껴야 한다. 내 안의 생각이나 판단, 관념들로써 걸러 들어서도 안 되고,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가려 읽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듣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 생각이며 편견들을 경전에 비춰 보다 견고히 하는 아견을 증장시키는 일 밖에 되지 못한다.
경전을 볼 때는 반드시 사경을 해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을 때도 사경을 해야 한다. 사경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베끼는 작업이다. 의심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베껴야 한다. 그래서 그 가르침이 그대로 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내식대로 가르침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글자 하나 빼놓지 말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경 수행을 하는 이유다.
다만 글로써 베끼고 쓰는 것만이 사경인 것은 아니다. 마음 안에 베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 견해를 다 놓아버리고, 맑고 텅 비게 한 다음 아무런 시비 분별이나 판단 없이 다만 경전을 내 안에 베껴 새기라. 경전을 올바로 베껴 사경할 때 그 사경은 그 어떤 고정된 견해가 아니다. 그대로 베꼈을 때 자유롭다. 내 견해로써 색안경으로 투사한 것을 베꼈을 때는 내 견해 속에 스스로 빠지게 되지만, 완전히 베끼고 사경했을 때 그 가르침은 물처럼 유연하며 허공처럼 활짝 열려있는,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의 가르침으로 물결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는 사경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사경을 설해 주고 계신다.
“선남자여, 항상 부처님을 본받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바 세계에 오시기까지 법신(法身)인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으시고 수없이 많은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이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왕의 자리나 궁전, 정원 등의 일체 소유와 갖가지 어려운 고행이 무슨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느냐.”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으며, 그만큼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목숨은 유위이며 다만 인연따라 오고 가는 것일 뿐이지만, 부처님의 법을 지니고 사경하는 공덕은 무위이며 일체 윤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수지독송(受持讀誦)을 말씀하셨다. 수지독송은 말 그대로 잘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는 말이다. 서사하고 사경함으로써 내 안에 법이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잘 받아지닌 것을 독송함으로써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 신구의 세 가지로써 업을 짓고 사는 우리들은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수행 또한 이 세 가지를 방편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몸으로써 서사하며 마음으로써 수지하며 말로써 독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몸과 말과 뜻으로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맑게 정화되고 진리로써 하나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공덕은 유위가 아닌 무위이다. 그렇다고 수지하지 않고 독송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유위의 공덕에 머물고 만다. 즉, 내 안에 그 참 뜻을 올바로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나날 동안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흡사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입으로만 외워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것은 참된 수지독송이 아니다. 그래서 독송에는 꼭 수지라는 말이 함께 따른다. 마음으로 온전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된 앎과 이해, 즉 경전에 대한 밝은 지혜 없이 입으로만 독송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무위의 공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금강경의 수지독송 수행법 때문에 오래도록 불가에서는 금강경 독송을 주요한 수행법으로 알고 실천해 왔다. 매 예불과 기도 때마다 1독, 3독, 7독, 혹은 21독에서 108독씩 늘 독송하며 정진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금강경 독송 수행이 내려져 오다 보니, 자칫 금강경 수행이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공덕이 있고 영험이 있는 것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금강경의 뜻을 전혀 모르더라도 매일 3독, 7독을 하면 그 자체에 엄청난 공덕이 쌓인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뜻을 모르고서라도 마음을 맑게 비우고 또한 밝게 비추면서 금강경을 독송하게 된다면 지관(止觀)수행의 공덕이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지독송이란 금강경의 참 뜻을 올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 독송 수행을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혹 금강경 독송만 매일 하면 무조건 업장이 소멸된다거나, 밝아진다거나 하고 금강경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상을 가져다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비추어 볼 일이다. 그것은 금강경에 또 다른 상을 부여하는 일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또 다른 상을 가져다 붙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로 위인해설(爲人解說)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서사와 수지독송으로 우리 안에 금강경이 물결치고 꽃피우는 것을 일체 모든 중생들을 위해 회향(回向)하도록 이끄는 수행방법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 꽃피어날 때 저절로 우리 안에는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동체대비심이 함께 꽃피어 나게 된다. 지혜는 곧 자비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수행을 통해 일체의 상이 타파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고, 일체는 모두가 ‘전체로써의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내가 배고플 때만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전체가 그대로 내 몸이 되다 보니 그 어떤 중생이 배고플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일이 되며, 일체 중생이 어리석을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 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체대비심이란 말 그대로 동체, 즉 같은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대자비의 마음이다. 동체대비심은 일체의 상이 타파되는 금강경의 실천에서 나온다.
완전히 금강경을 깨닫게 된다면 물론 위인해설이라는 수행법을 따로 만들어 둘 필요도 없다. 저절로 동체대비가 성숙해 지면 남을 위해 연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저절로 따른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 남을 위해 설법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분별일 뿐이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는 그런 생각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 서사와 수지독송이 완전해 지지 않은 중생들에게는 위인해설로써 동체대비심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때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자가 바로 나의 위인해설의 대상이다. 일체 중생에게 법을 설해주겠다거나, 법보시를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다 부질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가 바로 내 전법(傳法)의 대상이다. 유위의 세상에서는 유위의 공덕이 뒤따른다. 남에게 설법을 많이 해 주는 공덕을 짓는다면 설사 그 사람이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유위의 공덕은 뒤따른다. 위인해설과 법보시, 전법의 공덕은 대선지식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공덕이 뒤따른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법을 전하라. 법보시의 공덕은 스승을 얻는 공덕을 얻고 나아가 깨달음의 공덕이 된다. 저 많은 수행자들이 스승이 없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라.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들의 공통된 소망은 바로 참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참스승을 바로 찾게 되면 애써 돌아가지 않고도 바로 성품을 볼 수 있지만, 스승 없이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법보시로써 스승이 되어줄 때 그 유위의 공덕이 무르익는 어느날 저 인도의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열매가 열릴 것이다.
어쩌면 앞서 금강경 1분에서 금강경의 설법은 이미 끝마쳐졌다. 또한 구구절절한 설명 또한 14분까지 오면서 이미 다 설해 마쳤다. 지금부터의 금강경 강의는 앞서 했던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 정도이거나 부처님의 자비심에 의한 되풀이 되는 법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독자 수행자들에게 금강경의 가르침은 저 깊은 심연에서의 어떤 나직한 떨림 혹은 아직 활찍 피지 않은 봉우리로써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우리가 우리 가슴 속에 몽우리져 있다. 물론 그것은 금강경을 공부하기 전에도 그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랬으며, 우리 뿐 아니라 온 우주 삼라만상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가 다 그러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꽃봉우리는 더욱 선연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이 중요한 지금의 시점에서 금강경을 우리 안에서 완전히 꽃피우도록 할 이상의 세 가지 수행법을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우리 안에서 고동칠 수 있도록 이 세 가지 수행법을 실천하는 일이 남아 있다.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이 경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헤아리거나 생각으로 따져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 경전을 머리로써 이해하고 생각하며 분석함으로써 깨닫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머리로써는 도무지 담을 수 없다. 머리로써 다 이해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이해했다는 생각에 불과하다. 그 이해는 생각의 틀을 넘어 서지 못한다. 또한 이 가르침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상 타파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대 해탈의 깨달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헤아리려 하지 말라. 그 헤아림은 절대 내 경험과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든 따지려 들거나 연구하고 분석하고 생각하여 정리하려는 습관이다. 그런 과학적인 연구 분석을 통해 무엇이든지 다 체계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떤 거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불교가 상당히 과학적인 듯 하여 10년을 넘게 생각해 보고 연구해 보았는데 도무지 확연해 지질 않는다고 답답해 하셨다. 도무지 알 수 없을 뿐 확연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신경질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도대체 해탈이 무엇이고, 불성이 무엇인지, 공이 무엇인지, 아상타파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10년 동안 도무지 모르겠고 답답해서 유명한 스님들은 다 찾아가 물어보고 했지만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정리시켜 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생각과 정리, 분석과 연구로써는 언제까지고 그 답을 알아낼 수 없으니 ‘지금 거사님께서 도무지 모르겠고 답답한’ 그 속으로 들어가서 ‘답답해 미치겠는’ 그것과 하나 되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도무지 모르겠는 그래서 막막하여 오리무중인 그것이 바로 화두다. 그 화두를 따지거나 분석하는 것으로 풀고자 한다면 앞으로도 10년이 아닌 100년을 두고도 그 답은 얻을 수 없겠지만, ‘오직 모르는’ 그 속으로 들어가 ‘모르기만 할 뿐’ 다른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모르기만 할 때 그 때 완전히 알게 되는 수가 있을 것이니 그것이 화두인 것이다.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고 머리로써만 헤아리려 하고 생각하려 한다면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이렇듯 이 경에는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므로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에게, 또 최상승을 발한 이에게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대승을 발한 이’는 사사로운 아상에 갇혀 ‘나’라는 틀 속에서 이기심으로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진정 일체 중생을 위한 동체대비의 마음을 발한 이를 말하며, ‘최상승을 발한 이’는 소소하게 공덕을 키우겠다거나 복을 많이 짓고 착한 일을 많이 하겠다는 등의 이유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걸림없는 대자유와 대해탈의 열반을 얻고자 발심한 이를 말한다.
대승을 발한다는 것과 최상승을 발한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발심의 요소가 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첫째, 대승을 발심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보통 수행자라면 누구나 깨달음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그것이 자칫 이기적인 마음에서, 아상에 갇혀 있는 마음에서 발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즉, ‘내가 깨닫겠다’ ‘내가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 ‘내가 깨달아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겠다’는 아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마음은 어찌보면 아주 미세하게 일어나는 아상이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쉽고, 스스로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 깨닫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상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상이 있는 중생인 이상 ‘내가 깨닫는다’고 하는 상은 언제까지고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아상이 없다면 발심할 필요가 없다. 아상이 없다면 이미 깨달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아상을 끊임없이 놓치지 않고 주시할 수 있어야 하며, 원(願)을 세울 때 자칫 아상에 물들지 않을 수 있도록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위한 동체대비심을 바탕으로 하는 대승의 원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예민하게 돌이켜 비춰보라. ‘깨닫겠다’는 원 아래에는 ‘내가’라고 하는 아상과 이기가 바탕이 되어 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아상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림으로써 일체 중생과 일체 만 생명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동체대비의 대승의 원을 발하는 것이다.
둘째로, 최상승을 발한다는 말은, 자칫 수행자가 복이나 짓고 착한 일이나 함으로써 선한 곳에 태어나길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되며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대 자유, 대 해탈을 성취하고자 하는 원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사람들의 발심이 이처럼 투철한 최상승의 발심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원칙적으로, 또 표면적으로는 최상승의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발심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선을 행하고 복을 지음으로써 천상에 나겠다는 이유로 수행을 하는 이들도 많다. 다시 말해 수행을 하는 이유가 내 몸 편하고, 내 마음 즐거우며, 좋은 곳에 나고, 좋은 인연 만나며, 다만 이 생이나 다음 생에서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복적으로 기도하고, 유위의 복만을 짓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 가운데 최상승의 원을 발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반적으로는 보다 부자되길 바라고,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며, 보다 안정적인 월급과 노후를 바라고, 적당히 복도 짓고 수행도 해서 편안하게 살길 바라며, 가족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등의 지극히 세속적이고 작은 안락에만 만족하여 수행하는 이가 많다. 대 해탈을 위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최상승의 발심하였는가 스스로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이상에서와 같은 금강경 설법을 듣고 능히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본다. 여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안에 깊은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본래의 성품이며 참마음이다. 우리가 마음 내어 발심했다면 그 순간 이미 여래의 마음에도 전해지게 마련이다.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본다.
또한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이란 바로 무위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무위의 공덕을 말로써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에 이렇게 긴 수식으로 방편을 써서 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이다. 즉,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며 전법하는 이야말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래의 깨달음이란 누구나 항상 지니고 있다. 우리 깊은 마음 자리에는 누구라도 여래의 깨달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깨달아 있다. 다만 미혹할 뿐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미혹하여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 미혹 즉, 어리석음이 우리를 스스로 아상이라는 감옥에 가둔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아상이라는 감옥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감옥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누가 가둬 놓은 것도 아니다. 스스로 실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감옥에 가둬 놓았으며 그로인해 스스로 아파하고 고통당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그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스스로 만든 상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 상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법을 설해주고 계신다. 스스로 그 상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수행법을 알려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행법대로 수행하는 이가 바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깨달아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수행법을 알려주셨고, 그 수행법대로 실천하는 자야말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짊어지고 있다면 다시 찾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금강경을 수행하는 이는 이미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깨달아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법을 즐기며 따르지 말라. 작은 법에 머물러 기뻐함으로써 대승의 원을 발하지 못하거나, 소소한 선과 복을 따르는 법에 집착함으로써 최상승의 원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참으로 금강경을 알아듣고 독송하며 전법하는 자라면 대승의 원을 발해야 하며, 최상승의 원을 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란 앞서도 설명했듯이 전부 ‘아견’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견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서술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견해’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를 즐겁게 해 주는 법을 즐긴다. 다시말해, 아견을 강화시키는 법, 나를 내세울 수 있는 법, 소승의 원과 선과 복을 짓는 소소한 법을 즐기게 된다. 대승과 최상승이 아닌 법이 바로 소소한 법이다. 그런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곧 ‘나라는 견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할 것이다.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진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진리의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오를 것이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늘 공양과 공경, 찬탄과 예배가 있다. 인간이 삼보에 예배하고 공양 공경하듯 일체 세간의 모든 존재들 또한 응당 공양 공경하며 찬탄 찬양하게 될 것이다. 마땅히 이 곳은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진리는 항상 청정한 수행자로 장엄된다. 진리가 있는 곳은 늘 청정한 수행자의 공양과 공경 그리고 찬탄과 예배가 항상한다. 내 안에 진리가 살아 숨쉬게 하라. 이 경전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타연설하게 되면 곧 내 안에 이 경전이 꽃을 피운다. 또한 그곳은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공경 공양하며 에워써고 돌면서 꽃과 향을 뿌릴 것이다.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멸은 말 그대로 상을 떠난 바로 그 자리가 적멸의 자리라는 뜻이다. 상을 깨는 것이 적멸 즉 실상이며 깨달음의 자리라는 말이다. 사실 부처님 가르침이 무량하며 그 방편이 무한하다고는 하지만 쉽게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상을 깨라’는 한 가르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진리는 다양하게 표현되어질 수 있다.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편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는 상을 여읨으로써 깨달음 즉 적멸에 이르는 방편의 가르침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분에서는 지금까지 13분까지 이어오며 설해 왔던 가르침에 대한 일종의 정리와도 같은 느낌이 드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상적멸분으로써 그동안의 가르침을 정리해 보자.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의 말씀을 듣고 그 뜻을 깊이 깨달아 눈물을 흘리면서 부처님께 사뢰었다.
“희유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깊고 깊은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 바 혜안(慧眼)으로는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경전입니다.
불교 공부를 해 오던 분들 가운데는 여기 이렇게 수보리가 흘린 눈물의 의미를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수보리 뿐이 아니다. 누구든 어둡고 막연했던 삶에 대해 어리석었다가 밝은 진리의 가르침을 듣고 나면 환희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처음에 맑은 신심을 일으켜 이 공부를 해 왔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물을 흘려 보았을 것이다.
보통 눈물이라는 것이 슬플때나 기쁠 때 나오기도 하지만, 진리의 감동에 젖어 온몸으로 흘리는 눈물은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흘러 나온다. 그동안 온통 상에 물들어 세상을 왜곡해서 보고, 분별 판단 시비하여 걸러 보았다 보니 우리 마음에 온갖 때가 끼고 녹이 슬어 좀처럼 상 이전의 맑고 순수한 본래심을 보지 못한다. 그렇게 어리석게 살다가 상을 여읜 진리의 자리에 대한 법문을 듣고 난다면 누구든 상 이전의 본래 자리에서부터 감로가 샘솟듯 온몸의 감동이 눈물로써 나오곤 하는 법이다.
또한 법문을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할 때, 마음이 텅 빈 상태에서 모든 상이 잠시 떨어져 나가고 고요해 지면서 온통 상으로 둘려 쌓였던 탁한 마음이 잠시 적적한 세계를 맛보게 되는 순간 우리는 온 존재로써 감동하지 않을 수 없고, 그 감동은 눈물로써 표현되곤 한다.
그런 눈물은 애써 감출 것이 아니다. 법문을 들을 때건, 수행을 할 때건, 내면의 깊은 곳에서 눈물이 흘러나올 때는 오직 그 눈물에 내 온 존재를 맡겨라. 눈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것도 없고, 눈물을 억지로 닦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몸과 마음의 떨림과 흐르는 눈물과 하나가 되어 함께 흐르라. 눈물이 스스로 멈출 때 까지 이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 보려는 의도를 버리고 그저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그 눈물은 눈이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에 따라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괴로운 일이 있을 때, 아플 때, 혹은 너무 기쁜 일이 있을 때, 그런 온갖 종류의 인연이 내게 다가올 때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인연 따라 흘리는 눈물은 실체가 없어 공하다. 인연이 다하고 나면 눈물도 메말라 버린다. 기쁜 일이 가고 일상으로 되돌아오면 눈물은 멎는다.
그러나 진리의 눈물은 다르다. 그것은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며, 진리가 온 존재로써 일치되어지는 작은 경험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업장(業障)이 소멸되는 눈물이며, 진리의 발견에 대한 귀의(歸依)의 눈물이고, 본래의 존재로 회귀하려는 귀향(歸鄕)의 눈물이다.
그렇다고 그 눈물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라. 흐르는 눈물에 또 다른 의미를 덮씌우거나 붙잡고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어리석은 상을 만드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한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선명함과 가볍고 적멸한 느낌을 애써 반복하여 경험하고자 하는 집착을 버려라. 눈물을 흘리고 난 뒤에 오는 그 맑은 느낌도 스스로 맑다느니, 업장 소멸의 느낌이라느니 하고 분별을 붙이고 나면 되려 어두워지게 될 것이다.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말고, 스스로 대견하다고 느끼지도 말고, 좋아하면서 붙잡고자 하지도 말고, 왜 이럴까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을 품지도 말고, 다만 그냥 내버려 두고 지켜보라. 다만 그 눈물과 하나가 되어 흘리기만 하라.
또한 왜 난 눈물이 흐르지 않는 것일까, 왜 난 깊은 체험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왜 난 수행 중에 온갖 경계를 한번도 만나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등의 분별 또한 턱 놓아버릴 일이다. 어떤 사람은 수행을 조금만 해도 금새 삼매에 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조금만 기도를 해도 금새 눈물이 흘러 나오며 깊은 감동을 느낀다는데, 나는 아무리 기도하고 수행을 하더라도 눈물은 커녕 그 어떤 감각적인 느낌도 없고, 환희심도 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다를 뿐이다. 수행 중에 눈물을 많이 흘리는 것이 좋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은 나쁘다거나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눈물을 탓하지 말라. 눈물을 많이 흘리고, 정진 속에서 부처님을 본다거나 아름다운 환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놓아버릴 뿐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이 그대로 마장이 될 뿐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 법문을 듣고 나니 수보리의 온 존재는 저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흘러 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도무지 이런 법문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러한 진리를 들었다는 그 사실이 수보리의 온 존재를 강렬한 눈물로써 휘감고 있다. 어떠한가. 당신의 존재에서도 눈물이 흐르는가. 앞의 13장 동안에 정진해 왔던 금강경의 가르침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는가.
우리는 그동안 온갖 상에 얽매여 맑은 눈이 가려져 버렸다. 본래의 텅 빈 시선에 온갖 어둡고 탁한 것들이 잔뜩 끼어 버렸다. 수보리는 그동안 얻어 들었던 가르침으로 인해 지혜의 눈이 열렸지만, 수보리의 혜안으로 보더라도 지금의 이 가르침은 희유하고 희유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 찬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리의 가르침을 만나거든 수보리와 같이 찬탄하고 또 찬탄하라.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탄의 연주가 온 우주 법계에 까지 울려 퍼지게 하라. 찬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중요한 수행이 된다. 찬탄은 법계를 울리고, 또한 내 안의 본래 자성을 일깨운다. 찬탄의 소리는 그대로 진언이 되고, 다라니가 되어 안팎을 진리의 향기로 수놓을 것이다.
여기서 수보리가 지금까지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그간 소승의 견해에서 벗어나 부처님의 대승의 가르침을 이제야 비로소 바로 보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이라는 의미는 이 금강경의 가르침만이 가장 수승하며 소승의 다른 가르침은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올곧게 전해져 내려오다가 부파불교를 거치면서 왜곡되고 퇴락해 가는 기존 불교의 삿된 부분을 타파하고자 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당시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망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소승불교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 즉 ‘일찍이 얻어 듣지 못한 가르침’을 원하는 대중의 소망이 컸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점, 삿된 점을 파하고 바른 진리를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가 바로 대승이며, 대승의 기본이 되는 경전이 반야경인 것이다. 물론 이 금강경은 반야경 속의 작은 경전이며, 동시에 반야경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경전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니 소승불교에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리 자체를 포함시켜 소승불교는 잘못된 것이고, 대승불교는 훌륭한 것이라거나 하는 분별도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고려시대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불교가 많이 타락하고 퇴락해 갈 때 이러한 잘못된 불교를 바로잡고자 새로운 불교결사로써 정혜결사가 이루어 졌다고 해서 고려의 불교 가르침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표현인 것과 같다.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부파불교도 마찬가지다. 당시의 부처님 가르침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해 오던 부파의 사람들이 잘못 해석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을 타파하고 바른 가르침을 세우기 위해 반야경, 금강경의 가르침이 나타나고 그로인해 부처님의 오롯한 정법이 다시금 새롭게 출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존이시여,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믿는 마음이 청정해지면 곧 실상(實相)을 깨달을 것이니 이 사람은 마땅히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설해오신 이 가르침을 얻어 듣고 그 가르침을 믿는 마음이 청정해 진다면 그 사람은 곧 실상을 깨달을 것이며, 이 사람은 제일의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것이라고 했다. 이 가르침, 즉 사상을 비롯한 일체의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 맑아지면 곧 실상을 깨닫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일체 상을 여의게 되면 좋다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등의 일체 모든 시비 분별을 쉬게 된다. 시비 분별이 없다면 좋다고 더 집착하여 잡으려 할 것도 없고, 싫다고 미워하여 버리려 할 것도 없게 된다. 일체의 모든 상에 대해 잡으려 하지도 않고 버리려 하지도 않는다면 그 사람의 마음은 한없이 고요한 적멸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좋은 것(시비분별)을 더 붙잡아(집착) 두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을 ‘내 것’(아집)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원인은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아상) 내가 있으니 ‘내 것’을 더 늘리고 싶고, ‘내 것’을 더 늘리려다 보니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집착이 일체의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과정 때문에 사람들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니 반대로 그 모든 근본 원인이 된 ‘나’라는 ‘아상’만 여의게 된다면 일체 모든 괴로움은 소멸되고 만다. ‘나’라는 아상이 없어지면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고, ‘내 것’을 늘리려는 마음을 여의게 되면 자연스레 ‘집착’도 사라지며, 모든 집착이 사라지면 자연스레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분별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랬을 때 어느 한 가지 상도 내세울 수 없는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상’을 깨달을 것이라고 했는데, 실상을 깨닫는다는 말은 따로이 실상이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다. 상이 본래 상이 아님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실상이다. 상을 여의게 되면 일체 그 어떤 상도 남지 않게 되는데 그것을 이름 붙여 실상이라고 방편으로 표현했을 뿐인 것이다. 그래서 ‘실상이라는 것은 곧 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이름하셨습니다’라고 했다.
다시말해 실상이라는 것이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이름을 방편으로 붙였을 뿐이지 실상이라는 상은 따로 없다는 말이다. 실상이라는 표현에 어떤 모양을 짓고 상을 짓는다면 그것은 벌써 실상에서 벗어나 있다. 실상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실상일 수 있는 것이다. 흡사 이 말은, 불성은 그 어떤 상도 아니기에 불성일 수 있다는 말과도 같다. 보통 사람들은 불성이 도대체 어떻게 생겼느냐고 질문을 하곤 한다. 그 질문에는 ‘내가 머릿속에 그릴 수 있는’ 어떤 불성이라는 모양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즉 불성이라는 상을 어떻게 만들어 둘 것인가 하는 마음으로 불성이 어떤 것인지를 묻는다는 말이다. 그랬을 때는 그 어떤 답도 내려줄 수 없다. 불성은 허공과 같다거나, 거울과 같다거나 억지로 방편으로 그렇게 표현은 해 줄 수 있겠지만 어찌 불성을 어떤 모양, 어떤 상으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불성이란 일체의 상을 여의었을 때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 없는 자리가 바로 불성이며 실상이기 때문인 것이다. 깨달음이 어떤 모양이냐고 묻는다면 도무지 대답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모양 없는 모양을 어찌 모양으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떠한가. 실상을 깨달았을 때 희유한 공덕을 성취할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이 말도 방편일 뿐이다. 실상을 깨달아, 일체 모든 상을 여의었다면 공덕이라는 것도 방편의 말일 뿐이지, 별도로 공덕이 있을 리 없다. 일체의 상을 여읜 마당에 어찌 공덕이라는 또 다른 상이 붙을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무량한 공덕이라거나 하지 않고, ‘희유한 공덕’이라고 했다. 공덕은 공덕인데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거나, 어떤 보상이나 대가로써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억만장자가 되는 보상이 따른다거나, 능력과 외모, 성격 등이 출중해 진다거나 하는 그런 공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체의 상을 여의어 실상이 밝게 드러나면 그 어떤 공덕도 없다. 아니 공덕이라는 방편을 쓸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냥 여여부동하며 성성적적하여 어떤 한 법도 일으킬 것이 없어지고, 어떤 한 말 조차 붙일 틈이 없어진다. 그야말로 텅 비어 충만할 뿐이다. 그렇기에 공덕이라는 말의 표현을 빌릴 필요도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희유한 공덕’이다. 아무런 시비를 붙일 것도 없고, 아무런 비교나 판단이나 집착이나 욕망도 일어나지 않으며, 나와 너를 나눌 것도 없고, 잘살고 못산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아름답고 추하다거나, 좋고 나쁘다거나, 행복하고 불행하다거나 하는 일체의 모든 분별상들을 다 비워버렸기 때문에 둘 중 어떤 한 가지 좋은 쪽을 택해 많이 얻게 되는 그런 공덕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좋고 나쁜, 양 극단을 초월한 절대의 평화만이 있음도 없이 있을 뿐인 것이다. 좋다거나, 잘났다거나, 아름답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그런 상대를 가진 좋은 쪽의 공덕이 아닌 그러한 일체 모든 양 극단을 뛰어넘은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즉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희유한 좋음’이 있고, 긍정 부정 양 극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이 있으며, 공덕있음과 공덕 없음을 뛰어넘는 ‘희유한 공덕’이 있다는 말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이 같은 경전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것은 어렵지 않사오나, 만일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서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닌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제일 희유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상이 없으며 인상도 없고, 중생상과 수자상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아상은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수자상도 곧 상이 아니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살아 계실 때라면 직접 부처님으로부터 진리의 가르침을 받아 듣고 지닐 수 있겠지만 오는 세상 후 오백 세에 어떤 중생이 이같은 경을 신해수지(信解受持)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 당시에도, 부처님께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중에서도 아라한이 되지 못한 자는 수도 없이 많았거늘 어찌 오는 세상 미래세에 이러한 희유한 가르침을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지금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하는 것도 희유할진데 미래세에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믿어 이해하고 받아 지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일 것인가.
앞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렇더라도 물론 올바로 믿어 이해하고 받아지니는 희유한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만을 인연지은 것이 아니라 수 억겁동안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지으며 가르침을 듣고 공부하여 실천한 까닭이다.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신해수지 하는 희유한 사람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사람에게 아상은 더 이상 아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 또한 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을 여의는 이 가르침에 있어 깨달음이란 오직 ‘상을 여의는 것’이며, 부처님이라는 것은 오직 ‘상을 떠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멸(寂滅)이란 이상(離相)을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아주 중요한 이 경의 핵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한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이것이다. 오직 상을 떠나는 것, 오직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이 우리에게 주는 화두요 깨우침이다.
일상 속에서 우린 얼마나 상에 얽매여 살고 있는가. ‘나’라는 것이 본래 없는데 다만 인연따라 거짓으로 만들어진 육신을 보고, 또한 눈귀코혀몸뜻을 보고 그것이 ‘나’라고 얼마나 고집하며 얽매여 살고 있는가. 상을 떠난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를 가를 것도 없으며, 인간과 자연을, 신과 인간을, 인간과 우주를 나눌 것도 없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나’라는 상을 짓고, ‘너’라는 상을 지으며, ‘우주’라는, ‘자연’이라는, ‘신’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왜 나와 너를 갈라놓고 내가 너보다 더 부자가 되려고,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지려고, 내가 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는가. 왜 부와 가난이라는 상을 만들어 놓았으며, 높고 낮음을 만들어 놓았으며, 아름답고 추함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거기에 빠져 괴로워하고 있는가.
꽃은 꽃대로 완전한 진리의 나툼이며, 나무는 나무대로, 하늘은 하늘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공기는 공기대로 저마다 온전한 진리의 인연 따른 나툼임을 모르고, 그들을 갈라 놓고 등수를 매기며, 좋고 나쁜 것을 골라내야만 하는가. 사람 또한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농부는 농부대로, 정치가는 정치가대로,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이는 가난한 이대로 저마다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나툼이 있건만 스스로 너와 나를 비교하고 분별하며, 비교 우위와 비교 열등에 목숨 걸고 소중한 인생을 낭비해야 하는가.
그래놓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상에 스스로 얽매여, 좋다거니 싫다거니 개념을 붙여 놓고,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개념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렇게 만든 개념에 빠져 좋은 것은 더 못 가져서 안달하고, 싫은 것은 떼어내지 못해서 안달하는 이런 어리석은 일을 왜 계속해서 하고만 있는 것인가.
이 모든 문제는 오직 ‘상을 여의었을 때’ 끝난다. 상을 여의었을 때 실상이 드러난다. 상을 여읜 것이 바로 적멸이며, 일체 모든 상을 떠난 것을 부처님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고 그러하다.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찌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르침은 그동안 우리가 배워왔고 익혀왔던 세상의 가르침과는 거꾸로 가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보다 많이 소유하고, 보다 많이 배워 익히며, 보다 ‘내 것’을 많이 쌓는 것에서 찾아 왔다. ‘나’라는 상을 만들어 놓고 ‘내 것’을 많이 채우는 것이야말로, ‘나’를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며 삶의 의미라고 생각해 왔다.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나’를 드러내고자 돈을 벌고, 명예를 높이며, 학벌과 재력과 권력을 쌓아간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라는 이름 석자를 더 많이 알릴 수 있고, 나는 더 유명해질 수 있으며, 나는 더 높아질 수 있고, 결국 그러한 ‘나’라는 아상이 강화될수록 우리는 더욱 더 행복해 질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그것이야말로 내 행복의 조건이고, 진리에 입각한 삶이라고 여겨왔다.
그렇게 아상을 높이려는 내 삶의 목적을 향해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잠시 쉴 새도 없이 달려오기만 했다. 잠시 앉아 쉬려고 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나만 쉬는 것 같아 도무지 쉴 수가 없다. 쉬다보면 남보다 뒤쳐질 것 같고, 남보도 더 적게 소유할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남들보다 더 못난 사람이 될 것이고, 더 뒤쳐진 사람이 될 것이며, 더 불행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도 쉴 수가 없다. 나는 늘 바쁘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다. 늘 바쁘고, 남들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 숨도 쉴 수 없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 자위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그렇게 내 삶의 전부를 걸고 달려왔던 이 길, 이 길만이 나를 행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이 길. 지금 이 길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가르침과 만난 것이다. [금강경]은 그 길을 거부하고 있다. 그 길은 참된 진리가 아니며,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데려다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에서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고, 다만 인연따라 생겨난 것이기에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다’ 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내 것이다’라고 할 만한 소유도 실제는 내 소유가 아니고, ‘내가 옳다’고 여겨왔던 내 사상, 견해, 생각에 대한 것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목숨 걸고 가지려고 애써왔던 그 모든 소유의 일들이 모두 헛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라고 할 만 한 것이 없는 마당에 ‘내 것’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양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이 상이 아니라는 것을 올바로 볼 수 있을 때 여래를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왔던, 내 삶의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며 달려왔던 이 모든 것이 다 텅 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고 까무라칠 일인가. 언뜻 들어보면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고, 놀랄만한 일이며, 겁나는 일인가. 지금 금강경의 이 가르침은 내가 걸어온 모든 길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나’라는 상을 높이려고 살아왔던 나의 삶 자체를 모두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소유하고 있는, 내가 집착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이 다 실체가 없으니 다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일체를 다 놓아 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다 비우라고 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런 말인가. 그동안 쌓고 쌓느라 얼마나 많은 생을 소비해 왔는데, 얼마나 애써왔는데, 이제와서 다 놓아버리라니, 다 비워버리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인가.
그래서 보통 사람이라면 처음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들으면 놀라고 두려워하며 겁내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놀라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삶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실체라고 생각했던 것을 이제와서 다 비워버리라니, 다 허망한 것이라니 얼마나 억울하고 두려운 일인가.
그런데 이러한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얼마나 희유한 사람이겠는가. 그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니 셋 넷 다섯 부처님에게만 선근 인연을 지으며 공부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고 수행을 해 왔기 때문에 이렇게 한 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듣는 것 만으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겁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말한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일 뿐이기 때문이다.
