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흥국사 연못에 비친 종각]

선택하지 말라.
분별하고 차별하지 말라.
우리의 삶을 가만히 바라보면
끊임없는 선택과 분별의 연속이다.

단 한 순간도 선택을 멈춘 적이 없다.
선택하지 않으면 세상을 살 수 없을 것 같다.
바보가 될 것 같다.
매 순간 순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선택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란 점은 좀처럼 생각지 못하고 있다.
선택이 우리를 괴롭히며,
선택이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몰고간다.

우리는 생각한다.
보다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순간 순간 보다 올바로 선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공부하고 자료를 찾으며 온갖 정보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배움들은 이제 다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
모든 분별과 차별, 그로인한 '선택'은 삶에 대한 근원적인 대답을 해 주지 않는다.

언제나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선택받지 못한다.
한 가지를 옳다고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그른 것이 되어 선택받지 못하고 만다.

그러면 우리 삶은 둘로 나뉜다.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으로 나뉜다.
그렇게 둘로 나뉘면 반드시 그 중 하나는 좋고 하나는 싫어진다.
보통 사람들은 그 가운데 좋은 것은 선택하여 내 것으로 가지려 하고
싫은 것은 선택하지 않은 채 버려두거나 혐오하고 심지어 파괴시키고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러나 좋고 싫은 것으로 나누는 것,
그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본 진리의 관점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에 혼란과 분열, 시기와 질투 그리고 전쟁을 가져올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더욱 더 좋고 싫은 것을 나누게 되고,
점점 더 사물을 비뚫어지게 보게 된다.
한 쪽으로 치우친 시선으로 보게 된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만다.

항상 우리의 답변은 둘 중 하나다.
좋거나 싫거나, 옳거나 그르거나.
그러나 어찌 항상 좋을 수만 있고, 옳을 수만 있는가.
어찌 항상 싫을 수만 있고, 그를 수만 있겠는가.

흔히 '저 사람 어때?' 하고 물으면 그 답변은 늘
'괜찮아' 혹은 '별로야'이거나,
'좋은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거나하는 둘 중 하나의 답변이 돌아오곤 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런 둘 중 하나의 견해로 규정지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거나 '나쁜 사람'이거나 하는
둘 중 하나로 나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판단 자체가 그 사람에 대한 온전치 못한 편견을 불러올 뿐이다.

'나쁜 사람이야', '성격이 별로야'란 평가를 들었다고 치자.
그러면 분명 우리 마음에는 그 사람에 대한 '나쁘다' '별로다'라는 편견이 자리한다.
그런 치우친 견해로 상대를 판단하게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호의나 자비를 베풀었더라도 마음 속에는
'혹시 무언가 또다른 나쁜 의도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게 된다.
좀처럼 그 편견을 깨기란 쉽지 않다.

모든 나뉨과 판단과 분별 그리고 선택이란 것이 이와 같다.
좋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않고
나쁘게 보는 것도 본질적이지 못하다.

어떤 한 가지를 좋고 보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좋아진다.
또 한 가지가 나빠지면 모든 것이 싫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면이 다 좋아보이지만,
한 번 미운 사람은 하는 행동이 다 미워보이지 않는가.

좋고 싫은 색안경이 있는 이상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우리 마음은 더욱 더 비뚫어지고 분열 될 뿐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일이다.
판단하지 않는 일이다.
선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다만 보기만 하라.
판단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된다.

거기에 그 어떤 해석도, 분별도, 선택도 하지 말라.
그랬을 때 치우침 없는 정견의 시야가 열린다.
좋고 나쁜 양변에 갇히지 않은 무분별의 맑은 견해가 생겨난다.

누가 나에게 욕을 했다고?
시험에 진급에 떨어졌다고?
아이의 성적이 나쁘다고?
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다고?
원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고?
실패를 했다고?

그것이 뭐 어쨌단 말인가.
그 사실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그 사실, 그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좋고 나쁜 분별을 갇다 붙인 것일 뿐이다.

대그룹 입사 시험에 떨어졌다고 생각해 보자.
그 사실은 항상 두 가지를 내포하고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험에 떨어져서 그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또다른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상황 가운데 우리는 보통 전자를 선택함으로써 괴로운 상황으로 몰고가곤 한다.
그러나 왜 그 선택만을 고집해야 하는가.
그 선택에만 갇혀 있어야 하는가.

보다 창조적이고 주체적이며 긍정적이고 영적인 사람이라면
시험에 떨어졌다는 그 사실에 아무런 판단이나 선택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단지 둘 중 하나의 상황일 뿐이다.
분명 이렇게 될 수도 있고, 저렇게 될 수도 있었다.
다만 내 스스로 '반드시 이렇게 되야 한다'고,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고집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고집과 집착이 나를 괴롭히고 있을 뿐이다.

어떤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이런 저런 판단과 해석을 가하지 말라.
판단하고 분별하고 차별함으로써 어느 하나를 일방적으로 선택하지는 말라.
그 어떤 상황도 전적으로 좋은 것이라거나 전적으로 나쁜 것이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상황을 보고 내 마음이 좋은 것이라 선택하고,
나쁜 것이라 선택했을 뿐인 것이다.

실패가 왜 반드시 나쁜 것이기만 한 것인가.
그로인해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을 수도 있고,
그러한 몇 번의 실패로 인해 내적인 힘이 쌓였을 수도 있으며,
과거의 악업을 소멸시킬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의 때였을 수도 있고,
때때로 실패가 훗날 생각해 보면 더 큰 성공을 위한 정말 필요한 기초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 어떤 판단도 버리라.
둘 중 어떤 것을 선택하지 말라.
선택 없이 그 상황 자체를 무분별로 받아들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라.
큰 틀에서 삶을 즐기고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

그것이 바로 업을 뛰어넘는 길이다.
업에 얽매이지 않고 업에 구속되지 않는 길이다.
악업과 죄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다.

어떤 한 사람을 보고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지 말라.
'능력있는 사람'이라거나 '능력없는 사람'이라거나 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습관을 버리라.
마찬가지로 어떤 한 상황을 보고 좋다거나 나쁘다고 판단치 말라.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고,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사람도, 상황도 그것 자체는 완전한 무분별이다.
완전 중립이다.
다만 그 사람에 대한,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이
모든 문제를 가져올 뿐이다.

모든 분별을 버리라.
모든 차별과 선택을 버리라.
그 어느 쪽도 선택하지 말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하라.

선택없이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기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을 대상으로 힘겨운 투쟁을 버리지 않아도 되고,
마음에 온갖 혼란과 분열을 가져오지 않아도 되며,
우리 삶을 괴롭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이 있다.

선택하지 말고 다만 바라보라.
분별하지 말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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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롭게 사는 즐거움

산방한담 2009/09/08 07:45 Posted by 법상




외로움의 의미를
생각해 보셨는지요.

외롭다는 것은
내가 나를 알아간다는 것입니다.
나와 조금 더 가까워 진다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은 고개를 치켜들고 찾 아와
혼자있음의 고요를 방해합니다.

외로움은
가진 것이 없을 때 찾아옵니다.

아무것도 없 을 때,
내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우린 외로움에 눈물을 흘립니다.

외로움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혼자 있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외로움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외로움이란 느낌이 없다면
우린 쉽게 혼자 있을 수 있을 것입 니다.
그랬다면
아마 보다 많은 수행자들이
깨우침을 얻었을 지 모릅니다.

외로움이란 느낌 때문에
우 린 그 느낌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자꾸 밖으로 무언가를 찾아나섭니다.

혼자 있으면
도대체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TV를 켜든가,
비디오를 빌려 보던가,
사람들 많은 곳을 방황하던가,
아련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그런 일들 때문에
오랜만에 맑게 텅 비어지려던 내면은
다시 금 물들어 꽉 채워지게 됩니다.

혼자 있을 때,
외로움 그 속으로 들어가
온전히 느껴보고 하나 될 때,
우린 조금씩
내면의 참나와 마주할 수 있습니다.

늘상 밖으로 치닫는 사람은
내면이 헛헛하지만,
혼자 있음 을 즐기는 수행자는
맑은 향기가 충만합니다.

혼자 있어도
당당하고 초연합니다.

무언가 함께 할 때 당당한 것,
많이 가지고 있을 때 행복한 것,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마는
수행자는 아무것도 없이 홀 로 있을 때도
당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혼자 있어
외로움을 온전히 느끼는 것!
그것이 내 영혼을 맑혀 줄 것입 니다.

외로움 속에서
혼자 있음! 그 속에서
우린 가장 순수해 질 수 있습니다.

혼자인 순간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내면은
조금씩 참나에게로 다가서는 것입니다.




사람을 믿으려 하지 말고
법을 믿어라.
사람은 변함이 있지만
법은 변함이 없다.

믿었던 사람이
남들로부터 비난을 당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파계 하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면 실망하게 되고,
믿었던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의지처를 잃게 된다.

법을 믿지 않고 사람을 믿으면
그와 같은 허물이 생긴다.

[잡아함경]의 말씀입니다.
불법 을 믿을 것이지
스님을, 사람을 믿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변합니다.
변하는 사람을 믿으면
사람 이 변할 때
내 마음도 함께 흔들리게 됩니다.
중심이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오직 법을 믿고 부처님 을 믿으면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금강과도 같은 굳은 믿음이란
그 대상이 사람에 있지 않고
법과 부처님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철스님이 파계를 하고,
원효스님이 속세로 돌아가고,
법 정스님이 대사찰을 소유하고,
원성스님이 결혼을 하고,
법상스님이 큰 죄를 지었더라도

내 마음의 중심은
한 치 도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스님들이 타락하고,
절이 청정함을 잃더라도
내 마음 공부는
한 치의 흔 들림도 없어야 할 것입니다.

자성부처님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을 일이지
사람을 등불로 삼아선 안 될 일입 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할 일이지
승등명(僧燈明) 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고락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은 우둔한 범부들이 느끼는 감정보다도
지혜로운 사람이
감정적으로 더 예민할 수도 있다.

다만 지혜로운 사람 은
즐거움을 만나도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괴로움에 부딪쳐도
그것 때문에 공연히 근심을 더하지 않아
괴로움과 즐거움 의 감정에 구속받지 않고
그 모두를 버릴 줄 알아
감정의 굴레를 벗어나 자유로울 뿐이다.

[잡아함경]

지혜로운 수행자라고
괴로움과 즐거움의 감정이 없다거나
늘 여여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경계를 만나
감정이 올라오는 것은 똑같습니다.

다만 어리석은 중생은
올바로 관찰하지 못하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물 러 휘둘리지만,
지혜로운 수행자는
즉한 순간 관하여 깨어있기에
그 감정에 마음이 머무르지 않으며
바로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경계에 닦쳐
욱! 하고 올라오는 마음은 같지만,
그 감정에 머무르느냐
빨리 놓아버리느냐가 다른 것입니다.

바로 관하면
쉽게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빨리 놓아버리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절에 오며
좋은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나 쁜 일들은 부처님께서 다 거두어 주시고
늘 즐거운 일만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부처님 앞에서 당당해 져야 합니다.
떳떳해 져야 합니다.
'내가 지은 것 모두 내가 받겠습니다.'
하는 마음이 진실된 수행자의 마음입니다.
즐거움도 괴로움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입니다.

내 앞에 펼쳐진
일 체의 모든 경계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기에, 원인이 있기에 나온 것입니다.
짓지 않은 것은 절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안팎의 일체 모든 경계를
다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수행심입니다.

불교 교리 의 핵심을 연기법, 인과법이라 말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공'이라 말합니다.
큰스님네들은 연기와 공을 실천키 위해
'마음 을 비워라'
'놓아라' 고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해야 연기, 공을 실천할 수 있고
어찌 해야 비울 수 있 습니까.

모두를 버리고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이 진정 비우는 것인가요?

비운다는 것은
공을 실 천한다는 것은
연기를 실천한다는 것은

내 앞에 펼쳐진 일체 모든 경계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합 니다.

지을 때는 선도 악도 모두 닦치는대로 지어놓고
받을 때 되어선 좋은 것만 받겠다고 하니
중생심이란 얼마나 교활 합니까.
괴로움은 받기 싫은데
지어 놓았으니 지은대로 자꾸 나오게 되고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하니 괴로운 것입니다.

내 앞에서 당당해 지세요.
있는 그대로 모두를 받아 들이세요.

나는 수행했으니
나는 기도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괴로움이 비켜갈 것이란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는 않으셨나요.
진정한 수행자라면
괴로움, 즐거움 이 모두를
다 받아들일 준 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당히 싸워 몽땅 녹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 수행 많이 한다고
괴로움이 비켜가 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수행심으로 괴로움에 걸리지 않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괴로움 없는 이가 아니라
괴로움에 얽매 이지 않는 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괴로움의 과보가 왔을 때
싫다고 비켜가면 그만인 듯 하지만
도리어 더 큰 과보가 되어 언젠가 내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법계의 이치입니다.

그렇기에
다 받아들이고
그 모든 경계를 다 녹여 내셔야 합니다.
내 안에서 다 녹여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용광로라 고 하지 않던가요.
그 어떤 경계일지라도 나의 참생명 주인공 속에
몰록 놓고 나면 다 녹아들게 되어 있습니다.

까 짓 하늘이 무너진다 해도,
그 어떤 경계가 두려움을 몰고 온다 해도,
묵묵히 관찰하고
다 놓고
다 비우고
다 받아들 이세요

나의 참생명은
무엇이든 다 녹일 수 있는 부처님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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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고 있는데,
사진은 벌써 가을 단풍이네요...]

