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활짝 여는 명상

삶과 명상 이야기 2011/02/24 14:35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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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쉽게 오픈마인드라는 말을 듣곤 한다.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고 한다.
그러면, 마음을 닫지 말고 활짝 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마음을 여는 것이 마음공부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살펴보자.

문을 닫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무것도 문 안으로 들어 올 수가 없다.
다만 문 안의 주인이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 것들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어 두고 있으면
내가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바깥의, 우주의 모든 것들이
자유로이 내 존재의 집 안으로 들어오고 나가게 된다.
그 모든 무한한 지혜와 사랑과 힘들이
자유로이 오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즉,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만,
내게 이득되는 것만,
분별하고 판단하여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마음을 활짝 연다는 것은
그 어떤 분별도 일으키지 않고,
좋아하는 것을 애착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을 닫고 있을 때는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중심이 되어,
문을 열 것인지 닫을 것인지를 결정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열고,
도움이 되지 않으면 닫으며,
내 입맛에 맞는 것, 내 견해와 일치하는 것은 열고
내 입맛에 안 맞거나, 내 생각과 다른 것은 닫는 것이다.

즉, 문을 닫고 있을 때는
아상에 갇히게 된다.
‘나’라는 아상과 에고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고 있을 때
아상은 타파되고
내가 아닌 우주법계의 질서와 차원이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된다.

즉 문을 닫는 것은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하는 것이고,
문을 열 때
비로소 온전한 ‘내맡김’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을 열고
이 우주법계의 진실에 삶을 내맡길 때,
나는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무위로써 살게 된다.

그 때 모든 지혜와 힘이
무한한 자비로써 나를 돕기 시작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엄청난 속도로 깨어나게 됨을 의미한다.
아니 완전히 열었을 때
비로소 그 자리가 바로 삶의 완전성,
원만구족과 온전함이 깃드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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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는 본래 완전하고,
모든 것이 구족된 존재이고,
완전히 깨달아 있는 존재인데,
‘나’라는 아상과 이기가
문을 닫고 막아 섬으로써
그 완전성과 원만구족과 깨어남과 자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존재 근원의 깊은 차원의 질서에 내맡기지 못하고,
마음을 열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오다,
문득 깨달아 문을 활짝 열게 되면
우주적 깨달음과 완전성이
허물어진 벽과 툭 트인 문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으면
깨어남은 더뎌진다.
지혜도 자비도 내게 들어오지 못한다.

오직 있는 건,
아상 뿐!

아상만이 나를 집어 삼키고,
아상이 시키는 대로,
이기와 에고가 시키는 대로의 삶만을
반복적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삶은 전혀 새롭지 않다.
언제나 비슷한 패턴의 삶이 반복된다.
아상은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싫어하고,
과거에 안주하며, 안정만을 쫓는다.

아상의 기준에서
문을 선택적으로 분별하여 열고 닫기 때문에,
언제나 비슷한 것만을 열어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사람은
대중 앞에 나서는 결정은 죽어도 못 한다.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 될지라도
병원과 현대의학만을 신봉하는 사람은
대체의학이나 명상과 기도를 통한 치유는
다분히 기복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이라 매도하며
전혀 마음을 열지 않는다.

어느 한 종교만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거나,
어느 한 집단, 사상, 이념, 가치만이 옳다고 믿는 이는
마음을 활짝 열고
자신과 다른 사상, 종교, 이념,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닫은 이에게는
계속적으로 똑같은 진부한 일상만이 반복될 뿐이다.
무언가 새로운 변화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을 열지는 못하는 것이다.
당장에 마음만 열면
내가 원하는 그 모든 것이
언제든 들어 올 준비를 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마음을 열고자 한다면,
먼저 내 마음 속에서 반복되는
좋고 싫다는, 옳고 그르다는, 맞고 틀리다는
분별과 차별심을 잘 관찰하고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두 가지 극단적인 분별이 있으면
좋고 옳고 맞는 것만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여 문을 열게 되고,
싫고 틀리고 그른 것은
문을 닫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에서는
좋은 것도 유효하고 싫은 것도 유효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이란
내 생각의 틀일 뿐 실체가 아니다.
역경 속에서도 배울 수 있고,
순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역경과 순경을,
행복과 불행을,
맞고 틀리는 모든 것을,
그 양 쪽 모두를 향해
완전히 문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 말을 그저 우유부단하게
아무런 선택도 하지 않고,
모든 게 다 맞다고 여기면서,
바보가 되라는 말로 여겨선 안 된다.