제일바라밀이란 무엇인가. 구마라집은 제일바라밀(第一波羅蜜)이라 번역했고, 현장은 최승바라밀(最勝波羅蜜)이라 번역을 했다. 일반적으로 제일바라밀은 육바라밀 가운데 첫 번째인 보시바라밀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는 구마라집 번역의 제일바라밀이 첫 번째 바라밀이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번역을 하고 있는 것인데, 산스크리트 원전을 직접 번역하신 각묵스님은 이것이 구마라집 번역의 한문 해석만을 보았기 때문에 그런 잘못된 해석이 나온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현장은 최승바라밀은 다름 아닌 반야바라밀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으며[如來說最勝波羅蜜多 謂般若波羅蜜多], 각묵스님은 ‘산냐를 극복하라는 이 가르침이야말로 최초기부터 세존께서 고구정녕히 설하신 것이고 그 정신을 바로 전해 받은 이 경이야말로 최고의 바라밀,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이라는 말로 이해한다’고 함으로써 제일바라밀을 ‘최고의 바라밀’ 즉 ‘최고의 가르침’, ‘불교의 핵심’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상을 깨는’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고자 하는 가르침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이다. 즉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아야 한다는[약견제상비상]이 가르침이야말로 반야바라밀, 즉 지혜로써 저 깨달음의 언덕에 이르는 궁극의 깨달음을 설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니 각묵스님의 최고의 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현장스님의 반야바라밀이라는 의미나 크게 다를 것은 없다고 본다.
또한 구마라집 번역의 보시바라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넓은 의미로 보자면 동일 선 상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금강경에서는 상을 타파하는 것이 주된 가르침으로 등장하고 있는데, 설법의 대상이 주로 보살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앞서 말한 적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주된 서원인 ‘상구보리와 하화중생’ 그 중에서도 하화중생의 관점에서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 이롭게 하는 보시를 예를 들어 상을 타파할 것을 설하고 있다.
즉 보살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고자 원을 세워 실천하지만, 보살에게 ‘내가 중생을 교화한다’거나, ‘내가 중생에게 가르침으로써 베풀고 있다’ ‘나는 법보시를 행하고 있다’는 등의 ‘내가 보시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아상’의 틀을 깨고 나오지 못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문장의 제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최고의 바라밀이라 해석하거나, 혹 보시바라밀이라 해석하더라도 큰 금강경의 문맥에서는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면 다시 경전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희유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기 때문인 것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기 때문에 ‘제일바라밀은 곧 제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제일바라밀이다’라는 것을 명확히 깨닫고 있는 것이다. 즉 제일바라밀이라는 것, 혹은 최상의 바라밀, 반야바라밀, 보시바라밀이라는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림을 당했을 적에 내게는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과 수자상도 없었다. 만약에 내가 옛적에 사지를 마디마디 베이고 잘렸을 때 만일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있었으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여래가 과거에 오백 생애 동안 인욕 성인이 되었을 때를 기억해 보더라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도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이 경을 듣고도 놀라지 않고 겁내지 않으며 두려워하지 않는 이는 일체의 상을 타파한 사람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했으므로 이러한 가르침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사람은 더 이상 반야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고 보시바라밀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인욕바라밀에도, 육바라밀에도, 나아가 부처님의 그 어떤 가르침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집착하지 않지만 그 모든 가르침을 집착함이 없이 다 받아들이고 실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또 제일바라밀에 이어 또 하나의 비유로써 인욕바라밀을 들고 계신다.
인욕(忍辱)이란 어떤 괴로움이라도 잘 참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처럼 억지로 참는다거나, 마음 속에 꾹꾹 눌러 놓고 쌓아 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참된 인욕이란 참되 참는다는 생각마저도 다 소멸된 참음이다. 참는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참는 나’가 있다는 말이다. 즉 ‘나’라는 아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참음이 아니라 ‘나’라는 것이 완전히 소멸되고, 일체의 상 또한 모두 소멸된 가운데 참는 것을 말한다.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라고 말하나니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이라고 했다. 인욕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인욕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인욕바라밀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자는 ‘내가 인욕바라밀을 행한다’는 상이 없다. 그러한 수행자에게 인욕바라밀은 인욕바라밀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인욕바라밀일 뿐인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에 인욕선인(忍辱仙人)으로 계실 때, 고요한 숲 속 나무 아래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는데, 마침 그 나라의 왕인 가리왕(歌利王)이 사냥을 나와 있었다. 가리왕이 산 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잠을 자고 깨어 보니 함께 온 시녀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때 함께 온 시녀들은 나무 밑에 앉아 선정에 들어 있는 인욕선인을 발견하고는 그 모습이 너무나 청정하고 고귀해 보여 친견하고 예를 올리고 있던 차였다. 이 광경을 본 가리왕은 질투심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말하기를, “어찌 방자하게 남의 여색을 탐하는가” 라고 하니, 선인은 답하기를 “나는 여색을 탐하지 않습니다. 나는 인욕을 닦는 수행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은 ‘얼마나 인욕을 잘 하는가 두고보자’ 싶은 마음에 인욕선인의 코를 베고, 팔을 베고, 다리를 베면서 사지를 갈기갈기 잘라 놓고는 “네놈이 이래도 화가 나거나, 원망하는 생각 없이 참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었다.
이에 인욕선인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화를 내거나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 인욕 선인은 육신이 ‘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육신이 베이고 잘림을 당하였지만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억지로 참아 가슴 속에 화를 담아 둔 것이 아니라 청정한 인욕바라밀을 실천할 수 있었다. 그것은 화를 낼 ‘나’가 없으며, 원망할 ‘나’가 없다는 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생의 인욕선인으로 사지를 찢기고 베일 때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지만, 부처님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기 때문에 성내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육신이란 다만 인연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다. 밥과 반찬이 내 앞에 있을 때 우리가 그것을 먹는다는 인연에 따라 밥과 반찬이 인연따라 내가 된 것일 뿐이다. 밥과 반찬이 나로써 윤회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다시금 대소변으로 빠져 나가거나, 땀으로 빠져 나갔다면 그것은 다시금 인연따라 대지로 돌아간 것이다. 이와같이 일체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인연따라 잠시 우리 몸으로도 변했다가, 흙으로도 변했다가, 나무로도 변하고, 꽃으로도 변하는 것일 뿐, 어느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할 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이다.
사과 하나가 있을 때 그것을 칼로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지 않는다. 사과는 그저 사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과를 내가 먹고 사과가 우리 몸의 살로 변했다고 치자. 그랬을 때 칼로 살을 자르면 우리는 화를 내고 원망할 것이다. 그것은 ‘내 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그 몸이 ‘내 것’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다만 사과가 변한 것에 불과하다. 내가 먹은 것이 내 몸으로 잠시 변화하여 인연따라 나툰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내 몸을 칼로 그었을 때 괴롭거나 화를 내려거든, 사과를 칼로 자르거나, 나무를 칼로 자를 때도 똑같이 화를 내고 원망해야 할 것 아닌가.
어디 인욕선인 뿐이겠는가.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이 금강경을 번역하신 구마라집의 문하에 승조(僧肇)라는 스님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승조스님은 워낙 명성이 뛰어나 불교계 뿐 아니라 세간에서 또한 크게 숭상받았는데 그러다보니 많은 이들의 모함도 받게 되었고 왕이 부하로 만들려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특히 이 승조스님을 탐낸 진나라 왕 의희는 스님을 퇴속시켜 자신의 부하로 만들려고 갖은 희유와 협박을 다 하였다.
"스님께서 속인으로 돌아와 재상이 되면 천하의 백성을 위해 좋은 일을 더욱 많이 할 수 있을 것이니 부디 짐의 청을 저버리지 마시오"
그러나 스님은
"재상이 다 무엇이고 천하가 다 무엇이겠습니까. 부처님 법에서 볼 때는 모두가 부질없는 꿈 속의 일일 뿐입니다. 나는 무상대도를 얻어 만 중생을 이익되게 할 것입니다."
라며 단번에 거절해 버렸다. 이 말을 듣고 화가 난 진왕은 승조스님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승조스님은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사형이 집행되기 전 칠을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꿰뚫은 보장론을 저술하며 죽음을 앞에 두고도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하고 번역하는데 몰두하였다. 곧 형틀에 올라 칼로 목을 베이는 참수형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태연하게 게송 하나를 읊었다고 하니 다음과 같다.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는 원래 주인이 없고(四大元無主)
다섯 가지로 모여진 이 몸은 본래부터 비었도다.(五陰本來空)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將頭臨白刀)
이는 마치 봄바람을 베는 것과 같을 뿐이다."(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칼로 베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인가. 아! 이 금강경 가르침이야말로 감히 범인으로써는 범접하기 어려운 광대한 기상과 깨달음을 담고 있는가.
이처럼 세상의 모든 모양 있는 것들은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모양을 변화시킬 뿐,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내가 죽어 다음 생에 개나 돼지로 태어났다고 치자. 그러면 이번 생의 내가 나인가, 다음 생의 개나 돼지가 나인가. 또 그 다음 생에는 천상에도 태어날 것이고, 또 그 다음 생에는 지옥으로도 태어날 것이며, 어떤 생에는 여자 몸을 받았다가 또 어떤 생에는 남자 몸을 받게 될 것인데, 어느 한 때를 콕 찝어 ‘나’라고 고정지어 말 할 수 있겠는가. 어느 것도 ‘나’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변화하기만 할 뿐.
이와같이 부처님께서는 과거 오백 생 동안 인욕 선인이 되었을 때에도, 수없는 생을 윤회하고 육신의 변화를 겪으면서도 한 번도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으며, 중생상도 수자상도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지니,
그러므로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무상정등정각의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보리심을 일으키되 일체의 상을 떠나서 일으켜야 한다. 일체의 어떤 상에도 얽매임 없이,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보리심을 일으켜야 한다.
보통 많은 사람들이 보리심을 일으킨다. 수많은 이들이 다 깨달음을 추구하며, 위없는 대 보리를 증득하고자 수행하고 정진하며 또 보시하고 있다. 지혜와 복덕을 얻고자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리심을 일으킨 수행자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상에 머무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깨닫고자 하는 보리심을 일으키긴 하는데, 거기에 또 ‘나’를 내세우게 된다. ‘내가 깨닫겠다’ ‘내가 보리를 이루겠다’ 하는 아상에 머물러 깨달음을 추고하곤 한다. ‘내가 깨달아서 다른 사람들 보다 더 큰 행복을 이루겠다’거나, ‘내가 깨달아서 많은 중생을 구제하겠다’거나 하는 등 깨닫고자 하는 주체를 ‘나’라는 상에 꽁꽁 묶어 두곤 한다.
혹은 부처라는 상을 만들어 두고, 진리라는 모양을 만들어 두고, 내가 깨달아 가야 할 이상향을 마음 속에 설정하여 모양을 만들어 두고는 그 길로 향해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진리는 없다. 그런 부처는 없다. 어떤 모양을 가진 진리, 어떤 상을 가진 부처는 없다. 모양을 짓고, 개념을 붙이며, 생각하는 그 속에는 결코 진리도, 부처도 있지 않다.
그 모든 것들이 다 상에 머물러 보리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키되, 그 어떤 상에 머물러 보리심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참된 구도자의 길이 아니다. 수행자는 일체 모든 상을 다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나’라는 상도, 부처라는 상도, 진리라는 상도, 참나라거나, 불성이라거나, 주인공, 진아, 본래자성, 본래불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일지라도 그것이 다 방편인 줄 알아야지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고 머물러서는 안 된다. 보살은 마땅히 일체의 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켜야 한다.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라고 했는데, 색성향미촉법이란 다시말해 우리 인간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안이비설신의 육근의 대상, 즉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법을 말한다고 했다. 다시말해 ‘나’라는 주관이 접촉하여 만날 수 있는 일체의 외계 대상을 말한다. 바로 이 육근과 육경의 가르침은 근본불교에서부터 줄곧 중요한 생활 법문으로 이어져 온 중요한 가르침이기에 다시한번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내 몸의 여섯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게 마련이다.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고,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우리들의 일상이다.
색이란 눈에 보이는 대상인 빛깔과 모양이 있는 모든 것을 말한다. 즉, 우리는 바깥 대상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지에 마음이 머물길 좋아한다. 사람을 만나더라도 예쁘고 잘생긴 사람을 좋아하고, 못난 사람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가. 그래서 좋은 사람은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쓰고 집착하면서 싫은 사람과는 떨어지지 못해 안달한다. 그렇게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는 것이 사람들의 일상이다. 그러나 몸이라는 것도 어떤가. 사람의 몸은 그저 똥주머니일 뿐이라는 선지식의 말씀이 있다. 그야말로 이 몸이라는 것은 온갖 오물 같은 오장 육부와 모든 것들을 집어넣어 놓은 똥주머니일 뿐이다. 좀 비위 상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몸 속의 모든 내장 기관들을 다 끄집어 내 보라. 그것이 어디 예쁘고 좋을 것이 있겠는가. 얼굴이 예쁘다는 것도 눈코입 중 어느 하나가 조금만 살짝 옆으로 옮겨 달렸더라면 못난 얼굴이 되지 않았겠는가. 이 몸뚱이라는 것, 외모라는 것도 다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몸을 받을 것일 뿐이다. 어떻게 마음을 쓰는가에 따라 이 똥주머니의 생김새도 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몸에 집착할 것이 무엇인가. 100년도 못 살다가 대지의 지수화풍으로 돌아갈 육신이거늘 어디에 집착해 내 것이라고 단정 짓고 소유할 수 있겠는가.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는 것이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다.
마찬가지로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마음을 낸다. 칭찬이나 비난을 들을 때 울고 웃으면서 우리는 그 소리(聲)에 많이 휘둘린다. 칭찬을 들으면 좋아하고 비난을 들으면 싫어하기 때문에, 칭찬은 더 듣고 싶어 안달이고, 비난은 듣기 싫어 안달이다. 그러나 칭찬과 비난이라는 소리 또한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다만 소리일 뿐이지 않는가. 인연따라 잠시 칭찬도 들을 수 있고 비난도 들을 수 있는 일인 것이지, 칭찬을 들었다고 내가 정말 칭찬받을만한 실체적인 무엇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난을 들었다고 스스로가 비하되거나 못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말에, 소리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린다는 것이 얼마나 짐승스러운가.
또한 냄새에, 맛에, 감촉에, 생각의 대상인 법에 우리는 늘 휘둘리면서 산다. 늘 그러한 육근의 대상에 이끌려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한 채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그 중 좋은 데 탐심(貪心)을 내며 집착하고, 싫은 것에는 진심(嗔心)을 내며 미워하곤 한다. 그러나 좋고 나쁜 것이 본래 없다. 그 어떤 육근의 대상도, 그 어떤 색성향미촉법이란 대상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꿈처럼 나툴 뿐이다. 우리가 집착할 그 어떤 실체도 아닌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니 치심(癡心)이 들끓어 마음을 머물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로 탐심, 진심, 치심이란 삼독심(三毒心) 생겨나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본래 텅 비어 공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다. 바른 지혜만이 탐진치 삼독심을 끊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하는 길이다. 일체의 상이 타파될 때 삼독심이 소멸하며 그 어떤 집착의 대상도 없게 된다. 그래야 자유롭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고 집착할 것 없이 자유롭게 휘적휘적 삶의 길을 내딛게 될 수 있다.
여기서 이와 관련된 달마스님의 파상론의 말씀을 좀 더 들어보자.
“수행을 성취하자면 여섯가지 도적을 쫓아 버려야 하는데, 눈의 도둑을 쫓아 버리자면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하고,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들리는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며,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고,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맛에 탐미하지 않으며, 법다운 말만을 해야 하고,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하고, 마음의 도적을 조절하자면 무지를 극복하고 지혜를 닦아야 한다.”
달마스님은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뜻으로 들어오는 그 각각의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이 가장 큰 도둑이며, 도적이라고 하고 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향기 맡고 입으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며, 마음으로 분별하는 등 이 모든 우리 몸의 기관들은 바깥의 대상들 즉 육경, 색성향미촉법을 끊임없이 얻어 가지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한 시도 평화로울 날이 없이 대상을 탐하기 때문이다. 눈으로 물질(色)을 탐하고, 귀로 좋은 말(聲) 듣기를 원하며, 코로 좋은 향기(香) 맡기를 바라고, 혀로 맛(味)에 탐닉하고, 몸으로 좋은 감촉(觸)을 탐하며, 마음으로 온갖 분별을 일으켜 생각(法)을 지어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섯의 도둑 때문에 우리는 늘 고요하지 못하고 탐내며 성내고 어리석은 것이다. 여섯 기관으로 좋은 것을 탐내다가(貪心) 얻지 못하였을 때 화(嗔心)를 낸다. 이처럼 여섯 기관의 도적에 휘둘려 여섯 대상이 텅 비어 공한 것임을 알지 못하고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는 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음(癡心)인 것이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이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항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육근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것들을 잘 관(觀)하여 들고 나는 그 어떤 경계에도 집착하는 바가 없어야 할 것이다.
눈의 도둑을 몰아내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적 대상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좋고 나쁜 분별을 짓고 좋으면 애착하여 붙잡으려 하고, 싫으면 증오하여 버리려고 애를 쓰니 색이라는 경계에 휘둘려 마음을 번뇌로 몰아가는 것이다. 귀의 도둑을 억제하자면 귀로 들려오는 그 어떤 소리에도 흔들리지 않아서 칭찬이든 비난이든 그 어떤 좋고 나쁜 소리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칭찬에 집착하여 자꾸 듣고자 애쓰지도 말고 칭찬을 들었다고 쉬 들뜰 것도 없으며, 비난을 들었다고 번뇌에 휩싸여 내 중심을 잃고 헤매어 서도 안 된다. 코의 도적을 항복시키자면 향기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향기에 분별하면 곧장 눈귀코와 몸뜻도 함께 분별을 일으켜 온갖 집착을 만들어 낸다. 입의 도둑을 제압하자면 먼저, 맛에 탐미하여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야 한다. 맛에 탐함이 많으면 때를 구분하지 못하여 시도 때도 없이 먹게 되고, 그리하여 그 탐심이 뱃속을 채우게 되어 몸을 어지럽히고 그로인해 정신이 혼미해져 마음에도 헤를 입힌다. 또한 입을 잘 관하여 법다운 말만을 해야지 생각난다고 다 입 밖으로 내 놓게 되면 사람이 실없어 지고 공허해 진다. 늘 입을 잘 다스려 침묵을 지킬 일이고 말을 할 때라면 몇 번이고 관하여 법다운 말을 어렵게 꺼낼 일이다. 몸의 도적을 항복받자면 모든 감촉에 좌우되지 않아야 한다. 자칫 감촉에 집착을 하게 되면 음탕한 행과 삿된 행으로 온갖 신업을 짓게 된다. 몸의 행동을 늘 잘 관하여 어떤 행동에도 감촉의 욕망에 휘둘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도적을 잘 조절하자면 수행을 통해 어리석은 마음을 잘 극복하고, 관 수행을 통해 지혜를 닦아야 한다. 늘 경계따라 올라오는 마음을 잘 관하여 그 마음이 신구의(身口意)로 어떻게 퍼져 나가는 지 잘 살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십이연기에서는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라는 지분으로 설명하고 있다. 명색(名色)이란 색성향미촉법 육경(六境)을 말하며, 육입(六入)이란 안이비설신의 육근(六根)을 말한다. 육입이 명색을 촉(觸)할 때 수(受)가 일어나고 수는 곧 애(愛)를 불러오며 애는 취(取)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촉이란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며, 수는 느낌, 감정을, 애는 애욕, 취는 집착을 말한다. 이렇게 어려운 용어를 써서 그렇지 쉽게 말하면,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여섯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 눈으로는 빛과 모양을, 귀로는 소리를, 코로는 냄새를, 혀로는 맛을, 몸으로는 감촉을, 뜻으로는 뜻의 대상인 법을 만날 때(촉) 좋고 싫은 느낌을 가져오고 그 느낌의 결과 애욕(애)을 일으키며 그것이 결국 집착(취), 취착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즉 위에서 말한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이 육근 중 안근인 눈(육근)으로 예쁜 사람(육경)을 볼 때(촉) 좋은 느낌(수)이 일어나고 연이어 애욕이 생겨나고(애) 그 결과 그 사람에게 집착(취)하려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이런 집착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인이 이와같은 육근과 육입의 접촉으로 인해 생긴다는 말이다.
그러니 금강경에서는 육근을 가지고 육경을 접촉하되,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육근이 있는 이상 육경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고 접촉하게 되면 느낌과 애욕,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육경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십이연기의 중간 단계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요소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쉽고 실천적인 부분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하면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수, 애, 취를 일으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안이비설신의 육근이 색성향미촉법 육경을 만날 때 색에도 머물지 않고,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겠는가.
그 해답을 부처님께서는 정념(正念)에 두셨다. 즉 잘 관찰하고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깨어있는 마음으로써 잘 관찰함으로써 육경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눈이 대상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접촉할 때, 뜻으로 헤아릴 때 항시 육근과 육경을 또 육근과 육경의 접촉을, 그 접촉에서 오는 느낌을, 그 느낌에서 오는 애욕과 집착을 마음을 모아 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근본불교의 사념처(四念處)에서는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곳을 잘 관하라고 하고 있다. 즉 육근이 머물러 있는 신념처, 즉 우리의 몸과 몸의 감각기관을 잘 관하라는 것이 첫째이고, 둘째로 육근과 육경이 만날 때 일어나는 수념처, 즉 느낌, 감정을 잘 관하라는 것이다. 셋째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경계를 관하며, 넷째로 법에 대한 관찰을 말하고 있다. 이와같이 깨어있는 비춤으로 관하게 되었을 때, 색에도 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이 여섯가지 도적인 육경을 잘 경계하여 이 도적들이 우리를 침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우리 몸의 이 여섯가지 기관, 육근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성의 외곽이 튼튼하고 병사들이 두 눈 뜨고 깨어 있게 되면 함부로 도적들이 성을 뛰어 넘을 수 없지만, 병사들이 잠 자느라 깨어있지 못하게 되면 쉽사리 도적이 성을 침범하듯, 우리 몸의 여섯 기관을 잘 관하여 깨어있는 마음으로 지켜봄으로써 여섯가지 대상이 여섯 기관을 침범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달마스님께서도 여섯 도적을 항복 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하라고 연이어 법문하고 계신다.
"만약 마음을 거두어 내면을 관찰하고 밖의 대상의 일을 밝게 깨달아 잘 관조할 수 있다면 탐진치 삼독심을 완전히 끊을 수 있고, 밖에서 들어오는 여섯가지 도적들을 잘 막을 수 있다. 그러면 많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요. 진리에 이르는 많은 길을 낱낱이 성취할 것이다. 그렇게 수행하는 사람은 머지 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
여섯 도적을 잘 관조함으로써 삼독심을 끊고 온갖 공덕을 성취하며 머지않아 부처를 증득하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다. 수행의 관건은 바로 이 여섯 감각기관인 여섯 개의 문을 잘 관조함으로써 여섯 도둑들이 들어오는 것을 잘 막아내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하니,]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
구마라집의 해석본에는 없지만 연이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법에 머무는 마음을 내지 말며, 비법에 머무는 마음도 내지 말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경전에서는 법을 진리 혹은 존재로 번역하고 있다. 제법무아에서의 법은 존재를, 삼법인에서 법은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그 어떤 법이라도 마찬가지다. 제법무아에서 보듯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없어 무아이고 텅 비어 있는 공 그 자체이다. 그러니 일체 그 어떤 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비존재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을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진리에도 진리가 아닌 것에도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어디에든 마음이 머물 곳을 정해 두면 그것은 집착이고 상에 얽매이는 것일 뿐이다. 진리에도 머물면 안 되고, 부처에도 머물면 안 된다.
그래서 수행자는 일체 그 어떤 것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 그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간에 이 마음은 집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집착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대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여기, 무집착에 있다. 금강경에서 상을 타파하라는 것도 상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며, 근본불교에서 제법무아, 제행무상, 일체개고의 삼법인을 설한 것이며, 사성제를 설한 것 또한 집착을 타파토록 하기 위함이다. 선불교에서 방하착(放下着)하라는 말 또한 집착을 놓으라는 말이고, 인류의 모든 성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인 ‘마음을 비우라’는 것 또한 일체 모든 애착과 집착을 비우라는 말인 것이다. 집착이 없으면 어디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아 자유롭다. 집착이 없으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도 사라지며, 내것과 네것을 나누는 분별도 사라진다. 집착이 없으면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상이 생겨날 수가 없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바로 집착 없음에 있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이 모든 불교 수행의 핵심이다.
마음에 머무름이 있다는 것도 즉 머무름 아님이 된다.
마음이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고 했는데, 사실 마음이 머물러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이 아니다. 본래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실체가 없고, 머물 주체가 없으며, 머물 곳이 없거늘, 어디에 머무를 수 있겠는가. 머물러 집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집착할만 한 것도 없다. 집착이라는 것 또한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꿈에 집착한다고 하지만 실은 꿈을 깨고 보면 집착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집착한다고 생각하지만 환상으로 환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환상은 환상일 뿐 실체가 될 수 없다. 꿈 속에서 집착하고 아파할 수는 있지만, 그래서 그 꿈 속에서는 죽을 것 같고 아파 미치겠지만 꿈을 깨고 보면 그것이 실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금새 깨달을 수 있는 것과 같다. 집착했지만 사실은 집착이 아닌 것이다.
연극의 주인공은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고 그 연극 속에서 필요한 모든 마음을 다 일으킨다. 그러나 그것은 연극일 뿐 실제가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사랑하고 아파하며 집착하지만 마음이 거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집착 없이 집착하고 집착 없이 사랑하며, 집착 없이 아파하고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뿐이다.
사실은 이와 같이 우리 모두는 집착 없이 살고 있다. 머물러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머무름 없이 살고 있다. 그렇기에 선지식 큰스님들께서는 깨닫고 보니 깨달을 것이 없고, 닦을 것이 없으며, 집착을 버릴 것도 없고, 무언가 끊어낼 번뇌가 없다고 하셨다. 이미 다 이룬 부처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생노병사에 얽매여 고통받고 있지만, 사실은 고통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두가 꿈 속에서 일어나는 것 처럼 환상이고 꿈이며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보신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이룰 것이 있는가. 우리는 이 자체로써 이미 다 이룬 부처이며,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진리를 깨달은 입장에서 본다면, 더 이상 깨달을 것도 없고, 무언가를 구할 것도 없으며, 수행해서 진리를 깨닫겠다는 것도 다 허망한 말일 뿐이다. 깨닫고자 노력하고 애쓰는 그 자체가 벌써 어긋나 있는 것일 뿐이다. 이미 우리는 본래부터 부처였으며, 본래 다 깨달아 있던 것이다. 본래부터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마음을 내고 있었으며, 집착 없이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머무름 있다는 것도 사실은 머무름 아닌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보살은 응당히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다’고 설했던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의 보시도 색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보살이 색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할 수 있겠는가.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하며,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해 하화중생하지만, 스스로 보시한다는 생각이 없다. 스스로 보시를 하면서도 보시한다는데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이 몸(색)에 집착하여 이 몸을 더 편히 하겠다는 생각이라거나, 이 몸이 깨달음을 이루자거나, 내가 널리 보시하여 일체 중생을 구함으로써 큰 복덕을 누리자거나 하는 그런 색에 머무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 ‘나’에 집착하고, 육신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보살은 성향미촉법에 머물러 보시하지도 않는다. 그 어떤 일체 육근의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다 좋은 소리를 듣겠다거나, 보다 좋은 향기와 맛과 감촉이나 법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름이 없다.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함으로써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있다. 그러나 보살 스스로는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보시하겠다는 상이 없다. 나와 너라는 상대 개념이 없으며, 좋고 싫다는 분별도 없고, 중생과 부처라는 차별이 없고, 생사와 열반이라는 생각 또한 텅 비어 공적할 뿐이다.
보살은 어떤 한 생각도 일지 않는다. 무심(無心)일 뿐이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행하거나, 마음으로 깨닫고자 하거나, 마음으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마음 자체가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닦을 마음도 없으며, 깨달을 마음 또한 완전히 텅 비어 있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보살의 광대무변하고 원만한 일체 중생을 향한 무분별의 보시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상을 타파하라고 했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 일체 모든 상이 개시허망이므로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라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것도 없다. 타파할 상이 없다.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공연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가운데, 중생들이 홀연히 꿈처럼 망상을 일으켜 상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 낸 상 또한 상이 아니다. 상이라고 분별을 일으켰을 뿐이지 그것은 상이 아니다. 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스스로 그 상에 빠지고 걸리며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울고 웃고 해 왔지만 여전히 상은 생겨난 적도 없고 소멸된 적도 없다.
다만 저 혼자서 상을 만들고 깨고 그러면서 상을 만들었을 때는 중생이라고 생각하며 상을 깨는 수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상을 깨버린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이름 짓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열반을 성취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 만들어 낸 공일 뿐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중생도 마음도 부처도 이 셋은 서로 차별이 없다고 했다. 중생이 마음을 닦는 과정을 통해 부처를 이룬다는 것 자체가 공한 것이다. 그러니 무엇이 중생이고 무엇이 마음이며 무엇이 수행이고 무엇이 부처인가. 다 꿈 속의 일일 뿐이다. 다 신기루이고 물거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중생이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다. 부처님께서 지금까지 설하신 상이라는 것, 중생이라는 것은 다만 방편일 뿐이다. 홀연히 상을 만들어 내, 그 상에 갖히고 집착해 있는 자신을 중생이라고 하여 얽매이니까 ‘그게 아니다. 상이 상이 아니다. 무릇 모든 상이 다 허망한 것이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볼 때 부처를 볼 것이다.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다.’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여래는 일체의 모든 상도 곧 상이 아니며, 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이렇게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고 있지만 도무지 오리무중일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상이 그렇게 많고 두터우며 지중하다. 온갖 망상과 번뇌가 하늘을 찌르며 수미산을 덮는다. 그러니 어찌 이러한 부처님 말씀에 금새 신심을 일으키고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
가만히 부처님 말씀을 듣고 있다 보면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제는 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했다가 또 상도 상이 아니라고 하시고,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가 중생도 중생이 아니며 부처도 부처가 아니라고 하시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 쯤 되니 번뇌가 깊고, 두터운 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의심이 든다.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문이 들고 의심이 든다. 도대체 저 말이 참말이란 말인가. 실다운 말이며 여법한 말인가. 거짓말을 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 왜 저렇게 이랬다 저랬다 하시면서 서로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시는가. 온갖 부처님 말씀에 대한 의심이 들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보고 말씀하신다. ‘여래는 참다운 말을 하는 이고, 실다운 말을 하는 이며, 여법한 말을 하는 이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이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이다.’
여래는 참된 말만을 하는 이다. 거짓된 말을 하지 않는다. 또한 실없이 이유없이 말씀하지 않는다.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신다. 온갖 다량한 상에 얽매여 있는 복잡 다단한 중생들에게 얽매여 있는 다양한 상을 깨뜨려 주기 위해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말씀만을 하실 뿐이다. 그 부처님의 모든 말씀은 여법하다. 법에 합당하며, 진리로 이끄는 말씀만을 하고 계신다. 그렇기에 거짓된 말일 수가 없다.
우리 생각에는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시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부처님께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이 필요했고, 저 사람에게는 저 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보살이 스스로 하화중생을 하며 중생을 구제하면서 아주 작게나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내고 있음을 보시고, 그에 응해 상에 머물러 보시하지 말며, 보시한다는 마음을 일으킴도 없이 보시해야 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언뜻 금강경의 설법을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보인다. 이 말씀을 했다가 갑자기 저 말씀을 하는 듯 보이고, 이 설법을 하시다가 왜 갑자기 다른 말씀을 하시는가 싶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의 설법이 응병여약의 대기설법이기 때문이다. 대중의 근기에 맞춰, 온갖 중생의 근기에 맞춰 그때 그때 필요한, 그때 그때 그 사람의 마음상태와 근기, 상황과 일어난 온갖 생각들을 비추어 보시고 그에 합당한 여법한 법문을 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뜻 보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일지 모르지만, 마음을 모아 금강경에 집중하여 공부해 보면 위없는 부처님의 지혜에 그만 깊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공양하고 공경하며 존중하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설법을 하고 나면 이 즈음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의 극단에 치우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옭고 그르다거나, 좋고 싫다거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등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데 익숙해 있다. 그러나 어찌 전적으로 옳거나 그를 수 있는가. 어떻게 절대적으로 좋거나 싫을 수 있단 말인가. 삶의 그 어떤 모습도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삶에는 정답이 있지 않다. 정답일수도 오답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게 분별하고 시비하는 데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 말씀도 어느 쪽이 맞느냐 하고 둘 중 하나를 골라 그 하나를 불법이라고 못박으라고 독촉하곤 한다.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하다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며 부증불감이라고 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생이면 생이고 멸이면 멸이지, 또 불생이면 불생이고 불멸이면 불멸이지 불생불멸은 무엇인가 하고 따지고 든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 해 놓으면 어찌할 것은가. 그 사람은 그 옳다고 배운 한 쪽에 집착하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옳다고 느끼며 상대는 틀리다고 몰아붙일 것이다. 나는 옳고 상대는 틀리다고 느끼기 때문에, 상대와 다툴 일이 생기고 싸울 일이 생겨난다. 이에 따라 나 또한 괴롭다. 어느 한 쪽에 고집함은 결국 고통을 부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애써 둘을 서로 나누어 놓고 그 중 하나만을 고집하고 집착하려고 애쓰는가.