28.
깨어있는 명상으로써 마음을 관하는 수행자는
방일과 근심에서 벗어나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본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 사람을 내려다보듯이



어느 날 삡팔리 동굴에서 수행을 하던 마하가섭이 아침에 탁발을 하고 돌아와 공양을 드시고 자리에 앉아 천안으로 사람과 짐승들을 포함한 일체 중생들이 어떻게 업에 따라 나고 죽는지를 살펴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 마음을 닦아 밝아졌는지, 또 어떤 사람은 얼마나 나태하고 산만한 마음으로 생을 허비하고 있는지에서부터, 어떤 사람은 어떤 인연으로 이번 생에 이렇게 부유하게 태어났으며, 또 어떤 사람은 어떤 과거생의 인연으로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지, 또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인연과 업은 어떤 과거생의 수많은 인연으로 얽혀있었는지 등에 대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연을 환히 보고자 노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가섭을 관찰하시고는 가섭 앞에 모습을 나타내시어 말씀하신다.

“가섭이여, 일체 중생들이 각자의 업에 따라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를 환히 깨달아 아는 것은 오직 붓다의 지혜에만 한계가 없다. 다른 이의 지혜로서는 중생들이 여기 저기에서 업에 따라 부모를 만나며 나고 죽는지를 다 알 수 없다. 그것을 완전히 아는 것은 네 능력 밖이다. 붓다만이 이 모든 진실을 완전히 알 수 있느니라.”

물론 가섭 또한 아라한이기 때문에 전생과 업에 대해 볼 수는 있을지라도 일체 모든 중생들의 심지어 축생들과 곤충들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을 다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과연 어떤 업 때문에 저 두 사람이 원수 지간이 되었는지, 어떤 업 때문에 저 아이들이 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업 때문에 저들은 이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거나, 이별하게 되었는지, 또 어떤 인연이기에 이번 생에 함께 결혼하게 되었는지, 또 스승과 제자가 되었으며, 주인과 하인이 되었는지 일체 모든 중생의 일체 모든 업연을 하나 하나 낱낱이 환히 알 수 있는 분은 오직 부처님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더라도 업과 인과를 어느 정도 볼 수 있는 스승들은 무수히 많이 있었지만 부처님처럼 일체 모든 중생들의 일체 모든 업과 윤회의 사실을 분명하고도 환히 알고 보는 분은 없었다. 또한 수많은 인류의 스승들이 제자들을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부처님처럼 그 무수히 많은 출재가의 재자들에게 그것도 분명한 대기설법을 통해 때로는 말 한마디로, 때로는 지속적인 수행의 주제를 내어 주고 법을 설해 줌으로써 아라한으로 이끈 이는 없었다.

경전을 보면 부처님 당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과거 전생의 수많은 인과와 윤회 이야기가 무수히 등장한다. 어떤 하나의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것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인과 이야기를 부처님께서는 설하고 계시는 것을 본다. 또한 믿기 힘들 정도로 부처님 당시에는 부처님의 설법 하나만을 가지고 수많은 이들이 때로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과를 증득하거나 또 어떤 경우는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심지어는 수십, 수백명이 동시에 아라한과를 증득하기도 하는 것을 본다.

이러한 능력은 인류 역사 속의 그 어떤 위대한 영적인 스승일지라도 가능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물론 인류 역사 속에는 수많은 스승이 등장하고, 성자가 등장하고 그들의 능력은 우리의 생각 차원을 훌쩍 넘어선다. 그러나 부처님 같은 이런 능력은 그 어떤 이에게도 없었다.

바로 이 가섭에게 한 설법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가섭이 어떤 제자인가. 마하가섭이라는 칭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부처님의 상수 제자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제자요, 선에서는 부처님의 법을 물려받은 제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 미치지 못한다. 아마도 가섭 정도의 지혜라면 인류의 수많은 성자와 영적 스승들 가운데에서도 단연 으뜸인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분 가운데 한 분이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섭의 지혜 조차 부처님의 지혜에는 이토록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부처님의 지혜야말로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무한한 것인가.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를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접하고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것은 전생부터의 선근 공덕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공부해 가다 보면 언젠가는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태어나 우리도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처럼 부처님의 법문 한 자락 끝에 저마다 깨달음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이 선근 공덕을 지어야 하고, 바로 그 선근이란 것이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다름 아니다.

방일함이 없이 깨어있는 관찰의 수행을 닦는 수행자는 언젠가 지혜의 정상에 올라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려다 볼 것이다. 어리석은 중생을 내려다 본다는 것은 한 단계 아래로 깔본다거나, 무시한다는 뜻이 아니다. 마치 정상에 오른 자가 산 아래의 대지와 사람들을 한눈에 내려다보듯이 지혜의 정상에 오른 붓다는 모든 중생들의 인과와 업과 근기 등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근기와 업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고 그에 걸맞는 수행재료를 줄 수도 있고, 저마다의 근기에 따라 깨달음으로 이끌어 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 속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부처님만 유독 수많은 중생들을 하나같이 깨달음에 이르게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깨어있는 명상이라는 마음 관찰의 수행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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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인도의 홀리 축제, 델리 기차역 앞에서]

26.
지혜가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에 게으르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값진 보물처럼
깨어있는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한다.

27.
언제나 깨어있으라.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운 이는 값진 보물을 지키듯 깨어있음의 마음 관찰 수행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방일하지 않는다. 매 순간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깨어있으며 명상의 힘을 키우는 자,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않는 자, 그런 수행자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의 차이는 깨어있음의 유무에서 온다. 지혜롭게 깨어있는 이는 매 순간 순간 세상을 향해 온 존재를 열어두고, 지금 이 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활짝 깨어 지켜본다. 그에게 과거나 미래의 잣대는 무의미하다. 과거의 판단과 기억과 고정된 관념으로 현재를 걸러서 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의 생생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비추어 볼 뿐이다.

그렇기에 지혜로운 이의 눈은 언제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가 놀랍고도 신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듯 난생 처음 만난 것 처럼 세상을 바라보고, 내 앞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모든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마주한다. 그에게 모든 대상은 ‘다만 그러할 뿐’,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며,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치우친 견해로 대상을 판단하지 않으며, 다만 중도적인 열린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뿐’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는 항상 과거에 만들어 놓은 고정관념과 편견어린 시선, 온갖 판단 분별을 잣대를 가지고 현재를 재단하려 든다. 그에게 보여지는 모든 대상은 옳거나 그르거나, 좋거나 나쁜 양자 택일의 것일 뿐이다. 극단의 두 가지 판단 속에는 언제나 괴로움과 집착이 내포되어 있다. 그에게 세상은 언제나 거기서 거기이고, 진부하고도 매일 똑같은 일의 반복일 뿐이다.

그가 보는 시선은 언제나 과거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을 보더라도 과거의 비슷했던 기억과 분별들을 동원하여 그것을 과거의 틀 속에 가둔다. 에너지는 정체되어 있고, 눅눅하며, 과거와 미래로 생각을 끄집고 다니느라 늘 힘이 없고, 빨리 지친다.

어느 날 사위성에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라 불리는 축제가 열렸다. 이 때가 되면 사람들은 자기 몸에 똥과 재를 바르고 온갖 욕설과 악담을 해 대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아마도 이 축제가 이어져 내려오면서 오늘날 인도의 홀리 축제가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의 홀리 축제는 약간 성격이 달라진 듯 한데, 각종의 물감과 진흙으로 범벅하여 온몸에 뒤집어 쓰거나 바르고, 모닥불을 피우며 노래를 부르고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오늘날 홀리는 남자에게 눌려 살던 여성이나, 낮은 계급의 지위에서 항상 당하기만 하던 사람들을 위한 날로, 평소 눈엣가시이던 상층 카스트나 남성들에게 합법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날인 것이다. 그 공격이란 것도 흉악한 것이 아니라 물감을 푼 물이나 물풍선 따위를 던지면서 장난을 치는 수준으로, 대부분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간 계급에 짓눌려 있던 이들이 모처럼의 일탈을 즐기는 수준이다.

부처님 당시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가 지금의 홀리축제처럼 이어져 내려온 것이 맞다면 아마도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축제의 성격이 순화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마도 부처님 당시의 그 축제는 주로 쌍스러운 욕설과 온갖 악담을 하는 등 그 부작용이 더 많았던 듯 하다.

이 축제 때인 일주일 동안에는 부처님을 비롯한 스님들일지라도 어김없이 소똥과 재를 맞으며 욕설과 악담을 들어야 했던 듯 하다. 그러다보니 부처님과 승단에 늘 공양을 올리던 재가신도들은 부처님과 스님들께 일주일 동안은 음식을 준비해 사원으로 미리 보내고 절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게 일주일 간의 축제가 끝나고 부처님과 스님들을 집으로 초청한 재가신자들이 부처님께 그동안의 ‘어리석은 자들의 축제’에 대해 말씀드리며 부처님을 공양에 초청하지 못했던 연유를 말씀드렸다.

이에 부처님께서는 위의 게송을 설하시며, 지혜로운 사람들은 귀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깨어있음이라는 관 수행을 실천하지만, 어리석은 자들은 축제에서처럼 악담과 욕설의 업을 지으며 깨어있지 못한 행동을 한다고 설법하셨다.
감각적인 욕망과 쾌락에 빠져들지 말고, 한 순간도 방일하지 말며 언제나 깨어있으라. 삶의 모든 현상을 관찰하여 명상의 힘을 키우는 이는 마침내 위없는 열반에 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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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상징에 불과하다.
모든 개념작용들은
환영과도 같은 공허한 헛 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태초에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개념도, 관념도, 분별도, 상징도 없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꽉 찬 충만함이 여여(如如)하게 있었다.
거기에는 아무런 시비도, 분별도, 싸움도, 좋고 나쁨도,
행복과 괴로움도, 성공도 실패도 없었다.

나아가 중생과 부처도 없고, 어리석음과 깨달음도 없고,
삶과 죽음도 없고, 인간과 자연의 구분도 없었기에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한 노력이나 수행도 필요 없고,
어리석은 이가 지혜롭게 되기 위한 공부도 필요 없고,
죽지 않기 위해, 늙지 않기 위해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일 필요가 없으며,
성공을 위해, 부유함을 위해, 승리를 위해, 해탈을 위해 달려갈 필요도 없었다.

모든 것이 완전하고 원만하며 충만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부처였고, 신이였으며, 그저 그것으로 족했다.
그것은 도저히 말로 표현될 수 없는 그 무엇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태초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그러하다.
아니 어느 한 순간 그러한 텅빈 충만이 깨어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도대체 왜 나에게는 그런 충만하고 청정한 진리의 세계가 없는가.
이 세상은 왜 이토록 어둡고 탁하며 어지러운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인가.
이제 그 실마리를 찾아 사유의 뜰을 거닐어 보자.

사람들이 좋아하는 습관은 이름짓기다.
무엇이든 거기에 이름을 짓고, 상을 짓고, 규정 짓기를 좋아한다.
이른바 상징을 만들어 내는 습성이 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에 상을 짓고,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어떤 감정에는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어떤 감정에는 ‘미움’이라는 상징을,
또 어떤 감정에는 ‘슬픔’이니, ‘행복’이니 하는 상징을 붙여 놓았다.
또 어떤 것에는 ‘부유함’을 또 어떤 것에는 ‘가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어떤 상태에는 ‘성공’이라고, 또 어떤 상태에는 ‘실패’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으며,
어떤 것에는 ‘옳음’ 또 어떤 것은 ‘그름’이라는 이름을 짓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중생’이라는 이름을,
또 어떤 존재에 대해서는 ‘부처’라는 이름을 붙여놓기도 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이름붙이고 상징화하는 습성이 있다.
그런데 이런 상징화하는 작용, 이름짓고, 상을 짓는 작용
이것이 모든 문제를 어렵게 만들어 놓는 시발점이 되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러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뭉뚱그려 ‘이런 이름’을
‘저러한 상황’들에 대해서는 ‘저런 이름’을 붙이고는 있지만
사실 그러한 이름과 그러한 상황이 정확히 일치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사랑’이라는 상징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사랑’이라는 말에 그 어떤 정해진 실체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랑이라는 말 속에는 너무나도 많은 의미가 담겨져 있고,
또 특정한 상황과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랑이 행해질 수 있게 마련이다.

아마도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사랑이 있을 것이다.
어느 한 사람이 100번의 사랑을 했다면
거기에 또한 100가지 종류의 사랑이 있을 것이다.
과연 그 많은 사랑의 상황 가운데
어떤 것만을 딱 찝어 ‘사랑’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을 받으면서 성공했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은 같은 연봉 속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도 있다.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마음이 부유하다면 성공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가진 것이 많을지라도 실패한 인생이라 자책할 수도 있다.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성공이라고, 실패라고 단정지을 수 있는가.

사랑도 미움도, 성공도 실패도, 옳음도 그름도, 좋음도 나쁨도,
부자도 가난도, 중생도 부처도, 모두가 고정된 실체가 없다.
다만 대충 이러 이러한 상황을 이렇게 이름짓기로 약속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약속이 많은 문제점을 유발시켰다.

이런 수많은 약속, 수많은 상징, 수많은 이름들은
그 어떤 기억과 감정과 찌꺼기들을 양산해 낸다.



이렇게 이름짓고, 상징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다만 어떤 상황을 접할 때 오직 순수하게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경험들은
완전히 새롭고 신선한 경험으로 분별없이,
과거의 기억에 걸러지지 않은 채로,
과거의 상징이며 이름들과 섞이지 않은 채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징과 이름을 정해 놓기로 약속한 순간부터
우리의 어떤 경험은 어떤 이름으로 붙여져 기억 속에 저장되기 시작한다.
기억 속에 저장되기 위해서는 이름이 붙여져야 하기 때문이다.
컴퓨터도 파일을 저장하려면 이름이 있어야 하고,
창고에도 물건을 저장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이름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특정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생겨난
어떤 특정한 느낌이며 감정들을 ‘A'라고 이름을 짓기 시작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 접할 수 있는 그와 비슷한 감정들은
그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똑같이 ‘A'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기 시작한다.
사실은 그것은 전혀 ‘A'가 아닌데도 똑같이 'A'로 불리는 것이다.
사랑도 똑같은 사랑이 아닌데 그저 이름은 똑같이 사랑인 것 처럼.