분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좋고 나쁜 선호 조차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좋아해도 너무 집착하지 않고,
싫어해도 너무 증오하지 않으면서
그 두 가지 모두를 마음을 열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두 가지의 경계 모두를 받아들여
그 양 변을 통해 깨달아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닫지 말라는 것이다.
역경을 통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이지,
순경계에서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삶은 순역의 좋고 나쁜 모든 경계가
균형 있게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 양 쪽 모두에서 영적인 진보, 깨달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찬란하고도 눈부신 삶이라는 축제를 온전히 즐기라.
우주법계는 언제나 완벽하고도 충만한 지혜와 자비로써
당신의 삶을 조화롭게 균형 잡아 줄 것이다.

마음의 문을 닫음으로써,
선택적으로 좋은 것들만 받아들임으로써,
우주법계가 내게 무한히 공급해주고 있는
진리의 법비를 뿌리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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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신부처님께서는, 신성의 하느님과 성령은
언제나 무한한 지혜와 자비로써
우리를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나에게 딱 걸맞는
완벽한 인생의 시나리오와
삶의 교과과정을 언제나 준비해 두고 있다.

그것도 저마도 모든 사람들에게,
맞춤식으로 정확히 필요한 일들을 균형 있게 내보내 줌으로써,
자신의 삶에서 배워야 하고 깨달아야 할 바로 그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이 다 똑같지 않고 다 다른 것이고,
또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인생의 어느 때에는 잘 풀리며 행복해 하다가,
또 어떤 때에는 안 풀리며 괴로워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균형 있는 삶과 인생의 교육 과정을 통해
우리는 곧 깨달음의 바다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귀의(歸依)라는 구도의 과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본래 부처였고, 본래 진리였으며, 본래 청정한 수행자인
바로 그 본향인 자성의 귀의처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귀의하는 것,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지향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요, 인생의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귀의의 숭고한 여정은
언제나 부처님의 가피, 신의 가호,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완벽한 도움이
매 순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온전한 도움이 바로 인생이라는 수업이다.
저마다에게 딱 걸맞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나 자신만을 위한 맞춤식 인생수업이
바로 나의 인생인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인생의 수업을 온전히 이수해야지,
내가 선택적으로 원하는 수업만을 들음으로써,
좋아하는 수업만 선별해서 들음으로써,
균형과 조화로운 영적 진보와
성스러운 귀의로 가는 구도의 길을
에둘러 멀고 먼 길로 돌아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완전히 열고 받아들이면
수업의 진도는 급격히 빨라지고,
깨달음에로의 당도는 멀지 않지만,
마음을 닫고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면
지지부진하게 깨어남의 속도는 느려지는 것이다.

그 수업을 완전히 이수해야지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받아들이고 수용했을 때
괴로움도, 병도, 아픔도, 스트레스도, 역경도
빨리 소멸된다고 하는 것이다.

거부하고 두려워하며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록
그 거부하던 것은 계속되고 지속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거부하면 거부하는 것이 계속된다.
결국 포기하고 받아들이게 될 때까지.

그러니 어떤가.
삶을 거부하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나에게 주어진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놀이하듯 즐기며 살아내라.

설사 그 인생의 길에
굴곡진 역경이 놓여질지라도
‘괴로운 삶’이라고 해석하고 판단함으로써,
그리고 그 괴로운 삶을 거부함으로써,
그 인생의 수업을 이수 못한 채
다음 생에까지 나머지 공부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자살하는 사람이 바로 나머지공부의 대표적 사례다.
주어진 역경을 못 견디고 거부하고 저항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는 곧장 그 수업을 끝마치기 위해
그 역경을 다시 선택해서 삶을 부여받는 것이다.
이 생에 거부하고 저항하던 에너지를 듬뿍 양분으로 받아
다음 생에서는 지금보다 더 힘겨운 수업을 이수해야 하는 것이다.