왜 불자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빠져 불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가. 불교만이 진리고 불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틀에 빠지면 타종교 신자와 싸울 수 밖에 없고 그로인해 나는 고통당할 수 밖에 없다. 다행히도 부처님의 이런 열린 가르침이 불법을 수행하는 이들에게는 당연스레 받아들여지다 보니 불법으로인해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어떤 종교는 그 종교만이 진리라는데 치우치다보니 얼마나 많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 종교만이 진리라고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곧 옳고 그른 것을 가져오고 그러한 시비는 다툼과 전쟁을 불러오며, 그로인해 우리는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종교전쟁으로 아파했으며 고통당해야 했는가. 인류의 전쟁 가운데 상당한 부분이 종교로 인한 전쟁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내 것만이 옳고,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참된 종교도 참된 진리도 될 수 없다. 참된 진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것은 전쟁을 부르고, 살상을 부를 뿐이다. 이제 올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올바로 볼 정견의 지혜의 안목이 있어야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온전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 아닌가.
불교는 그런 종교이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종교. 어디에도 고집하지 않는 종교.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종교이다. 진리에도, 법에도, 부처에도,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갈 수 있고, 그 어떤 종교와도 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며, 그 어떤 진리의 모습들도 다 감싸안고 받아들일 수 있다. 혹 외도들과도 마땅히 대자비심이 바탕이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것은 불교 그 자체에도 고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불법의 위대함이다. 불법의 치우침 없는 진리성을 대변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말하고 있다. ‘여래가 얻은 진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걸림 없는 대자유의 설법인가. 도무지 이런 말은 진리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우리는 그동안 금강경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동안의 분별, 시비하는 습관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에 기울고 말 것이다. ‘역시 금강경의 가르침은 참된 것이구나’ ‘이 진리야말로 실다운 것이구나’ 하고 감동하거나, 혹 또다른 사람은 ‘도무지 금강경은 알 수가 없구나’ ‘실다운 것이 아닌 헛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것이다. 혹은 일체 모든 상도 상이 아니라 하고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니 ‘불법은 다 허망한 것이구나’ ‘불법이란 다 헛된 것이구나’ 하고 생각을 일으킬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두 가지 차별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실답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으며, 동시에 헛되다고 생각하는 그 치우친 생각에서도 벗어나라고 말하고 있다. 금강경의 가르침, 불법을 실답다고 생각하면 그 외의 다른 것은 실답지 않다고 여길 것이다. 불법이 실답다는 그 견해에 머물고 말 것이다. 그러한 견해는 곧 옳다는 편견을 불러오고, 그것은 집착을, 또한 그 가르침에 대한 집착은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헛되다는 치우친 생각 또한 그르다는 편견을 불러옴으로써 그릇되다는 집착과 편견으로 인해 다툼과 고통을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두 가지 모두 치우친 견해일 뿐이고, 고통을 불러오게 될 뿐이다.
또한 선악(善惡)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통 선악을 나누어 놓고 선은 좋은 것이니까 취해도 좋고 악은 나쁜 것이니까 마땅히 버려야 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본질에서 본다면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선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고 악에 치우치더라도 고통받게 된다는 그 끝은 변함이 없다. 선에도 머물지 말고 악에도 머물지 않을 수 있어야 선악을 초월해 대 자유의 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실답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 것이며, 헛되다는 데 머무르지도 말라고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을 통해 끊임없이 보살의 보시에 대한 상을 놓아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승의 보살은 거의 깨달음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이제 보살에게는 그 어떤 번뇌도 그 어떤 괴로움도 거의 다 사라졌다. 업(業)이 거의 다 소멸되었다. 그렇기에 보살은 업에 의해 태어나지 않고 원(願)에 의해 태어난다. 업생이 아닌 원생이다. 깨달음에 들기를 잠시 뒤로 미루고 일체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하화중생의 원이 모든 보살을 보살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 보다는 중생을 교화하여 열반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아니 거의 깨달음의 입구까지 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필요가 없다. 언제든지 열반에 들 수 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일체 중생을 교화해야 한다는 대비중생의 원력만이 보살을 지금 이 중생계에 묶어 두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보살에게는 오직 하나의 서원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겠다’ ‘일체중생에게 보시하겠다’는 한 가지 서원 밖에 없다. 그러나 서원 또한 일종의 욕심이다. 그러나 그 욕심은 중생들의 욕심처럼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닌 일체 중생을 향한 이타의 승화된 욕심이다. 승화된 욕심이지만 여전히 중생계에 남는 이유가 되는 욕심이다. 여전히 부처는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언제든지 다시금 중생계로 떨어질 수 있다. 자칫 잘못하면 다시금 시비 분별의 세계에 물들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을 염려하고 있는 것이다. 자칫 보살들의 이타적인 서원이 이기적인 욕심으로 바뀌지 않을까를 염려하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 전체에 걸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설법하고 있다. 어떤 법에도 머물러 보시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중생을 구제하고 중생을 위해 보시하면서도 내가 보시한다는 상을 일으키지 말라는 당부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이 부처님의 자비심이다. 한 두번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닌 부모님께서 어린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타이르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여 이야기 하듯 부처님께서도 보살에게 똑같은 법을 계속해서 설하고 있다.
만약 보살이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두운 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이 일순간 어두워질 것이다. 밝은 깨달음의 마음이 소멸하고 곧장 어두운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으로 떨어질 것이다. 보살이 일체 중생을 위해 교화하고 보시하지만 자칫 보시한다는 한 생각에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보살은 곧장 어두워질 것이다. 곧장 무명, 치심(癡心)에 물들게 될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염려하고 계신다.
그러나 만약 보살의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햇빛이 비침에 밝은 눈으로 가지가지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그 밝음은 유지될 것이다. 그 광명은 한없이 중생계에 빛을 놓을 것이다.
수보리야, 다음 세상에서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보나니,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다음 세상에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능히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다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며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다. 부처님은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진리 그 자체, 진리의 당체인 법신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법을 향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는 법으로써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된다. 우리 마음 안의 진리를 다 알고 다 보시게 될 것이다.
또한 그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운 사람은 스스로 공덕을 성취한다는 상에 머물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만약 이 경을 받아 지녀 읽고 외우더라도 스스로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공덕을 바라는 마음으로 경전을 읽고 외운다면 그 사람에게는 공덕이 없다.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그 많은 절을 짓고 불전에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어떤 공덕도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스스로 절을 짓고 보시했다는 상에 얽매이고 머물러 있는 한 그것은 어떤 공덕도 없다. 그러나 일체 모든 공덕을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일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릴 때 일체 모든 것이 다 잡힌다.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릴 때 깨달음은 오며, 갖고자 하는 일체 모든 소유욕을 포기할 때 일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 ‘나’라는 울타리를 완전히 비우고 놓아버릴 때, 완전한 나, 전체의 나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여법수지분은 이 경의 이름과 이 경을 어떻게 여법하게 수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부처님의 답변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의 이름을 밝혀주셨지만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을 언급하시면서, 이 세상의 가장 작은 미진에서부터 이 세상에 이르기까지 또한 나아가 부처님의 거룩한 상호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은 다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음을 설함으로써 다시한번 금강경의 무집착의 가르침을 설하고 있다. 이렇듯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가르침은 일체의 모든 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 어떤 티끌도, 세상도, 부처도, 경전의 이름도 거기에 얽매여 집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일체 상의 완전한 타파의 자리에 깨달음은 드러남 없이 드러난다. 여기에 이 경의 위대함이 있다. 그래서 세세생생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하는 것 보다 이 가르침 하나만을 받아 지녀 설하는 것이 더욱 큰 공덕이 됨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아 지니면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마땅히 이 이름대로 받아지니라.
지금까지 들어 온 이러한 가르침을 듣고 수보리는 한없는 감동과 환희에 휩싸였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찌 이러한 말 없는 위대한 말을 듣고 수보리와 같은 깊은 제자가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은 참으로 위대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이렇게 표현했을 때 그 표현은 위대하지 못하다. 그 표현으로써 위대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이 담고 있는 그 깨우침의 깊이는 말이 가져다 주는 의미를 초월하여 위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수보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으면 좋을지 묻고 있다. 일체의 모양을 타파하고, 상을 버리도록 이끄는 이러한 가르침, 일체의 그 어떤 이름에도 집착함이 없도록 일깨워주는 이러한 가르침에 도리어 또 다른 이름을 짓는다는 것이 얼핏 생각했을 때는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름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이름을 깨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이름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그 모순 속에는 무한한 ‘방편’과 ‘자비’가 녹아있다.
앞서도 누누이 언급하고 있지만 말이란 그 자체가 모순이다. 부처님 말씀도 논리적으로 따지려 들거나, 말 그 자체를 가지고 옳고 그른 진위를 가리려고 한다면 한마디 말도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모순이고 잘못일 수 있다. 그렇듯 말이란 온전하지 못하다. 그렇다면 말을 하지 말 것인가? 아무런 언어도 사용하지 말고 오직 침묵하기만 할 것인가. 그렇다. 그렇게 하면 된다. 그러나 그 방법은 이미 단 한 순간도 끊어지지 않고 항상 사용되어져 오고 있다. 본연의 침묵의 가르침은 항상 법계에 가득하다. 다만 그 침묵의 소리 없는 소리를 우리가 듣지 못할 뿐, 침묵의 법문이 사라진 적은 없다. 그러한 침묵의 말 없는 가르침은 항상하고 있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듣지 못한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침묵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지 말을 들을 수 있고,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혹자는 그러한 침묵의 가르침이면 되었지 왜 애써 어리석은 이들을 일깨우고자 하는가 하고 묻는다. 그것은 바로 ‘자비’ 때문이다. 지혜의 본질은 자비에 있다. 아니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니다. 지혜가 충만하면 자비 또한 똑같이 충만하다. 그러니 자비를 베풀지 않을 수 없다. 깨달음을 얻은 이는 당연하게 자비를 실천하게 된다. 고통 받는 어리석은 중생들을 일깨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결론은 나왔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이들을 위해 법을 설하는 자비를 베풀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이라는, ‘언어’라는 방편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수보리는 질문을 하고 있다. 부처님께 ‘자비’와 ‘방편’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마땅히 자비와 방편으로써 답을 하고 계신다. 이름을 타파하고 깨뜨려야 한다는 이 가르침에 금강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계신다. 이러한 부처님의 모순은 자비에서 나온 것이다. 그 수단으로, 그 방편으로 사용된 것이 우리들 중생들이 좋아하고 이해하기 쉬워하는 ‘말’이고 ‘언어’인 것이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자비와 방편으로 이름 붙여 준 이 경전의 제목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다. 즉, 금강과도 같은 반야바라밀을 설한 경이란 의미다. 금강과도 같이 견고하여 깨어지지 않는 ‘반야바라밀’을 설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이렇게 방편과 자비로 반야바라밀 이라고 이름을 붙여 주셨지만 어리석은 많은 중생들은 또 다시 ‘반야바라밀’이라는 경의 이름에 집착하고 얽매일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이라고 말씀해 주시고는 그것이 방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해 주고 계신다. 다시말해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이름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며 다만 그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다. 산스크리트 원문에는 ‘반야바라밀이라고 여래가 설한 것 그것은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여래는 다시 설한다. 그래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이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다.
반야바라밀이라는 이름에 속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그 말 속에, 반야바라밀경이라는 그 경전 속에만 어떤 특정한 진리가 담겨 있다고 생각지 말라. 몸으로는 나쁜 짓을 하면서 입으로 반야바라밀이라고 외운다고 해서 나쁜 업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어리석은 것이다. 반야바라밀을 신격화하지 말라. 반야바라밀이라는 이 단어에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고 신비로운 힘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지혜롭지 못한, 반야바라밀 답지 못한 이해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이 이름에도 얽매이거나 집착하면 안 된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많은 금강경 수행자들이 특히 눈여겨 볼 말씀이 아닐 수 없다. 금강경을 독송하는 이들은 다만 금강경 독송을 마음을 쉬기 위한 방편으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금강경이라는 이 경전 자체에, 이 글귀 자체에 그 어떤 신비로운 힘이나, 수행력 같은 것이 담겨 있기 때문에 금강경 독송만 하면 그 어떤 특별한 경지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 다면 이는 금강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금강경이기 때문에 금강경을 독송하고 공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금강경을 공부하고 독송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를 담고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금강경’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이 말은 흡사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리의 가르침이기 때문이지 그것이 불교이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는 말과 같다. 불교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고, 금강경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금강경은 그 어떤 진리라도, 부처라도, 고정되게 집착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로써의 기능을 잃고 만다는 완전한 무집착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옛 스님들께서는 염불을 하든, 다라니를 하든, 어떤 경전을 독송하든, 아니면 하늘천 따지를 하든, 가나다라마바사를 하든 마음만 집중하고 비우며 그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셨다. 중요한 것은 방편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준엄한 말씀이시다. 중요한 것은 금강경 그 자체가 아니라, 금강경을 통해 이를 수 있는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혹 스승들께서 어떤 분은 ‘아미타불 염불’이 최고라고 하시고, 또 어떤 스님은 ‘금강경 독송’이 최고라고 하시고, 또 어떤 분은 ‘간화선’만이 우리를 진리로 이끈다고 하시고, 또 다른 스승은 ‘위빠싸나’가 최고라고 했다면 그것은 모두 자비와 방편으로 행한 말씀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그 한 가지 수행법이 절대적인 것이니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고, 그것에만 집착하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그 한 가지 수행을 하는 사람들에게 퇴전심이나 분별심을 일으키지 말고 자신이 택한 그 수행법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라는 경책인 것이다. 그러니 금강경 그 자체에도, 반야바라밀 그 자체에도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경문의 말씀처럼,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하면서 반야바라밀이 아님을 온전히 알게 될 때, 그 때 비로소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반야바라밀이란 어떤 틀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며, 어떤 이름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혜이고, 일체의 모든 고정된 집착에서 벗어난 지혜이기 때문이다. 반야바라밀은 반야바라밀이 아니기에 진정으로 반야바라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진리를 설한 바가 있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바가 없습니다.”
이렇듯 부처님께서는 가르침을 설하셨고, 그 가르침을 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고 이름지어주셨다. 그러나 그 이름에도 집착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있다. 나아가 여기에서는 ‘진리를 설했다’는 상마저도 버리도록 이끌고 있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설했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벌써 ‘부처님께서 설하신 진리’에 갇히게 되고 만다. 부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설법은 설법이 아니다. 그렇기에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설하셨지만 단 하나의 진리도 설하신 바가 없다. 함이 없이 행한 것이다. 진리를 설하고도 그 설한 진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은 실천해야 할 계율이 있고, 들어야 할 설법이 있지만 깨달은 여래는 행하는 바가 그대로 계율이고, 설하는 말이 그대로 진리가 된다. 여래는 스스로 법을 설한다는 생각이 없다. 그저 함이 없이 행하고 있을 뿐이다. 인연따라 이렇게 설하기도 하고 저렇게 설하기도 한다.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선(善)을 행하도록 이끌기도 하고, 선악을 다 놓도록 이끄시기도 한다. 때로는 공(空)을 설하고, 또 때로는 유(有)를 설할 수도 있다. 아무런 걸림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이렇게도 행하시고, 저렇게도 행하시지만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행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들의 입장에서는 선을 행하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하고, 선악을 다 놓으라는 설법을 하셨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한쪽에서는 선을 애써 행하게 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면서 선악도 다 버려야 한다고 고집을 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어리석은 분별지(分別智)다. 사람들은 그것을 설법이라고 이름 붙인다. 부처님께서 설해주신 법문이고 그것이 경전이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나서 이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저 경전이 더 좋은 경전이네 하고 다툰다. 이 법문이 옳으니 저 법문이 옳으니 하고 분별한다.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불성(佛性)이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한편으로는 그 어떤 종류의 실체도 있을 수 없는 무아(無我)라고 말씀하셨다. 무아와 진아(眞我), ‘나 없음’과 ‘참나’, 얼핏 보기에는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불성에 어떤 모양을 정해 두거나, 실체화 시키거나, 상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불성을 잘못알고 있는 것이다. 그랬을 때 불성은 없다. 그러나 불성이 불성이 아님을 바로 알았을 때 그 때 온전한 불성은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불성이 있다. 그러나 무아이다.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가 없다. ‘나’가 없는데 어찌 불성이 있는가. ‘나’가 없기 때문에 불성, 즉 ‘참나’가 있을 수 있다. ‘참나’를 ‘나’와 같은 어떤 존재로, 어떤 모양으로, 어떤 실체로 인식한다면 그것은 참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참나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 참나는 있다. 불성에 집착하지 않는 이에게 불성은 있다. 즉 불성이 불성이 아닐 수 있을 때 참된 불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불성에 집착하게 되면 더 이상 불성은 없다. 그것은 불성이 아니다. 윤회하는 주체 또한 고정된 실체가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무아이다. 윤회하지만 무아인 것이다. 여기에 무슨 모순이 있는가. 참나와 무아 사이에 그 어떤 모순이 있는가.
이름에 집착하지 않았을 때는 그 어떤 혼란도, 그 어떤 모순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온통 모순 덩어리다. 불교의 역사가 3,000여 년을 이어져 내려오면서 아직까지 논쟁의 불씨가 되는 것이 바로 윤회와 무아의 문제이다. 이 두 가지가 도대체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가. 그것은 말에 얽매이고 있기 때문이다. 윤회는 윤회가 아니기에 윤회이고, 무아는 무아가 아니기에 무아라는 그 깊은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말에 속지 말라. 윤회가 옳은 것인가, 무아가 옳은 것인가 하고 다투지 말라. 어리석은 이에게는 다 틀리지만 충분히 지혜롭다면 그것은 아무런 논쟁거리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어떠한가. 어리석은 사람들에게는 법도 법이 아니지만, 깨달은 이의 입장에서는 법 아닌 것도 그대로 법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 혹은 ‘진리’의 테두리에 가두지 말라. 어떤 말로써든 그 ‘언어’ 속에 가두지 말라. 언어 속에 가두게 되면 끊임없는 논쟁과 다툼만을 만들게 될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설한 바 없다’고 말씀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열반하실 때 까지 끊임없이 법문을 들려주셨지만 단 한 말도 설한 바가 없다. 설했지만 설한 바가 없다.
어리석은 이는 설했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설한 것이 아니다. 그저 물 흐르듯 흘렀을 뿐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초록이 물오르고, 가을에는 단풍이 지며, 겨울이 되어 호젓하게 잎을 떨굴 뿐이다. 계절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고, 대자연은 끊임없이 설법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다. 그것이 말로 표현되어지면 논쟁을 낳는다. 그 무한한 설법 속에서도 설한 법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참된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래 설해 질 진리가 없다. ‘진리’라고 이름 붙일 그 어떤 것도 없다. 그런데 어찌 진리를 설할 수 있단 말인가. 설해질 진리도 없으며, 그 진리가 설 땅도 없다. 이 세상이라는 곳 또한 완전히 텅 빈 공화(空華)일 뿐이다. 이 세상은 텅 빈 한 송이 꽃이다. 또한 그 세상을 이루고 있는 모든 요소들, 세포들, 미진들, 티끌들 또한 모두가 텅 비어 있다.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고, 어떤 말로 설해질 수도 없다. 진리도 없고, 세상도 없으며, 미진도 없다. 그것이 바로 법이고 진리인 것이다. 법도 없고 진리도 없는 것이 법이고 진리이다. 그래서 다음 게송에서는 삼천대천의 세계와 미진 또한 텅 빈 공일 뿐, 그 이름이 세계이고 미진일 뿐, 그 어떤 실체도 없다는 설법이 이어지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미진(微塵)을 많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주 많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 모든 미진을 여래는 미진이 아니라고 말하느니 이것은 이름이 미진일 뿐이다. 여래가 말하는 세계 또한 그것이 세계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이다.
삼천대천세계가 텅 빈 공이고, 그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티끌들, 미진들이 실체가 없는 텅 빈 공일 뿐이다. 다만 그 이름이 미진이고, 그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실체는 없다. 그러니 그 세계의 진리 또한 텅 빈 것이며, 이름이 진리일 뿐인 것이다.
삼천대천세계란 이 우주를 말하는 것이고, 미진이란 그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작은 단위의 티끌을 말하는 것이다. 즉 가장 크고 가장 작은 그 모든 존재계가 다 텅 빈 공일 뿐임을 밝히고 있다. 다만 이름이 미진이고 이름이 세계일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다.
그렇다면 이렇게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가유(假有)에 불과할 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거짓으로 존재한다는 말은 인연 따라 잠시 일어났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났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소멸된다.
이 세상 속의 ‘나’라는 존재 또한 실제 내가 아니다. 나를 나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인 것이다. ‘나’라는 존재 또한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진 가유일 뿐이다. 내 몸뚱이 또한 내가 지은 인연, 즉 업에 의해 이번 생에 잠시 이렇게 인연화합되어 만들어졌을 뿐이다. 이번 생 인연이 다하면 짐승으로 다시 태어날지, 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날 지 누가 알겠는가. 전생에 남자로 태어났다가 이번 생에 여자로 태어나고 다음 생에 짐승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한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콕 찝어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사람 모습으로도 태어났다가, 짐승의 모습으로도 태어나고, 부자의 모습으로도, 가난한 모습으로도, 잘생긴 모습으로도, 못생긴 모습으로도 태어날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인연의 나툼일 뿐, 고정된 실체는 없다.
이번 생에 많이 베풀고 살았다면 부자의 인연을 받아 태어날 것이고, 술을 많이 먹고 지혜의 종자를 끊어버린 사람이라면 다음 생에 어리석은 바보가 되어 태어날 것이며, 입으로 욕이나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은 목소리가 나쁘게 태어나게 될 것 아닌가. 그렇듯 인연따라 이런 모습으로도 저런 모습으로도 나투는 것이지, 어떤 한 과정이 ‘나’의 실체인 것은 아닌 것이다. 물을 한모금 먹으면 물이 나로써 나투게 되고, 땀을 많이 흘리면 땀으로 빠져 나가게 마련이고, 그것은 또다시 수증기로도 강물로도 무엇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일 뿐이다.
이 삼라만상의 삼천대천세계가 모두 그와 같다. 그러니 무엇을 가지고 ‘미진’이라고, ‘세계’라고, ‘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나아가 무엇을 가지고 ‘깨달음’이라고, ‘진리’라고, ‘여래’라고 이름 지을 것인가. 이 모든 것이 다 꿈이고, 신기루일 뿐이다. 하물며 여래의 32상호를 가지고 여래라고 이름지을 수 있겠는가?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32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32상이란 곧 상이 아니라 그 이름이 32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의 단위인 미진도, 나도, 모든 것들이 다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일진데, 부처라는 것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32상이란 부처의 거룩한 모습의 특성을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부처의 모습을 가지고 부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부처는 상 없음을 이름한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모양도 이름도 실체도 없다. 그럴진데 어찌 부처에게 32상이란 특별한 상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육신으로써 부처를 볼 수는 없다.
부처를 어떤 특정한 모습이라거나, 특정한 성격이라거나, 특별한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고자 하지 말라. 사람들은 보통 부처님은 이럴 것이다, 큰스님은 이럴 것이다라고 하는 자신만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큰스님의 성격은 자비로울 것이고, 한없이 어린아이처럼 맑을 것이며, 성품은 온화하여 말도 없을 것이고, 큰스님 하면 떠오르는 모습은 늘 가부좌하면서 좌선하고 있는 모습일 것이라는 등의 온갖 모양을 규정짓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그런 모양에 있지 않고, 성격에 있지도 않다. 어떤 모양에, 어떤 외모에, 어떤 성격에 부처님을 가두지 말라. 그 어떤 틀에도 가두지 말라. 틀에 갖힌 것은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
부처는 남자일 수도 있고, 여자일 수도 있으며, 사람같을 수도 있고, 짐승같을 수도 있으며, 산일 수도 있고, 바다일 수도 있고, 티끌일 수도 있으며, 하늘일 수도 있다. 그 어떤 가능성도 활짝 열어두라. 어디에도 가두려 하지 말라. 갇힌 것은 부처가 아니다. 깨달음이 아니다.
큰스님들을 보더라도 어떤 분은 한없이 자비로우시지만, 또 어떤 분은 사천왕처럼 엄하고 무섭기도 하지 않은가. 말이 많을 수도 있고, 말이 적을 수도 있으며, 걸음이 빠를 수도 있고, 걸음이 느릴 수도 있다. 어떤 특정한 모습이 수행자의 참모습일 것이라고 스스로의 틀을 만들어 두지 말라. 그렇게 되면 갇히는 건 자기 자신이다. 부처는 중생이 만들어 놓은 틀에 갇히지 않는다. 다만 갇히는 것은 나 자신이다.
그래서 참된 수행자란 누구를 닮고자 하는 이가 아니다. 부처를 닮고자 하거나, 큰스님을 닮고자 하거나 하는 그런 이가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자기답게’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는 자다. 자기 자신답게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고,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야말로 가장 진리답게 사는 길이다. ‘누구처럼’ 살고자 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목표치가 있고, 아직 그렇게 되지 못한 내가 있기 때문에, 그 간격만큼 마음은 괴롭고 무겁게 마련이다.
오직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어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갈 수 있다. ‘다른 사람처럼’ 살고자 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일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한 만족이 있을 때 깨어있을 수 있고 그 깨어있음이란 ‘자기답게’ 사는 방식 속에서 나온다. 그것은 어떻게 정해진 길이 아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저렇게’ 살아야 한다거나 하는 길이 있으면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해야 하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 때 괴로움이 동반된다. 그러나 나답게 사는 것은 아무런 노력을 필요치 않으며 매우 자유롭고 걸림이 없다.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처럼’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 될 수 있다. ‘부처님’처럼 살지 말고 ‘나’ 자신으로써 살아가면 된다.
그러니 어떠한가. 부처님의 외형적인 모습인 32상 80종호를 닮고자 애쓸 일이 무엇인가. 32상 80종호가 부처인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32상으로 모습을 바꾸고자 애쓴 분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 끝에 32상으로 모습을 바꾼 것이 아니다. 부처는 부처라는 상도 없고, 32상이라는 상도 없다. 다만 32상이란 우리들 중생들이 부처를 바라보고 스스로 상을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32상이란 중생들의 시선이지 부처의 시선이 아니다. 부처가 32상을 갖추게 된 것은 그것이 갖춘것이 아니라 그저 아무런 걸림 없이 ‘자기답게’ 산 결과다.
부처님은 그저 자신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애써 32상을 갖추고자 애쓴 적도 없고 또한 특별한 상을 버리려고 애쓴 적도 없다. 그저 아무런 상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롭게 살았을 뿐이다. 부처님은 ‘누구처럼’ 살고자 전혀 애를 쓰지 않는다. 과거 연등부처님이 훌륭하셨으니 그 분처럼 살아야지 하고 생각한다거나, 스스로 부처님처럼 거룩하게 살아야겠다는 등의 생각이 없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써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상을 만들어 놓았고, 불상도 만들어 놓았으며, 32상 80종호도 만들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참된 부처님의 모습은 법신(法身)이라고 하는 것이다. 법신이란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니다. 특정한 모습 없음을 일러 법신이라 부른다. 다시말해 법신이란 진리의 몸이란 뜻으로 특정한 모습이 없는 온 우주법계, 삼라만상의 모든 모습을 부르는 이름이다. 내 모습도 법신이며, 산과 들도, 하늘과 바람도, 짐승이며 하늘사람도 모두가 법신이다. 저마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완전하게 살고 있다면 그것이 모두 법신이다. 그래서 온 우주 법계에 법신 아닌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단 하나, 사람들만이 ‘남들처럼’ 살고자 애쓴다.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써 나툰 법신 부처님을 버리고 다른 사람처럼 살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사람들만이 열등감과 우월감, 잘나고 못난 분별로 인해 괴로운 것이다. 나무가 꽃을 닮지 못했다고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며, 하늘이 땅을 보고 우월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사람들만이 어리석은 분별심으로 비교, 판단에서 오는 괴로움을 감당하고 산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법신이 되라. 법신 부처님으로 살아야지 왜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 것인가. 누구든 ‘나답게’ 사는 사람은 법신불로 사는 것이다. 법신부처님이 나로써 온전하게 나툴 수 있도록 나의 모든 것을 몽땅 부처님께 맡기고 가라. 완전하게 내맡기고, 완전하게 바치며, 완전히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법신부처님의 향기가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와 같은 목숨을 바쳐 보시했다 할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의 사구게 하나만이라도 받아 지녀 남을 위해 설해 준다면 그 복이 더 많으니라.”
일체는 텅 비어 있다. 세계도, 미진도, 나도, 부처도 다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가 나타나고 사라짐도 다만 인연에 따를 뿐이고, 미진도 나도 부처도 모두가 인연의 가합에 의해 이루어지고 사라질 뿐이다. 그 어떤 것도 다만 이름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사실을 이름하여 진리라고 하고, 그러한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라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지, 그것이 괴롭다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슬프고 괴로운 마음은 어리석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다. 봄이 와 꽃이 피다가 꽃이 지고 여름이 온다고 해서 봄은 죽고 여름이 살아났다고 할 것인가? 봄이 죽어서 괴롭고 여름이 태어나서 즐겁다고 할 것인가?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면서 강물은 죽고 바다는 살았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강물이 바다로 윤회했다고 할 것인가? 그런 것들은 다 이름일 뿐이고 모양일 뿐이다. 어떻게 이름지어도 좋지만, 어떻게 이름 짓더라도 옳다고 할 수도 그르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렇다’라고 고정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머무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항하의 모래수와 같이 많은 수의 목숨을 나고 죽고 반복하면서 목숨으로써 보시했다고 한다면 그 복덕은 어떠한가. 내 소유의 물질로써 보시하더라도 그 복덕은 많을 것인데, 하물며 내 목숨을 바쳐 보시하였다면 그 복덕은 무량할 것이다. 앞서 말했던 칠보로써 보시하는 복덕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목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은 벌써 나고 죽는다는 분별 속에서의 보시이다. 내 삶을 바침으로써 보시한다는 것 그것은 생사법에 빠져 있는 보시이다. 그것은 참된 무위의 함이 없는 보시가 되지 못한다. 본래 생사가 둘이 아니라면 생을 사로 바꿈으로써 보시할 것이 무엇인가.
차라리 생사가 본래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것이야말로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 세상도 없고, 미진도 없으며, 나도 없고, 부처도 없다면, 열반도 없고, 생사도 없다. 바로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가장 온전한 보시이다. 본래 보시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참된 무주상보시가 된다. 그 사실을 깨닫는 지혜야말로 복덕과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와 복덕은 하나다. 지혜가 복덕이고 복덕이 지혜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게송이 바로 이 금강경의 사구게이다. 그러한 지혜로 우리를 안내하는 게송이 바로 금강경의 가르침이다. 왜 애써 항하의 모래수와 같은 수의 목숨을 바쳐 보시해야 하는가. 그 공덕은 유위의 공덕이 될 뿐이다. 그러나 생사가 본래 없으며, 보시할 것도, 보시할 사람도, 보시 받을 사람도 본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무량한 복덕이 될 수 있다.
생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이해하고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수도 없이 많은 생을 윤회하였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나이만 많이 먹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시간을 많이 흘려보냈다는 사실이 그대로 나를 보다 더 깊이 깨닫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수도 없이 윤회하며 생사를 반복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은 커녕 업만 자꾸 쌓아왔다면 그 사람은 수도 없이 많은 억겁의 세월을 허비하며 지낸 것이다. 그 사람에게 깨달음의 빛은 날로 줄어갈 것이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단 한 가르침이라도 올바로 믿고 받아지녀 남을 위해 연설해 준다면 그 공덕이 더욱 수승하다. 수도 없이 많은 생을 목숨 바쳐 보시하고, 수많은 물질로써 보시하고, 칠보로써 쌓아 보시한들 그것은 단 한 가르침을 올바로 수지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유위의 복은 쌓는 공부지만, 무위의 공부는 놓아가는 공부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선이라도, 아무리 많은 복이라도 쌓는 것 보다는 놓아버리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선을 쌓고자 애쓰지 말라. 복을 짓고자 애쓰지 말라. 아무리 선을 행하고 복을 지어 봐야 유위의 복이고, 유위의 업일 뿐이기에 그것은 결국 채우는 공부 밖에 되지 못한다. 아무리 선이라 할지라도 채우는 것은 근본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놓아버리는 것이다. 본래 공한 줄 알고, 본래 실체가 없는 줄 알며, 본래 그 어떤 상도 상이 아닌 줄 알아 다 놓아버릴 수 있어야 한다. 놓는 공부는 복덕이라는 유위를 뛰어넘는 무량복덕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의 일상무상분에서는 깨달음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말아야 함을 말하였는데, 이 분 장엄정토분에서는 그러한 가르침을 정토장엄이라는 우리들에게 익숙한 표현을 빌어 다시한번 강조하시면서 정토를 장엄한다는 상을 내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정토를 장엄한다거나, 불교를 수행한다거나, 중생을 구제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을 깨버릴 것을 강조한다. 깨달음에도, 정토에도, 부처에도, 그 어디에도 머무는 마음을 내면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눈귀코혀몸뜻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 그 어디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하며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도록 이끌어 줌으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함이 없이 하는 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을 얻은 바가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연등 부처님 처소에 계실 적에 어떤 법도 얻으신 바가 없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전생에 대한 일화들을 다룬 경전에서는 공통적으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과거 인행(因行)의 시기에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受記)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연등부처님께서 꽃을 공양하는 선혜 비구에게 장차 사 아승지 십만 겁 후에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예언을 내리셨다고 한다. 이러한 수기로 인해 일반적으로 연등부처님께서 과거에 선혜 비구에게 이미 어떠한 특별한 법을 주었으며 그 법을 얻어 결국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셨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러한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기는 불본행집경, 자타카, 육도집경, 본생경 등에 등장하는 것으로써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는 모습을 [불본행집경]을 통해 잠시 살펴보자.
어느 때 선혜라는 젊은 행자가 있었다. 생사의 진흙 수렁 속에서 방황하는 자신과 세상의 모습을 보고 크게 발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큰 행원을 일으켰다.