이것은 엄청난 문제를 초래한다.
이제부터 우리의 인생은 꼬이기 시작하고, 따분해 지기 시작한다.
이름을 붙여 놓고 나면 곧 그것은 기억 속에 저장되게 된다.
특히나 저장될 때는 그 과거의 기억에 빗대어
좋거나 싫다는 둘 중 하나의 감정이 자동으로 섞인다.

그리고 그 기억은 그것과 비슷한 또 다른 상황을 만나게 될 때
자동적으로 튀어 나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기억 속에 담겨진 이름으로 걸러서
판단하고 분별하게 만든다.
전혀 새로운 상황을 예전의 그 상황으로 한정짓고야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삶은 고리타분하고 따분하며 진부한 삶으로 전락하고 만다.
전혀 새롭고 신선한 매 순간 순간을 늘상 그저 그렇고 새로울 것 없는
따분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이라면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될 때 과거의 ‘사랑’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되고
그 과거의 ‘사랑’이 아프고 ‘싫은’ 것이었으므로
새로운 사람과의 새로운 사랑을 새롭게 마주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서 해석을 하게 된다.
그 사람에게 사랑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과거에 해 보았던 기억과 그 기억에 담긴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 새롭게 마주한 사랑의 상황에 대해서도 똑같은 해석과 전제를 깔게 된다.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나타난 상황과 사람에 대한 폭력이며 억압이다.
그것은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보지 못한 채 놓치고 있는 것인가.

이처럼 예전의 기억이 좋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좋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졌다가
훗날 새로운 비슷한 상황을 맞을 때 똑같이 ‘좋다’고 해석하게 되고,
‘나쁘다’는 관념으로 저장되어 있던 상황들은
또 다른 상황을 맞을 때 ‘나쁜 상황’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제부터 모든 상황은 과거의 기억으로 걸러지고 해석되게 된다.
과거로 걸러지면서 그것은 좋고 나쁜 두 가지 감정으로 한정되고 만다.
과거의 기억에는 언제나 그 기억이 가졌던 감정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큰 실수며, 오류인가.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오류인지를 모른다.
아니 그것이 옳다고 느끼고, 정당한 해석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내 생각이 옳고, 내 감정이 옳다고 고집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면서 사람들은
매 순간 순간 전혀 새롭고 신선한 경험들을
새롭고 경이롭게 체험하고 경험하지 못한 채
과거의 기억과 감정에 얽매여 아집에 사로잡힌 해석을 가하게 된다.
그러면 세상은 새로운 곳이 아니다.
매 순간 순간은 과거의 연장이며, 과거의 속박 밖에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된 수많은 감정들 가운데
과거의 경험에 빗대로 ‘좋았던’ 감정을 ‘행복’이라고 이름 짓고
계속해서 그 좋았던 행복의 감정을 추구하고 집착하게 된다.
물론 반대로 과거에 ‘나빴던’ 감정은 회피하고 멀리하려고 애쓰게 된다.



우리의 욕망이나 집착의 실체가 바로 이런 것이다.
욕망과 집착은 과거의 잔재이며 기억된 감정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이렇게 욕망하고, 욕망한 것을 얻어 내는 방법으로 행복을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욕망을 채워나가는 방법으로는
언제까지고 욕망을 끝낼 수는 없다.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는 결코 욕망을 끝낼 수 없다.
욕망이 생겨나게 된 전체적인 마음의 작용을 전체적으로 사유하고 깨달아
욕망이라는 것이 허망하게 일어났으며, 허망하게 끝날 것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볼 때 욕망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버리기 위해서는
‘아상’과 ‘아집’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내가 만들어 놓은 ‘상’ ‘상징’에 얽매여
그러한 상에 집착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욕망의 문제를 끝장낼 수 없다는 것이다.

욕망을 채우겠다거나, 욕망을 없애겠다는 생각 모두 또 다른 욕망일 뿐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일어나는 방식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욕망을 채우겠다는 것이 중생이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이라면,
욕망을 없애고 초월하겠다는 것은 부처라는 상징에 얽매여 있는 것일 뿐이다.
부처라는 상징도, 중생이라는 상징도
모두 다 하나의 만들어진 상징일 뿐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욕망과 집착과 아상의 전체적인 이해와 사유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위해 피나는 수행으로 욕망을 버리려 해서도 안 되고,
욕망을 채워 나가겠다는 생각도 안 된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그것은 욕망을 채우거나 끊는 문제로 다가설 것이 아니라,
욕망 그 자체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실마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전체적인 과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관찰하되,
그 어떤 시비분별도 옳고 그르다는 판단도 없어야 한다.

다만 매 순간 순간 내 앞에 펼쳐지는
모든 상황을 좋거나 싫다는 분별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전체적으로 자각하여 바라볼 때
욕망의 본래 성품을 바로 보게 될 수 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났다.
우리의 습관은 순간 과거의 어떤 비슷한 상황과 기억으로 쏜살같이 달려 갈 것이다.
그리고는 번개처럼 이 상황이 좋은 상황인지 나쁜 상황인지를 판단 해 낼 것이다.
그것이 좋은 감정이라고 판단이 되면 그 상황에 집착할 것이고,
나쁜 감정이라고 판단되면 그 상황을 회피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모든 과정이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조금만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모든 과정을 낱낱이 돌이켜 관조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애써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릴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면 된다.

바라보다 보면 순간 좋게 보거나 나쁘게 보는 습관이
나를 지배하게 되는 순간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작용을 지켜보게 되면 좋거나 나쁘게 보는 틀이
깨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온전히 보면
매 순간 새롭고 신선한 삶이 내 앞에 펼쳐진다.
온전히 바라보면
욕망을 없애려고도 채우려고도 하지 않은 채
욕망이라는 이름조차 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랬을 때
내 앞에 펼쳐지는 지금 이 순간이
다시금 태초의 텅 빈 고요로써 되돌아 옴을 느낀다.
본래 아무 일도 없었음을.



[사진 : 강화도 적석사 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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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바라볼 뿐!

삶과 명상 이야기 2009/08/31 09:27 Posted by 법상







우리는 평소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각종의 느낌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흘려보내게 되고,
그렇게 흐르게 되면 좋은 느낌에는 애욕과 탐심을
싫은 느낌에는 증오와 진심을
또 좋지도 싫지도 않은 느낌은 방치함으로써 어리석음을 일으키게 되고,
그런 과정은 이윽고 애욕과 집착, 삼독심의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 결과 무수히 많은
좋고 싫은 등의 관념 혹은 편견의 틀을 형성하게 되고
그렇게 형성된 관념을 뭉쳐진 실재적 개체로 인정하게 되어
거기에 '나'라는 관념을 개입시켜 '나'를 실체화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나다' '내것이다' '내가옳다'라고 하는 아상(我相)인 것입니
다.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접촉하고 생각하는
'나'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는 상(相)은 돌이켜 생각해 보았을 때,
각종의 '느낌'을 놓침으로 인해 연이어 애욕과 집착이 일어나고
여기에서 오는 물질적 정신적 인과 작용의 끊임없는
순환작용에 불과한 비실체적 허상에 불과합니다.
부처님의 근본교설에서의 '무아(無我)' 개념 또한 이러한 연유입니다.

이렇게 형성되어진 '나'라는 관념에서 시작되어
다시금 무수한 분별과 편견, 새로운 관념이 끊임없이 펼쳐집니다.
자신의 편견과 관념들을 고집하여 사실이라 받아들이지만
그 관념이란 우리들 습(習)으로 무장된 헛된 관념에 불과합니다.

가만히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모든 대상을 고요히 바라보십시오.
관(觀)함에 있어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관념이나
생각의 늪에 빠지면 안됩니다.
떠오르는 분별과 생각으로 대상을 관찰해선 안됩니다.

관을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관념과 생각이 게재되지 않는 순수한 주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관념이나 생각이 게재되면 또 다른 관념만을 만들어 낼 뿐입니다.
마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사람처럼
저마다의 관념의 틀에 세상을 대입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법당에서 '목탁'을 보여주며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편견없이 보라는 주문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전의 경험과 기억, 관념을 목탁에 투사하여
자신의 관념대로 목탁에 대한 분별을 이야기 합니다.
'목탁이다', '소리나는 나무다', '둥글고 속이빈 소리나는 통이다' 하며
애써 편견없이 보려 하지만
우리네 관념의 틀은 너무나도 깊숙히 개입이 되어 있음만을 증명해 줄 뿐입
니다.

목탁을 바라보는 순간 좋고 나쁜 분별 또한 일어납니다.
불교신자이며 목탁이 친근한 이라면 좋다는 느낌을
또 타종교 신자라거나
심지어 산골자기에서 자라 목탁채로 맞으며 자란이가 있다면
싫은 느낌이 앞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의 순수한 시각에서 목탁을 바라본다면
'나무'라는 관념도, '소리'난다는 생각도
'둥글다' '속이 비었다' '좋다' '싫다'라는 관념도 없을 것입니다.

이렇듯 이전에 만들어 오던 고정된 관념을 빼고 사물을 바라보면
바라보는 그 순간의 느낌은 고요할 것입니다.
다만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뿐'입니다.

소리를 들어도 좋고 싫음이 아닌 그저 '들릴 뿐'
무엇을 보아도 그저 '바라볼 뿐'
냄새를 맡아도 그저 '냄새날 뿐'
이와 같이 육근의 모든 감각기관은 오직 '할 뿐'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만나는 직장의 상사를 만난다거나
가족이며 친구를 만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쁜 상사' '싫은 친구' '좋은 사람' 하는
이전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 놓은 관념으로 상대를 대하기 때문에
늘상 관념의 늪에 빠져 그 대상에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만나면 행복하고
싫은 사람 만나면 괴롭고
그렇듯 대상에 내 마음이 놀아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설령 미워하던 사람이 좋은 마음으로 일을 했더라도
내 마음의 편견 때문에 그렇게 쉽게 칭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전에 만들어 두었던 관념에 빠져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그저 일체의 모든 사물, 사람, 대상을 바라봄에
오직 고요할 수 있어야 합니다.
텅 비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고 담을 수 있도록
그런 열린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미워하던 사람, 싫어하는 음식, 도저히 못 할 일, 내 능력 밖의 일...
이 모든 것들은 오직 어설픈 관념일 뿐입니다.
놓아 버렸을 때 잡히지 않던 일체를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어설픈 관념을
현실로까지 가져와 투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삶에는 오직 '지금 여기'라는 현실만이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 만들어 두었던 관념의 틀은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묶어두는 관념의 사슬이며
그로 인해 우리는 괴로움을 느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라는 현실에서 떠오르는 생각, 관념
그 자체의 '현상'은 현재의 실제이지만
그 관념과 생각을 파고 들어가보면 이미 그것은 공(空) 그 자체입니다.
거짓된 분별이며 인연따라 만들어진 허상일 뿐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그 순간 몸과 마음의 '현상' 그 자체가 가장 참된 진실에 가깝습니다.
이미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은
텅 빈 거짓 관념일 뿐 더 이상 진실일 수 없습니다.
거짓된 허상을 붙잡고 늘어져 봐야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가까운 참된 실재' 그 자체가 수행의 대상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지금 여기'라는 '보다 가까운 실재'에 집중해야 합니다.

관찰하는 순간 미세하게 끼어드는
과거 혹은 미래로부터 오는 일체의 무수한 관념을
그저 순수한 객관이 되어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녹여야 할 것입니다.

관념의 틀은 '나다' 하는 아상과 아집(我執)을 형성하지만
관수행은 관념의 허상을 바로 봄으로써
관념의 소멸, 아상의 소멸, 아집의 소멸을 돕습니다.

'진리'는 생각이나 관념 속에 있지 않고,
오직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 속에 있습니다.

오직 대상인 '현상'과
현상에 대한 고요한 '관찰'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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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의 낙조]

우리의 삶에서
마음 씀씀이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공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같은 조건 속에서도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떤이는 지옥이 될 수 있지만
어떤이는 천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사람이
참으로 당당한 수행자입니다.
내 마음인데 내가 자유롭게 써야지
다른 경계에 이끌린다면 그건
내 마음 떳떳한 주인공이 아닌
노예의 나약한 마음일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자유롭게 쓰는 방법,
'마음 돌리기'의 가르침을
깨우치게 된 작은 인연이 있었기에
적어 볼까 합니다.

한번은 논산 군법당 법회에 참석키 위해
은사스님을 모시고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습니다.

법회 시간은 다가오는데
갑자기 차가 밀리기 시작하는데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하던지
조금만 더 밀리면 법회에 늦을 것 같았습니다.
약 5000명의 장병들이
은사스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있을 것을 생각하니 더욱 걱정이 되었습니다.

이런 내 마음과는 다르게
큰스님은 시종 편안하셨습니다.
그러더니 '허허'하고 웃으시면서
"법계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우렁차게 설법하라고 밥때를 챙겨주시는구나"
하시며 밥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항상 만행중에는 도시락을 싸서
다녔지만 시간이 모자라 못 먹고 굶을 때가
다반사였답니다.

그러시고는
"법상아!
수행자는 법계를 써먹을 줄 알아야 되는게야..
일체 법계가 나를 도와주는 도리를 알아야 하는게지.

마음을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그 어떤 경계도 나를 도와주는 부처님의
나툼이 될 수 있는게지...
마음을 돌리고 나면
모든 것이 내편이야..."

큰스님의 벽력같은 말씀에
조금씩 조바심나는 마음을 돌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안해 졌습니다.

그리고 빨리 가야한다는 착을 놓아버리고
밀리는 도로사정에 대해서도
공양하라는 것으로 마음을 돌리고 나니
이내 고요해졌습니다.