마음을 활짝 열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임으로써,
완벽하고도 아름다운 삶을
마음껏 누리고 느끼며
놀이하듯 가지고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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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성, 진리에 직접 물으라
 

어떤 아주머니께서 불서들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자주 읽어본다고 하시는데 때때로 신기한 것을 경험한다고 하신다. 때때로 자식 문제로 고민이 있다거나, 어떤 고민들로 답답해하면서 답을 찾다가 우연히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볼 때, 종종 마침 바로 거기에서 원하던 정확한 답변을 얻게 되곤 한다는 것이다. 마치 나를 위해 부처님께서 바로 그 쪽을 펼치게 해 주신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때때로 일어난다.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에 답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모처럼 켠 TV에서 그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한다거나, 우연히 펼친 신문기사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새로운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을 때, 평소에는 그것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가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에서도, 책에서도, 혹은 주변에서도 동시적으로 그것을 듣게 되기도 한다. 이것을 칼 융은 동시성(同時性)으로 설명한다.

칼 융이 한 여인을 치료하는데, 그 여인이 하루는 풍뎅이 꿈을 꾼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창문 밖에 풍뎅이가 날아온 것이다. 이러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동시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질서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피트는 이러한 융의 동시성이 ‘감추어진 질서’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본다. 겉에 드러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있으며, 그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말하듯, 우리의 깊은 차원은 인드라망 그물코처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 연기적 연결성에서는 그 무엇도 우연이 없다. 더욱이 감추어진 질서라 불리우는, 우주법계의 근원적 질서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어떤 부족함도 없다. 부처님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라, 본래 충만했던 진리를 다만 발견하신 분이다. 사실, 진리는 온 우주에 충만하게 꽉 차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때때로 체험하곤 한다. 질문을 던지면 언제든 진리의 차원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뭣고’ 하고 화두를 던지면 답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피트는 동시성을 자연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광대한 질서를 힐끗 엿볼 수 있게 하는 찰나적인 틈새라고 믿는다. 바로 그렇다. 이 겉에 드러난 몽환포영(夢幻泡影)의 허상의 세계 이면에 완전하고 충만한 진리가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만 우리의 아상과, 아집, 탐진치 삼독과 무명이 그것을 보는 것을 제한할 뿐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마음을 쉬고, 내면을 살펴본다면 그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힐끗 엿보게 될 수 도 있을뿐더러, 그 세계와의 깊은 연결을 이룰 수도 있으리라.

마음을 비우고 질문을 던지라. 세속적인 질문에서부터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해답을 법계에서는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 물론 그 답은 다양한 방식으로 온다. 스님의 설법, 책이나 신문, 아이들의 말 한마디, TV, 아니면 문득 내면의 직관을 통해서도 올 수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음을 닫아걸지 않는다면, 활짝 열린 맑은 정신 안으로 진리가 문을 두드릴 것이다. 스승에게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제부터 우주법계의 진리 그 자체에 직접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떤가.

그것은 직접적이며 본질적이다. 또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법계 본연의 계획에 입각해 무한한 자비와 지혜로써 내리는 답변이 올 것이다. 에둘러 가던 버릇을 돌이켜 내면으로, 법계로 직접 노크 해 보라.

운학사 주지 법상 스님


법보신문 1040호 [2010년 03월 16일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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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창조하는 네 가지 방법