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중생들이 끝없이 많사오니
내 부처되어 마지막 한 생명까지 기어이 건지리라.
젊은 선혜 행자는 부지런히 노동하고 받은 보수를 아껴서 은전 오백량을 모았다. 이 때 연등부처님께서 이 나라에 오시니, 왕과 백성들이 꽃을 바쳐 공양하려 하였다. 선혜 행자도 이 소식을 듣고 꽃을 구하려 하였으나 구할 수가 없었다. 꽃을 찾아 거리를 헤매다가, 한 궁녀가 푸른 연꽃 일곱 송이를 감추어 가는 것을 보고, 사정 사정하여 은전 오백량을 주고 다섯 송이를 샀다.
이 때 연등부처님께서 거리로 걸어 오시니, 선혜 행자도 시민들과 함께 푸른 연꽃을 들어 바치었다. 마침 그 때, 연등부처님께서 걸어가시다가 진흙탕에 이르셨다. 이 모습을 본 선혜는 입었던 사슴 가죽옷을 벗어 진흙탕에 깔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자 엎드려 머리털을 풀어 길을 만들었다.
이 때에 연등부처님께서 선혜 행자를 향하여 찬탄하셨다.
“아 장하다. 선혜여! 그대의 보리심은 참으로 갸륵하구나. 이같이 지극한 공덕으로 그대는 오는 세상에 결정코 부처가 되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 부르리라.”
이렇듯 연등부처님은 선혜 행자에게 석가모니가 되리라는 수기를 주셨다. 그런데 이 경전에서는 왜 수보리는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금강경은 일체의 모든 방편을 파하고 근본을 드러내는 경전이다. 금강경 앞에는 일체의 그 어떤 방편도 설 자리가 없다.
깨달음을 전해줄 수 있는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참된 깨달음은 전해주거나 전해받는 어떤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고 받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항상 현존하고 있다. 그대 앞에 항상 참된 모습으로 꽃을 피워내고 있다. 아니 그대의 존재 그 자체가 그대로 깨달음의 증거이며 부처의 현현이다. 우린 이미 완성되어 있다. 이미 깨달아 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받을 필요도 없고 얻고자 애쓸 것도 없다. 진리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여여부동하게 오고 감이 없이 늘 그 자리에 있다. 그런데 어찌 두 부처님 사이에 법이 오고 갈 수 있단 말인가.
중생과 부처 사이에 법이 오고갈 수 있는가? 중생과 부처가 따로 나뉠 것이 없다.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오고 갈 법 또한 없다. 그런데 어찌 중생과 부처 사이에, 혹은 부처와 부처 사이에 오고 갈 어떤 법이 있겠는가. 주고 받고 할 어떤 수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 것은 없다.
아무것도 나뉘지 않은 텅 빈 적멸의 세계에서는 그저 부처만 있다. 이름을 부처라고 해서 그렇지 오직 ‘그것’만 있을 뿐이다. 오직 영원의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성성적적의 적멸만이 가득 차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이미 부처이다. 당신은 과거에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는가. 어떤 깨달음을 선물로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 주고 받을 것이 없는데 어찌 이런 물음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처님께 수기를 받지 않았고, 어떤 특별한 법을 받지도 않았는데, 저 선혜라는 비구는 부처님께 이미 수기를 받았구나 하고 부러워 할 것도 없다. 선혜가 수기를 받는 순간 우리 모두는 함께 수기를 받았다. 아니 선혜가 연등부처님께 수기를 받았다는 그 표현 자체가 일체 모든 중생이 수기를 받았다는 방편의 설법일 뿐이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부처라는 방편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무엇이 문제기에 깨달은 완전한 부처가 이렇게 힘겹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왜 우리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중생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과연 어떻게 하면 그 사실을,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가. 어찌 하면 얻을 수 있는가.
간단하다. 진리는 너무나도 단순한 데 있다. 일체를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얻어진다. 그냥 놓아두면 된다. 놓아버리는 순간 영원한 대자유가 찾아온다. 그것은 얻는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본래의 고요를 되찾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깨닫게 되어있다. 깨닫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이미 부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내면 깊은 곳은 항상 깨달음으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나 저절로 깨닫는다. 그냥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가만히 놔두면 저절로 내면 깊은 곳에서 깨어있음의 빛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한다. 생각하고, 애쓰고, 안달하고, 수행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려는 그 모든 ‘나’의 행위들을 다 놓아버려라. 겉에 드러나 있는 거짓의 ‘나’가 행하는 모든 활동들을 멈춰라. 껍데기의 ‘나’를 놓아버려야 본래의 ‘나’가 활동을 시작한다.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애쓰지 말라. 깨달음을 얻고자 안달하지 말라. ‘어떻게’ 해 보려는, 깨달아 보려는 마음을 푹 쉬기만 하면 된다. 푹 쉬었을 때 이 가짜의 ‘나’는 활동을 멈추고 내면의 ‘그것’이 드러난다. ‘그것’을 한마음이라고 해도 좋고, ‘참나’라고 해도 좋으며, ‘부처’라고 해도, ‘자성’이라고 해도, 그 어떤 표현을 써도 좋지만 거기에 머무르지는 말라. 그 표현에 집착하지 말라. 다만 다 놓아버리고 그 어떤 것도 붙잡지 말며, 그저 푹 쉬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꾸만 ‘나’를 가지고 ‘어떻게’ 해 보려고 한다는데 있다. 그냥 있으면, 그냥 푹 쉬면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공연히 붙잡고, 깨닫고자 애쓰며, 부처가 되려고 노력한다. 모든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그냥 놔두지를 않는데서 모든 문제가 생긴다. 모든 괴로움이 생기며, 모든 번뇌가 생기고, 모든 욕심과 집착이 들끓는다.
그냥 놓아두라. 애쓰지 말라. 애쓰려는 마음을 놓으면 그냥 얻어진다. 이미 얻어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래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얻을 것’이 생기면 결코 얻을 수 없다. ‘얻고자 하는 것’이 없을 때 그 때 비로소 얻게 된다. 아니 그냥 ‘얻음’이란 말 자체가 끊어지고 지고한 평화만이 현현한다.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어떤 법을 얻었다고 생각지 말라. 그 때 선혜 비구가 연등부처님께 무언가 얻은 특별한 법이 있었다면 선혜 비구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법도 얻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부처를 이룬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이 불국토를 장엄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것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입니다.”
앞 장에서 수행 사과라는 깨달음의 계위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러한 깨달음 조차 놓아버려야 함을 언급했다. 수행 사과의 깨달음이라는 것도 본래 얻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장에서는 과거 연등부처님에게 수기를 받은 선혜 비구 또한 어떤 특별한 법을 얻은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렇듯 모든 보살들이 얻은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다.
여기에서는 보살의 깨달음의 사회화의 과정인 불국토 장엄에 대한 물음이 이어지고 있다. 깨달은 자는 스스로 깨달았다는 생각이 없다. 하물며 깨달은 자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깨닫지 못한 중생이나 할 수 있는 것이 불국토의 장엄이다. 깨달은 자는 불국토를 장엄하지 않는다.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장엄하고 있다.
불국토는 별도로 장엄할 필요가 없다. 불국토는 더없이 완전하다. 더 이상 손 댈 곳이 없다. 어떤 장엄이 따로 필요한 곳이라면 그곳은 불국토가 아니다. 스스로 완전한 곳 그곳이 불국토요 정토다. 그러므로 보살은 정토를 장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없다. 장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장엄이라는 말 자체가 매우 생소하다. 그런 말이 필요 없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불국토며 정토이기 때문이다.
불국토, 정토는 어떤 곳인가. 부처님의 땅이며, 깨끗한 땅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땅이란 어떤 특정한 장소를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공간이 아니다. 만약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했다면 그곳은 더 이상 정토가 아니다. 정토는 영역이 정해지지 않은 곳이다. 별도로 경계선을 그을 필요가 없다. 정토의 경계를 긋는 순간 이미 정토는 사라지고 만다. 깨달음에는 시공(時空)의 차별이 없다. 하물며 어떤 특정한 공간을 가지고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지역을 정토라고 했다면 그 지역에서 벗어난 곳은 예토(穢土), 즉 더러운 땅이 될 것인데, 그렇게 깨끗하고 더러움을 나누고, 이쪽 저쪽을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깨끗한 쪽을 택하는 그런 상대적인 곳을 가지고 어찌 정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부처는 차별이 없다. 깨달음에는 그 어떤 나뉨도 없고, 극단도 없다.
그러니 정토를 장엄한다는 말은 어리석은 중생들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보살은 정토를 장엄할 이유가 없다. 그들 자체가 그대로 정토이다. 정토를 장엄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온갖 정토를 무한히 장엄하고 있다. 정토의 장엄은 정토의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토의 장엄이다.
불교를 어느 정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알음알이로 지식을 축적하면 할수록 더욱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불교를 많이 공부한 사람들은 주로 자신이 수행을 많이 했고, 경전도 많이 보았으며, 깨달음과도 가깝고, 부처님의 좋은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많이 가르쳐 주며, 포교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즉 그러한 모든 행위가 정토를 일구는 장엄한 깨달음의 길이요, 포교의 길이라고 여긴다. 스스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원을 잘 성취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에 비해 더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복도 더 많이 짓고, 공부도 더 많이 했으니까 지옥에 가는 일은 없을 것이며, 더 빨리 깨달음을 얻어 성불할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깨달음과는 멀다. 오히려 초심자들의 발심보다도 더욱 멀어져 있다. 초발심의 행자들은 하심하며 지극히 겸손하다. 스스로 수행을 많이 했다거나, 불교를 좀 안다거나, 깨달음과 가깝다거나, 포교도 잘 한다거나 하는 일체의 상이 없다. 오직 그런 마음을 비우고 하나에서부터, 낮은 마음에서부터 정진할 뿐이다. 초심자의 하심은 고참자의 그것보다 깨달음에 더욱 가깝다. 지식이 많을수록 깨달음과는 멀어진다. ‘공부했다’는 상에 빠질수록 공부와는 멀어지고 만다.
그래서 수행자의 첫 번째 덕목은 하심이며 겸손이다. 공부를 많이 했다는 말은 공부와 멀어졌다는 말이다. 해도 한 바가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많이 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의 수행은 깨달음과는 정 반대로 치닫고 있다. 포교를 했고, 법보시를 했고, 열심히 기도를 했으며, 온갖 불사를 했고, 정토를 일구는 일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공덕은 사라진다. 그래서 달마는 전국에 온갖 불사를 이루어 놓은 양무제에게 아무런 공덕이 없다고 했다. [전등록]을 잠시 살펴보자.
“짐이 왕위에 오른 이래, 절을 짓고 경전을 편찬하고 스님을 만든 것이 이루 셀 수 없이 많은데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아무 공덕도 없습니다.”
“어찌하여 공덕이 없습니까?”
“이것은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는 유루(有漏)의 원인일 뿐, 마치 그림자가 형상을 따르는 것과 같아서 있는 듯 하나 실체가 없습니다.”
“어떤 것이 진실한 공덕입니까?”
“청정한 지혜는 묘하고 원만하여 본체가 원래 비고 고요하니, 이러한 공덕은 세상의 법으로는 구하지 못합니다.”
“어떤 것이 성스러운 진리의 제일가는 이치입니까?”
“텅 비어 성스러움이란 없습니다.”
공덕은 없다. 인간과 천상의 작은 과보를 받을 뿐. 아무리 복을 짓더라도 그것은 천상에 태어나거나, 조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나거나 하는 그런 작은 과보만을 받을 뿐이다. 물론 사람들에게는 그런 과보처럼 크고 좋게 보이는 것이 없을 테니 큰 공덕이라고 좋아하겠지만 그것은 유루(有漏)의 공덕일 뿐, 무루(無漏)의 공덕에 미칠 수 없다. 아무리 천상에 산들, 아무리 조건 좋은 인간으로 태어난들, 설사 잘 생기고, 돈 많고, 집 좋고, 가문 좋은 곳에 태어난다고 한들 그것이 그대로 ‘행복한 삶’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조건 속에서 괴로움에 허덕이는 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조건을 뛰어넘어 어떠한 조건이나 상황 속에서도 의연하고, 초연하며, 여여하고, 평화로운 깨어있는 정신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 그러한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조건도 실체 없는 그림자요 헛된 환영일 뿐이다. 돈, 명예, 권력, 지위, 계급, 이 모든 것이 다 환영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면 참되고 진실한 공덕은 무엇인가. 청정한 지혜 공덕은 원만하며 고요하고 텅 비어 있다. 비어 있기에 세상의 법으로는 구할 수 없다. 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지위나 계급이 아무리 높더라도, 청정한 지혜 공덕을 살 수도 얻을 수도 없다. 얻으려는 노력이나 애씀을 통해서도 얻을 수 없다. 세상의 그 어떤 법으로도 구할 수 없다.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 빈 것은 따로 얻을 것이 없다. 이미 빈 그대로 충만하다. 빈 것을 또 다시 애써 비울 필요는 없잖은가. 성스러운 진리라는 것도 그와 같다. 성스러운 진리는 맑게 비어 있다고 할 수도, 그렇다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성스러운 진리는 성스러운 진리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이처럼 진리도, 공덕도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진리를 실천하더라도, 공덕을 짓더라도 진리라는, 공덕이라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것은 가짜일 뿐이다. 무엇이든 잘 해 놓고 잘 했다고 상을 내면 잘 한 것이 아니다. 수행을 열심히 해 놓고 열심히 수행했노라고 하면 수행한 것이 아니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었노라고 하면 그 깨달음은 가짜가 된다.
아무리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더라도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상을 일으키고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참된 장엄이 아니다. 모름지기 함이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머무는 바 없이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을 하고서도 수행했다는 바에 머물지 않아야 하며, 베풀고서도 베풀었다는 상을 일으켜 베풂에 마음을 머물지 않아야 한다. 마음이 머물게 되면 썩고 만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되 그 일으킨 마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 마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마땅히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지니라.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
방하착하라. 일체를 다 놓아버리라. 다 놓아버렸을 때 그대로 진리는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이 말을 자기방식대로만 해석을 한다. 다 놓아버려야 하니 아무 일도 할 것이 없고, 아무런 마음도 낼 것이 없으며, 그냥 빈둥 빈둥 놀기만 하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한다. 또 다 놓아버린다면 저 강가의 돌이나 산의 바윗덩이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고 이 가르침을 의심한다.
다 놓아버리라고 하고, 얻을 것도 본래 없다고 하며, 깨닫고자 애쓰지 말고, 정토를 장엄할 것도 없다고 하니까 불교는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냐고 따질지 모른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이런 물음을 한 번 쯤은 던져 보았을 것이다. 이 게송은 바로 그 점에 대한 명확하고도 통쾌한 답변을 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의문은 풀어질 것이다.
아무 마음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마음을 낼 것인가 또한 어떻게 마음을 낼 것인가가 중요하다. 마땅히 청정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청정한 마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형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며,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대상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어떤 바깥의 대상에도 마음이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내라는 것이다. 즉 마음을 내되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다.
마음을 내고 나면 보통 사람들은 거기에 얽매이고 머물러 집착한다. 착한 일을 행하고도 거기에 마음이 머문다. ‘선행을 했다’는 상을 남기게 된다는 말이다. 착한 일을 했다는데 마음이 머물러 상을 남기게 되면 연이어 거기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게 된다. 보상을 기대하는 그 어떤 바람도 우리를 괴롭게 할 뿐이다. 기대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이고, 바람이 있을 때 그것의 성취 유무에 따라 괴로움과 즐거움이라는 두 가지 극단의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착한 일을 행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마땅히 마음을 일으켜 착한 일을 행하되 함이 없이 하라는 말이다. 선행을 하고도 선행을 했다는 상을 버려야 한다. 거기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세상 모든 일이 마찬가지다. 돈을 열심히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하는 마음으로, 돈에 머무르는 마음으로 벌면 안 된다. 그것은 곧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에 대한 집착으로 돈을 벌면 많이 벌었을 때와 못 벌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두 가지 극단으로 치닫는다. 즐거움과 괴로움 속에서 이리저리 휘둘린다. 즐거움에 휘둘리는 것은 좋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즐거움도 일종의 괴로움이다. 즐거움에 크게 휘둘리는 사람일수록 괴로움에 크게 휘둘리게 마련이다. 즐겁거나 괴롭기 보다는 그 양 극단을 다 놓아버린 여여한 평화를 찾아야 한다.
수행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열심히 수행을 하되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수행했다는 상을 내지 말고, 이만큼 수행했으니 곧 결과가 있겠지 하는 바람도 놓아버리고, 수행이라는 그 자체에 머물러 집착하지 말라는 말이다. 수행을 했으니 곧 깨닫겠지, 혹은 이렇게 수행을 했는데도 왜 깨달음은 오지 않을까 하고 탓할 것은 없다. 다만 수행을 할 뿐이지 수행의 결과를 바란다거나, 내가 행한 수행에 대해 바라는 바를 가져선 안 된다. 그것은 집착이며 집착은 괴로움이다. 수행은 오직 지금 이 순간 행하는 것으로써 완성되는 것이지, 그것이 미래의 어떤 깨달음을 위한 준비과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오직 할 뿐, 바람을 놓아라. 수행이라는 말 자체가 머물지 않음을 뜻한다. 그것이 함이 없이 하는 도리이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는 법이다. 금강경의 모든 구절은 바로 이 뜻을 함축하고 있다. 어디에도 머무는 바 없이 행해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주로 어디에 마음이 머물러 있는가. ‘나’라는 주관이 만날 수 있는 일체 모든 객관의 ‘대상’들에 마음이 머물러 있다. 주관은 무엇이고 객관계의 대상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이것을 십이처(十二處)로 설명하고 있다. ‘나’라는 존재는 여섯가지 기관으로 세상과 접촉하고 대화한다. 그 여섯가지란 눈, 귀, 코, 혀, 몸, 뜻을 말한다. 눈으로 모든 형상을 바라보고,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들으며,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보며, 몸으로 감촉하고, 뜻으로 모든 대상들을 분별한다. 이 여섯 가지 말고 또 다른 세상을 접하는 기관이 있는가? 오직 이 여섯 가지가 한다. 바로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을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六根)이라고 한다. 여섯 가지 내 안의 뿌리라는 뜻이다.
주관인 이 여섯 가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각각의 대상을 만나는데 그 대상이 바로 육경(六境)이다. 육근이 만나는 대상이 바로 육경이다. 그것은 각각 형상과 소리,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이다. 눈이라는 근(眼根)으로 형상이라는 경계(色境)를 접촉하며, 귀라는 근(耳根)으로 소리라는 경계(聲境)를 접촉하게 된다.
이렇듯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바로 그 때 일체의 모든 괴로움과 즐거움, 좋고 나쁜 느낌이 일어난다. 그 느낌에 따라 좋은 느낌은 더 많이 느끼기 위해 붙잡아 두려고 집착하고, 싫은 느낌은 느끼지 않기 위해 버리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래서 좋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즐거움을 느끼고, 싫은 느낌을 많이 얻을 때 괴로움을 느낀다. 이렇듯 좋고 싫은 느낌에 따라 모든 집착이 생겨난다. 애욕이 생겨나고 증오가 생겨난다. 좋은 것을 더 갖고 싶은 것도 집착이며, 싫은 것을 버리고자 애쓰는 것도 집착이다.
우리들이 괴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육근과 육경이 접촉하고, 연이어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나며, 그에 따라 온갖 집착이 생기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 집착이 바로 머무름이다. 어떤 경계를 대할 때라도 항상 집착이 생긴다. 눈귀코혀몸뜻이 대상을 만날 때면 항상 이렇듯 집착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즉 형상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고, 소리에 마음이 머물게 마련이며, 냄새와 맛, 감촉과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집착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눈으로 좋은 것을 볼 때 더 보고 싶은 집착이 생겨나고, 칭찬을 받을 때 더 받고 싶은 집착이 일어나며, 좋은 냄새에도, 좋은 맛에도, 좋은 감촉에도 집착이 생겨난다. 이렇듯 모든 대상을 접촉할 때 집착이 생기므로 마음이 머물게 되는 것이다.
모든 수행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여기에 있다. 바로 이 머무는 마음, 집착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머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일으키라. 일체 모든 대상을 만나고, 대상과 접촉하면서도 어떤 대상에도 머물러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집착이 생겨나면 연이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금강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씀으로써 우리에게 안내해 주고 있다. 마땅히 모든 마음을 내되 머무름이 없을 수 있다면 그 어떤 걸림도 있을 수 없는 대자유를 만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느끼고 있는 일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바로 집착과 머무름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네 생각은 어떠한가? 그 몸을 크다고 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육근이 그 대상인 육경을 만나 접촉함으로써 좋고 싫은 느낌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좋고 싫다는 느낌의 분별에서 온갖 집착이 생겨난다. 육근이 육경을 접촉할 때 그 사이에서 온갖 시비 분별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이 대상을 받아들일 때 그 대상 자체는 과연 분별할 것이 있는 것일까?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뜻의 대상이 과연 좋고 싫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하는 차별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 모양과 색깔이라는 형상에서 옳고 그른 것이 어디 있고 좋고 싫은 것이 어디에 있는가. 온갖 나무와 꽃들이 있지만 어떤 나무와 어떤 꽃은 옳고 다른 것은 그런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이 세상의 일체 모든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대상은 모두 무분별(無分別), 무차별(無差別)이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차별을 일으키는 것일 뿐이지 이 세상에는 본래부터 나뉨이란 없다.
태양과 달과 별, 바다와 시내와 강과 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틀린 것인가. 정치인과 경제인 가운데 누가 옳은가? 서양의 여인과 동양의 여인과 아프리카의 여인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가? 그들은 그저 서로 다를 뿐이지 분별할 수는 없다. 점수를 매겨 줄을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을 나누고 차별하고 점수 매기고 등수를 매기는 따위의 나눔은 오직 인간들만이 한다. 이 대자연 법계의 모든 존재와 생명은 오직 전 존재로써 받아들일 따름이다. 인간들만이 세상을 대상으로 차별하고 분별하며 그렇기에 인간들만이 좋고 나쁘며 옳고 그르다는 등의 어리석은 극단을 설정한다. 그리고 그 극단과 나뉨은 곧 부조화와 평화롭지 않은 상태를 가져온다. 그로인해 인간은 늘 어지럽고 복잡하며 괴롭다.
세상은 다만 변화할 뿐이다. 변화하는 세상에 어리석고 좁은 소견으로 좋다거니 싫다거나 하는 차별을 가하지 말라. 세상은 다만 변화만이 있을 뿐, 좋고 싫은 것은 없다. 봄을 알리는 꽃이나 여름의 우거진 초록이나 가을의 오색 단풍, 또 겨울의 호젓한 눈꽃은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다. 1, 2, 3, 4등 등수를 매길 수는 없다. 어느 계절이 더 좋고 나쁜 것은 없고 다만 변화만 있을 뿐이다. 변화의 과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 변화의 어느 한 과정을 콕 찝어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맞다느니 틀리다느니,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차별하지 말라.
소리와 냄새와 맛 그리고 감촉 따위의 것들은 또 어떠한가. 그것들 또한 인연따라 잠시도 쉼 없이 변화할 뿐이지 차별되어 있지는 않다. 똑같은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듣기 좋은 말도 되었다가 또 어떤 이에게는 듣기 싫은 말도 될 수 있다. 청국장 찌개의 냄새처럼 똑같은 냄새가 어떤 때는 참 좋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구역질이 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육경이란 대상에 대한 일체 그 어떤 분별도 다 우리들의 의식이 만들어 내는 거짓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늘 여여(如如)하다. 다만 변화할 뿐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 본질은 무엇이든 다 부처이며 청정한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이 세상에 무엇을 차별하고 분별하며 나누겠는가. 무엇을 옳다거니 그르다거니 할 것이며, 무엇을 잘났다거니 못났다거니 할 것인가. 무엇을 크다거니 작다거니 분별할 것인가.
본질에 있어서는 옳고 그름도, 잘나고 못남도, 미추도, 장단도, 대소도, 그 어떤 나뉨도 없다. 두 가지로 나누게 되면 거기서부터 질긴 집착과 그로인한 괴로움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분별할 것이 없으면 집착할 것도 없고 따라서 괴로울 것도 없다. 그렇기에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도 분별하거나 차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을 설정해 놓고 그 가운데 하나를 택해 대상을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 양 극단은 세상을 올바로 정견으로 보는 눈이 아니다. 오직 중도(中道)만이 세상을 바로 보게 해 준다.
이 모든 것이 둘이 아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낸다는 말이나,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이나, 분별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 둘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말이 그대로 중도의 가르침이며 연기(緣起)의 가르침이고,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인 삼법인(三法印)의 가르침이다. 육근[육입(六入)]과 육경[명색(名色)]이 접촉[촉(觸)]함으로 느낌[수(受)]이 일어나고 그에 따라 좋고 싫은 애욕과 증오[애(愛)]가 일어나고, 그럼으로써 집착[취(取)]이 일어나고, 그로인해 온갖 업[유(有)]을 짓게 되어 생노병사[생(生), 노사(老死)]의 괴로움이 시작된다는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가르침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이라는,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설법에 이어 수미산만한 사람의 몸을 비유하며 크고 작다는 분별을 비우도록 이끌고 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모든 차별과 분별을 놓아야 한다. 아니 머무는 바가 없으면 차별하는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 어떤 마음도 일어날 것이 없다. 바로 그 때 일체 모든 분별이 타파되며 그랬을 때 비로소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바라보는 정견의 눈이 열린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면 그 몸이 큰 것인가 하는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는 크다고 답변을 드린다. 방금 설법한 것에 의하면 본래 크고 작을 것이 없어야 하는데 수보리는 왜 크다고 했는가. 이것이 바로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법이다. 분별과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아무런 마음도 내지 말아야 할 것인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며, 아무런 마음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저 산의 나무처럼, 저 들의 돌처럼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것인가. 옳다 그르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고, 좋다 싫다는 표현도 하지 말고 살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내야 한다. 그러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이다.
크다는 마음도 내고 작다는 마음도 낼 수 있다. 그러나 크고 작음에 걸려 집착하면 안 된다. 옳고 그른 마음도 낼 수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불교는 산중에 홀로 들어가 아무런 말도 하지 말고, 아무런 분별도 일으키지 말며 은둔해서만 살아야 하는 그런 종교인 것은 아니다. 큰 것은 크다고 마음을 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좋고 싫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어느 한 쪽에 머물러 집착하는 마음을 키우다 보면 집착이 생기게 마련이다.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다시 본문으로 가서, 부처님께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내라고 하셨다. 그래서 수보리에게 비유로써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몸이 수미산만 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형상이 그렇게 크다는 것을 말한다. 수보리에게 부처님은 수미산만큼 큰 사람의 몸이라는 형상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형상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다.
부처님의 물음에 수보리가 사뢰었다. ‘매우 큽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몸은 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몸이다. 큰 몸을 큰 몸이라고 하면 그것은 큰 몸이 아니다. 큰 몸은 큰 몸이 아니며 그랬을 때 큰 몸인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것은 크다고 할 수 없다. 다만 크고 작다고 방편으로써 말하고 있을 뿐 크다는데 머물고 작다는데 머물기 위해 크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매우 크다고 답변을 드렸지만 그 이유는 큰 몸이라는데 머물러 있지 않았기에 그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큰 몸이라는데 집착을 하여 작은 몸에 상대되는 ‘큰 몸’으로써 ‘매우 크다’고 했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부처님의 의도를 정확히 알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이름하여 큰 몸이라고 하셨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크다고 말씀드린 것이다. 형상에 머물러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 아니라 형상에 머무는 바 없이 크다고 답변을 드린 것이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 대답하고 있는 것이다. 이야말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답변이다.
차별을 넘어선 ‘법의 몸’, 법신(法身)은 어떤가. 그것은 크다 작다로는 표현될 수 없다. 수미산만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큰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다. 법신의 몸은 한 티끌 속에도 포함될 수 있으며, 온 우주 법계 전체라는 표현으로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법신은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되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법신은 항상 침묵으로 우레와 같은 사자후(獅子吼)를 설함 없이 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다. 말로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마음을 내되 머무름 없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물었고 수보리는 대답했다. 그것은 철저히 머무름 없는 물음이고 머무름 없는 답변이다. 단순히 크다고만 답했다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단순히 크다고만 했다면 그것은 ‘이생기심(마음을 낸 것)’이지만, 그 이유를 설명함으로써 ‘응무소주(머무는 바 없음)’가 설명 되었다. 큰 이유는 몸이라는 것은 몸이 아니기에 큰 몸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큰 몸이라는데 머물지 않고,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아래 산스크리트 원문의 답변을 들어 보면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세존께서 몸, 몸이라 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고 여래께서는 설하셨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그것은 몸이 아니며, 몸 아님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몸이라고 합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합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이시여, 저는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아란나행을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일상무상’의 의미는 아무리 궁극적인 실체의 모양[一相]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모양으로써 취할 수 있는 상이 아니라는[無相] 말이다. ‘일상’이란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 즉 해탈과 열반의 모습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일체의 모든 모양이나 세계는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깨달음’ ‘하나의 해탈’로 귀결된다고 우리는 느낀다. 결국에는 모두가 ‘하나의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상’으로 귀일 될 것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모든 상들을 다 타파하는 이유는 결국에 종극의 깨달음이라는 ‘하나의 상’으로 향하기 위한 수행과정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즉 수없이 나뉘는 우리의 분별상들을 다 통합하여 결국에는 ‘하나의 상’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 수행이라고, 깨달음이라고 느낀다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보통 해탈이다, 열반이다, 부처다라고 하면 어떤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위엄 있고 근엄한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린다거나, 해탈의 세계, 열반의 세계를 떠올리면서 그것은 늘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아름다운 천상일 것이라는 등의 모양을 세우곤 한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곧 모양 없음을 말한다. 일체의 모든 상이 타파된 자리를 해탈, 열반이라고 이름붙이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런데 상이 타파된 그 자리를 가지고 또 다른 모양을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이 분에서는 일상, 즉 궁극의 마지막 하나의 실체까지도 그것이 모양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수행을 하여 깨달음을 얻는 네 가지 단계를 설하면서 그 단계 또한 모양이 아니고, 그 단계의 깨달음 또한 모양으로 얻는 것이 아님을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이 생각하기를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수다원은 이름이 ‘흐름에 든 자’를 말하오나 실은 들어간 바가 없습니다.
수행 사과(四果)란 수행을 통해 증득하여 얻는 깨달음의 결과인 과위(果位)로써 수다원, 다사함, 아나함, 아라한의 네 가지 계위를 말한다. 우선 부처님께서는 그 첫 번째 과위인 수다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깨달은 자가 ‘나는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한다면 그는 깨닫지 못했다. 깨달았다고 할 내가 없는 것이 깨달음이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을 여읜 것이 깨달음이며, 무아(無我)의 증득이 깨달음일진데, ‘나는 깨달았다’고 했다면 그것은 벌써 한참을 어긋난 것이다. 깨달음을 얻을 주체가 없다. 어리석은 중생과 깨달은 성인이 둘이 아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니다. 그러한 툭 터진 텅 빈 깨달음의 자리에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끼어들 틈이 없다.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노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다. 수다원이란 말은 예류(預流), 혹은 입류(入流)라 번역한다. 이는 곳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흐름에 들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류(流)는 깨달음, 성도, 해탈, 열반을 의미한다. 즉 수행을 통해 이제 막 깨달음의 흐름에 든 자를 말한다.
그런데 왜 깨달음을 류(流)라고 하였는가. 흐름에 든다는 표현을 썼는가. 이 표현은 참으로 진리를 설명하기에 흡족한 말이다. 우리는 모두 흐름에 들어야 한다. 흐름에 내 온 존재를 완전히 내맡길 수 있어야 한다. 법계의 흐름, 진리의 흐름을 타고 함께 따라 흐를 수 있어야 한다. 흐름이란 무엇인가. 흐름이란 멈춤이 아니라는 의미다. 이 세상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흐르지 않는 것은 없다. 어디에도 멈추는 것은 있지 않다. 어떻게 멈출 수 있단 말인가. 이 세상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현상도 언제나 흐르며 변화할 뿐, 멈춰서지 않는다. 찰나 찰나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존재의 법칙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도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이다. 항상하지 않고 흐르므로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다.[제법무아(諸法無我)]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 자아가 없는 것은 괴로움이다.[일체개고(一切皆苦)] 이것이 이 세상 모든 존재의 변하지 않는 세 가지 법칙, 삼법인(三法印)이다. 이렇듯 이 세상은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고 찰나로 흐른다. 변화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러니 변화하는 그 흐름에서 벗어나려 할 것도 없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라. 변화를 멈춰 세우려고 하지 말라. 변화의 흐름을 붙잡아 두려 하지 말라.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려는 데서 온다. 흐름을 타지 않는데서 온다. 변화하는 것이 두렵고, 지금 이 모습이 그대로 지속되길 바란다. 이 몸이 지속되길 바라고, 이 행복의 느낌이 지속되길 바라며, 내 돈과 명예, 권력, 가족, 친구... 이 모든 것이 지속되길 바란다. 그것들이 변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변화하는 것 말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면서, 안주할 것을 찾게 된다. 지속됨과 안주 속에 행복이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없다.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영원히 안주하여 머물 곳은 없다. 오직 변화라는 흐름만이 있을 뿐.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며, 감정도 변하고, 사랑도 미움도 변한다. 사상이나 견해도 변하고, 욕구나 욕심도 변한다. 명예나 권력, 지위도 변한다. 업(業) 또한 끊임없이 변화할 뿐이다. 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름다운 법계 본연의 모습이다. 그것을 받아들이라. 함께 변화하라. 그 흐름에 들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수행은 오직 이것 밖에 없다.