옆에 계시던 보살님께서,
10여년 스님을 모시고 다녔지만 한 번도 차가 막혀
법회에 늦은 적이 없었으니
걱정 안해도 될 거라며
안심을 시켜 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공양을 끝내었는데...
거짓말처럼
차가 뻥 뚤리는 것이었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하하 웃으시며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우리 제자들 공부시키라는 법신 부처님 나툼이라며..
그렇게 소탈한 웃음을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돌려
'착'되는 마음을 놓아버리면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께서 법계에 나투어
그 고요하게 놓여진 마음이 시키는대로
그저 그렇게
여여하게 되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너무도
맑고 향기롭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계에서도
마음을 돌리고 나면
모두가 부처님의 나툼이라는
소중한 가르침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눈물이 나도록 은사스님이 높아보였습니다.
스님을 향한 감사의 예를 마음속으로
가만히 드려 보았습니다.

그 어떤 외부 경계도
경계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바로 '내 마음'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꾸어야 할 것은 그 외부의 '경계'가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인 것입니다.
내 마음 돌리면 모두가 천상입니다.
내 마음 돌리면 모두가 행복입니다.

마음 돌리기...
수행자의 당당함이
여기에서 나오는 듯 합니다.

까짓거 하는 일이 잘 안되더라도
부처님께서 더 잘하라고 채찍하시는구나
하고 마음을 돌려 보면 어떨까요?

잘 안 되는 속에 잘 되어짐이 있고
괴로움 속에 행복해질 수 있는 너른 길이 있고
답답함 속에 훤칠하게 뚫려 있는 확연함이 있음을

안 되는 것도 되기 위해 안 되는 것임을

그렇게 믿고 맡기며
내 안에 있는 부처님 참생명
주인공 자리에
모든 것을 내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 공양이 최고의 공양입니다. "아무리 일이 잘 안 풀리더라도
그것에 화를 내고 분별심 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좋은 쪽으로 마음을 잘 돌리면
모든 일이 풀리게 되어 있는게야...
법계는 그런 사람을 위해 돌아가기 마련이지..."

은사스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약해 질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을 잘 써먹으라는 말씀이십니다.
우주 법계의 주인이 되라는 말씀이십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누님에게 남동생이 크게 다쳤다고 연락이 왔었습니다.
턱뼈가 부러지고 이빨이 나가는 바람에
약 8주의 진단이 나오고 치료비용도
약 2천 만원이 넘게 들것이라고 하며 걱정이었죠.

부모님이 얼마나 걱정하실까 하여
위로를 드리려고 전화를 했답니다.
당연히 망연자실하여 괴로워하실 것을 염려하였으나
전화를 드리자 오히려
나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고 하시며
우리 아들 법사님이 기도해 준 덕분에
그나마 더 잘못될 수 있을 것이 이 정도였다고 하시며
꿈 이야기를 들려 주셨답니다.

그저 동생이 다치던 날 꿈에 내가 나타났더라고 말입니다.
스님이 된 이후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날 마침 꿈에 나타난 것이
동생을 구하려고 한 것이었으리라고 믿으시며
그나마 이 정도인 것에 대해
부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짓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어머님의 전화를 끊고
참으로 얼마나 감사드렸는지 모릅니다.
관세음보살님의 나툼도 이럴 수 있을까 하며...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신 어머님이시지만
마음만은 이렇게도 순수하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런 마음을 내지 않고 걱정하시며
가만히 잘 있을 놈이 다쳐 왔다고 한탄을 하며
괴로워한다면 부모님의 마음은
상대적으로 지옥인 것이지만
이렇게 마음을 돌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을 자꾸 연습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같은 경계가 닥쳐도 그것에 꼼짝 못하고 이끌려
마음을 빼앗기고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경계를 돌려서 내가 주인이 되어
슬기롭게 이겨내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가 우주 법계의 주인이 되어
그 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인연생기한 무상한 경계들을
주체적으로 이끌고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거대한 우주의 인연의 고리에 이끌려
노예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중대한 문제인 것이지요.

마음을 돌리면 인생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모든 경계에 나의 마음을 올바로 돌리면
모든 경계가 수행의 재료가 되고 ,
나를 도와주는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처럼
인생에 있어서의 길흉화복은 언제나 바뀌게 마련입니다.
또한 지금 당장에는 불행이라 느끼는 것도
마음을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보다 낳은 행복을 위한 과정이 되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조건 속에서도
마음 닦는 이의 마음은
언제나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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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깨어있음

21.
깨어있음은 영원의 길이며
깨어있음에 나태한 것은 죽음의 길이다.
바르게 마음을 관(觀)하여 깨어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지만
마음이 집중되지 않아 깨어있지 못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

22.
이러한 진리를 온전하게 깨달아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관하는 수행자는
그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法悅)을 누린다.
그는 언제나 성스러운 깨달음의 길 위에 서 있다.

23.
언제나 굳은 의지력으로 깨어있음의 명상을 수행하며
매사에 주의 깊은 자각으로 평화와 선정을 성취하나니
이러한 현자는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깨어있음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삶의 방식이요 영원한 동반자다. 삶 속에서 매 순간 순간 깨어있다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의 삶을 100% 완전하게 살고 있다는 뜻이다. 깨어있는 순간은 영원히 사는 순간이지만, 깨어있지 못한 순간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허비하고 있는 것일 뿐. 그것은 죽음과 다르지 않다.

깨달음이 거창한 어떤 것이거나, 수행을 통해 결과적으로 얻어야만 하는 성취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모든 순간에 일어나며,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다. 깨달음이 완성된 순간만 깨달음이 아니라, 마음을 바로 집중하여 현재를 관함으로써 깨어있는 자에게는 모든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 된다. 그는 순간 순간 깨어있음 속에서 법의 즐거움을 누린다.

삶은 매 순간 완성되어 있다. 모든 순간이 완벽하다. 그 어떤 깨달음의 달성과 성취를 위해 미래로 달려가는 일은 수행이 아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깨어있음이 곧 깨달음이며, 깨어있음의 순간이 바로 내 삶의 최고의 순간이요, 완성된 순간임을 바로 아는 지혜가 깨달음을 찾는 불가의 오래된 방법이다.

깨어있음이란 마음을 과거나 미래로, 혹은 다른 어떤 장소로 뛰어다니게 하지 않고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몸과 마음을, 느낌과 생각과 욕구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핵심이다. 다만 관하되 분석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만 보는 것, 그것이 바로 깨어있음의 수행이다.

끊임없이 삶을 관하라. 몸과 마음을 관하라. 처음에는 마음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관하려고 하면 계속해서 마음이 이리저리 원숭이처럼 날뛸 것이다. 과거로 갔다가 미래로 갔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로 갔다가, 끊임없이 날뛰느라 한 순간도 마음을 고요히 지켜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더라도 굳은 의지력을 가지고 마음을 관하라.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아 지금 여기로 돌아오라. 의지력과 주의 깊은 자각으로 삶을 관하는 깨어있음의 순간이 길어지다보면 조금씩 깨어있는 순간의 평화와 고요를 나아가 선정과 삼매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는 모든 속박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저 자유로운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코삼비국의 왕비인 사마와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시종을 통해 전해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국왕의 다른 왕비인 마간디야가 사마와띠를 질투해 부처님과 불결한 내통을 한다거나, 왕을 독살하려 한다거나 하는 등의 음모를 꾸몄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결국 왕비의 궁에 불을 질러 사마와띠를 죽게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세 번에 걸친 마간디야의 음모와 살해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죽기 직전까지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마음집중의 관수행을 통해 깨어있음을 지켜나갔고, 죽음의 순간에도 불길에 휩싸인 궁 안에서 당황하지 않고 이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며 깨어있음의 좌선수행에 마음을 집중함으로써 결국 죽음 직전에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었다.

사마와띠의 죽음을 안 국왕은 마간디야의 짓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발뺌할 것을 알고 ‘아, 이제야 안심이다. 그동안 사마와띠가 나를 죽이려 하여 공포에 떨었는데, 누군가가 이런 왕의 근심을 알고 대신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이 일을 한 사람과 도운 사람들을 모두 찾아내어 큰 보상을 하겠다’고 묘수를 썼다. 이에 마간디야와 그의 친척들이 궁으로 몰려들어 자신의 소행임을 밝히자 왕은 그들을 모두 처참히 죽여 버렸다.

이러한 사건이 세상 뿐 아니라 비구스님들 간에도 화제가 되자 부처님께서 사마와띠와 그 궁녀들이 왜 불에 타 죽게 되었는지 그녀들의 전생을 말씀하셨다. 그들은 전생에 왕비와 궁녀로 물놀이를 갔다가 따뜻한 불을 쬐고 싶어 근처의 작고 허름한 초막에 불을 붙였는데, 마침 그 초막이 왕의 존경을 받는 빳쩨까붇다라는 수행자가 선정에 들어있었다가 화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왕비와 궁녀는 그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면 큰 벌을 받을까봐 아예 빳쩨까붇다를 화장시켜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보에도 불구하고 사마와띠는 이번 생에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어있음의 수행을 의지력을 가지고 꾸준히 했기 때문에 죽는 순간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렇기에 사마와띠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위의 게송을 설하셨다.

이처럼 깨어있는 수행자는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깨어있음 속에서 법열을 누리고, 마침내 저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열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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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하착(放下着), 놓아버림

연기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이거나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일 뿐이다. 존재도 존재가 만들어내는 현실도 모두가 인연 따라 잠시 만들어졌다, 머물고 변화하며 결국에는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존재는 생주이멸하며, 인간 또한 생노병사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연기적인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붙잡을 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인연 따라 잠시 내게로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는다. 내 것이라고 붙잡아 집착하고 나서는 인연이 다해 그것이 소멸될 때 괴로워하며 아파한다. 언젠가 떠날 것이 분명하다면 붙잡아 집착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붙잡는다.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이 어쩌면 끊임없이 내 것으로 붙잡아 집착함으로써 ‘내 소유’를 늘려 나가는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붙잡을 것이 없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붙잡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괴롭다. 붙잡는 것은 결국 괴로움을 남길 뿐이다. 그렇지만 도저히 붙잡는 것을 멈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은 집착에서 온다. 허망하여 꿈같고, 신기루 같으며, 환영 같은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하는데서 모든 인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모든 괴로움을 소멸시키고자 하는가. 그렇다면 집착을 놓으라. 내 것으로 붙잡으려는 모든 소유와 집착의 대상을 해방시켜 주라. 행복은 집착을 놓아버리는데서 온다.

연기법이 끊임없이 설하고 있는 사실이 바로 집착할 것이 없다는 자각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을 내 것이라고 붙잡으면 남는 것은 괴로움 뿐이다. 연기적인 삶이란 방하착이요, 집착을 버리는 삶이다. 인연 따라 잠시 생겨난 것은 인연이 다하면 사라질 뿐이니, 오면 오는대로 받아들이고 가면 가는대로 받아들이되,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놓아줄 수 있어야 한다. 인연 따라 오면 오는 대로 받아들이고, 인연 따라 가면 가는 대로 받아들이라. 온다고 좋아할 것도 없고, 간다고 슬퍼할 것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그렇게 왔다가 그렇게 가는 것일 뿐이다.

오고 가는 모든 것을 허용하라. 내 존재 위를 잠시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 내버려두되 어떻게 오고 어떻게 머물다가 어떻게 가는지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지켜보았을 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는 지혜가 생겨난다. 지켜보았을 때 본래 머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 모든 것들이 나를 스쳐 흘러갈 수 있도록 나를 활짝 열어주라. 세상의 모든 여행자들이 잠시 왔다가 몸을 쉬어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도록 자비로운 객사(客舍)가 되어 주라. 세상 모든 존재가 잠시 들러 쉬었다 떠날 수 있는 간이역이 되라. 내게 와서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 말라. 종착역으로써 나에게 오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 그 어떤 존재도 나에게 종착할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모든 것은 잠시 머물다가 떠날 뿐이다. 그것을 거역하지 말라. 잠시 왔다가 가야할 때가 되면 떠나게 내버려 두라. 수행자에게 방하착, 놓아버림이야말로 모든 괴로움을 여의는 축복 같은 선물이다.




관, 깨어있는 관찰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연기법이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셨는가. 이 세상이 상의상관적으로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어떻게 깨닫게 되셨을까.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철저한 관찰, 관조(觀照)에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세상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치우침 없는 관찰에 있다. 이 세상의 이치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치우침 없는 시선으로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관행(觀行)이 필요하다. 뒤에서 팔정도와 사념처에서 별도의 설명이 있을 것이므로 여기에서는 간단한 소개만을 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연기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지만 설명만으로는 연기법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실천할 수도 없다. 연기법이 그대로 내 삶의 방식이 되고, 내 삶이 고스란히 연기법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알음알이나 지식만을 가지고는 부족하다. 연기법에 관한 몇 백 권의 책을 낸다고 해도 읽는다고 해도 연기법을 깨닫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해서는 철저한 수행이 필수적이다. 불교적인 깨달음, 연기의 깨달음은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천 수행으로써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하지 말라. 불교의 수행이라는 것은 고도의 정신적인 능력이 있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실천되어질 수 있는 고난이도의 고행이나 묘기가 아니다. 아무리 똑똑한 지식인들이라도 한 발조차 내딛지 못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아무리 공부에는 관심이 없는 자일지라도 성큼 성큼 앞서갈 수도 있다. 연기법을 깨닫기 위한, 지혜에 대한 깨달음을 위한 수행은 바로 관(觀)에 있다. 관 수행이야말로 나와 내 밖의 우주에 대한 지혜로운 통찰을 가져다 준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쉬운 일인가. 그러나 이것은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내식대로 왜곡해서 보고 편견과 선입견을 투영해서 본다. 똑똑한 지식인일수록 오히려 현실을 바라볼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온갖 지식과 견해라는 색안경으로 투영해서 보기 쉽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사람, 순수한 사람일수록 왜곡해서 볼 내 안의 견해와 판단이 없다. 옳고 그른 것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자기만의 가치관이 뚜렷하거나, 세상 일을 판단해 낼 수 있는 가치판단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에 빠져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편견과 선입견, 지식과 아집이야말로 이 공부에서 버려야 할 첫 번째 것들이다.

아무런 편견과 선입견도 없이, 순수하게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라. 난생 처음 바라보는 것처럼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옳고 그르다거나, 선악이라거나 하는 일체의 분별을 비워버리고 다만 지켜보기만 하라. 한 번도 지켜본 적이 없는 것처럼 내 몸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내 마음과 느낌, 감정들을 지켜보라. 세상에 처음 태어나 첫 호흡을 내쉬는 갓난아이처럼 천진한 비춤으로 호흡을 지켜보라. 나와 내 밖의 세상이 어떻게 마주치며, 접촉하고, 느끼고, 흘러가는지 다만 바라보기만 하라.

바라보는 것에 그 어떤 이름도 붙이지 말라. 관 수행이라거나, 위빠싸나라거나, 지관이니 정혜(定慧)니 하는 모든 이름을 지워버려라. 관 수행을 통해 연기법을 깨닫겠다는 생각도 놓아버리라.

내가 수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 이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람, 수행이 잘 되고 있다는 혹은 잘 안 된다는 모든 착각을 버리라. 그리고 다만 분별없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바라보기만 하라. 바라봄, 깨어있는 관찰, 알아차림, 지켜봄, 비추어 봄, 관, 주의집중, 마음모음, 그 어떤 용어에도 걸리지 말고 다만 바라볼 때, 연기가 드러난다. 온 존재가 연기를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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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의 명상수행

삶과 명상 이야기 2009/07/31 07:12 Posted by 법상




[보물 제833호 기림사 대적광전의 비로자나부처님입니다. 이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중심으로 왼쪽에 보신인 노사나불 오른쪽에 화신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으며 삼존부처님은 현재 보물 제958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수인은 지권인으로 부처와 중생 무명과 지혜가 둘이 아닌 세계를 상징하고 있으며, 온 우주법계 일체 모든 존재가 그대로 부처님 참생명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부처님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바로 '이 순간' 나의 삶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나의 참생명
부처님 생명이 성성히 깨어 있는 깨침의 순간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다시금 이곳 현실까지 불러들여
집착하고 얽매일 필요가 없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괴로움으로
지금 현실을 괴롭힐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앞에 떨어진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재, 바로 지금만이 있을 뿐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부딪히는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가 실제로 부딪히는 것은 과거도 아니요 미래도 아니요
오직 바로 지금이라는 현실일 뿐입니다.
평생을 살더라도 과거를 살 수도, 미래를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는 괴로움의 마음은
이미 지난 과거에 얽매이는 마음과
오지도 않은 미래에 얽매이는 마음이 대부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순간 완벽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식들이 말하길
"배고플 때 먹고, 배부르면 싸고, 졸리면 자고 하는 것이 바로 道이다.
평상심이 곧 도이다."라고 했습니다.
현재심을 올바로 가질 것을 경책하는 말입니다.
바로 현재를 올바로 사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배고플 때 오직 먹기만하고,
졸리면 온전히 자기만할 수 있다면 참된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행위에 충실히 온전히 온 힘을 기울여 살아가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는 밥 먹는 데에 온 힘을 기울여
온전히 밥 먹는 것에 집중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배고플 때 밥만 먹는 것이 아니고
밥먹으며 딴 생각하고 딴 짓하고
밥 먹는 한 순간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합니다.
겉 모습은 똑같이 밥을 먹고 있더라도
이렇게 수행자와 비수행자의 내면 세계에서는 커다란 차이점이 나는 것입니다.

틱냩한 스님은 말씀하시길
"설거지를 위한 설거지"에 대해 말씀하시며
설거지를 할 때에 오직 설거지만 할 수 있다면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릇을 깨끗이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설거지를 하기 위해 설거지를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하기 싫고 짜증나는 일이 있게 마련입니다.
청소하기 싫고, 설거지 하기 싫고, 일하기 싫고, 공부하기 싫고,
수행하기 싫고, 절하기 싫고, 남편 뒷바라지 하기 싫고...
이러한 일을 행할 때는 반드시 그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빨리 빨리 청소나 설거지를 하고 쉬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면
마음이 짜증나고 싫고 빨리 끝내려는 마음만 앞서게 됩니다.

이렇게 청소, 설거지를 끝내고 나면
다만 깨끗하다는 결과만 우리에게 남게 됩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마음으로 했으니 얼마나 깨끗할까요.
그러나 청소를 위해 청소를 한 수행자는
그 행위 속에 수행의 힘까지 남게 됩니다.

청소를 하며 마음을 집중하고 청소하는 그 마음에 온 힘을 기울였기에
청소 그 자체가 수행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청소하는 그 순간 이 사람은
온전히 깨어 있는 것이 되고 방하착 한 것이 됩니다.
빨리 하고 나서 쉬어야지 하는 게으른 마음이 놓여졌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것, 공부하는 것, 수행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공부할 때 공부를 위해 공부를 해야지
대학가기 위해 공부를 한다면
공부하는 순간의 마음은 조급하고 공부에 충실할 수 없게 될 수 있습니다.
오직 대학합격이라는 오지도 않은 미래에 생각이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그렇게 빼앗기면 그만큼 공부하기가 힘들어 집니다.

일을 할 때
빨리 시간이 지나길 바라는 마음에 퇴근할 시간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일에 대한 보답으로서의 봉급에만 마음이 머문다면
우리는 돈은 벌 수 있을지언정 진정 깨어있지 못하게 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 그 자체를 위해 절하는 그 순간, 염불하는 그 순간이
그때 그때 목표가 되어 그때 그때 현실에 충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빨리 수행해서 성불해야지 라든가
빨리 수행해서 복많이 짓고 편한 삶을 살고 집안이 편안해야지
라는 생각으로 수행하고 절하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빠른 시일안에 수행의 결과를 바라게 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부처님을 원망하며
심지어 원하는 데로 되지 않았을 때 개종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수능 시험이 끝나고 잘되면 내탓
못되면 부처님 탓을 하는 사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집에서 남편 뒤 바라지, 자식들 뒷바라지를 할 때에도
오직 그때 그때 내가 가족들에게 행하는
그 뒷바라지 자체에 충실할 일입니다.

뒷바라지 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남편이 승진을 못할 때, 자식이 대학에 떨어질 때,
자신에게 잘 못해줄 때 괴로움이 따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뒷바라지 하는데 하는 상(相)이 있으면
자식이나 남편이 내게 서운하게 대할 때면 괴로워집니다.
오직 남편, 아내, 자식, 부모님을 부처님으로 여기고
부처님 시봉하듯이 현실, 현실을 충실히 시봉하면
그것이 바로 수행인 것입니다.

이렇게 수행은 가정에서 사회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일체 모든 사람들을 부처님 처럼 모시며 시봉하면서
해 나가는 것이지 절에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고
집에서 직장에서 일상에서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집에서 남편을 대할 때, 자식, 부모님을 대할 때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 시봉한다는 마음으로 현실 현실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크나큰 수행임을 알아야 합니다.

집에서 행하는 사소한 일상 하나 하나,
예를 들면 설거지하는 것, 청소하는 것, 밥 먹는 것, 잠자는 것, 책 읽는 것,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 부모님 모시는 것, 친구들 만나는 것,
회사에서 일하는 것, 친구들과 모여 술마시러 가고 노래방가서 놀고 즐기는
그 속에서도 내가 행하는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며
그때 그때의 현실에 충실할 수 있다면
이 모든 일상의 일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활 수행인 것입니다.

절에서 애써서 절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수행인 것입니다.
이처럼 수행하는 삶은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며,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고 가장 큰 힘이 됩니다.

이제 현실에 충실하는 그 실천의 문제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현실에 충실한 다는 것은 완벽하게 현실을 깨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실에 집중하여 마음을 다른 곳으로 빼앗기지 않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습니다.

또한 현실을 올바로 집중한다는 것은
항상 현실의 마음과 행동 하나 하나를 관찰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觀)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곧 집착을 놓고 살아가는 방하착(放下着) 수행을 의미합니다.

올바로 관할 수 있을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착(着)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괴로운 마음이 생길 때 그 마음에 얽매이면
우리는 이미 그 실체가 없는 괴로움에 노예가 되어
내 마음을 빼앗겨 버리며 한없는 괴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 괴로운 마음이 일어날 때
일어났다는 것을 올바로 관찰하고 방하착하면
그 마음은 이미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지눌스님은 수심결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망상이 일어남을 두려워 말고 알아차림이 더딜까 두려워하라.
망상이 일어나면 곧 알아채라.
알아채면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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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산방한담 2009/07/26 08:05 Posted by 법상


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많이 포근해 졌다. 그리고 벌써 이렇게 들녘엔 새봄을 맞이하는 꽃들이며 봄나물이 한창이다.

이렇게 세월은 하루가 다르게 흘러가는데 내 속 뜰의 공부는 얼마만큼 그 흐름에 부응하며 보내왔는지… 하루 이틀, 한 시간, 일분, 일초 이렇게 흐르는 시간을 너무 쉽게 소모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날이 갈수록 단순한 아쉬움에 그치지 않고 좀 더 뻐근한 가슴앓이로 다가온다.

이 소중한 기회 이 소중한 순간을 놓쳐버리면 다음 순간이란 그다지 소중하지 못하다. 이 순간, 내게 주어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이 생에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되어야 한다.

백일 천일 공부할 것도 없고, 전생 공부 인연 논할 것도 없으며, 다음 생에도 이 공부인연 이어지기를 구할 것도 없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가 그렇게 찾던 '바로 그 순간'임을 알아야 할 것.

우리는 끊임없이 바라고 또 바란다. 돈을 벌기 바라고, 지위가 오르길 바라고, 성공하기 바라며 계속해서 무엇인가 이루길 바란다. 그러나 바라는 순간 그 마음은 '지금 여기'에 없다.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지금 이 순간을 최선으로 살아가는 길이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내가 바라던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진 순간이 되어야 한다. 자꾸 어디로 가려고 애를 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우린 이미 도착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밥 먹는 그 사소한 일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의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밥 빨리 먹고 나서 일 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오직 밥 먹는 그것이 그대로 목적인 것이다. 밥 먹는 순간 온전히 밥만 먹는 것이다. 밥 먹으며 다른 생각하고, 미래를 계획하고, 과거를 떠올리며 그렇게 번잡하지 않고, 오직 밥만 먹어야 한다.

밥을 먹는 순간, 일을 하는 순간, 걷는 순간, 대화하는 순간, 매 순간 순간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거기에 있어야 한다. 매 순간 도착해 있어야 한다.

어느 다른 목적지를 향해 달려 갈 필요는 없다. 이미 도착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착하려고 애쓸 것도 없고, 깨달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이 괴로운 세상 잘 살아 보려고 애쓸 것도 없이 매 순간 순간 도착해 마친 것임을 알면 된다. 그랬을 때 더없이 평화롭고 향기로울 수 있다. 낱낱의 모든 움직임이 그대로 좌선이고 깨어있음이 된다.

모든 순간 순간 더 이상 도달할 곳이라고는 없이 그 순간이 가장 온전한 순간이 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들이 그렇게 찾아 나서던 궁극의 순간인 것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마음을 돌아보자. 늘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려 하고, 무엇인가 목적 달성을 위해 애쓰고, 끝이 보이지 않는 욕망과 집착의 사슬에 빠져 한 시도 만족하지 못하며, 한 시도 도착의 평화로움을 맛보지 못하는 이 마음을…

시간이란 것이 다 우리가 만들어 낸 조잡한 관념에 불과하지만, 너무나도 빨리 스쳐 지나가는 이 시간 속에 내가 온전히 살고 있는 순간은 얼마나 되는가. 끊임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할 것이다.

순간을 살면 시간은 없다. 과거가 없고 미래가 없는데 시간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이 새로운 순간. 이 소중한 시간 시간을 결코 소홀히 흘려보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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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왜 괴로울까?

 

우리가 삶을 살아가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감당 하면서 살고 있고, 어쩌면 그 고통과 괴로움, 두려움 같은 것들과 전쟁을 하다시피 투쟁하고 싸우면서 그것들이 없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습니다. 삶을 어찌 보면 좀 허비하고 있고 낭비하고 있다 싶을 정도로 그렇게 우리 안에서 만들어 놓은 수많은 고통, 괴로움 그런 것들과의 한바탕 전쟁을 불사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이렇게 고통 받고 사는 것, 고되고 힘들고 두려운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살아요. 과연 그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또 어떤 사람은 아마 이렇게 얘기하면 ‘나는 고통 받지 않고 삶에 대해 두렵지 않고 그냥 문제없이 살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하시는 분도 계실 텐데 과연 내가 고통 받지 않고 살고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조차 ‘내가 내안에서 엄청난 고통을 만들어내면서 그것과 싸우며 살고 있지 않았던가’ 그것을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왜 고통을 받게 될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고통 받고 있는 것에서 분명한 사실이 무엇인가하면‘내가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만드는가! 우리들은 삶을 살면서 ‘내 앞에 그 어떤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 라고 아주 굳게 바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삶에 문제가 있으면 안 된다, 힘든 게 있으면 안 된다, 고통이 있으면 안 된다, 내 삶에는 항상 좋은 일이 벌어져야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게 누구나 원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이 나를 비난할까봐 나를 욕할까봐 항상 두려움에 떨고 있어요. 항상 걱정이 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 사람이 뒤에서 나를 욕하지 않을까, 남들의 어떤 판단 평가, 뒷말 이런데 항상 조마조마 하면서 사는 우리 마음이 어찌 보면 너무나도 약하고 여립니다.