모든 것을 변하는 대로 그저 있는 그대로 놔두라. 어떻게 하려고 애쓰지 말라. 어떻게 바꿔보려고 다투지 말라. 그냥 변화라는 진리를 변하도록 그대로 놓아두기만 하면 된다. 그 흐름에 내 전 존재를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르라. 변하지 않는 것은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에서 우리들 삶의 목적이 ‘변치 않음’의 추구에 있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집착하지 말라. 머물러 있지 말라. 그저 흐르도록 놓아두라. 이 세상을 그냥 놓아두면 저절로 알아서 흐른다. 그리고 그 흐름은 정확하다. 정확히 있어야 할 일이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곳에서 흐르고 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법계(法界)라고 하는 것이다. 명확한 진리, 법에 의해 흐르는 세계라는 뜻이다. 변화에 의해 온전하게 흐르고 있다. 그 흐름을 거부하지 말라. 그대로 놓아두라. 어떤 것을 애써 잡으려 하지 말라. 깨달음도 잡지 말라. 잡을 것이 없는 것, 고정된 것이 없는 것, 모양이 없는 것, 안주할 것 없는 것, 항상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한다. 그런데 왜 도리어 그것을 잡지 못해 안달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이것이다. 부처님의 수행은 오직 이것이다. 그냥 놓아두라. 어떤 것도 붙잡지 말라. 변하는 대로 그냥 두라. 다만 그 흐름에 들라.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변화를 거부해왔다. 변화를 거부하며 안주와 지속을 바랬다. 흐름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수행이란 아주 단순하며 명쾌하다. 다만 흐름에 들면 된다. 지금까지의 온갖 집착과 안주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벗어나면 흐름에 들게 된다. 이렇게 흐름에 든 자가 바로 수행 사과의 첫 번째 과위인 수다원이다.
수다원은 흐름에 든 자다. 그러나 수다원은 제 스스로 흐름에 들었다는 생각이 없다. 흐름에 든다는 것은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다. 대단한 무언가를 얻은 것이 아니다. 누구나 아무 일 없이, 그저 편안하게 푹 쉬면 그대로가 수다원이고 흐름에 든 자다. 그 어떤 얻음이나 수행의 결과가 아니다. 다만 어리석은 이들은 애써 붙잡으려 하고, 집착하려 하기 때문에 스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을 뿐이다. 붙잡아 둘 수 없고, 멈출 수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의 것으로 붙잡아두려는 어리석음을 일으키고 그로인해 모든 문제는 시작된 것이다. 그러니 수다원에 드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가, 어리석게 붙잡는 중생의 길을 택하는 것이 더 힘겨운 일인가. 중생은 스스로 붙잡고 붙잡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애를 쓰며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괴로워한다. 공연히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스스로 만든 괴로움에 스스로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그냥 일시에 다 놓아버리기만 하면 즉시로 흐름에 들게 되는데 그것을 놓지 못한다. 수다원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 중생들이 어리석은 것이고 이상한 것이다. 그러니 결국, 첫 번째 수행의 과위인 수다원은 그동안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모든 집착과 욕망을 놓아버리고 자연스럽게 흐름에 드는 계위인 것이다.
이처럼 수다원은 전혀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니다. 그냥 평범한 것이다. 그러나 그 평범함 속에 비범함이 있다. 지극한 평범함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길이다. 그러니 흐름에 든 수다원이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길 것이 없다. 스스로 ‘내가 수다원과에 들었노라’고 선언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러한 선언은 스스로를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은 ‘흐름에 든 자’를 말하지만 실은 들어간 바가 없다. 들어가고 나가고 할 일이 없다. 그냥 쉬기만 했을 뿐. 그냥 온전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다른 어떤 일을 하지 않고 그 흐름을 타기만 했을 뿐이다. 그것은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런 노력이 필요 없다. 수행은 그런 것이다. 깨닫기 위한 노력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이란 그저 쉬는 것일 뿐이다. 그저 푹 쉬었을 때 완전한 법계의 흐름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처럼 수행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할 일 없는 쉬운 것이다. 다만 쉬기만 하면 되니 그처럼 쉬운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요즘 사람들에게, 중생들에게 수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동안 애써 쌓아왔고, 집착해 왔고, 붙잡아 왔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라고 하니 힘들어 하는 것일 뿐이다. 본래 우리는 아무것도 붙잡지 않았고, 쌓아 두지 않았기에 괴로울 것도 없었고, 다시금 놓을 것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붙잡고, 집착하고, 욕망하기 시작하면서 ‘나’ ‘내 것’이라는 관념을 쌓아왔다. 그러니 아주 단순하게 내 스스로 붙잡아 둔 집착의 덩어리들을 다시금 내려 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저 돌려 놓기만 하면 그대로 진리의 흐름을 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수다원인 것이다.
그는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합니다.”
수다원은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흐를 뿐, 잠시도 멈추는 일이 없다. 그 어떤 대상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그 어떤 대상에도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않는다. 항상 새롭게 흐를 뿐이다. 날마다 새로우며, 매 순간 순간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다.
하물며 형상에 머물 것인가. 모양에 머물 것인가. 수다원은 형상에 들지 않는다. 소리나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 그 어디에도 들지 않는다. 그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흐름에 들지만 들지 않는다. 인연 따라 형상으로도 나타나고, 소리와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도 항상 인연 따라 응한다. 응하여 나툰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항상하지 않고 흐른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인연 따라 나툰 형상을 취하기도 하지만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부처는 마땅히 화신으로 이 중생계에 내려오기도 한다. 그것이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눈귀코혀몸뜻을 가지고 색성향미촉법이라는 대상과 접촉하며 살아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거기에 물들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 그것이 항상하지 않으며 실체가 없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흐름에 든 자이지만 흐름에 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주체와 대상은 무엇인가. 주체는 안이비설신의 육근이다. 즉 눈귀코혀몸뜻이라는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다. 그 대상은 각각 색성향미촉법이라는 육경이다. 즉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이 그것이다. 여섯 가지 몸의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세상의 대상을 만난다. 그러면서 그 둘의 접촉에서 좋고 싫고 그저그런 느낌이 일어나고, 그 느낌은 연이어 애욕과 집착을 불러온다. 그것은 곧 괴로움이다. 집착하여 머무는 것은 모든 괴로움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모든 괴로움을 없애려면 마땅히 그 괴로움의 뿌리를 없애야 한다. 집착을 없애야 한다. 그러나 집착을 없애라고 해도 잘 없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집착의 원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집착의 원인은 무엇인가. 앞서 말했던 육근과 육경의 접촉이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눈귀코혀몸뜻이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을 만나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육근과 육경이란 어떠한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다. 눈귀코혀몸뜻도 이 세상을 살아가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또 전생과 후생에 있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상속한다. 그 대상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흐름 속에 있다. 육근도 육경도 항상하지 않고 흐른다. 그렇기에 붙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 집착해서는 안 된다. 다만 변화의 흐름에 들 수 있어야 한다. 들으면서 들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눈으로 형상을 보더라도 좋고 나쁜 느낌이 실체가 아닌 줄 알아, 좋은 것을 가지려고 집착하지도 말고, 싫은 것을 버리려고 애쓰지도 말라. 귀로 무슨 말을 들었더라도 그것이 실체가 아닌 줄 알아 칭찬에도 쉬 들뜨지 말고, 비난에도 가라앉을 것이 없다. 칭찬이나 비난이나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말라.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감촉을 느끼거나, 뜻으로 마음의 대상을 헤아릴 때에도 그것이 주체건 대상이건 모두가 고정된 실체 없이 항상 변화하는 흐름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다만 그 흐름에 들 일이지 멈추어 두려고 하지 말라. 붙잡아 두려고 하지 말라.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 그렇게 되면 괴로움이 시작된다. 윤회가 시작된다. 이상에서 말한 것이 십이연기에서 말한 생노병사의 원인에 대한 대략의 줄거리다. 즉, 명색(육경) - 육입(육근) - 촉(육근과 육경의 접촉) - 수(좋고 싫은 느낌) - 애(애욕, 갈애) - 취(집착) - 유(업, 삼계) - 생(태어남) - 노사(늙음과 죽음 등의 괴로움) 라는 12연기의 지분인 것이다. 이러한 지분의 원인으로 인해 생과 노사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육근이 육경을 촉하면서 그 육경에 대해 좋고 싫은 느낌과 애욕과 집착이 연이어 일어나기 때문에 육근이 육경을 만날 때 그 육경이란 대상에 끄달리지 않고 머물지 않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 된다. 쉽게 말해 눈이 대상을 볼 때 대상에 집착하지 말고,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소리에 집착하지 말며 내지 의식이 어떤 법을 생각할 때 거기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수다원은 ‘형상에 들지 않았으며,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에 든 것도 아니기에 수다원이라 이름한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형상과 소리, 냄새, 맛, 감촉, 마음의 대상 등의 육경에 집착하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의미다. 마땅히 색성향미촉법에 응해주면서도 머물러 있지는 않는 것이 수다원이다. 그것이 그 흐름에 들면서도 들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다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사다함은 이름이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가고 온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사다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마찬가지의 질문이 계속된다.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오는 자’를 말한다. ‘한 번 갔다 오는 자’는 무엇을 말하는가. 수다원이 되어 진리의 흐름에 들게 되면 더 이상 업(業)을 짓지 않는다.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미 십이연기의 ‘명색-육입-촉-수-애-취’라는 흐름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업을 끊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여전히 습(習)에 이끌린 미세한 업은 짓게 된다. 업의 수레를 멈추기 위해 힘을 주기 시작했더라도 지금까지 내달려 온 힘을 한순간 멈출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이 때부터는 업의 소멸이 빨라진다. 업이 점차 가벼워진다.
그러나 업이 있는 이상 여전히 윤회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버릴 수는 없다. 아직도 윤회의 수레바퀴는 돌고 있다. 물론 그 수레는 조금씩 천천히 돌고 있으며 언젠가는 멈춰 서게 될 것이다. 그러더라도 여전히 윤회를 하겠지만, 윤회의 길이 괴롭지만은 않다. 완전히 흐름에 들어 온 존재를 흐름에 맡기고 함께 따라 흐르기 때문이다.
점차 업은 솜털처럼 가벼워 질 것이다. 이제 계속해서 윤회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가벼워졌다. 그런 자를 사다함, 즉 일왕래라 한다. 즉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된다는 의미다. 한 번만 더 다녀오면 다시는 두 번 다시 윤회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어떠한가. 사다함이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노라’는 생각이 들겠는가. 내가 이제 한 번만 더 갔다 오면 된다는 생각이 일어나겠는가.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면 그는 더 이상 사다함이 아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어리석은 분별이며, 어리석은 의업을 짓는 것이고, 아상인 것이다. ‘나’라른 상을 벌써 깨버렸는데, 어디에 사다함과를 얻을 내가 있단 말인가. 사실 사다함과라는 실체는 없다. 실체가 없는데 어찌 얻을 수 있는가. 딱 정해진 것이 있고 그것을 잡을 수 있으며, 얻을 ‘어떤 것’이 있어야 그것을 얻지 않겠는가. 그러나 얻을 것이 없다.
수다원과도 사다함과도 정해진 어떤 과위가 아니다. 어떤 깨달음의 상태가 아니며, 얻어야할 목적도 아니다. 편의상 이름을 붙여 수다원이라고 했고, 사다함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건 하나의 약속일뿐이지 실체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위치를 수다원이라고 사다함이라고 딱 고정지어 못 박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어떤 상태를, 수행자의 어떤 위치를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는 없다. 수다원은 내가 수다원이란 생각이 없고, 사다함도 내가 사다함이란 생각이 없으며, 나아가 아라한 또한 스스로 아라한이란 생각이 없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나함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나함과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아나함은 이름이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하오나 실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없기에 이름하여 아나함이라 하였을 뿐입니다.”
아나함과도 마찬가지다. 아나함이란 불래라고 하여, ‘돌아오지 않는 자’를 말한다. 더 이상 남아있는 업이 없다. 남은 여습(餘習)까지도 다 불태워버렸다. 더 이상 윤회할 이유가 소멸돼 버렸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한 가지. 사다함이 수행하고 노력해서 결국에 아나함이 된 것은 아니다. 사다함이란 ‘한 번 갔다 오는 자’이며, 아나함은 ‘돌아오지 않는 자’라고 했다. 사다함이 한 번 갔다 오고 나면 이제는 더 이상 다시 오지 않는다. 바로 아나함이 된다. 별다른 뼈를 깎는 수행을 통해 얻어진 결과가 아니란 말이다. 자연스럽게 온다. 깨달음은 이렇듯 자연스럽게 온다. 노력하고 애쓰면서 훈련하는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다원에서 흐름에 들고 나면 그 때부터는 그저 쉬기만 하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다시 중생계로 떨어진다. 깨닫고자 애쓰거나, 그 다음 계위인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까지 오르기 위해 수행하고자 한다면 그 노력이 시작됨과 동시에 다시금 흐름에서 벗어나고 말 것이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할 것 없다. 빨리 깨닫고자 애쓸 것도 없다. 다만 그냥 편안하게, 평화롭게 푹 쉬기만 하면 된다. 흐름에 들고 나면 더 이상 도달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깨닫는다는 관념 자체도 소멸되어 버린다. 다만 그 흐름을 타고 평화롭게 쉴 뿐이다. 완전한 무위(無爲)만이 있다. 함이 없이 행한다.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다만 흐를 뿐이다. 흐른다는 표현도 부적절하다. 어떤 말로도 표현될 수 없다. 그냥 그러하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겠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을 이름하여 아라한이라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라한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하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입니다.
아라한이란 수행 사과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이다. 부처님 또한 경전에서 자신을 ‘대아라한’이라고 표현하셨다. 욕계 색계 무색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해탈을 이룩한 경지로, 아라한을 불생(不生), 즉 다시는 생을 받게 되지 않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처럼 아라한이란 온갖 깨달음의 경지 가운데 가장 수승한 경지를 말한다.
하물며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에게도 있지 않은 생각이 아라한에게 있겠는가. 아라한이라는 생각은 오직 중생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아라한은 아라한을 모른다.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 진리라고 이름 지을 것이 도무지 없는데 애써 진리라는 이름을 내세울 것은 무엇인가. 아라한이란 진리라고 할 것이 없음이다. 그렇다고 아라한은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말도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니다. 아라한은 깨달았는가 깨닫지 못했는가. 이는 참 어려운 물음이다. 깨달았다고 해도 어긋나고 깨닫지 못했다고 해도 어긋난다.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한 것인가. 오직 침묵만이 그것을 증명해 줄 뿐이다.
만일 아라한이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노라’고 한다면 이는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집착함이 되는 것이다. ‘나’는 절대 아라한도를 얻을 수 없다. 아라한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아, 인, 중생, 수자가 사라졌을 때 온다. 오고 감이 없이 온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으나 세존이시여, 저는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습니다.
무쟁삼매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다툼이 없는 삼매를 말한다.
우리 마음 속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고 있다. 끊임없는 다툼, 끊임없는 싸움, 끊임없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다툼이란 무엇인가. 다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둘로 대립되어 있어야 한다. 둘로 대립되면 그 사이에서는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나뉨이 있으면 곧 다툼이 일어난다. 불행한 자는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쓴다. 그러나 행복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이 때 다툼이 일어난다. 행복을 구하지만 행복을 얻지 못하는데서 마음은 괴롭다. 마음 안에서 내적인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다. 돈과 명예와 권력과 사랑을 구하지만 그것은 쉽게 찾아오지 않기에 괴롭다. 소유와 무소유 사이에서, 부와 빈곤 사이에서, 사랑과 미움 사이에서, 일체의 모든 나뉨 속에서 무수한 다툼은 일어나게 마련이다.
수행도 마찬가지다. 생사와 열반, 무명와 깨달음, 중생과 부처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난다.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지만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마음 속에는 끊임없는 다툼이 일어난다. 깨닫고자 애쓰는 바로 그 마음이 다툼이다. 중생과 부처를 나누지 말라. 우리는 깨닫지 못해서, 부처가 되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 아니다. 중생과 부처를 둘로 나누어 놓고 이쪽의 중생이 저쪽의 부처로 가지 못하는 현실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이쪽 저쪽은 없다. 중생과 부처도 없고, 생사와 열반도 없다. 오직 무분별로써, 무차별로써 큰 하나일 뿐이다. 전체로써의 하나일 뿐이다. 나눌 것이 없다. 나누지 않으면 그대로 부처이지만 거기에는 부처라는 생각조차 없다.
어리석게 생각하지 말라. 어리석게 깨닫고자 애쓰지 말라. 깨닫고자 애쓰면 벌써 다툼이 생긴다. 깨닫지 못한 ‘나’와 깨달음을 얻은 이후의 ‘나’ 사이에 간격이 생겨나고, 차별이 생겨난다. 그 때 그 둘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게 된다. 그랬을 때 깨달음은 멀어진다. 깨닫고자 애쓰면 애쓸수록 다툼은 더욱 커져만 간다.
우리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바로 이것이다. ‘중생’이 ‘수행’을 통해 ‘부처’로 나아간다는 착각. 바로 그 어리석은 착각 때문에 깨달음은 멀어진다. 중생이고 수행이고 부처고 이 모든 나뉨과 분별을 다 놓아버렸을 때 깨달음은 향기롭게 피어난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중생과 상반되는 부처가 아니다. 중생이 깨쳐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중생은 없어지고 깨달음을 얻은 부처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직 텅 빌 뿐이다. 부처도 중생도 다 사라지고 오직 텅 빈 충만이 현현할 뿐이다.
이처럼 둘로 나뉨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무수한 다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나눔과 분별은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분별과 다툼은 어디에서 오는가. ‘나’라는 틀에서 온다. ‘나’라는 틀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안’으로 만들어 놓으니,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상대’라는 것이 생기고, ‘밖’이 생겨나는 것이다. ‘나’가 있으니 내가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하는 나뉨이 있다. ‘나’가 있으니 내 소유의 많고 적음, 빈부가 생겨난다. 일체 모든 상대적 분별개념은 모두 ‘나’라는 틀, 즉 아상에서 온다.
아상이 있는 이상 분별 계속된다. 그런데 바로 이 아상에서 아집(我執)이 생겨난다. ‘나’라는 상이 있으니 ‘내 것’이라는 소유와 집착 그리고 욕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욕심이 있는 이상 분별은 계속되며 다툼은 계속된다.
그래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라는 일체 모든 상이 깨지고 나면, 일체의 모든 분별이 타파되고, 일체의 모든 욕심과 집착이 사라지며, 그랬을 때 비로소 ‘다툼이 없는 삼매’ 곧 무쟁삼매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쟁삼매는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다. 번뇌와 삼매를 나누어 놓고 삼매를 얻고자 하면 또다시 어긋난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고 하셨으며, ‘욕심을 여윈 제일의 아라한’이라고 하셨다. 이 말은 다시말해 ‘나’가 사라진 자라는 뜻이고, 무아를 체득한 사람이라는 뜻이며, 이는 또다시 일체 모든 나뉨이 사라지고 욕심이 사라지며 집착과 번뇌가 사라진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나 수보리는 스스로 ‘나는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는 생각이 없다. 앞서도 말했듯이 무쟁삼매는 얻어지는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번뇌와 삼매를 나누어 놓고 삼매를 얻고자 했다면 벌써 무쟁삼매와는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나’라는 것이 사라졌으며, 번뇌와 삼매라는 분별이 사라졌고, ‘사람’이라는 분별도, ‘제일’이라는 분별도 다 끊어졌다. 더 이상 그 어떤 말로도 수보리를 표현할 수는 없다. 오직 묵연한 침묵만이 그를 대변해 줄 뿐이다.
깨달은 자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깨달을 주체가 없다. 깨달은 자가 없는데 어찌 ‘나는 깨달았다’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깨달은 자’는 없고, 오직 ‘깨달음의 행위’만 존재한다고 했다. 즉, 깨달은 자는 매 순간 순간 깨어있는 행위를 할 뿐이지 스스로 ‘나는 깨달은 자다’라는 생각이 없다. 다만 깨어있는 행위가 그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러나 다시금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말이라는 방편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부득이하게 말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말은 온전한 진리를 그대로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깨달은 자가 ‘나는 깨달았다’라고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깨닫지 못했다’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저를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며, 욕심을 버린 아라한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스스로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입니다’라고도 할 수 없으며,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 아닙니다’라고도 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욕심을 여윈 아라한이다’라는 생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며, 그러한 분별과 다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찌 ‘다툼이 없는 삼매’를 얻은 자가, ‘나는 아라한이다’라는 어리석은 분별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분별한다는 것 자체가 벌써 다툼이기 때문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약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세존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아란나행을 한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이르신 것입니다.
만약 수보리가 스스로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고 생각했다면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생각과 분별이 일어났다면 수보리는 더 이상 아라한도를 얻은 자도,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도 아니다. 스스로 ‘나는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아라한도를 얻은 증명이 되는 것이다.
아란나란 무엇인가. 이는 범어 아란야(Aranya)의 음역으로, 무쟁처(無諍處) 혹은 적정처(寂靜處)로써, 다툼이 없고 번잡함이 없어 고요한 곳을 말한다. 수행자들이 수행하기 좋은 곳으로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고요한 숲 같은 곳을 말한다. 그런데 이는 어떤 특정한 장소를 부르기도 하지만, 내면의 아란야를 의미하기도 한다. 즉 마음이 다툼이 없이 고요하여 무쟁삼매를 얻은 그 자리를 무쟁처 혹은 적정처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니 앞에서 언급했듯이 무쟁처란 그 어떤 시비 분별도 없는 있는 그대로의 텅 빈 본 바탕을 말한다. 법신 자성이 그대로 무쟁처요 아란나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수보리가 아란나행을 즐긴다는 것은 다시말해 무쟁삼매에 빠져 본 바탕의 법신과 하나되는 즐거움을 즐긴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무쟁삼매로써 무쟁처에 이르는 것이 그대로 아란나행을 즐기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는 아란나행을 즐긴다’고 말씀하셨다. 앞서 말한 ‘수보리는 무쟁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제일’이라는 말고도 상통하는 말이라 하겠다.
다시말해 이 말은 수보리가 어떤 성스러운 수행을 하고 있다거나, 위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이 아니다. 성스러운 수행이니, 위대한 깨달음이니 이 모두가 다 어리석은 분별이고 망상일 뿐이다. 그저 푹 쉬고 있을 뿐이다. 억지로 번뇌와 무명을 깨뜨려 진리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번뇌와 무명을 깨뜨리려는 것이 바로 다툼이다.
그런 일체의 모든 분별과 나뉨을 다 놓아버리고 푹 쉬고 있는 자리야말로 무쟁삼매의 자리요, 아란나행이다. 이는 그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자리일 뿐이다. 어떤 위대한 수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할 ‘나’도 없고, 할 ‘수행’도 없어진 그저 여여한 자리인 것이다.
그러니 수보리를 위대하다고 생각지 말라. 저런 수보리에 비해 나는 왜 이렇게 초라한가 하고 생각지도 말라. 그 모든 분별을 놓아버려라. 이 세상엔 처음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아무일도 없다. 깨달음을 얻을 ‘나’도 없으며, 내가 해야 할 그 어떤 ‘수행’도 없다. 오직 쉬기만 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아무것도 나눌 게 없다. 무쟁삼매의 자리, 아란나행을 즐기는 일은 그렇듯 푹 쉬기만 하면 되는 자리이다. 아니 그 말도 분별이라면 그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침묵할 일이다.
“수보리야,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무득무설’이란 말 그대로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다는 뜻으로써, 이 분에서는 본래 얻을 것도 없고 설할 것도 없는 무유정법의 이치를 밝혔다. 부처님 가르침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앞 장에서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일체 모든 상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그러나 제자들 가운데는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 말씀이야말로 진리구나’ ‘이러한 법을 깨달으신 부처님처럼 나도 깨달음을 얻어야겠다’ 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런 법은 없으며, 내가 설한 바도 없고, 또한 얻은 바도 없다는 말로써 법은 어디에도 집착됨이 없음을 다시금 일깨우고 계신다.
“수보리야,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가 사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최상의 깨달음’을 의미하는 말로써,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번역한다. 그 뜻은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으로, ‘무상’이란 더 높은 깨달음이 있을 수 없다는 말이고, ‘정’이란 객관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치우침 없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며, ‘등’은 어느 한쪽에만 타당한 가르침이 아닌 일체 모든 존재에게 두루하는 보편적인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이야말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신 분이시며, 부처님께서는 항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설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당연한 물음을 던지신다. 일반적으로 생각한다면 수보리의 답변은 ‘예 그러하옵니다.’ 가 되어야 하겠지만 수보리는 부처님 질문의 의도를 바로 깨닫고 있다.
수보리의 답변처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것 또한 언어적인 표현일 뿐이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고정된 법이 없다.
왜 그러한가. 부처님은 새로운 가르침을 펼치신 분이 아니다. 부처님께서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진리 그대로일 뿐이다. 진리는 항상 온 우주 법계를 골고루 비추며 항상 참빛을 수놓고 있다. 진리는 없어진 적도 없고 다시 만들어 진 적도 없으며, 아니 진리라고 이름 붙일만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인간들이 텅 빈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할 뿐이다. 스스로 삐뚫어진 생각과 분별로 괴로움을 만들어 놓고 그 틀 속에 스스로 갇혀 있을 뿐이다. 괴로움도 스스로 만든 것일 뿐, 본래 괴로움이란 없다. 인간의 욕심과 집착 온갖 번뇌며 분별들이 우리를 얽어매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여래의 눈으로 본다면 그 또한 역시 진리의 모습으로 온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다만 여래는 전도된 망상을 깨라고 하시고, 어리석은 욕심과 집착을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실 뿐이다. 그것을 어찌 진리라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며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릴 적부터 그 바윗덩이를 늘 짊어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또 남들도 그렇게 짊어지고 살기 때문에 그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그렇지만 너무 무겁다. 이렇게 큰 바위를 들고 살아가기가 너무 힘에 겹다. 그래서 괴롭다고 야단이다. 어느날 바위를 이렇게 붙잡고 살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 한 사람이 이 사람에게 놓아버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었고, 놓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었으며, 남들도 다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 보니 놓을 수 없다고 고집한다. 안 놓으려고 꼭 붙잡고 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놓아버리고도 아무런 일 없이, 아니 오히려 가볍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 그 사람의 말을 듣고 과감하게 스스로 놓아버렸다. 놓고 나면 큰 일이 날 줄 알았는데 놓고 나니 비로소 자유롭고 무거운 삶의 짐을 덜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괴로움은 없다. 그렇다면 놓으라고 한 그 말이 진리인가? 스스로 깨닫고 놓은 사람은 깨달은 사람인가? 제 스스로 들고 있으니 다만 놓으라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말만을 했을 뿐이지만 그 사람은 그로인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말을 진리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실체는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고정관념일 뿐이며, 욕심이고 집착일 뿐이다. 부처님은 다만 그것을 놓으라고 말씀하실 뿐이다. 진리는 그 무엇도 붙잡고 있지 않다. 항상 빈 손이며, 텅 비어 있고, 자유롭다. 그런데 다만 우리 인간들이 스스로 붙잡을 것들을 하나 하나 만들어 내었고 거기에 집착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괴로움은 시작되었다.
부처님께서도 처음에는 붙잡고 사셨지만, 비로소 깨달았다. 붙잡고 있는 것만 놓으면 그대로 자유롭고 평화로운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놓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지금 붙잡고 있는 것은 다만 ‘집착’일 뿐이라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내 것’을 늘리려고 집착하고 욕심 부리고, 그래서 스스로 아상과 아집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은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주 간단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 놓아라” “그것이 너가 아니다. 놓아라”
본래 우리는 아무것도 잡지 않고 있었다. 그 때는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고, 무거울 것이 없고, 삶이 힘들 것이 없었다. 다만 진리만이 있었고, 평화만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하나씩 하나씩 잡기 시작했다. 실체인 줄 알고 잡기 시작했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 되었다. 집착하여 붙잡기 이전에는 오직 진리만이 있고, 고요만이 있으며, 일체 모든 존재는 그대로 법신이고 부처였다. 아니 이런 말 조차 필요 없는 텅 빈 허공 그 자체였다. 다만 진리만이 있을 뿐, 다만 하나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나뉘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내 것’이라고 나누기 시작하면서 분별하고, 자신의 것을 가지려는 집착과 소유, 욕심을 일으키면서부터 이 세상은 괴로운 곳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은 온전한 진리만이 있을 뿐이다. 다만 그 괴로움은 그 사람의 문제다. 다만 그 사람이 스스로 착각하여 스스로 만들어 낸 괴로움일 뿐이고, 고정된 상일 뿐이다. 스스로 붙잡아서 괴로운 것이니 스스로 놓아버리면 다시 본래자리로써 여여하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만 그것이다.
“잡아서 괴롭다면 놓아라”
이렇게 평범한 말이다. 이것을 진리라고 할 것인가? 법이라고 할 것인가, 법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이것을 깨달은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은 것이라고 할 것인가? 물론 다 언어의 장난일 뿐이니,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여전히 우리가 만들어 낸 약속이고 비실체적인 것일 뿐이다. 그것 또한 놓았을 때 비로소 완전한 본래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보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만한 정해진 법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며,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 깨달아 있는데 거기에 또다시 깨달음이라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이름을 붙일 것은 무엇인가. 이해를 위해 방편으로 그런 이름을 붙이기로 약속했다면 이해된 뒤에는 그 약속 또한 놓아버려야 한다. 여래가 ‘이것이 진리다’라고 고정된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아직도 멀었다. 그것조차 놓아버렸을 때 여래의 참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계속해서 수보리는 말한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모두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 법을 취한다는 것은 법을 붙잡는다는 말이다. 붙잡아서 괴로운 사람에게 또 다른 것을 붙잡도록 이끎으로써 그 괴로움을 없애줄 것인가. 붙잡아서 괴로운 사람에게는 그저 놓을 수 있도록 ‘놓아라’ ‘그것은 실체가 아니다[空, 無我]’ ‘네가 붙잡고 있을만한 그 어떤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어떤 행복이 있는 것도 아니며, 항상하지 않고[無常], 괴로운 것이다[苦].’라는 방편의 말로써 이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기에 또다시 ‘진리’라는, ‘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공’ ‘삼법인’ ‘사성제’ ‘무아’ ‘무상’ 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법’이라는 상을 또다시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상일 뿐, 그것이 진리인 것은 아니다.
진리는 취할 수 없다. 아니 취함이 있었을 때 이미 그것은 진리로써의 기능을 상실한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달 자체일 수는 없다. 방편은 그 쓰임이 다하면 놓아버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리는 말할 수도 없다. 부처님께서는 오랜 교화 끝에 반열반에 드실 때 “내가 녹야원에서부터 쿠시나가라에 이르기까지 내 생에서 한 마디 설법도 한 적이 없다”고 하셨다. 진리는 ‘이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많은 설법을 하셨지만 그 설법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을 뿐이다. ‘함이 없이 한’ 무위의 설법이었다. 앞서도 말했듯이 부처님은 ‘이것이 진리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집착을 놓으라고 하셨을 뿐이고, 욕심을 버리라고 하셨을 뿐이며, 분별을 없애도록 이끄셨을 뿐이다.
다시말해 삿된 것을 타파해 주셨을 뿐, 새롭게 진리를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삿된 것, 즉 욕심이며 집착, 분별들을 깨뜨리면 스스로 진리는 드러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이념인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삿된 것을 파하면 그대로 바른 것이 드러난다. 그러니 일체 모든 삿된 것,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비롯해 법상까지 다 타파하고 깨뜨릴 지언정 새롭게 ‘진리’라는 상을, ‘법’이라는 상을 내세울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으며,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놓고 살면 평화로운데, 어리석게 잡고 살면서 스스로 괴로워하는 이에게 ‘놓아라’ ‘실체가 아니다’ 이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법이라고 할 것인가, 법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방편에서는 법이라고 할 수도 있고, 법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지만, 진리에서는 법이라고 해도 안되고, 법이 아니라고 해도 안 된다. 그저 그런 것까지를 모두 놓아버려야 할 뿐이다.
그 까닭은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때문입니다.
모든 현인과 성인, 즉 깨달은 자는 일체 모든 행위가 ‘함이 없는 행위’이고, ‘머무르지 않는 행위’이다. 함이 있는 법을 유위법(有爲法)이라 하고 함이 없는 법을 무위법(無爲法)이라고 한다. 깨달은 자는 일체 집착이 없고, 번뇌가 없으며, 그러한 함이 없는 행위는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업을 남기지 않고, 티끌을 남기지 않으며, 그 어떤 행위도 온전하고 순수하다. 그런 행을 무위라고 하고, 흔적을 남기며 업을 남기고 괴로움을 남기는 행위를 유위라고 한다.
쉽게 말해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집착을 하거나, 욕심이 있거나, 했다는 상이 있거나, 아상, 아집이 있다면 그는 유위를 행하는 것이지만, 집착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고, 아상과 아집을 놓아버린 채 그 일을 했다면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차별적인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사실은 무위로써 함이 없이 한 것이다. 보시를 한다고 했을 때, 보시를 하고도 ‘내가 네게 얼마만큼 보시했다’는 상이 남아 있고, 보시한데 대한 집착이 남아 있거나, 아까운 마음 혹은 보시했으니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등이 있다면 그는 유위로써 보시를 한 것이다. 그러나 보시를 하고도 보시했다는 상이 남아 있지 않고, 보시한데 대해 그 어떤 집착이나 보상도 바라지 않으며, 아주 보시했다는 것조차 잊게 된다면 그는 무위로써 보시를 한 것이다. 그렇기에 어리석은 중생은 무슨 일을 해도 ‘내가 했다’ 하는 상이 남고, 집착이 남기 때문에 유위법으로써 행하지만, 일체 모든 현인과 성인은 ‘내가 했다’는 아상이 없고 집착이 없는 무위의 행을 하는 것이다. 해도 했다는 상이 없기에 무위의 행을 ‘함이 없는 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현인과 성인은 오직 무위로써 행동한다.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일체 모든 것을 한다. ‘함이 없이’ 한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다 하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다. 이것이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태어나 깨달음을 얻고 교화를 하다가 열반에 드신 것 또한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어 나투시며 교화하신다. 그렇기에 여래는 태어나도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무위로써 태어나기 때문이다.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차별심을 일으켜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렇듯 차별로써 태어나기는 하지만 그것이 유위로써가 아닌 무위로써 태어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현인과 성인은 무위로써 차별을 두어 태어나기도 하고 늙고 병들고 죽기도 한다. 무위로써 인간들 앞에 나타나고, 무위로써 온갖 중생을 구제하며, 무위로써 살아가지만, 무위이기 때문에 나도 난 것이 아니고, 구제도 구제가 아니며, 삶도 삶이 아니고, 죽음 또한 죽음이 아니다. 즉 삶의 그 모든 과정에서 한 치의 집착도, 한 치의 욕심도, 한 치의 아상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 어떤 흔적도, 결과도, 티끌도, 업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중생들 앞에 일체 모든 것으로 화하여 나타난다. 무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과도 하나가 되어 나툰다. 관세음보살이 33화신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이 세상 삼라만상 그 어떤 곳에서도 법신불을 친견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무위의 행을 하며 무위의 법을 설하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고정된 법이 없다. 고정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에도 수만가지로 응할 수 있는 것이다. 무수한 중생이 있고, 무수한 근기의 중생이 있으며, 또한 그 많은 중생들의 무량한 괴로움이 있지만 여래는 무위의 행과 무위의 법을 설하기 때문에 고정되지 않은 무량한 중생과 무량한 근기와 무량한 괴로움에 자유자재로 나투는 차별법으로 중생앞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진 바가 없이 무위의 행이라야지만 무수한 중생 앞에 차별법으로 나투는 것이 가능하며, 무량한 방편법을 행하고, 무량한 근기에 대기설법으로 응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여래는 무량한 차별법을 행하지만 무위로써 행한다. 함이 없이 행한다.
그렇다면 성현은 왜 차별을 일으켜 중생들 앞에 나타나는 것인가. 그것은 중생구제를 향한 동체대비(同體大悲) 때문이다. 오직 성현은 중생구제를 위해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나툰다. 부처님도 깨닫고 나서 바로 반열반에 들 수 있었지만, 동체대비심 때문에 그대로 인간의 모양으로써 80세까지 교화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반열반에 드심으로써 비로소 온 우주와 하나가 되셨다. 아니 우주 그 자체가 되셨다. 일체 모든 것으로써 늘 나투고 계시는 것이다. 바람으로도, 구름으로도, 태양으로도, 사람으로도, 축생으로도, 사랑하는 모습으로도, 미워하는 사람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능히 나투어 주고 계신다. 능히 나투어서 일체 중생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주변에 있는 일체 모든 모양으로써 나투고 있지만 우리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보지 못하도록 가릴 뿐이다. 공연히 스스로 가리지만 않으면 나도 존재도 그대로가 부처이며, 모든 행위가 그대로 함이 없는 부처의 행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차별 있는 모습 속에서 차별 없는 무위의 부처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차별 있는 몸으로써 차별 없는 법신을 체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행하고 실천할 수 있는 무위의 행은 무엇인가. 현실을 사는 우리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한가. 무위란 앞서 말했듯이 함이 없다는 뜻이다. 함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집착이 없고, 머무름이 없고, 티끌이 없으며, 아상이 소멸된 행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무위란 자연스러운 행이다. 우리의 삶이 자연스럽게 그 흐름을 타게 된다면 아무런 걸림이 없게 된다.
뒤에 금강경 제9분에 사향사과라는 수행의 계위가 나오는데, 그 첫 번째 수행의 계위가 수다원과로 이는 ‘흐름에 든 자’란 의미를 가진다. 수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첫 번째의 깨달음인 수다원이 바로 흐름에 든 자란 뜻은 많은 것을 의미한다.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흐름에 들었다는 것은 곧 이 우주의, 진리의 흐름에 완전히 내맡기고 함께 따라 흐른다는 뜻이다. 그 자연스런 흐름에 자연스럽게 들어 함께 따라 흐를 뿐, 그 자연스런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흐름을 따라 온 존재를 내맡기게 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진리와 하나 되며, 그 어떤 것과도 다투지 않고, 그 어떤 것에도 걸리지 않은 채 진리로써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렇듯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타는 것 그것이 바로 무위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물처럼 사는 삶이다. 물은 자연의 이치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그저 흐름을 따라 흐를 뿐이다. 그렇기에 다툼이 없고, 괴로움이 없으며, 걸림 없이 자유롭다. 우리의 삶도 물이 그 흐름을 타고 자연스레 흐르듯, 우리 삶의 거대한 진리의 흐름에 온 존재를 내맡기고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자연스레 함께 따라 흐를 때, 그 어떤 다툼도, 괴로움도, 걸림도 없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는 삶 보다는 자연스러운 삶의 흐름을 거스르는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조작의 삶에 더 달콤함을 느끼곤 한다. 돈이 없다면 없는 대로 그 수준에 맞춰 만족하며 살면 되는데, 남들과 비교하며 열등감을 느끼고, 부족하다는 관념에 빠져 괴롭게 산다. 어떻게 해서든 남들보다 더 잘 살려고 애쓰고,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쓰고,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자 억지스런 노력을 감행한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쓰는 것들은 모두가 인위적이며 유위적인 것들일 뿐이다.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것들은 자연스런 삶의 흐름을 거스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서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자연스럽게 흐를 것인데, 우리는 붙잡고자 애쓰고, 더 많이 벌고자 애쓰면서, 억지스럽고도 정의롭지 못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바로 그 억지와 인위, 노력과 애씀 속에는 ‘지금 이 자리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암시가 내포되어 있다. 인위적이고 억지스런 애씀을 통해 무언가를 욕구하고 갈구하며 그것을 이루고자 하지만, 그 욕구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음을 알지 못한다. 그렇듯 인위적이고 유위적인 모든 것은 결국 괴로움을 불러 올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다. 무위로써 걸림 없이, 함이 없이 사는 것이다. 무위의 삶은 우리를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만족과 자족으로 이끌며,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인위적인 노력 없이도 지금 이 자리에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요즘 현대 사회에 가장 큰 문제는 단연 환경의 문제요, 생태계 위기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환경 위기의 문제라는 것이 가만히 살펴보면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에서 기인한다. 자연을 야생의 상태 그대로, 자연스러운 자연의 상태 그대로 놓아 두면 아무런 혼란이 없고, 오염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명과 욕망에서 기인한 억지스런 유위의 노력이 대자연의 자연스러운 운행을 막고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자연을 함부로 훼손시키고 파괴시켜 왔다.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자연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유위적인 조작을 가함으로 생겨난 위기다. 요즘 같은 환경 위기의 시대야말로 무위법의 실천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현실 속에서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두는’ 행은 우리들 개개인의 괴로움을 풀어줄 뿐 아니라, 현대 환경의 위기, 지구의 위기를 구해낼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실천 수행의 방법일 수 있다.
얼핏 보면 무위와 차별이라는 두 단어가 전혀 서로 다른 것 같이 느껴지지만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중도의 실천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우리들의 수행에 균형이 생겨날 것이다. 불교를 단순히 허무주의라고 하는 이유는 무위법에만 치우쳐 바라보기 때문이다. 무위라고 하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실천하지도 말고, 행하지도 말고, 그저 바보처럼 멍 하니 살라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의 무위법은 그렇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현실 속에서 사회 생활도 하고, 경제 생활도 하며, 역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삶을 살라는 차별의 가르침이다. 즉, 차별이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일으키는 모든 말과 행동과 마음을 가리킨다. 세상을 살면서 행동하고 말하며 마음을 쓰고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렇듯 차별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인과 성인의 차별은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무위법으로써의 차별인 것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중생이든 현성이든 모두 차별을 일으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아 보인다. 똑같이 밥 먹고, 잠 자고, 일 하고, 삶을 살아 나간다. 그러나 중생은 유위법으로써 차별을 일으키지만, 현성은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 불교의 중도 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차별을 행하지만 그 차별에 집착하지 않는 무위를 행하고, 무위를 행하지만 무위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차별을 다시 행하는 것이다. 뒤에 10분 장엄정토분에 나올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마땅히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것도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무위법으로써 차별을 일으키라. 차별심을 일으켜 돈도 벌고,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 나가라. 그러나 거기에 머물러 집착하지는 말라. 나만 잘 살자고 아상과 아집을 일으켜 거기에 집착하지는 말라. 돈을 벌되 돈에 집착함이 없이 돈을 벌고, 사랑을 하되 사랑에 집착함이 없는 사랑을 하라. 그것이 바로 무위로써 차별을 일으키는 함이 없는 행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정신희유’란 ‘올바른 믿음은 희유하다’는 뜻으로써, 이 분은 앞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모든 가르침에 대해 말세의 중생들이 바른 믿음을 낼 수 있겠는가 하는 수보리의 의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 이같은 말씀이나 글귀를 듣고 참된 믿음을 일으키기나 하겠습니까?”
앞의 제5분에서 부처님께서는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가르침을 설하셨다. 이 세상에 무릇 모양이 있는 바 모든 것은 다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그러한 사실, 즉 상이 상이 아니라는 진실을 바로 보면 곧 여래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사실 이 가르침은 그동안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리며, 코로 냄새 맡아지고, 혀로 맛보아지며, 몸으로 감촉되고, 뜻으로 헤아려 지는 모양 있는 대상들에 얽매여 살아 온 보통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엄청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이 나라는 몸뚱이를 비롯한 온갖 모양에 의지해 살아가며, 더 많은 것들을 소유코자 하고, 더 많은 지식들을 쌓고자 하며 살아왔는데, ‘나’라는 것도 허망한 허상일 뿐이고, 내가 소유코자 하는 물질이며, 배우고자 하는 공부며 가치관까지 일체 모든 상이 다 텅 비어 허망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방식이 더 많은 상을 짓고, 상을 지은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하며, 그것을 향유하고자 하는 등 상에 의지해 살아왔는데, 이제와서 그것이 모두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상을 타파하라고 설법을 하시니 일반적으로 본다면 이것은 너무나도 이 세상과 거꾸로 가는 당황스런 가르침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가르침에 대해서 수보리는 깊은 깨달음을 얻으면서, 깊은 관찰과 사유를 통해 비교적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수보리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은 너무나 어렵고 깊은 깨달음이었기에 수보리는 문득 의심이 드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이야 근기가 수승하고, 부처님께서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시니 어렵더라도 잘 믿고 의지하여 바른 믿음을 일으킬 수 있었지만, 만약에 정법이 쇠퇴할 미래세인 말세의 중생들이 더구나 부처님도 안 계실 때에 이러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 과연 잘 믿고 따르며 실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수보리의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과 중생구제의 대서원이 잘 나타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여기에서 구마라집의 번역에는 등장하지 않는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정법이 쇠퇴한 시기가 되었을 때’라는 번역을 넣었는데,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 역에서는 나타나는 것으로 이 곳에서는 이 문자이 들어가야 문맥이 더욱 자연스럽고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넣어 보았다. 물론 구마라집 번역에도 다음 경문을 보면 미래세의 후 오백세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확고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여래가 멸도한 뒤 후 오백세가 지나더라도 분명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러한 사구게 법문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 잠깐 ‘후 오백세’를 살펴보면, 이는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역을 비롯한 한문본에서도 명백하게 설명되고 있지는 않으나, 금강경오가해에서 규봉스님께서 해석하신 바를 따라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후 2,500년 뒤를 말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한 부처님의 법이 전파된 뒤부터 1주기를 500년씩으로 하여 총 5주기, 즉 2,500년 동안 법의 수레바퀴가 굴러간다고 하는 설이다.
제1기는 해탈견고(解脫堅固)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즉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만큼 정법이 가장 밝게 서 있는 때를 말하며, 제2기는 선정견고(禪定堅固)의 시대로, 1기 때처럼 즉각 깨달음을 얻는 이는 매우 드물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을 열심히 하는 시기다. 제3기는 다문견고(多聞堅固)의 시대로, 부처님께서 남겨주신 말씀인 경전을 읽고 외우며 부지런히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은 많지만 선정을 닦고 참된 수행을 해 나가는 사람은 드물어 부처님의 법력이 많이 감소되는 시기를 말하며, 제4기는 탑사견고(塔寺堅固)의 시대로써, 선정을 닦는 사람은 물론이고 경전을 읽고 외우며 배우려는 사람들조차 줄어드는 시대로 이 때에는 공부나 수행은 없고 오직 사찰과 탑을 세워 복과 공덕을 얻고자 하는 사람만 늘어나는 기복불교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제5기는 말기로써 투쟁견고(鬪爭堅固)의 시대로, 불법이 거의 쇠퇴하여 복을 바라며 절을 짓는 등의 불사까지도 사라지고 오히려 절의 재산을 갖고 싸우고 다투며, 불법을 팔아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투며 분열하는 시기다. 여기에서 말한 후 오백세란 이런 다섯가지 시기 가운데 뒤에 있는 오백세, 즉 제5기 말기를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시대의 3가지 구분법으로, 정법시대는 부처님 멸도 후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잘 수행하여 쉽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던 시기이며, 상법시대는 그 다음의 500년간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수행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어려운 시기이고, 말법시대는 그 이후의 500년 간의 시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은 있으나 수행도 없고 깨달음도 없어 불법이 쇠하는 시기를 말하는데, 이 가운데 말법시대를 후 오백세라고 한다는 설도 있으며, 또 학계에서는 역사적으로 금강경이 나온 시기를 고려했을 때 정법시대가 끝난 뒤의 상법시대가 후 오백세에 가장 적합하다는 설도 있다. 또한 정법, 상법, 말법시대 구분을 이처럼 일괄 500년으로 하지 않고 경전이나 논서 혹은 해석한 스님들에 따라서 500년에서 1,000년까지로 이야기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그다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미다. 다시 말해 후오백세라는 것은 어떤 한 시점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가르침이 쇠퇴하여 사람들이 경전공부도 뒤로하고, 수행도 하지 않으며, 나날이 부패와 분열만이 있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정법을 공부하기가 너무도 어려운 그러한 시대적 상황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수보리의 질문, 이러한 후 오백세가 되면 정법이 쇠퇴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없어지고 분열이 심해지기 때문에 그 때에도 지금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며 실천하여 깨닫는 사람이 있을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으며, 앞의 사구게인 ‘범소유상 게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고 하는 등의 글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이것을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으며, 부처님 말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란 말은,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수행법인 삼학(三學)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계정혜(戒定慧) 삼학은 모든 수행자들이 실천해야 할 수행의 핵심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계를 지키고, 최상의 복인 깨달음을 실천하는 선정을 닦고, 부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깨달아 요달하여 지혜를 이루는 이 세 가지가 삼학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여기에서도 부처님께서는 계를 지키고(戒) 최상의 복을 닦으며(定) 부처님 말씀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김으로써 참된 지혜(慧)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심으로써 후오백세의 말법시대에도 삼학을 닦는 청정한 수행자가 있을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 셋 넷 다섯 부처님께만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 부처님께 수많은 선근을 심어 놓았으므로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왜 그럴까. 왜 부처님께서는 멸도 한 지 후 오백세가 되도록 불법이 멸하지 않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계정혜를 닦으며 정법을 수행하는 자가 있다고 말씀 하셨을까. 그 답변이 바로 이 구절에서 나온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흐르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꾸준히 남아 이 세상을 밝게 비출 것이다. 그 이유는 인연법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우리가 지은 인연은 언제까지고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佛]과 지은 인연, 부처님의 가르침[法]을 수행하면서 지은 인연,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는 수많은 선지식[僧]과 지은 인연은 아무리 수많은 세월이 흐르더라도 계속해서 남아 있을 것이다. 선한 인연의 뿌리, 즉 선근을 심되 과거 전생 또 그 전생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부처님과 그 인연을 심어 놓았기 때문이란 말이다.
수많은 부처님과 불법인연을 맺어 놓았기 때문에 이렇게 지금까지도 불법을 만나 수행할 수 있고 나아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어느 한 생에 선근을 심었다고 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정진하는 마음으로 선근을 심어 나가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부처님과의 인연을 잘 가꾸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한 부처님과 좋은 인연을 맺음으로써 아무리 험한 말법 시대가 오더라도 정법을 잊지 않고 수행해 나가며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처님께 선근을 심어 놓을 수 있겠는가. 물론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세상에 태어나 직접적으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고,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청함으로써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시대라고,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이 시대라고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란 몸으로써 나투신 화신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참된 부처님이란 법신을 의미한다. 법신이란 진리의 몸으로써 이 세상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그 자체로써 진리이고 부처님의 몸이란 말이다. 이러한 법신을 바로 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몸으로 나툰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겉모습으로써의 부처님을 친견했다고 하더라도 내 안의 부처님, 또 일체 삼라만상 속에 깃든 부처님을 바로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부처님을 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부처님은 법신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진리를 가까이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친견할 수 있고, 선근을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은 이 세상 삼라만상 속에서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하고,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을 부처님과 인연 짓듯 해야 한다는 말과 같다. 사실은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체 모든 업연이 선하고 텅 비어 있을 때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인연을 짓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의 사람들과 인연을 짓는 것이지만, 그 업을 짓는 주체인 몸과 말과 뜻이 맑고 텅 비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를 바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이 세상과의 인연이 아닌 이 세상의 근본 당체인 법신과 인연을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을 단순한 모습으로써, 화신으로써만 보면 안 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태어난 수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얼마나 공허하고 실망감이 크겠는가. 이 금강경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부처님과 인연을 짓지 못함을 얼마나 가슴 아파 하겠는가. 지금 금강경에서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화신으로써의 부처님과 많은 인연을 짓고, 선근을 맺어야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출현하지 않은 세상에 사는 수많은 중생들도 부처님의 출현을 기다려야하고 부처님이 출현하셨을 때 놓치지 말고 좋은 인연을 심으라는 그런 말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님과 선근을 맺을 수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이다. 일체 삼라만상을 그대로 부처님으로, 진리로 바로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밝은 눈, 정견의 시야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랬을 때 내 이웃과의 인연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고, 나무 한 그루와도 부처님과의 인연이 되며, 대자연과 일체 모든 존재와의 인연이 그대로 부처님과 맺는 선근 공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부처님과의 선근공덕은 지을 수 있다. 사실 진리를 ‘불교’ 속에 한정짓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며, 불교가 아니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고, 부처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저 불교에서는 진리의 가르침을 이름 지어 ‘법’이라고 하였고, 진리를 깨달은 자를 ‘부처님’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그 부처님을 올바로 따르고 수행하는 이를 ‘승’이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며, 그러한 불법승 삼보를 믿고 수행하는 종교를 ‘불교’라고 이름 지었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 자체에 불교가 있는 것은 아니다. ‘부처님’이라는 그 이름 자체에 부처님이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가 없는 나라에서도 진리는 있으며, 또한 부처도 있고, 참된 깨달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랜 역사 속의 인물들을 살펴보면 ‘깨닫고 보니 그 내용이 불교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 것이다. 일체 모든 진리는 결국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 다만 불가에서는 그것을 편의상 이름지어 ‘불교’라고 한 것 뿐이지, ‘불교’라는데 집착하고 얽매여 그것만이 진리이고 그것만이 우리를 깨닫게 해 준다는 틀에 갇히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한 이야기는 금강경 전면에 계속해서 나타나는 가르침이다.
저 숲 속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며 바람과 구름과 태양 그리고 흐르는 물이 그대로 부처님이다. ‘첩첩 쌓인 푸른 산은 부처님의 도량이요, 맑은 하늘 흰 구름은 부처님의 발자취며, 뭇 생명의 노랫소리 부처님의 설법이고, 대자연의 고요함은 부처님의 마음이니 불심으로 바라보면 온 세상이 불국토요 범부들의 마음에는 불국토가 사바로다’ 하는 말씀은 이 세상 그대로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아름답고도 분명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산하대지현진광(山河大地現眞光)’이라 하여 ‘산하 대지가 그대로 진리의 빛이다, 즉 부처님 생명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수많은 선지식 스님들은 흘러가는 구름에게 설법을 듣고, 계절따라 변해가는 숲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였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다. 대자연은 늘 그렇듯 똑같이 우리 앞에 있지만, 어떤 이에게 그 대자연은 진리의 나툼이며, 부처님 법신의 표현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조화로운 천상의 뜰이 될 수 있는 반면에 어리석은 이에게 대자연은 별다른 감응도 주지 못하고, 그저 약육강식의 치열한 전쟁터처럼 느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리석은 이에게 대자연은 업장만 늘리는 곳이지만, 지혜로운 이에게 대자연은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공덕의 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는 선근 공덕의 장이라는 말이다. 따로 부처님이 출현하신 세계에서만, 혹은 절에 가서만, 스님들을 뵙고 법을 들었을 때만, 경전을 볼 때만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부처님과 인연을 맺고 있음을 확연히 알고 우리의 모든 인연을 부처님과의 인연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내 안에 번뇌를 버리고,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집착을 비우고, 텅 빈 마음으로,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세상과 인연을 지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렇듯 모든 삶 그 자체를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삶으로 산 사람은 이러한 경전의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다. 내 안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 혹은 삶 속에서 진리를 체득한 사람이 문득 경전을 보고 내가 깨달은 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났을 때 그 때의 환희심과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경전의 글귀 하나만을 듣고도 분명 한 생각에 바로 청정한 믿음을 일으킬 것이다.
또한 수많은 생을 부처님과의 인연을 지어왔고, 경전 공부를 하고, 선지식을 찾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번 생에 태어나서도 그 부처님과 지은 마음공부의 공덕과 선근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쉽고 빠르게 이해하고 청정한 믿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수많은 신도님들을 대하다 보면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을 쉽게 알려주려 하여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바로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어떤 신도님들은 한 두번만 경전의 가르침을 말씀해 드려도 바로 이해하며 신심을 내는 분들도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오래도록 부처님과의 선근을 많이 심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의 차이다. 똑같은 설법을 하더라도 곧바로 발심하고 실천 수행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좋은 설법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별다른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바로 선근의 유무에 있다. 선근이 있는 사람은 단 한 번의 설법에, 경전의 단 한 구절에도 발심하여 정진하지만, 선근이 아직 충분하게 맺어지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오래도록 부처님 말씀을 들려주더라도 소 귀에 경 읽기 처럼 아무런 깨달음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렇게 아무리 부처님 말씀을 들어도 잘 모르겠거나, 설법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수행해야겠다는 대신심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꾸준히 법을 듣고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선근 공덕이 인연을 만나 빛을 발하는 순간이 찾아 올 수 있다. 대충 대충 법문을 듣고 공부를 했더라도 그것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소중한 인연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모르더라도 모르는대로 꾸준히 공부하고, 신심이 나지 않더라도 그런대로 꾸준히 닦아 나가는 것이 잘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그것이 우리 안에 깊은 업식에 저장되어 있다가 어느 순간 결정적인 인연을 만나게 되면 한순간 불꽃이 타올라 뜨거운 신심으로 피어날 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수행이나 기도에 힘이 붙지 않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앞서 말했듯이 욕심을 비우고, 집착과 번뇌를 비우고 텅 빈 시선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일이 부처님과 선근을 맺는 시작이며, 도량을 찾아 기도를 하고 스님들을 찾아 법을 들으며 경전을 읽고 좌선을 하는 이 모든 일이 또한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다. 경전 공부를 하면서, 설법을 들으면서도 지금 당장에는 이해하기 어렵고 모르겠더라도 퇴전하는 마음을 일으킬 것이 아니라 ‘이것이 부처님과의 선근을 맺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끊임없이 공부인연을 맺으면 언젠가는 밝게 깨달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끊임없이 선근을 맺어 놓는다면 언젠가는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날이 분명 다가 올 것이다.
다음 경구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선근(善根)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었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구마라집과 현장의 번역에서도 똑같이 선근으로 되어 있다 보니 한글로 해석할 때도 악의 반대 개념인 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이 있다. 즉 과거 수많은 부처님께 착한 인연의 뿌리를 심어 놓았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해도 해석하는데 큰 불편은 없겠지만 조금 더 주의 깊게 생각해 보면 부처님께 착한 법을 심었다는 것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착한 것이고 어떤 것이 악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진리에 있어서는 선악이 서로 나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찌 선근만을 문제 삼고 있는가. 물론 선에 대한 해석을 선악의 차별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지 않고 선악을 초월하는 절대선, 초월선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각묵스님이 번역하신 산스크리트 원전 주해에 보면 선근은 단순한 악의 반대로서의 선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로써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선이란 산스크리트어로 꾸살라인데, 이는 꾸사라는 풀을 자른다는 의미로 이 풀은 억새풀처럼 억세고 날카로워 자를 때 마음을 주의집중하지 않으면 손을 베일 수도 있기 때문에 꾸살라는 의미가 ‘지혜로운 주의’ 혹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 등으로 이해된다는 내용이다.
즉 선근이란 마음을 기울여 주의 집중하는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번역된다면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다는 말은 한량없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또 선지식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여 주의집중하는 정념(正念)의 수행, 관(觀)의 수행 인연을 심었다는 말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수많은 부처님에게 악한 인연이 아닌 선한 인연을 심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수많은 부처님에게 지혜로운 주의 즉 마음을 주의 집중하여 분별없이 관하는 수행의 인연을 심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마음집중’이란 팔정도(八正道)의 정념이며, 근본불교 핵심 수행법을 망라한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의 사념처(四念處)에 해당되는 수행법으로 불교의 핵심 중에도 핵심 수행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함경에서는 ‘지혜로운 마음집중’인 사념처를 닦으면 생노병사에서 벗어나며, 모든 악견을 없애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했다.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정혜쌍수의 혜, 지관겸수의 관 수행이며, 요즘 남방불교에서 잘 알려진 부처님 당시의 수행법인 ‘위빠싸나’가 바로 이 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되었을 때 비로소 이 정신희유분의 가르침이 좀 더 선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과거 수많은 부처님과 마음집중의 수행인연을 지었으니 그 수행의 인연으로 인해 여래가 멸한 뒤 후 오백세에도 능히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이가 있어서 이같은 글귀, 즉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가르침에 능히 신심을 내어 진실하게 여길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부분, 선근, 선법에 대한 해석과 의미는 뒤에 23분 정심행선분에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하고 다음 게송을 보자.
수보리야. 여래는 다 알고 다 보나니, 이 모든 중생들이 이와 같은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여래는 다 알고 다 본다고 하였다. 우리가 부처님과 선근을 얼마나 심고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그렇기 때문에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라는 것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그 어떤 생각과 말과 행동도 부처님께서 보고 계시지 않거나 알고 계시지 않는 것은 없다.
보통 우리들은 사찰을 찾아 기도를 드릴 때에도, 108배를 하면서도, 하나 하나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꼬박 꼬박 다 부처님께 말씀을 드리려 하고, 절을 하는 내내 ‘남편은 진급하게 해 주시고, 자식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 주시고, 우리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해 주시고, 화목하게 해 주시고...’ 그러면서 일일이 수많은 부탁을 드리곤 한다. 그래야지만 부처님께서 이 기도의 의미를 아시고 들어 주실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기도하면서 내내 머릿속으로는 바라는 것들을 되새기느라 바쁘다. 한참을 말씀드렸다가도 조금 있다 보면 또 하나 생각나고, 집에 가다가도 또 하나 생각나고, 한참 후에 ‘아차 그것 하나 말씀 못 드렸구나’ 싶은 것도 생기곤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우리가 말하지 않더라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우리들의 인연과 업도 다 보고 계시며, 우리의 바램도, 우리의 발원도, 우리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미세한 분별심 또한 부처님께서는 다 알고 다 보고 계신다. 왜 그런가. 내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내 안에 자성부처님이 항상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저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별이며 바람들을 그저 텅 빈 마음으로 부처님께 다 공양올리고 바치고 비울 것이지 그것을 애써 다시금 되새기며 부처님께 말씀을 드린다면 번거로운 일이고, 오히려 참된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참된 기도며 수행은 번뇌를 비우고, 분별을 비우며, 바램도 놓아버리고 욕심도 놓아버리는 데서 온다. 부처님은 이미 다 알고 다 보고 계시는데, 애써 그것들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그것을 그냥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부처님께 다 맡기는 것이다. 그렇게 다 맡겨버렸을 때, 내 마음은 맑게 비워지고 텅 비어 참된 울림이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부처님과 진짜 선근을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잔뜩 짊어지고 복잡한 때에는 부처님을 만날 수 없으며, 부처님 또한 우리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다. 그 복잡하고 정신없는 바람과 소망들을 그저 부처님께 다 바치고 공양올린 뒤 내 마음을 평화롭게, 고요하게 텅 비울 수 있다면 그 때 비로소 참된 성취가 있을 것이고, 참된 공덕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글귀는 구체적으로 무엇이겠는가. 바로 앞의 분에서 말했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게송 한 구절을 보고 문득 청정한 믿음을 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한없는 복덕을 짓는 것에 다름이 아니다.
복덕 중에 가장 큰 복덕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을 얻는다거나, 바람을 성취한다거나, 지식을 얻는다거나, 지위나 명예를 얻는다는 것들은 유루복(有漏福)으로 유한한 것들이지만, 청정한 믿음을 일으켜 진리를 깨닫는 일은 무루복(無漏福)으로 한도 끝도 없는 무량한 복인 것이다. 유루복들은 짓는 내가 있고 받는 내가 있다 보니 내가 지은 복 만큼만 받을 수 밖에 없고, 지은 복을 다 받고 나면 복의 텅 비고 말지만, 무루복은 ‘나’라는 아상이 없기 때문에 짓고 받는 주체가 공하게 되고, 그랬을 때 비로소 온 우주법계를 다 먹이고도 남을 만큼의 무량한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한 생각에 온 우주를 다 먹이고 남을 만큼의 복 그 정도는 되어야 수행자의 복이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수보리여, 그들 모두는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를 쌓고 얻게 되리라’ 다시말해 ‘측량할 수 없고 셀 수 없는 공덕의 무더기’라고 하여 무량한 복을 언급하고 계신다.
그래서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는 한 글귀를 보고 깨달음을 얻어 한 생각에 이것이야말로 진리의 말씀이구나 하는 청정한 믿음을 일으킨다면, 한량없는 무량한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나’라는 형상도 형상이 아니며, 무릇 일체 모든 형상이 형상이 아님을 바로 보았기 때문에, 복을 짓고 받는 주체도 사라지고, 그 때 비로소 일체 모든 존재가 바로 내가 되고, 이 세상 삼라만상 그대로가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온전한 하나’가 되었을 때, 무량한 복은 오는 것이다. 아상이 있으면 무루복은 없다. 아상이 없는 텅 빈 깨달음 속에서 무루의 복, 무량대복은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중생들에게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
연이어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낼 것이며, 그러한 중생들이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중생들에게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고, 또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상을 비롯한 일체 모든 상이 다 끊어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앞서 말했듯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란 결국에 ‘아상’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상’이 끊어졌다는 것은 ‘나와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되었다는 말이고, 그말은 다시 복을 짓고 받는 주체가 소멸되었다는 말이며, 그랬을 때 ‘전체의 복’이 곧 ‘나의 복’이 되기 때문에 한량없는 무루의 복이 생겨나는 것이다. 다시말해 이 말은 ‘일체의 모든 상’이 다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상 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으며, 법이라는 상도 없고, 법이 아니라는 상도 없다고 한 이유는, 부처님 가르침인 사구게 글귀, 즉 법을 듣고 한 생각에 청정한 믿음을 내었는데 내가 청정한 믿음을 내어 무량한 복을 얻게 된 원인인 ‘법’에 대해서도 머물러 집착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법으로 인해 청정한 믿음을 내었으니 자칫 법에 집착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법이라는 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법이라는 상이 없다는 말은 자칫 법이 아니라는 상으로 바뀔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또 다른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
그래서 부처님 가르침이 진리라는 상에 머물러 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또한 그것은 엄연히 우리를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청정한 믿음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에 법이 아니라는 상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침이 있으면 진리가 아니다.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쉽게 말한다면, 법이라는 상, 진리라는 상에 집착하여 ‘이것만이 진리다’라는 치우친 생각 때문에 역사 속에서는 큰 갈등과 심지어는 전쟁까지 일어나는 일이 있지 않는가. 많은 종교에서는 그 종교만이 구원해 줄 수 있으며, 그 종교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고 실제 그런 ‘진리에의 집착’ 즉 ‘법이라는 상’ 때문에 얼마나 많은 다른 사람들이 핍박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지금 이 시대에까지도 수많은 갈등이 조장되고 있는가.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진리라는 집착’까지도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만이 진리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일체 모든 집착과 고집은 그것이 진리가 아님을 뜻한다. ‘진리’ 또한 집착하고 머물게 되면 더 이상 진리가 아니게 된다는 말이다.
진리는 어디에도 있다. 불교에도 있고, 기독교에도, 천주교에도, 알라신에게도, 저 아프리카 오지에도, 인디언이나 원주민들에게도, 저 숲 속의 동물 식물에게도 진리는 있다. 지금 이 시대에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 바로 이 말이 아닌가. ‘내 종교만이 진리’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이제 버려야 할 때다. 특히 현재의 한국 교회에서는 이 세계의 그 어느 나라보다도 뿌리 깊은 ‘배타주의’ ‘극단적인 근본주의’ ‘문자주의’에 빠져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경향이 90%이상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반면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30%도 안 되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러한 배타적인 자세를 취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다원주의’로써 모든 종교들을 진리와 구원의 길에 함께 가는 동반자로 생각하고 함께 배우고 협력하는 관계를 가진다고 한다.