그래서 아주 작은 경계에도 크게 휘청거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서 누가 내 욕하는 말 한 마디 듣고 나면 몇날 며칠을 붙잡고서 괴로워하고, 자꾸 떠오르고 떠오르면서 오래도록 괴로워 한단 말입니다.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떡하지’, ‘버림받으면 어쩌지’, ‘이 조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어쩌지’, ‘친구들 사이에서 버림받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고 있단 말입니다. 아주 쉽게 생각해서 어떤 사람이 ‘한 마디를 툭 던졌습니다’ 그냥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무언가 얼굴 표정이 찜찜했어요. 그러면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내가 한말 때문에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을 하느라고 그 말 한마디 내뱉은 것 가지고 몇날 며칠을 근심 걱정에 시달립니다. ‘저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거야’, ‘에이 이미 지나갔는데 괜찮겠지’, ‘아니야 그래도 나를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다른사람에게 내 욕하고 다니면 어쩌지?’ 하면서 온갖 생각 생각으로 말 한마디 한 것 가지고 잘됐느냐 잘못됐느냐 하는 것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끄달려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으로 고민을 애써 만드느라 괴롭고, 상대방에게 끝없이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서 괴롭고, 좋게 보이고 싶고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계속해서 우리는 근심 걱정을 굴리며 덩치를 키우고 산다는 말입니다.

어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다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며 살아요.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는데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해 줄 수가 있습니까? 없어요. 그 어떤 훌륭한 사람도 세상 모든 사람이 전부 나를 좋아해 줄 수는 없습니다. 누구나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고 그러고 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외가 없어요.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아주 지극히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모두 다 나를 좋아하는게 당연한 것이 아니라,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도 있고 때로는 미워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면서 정작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나를 좋아해 주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한 사람이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할지라도 그것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건 문제가 아니죠. 당연한 겁니다.

 

 

부처님을 청부살인해?

 

부처님일지라도 모든 사람이 부처님을 다 좋아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도 외도들이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별수단을 다 썼어요. 부처님을 죽이려는 자객만 해도 엄청났습니다. 실제 자객이 칼을 가지고 찾아간 적도 있었고, 막 지나가는 협곡 같은데서 큰 바위덩어리를 던지거나 성난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부처님을 짓밟게 한 데바닷다 같은 사람도 있었지요.

또 어떤 사람은 큰돈을 주어서 젊고 예쁜 여자 분을 시켜서 돈을 얼마나 많이 주었는지는 모르지만 일부러 사람들 눈에 띄도록 밤만 되면 부처님 처소 쪽으로 가고 아침이 되면 나오는 모습을 보여라 하고 그것을 열 달 동안 하되 애기를 가진 것처럼 배를 점점 불려라 했단 말입니다. 그렇게 여자가 열 달 동안 왔다 갔다 하면서 점점 배가 불러오거든요. 열 달쯤 되었을 때 법회 날 부처님께서 법문을 마쳤더니 어떤 한 여인이 벌떡 일어나서는 ‘당신이 어떻게 깨달은 부처라고 할 수 있느냐. 배속에 있는 당신의 아들조차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무슨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겠다고 하는 것이냐’ 라고 하면서 부처님의 아기가 이 뱃속에 있다고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소란을 피웠던 말입니다. 그렇더니 경전에는 천신들이 시켜서 쥐가 배속에 있는 박의 줄을 끊어서 탈로가 났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예요. 그것이 탈로가 났는데도 몇 년 있다가 동일한 범죄를 또 저지릅니다.

외도들이 부처님이 싫어서 어떻해서 든지 부처님의 거대한 교세와 인기와 신자들의 존경심 이런 것들을 없애버리고 싶어서 또 한 여인을 열 달 동안 왔다 갔다 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여인에게 시켜놓고는 이번에는 그 방법이 안 되겠다 싶어서 열 달 후에 자객을 시켜서 죽인 후에 부처님 처소 근처에 묻어버립니다. 그래서 여인이 없어지자 그 여인이 열 달 동안 부처님 처소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부처님이 애기를 낳을 때가 되니 사람을 시켜서 죽인 것 같다 이렇게 외도들이 소문을 내고 다닌 거예요. 그래서 외도들이 소문을 막 내고 사람들을 시켜서 여기 저기 찾다가 그 여인 묻은 곳을 찾아서는 모든 죄를 부처님께 덮어씌웁니다. 그런데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그 여인을 죽었던 자객이 너무 두렵고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참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사실은 누구누구가 시켜서 이렇게 했다 해서 부처님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었죠.

그것처럼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부처님일지라도 세상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란다는 것도 우리의 욕심이지요.

 

 

괴로움의 이유

 

그런데 우리가 괴로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들이 나를 욕하기 때문이거든요. 누군가 한 사람이 나를 욕하기 때문에 괴롭단 말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이 지구상에 수십억 인구가 되는데 그 엄청난 인구 가운데 한사람이 나를 향해 욕을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 때문에 괴롭고 죽을 지경입니다. 어떤 한사람이 나를 향해 욕을 했다 그것이 왜 우리를 괴롭히는 이유가 돼야 합니까. 누가 나에 대해서 평가절하 했다, 욕을 했다, 미워했다 그것 때문에 왜 미칠 것 같은 그런 이유가 되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그 말은 무슨 얘긴가 하면, 우리는 우리 마음 가운데 누구에게도 상처 받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욕 얻어먹고 싶지 않고, 어떻게든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 내가 원하는 삶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항상 매여 있습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이 내 생각이 무조건 맞다 맞다 하면서 다 들어줄 수 있겠어요. 내가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 착착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처럼 엄청 큰 착각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런 삶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사는 거예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한 노후가, 부유한 노후가, 아무 문제없는 노후가 나에게 왔으면 좋겠다 한단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삶이 얼마나 황당하고 과하며 무지몽매하고 터무니없습니까. 너무 과한 바람 속에 산단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삶 속에서 바라고 있는 것이 너무 터무니 없단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끊임 없이 문제가 생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가만히 돌이켜보면 세상이 문제이기 때문에 내게도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에 대고 불평불만을 하기 때문에 내게도 문제가 생겨난 것일 뿐입니다. 내가 세상에다가 너무 내 마음대로 내식대로 너무 높은 기준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내 기준대로만, 내 생각대로만, 내 마음대로만 따라 줄 수 있겠어요. 세상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대상으로 하여간 불평 불만으로 가득 차있고 그러다보니까 거꾸로 내 내면에 문제가 있어서 세상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모르고 세상만을 탓합니다. 세상과 싸우려듭니다. 내안에 있는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을 바꾸려고 든단 말이에요.

 

 

문제가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모든 문제는 내면의 문제인데 이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외부를 바꿈으로서, 세상을 바꿈으로서 내면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실 인생에 있어 하는 일이 대부분 무엇인가 하면요, 내 내면적인 문제를 외부로 돌리는 것입니다. 내 내면적인 문제를 바꾸는 방법으로 자기 내면을 바꾸는 것을 택하지 않고 거꾸로 외부적인 곳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외부세계를 바꿈으로써 나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씁니다. 나 자신을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사실 매사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노심초사하는 그 마음이 문제입니다. 그 마음이 문제다,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가 없도록 세상을 통제 하려는 그 마음이 바로 문제다 이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마음속에 외로움이나 고독감이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바로 이성 친구가 없는 것을 탓합니다. 즉 무언가 마음에 외로움이 있으면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냐하면 이 외로움을 없애줄 세상의 무엇인가를 찾습니다. 외로움이라는 내 문제를 해결해 줄 내 밖의 대상을 찾아요. 외로움이라는 것은 내 내면의 문제 아닙니까. 내면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바깥에서 내면의 문제를 해결해줄 무엇인가를 찾는다 이 말입니다. 끊임없이 친구에게 전화를 하던가, 좋은 친구를 사귀려 하던가, 이성 친구를 사귀려 하던가 말이지요. 그런데 그 사람도 나에게 외로움을 충족 시켜주지 못 한다, 처음에 사랑했을 때는 외로움이 그칠 것 같더니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이 사람도 아니다, 그럼 바로 바로 쳐버리고 다른 여자를 또 사귄단 말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내 바깥에 있는 대상에서 내 외로움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완벽한 대상을 만남으로서 그 외로움을 극복했다 이렇게 착각 하는 거예요. 함께 있다고 해서 근원적인 외로움을 없앨 수 있습니까? 누군가 함께 있다고 해서 인간 본연의 근원적인 외로움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본연적인 외로움이 없어졌다는 것은 어찌 보면 좀 서글픈 이야기죠. 우리 중생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않고서는 이 외로움이라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아주 좋은 공부의 재료가 되어주고 우리가 내면을 살필 수 있는 굉장히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정스님께서는 때때로 사람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이제 외로움을 없애기 위해서 바깥에 누군가가 나의 외로움을 보듬어 줄 수 있고 나를 사랑해주어 그 외로움을 없앨 수 있는 그런 대상을 찾아 헤메는 방법이 근원적인 답이 되겠습니까? 안 됩니다.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 일 년, 이 년, 삼 년 지나다보면 그 다음에는 무상하게 휙 휙 없어지는 거예요. 그 마음은 내면의 문제이거든요. 바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바깥을 아무리 바꾸어 봐야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결혼한 지 몇 년, 혹은 몇 십 년 되어서 바람을 피기도 하고 또 다른 것을 찾아 나서기도하는 것 아니겠어요? 그게 다 내적인 문제를 외부를 바꿈으로써 풀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볼까요? 내면의 결핍감, 불만족, 어떤 그 가난한 마음, 뭐랄까 거지같은 마음, 무언가 모를 부족감 같은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돈을 끊임없이 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봉을 이천, 삼천을 받다가 거기서 만족을 못 하고 오천만원, 일억을 벌어도 거기에 만족을 못 하잖아요. 그런 만족은 마음의 문제이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많다고 해서 우리의 만족감 그것이 충족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충족될 수가 없어요. 우리 삶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부족합니다. 이 부족이라는 결핍감은 내면의 문제이지 외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아무리 좋은 차를 사고 아무리 좋은 집을 짓고 아무리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더라도 그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많이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고통은, 그 결핍감은 더욱 더 강렬해지죠. 더욱 더 엄청난 욕망으로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어리석은 욕망에 빠지게 만들죠.

보통 우리들 마음의 바람이 소박하잖아요. ‘뭐 나는 많은 것도 바라지 않는다’ ‘어느정도 연봉만 되면 좋겠다’ 그렇듯 소박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발생되는 순간 우리의 소박함은 없어지고 맙니다. 또 다른 목적 또 다른 욕망 또 다음 것에 대한 욕망을 시작하고야 말지요. 이 세상을 다 소유하더라도, 세계 1등 가는 부자가 되더라도 우리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아요.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이것이 내적인 문제이지 어찌 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겠어요? 이렇게 내적인 문제인데, 바깥의 문제가 아닌데 우리는 끊임 없이 바깥을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죠. 돈이 없어 괴롭고, 친구가 없어 괴롭고, 성공하지 못해 괴롭다, 이것은 전부 바깥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내면의 문제입니다.

부처님 같은 경우는 외적인 무언가 필요한 것이 있겠습니까? 부처님의 부족함을 채워줄 외적인 어떤 대상이나 물질이 필요할까요? 아니겠지요. 항상 가득 차 있고, 항상 원만 구족하신 분입니다.

 

 

중심을 잡고 삶 위에 서라

 

엊그제 어떤 도반스님을 만났는데 그 스님이 스승님으로 존경하는 스님이 계신다는데 그 스님을 보면 항상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그 스님은 당신이 보았을 때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것 같데요. 무언가 삶에 낙이 없어 보인답니다. 늘 법회하고 기도하고 참선하고 산책하고 아니면 방안에 혼자 앉아 있을 뿐입니다. 방안에는 아무것도 없답니다. 컴퓨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책 한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에 혼자 앉아있고 좌선을 하고 또 기도 시간되면 기도하고 법회 시간되면 법회 하고 그 외에 시간에는 취미 활동 이런 것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는 것입니다. 신도님이 오시면 신도님과 이야기 나누다가 또 없으면 들어가 앉아있고 그냥 방 안에만 앉아 있는데요. 그래서 이 스님이 생각 할 때는 저 스님은 어찌 삶을 재미없게 심심하게 살고 있는가 그런 생각을 했는데 가만히 오랫동안 그 스님을 살펴보았더니만 이 스님은 누군가 옆에 있어야만 행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언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어야지만 행복한 스님이 아닌 거예요. 그냥 항상 혼자 있어도 충만한 것입니다. 돈과 함께 있지 않아도, 무언가 나를 알아줄 사람이 있지 않아도, 누군가 전화를 걸어 노닥거릴 일이 없어도, 무슨 재미있는 건수를 찾지 않아도, 그 어떤 것 없이 혼자 독방에 앉아 있더라도 아무런 외로움이 없는 자기중심이 딱 서 있는 분인 거예요. 자기 내면의 중심이 딱 서있게 되면 바깥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방안에 딱 들어서 있는 것이지 바깥을 향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내면의 이 공허함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아 나서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어떤 사람이 되었든, 친구가 되었든, 돈이 되었든, 명예가 되었든, 어떤 재미난 일이 되었든, 명예를 충족시키는 일이 되었든, 그런 것들을 찾아 나서지 않고 그저 홀로 있더라도 가득 차있기 때문에, 중심이 잡혀 있기 때문에 어디에도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밖에서 보면 그저 평범한 스님 같겠지만 정말 얼마만큼 중심이 서있는 분이신지, 그 자리가 얼마나 굳고 깊은 자리인지를 아시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삶이 고되다고 고통스럽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삶이 실패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이게 바로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엄청난 이상적인 것을 꿈꾸고 있어요. 내가 원하지 않는 어떤 것이 일어날 때 그것을 문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내면에서 끊임없이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문제다 저것이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아까 회사에서 했던 말이 혹시 실수 한 건 아닐까? 그 때 그 말을 괜히 했나? 오늘 내가 말이 너무 많았나? 너무 내 자랑만 했나? 너무 남 욕만 했나? 너무 속보이는 말이었나?’ 말 한 마디 한 것을 가지고, 그건 내가 잘못한 것 같다 실수한 것 같다, 끈임 없이 마음에서 생각이 일어나서 우리를 괴롭게 한단 말이예요. 그 말 한마디를 넘기지 못하고 붙잡는단 말입니다. 한 가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를 넘기지 못하고 붙잡아 멘단 말입니다. 흘러가지 못하고 거기 딱 박혀 있는 거죠. 그런 식으로 우리 삶에서 흐르지 못한 채 문제가 되어, 정체가 되어, 괴로운 무언가가 되어 꽉 막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괴로움 없는 삶을 사는 방법

 

그런데 아주 다행스러운 소식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꽉 막힌 삶을 대번에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방법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실패적인 삶을 살지 않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면서 걱정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 할 수 있어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이일이 잘 될까 못 될까 두려워하거나 조바심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의 성패에 따라 내 진급 문제가 달린 아주 중요한 회사의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면서 조차 초조한 마음, 걱정스런 마음을 붙들고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회사의 프리젠테이션을 앞두고 여유로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맑게 비어있으면, 어떤 하나에 붙박혀 있어서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한다’ 하고 고집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습니다.

왜 우리 삶에 즐거운 일만, 내가 원하는 일만 일어나야 됩니까? 그렇지 않지요. 또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 내가 원하는 삶이 펼쳐져야 성공한 삶이라고 고정지어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조금 더 지혜롭다면, 사업에 성공하지 않더라도, 진급을 하지 않더라도, 돈을 벌지 못하더라도, 아주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겨우 겨우 끼니를 이어가면서 한 달에 몇 십만 원 정도 가지고 그냥 아이들 키워가면서도 즐겁게 삶을 누리며 살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 삶이 될 수 있어요. 고층빌딩을 소유하고, 아주 비싼 아파트에 살면서, 그 아파트 값이 몇 년 안에 두 배 세배 뛰고 그런 삶을 살지 않더라도, 승승장구하며 제때 제때 진급을 하지 않더라도 삶이 성공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리 성공적인 삶으로 보인다 하더라도 실패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의 삶이 겉으로는 성공한 삶으로도 실패한 삶으로도 보이지만 사실은 실패한 사람 투성이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이 소유 할수록 오히려 실패한 삶일 가능성이 높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긴 하죠.

나의 삶이 남들이 보기에는 문제가 많은 삶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 나를 뒤에서 욕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진급을 못 했을 수도 있어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지 않는 삶일 수도 있고, 누군가 나를 뒤에서 해코지 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어요. 거기에 막 신경증에 걸려 예민해져서 하나하나에 마음 쓰고 괴로워하며, 누구 하나 내 목줄을 쥐고 있는 사람이 나쁜 말 한 마디 한다고 그것 때문에 몇날 며칠 지옥세계에 빠져서 살 이유는 없다 이 말입니다.

인연 따라 펼쳐지는 삶으로부터 나 하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온갖 생각 생각 가지고 분별심을 가지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일어나는 그 일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포용하란 말입니다. 거부하지 말라,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되었으면 좋겠다’, ‘누가 나를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마음속에서 만들어낸 생각과 바람들 때문에 벌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생각이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온갖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그런 바램들을 긍정해 줄 필요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허무맹랑한 바람들에 우리가 왜 다 응해야 합니까. 그것을 맞추기 위해 내 인생 전부를 걸고 그냥 전쟁을 하는 삶을 살아야 되고, 고통의 삶을 살아야 되느냐? 그런 삶을 당장에 청산 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 내 기분대로 내 생각대로 만사가 돌아가야 된다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그렇다고 이 내부의 문제를 어떤 방법으로 고치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구나 그러니까 내부의 문제를 고치면 되는구나 해서 나 자신을 탓하고 내면의 문제를 탓하고 고치려고 애쓰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그대로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받아드리고 허용하되 거기에 끌려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내부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 바람, 욕망, 번뇌 등의 속삭임을 귀담아 듣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야 그때 너 잘못 한거 아니야’ 하고 끈임 없이 올라오는 생각 생각들을, 그 불평불만을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발자국 뒤에 떨어져서 그 생각이나 고통이나 분별이나 내가 만들어낸 모든 문제들, 문제라고 만들어냈던 모든 것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는데 나라고 하는 것이 벌려 놓은 삶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생각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지켜보면 삶이 너무나도 생기발랄해집니다. 어떤 고통도 고통이 아닙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삶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더 이상 우리 삶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해 온 수많은 것들이 사실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다는 거예요. 가만보면 우리는 작은 것 하나 가지고 예민하게, 어찌 보면 우리가 아주 신경박약증세를 보이고 있죠.

남들이 말하는 것에 몇날 며칠을 구속돼서 끄달리고 그것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산다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껏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삶을 살아온 거예요. 거기에 붙박여서 몇날 며칠을 아파하고 괴로워한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생각 생각들에 힘을 보태줄 필요가 없습니다. 힘을 실어주면 안 되요.

 

 

아상에 밥 주지 마라

 

힘을 실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하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생각을 또 다른 생각으로 플러스 플러스 시키지마라 하는 말입니다. 내안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모두 아집(我執), 아상(我相)의 범주라고 볼 수 있는데요. 즉, 내생각 내견해는 아집이고 아상입니다. 내가 만들어 놓은 틀일뿐이다 이 말입니다. 거기에 밥 주는 일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원하는 어떤 삶, 내가 바라는 삶 거기에 끊임없이 끄달려가고 생각이 붙박여 있으면 그 생각은 더욱 더 에너지를 받아서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예를들어 ‘저 사람이 너를 뒤에서 욕하더라’ 하고 한 마디를 들었어요. 그러면 그냥 욕했구나 하고 탁 흘려보내면 됩니다. 그런데 욕한다는 그 말 한마디가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내 인생에서, 우리 삶에서 백년 팔십년 칠십년 되는 삶에서 이 수십억 인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뒤에서 욕했어요. 그게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어요. 더구나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들은 말이니 100% 분명한 사실도 아직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뒤에서 욕한다더라’ 하는 그 한마디에 온갖 밥을 줍니다. 에너지를 보태요. 어떻게 밥을 주느냐하면 생각으로써 ‘야! 저 때도 나를 미워했고 이 때도 나를 미워했고 생각하면 할수록 괴심한 녀석이네’, ‘어쩌면 이 사람이 그 사람에게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동네방네 욕하고 다닐지도 몰라’, ‘어쩌면 이 사람이 나를 아주 음모를 꾸며가지고 우리 회사에서 매장 당하게 할지도 몰라’, ‘어쩌면 저 사람이 나를 공격하려 들지도 몰라’ 하면서 온갖 생각 생각으로 에너지를 키워요.

그냥 단순히 욕 한마디를 넘겨 버리면 되는데 그 생각 하나에 온갖 에너지를 개입시킴으로서 밥을 주는 겁니다. 그러면 덩치가 너무 커져서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립니다. 그렇게 생각 생각으로 밤새도록 그 사람을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렸어요. 그 다음날 그 사람을 딱 만났는데 말 한마디를 걸어 옵니다. ‘야! 너 요즘에 잘하는 것 같더라’ 하고 좋은 얘기를 했어요. 칭찬을 했어요. 그런데 생각에서는 그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에너지가 너무 덩치가 커졌기 때문에 ‘저놈이 무슨 꿍꿍이가 있어’, ‘나에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앞에서는 저러지만 뒤에서 뒤통수를 치려고 저려는 걸 꺼야’ 무언가 칭찬을 하는 말도 나쁘게 들린단 말입니다.

그 사람이 커피 한 잔 타주면서 ‘이거 한 잔 먹고 해’ 하면, ‘야! 네가 먼저 먹어봐’, 혹시 독을 탓을 지도 모른단 말이지요. 이거 말도 안 되는 얘기잖아요. 그러나 우리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끊임없이 벌이고 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벌어졌어요. 그런데 거기에 분별하고 온갖 생각 생각들이 밥을 주지 않는다면 그 생각은 거기서 딱 끊어지고 맙니다. 붙잡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면 그냥 거기에서 끝입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삶에 펼쳐지는 흥미로운 경험이 됩니다. 왜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문제로 생각 할 필요가 없지요. 문제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에너지를 실어 주면 실어 줄수록 우리는 나중에 가면 남들이 보았을 때 좀 미친 사람처럼 바뀌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아요. 어떤 한 가지에 미친 듯이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 생각에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것에 집착하는 것을 보고 참 이상한 사람이다, 꼭 정신병자 같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 일이 이렇게 밥을 주니까 생긴 거지 그 사람은 원래부터 정신병자가 아니였어요.

로또에 당첨되었거나 아버지가 농사를 짓다 갑자기 부자가 되어서 엄청난 돈이 생겨서 자식이 싸워가지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가 자살을 하고, 아내가 로또 당첨되어 남편과 싸우고 이혼하고 하는 일들이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럽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애초부터 나쁜 사람들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생각 생각에 온갖 밥을 주다보니까 그것이 그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생각에 밥을 주게 되면 엄청난 욕망 집착 이런 것으로 몸뚱이를 키우게 되고 그것이 이제 나를 장악하게 됩니다.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아상의 덩어리가, 생각의 덩어리가 나를 완전히 장악하게 돼서 그때부터는 내 삶이 그 방향으로 흘러들어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사실은 우리가 크고 작게 이런 일을 벌이면서 인생을 살고 있는 거죠. 이런 아찔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이 아상에 밥 주는 일을 하면 안 돼요. 어떤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고 어떤 문제가 생겨났어요. 불평스런 일이 생겨났습니다. 불평불만을 일으키는 어떤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그 자리에서 끝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게 지혜로운 거예요.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순간 그날 모든 것을 딱 풀어버리는 겁니다. 질질 끌고 가면서 거기 계속 머물러 있게 되면 생각이라는 것이 바로 몸뚱이를 키우게 되고 말지요. 그래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하라’ ‘응당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하는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지라

 

어떤 불평거리가 생겼을 때 ‘불평거리가 생겼구나’ 하고 거기에 응해 줄 수는 있겠죠. 어떻게 할까 하고 대응 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 마음이 머물러서 그 불평스런 마음에 점점 더 살을 붙이고 몸뚱이를 키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발자국 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져야 합니다. 내 마음이 화가 나고 욱하고 올라오는 마음으로부터 떨어져서 나를 지켜보아야 합니다. 내 안의 온갖 생각 생각들을 지켜볼 수 있어야 되고 그렇게 지켜보다보면 내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에 내 생각이라는 녀석이 얼마나 많이 거기에 밥을 줌으로 해서 생각의 몸뚱이를 키우는지를 여실히 보게 됩니다. 그런데 여실히 보게 되면 덩치가 커지지 않습니다.

분명히 보게 되면 생각이 덩치를 키우지 않고 저절로 관찰 한다는 것이, 본다는 것이 그 문제를 녹여주게 되고 없애주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문제를 양산해내는 것은 바로 아상이라는 놈이 하는 일이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지켜보는 자는 누구입니까? 지켜보는 자가 우리의 본질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생각을 지켜보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는 참나로 살지 않고 겉껍데기로 살잖아요. 생각을 가지고 온갖 분별하니까 껍데기인 나로 사는 겁니다. 그 분별과 해석과 생각을 놓아버리고 그 껍데기의 나가 아닌 본연의 나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생각을 지켜보는 자, 주시하는 자, 온갖 문제를 만들어낼 때 그 문제를 지켜보는 자, 화가 올라올 때 그 화를 지켜보는 자, 그렇게 주시하는 자가 되었을 때 주시하는 자가 바로 본연의 참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지켜보는 자가 되었을 때 어떤 공덕이 있겠어요? 부처님은 우리의 모든 업장을 소멸시켜주신다고 하잖아요. 그 말은 내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들을 녹여준다는 겁니다. 그것을 누가 녹여주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님이다 이 말입니다. 말을 하자면 그렇다는 거니까 이 말에도 걸려서는 안 되겠죠. 그런데 부처님이 누구냐? 지켜보는 자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 말입니다.

지켜보는 것이 바로 나의 본체이고 당체입니다. 그래서 ‘관찰하라’, ‘깨어있으라’, ‘어떤 놈이 관하고 있는가 그것을 돌이켜보아라’, ‘보는 놈을 돌이켜 보아라’ 하는 얘기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본다 라는 것, 주시 한다는 것, 분별하지 않고 해석하지 않고 그 상황을 지켜본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순간순간 부처로 만들어준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우리가 깨달아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부처가 되는 문제이지, 내가 지금 부처로 사느냐 중생으로 사느냐 하는 문제이지, 지금은 중생이지만 나중에 깨달아서 부처 되겠다 하는 그 공부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 되는 공부가 아니라 부처로 사는 공부

 

불교 공부는 부처가 되는 공부가 아니라 순간순간 부처로 사는 공부입니다. 내 안에 부처가 있다고 했잖아요. 어떤 것이 내안의 부처냐? 지켜보는 자, 그것이 내안의 부처다 이 말입니다. 생각이 내안의 부처가 아닙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차라리 직관을 의지하라 그러잖아요. 영감 같은 내안에 깊은 곳에 있는 직관 같은 것 그것은 생각보다 더 차원이 높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이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과 다투는 대신, 삶과 투쟁하고 문제를 만들어 내는 대신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내가 만들어낸 모든 문제를 주시하고 있을 때 삶이 어떻게 바뀌겠어요. 삶이 어떻게 바뀌느냐 하면요 예를 들어 우리가 여름에 휴가를 가고 싶잖아요. 일 년 동안 열심히 일하고 나서 여름이 딱 되면 삼박사일 사박오일 휴가를 내서 휴가를 가잖아요. 매일 매일 일 년 휴가를 기다리잖아요. ‘야! 올 여름 휴가 때가 언제 오겠나’ 하고 매일 매일 기다리잖아요. 그런데 매일 매일의 삶이 휴가가 될 수 있습니다. 휴가 가는 날로서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을 살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주중에는 매일 주말을 기다리지만 주말을 기다리지 않아도 주말을 기다리지 않고 당장 이 자리에서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야! 집에 가서 좀 쉬고 싶다’ 하지만 그 집에 가서 쉬고 싶은 것을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에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집에 가서 쉬고 싶다 하고서도 정작은 집에 가서 쉬지 않죠. TV 켜놓고 누워서 TV 보고 있잖아요. 머릿속은 온갖 생각과 계획들로 가득 채워둔 채 말입니다. 그건 쉬는 것이 아니죠. 엄청난 문제를 머릿속에서 양산해 내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전혀 거꾸로 가는 거죠. 우리의 생각이라는 것이 이렇게 허황됩니다. 그것이 쉬는 것이라 착각을 하고 살아요. 다시말해 휴가 때나 주말을 그렇게 기다려 놓고도 우리의 습관이 막상 주말이나 휴가가 다가오면 ‘쉬는 일’을 하면서 마음을 또 힘겹게 만들어 냅니다. 쉬는 건 일이 아닙니다. 그냥 말 그대로 푹 쉬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전히 푹 쉴 수 있는 시간이 오더라도 쉬는 법을 모른단 말입니다. 쉬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살면서 우리는 한 번도 참되게 쉬어 본 적이 없습니다. 참된 휴식을 취한 적이 없어요.