내가 잘 아는 한 목사님도 다원주의적인 입장에서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 현재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그러한 입장을 취하면서 성직자 활동을 하기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렵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성직의 길을 포기하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다. [예수는 없다]라는 책에서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고 변선환 박사 같은 분은 유럽이나 미국 신학계에서 공부하면서, 지각있는 서양신학자 사이에 ‘기독교만’이라는 배타주의적 생각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한국에 가서 이른바 ‘종교다원주의’를 선창하다가 신학교 학장직은 물론 목사직까지 박탈당하는 ‘변’을 맞으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며, 자기가 생각하는 진리에, 종교에 집착하는 일인가. 참된 종교요 진리라면 어디에도 갇혀 있지 않아야 한다. 진리라는 종교라는 틀을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진리를 찾고자 한다면 그것은 보편적인 진리가 될 수 없다. 어찌 어떤 특정 종교 안에만 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에서처럼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고, 경전이나 부처나 신 그 자체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을 수 있을 때 툭 트여 자유로운 완전한 해탈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성경을 미진하나마 공부하고 있는데, 성경 속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있고, 법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만 그 성경을 보는 사람의 관점에서 다르게 해석하다 보니 성경만을 문자적으로 있는 그대로 믿게 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문자를 넘어서서 담겨있는 깊은 뜻을 바로 보고 해석할 수만 있다면 그 안에는 분명 진리의 숨결을 담고 있다고 본다. 실제 많은 스님들께서 성경에 대한 아름다운 해석을 해 놓고 있으며, 또한 목사님이나 신부님들도 불경에 대한, 금강경에 대한 깊이 있는 해석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이 정도까지만 해 두고,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마라집 한역의 금강경 번역인데, 현장 역이나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도 없고 상 아님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을 좀더 살펴보자. 산스크리트 원문이나 현장역에서는 상이다 상이 아니다 하는 그런 관념 또한 치우침이기 때문에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상도 없고, 법상도 없으며, 법상이 아님도 없고, 또한 상 그 자체도 없고, 상 아님도 없다고 함으로써 일체 모든 여지를 남겨두지 않고 모조리 불태워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체 모든 집착과 모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다. 그야말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 고요와 텅 빈 적멸이 있을 뿐이다.
무슨 까닭이겠는가. 이 모든 중생들이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을 취하면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만약 마음에 ‘어떤 상’이라도 취하게 되면 이는 곧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한 티끌도 남김이 없어야 하고, 마지막 한 가지의 ‘상’ 또한 다 불살라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법상도 비법상도 상도 비상도, ‘어떤 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취하면 다시금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법의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고,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이 진리의 글귀를 듣고 ‘이것이 진리다’라고 법에 집착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결국에는 아상에 집착하는 것에 다름이 아닌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법상도 또 다른 아상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아상은 일체 모든 상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아상이 완전히 소멸되고 나면 이 세상 그 어떤 상도 함께 완전히 소멸될 것이지만, 만약 그 어떤 미세한 상이라도 생기고 나면 그것은 그대로 아상이 생기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라고 집착을 한다고 했을 때, 집착을 하는 주체가 바로 ‘나’다. 집착이 생겼다 하면 그것은 벌써 내가 사라지지 않은 것이다. ‘나’라는 상에 집착해 있는 것이며, 아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내가 없는 마당에, 나도 일체도 모두 공한 마당에, ‘진리다’라고 붙잡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도 공하고 진리도 함께 공한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법이 아니라는 상’을 취하더라도 그것은 다시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에 집착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법에도 집착하지 말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뜻에서 여래는 항상 말하기를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으니,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법 아닌 것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일체 모든 ‘집착’은 다 떨쳐 버려야 하는 것이다. 진리도 놓아버렸을 때 진리이지 잡고 나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부처님도 놓아버려야 하고, 가르침도, 복도, 지혜도, 선정도, 깨달음도, 일체 모든 것을 놓아버렸을 때 비로소 전체를 다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 이러한 표현까지도 나아가 일체를 다 놓아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부처님께서는 ‘너희 비구들은 나의 법문이 뗏목의 비유와 같음을 알라’고 했던 것이다. 부처님의 법문이 뗏목 같은 것이기에 강을 건넜으면 뗏목은 짊어지고 갈 것이 아니라 버리고 가야 한다는 말이다. 이 비유는 아함경에 나온 비유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부처님께서 강을 건너기 위해 제자들과 함께 기슭에 서 계셨는데 강에서 한 젊은이가 뗏목을 어깨에 이고 올라오려고 하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왜 그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가려고 하냐고 물으셨더니 “이 뗏목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있었으니 이 뗏목은 내게 고마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그 젊은이의 어리석음을 지적하면서 불법을 뗏목에 비유하였다. “강을 건너고 난 뒤에는 뗏목을 버리고 가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내 가르침도 그와 같아서 내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생로병사의 고해바다를 잘 건넜거든 내 가르침도 버려야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앞서 말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 또한 방편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환(幻)이다’라는데 치우친 사람에게는 본래마음의 무한한 능력에 대해 말씀하심으로써 치유해 주셨고, ‘마음이 실체다’라고 치우친 생각을 가진 이에게는 마음의 공한 도리에 대해 말씀해 주심으로써 치유를 해 주고 계신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 따라 응병여약(應病與藥)으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해 주신다. 그러니 어떤 한 가르침을 가지고 그것을 절대화하여 그것만이 진리라고 집착한다면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보편적인 진리를 말씀하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을 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닌 것이다. 진리는 집착하지 않음에 있는데 진리에 집착을 하면 ‘집착하지 않음’의 진리에서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외일 수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렇게 걸림 없고 자유로운 것이 진리의 참 모습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법도 오히려 놓아버려야 하거늘, 법 아님에 있어서 이겠는가’ 법도 놓아버려야 하며, 법 아닌 것들 또한 놓아버려야 비로소 걸림 없는 대자유를 얻을 수 있다.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른
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 해야 한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이 금강경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면, 이 제 4분인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금강경의 실천적인 가르침이 잘 드러나 있는 분이라고 하겠다. ‘묘행무주’라는 이 분의 제목은 모든 수행자들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실천의 행을 일컫는 말이며, 불교 수행의 핵심이 잘 드러나 있고 동시에 수행자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 잘 드러나 있다고 할 수 있다. 묘행무주란 쉽게 말해 ‘머무는 바 없는 미묘한 행’이라는 말인데, 묘행과 무주는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이다. 어떤 행에도 머무는 바가 없어야 묘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묘행에서 ‘묘(妙)’ 자는 불교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로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언어를 뛰어넘어 그 이면의 ‘참 말’을 전하고자 할 때 보통 사용하는 말로써, 묘행이란 부처의 행, 즉 깨달은 이의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의미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행이면 행이지 함이 없는 행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겠지만, 바로 그처럼 언어를 뛰어넘는 ‘묘’한 말씀이기 때문에 묘행이라고 한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묘한 가르침인가. 그러면 묘행은 어떠해야 하는가가 궁금해 질 터인데 그에 대한 답이 바로 ‘무주’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묘행은 ‘머무는 바 없는 행’ 즉, ‘무주’인 것이다. 함이 없이 행하고, 머무는 바 없이 실천하는 행이 바로 부처의 행인 것이다.
머무는 바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는 말이고, 바라는 바가 없다는 말이며, 아무런 분별도 없이 무분별의 행을 한다는 말이며, 나아가 과거나 미래에 걸리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는 행이란 뜻이다. 어떤 행을 하면서도, 그 행동에 이유가 없고, 목적이 없고, 그 행동을 했을 때 이렇게 되겠지 하고 바라지 않으며, 내 이익을 위해 머리 굴려 행동하지 않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에 대한 연상작용에 의해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무주의 행은 즉각적이면서도 전체적이면서 온전한 행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주의 묘행은 온 우주 법계에 그대로 내맡기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흐르는 행인 것이다. 내가 하는 행이 아니라, 법계가 하는 행이고, 부처님이 하는 행인 것이다.
불교에서 ‘마음을 비워라’ ‘놓아라’ 하니까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진다. 다 비우고 놓으라고만 하니 그럼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반문하곤 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일도 하지 말고, 그냥 목석처럼 앉아 있으라는 말이냐고 말이다.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묘행무주에 있다. 즉, 아무 행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묘행을 하라는 말이며, 즉 머무는 바 없는 행을 하라는 말인 것이다. 돈도 벌고,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할 것 다 하면서도 집착함이 없이 머무름이 없이 해야 한다는 말이다. 돈에 집착해서 돈을 벌지 말고, 사랑에 집착해서 사랑을 하지 말고, 일에 집착하여 일의 결과나 성취에 마음을 묶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집착함이 없는 행이고, 머무는 바 없는 행이며, 바로 무주묘행인 것이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경계(법)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
이 4분의 법문은 앞선 수보리의 질문 ‘어떻게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하는데 대한 답변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머무는 바 없이 머물러야 하고, 함이 없는 행인 묘행의 실천 수행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분에서 묘행은 구체적으로 ‘보시’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 갑자기 보시의 법문이 나오게 되니 조금 의문스러운 점이 있을 것이다. 무주의 묘행으로 보시를 이야기 하는 이유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 즉 보살마하살들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바를 설법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앞의 대승정종분에서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해야 한다는 설법을 하셨는데, 이 말은 보살이기 때문에 상구보리는 거의 이루었으므로 하화중생이라는 보살의 대원을 세워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설법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보살의 묘행은 근원에서 무주의 행으로 하나이지만, 방편으로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지혜 증득을 위한 깨달음의 실천 즉 수행이고, 다른 하나가 이타적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이는 모든 보살의 두 가지 큰 서원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복과 지혜가 충만한 분으로 묘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은, 즉 보살이 부처가 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일체중생을 성불의 길로 이끌겠다는 회향의 발원, 보시의 발원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보살에게 있어 유일한 묘행은 ‘보시’인 것이다. 보살이 보살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모든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 즉 법보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묘행이라는 보시를 설하고 계신 것이다.
앞서 대승정종분에서 일체 중생을 모두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서원하라고 말씀을 하셨고, 이 분 묘행무주분에서는 그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점이 바로 머무름이 없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는 점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보살들은 아직 완전히 100% 부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수행의 퇴전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주 드문 일이 될 것이고, 아주 작고 미세한 분별과 번뇌일지 모르지만 그렇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대자대비의 마음으로 보살들이 서원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행여나 퇴전하게 될지 모를 점을 짚어주고 계시는 것이다. 일체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이끈다는 것이 바로 법보시인 것이며, 법보시야 말로 가장 온전한 보시다. 이러한 보살들의 하화중생이란 법보시의 실천에 있어 부처님께서는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신 것이다. 행여나 있을지 모를 ‘내가 보시한다’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 ‘내가 하화중생을 실천한다’라고 하는 작은 상조차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 ‘나’라는 상 없이 보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보시를 하면서, 또 일체 중생을 열반으로 이끌면서 ‘내가 한다’는 아상이 있다면 그것은 무주가 아니며 묘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는 나(施輪)도 없고 받는 상대(受輪)도 없으며, 주는 것(物輪) 또한 다 청정한, 삼륜청정(三輪淸淨)의 보시, 묘행의 보시를 하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상의 타파가 곧 바른 보시의 실천인 것이다. 사상이 타파되지 않고서는 참된 보시가 불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묘행 무주의 의미는 좀 더 깊이 있게 다가올 것이다. 묘행이란 실천의 가르침이며, 무주는 이론의 가르침이고, 묘행이란 보시의 실천행이며, 무주란 지혜의 실천행이고, 묘행이 하화중생의 가르침이면, 무주란 상구보리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주와 묘행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무주일때만이 묘행이 될 수 있고, 묘행이 그대로 무주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거의 깨달음에 이르러 하화중생의 원을 세운 보살마하살들에게만 이 보시의 법문이 중요한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일체 모든 발심한 선남자 선녀인, 즉 우리들 같은 생활 수행자들의 모든 실천 수행 또한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이 되어야 한다. 깨달음을 얻는 것은 상구보리의 측면이고 상구보리가 체득되어 깨달음을 얻고 나면 저절로 하화중생의 발원, 즉 일체 중생을 향한 동체 대비의 마음이 바탕 된 보시행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상구보리가 그대로 하화중생이란 말이다. 즉 깨달음이라는 것이 곧 보시의 실천과 다르지 않다. 지혜가 곧 자비인 것이다. 지혜가 생긴다는 말은 곧 일체 중생을 향한 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이 생긴다는 뜻이다. 반대로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마음, 보시의 마음을 일으키고 실천한다면 그 실천은 곧 지혜의 증장으로,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보시를 하되 진리의 보시를 하고, 중생을 깨달음으로 이끌기 위한 보시를 하며, 또한 보시를 하되 색성향미촉법 어느 곳에도 머무는 바 없이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깨달음의 발심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이처럼 보시와 수행은 둘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부처님께서는 묘행무주의 실천행으로, 마음을 어떻게 머물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하는 답변에 묘행무주의 보시행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이른바 색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할 것이며,
성ㆍ향ㆍ미ㆍ촉ㆍ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
앞에서 보살은 마땅히 경계(境界)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경계라는 말을 구마라집은 법(法)이라고 번역을 했고, 현장스님은 사(事)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는 공히 경계를 의미하는 말로써, 여기 이어지는 경전의 내용에서처럼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의 육경(六境) 혹은 육진(六塵)을 의미하는 것이다. 육경이란 육근(六根)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육근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즉 눈․귀․코․혀․몸․뜻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육근은 우리 몸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며, 육경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의 대상으로, 눈(眼根)으로 보여지는 대상인 모양과 빛깔을 색경(色境)이라 하고, 귀(耳根)로 들리는 대상인 소리를 성경(聲境), 코(鼻根)의 대상인 냄새를 향경(香境), 혀(舌根)의 대상인 맛을 미경(味境), 몸(身根)의 대상인 감촉을 촉경(觸境), 뜻(意根)의 대상인 온갖 생각을 법경(法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외부의 세계와 접촉할 때는 오직 이 여섯가지 주관적 기관이 여섯가지 객관적 세계를 접촉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 공부를 하다 보면 경계라는 말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접촉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경계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이 두 가지가 모두 공한 것으로, 잠시 인연따라 기관이 생겨난 것이며, 또한 인연따라 경계가 생겨나는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눈귀코혀몸뜻은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이다. 우리의 생이 끝나갈 때 우리의 감각기관인 육근 또한 함께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100년도 안 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잠시 이 몸뚱이를 받아 이 세상에 왔다가 몸뚱이 유효기간이 다 되면 곧 법계로 흩어질 뿐, 그 어디에도 고정된 실체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눈은 우리가 죽고 나면 곧 사라질 뿐, 본다는 기능도 사라지고, 눈 그 자체도 사라지는 것이며 귀코혀몸뜻 또한 마찬가지로 공한 것이다. 또한 육근의 대상인 육경 또한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항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고 항상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눈에 보여지는 것이든, 귀로 들려지는 것이든, 코로 냄새 맡아 지는 것이든, 혀로 맛보는 것이든, 몸으로 감촉이 느껴지는 것이든, 뜻으로 헤아려 지는 것이든 언제까지고 영원히 남아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육근도 육경도 모두 제행무상이며, 제법무아이고, 공한 것이며, 다만 인연 가합으로 인해 신기루처럼,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에서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물지 말고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성향미촉법이 항상하고 영원불멸하는 고정된 실체성이 있는 것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육경에 머물러 보시해야 한다고 말하겠지만, 공한 것이며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머무를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색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는 것은, 보시하는 나와 보시받는 대상 그리고 보시하는 물건을 눈으로 분별하면서 보시를 한다는 말인데, 쉽게 말해, 우리 눈으로 보여지는 형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하는 것으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뚱뚱한 사람, 마른 사람, 착하게 보이는 사람, 착하지 않게 보이는 사람, 가난해 보이는 사람, 부자처럼 보이는 사람 등을 분별해서 그 모양에 따라 어떤 사람에게는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보시를 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이에게는 많이 보시하고, 어떤 이에게는 적게 보시를 한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이만큼 보시하면 큰 보상이 따르겠다거나, 이 사람에게는 아무리 보시를 해도 덕 보는 것이 없겠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을 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소리에 머물러 보시를 한다고 하면, 나를 칭찬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 혹은 말이 거친 사람, 말이 싹싹하고 부드러운 사람 등을 분별하여 그에 따라 보시의 유무와 많고 적음을 분별하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중생들은 보여지는데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하며, 들려지는데, 냄새 맡아지는데, 맛보아지는데, 감촉되어지는데, 또한 각종의 생각의 대상에 얽매여 분별을 하고 집착을 한다. 그렇듯 육경에 얽매이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 그래서 이 묘행무주분에서는 빛과 소리 냄새 맛 감촉과 온갖 생각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체가 공한 마음으로, 경계에 따라 분별되어지고, 계산되어지는 마음으로 보시를 할 것이 아니라 텅 빈 마음으로 보시를 실천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은 이와 같이 보시해야 할 것이며,
상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앞에서 말했듯이 육근이든 육경이든 어디에 마음을 머물 것이며, 무엇에 집착을 할 수 있겠는가. 육경이라는 모든 대상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집착할 만한 것, 마음을 머무를 만한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근과 육경을 구분하고, 나와 남을 구분하며 오랜 아상을 키워가기에 여념이 없다. 육근이 있고, 육경이 있으며 육근과 육경이 접촉한다고 생각하는 바로 거기에서 인간의 근본 무지인 아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육근도 공했고, 육경도 공했을 진데 공한 것과 공한 것이 마주하여 접촉한들 무엇이 더 생겨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육근과 육경을 실체화 시켜 놓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집착하게 되니 그때부터 아상이 생겨나고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경계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이겠는가. 상에 머물러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상으로 보시하지 말라는 말인 것이다. 즉 ‘내가 한다’, ‘내가 보시한다’는 생각으로 보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조금 구체적으로 말해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삼륜(三輪)이 청정해야 참된 보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삼륜이란 시륜(施輪)과 수륜(受輪), 물륜(物輪)으로 베푸는 자, 받는 자, 주고 받는 것을 의미한다. 돌고 도는 바퀴인 륜(輪)의 의미는 이 세 가지가 모두 마치 수레바퀴가 돌고 도는 것처럼 고정불변하지 않는 것임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니 이 세 가지가 청정해야 한다는 말은 이 세 가지가 모두 공했음을 잘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보시하는 나도 공했고, 보시를 받는 상대도 공하며, 보시하고 받는 것 또한 모두 공한 것이거늘,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생각이 어디에 가서 붙을 것인가. 주고도 준 것이 없고, 받고도 받은 것이 없으며, 주고 받은 물건 또한 공했을 때 바로 묘행무주가 실천되는 순간인 것이다. 함이 없는 보시행, 머무는 바 없는 보시행 그것이 바로 무주의 묘행인 것이다.
“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마음에 ‘내가 보시했다’고 하는 아상을 전제로 보시를 했다면, 그것은 거래이고, 장사는 될 지언정 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내가 보시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상에 머무는 보시를 하면 ‘난 참 장한 일을 했다’거나, ‘내가 보시했으니 많은 칭찬과 존경을 받겠지’라거나, ‘이만큼 했으니 돌아오는 것이 있겠지’라거나, ‘이렇게 보시를 했으니 상대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없더라도 내 안에 많은 복이 지어지겠지’라거나 하는 등의 수많은 관념과 바라는 마음이 따라 붙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듯 바라는 마음으로 주었다면 그것을 어찌 보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주었으니 받아야 한다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는 순간 그것은 장삿속이나 거래는 될 지언정 참된 베풂은 될 수 없다.
아무런 바라는 바 없이, 아무런 분별 없이 베풀고도 베풀었다는 마음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그 때 비로소 보시는 무주상보시가 되어 보시바라밀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주었으니 받겠지 하는 바라는 마음이 전제되고, 상에 머물러 보시를 하게 된다면 물론 인연법에 따라 준 만큼은 받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복이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주고도 준 바가 없이 함이 없는 보시를 했을 때, 그 보시의 공덕은 도무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이다.
무주상보시의 복덕을 가르켜 무량대복(無量大福)이라고 한다. 다시말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을 무량대복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무량대복이란 말 그대로 복이 도무지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의미다. 복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셀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너무 커서 크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온 우주 법계 전체를 다 소유하고 있는 복을 말한다. 다 소유하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을 말한다. 무소유가 전체를 소유하는 것이란 말처럼 하나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소유하고 있는, 즉 정해져 있지 않고 셀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가 되어버린 무량의 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복이 많아야 돈도 많이 벌고, 사업도 잘 되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에 머무는 보시, 바라는 바가 있는 보시를 많이 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결과인 유루복(有漏福)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보통 우리가 행하는 복이 대부분 유루의 복이다. 유루의 복을 지으니 받는 결과도 유루의 결과만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고, 바라는 바 없는 보시를 행하는 과보는 유루의 복이 아닌 무루(無漏)의 복이 되는 것이다. 무루복이란 앞서 말한 무량대복을 의미한다.
무량대복을 소유하면 가진 것 하나도 없이 온 우주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며, 거지가 되어 들판을 거닐고 있을 때라도 하나도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량대복을 소유하고 있으면 마음 하나 일으켜 그 무엇이라도 다 얻을 수 있게 된다. 도무지 복의 양을 셀 수 없으려면 온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대로 법계가 되고 그대로 부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허공과도 같이 툭 트여 그 무엇이든 다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설법이 아니다.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하고 또 가장 실천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를 행하면 누구든지 이런 무량대복, 무루복이 주어진다. 무량대복을 가진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거지처럼 살더라도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키면 이 법계에서 무엇이든 만들어 준다. 그러니 따로이 저축할 필요도 없고, 미래를 계획할 필요도 없고, 날마다, 아니 매 순간 순간 평화로울 수 있는 것이다. 소유의 관념에 얽매여 내 것을 늘리려고 애쓸 것도 없다. 언제든지 한마음 일으켜 법계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많이 보시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란 생각 때문에 선뜻 보시를 실천하지 못한다. 그러나 상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를 하면 내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온 우주를 소유함 없이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바로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은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는 법문의 참뜻인 것이다.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내 것이고, 나와 다르지 않은 것이니, 따로이 ‘내 것’ ‘네 것’을 나눌 것도 없이 내가 곧 전체이고, 내가 곧 우주이며, 나와 남을 나눌 수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 한마음 참 부처를 이루는 순간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툭 트여 한없이 자유로운 법계에 한 생각 잘못 일으켜 ‘내 것’을 나누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나누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내 것’으로 편입시키려고 할 때, ‘내 것’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때, 즉 아상이 생겨나는 순간 우리 안에 충만하게 존재하던 무량대복은 한순간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날마다 베푸는 삶을 실천할 일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뭐 줄 것 없을까’ 하고 고민할 일이다. 계산하고 따져 가면서 적당히 보시할 것이 아니라 인연따라 필요에 의한 보시라면 아무런 계산도 하지 말고 다 베풀 일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참으로 진실한 법문 한 가지 꼭 가슴에 새겨 실천할 일이다. 베푼다고 절대 가난해 지지도 않고, 많이 베푼다고 절대 못 살지 않으며, 오히려 필요에 의해 베풀어야 할 인연처가 생기면 턱 저질러 베풀었을 때, 그 마음에 바로 무량대복이 생겨 온 우주법계 전체가 내것이 되는 것이다. ‘내 것’과 ‘내 것 아닌 것’의 경계가 사라져 전체로서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무량대복이 생겨나면 언제든 ‘욕심’이 아닌 ‘필요’에 의해 한마음 일으켰을 때 법계에서는 얼마든지 그것을 가져다 줄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청정한 수행자들은 한마음 내어 무엇이든 자유자재로 법계를 굴려 쓰고, 법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 가져다 쓸 수 있으며, 참으로 법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맑고 청정한 도량, 청정한 수행자가 사는 곳은 그래서 ‘원만구족’한 것이다. 소유한 것이 많아서 원만구족이 아니고, 소유한 것은 하나도 없더라도 필요에 의해 가져다 쓸 수 있는 무량대복이 언제나 충만하기 때문에 원만구족인 것이다. 절에 쌀이 다 떨어져 없을 때 즈음이면 어디서든 쌀을 가져다 주는 사람이 나타나게 마련이고, 돈이 필요하면 또 어디서든 돈이 생겨나며, 사람이 필요하면 무량대복이 사람의 인연으로 화하여 주게 마련인 것이다. 수행자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법계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굴리고 자유자재하게 쓸 수 있어야 대장부 수행자라 하지 않겠나.
이것은 비단 스님들만의 또 치열하게 정진하는 수행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니다.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그 어떤 사람도 당연스럽게 누릴 수 있는 법계의 선물이며, 이치이고 진리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동쪽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네 간방과 위 아래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느냐?”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서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러야 한다.”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허공의 비유를 들어 상에 머물지 않는 보시의 공덕을 말씀하고 계신다. 허공이야말로 툭 트여 도무지 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으며 우리의 관념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허공을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 또한 헤아릴 수 없다고 다시한번 비유로써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보통 우리가 쉽게 들어 본 말이 사방(四方), 팔방(八方)일 터인데, 경전에서는 허공을 사방 팔방이 아닌 십방(十方)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사방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정방위인 동서남북(東西南北)을 의미하고, 팔방이라고 하면 여기 사방에다가 사방의 사이사이에 들어가는 간위인 동북, 동남, 서남, 서북을 더한 것으로, 경전에서의 사유(四維)가 바로 이 네 가지 간위를 뜻한다. 여기에 상하(上下)를 더하여 10방위가 되는 것이다. 보통 경전에서 자주 등장하는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바로 이렇게 10가지의 방위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끝없이 넓어 셀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허공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시방세계 허공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무주상보시의 복덕 또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음을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누차 무주상보시의 복덕이 크고 원만한 것임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설법을 접하고 나면 누구나 무주상보시를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 이면에는 벌써 무주상보시를 해야만 무량대복을 얻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깔려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 마음 조차 잘 관하여 놓아버렸을 때 참된 보시의 복덕을 얻을 수 있을 것입이다.
사실 무주상보시를 실천할 때는 복덕이라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한다. 복덕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는 말이 되어야 한다. 그저 보시 그 자체로써 의미가 있는 것이지 벌써 여기에 ‘복덕’이라는 말이 전제되고 나면 누구든 복덕을 위해 무주상보시를 실천하려고 애쓸 것이기 때문이다. 보시한다는 말도 필요 없고, 그저 필요한 것이 필요한 곳에 놓여진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이 우주 법계는 정확하게 필요한 일이 필요한 순간에 벌어지고 있으며, 필요한 것이 정확히 필요한 자리에 놓여지게 되어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인연의 인다라망은 펼쳐지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만하게 펼쳐지는 법계에 공연히 한생각 분별심을 일으켜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보시한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것만 다 놓아버리면 ‘보시’도 없고, ‘복덕’도 없고, 주는 ‘나’도 없고, 받는 ‘너’도 없으며, 주고 받는 ‘물건’도 없고, 오직 부처님의 성품이 이 법계에 여여하게 비추고 있을 뿐이며, 다만 인연따라 부처님이 가지가지 모습과 행으로써 나투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인연법이라는 법칙에 따라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렇게 놓여 있다. 사람이 가졌다 버렸다 하거나, 주고 받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인연의 법칙에 따라 있어야 할 그 자리에 그저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준다 받는다는 말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니 한생각도 분별할 것이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방편으로써 복덕을 이야기 하고, 무주상보시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무주상보시를 하고서도 이것이 복덕이라고 생각하면 벌써 복덕을 잃을 것이고, 복덕이라는 생각 조차 놓아버렸을 때 그 복덕은 실로 무량할 것이다. 이것은 흡사, 일체 모든 집착을 놓아버려야 오히려 얻을 것이고, 얻고자 하면 도리어 얻지 못하는 이치와 같으며, 무소유 했을 때 전체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고, 소유하고자 하면 도리어 소유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고자 애쓰면 벌써 깨달음은 저만치 달아날 것이지만, 깨달음 조차 놓아버리고 났을 때 이미 무시무종으로 언제나 깨달음과 하나 되어 있었던 것 처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승정종분은 ‘대승의 바른 종지(宗旨)’란 뜻으로 금강경이라는 이 경전의 가르침의 요지가 핵심적으로 잘 드러나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정종’이란 바르고 으뜸 된다는 뜻으로 이 부분이야말로 대승불교 경전인 금강경의 종지를 밝히는 핵심이 되는 장이다.
보통 대부분 경전의 구성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서분(序分), 정종분(正宗分), 유통분(流通分)이 그것이다. 서분은 육성취(六成就)라고 하여 경이 설하여지게 된 연유를 여섯가지로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며, 유통분은 정종분에서 설하신 교법을 제자들에게 부촉하여 후세에 널리 유통되도록 하기 위한 부분이고,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본문이 바로 정종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 번째 분의 명칭이 대승정종분인 것은 금강경의 본문인 정종분 가운데에서도 그야말로 정종인 부분, 즉 핵심 중의 핵심에 해당되는 부분이므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이 금강경 전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이고 사실 이 제 3분 이후에 나오는 많은 설법들은 이 대승정종분의 내용을 풀어 해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제 1분에서는 부처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임으로써 가르침이 그대로 삶 속에서 녹아들어 있는 모습을 설함이 없이 행동으로 설하셨다면, 이 부분에서는 부처님께서 하고 싶으셨던 말씀을 설법하고 계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부처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發心) 한다.
보살마하살에서 마하살이란 마하살타의 준말로 마하는 크다는 대(大)의 의미이며, 살타는 중생 혹은 유정(有情)의 의미로 마하살타는 큰 중생 즉 대유정 혹은 대사(大士)라고 번역되는 보살의 별칭이다. 보살마하살은 보살의 크고 위대한 덕을 높여 붙이는 존칭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앞 분 선현기청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이 부처님께 질문하는 내용에 대한 답변이 이 분 대승정종분인데, 바로 이 부분 보살마하살과 앞 분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자라는 부분이 산스크리트 원본에서는 '보디사뜨와야나 삼쁘라스티따(bodhisattva-yana-samprasthitena)'라고 하여 같은 원어를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다시말해 보살마하살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 선녀인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라는 질문에 '모든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답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와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모든 선남자 선녀인들이 곧 보살마하살이라는 점이다. 즉, 이미 깨달음의 직전에까지 이른 보살만 보살이 아니라, 단지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초발심을 낸 모든 남녀 신도들이 그대로 보살마하살일 수 있다는 점이다. 화엄경이나 법성게의 '초발심이 곧 바른 깨달음' '초발심시변정각'이라고 했던 말씀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금강경은 이미 상구보리라는 깨달음에 거의 이르러 하화중생을 실천하기 위한 보살들을 위한 설법인 동시에 최상의 깨달음을 얻겠다고 발심한 모든 남녀 신도들을 위한 설법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부분은, 의역에 중점을 둔 구마라집의 한역을 보면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고 되어 있는데, 문맥을 보더라도 그렇고, 빠알리어 경전이라거나 현장의 해석(發趣如是之心)을 참고하였을 때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발심(發心)’으로 해석하는 것이 알맞다고 여겨진다. 물론 항복받는다는 의미나 마음을 내어야 한다는 것은 의미상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니 어떤 해석도 무방하다고 본다.
앞의 제 2분에서 수보리의 질문, 즉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에 대하여 이 장 대승정종분에서 부처님은 ‘이와 같이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답변하고 계신 것이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이른바 알에서 태어나는 것, 모태에서 태어나는 것, 습기에서 태어나는 것, 화현하여 태어나는 것,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하여 완전한 멸도에 들게 하리라.