그러나 한 발자국 떨어져서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매일 매일이 아주 흥미롭고도 생기로운 휴가가 되고, 주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순수하게 상대방과의 사귐 그 자체를 즐겨야지, 내 필요에 의해서 친구를 사귄다거나, 저 사람을 사귀면 도움이 되겠지 하는 식으로 사람을 사귀지 않습니다. 그저 그 사람과 사귐이 즐거운 거예요. 이익이 될지 안 될지는 생각이 하는 거예요. 생각은 항상 그 사람이 나에게 이익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을 따집니다. 그게 바로 생각의 전공분야예요. 그런데 우리 본질이 하는 것은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다만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교제를 할 때 교제를 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를 묵묵히 분별없이 지켜볼 뿐입니다.

그리 되었을 때는 설사 늘상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문제를 일으킬지언정 나에게는 문제를 안 일으키게 됩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사기 치는 사람에게 사기 치지 자기 친구에게 사기 치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생각이란 놈은 편견을 가지고 무슨 짓을 하냐 하면은요, ‘이 사람은 전과가 있으니까 나에게도 사기를 칠거야’, ‘나에게도 나쁜 짓을 할 거야’ 이런 편견을 가지고 대화를 하거든요. 끊임없이 그 사람의 과거를 끌어들이고, 기억하고, 판단하고, 추리하고, 상상하고, 분별하면서 무수한 생각의 다발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면 그것을 상대방이 분명히 압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사람의 나에게 친구가 아니에요. 그때부터는 사기 칠 대상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마음을 활짝 열고 온전히 받아드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의 과거를 놓아버린 채 분별없이 다만 바라보고 주시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때에도 여전히 그런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죠. 생각을 놓아버리면, 그 사람이 사기를 쳤다든가 그 사람이 나쁜 놈이라든가 하는 그런 생각을 질질 끌고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나에게 투명한 존재로 다가오게 됩니다. 그럼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가 아주 흥미롭고도 즐거운 사귐이 됩니다. 이처럼 무분별의 지켜봄이 관계의 토대가 되었을 때, 비로소 그 상대방도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열게 되고, 나아가 상대방이 그 때부터 근원적으로 변하게 되고, 감동스러운 삶을 살아나가게 됩니다. 상대방에게 근원적인 삶의 변화가 찾아온단 말입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생활이 돈을 벌어야 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으로서 만들어낸 관념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내가 하는 일을 지켜보게 되면 그냥 하루하루 일하는 그자체가 즐거운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주 즐거운 일을 할 때는 어때요. 밤을 세며 일하더라도 즐겁고 피곤한 줄을 모르잖아요. 또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밤새도록 어디 여행을 갔다 와도 지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삶을 살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직장생활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그 직장생활을 즐기려는 생각을 못 하고 직장생활 그것을 온갖 문제로 만들어 놓고 있는 거예요. 직장생활이 왜 문제가 됩니까. 빨리 퇴근하고 싶은 곳, 직장이 왜 이런 곳입니까? 직장이 없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정말 우리가 꿈꾸는 것입니까? 아니거든요. 그런데 멀쩡한, 또 고마운 이 직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어찌 생각해 보면 완전히 잘못된, 정신병자 같은 생각들을 끊임없이 하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가 결혼하기 전에 얼마나 결혼하고 싶어 합니까. 그런데 결혼하고 났을 때, 아이를 낳고 났을 때 그렇게 생각하던 것 처럼 행복하기만 한가요? 씩 웃으시는 분들 계시죠. 자식을 그렇게 갖고 싶어 하다가도 자식이 생겼을 때 막상 키우기 어렵다고 죽겠다 죽겠다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아름다운 일도 문제가 됩니다. 문제를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고통스러운 일도 수행의 재료가 됩니다. 내 공부의 재료가 되고 어떤 아름다운 정신적인 성숙을 위한, 깨달음을 향해 가기 위한 아주 아름다운 재료가 된단 말입니다.

그것은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내부적인 문제이지 외부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만들어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아름다운 외부세계나 환경도 모두 문제로 보입니다. 그러나 문제를 양산해 내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악조건이나 역경일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에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아무런 고통도 남기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외부를 바꾸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 우리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겠습니까? 어떻게 사시겠어요? 그것은 자기 스스로 결정할 문제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분별없이, 생각에 휘둘림 없이 다만 삶의 모든 것이 내 존재위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스쳐가도록 내버려 두면 됩니다. 다만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내 존재 위를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도록 내버려 둔 채 지켜보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물들지 말고, 거기에 휘둘리지 말고, 거기에 깊이 개입하지 않은 채, 그저 영화 한 편을 보는 마음으로 내 삶의 연극을 흥미롭게 지켜보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니 어떤 분들은 관하고 사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살면 너무 삶이 게을러지고 나태해 지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이렇게 주시하고 산다는 것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 순간순간 아주 온 존재를 바쳐서 일을 하고 주어진 몫을 해 내는 것입니다.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온전히 마음을 모아 집중한 상태에서 모든 일을 생생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일이야말로 내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라도 된 것처럼 바로 그것이 내 삶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또 불교에서 집착을 버린다고 하니까 그냥 대충 대충 사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직장의 일에 나의 온 존재를 투영합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을 만나게 됩니다.

 

 

깨어있음에 담긴 우주적 힘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렇듯 완전히 깨어있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에 힘이 붙는다는 점입니다. 깨어있는 순간, 내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 상대방과 교제를 나눌 때 혹은 상대방과 일을 추진할 때, 어떤 글을 쓸 때, 무언가 일을 하나 할 때, 내가 온전히 그 일을 주시하고 일을 하게 된다면 아주 그 일에 성스러운 에너지가 붙게 됩니다. 생각이 만들어낸 잡스러운 에너지가 사라지고 내 더 깊은 차원에서 일어나는, 더 깊은 불성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부처님의 엄청난 에너지와 힘이 붙기 때문에 그 일의 흐름이 아름답게 바뀌게 됩니다. 아주 자연스럽고도 법계의 흐름과 일치를 이루는 우주적인 힘으로써 그 일이 저절로 진행되게 됩니다.

도반 스님께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군법당 주지스님들이 군종병을 뽑아 함께 살잖아요. 그런데 어느 부대에 아주 문제를 많이 친 문제아랄까, 관심사병이 있었단 말입니다. 아주 사고만 치고 전과도 있고 가만히 놔두면 자살 할 것 같고, 너무 장병들을 괴롭히고 부대에서도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장병이 있었는데 이 스님이 상담을 해 본 뒤에 그럼 내가 거두어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법당에 데리고 와서 그 장병 법우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 아이가 과거 부대에서 어떻게 했든 전혀 상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고 사귀어 주는 겁니다. 처음에 그 장병을 데려와서 같이 살겠노라고 했을 때 주위에서 뭐라 그랬느냐 하면요, ‘법사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법사님이라도 얘가 하도 교묘한 아이라 무슨짓을 할 지 모릅니다.’, ‘모르긴 해도 법사님에게도 무슨짓을 하고 사기를 칠 놈이다’ 이랬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스님에게 했던 결정적인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세요. 눈물을 흘리면서 며칠을 같이 살다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어떤 사람도 나를 진심으로 대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물론 내가 나쁜 놈이기 때문에 그러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왜 이런 나쁜 짓을 하지는 진심으로 나를 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나를 조금 멀리 하려는 것을 감지 했을 정도라는 거예요. 아버지와 어머니조차 나를 얼마나 부담스러워하고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지를 스스로 느끼면서 이 친구의 좌절감은 거의 극에 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그 어떤 사람이 나를 살펴줄수 있고 나를 사랑해 줄 수 있겠느냐 한 거지요. 그런데 이 주지법사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실 어떤 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을 내가 바라볼 때 문제로 바라보면 그 사람은 내게 와서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투명하게 바라보면 그 사람은 나에게 와서 맑고 아름답고 투명하게 좋은 인연이 됩니다. 모든 것은 내문제이지 바깥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사귀는 친구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친구를 사귀는 것이고 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바깥의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상의 모든 순간순간을 내가 불평이 있을 때 불만이 있을 때 무언가 고통이 있을 때 그때를 아주 생기로운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아주 수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내 마음공부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마다 ‘아차!’하고 뒤로 물러나야 합니다. 내 몸뚱이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문제에 연루된 자가 아닌 한 발자국 떨어져 지켜보는 자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친구가 욕을 했고, 내 안에서 욱 하고 화가 올라왔단 말입니다. 이 상황에 맞받아쳐 욕을 하고 싸움을 걸 것이 아니라, 이때 한 발자국 물러나서 내안의 화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욕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는 거예요. 내 안에서 올라오는 화도 지켜보고. 힘든 일을 할 때, 힘든 훈련을 할 때 힘들다는 생각에 함몰 되어 버리면 그 생각이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그것을 두 번째 화살을 맞는다 세 번째 화살을 맞는다 이래요. 그 일 자체가 힘들 것 보다는 내가 생각으로 그 일을 더 크고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든 일을 할 때, 한 발자국 떨어져서 힘든 일을 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볼 수 있어요. 그렇게 지켜보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힘든 일을 한다는 자체가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여러분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이 천팔십 배, 삼천 배를 할 때 힘들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여러분을 고통스럽게 합니까? 마음도 고통스럽습니까? 절을 할 때는 마음은 고통스럽지 않거든요. 몸은 힘들 지언정 마음은 뿌듯합니다.

내가 무언가 뿌듯한 일을 해서 이일을 성취하게 되었을 때 예를 들어서 축구를 할 때 힘들어 죽겠습니까? 뭐 기합을 받는다 이럴 때 힘들어 죽겠지 축구할 때 힘든 일이 없죠. 몸은 힘든데 마음은 더 즐겁습니다. 거기다가 골이라도 하나 넣으면 아무리 힘들게 뛰어도 힘들지 않거든요. 괴로운 일 자체, 괴로운 현상 자체가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괴롭다고 생각하고 괴롭다는 생각으로 온갖 밥을 주고 그것이 더욱 더 큰 괴로움으로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시하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괴로움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양극단을 벗어난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그것에서 우리는 큰 공부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휴가 같은 삶, 주말 같은 삶, 달콤한 낮잠과도 같은 삶,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나의 연인과도 같은 그런 관계, 매 순간 순간이 투명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게 되는 겁니다. 삶을 즐기게 되고 누리게 되는 겁니다.

삶과 투쟁하지 않고 삶의 문제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일들이 자연스럽게 왔다가 갈 수 있도록, 흘러왔다 흘러 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듯 한 발자국 떨어져 내 중심에서 모든 삶을 그냥 가만히 투명하게 지켜보게 되고, 그랬을 때 내가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내 중심에 딱 뿌리내린 삶을 살게 됩니다. 중심을 잡고 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화에 정신을 빼앗기고, 누가 밉다고 거기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모든 일이 생길 때 마다 정신이 왔다 갔다 하고 에너지를 소진하는 삶이 아니라 내 중심에 딱 자리 잡고 앉아서, 내 깊은 뿌리에 자리 잡고 앉아서 내 안에 나라는 존재가 어떤 일을 벌이는지 가만히 지켜보는 거예요. 인연따라 일어나는 삶을 거부하지 않고 내버려 둔 채 허용하고 수용하고, 그렇게 되었을 때 자기중심이 딱 잡힌 장부의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출격장부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더라도 나는 중심에 머물러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외부의 경계에 이리 끄달리고 저리 끄달리는 왔다 갔다 하는 삶이 아니라 중심에 딱 뿌리 내리고 그것을 자유롭게 바라보면서 거기 휘둘리지 않고 걸림 없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의 삶은 사실 아주 즐겁고 생기롭게 누리는 삶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고통 받고 사는 삶이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니라 즐겁게 사는 게, 행복하게 살고 평화롭게 사는 것이 우리 삶의 본질입니다. 그러니까 본질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본성을 거슬러 살지 말고 다만 본성에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은 내가 공연히 문제를 만들지 말고 애써 만들지만 않으면 그 자리가 부처의 자리다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드리실지 모르겠으나 이것을 한 번 듣고 넘기지 마시고 내 안에 딱 주시하는 중심을 두고 내 존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 번 지켜보겠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생생하게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스스로 체험해야 되요. 그럼 이 수행이라는 것이, 나라는 본연의 중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광대무변한 것인지를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삶에서 깨어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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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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