다시 말해 부처님 말씀은 일체 모든 중생들을 다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대 서원의 발심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모름지기 대승 보살의 몫은 하화중생의 마음을 내는 것이란 뜻이다. 그러면 부처님 답변의 의미를 살펴보기에 앞서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라고 말씀하신 아홉가지의 중생의 종류, 즉 구류중생(九類衆生)에 대해 먼저 그 뜻을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들이 일상에서도 쉽게 사용하는 단어인 ‘중생’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디까지의 범위를 의미하는지 여기에서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우리들은 우리 인간들만 중생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짐승들까지를 중생으로 본다거나 하지만 경전에서는 이상에서 언급한 아홉가지의 종류를 모두 중생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통 구류중생 중 처음의 네 가지인 태란습화(胎卵濕化) 사생(四生)으로 분류하는 것은 온갖 중생들의 태생 방식에 따른 분류라고 할 수 있다. 난생(卵生)은 알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조류 등 알에서 태어나는 일체 모든 것들을 말하며, 태생(胎生)은 모태(母胎)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온갖 짐승들이나 사람 또한 이 곳에 속한다. 습생(濕生)은 습기(濕氣)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모기, 지렁이, 온갖 벌레들이 이에 속하고, 화생(化生)은 모태나 알 등의 태어나는 원인을 빌리지 않고 스스로의 업력에 따라 화현(化現)하여 태어나는 것으로 천상의 신들이나 지옥의 중생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그 다음의 두 가지 종류인 유색(有色), 무색(無色)의 분류는 형상의 유무에 따른 분류로서 유색은 모양과 빛깔을 가진 중생으로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사는 이를 가리키며, 무색은 모양과 빛깔이 없는 신들로써 무색계(無色界)에 사는 이를 가리킨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가지의 종류인 유상(有想), 무상(無想), 비유상비무상(非有想非無想)의 분류는 인식의 유무에 따른 분류로서 유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중생으로 무상천과 비상비비상처천을 제외한 나머지에 사는 중생이고, 무상은 인식작용이 없는 중생으로 색계의 세 번째 하늘인 무상천[무상유정천]에 사는 중생이며, 비유상비무상은 인식작용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중생으로 비상비비상처천[비유상비무상천]에 속하는 신들을 말한다.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는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보살마하살의 수행자들에게 구류중생, 즉 일체 모든 중생들을 아무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의 세계로 인도하리라는 발원을 해야 한다고 설하고 계시는 것이다. 무여열반이란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고도 하며 일체 모든 고통과 번뇌의 불길이 다 끊어져 마지막 육신까지도 소멸하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궁극의 경지로서 완전한 열반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유여의열반이란 일체의 번뇌를 끊어 없앴지만 아직 육신을 남겨 둔 열반을 말하는 것으로, 마지막으로 아무것도 남음이 없이 그 육신마저 없어졌을 때를 무여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승정종분이라 대승의 바른 종지가 담겨 있으며, 이 금강경의 핵심 요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이 분에서 아마도 금강경을 공부하는 많은 수행자들은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마음을 닦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법문을 기대했을 터인데 이러한 부처님의 답변이 한편 실망스러울수도 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질문과 좀 맞지 않는 답변이 아닌가 하고 의문스레 생각되는 분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경전이 대승불교가 아닌 근본불교의 경전이었다면, 또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을 대상으로 설법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또 수보리를 위시하여 이미 부처가 되기 직전의 깨달음에 이르렀지만 열반적정의 ‘저 언덕’으로 가버리지 않고 ‘이 언덕’에 남아 하화중생의 서원을 세우려는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들에게 행하는 법이 아니었다면 부처님의 답변은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우리들처럼 금강경을 공부하고자 마음을 내는, 그러나 아직 깨닫지 못한 우리네 중생들을 대상으로 설법을 하셨다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하여 우리들 근기에 맞는 좀 더 자세한 설법을 들을 수 있었을른지 모른다. 그러나 수보리의 질문의 핵심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즉,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한 이들 이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부처님께서 이미 수많은 설법을 하셨고, 수많은 가르침과 실천 방법에 대하여 이미 많은 법문을 해 주셨다. 다만 이 경전에서는 대승의 종지, 다시 말해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 들어선 대승불교의 수행자들에게 대승의 종지, 보살의 종지를 말해주고자 하셨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하겠다.
보살의 공통된 서원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지만, 지금 질문하고 있는 수보리는 거의 깨달음을 이루신 분으로써 상구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고 계신 분이다. 다만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저 언덕으로 가기를 잠시 미루고 이 언덕에서 하화중생의 발원을 실천하기 위해 남아 있는 것다. 또한 그러한 원력의 수행자를 대승불교에서는 보살, 혹은 보살마하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따로이 상구보리를,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하는지를 설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비롯하여 ‘보리심을 발해 보살의 길로 들어선 선남자 선녀인’들이 보살의 길을 온전하게 걷기 위해서는 하화중생의 발심이 보살에게 있어서는 생명과도 같이 중요한 것임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보살을 부처라 부르지 않고 보살이라 부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발심과 원력이 있기 때문임을 다시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 제도의 서원이야 말로 보살을 보살일 수 있게 해 주는 보살의 요건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대기설법인 것이다. 설법을 듣는 상대의 근기에 맞게, 그 내면의 깊은 뜻을 온전히 헤아려 그 핵심을 바로 짚어 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 입장에서는 금강경의 핵심이라는 이 내용을 보고도 그다지 깊은 신심을 일으키지 못한다거나, 기대에 못 미치는 실망감을 안고 금강경을 덮어 버릴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속단하기는 아직 이르다. 어차피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많은 경전은 이와 같이 부처님과 어떤 특정한 제자들 사이에 이루어 졌던 대기설법들을 모아 기록된 것이다. 내게 한 설법이 아니니 나중에 내가 보살의 길로 들어섰을 때, 내가 수보리처럼 깨달음을 얻어 이 질문이 나의 질문이 될 때, 그 때 금강경을 다실 열어 봐도 되지 않겠나 하는 분별은 그냥 놓아버려도 좋다. 앞 장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금강경은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수행자들을 위한 설법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들 즉 보살이 되고자 노력하고 초발심을 일으킨 바로 현실의 우리들에게도 훌륭하고 온전한 설법이 된다. 경전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설법의 표현방식이 다를 수 있을 뿐이지 궁극에서 그 내용은 온전한 진리를 그대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길로 올라가더라도 궁극에서는 정상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실망감을 조금이라도 느끼셨던 분이시라면 이제부터 나오는 부처님의 설법에 귀를 기울여 주기 바란다. 이 부분이 제 3분의 설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리를 향해 정진하고 수행하는 수행자들이, 또 보리심을 발하여 보살의 길로 들어선 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수행해야 하며, 살아야 하고 발원을 성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소중한 법문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을 완전히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실은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
이 대목이 이 제 3분의 핵심이면서 또한 금강경의 핵심이고, 나아가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겉으로 드러난 말만을 바라보면 안 된다. 그 깊은 의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잘 관해볼 수 있어야 부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왜 이 부분이 불교의 핵심이라고 하는지 하나 하나 짚어 보자.
앞에서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의 길로 들어선 이들에게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으로 일체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해야 한다고 발원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 말이 방편법(方便法)을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부분은 근본법(根本法)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 제도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어느 한 중생도 제도되지 않았음을 깊이 통찰하여 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말은 수없이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며, 수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전달하고 있다. 이 말 속에서 무분별(無分別), 무아(無我), 연기(緣起), 공(空), 중도(中道)의 이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이다.
중생들은 열반에 들지 못하고 수없이 많은 번뇌와 괴로움, 불행 속에서 헤매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환상이며 거짓이고, 신기루이며, 꿈이고, 물거품과도 같은 것일 뿐, 이 세상 그 어떤 이들도 본질적으로 괴롭지 않다. 다만 꿈 속에서, 환상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이것이 환상이고 신기루임을, 꿈임을 그저 알기만 하면(반야) 더 이상 얽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일체 모든 존재는 이미 제도되어 있고, 열반의 저 언덕에 이미 도착해 있는 것이다. 다만 환상과 같은 탐진치 삼독에 빠져 환상과 같은 괴로움에 허덕이며 환상과 같은 열반을 찾아 헤매고 있을 뿐인 것이다. 중생들의 불행이 환상이기 때문에 보살들의 구제 또한 환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모든 중생들은 이미 구제 되어 있다. 새삼스럽게 또다시 분별을 일으켜 누가 누구를 깨닫게 할 것도 없고, 구제할 것도 없는 것이다.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고, 행복을 향해 나아가고 있지만 사실은 이미 우리가 바라던 니르바나의 ‘저 언덕’에 도착해 있는 것이다. 다만 모를 뿐. 무명(無明), 즉 어리석음으로 인해 이 삶이 환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하고자 하는 말씀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하화중생의 발원을 가져야 하지만 ‘함이 없이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중생을 저 피안의 세계로 인도해야 하지만 사실 그들은 중생이 아니며, 이미 인도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중생을 구제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어서도 안 되고, 거기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걸림 없이, 집착 없이 발원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며, 발원의 성취라는 것 또한 성취가 아님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중생들이 느끼고 있는 불행과 괴로움이라는 것도 환상이지만, 더 나아가 제도되어야 할 중생도 환상이며, 제도해야 할 보살 또한 환상일 뿐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일체 모든 존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고정된 ‘자아’가 아니다. 제도해야 할 ‘중생’도 없고, 제도 해야 할 ‘나’ 또한 모두 공(空)하고, 무아(無我)인 것이다. 제도 하고 제도 받는 주체가 모두 공할진데 공한 가운데 일어난 불행이며, 괴로움이라는 관념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내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생각이 얼마나 큰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 ‘나’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도 공이고 무아이며, 중생의 괴로움도 공하고 보살의 구제 또한 공한 것일 뿐이다.
나와 남을 분별할 것도 없고, 중생과 부처를, 생사와 열반을, 행과 불행을, 제도 받는 이와 제도하는 이를 분별할 것도 없이 이 세상은 본래부터 무분별이고 공이며 무아인 것이다. 그 어떤 한 쪽에도 치우치면 안 된다. 본래부터 극단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중도의 실천만이 무분별과 공 무아를 체득할 수 있게 해 준다. 다만, 이렇게 세상이 만들어지고 온갖 경계가 나타난 것은 다만 공한 가운데 꿈처럼 인과 연이 서로 화합하고 흩어지고를 반복할 뿐인 것이다. 인연화합의 법칙, 인과응보, 연기의 법칙에 의해 다만 꿈처럼 일어났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할 뿐이다. 그러니 무아라는 말, 공이라는 말, 중도라는 말은 다시말해 연기법의 실상을 달리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가 아닌 연기되어진 존재, 인연화합의 존재이기 때문에 공이고, 무아라고 말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러한 이치, 진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아(無我)’라고도 할 수 있다. ‘나’도 없고, ‘남’도 없고, 구제받을 사람도 없고, 구제시켜 줄 사람도 없으며, 그렇기에 온갖 번뇌며, 속박, 무명 또한 모두 고정된 실체적 관념이 아니며, 실제적 자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도 그랬고, 대승불교가 출현할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아트만’이라거나, ‘푸드갈라’ ‘지바’ ‘뿌루샤’ 등의 ‘자아개념’을 설정하여 그것을 ‘영원불멸의 근본적인 존재, 생명자리’로써 이해를 하고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도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갇혀 있는 많은 이들에게 올바른 이해를 주기 위해 ‘무아설’ ‘제법무아’를 말씀하셨지만, 수백년에 걸쳐 내려오면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고정된 실체적 자아’를 상정하기에 여념이 없었고, 그것은 온갖 부파와 사상가들 사이에서 온갖 다른 이름을 가지고 등장하여 집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전통적인 아트만 사상을 무아로써 극복하셨던 것처럼, 대승불교 출현 당시 즉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의 온갖 ‘자아’ 관념(푸드갈라, 지바, 뿌루샤, 아트만 등)들에 집착하고 있는 수많은 사상가며 수행자들에게 거기에서 벗어날 것을 간곡하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음 구절에 가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왜 그러한가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구절에서 금강경의 가르침은 절정을 이룬다. 앞서 말씀하신 ‘모든 중생을 열반에 들게 했다 하더라도 한 중생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다’는 말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이기도 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법무아에 대한 회귀이고, 근본불교에 대한 회귀이면서 대승불교의 파사현정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주는 말씀이라 하겠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금강경이 설해질 당시 수많은 수행자와 사상가, 종교가들은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심지어는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부파에서 조차 고정된 ‘자아’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쉽게 말해 ‘나’ ‘나의 것’ ‘내 생각’ ‘내 몸’ ‘자아(atman)’ ‘중생(sattva)’ ‘영혼(jiva)’ ‘개아(pudgala)’ 등의 관념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나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며 집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확고하다. 이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관념도 내가 아니며, 본질이라고 할 수 없고, 그러므로 거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계신 것이다. 일체 모든 관념과 모양 소견, 집착, 번뇌며 온갖 상(相)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마도 이 구절의 해석에 대해 금강경을 공부한 많은 분들도 궁금증을 시원스레 벗어버리지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해석은 아마도 금강경이 설해진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상가, 종교가, 철학가며 수많은 스님들에게 많은 의구심이 들게 했고, 그 결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해석으로 분분하게 펼쳐져 왔다. 그러다보니 금강경을 해설해 놓은 책들마다, 금강경을 설법하시는 스님과 법사에 따라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해석은 제각기 다르며 통일되지 못한 실정이다. 물론 그 근본에 있어서의 내용이야 모두가 아상을 타파하는 무아의 실천, 연기, 공의 실천으로써 온전하게 전달되어 왔음은 다행한 일이다. 결국 다 다르게 해석될 수는 있지만 근본에 있어서 그 내용의 변질은 없었다고 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대한 해석을 보다 분명하게 해 두는 작업은 두 말 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이는 곧 금강경 나아가 반야경 전체에 대한 해석에도 큰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네가지 상, 사상(四相)에 대해 온전히 해석을 하기 위해서는 금강경을 설하게 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근본불교, 초기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당시의 육사외도라든가,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들을 논파하기 위해 연기법과 공의 해석을 ‘무아’라는 점에 치중하여 설명하였음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 즉 아트만이나 자아관념에 집착해 있던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연기법과 공 무아 중도 등의 개념이 모두 동일한 근본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무아라는 단어를 수시로 채택하여 설법을 하셨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금강경을 설하는데 있어서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의 이해는 필수적이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대승불교가 막 태동할 때 많은 사상가며 불교 수행자들은 ‘자아’ ‘중생’ ‘영혼’ ‘개아’ 등의 온갖 실체적인 관념에 많이 집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것은 약간씩은 다른 의미일지라도 모두 ‘실체적 자아’관념, 다시 말해 ‘무언가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네 가지로 나누어 설명한 데 불과한 것으로, 이 네가지 의미는 거의 동의어라고 볼 수 있을 정도인데,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실체적 자아 관념에서 벗어나야 할 것을 설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면 하나 하나 사상에 대하여 설명해 보도록 하자. 역사적인 상황에 비춰 설명하기 위해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금강경의 산스크리트 원문을 알아보는 일이다. 구마라집 역의 한문 원전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순서로 나와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에서는 그 순서가, 아상, 중생상, 수자상, 인상의 순서로 등장하며, 그 원문을 보면 ‘atman(아상)', 'sattva(중생상)', 'jiva(수자상)', 'pudgala(인상)'라고 되어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다른 책의 설명을 보았을 때, 순서가 바뀐 것은 한문으로 번역할 때의 리듬과 운율을 맞추기 위해서 아와 인을 붙여 놓았을 뿐 그리 중요한 의미는 없다고 보여진다. 여기에서는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번역에 맞춰 구마라집 번역의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번역을 따르고 있지만, 산스크리트 원문과 현장의 번역을 참고하여 새롭게 해석한 각묵스님의 [금강경 역해]에 나오는 사상의 해석인 자아[아상, atman], 중생[중생상, sattva], 영혼[수자상, jiva], 개아[인상, pudgala]라는 해석을 채택하여 그 역사적 상황이 갖는 사상의 의미에 대해 살펴볼까 한다. 산스크리트 원문을 살펴보면 이 네 가지 상의 역사적 상황이 갖는 의미를 유추해 보기가 좀 더 쉬워지기 때문이다.
우선 ‘아상’의 원문인 'atman'[자아]은 인도 전통 종교인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대한 부정이다. 이는 흡사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아트만을 부정하기 위해 무아(無我)법을 말씀하신 것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아트만이란 고정된 실체적 자아 관념으로 브라흐만에서는 윤회의 주체라고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부처님께서는 고정된 실체적 자아관념, 다시 말해 고정된 실체로써 ‘나’를 상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브라흐만의 아트만 사상에 빠져 집착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아트만이라는 집착을 가져선 안 된다고 하는 설법이 바로 아상타파의 교설인 것이다.
두 번째 ‘중생상’의 원문인 ‘sattva’[중생]는 ‘존재하는 모든 것’ 혹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란 의미로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중생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두 번째는 불교 내부적으로는 수행자들이 중생과 보살이라는 이원론적인 분별심에 빠져 있는 것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나는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죽어있는 것들과는 다르다는 이원론적인 분별심에 빠져있는 것을 깨우쳐 주고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위로는 깨달은 이와 견주면서 난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상에 빠져 보살과 중생을 나누고 분별하는 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고, 아래로는 난 살아있는 생명체로써 죽어있는 저 바위며 물 흙보다 우월하다는 분별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말로써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중생과 보살을 나누고, 생명 있고 없음을 나누는 어리석은 이원론적 집착에서 벗어나라는 설법이 중생상의 타파인 것이다.
세 번째 ‘수자상’의 원문인 ‘jiva’[영혼]는 ‘목숨’ ‘생명’ ‘영혼’이라는 말로써, 자이나교에서 ‘생사를 초월해 있는 존재’ ‘순수영혼’이라는 의미로 자이나교의 가르침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며, 지바라는 생사를 초월하고, 시간을 초월한 순수영혼이 실체로써 존재한다는 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을 초월하고, 생사를 초월하는 영원한 참생명이 있다는 상을 타파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자이나교 ‘순수영혼’설에 대한 반박의 교설이다. 자이나교의 ‘순수영혼’에 빠져 집착해서는 참된 보살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미다.
네 번째 ‘인상’의 원문인 ‘pudgala’[개아]는 ‘개인’ ‘인간’ 등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쓰이나, 부파불교의 한 부파인 독자부(犢子部)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의미하는 말로 유위법과 무위법의 중간자적 존재라고 상정하고 있으며, 여기에서는 이러한 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인 뿌드갈라가 존재한다는 상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교설을 살펴보면 윤회를 한다고 하면서 윤회의 주체로써의 실체가 있지 않다고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업의 결과’는 있으나 ‘업을 짓는 자’는 없다라고 하여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고 있지 않다. 이 문제, 즉 윤회와 무아의 문제는 지금까지도 학계에서 모순이라는 논쟁이 진행중인데, 아마도 부처님 열반 후 훗날 부파불교 가운데 독자부에서 윤회와 무아의 모순을 고민하다가 윤회를 하려면 ‘실체적인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에서 ‘뿌드갈라’라는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인상의 설명인 본문에서 조금 벗어나는 듯 하지만 잠깐 무아와 윤회문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는데, 이 금강경의 설법에서도 보듯이 독자부에서 말한 ‘윤회의 주체’를 상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며, 그렇듯 윤회의 주체인 ‘뿌드갈라’(인상)를 상정하게 되면 그것은 곧 보살이 아니라고 하기 때문이다.
잠시 무아와 윤회 문제를 살펴보면, 불교에서는 윤회의 주체를 고정된 실체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언급해 두어야 한다. 윤회의 주체라는 것을 이름하여 유식불교에서도 ‘아뢰야식’이라고 붙여 놓긴 했지만 그 아뢰야식이 고정된 실체적 관념으로 붙인 것이 아니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아뢰야식은 그야말로 업들이 모여 있는 업장이요, 장식인데, 그 또한 끊임없이 변화하는 제행무상의 한 모습일 뿐이다. 우리는 수많은 생을 이어가며 수많은 업을 짓고 받는다. 그러면서 업은 수없이 변하고 변하는 가운데에 있다. 그러니 당연히 그 ‘업의 모임’인 업장, 아뢰야식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는 사람으로 윤회를 했다가 다음 생에는 축생으로도 태어나고 지옥에서도 태어나고 천신으로도 태어나는 것 아니겠는가. 즉 아뢰야식이 윤회의 주체이지만 그 윤회의 주체 또한 변화하는 ‘무아’ ‘공’ ‘제행무상’ ‘연기’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윤회의 주체를 딱 정해 실체화할 수 있겠는가. 윤회의 주체를 가지고 고정적인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나’라고 하는 것 또한 끊임없이 변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의 한 부파인 독자부에서는 생사를 초월한 윤회의 주체를 ‘뿌드갈라’라고 하여 실체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러한 뿌드갈라라는 상에 빠져 있는 어리석음을 타파하기 위해 인상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에서처럼 아상[자아], 중생상[중생], 수자상[영혼], 인상[개아]라는 말은 모두가 고정된 실체적 존재로써의 ‘나’를 상정하지 말아야 할 것을 역설하고 있는 거의 동일한 개념, 동일한 의도로 쓰여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나’의 본질은 실체가 없이 인연따라 오고 가는 ‘무아’적 존재요, 공한 것일 뿐 그 어떤 실체적 자아관념을 만들어 거기에 빠져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인 것이다. 다만 이렇게 네 가지 상을 말하고 있는 것은 당시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부파나 종교별로 이름만 다를 뿐 더 많은 ‘실체적 자아관념’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가장 보편적이고 널리 알려져 있는 관념이었기에 이 네 가지 상을 대표로 나열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니 궁극적으로는 이 모두가 ‘실체적 자아관념’ ‘실체적인 나’를 내세우지 말라는 무아의 설법이요, 공과 연기의 설법인 것이다. 이렇듯 사상에 집착하면 보살이 아니라는 설법으로써 ‘나’라는 상에 빠지지 않도록 한 이유는 ‘나’라는 상이 일체 모든 상에 빠지는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라는 상이 근본이 되어 일체 모든 상이 만들어 진다. 쉽게 말해서, ‘나다’ ‘내것이다’ ‘내가 옳다’ 라고 하는 아상이 있음으로써 나와 너를 둘로 나누는 분별도 있게 되고, 인간과 자연을, 또 생사와 열반을, 중생과 보살을 나누는 분별들을 비롯한 일체의 분별 망상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네 가지 상의 타파는 곧 ‘나’라는 상을 깨버리는 수행을 의미하며 이는 무아(無我)를 깨닫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연기(緣起)되어진 존재이기 때문에 무아이고, 공(空)이라고 보았을 때, 사상의 타파가 곧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고, 공성을 깨닫는 것으로 불법 수행의 요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이 부분의 설법이 불교의 핵심이며, 금강경의 핵심이고, 정종분의 핵심이라고 앞서 말씀을 드린 것이다.
그러면 조금 더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의미로서의 사상(四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아상[자아, atman]라는 생각은 이 몸과 마음을 가지고 ‘나’라고 생각하는 것, 혹은 나의 본질적인 근원이나 윤회의 주체 등을 설정하여 ‘나’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이것이 일체 모든 분별과 고통과 번뇌 그리고 모든 불행의 원인이 되는 근본의 어리석은 생각인 것이다. 아상으로 인해 일체 모든 괴로움이 시작되고, 분별이 시작되고, 집착과 애욕이 시작되는 것이다. 불교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아상을 타파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상의 타파는 중요한 불교 수행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아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의 실천이고, 연기, 공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아상은 좀 더 세부적으로 ‘나다’ ‘내것이다’ ‘내가 옳다’고 하는 분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나다’하는 것은 이 몸뚱이와 이 마음이며 생각이 나라고 착각하는 분별이다. 몸뚱이는 이 우주법계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인연따라 잠시 내 몸의 지수화풍으로 화했을 뿐 고정된 실체로써 이 몸이 영원불멸의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내 몸은 과거 10년 전 내 몸과 물질적인 세포로만 보았을 때 전혀 다른 물질에 불과하다. 몸이란 것은 신구의(身口意)로 지은 업(業)에 따라 이 우주 법계의 지수화풍의 요소들이 잠시 이 몸뚱이로써 인연화합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 흐르면 이 몸은 없어질 터인데 고작 이것을 가지고 ‘나’라고 이름 짓겠는가? 결국 이 몸이 ‘나’인 것은 아니다. 또한 마음이나 생각 또한 마찬가지다. ‘내 성격’이며, ‘특기’ ‘적성’ ‘IQ'를 가지고 ‘나’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각이란 것도 인연따라, 상황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며, 성격이나 특기, 적성이라는 것도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지 ‘내 성격’ '내 마음‘하고 딱 정해진 것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 뿐이다.
다음으로 ‘내것이다’하는 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일체 모든 것들을 내것이라고 착각하는 분별이다. ‘나다’ 하는 아상으로 인해 ‘내것’이라는 소유욕이 생겨난다. 그러나 소유라는 것은 엄청난 착각에 불과하다. 소유의 주체인 ‘나’라는 것이 공하였고, 무아일진데 어찌 소유의 관념이 생겨날 수 있겠는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면 ‘내 것’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영원히 내 것이라고 할 것은 아무데도 없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와서 쓰여졌다가 인연이 다하면 다시 흩어질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분별하여 ‘내 것’이 되었다가 ‘남의 것’이 되었다고 분별함으로써 괴로워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이 우주 법계의 일체 모든 것들은 제 스스로 정확히 제 자리에 언제나 그렇게 있을 뿐이다. 누가 누구의 주인도 아니고, 누가 누구의 것도 아니고, 누구의 것이 되었다가 누구의 것으로 옮겨가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법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저 늘 있어야 할 자리에 인연따라 정확하게 있을 뿐인 것을 사람들은 어리석은 아상으로 인해 ‘내 것’이라고 하며 쌓고 집착하는데 여념이 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살아가면서 ‘내 것’이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내 것’은 어디에도 없다. 애써 표현한다면 내 것이기도 하며 전체의 것이기도 한, 오직 우주 법계의 것이 있을 뿐이고, 무분별의 부처만 있을 뿐인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아상은 정신적인 것에서도 여실히 나타난다. ‘내가옳다’고 하는 생각, 내 가치관이 옳다라고 여기는 어리석은 분별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도 오직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내 생각’이라고, ‘내 가치관이며 세계관’이라고 생각하는 일체 모든 견해들은 모두가 다른 사람의 것들일 뿐이다. 배운 것이거나, 보고 들은 것이거나, 책에서 읽은 것이거나, 그도 아니면 그 좁은 경험으로써 몇 번 체험했던 것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런 것들을, 수도 없이 듣고 배운 것들을 내 식대로 조합하고 짜맞춘 것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그래 놓고 그것을 ‘내 생각’이라고 고정 짓고, 그것만이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내 안에서 순수한 ‘내 생각’을 찾아 보라. 그 어떤 견해도 순수하게 내 생각일 수는 없다. 또한 그 어떤 생각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하고 분별할 수는 없다. 옳고 그르다는 것, 맞고 틀리다는 것도 사실은 우리가 만들어 낸 상대세계에서의 분별일 뿐이지 우주 법계는 그저 그대로 여여하게 흐를 뿐, 어디에도 맞고 틀리는 것이 없이 그저 절대적으로 항상 옳을 뿐이다. 맞고 틀림을 나누어 놓고 그 중에 맞는 것을 택하는 맞음이 아닌 그저 아무런 분별도 붙이지 않은 절대선이며,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란 말이다. ‘내가 옳다’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 줄 알아야 한다.
이상에서처럼 우리 안에서 ‘나’와 ‘상대’를 나누는 일체 모든 분별에서 온전히 벗어나야 그 때 나도 없고 상대도 없는, 내 것도 없고 상대의 것도 없는, 내가 옳고 그를 것도 없는 무분별의 절대 깨달음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상은 아상인 줄 알고, 타파해야 한다고 설파를 하면서도 막상 그 위에 ‘참나’를 세우고, ‘아트만’을 세우고, ‘자성불’을 세우면서 절대적이고 근원적인 실체적 존재로써의 ‘나’를 내세우고 있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부처님께서 자아, 중생, 영혼, 개아라는 단어들을 쓰시면서, 또 금강경의 현장 번역을 보면 사상 뿐 아닌 아홉가지의 상을 열거 하면서 까지 아상을 타파할 것을 말씀하시는 데는 그 안에 그 어떤 절대적인 ‘나’도 상정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이란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사상뿐 아니라 현장이 말하고 있는 아홉가지의 상은 모두 여러 가지 단어로써 절대적인 존재를 가설하는 것을 정형화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궁극적인 존재를 상정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 그것이 바로 아상의 극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즈음에 이르면 많은 분들께서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것이고, 자성불을 찾고, 참나, 진아(眞我), 본래면목, 일심, 한마음, 자성청정심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 것인데, 그것이 모두 아상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 즈음에 이르러서는 금강경의 철저한 아상타파의 정신에 잠시 혼란스러움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그런 혼란스러움을 잠시 비워두고 부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고 있는 ‘참나’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하자. 보통 우리가 참나를 말할 때, 그 참나는 참나가 아니라 참나라는 말일 뿐이고, 생각일 뿐이고, 참나라는 개념의 인식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많은 선지식 스님들께서 참나를 찾으라고, 자성불을, 본래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방편설법을 하시지만, 많은 제자들은 ‘도대체 참나가 무엇일까’ 하고 참나에 대하여 생각하고, 분별하고, 인식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참나는 생각되어질 수 없고, 말로 표현되어질 수 없으며, 우리가 인식할 수도 없는 언어 그 너머에 있고, 생각 그 너머에 있으며, 우리의 인식과 분별의 그 너머에 있고 없음을 넘어 서 있을 뿐이다. 행여 ‘생각 그 너머에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나’를 말로 표현했다고 했을 때 조차 그것은 그렇다고 말로 표현되어지고 있을 뿐이지 그것은 여전히 참나가 될 수 없다. 단지 ‘우리의 생각과 인식, 말을 초월해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일어날 뿐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중생들의 마음에서는 무언가 표현을 하길 바라고, 논의 되길 바라고, 설하여 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 자리는 표현할 수도 없고, 논의의 대상도 아니며,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리에 대한 그 어떤 상도 내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즈음에서는 ‘참나’라고 방편으로 세워 놓은 그 방편까지도 오직 일미(一味)의 진리로써 거두어 들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세속제와 제일의제(第一義諦)라는 말이 대승불교 경전이 나온 이후에 논사들에게 설파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점, 이렇듯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자리에 대한 또 다른 표현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그동안 방편으로 부처가 되어야 한다고, 자성불을 찾아야 하고,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고 하셨던 그 말 또한 단지 말일 뿐 참 진리의 당처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는 것임을 진리의 말 아닌 말로써 표현하고 계신 것이라는 점을 살필 수 있어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참 진리의 자리를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 보니 유마경에서는 ‘침묵’으로써 말씀을 하게 된 것이고, 역대의 조사스님들께서는 사량 분별이 끊어진 말아닌 말 즉, ‘화두’로써 그 의미를 설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쉽게 쓰는 말 ‘참나’니, ‘자성불’이니, ‘본래면목’이니, ‘한마음’이니 하는 이 모든 것들 또한 하나의 진리를 표현하는 ‘말’일 뿐이지, 그것 자체가 당처인 것은 아니니, 그러한 말에도 걸려서는 안 되며,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금강경의 표현대로 한다면 ‘자성불은 자성불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자성불일 뿐이다’라는 설법으로 마감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그래도 방편일 뿐이지만 자성불이 있긴 있는게 맞지요?’ 하고 질문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그것마저도 다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지금 금강경에서는 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아상에 대한 타파의 법문이 금강경의 전체에 깔려 있으며, 아상의 다른 표현으로써 중생상, 수자상, 인상, 즉 자아, 중생, 영혼, 개아라는 사상(事狀)도 설정이 되게 된 것임을 이해하면서 다음의 중생, 영혼, 개아에 대해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자.
다음으로, 중생상[중생, sattva]이라는 생각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중생이라는 의미는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모든 존재’를 의미하는 말로, 깨달은 이와 깨닫지 못한 중생을 분별하는 착각이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존재와 죽어있는 존재를 분별하는 착각을 의미한다. 중생상도 그 근원에서는 ‘나’라는 아상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깨달음의 주체인 ‘나’라는 상을 상정해 놓기 때문에, ‘내가 깨달아야 한다’거나 ‘나는 아직 못 깨달았다’거나, 혹은 ‘나는 깨달았다’라는 상이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과 부처라는 것도 착각일 뿐, 깨달은 각자(覺者)의 눈에는 일체 삼라만상 모든 것이 부처의 현현일 뿐, 깨달은 것도 없고 깨닫지 못한 것도 없으며, 생명 있는 것도 없고 생명 없는 것 또한 없을 뿐이다. 오직 아무런 분별도 짓지 않은 텅 빈 자리에서 홀연히 여여하게 존재할 뿐인 것이다. ‘나’라는 생각, 아상이 타파되면 중생상도 자연스럽게 타파될 수 밖에 없는 상인 것이다.
다음은 수자상[영혼, jiva]이라는 생각으로, 목숨과 생명에 대해 집착하여 생사를 초월하는 그 어떤 영혼이나 지바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생사를 초월하고자 하고, 목숨과 생명이 끊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이 또한 ‘나’라는 것이 있다는 착각, 아상에서 시작되는 것에 불과하다. ‘나’가 있으니 내가 조금 더 오래 살고 싶고, 생사를 뛰어 넘고 싶고, 그 어떤 불생불멸의 초월적인 내재적 존재[영혼, 지바]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없는 무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나고 죽음도 있을 수 없고, 목숨의 길고 짧음 또한 꿈이며 환상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네 번째는 인상[개아, pudgala]라는 생각으로, 이것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윤회의 주체로서의 그 어떤 실체, 뿌드갈라가 존재하여 나고 죽음을 영원히 반복하더라도 이 실체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하고 있다. 후대 유식사상에서의 아뢰야식과도 비슷한 개념이라고 하겠는데, 아뢰야식은 윤회의 주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상속한다고 하여 연속성은 인정하더라도 실체적 개념은 아니며, 아뢰야식 또한 무아(無我)라고 하는 반면에 당시 부파불교의 독자부에서는 윤회의 주체로써 생사를 초월한 주체인 뿌드갈라를 상정하였으므로 그것에 대한 타파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보통의 해석에서는 개아(인상)를 나와 상대를 갈라놓는 분별심에 대한 타파,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타파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뿌드갈라의 어의(語義)가 ‘개인’ 혹은 ‘인간’을 의미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그런 해석이 가능했다고 생각되어진다. 어쨌든 개아라는 생각 또한 결국에는 ‘나’라는 상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생사를 윤회하는 주체로서의 ‘개아’를 상정하는 것 또한 앞서 자아의 설명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결국에 타파되어야 할 것임이 분명하고, 나와 상대에 대한, 혹은 내가 인간이라는 생각에 대한 분별로 보더라도 이것은 ‘나’라는 상이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아상의 연장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처럼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나’라는 상에 대해 철저하게 타파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나’라는 상이 근본이 되어, 일체의 모든 상이 생겨나기 때문에, 나라는 상을 타파하면 동시에 ‘나 아닌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분별 또한 여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3분에 대한 설명이 많이 길어졌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대로 제 3분이야말로 금강경의 본문이 정종분 중의 정종분이며, 불교의 핵심이며 금강경의 핵심 사상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러하였으며, 앞으로 진행될 금강경 공부에서 이 부분의 내용들이 여러번 반복되고 다른 표현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을 약하고 전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좀 더 세부적이고 자세한 이해는 앞으로 나올 경문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제 3분을 마친다.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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