빗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지난 시간에 ‘내가 내 삶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내 삶을 아주 멋지게 만들어낼 수가 있다, 창조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랄까 좀 희망찬 그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전 같으면, ‘집착을 하지 마십시오,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사십시오.’ 이런 말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마음을 멋들어지게 창조해내고 자유자재로 쓰면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보니까 아무래도 아주 상기가 되면서 ‘아! 이렇게 멋지게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바꾸어 가면서 살 수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 있는데, 오늘은 어찌 보면 이제 좀 찬물을 끼얹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말씀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일으켜서, 나의 삶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업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창조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내 삶을 만들어낸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구의 삼업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사는 이유는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써 다른 업을 지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얘기했다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가 창조를 할 수 있느냐? 그리고 대부분 내가 내 생각으로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안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로 된다는 얘긴가? 사실과 좀 다른 것 같다. 『시크릿』에서도 얘기하기를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 나의 현실에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더라.’ 라는 얘기를 한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이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아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 이 우주법계에서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하면서 남들에게는 ‘너는 망해라’ 라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킨 거예요. 나는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너지와 남들은 망해라 하는 에너지를 함께 일으킨 거니까 우주법계에서 볼 때는 이게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겁니다.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으니까, 그 두 가지 마음에 대해 똑같이 창조에너지를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되고 싶단 말인지, 망하고 싶다는 말인지 영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써 나의 창조에너지로 바뀐다 이 말입니다. 남들에게 ‘너 좀 망해 봐라’ 라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나를 망하게 하는 강력한 창조에너지로써 내 삶을 망하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오는 자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세상을 창조하는 일체유심조의 원칙은 뭐냐 하면 바로 내 바깥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했느냐, 얼마만큼 자비롭게 대했느냐 하는 것이 내 삶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아주 주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원리는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면 할수록 내 삶은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일종의 아상(我相), 아집(我執)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기 스스로 자기 능력을 한정짓고, 한계를 지우기 때문에 그만큼의 범위 안에서만 창조가 되지 그 바깥의 더 많은 창조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은 이것 밖에 안 돼,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계를 지움으로써 자기능력을 자기 스스로 그렇게 딱 제한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능력을 딱 제한 해 놓으니까 그 능력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기 한계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자신을 제한하고, 묶어두는데 쓰고 있으니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내 스스로 그 제한과 한계와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놓여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외부적인 힘도 나를 바꿀 수 없고, 내 삶을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자기 한정의 관념만 깨버리면 무한한 자기 창조의 에너지로써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이 깨어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다면 그것이 생겨나기를 바라고, 빌고, 기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라는 그 부분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 하고, 만족스러워하고, 충분히 느끼고 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빌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고 한다면 돈을 더 벌려고 막 기를 쓰고 원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재산 그 돈에 대해서 충분히 누릴 줄 알아야 되고 느껴볼 줄 알아야 되고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알면 그 감사한 것이 우주로 전달이 되어서 감사할 일들이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감사하지 않고 만족해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일으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창조의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감사와 만족에 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현실을 창조해 내려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맑고 깨끗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깨끗하고 텅 비어 있을 때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강력한 에너지를,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항상 혼란스럽고 망상이 들끓고 온갖 생각들이 막 죽 끓듯이 왔다갔다 오락가락합니다. 한 가지 판단을 가지고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가지고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듯이 그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까 뭔가 한 가지 원하는 것에 힘이 집중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잘 하는 말로 몰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흐트러지고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에너지를 강력하게 쓸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명상과 기도 끝에 하는 발원이 힘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삶을 멋들어지게 창조하고 싶다면, 네 가지가 중요합니다. 만약에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창조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네 가지 중에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자비로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방법이지요. 두 번째는 자기 스스로의 능력을 한정짓지 말아야 한다, 아견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무한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바라고 빌기보다는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하는 참선과 명상 같은 그런 기도와 수행을 통해서 발원을 했을 때 그것은 큰 힘을 받는 것이라고 이렇게 네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삶의 창조를 뛰어넘으라

그러면 이제 좀 어떻습니까? 이제 좀 현실에서 잘 이루어집니까? 이렇게 마음을 쓰면, 배운 것처럼 마음 내는 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삶이 창조되어 집니까? 물론 아직까지 의심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하는 그 크기만큼 거꾸로 내 삶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얘기죠. 이렇게 이제 창조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내가 내 뜻대로 세상을 창조한다 그것은 업이 아닙니까? 뭔가 내가 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의지적인 행위이잖아요. 의지적인 행위가 곧 업(業)입니다. 의지적인 생각도 업(意業)이고, 의지적인 말(口業), 의지적인 행동(身業)도 업입니다. 아주 정확히 본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지만 다른 말로 내가 나의 업을 창조해내는 거예요. 업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바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좋은 에너지, 좋은 삶을 창조해내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지난 시간에 내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설법을 했던 내용은 뭐냐 하면 “기왕 세상을 창조할 거라면 못살고 고통 받고 부정적인 에너지 가지고 세상을 살지 말고 긍정적인 삶을 창조하고 뭔가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고 부유하고 풍요롭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창조하십시오.” 라는 방편으로써 그런 말씀을 드렸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이것이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한다면 본질은 뭔가? 방편이 아닌 본질적인 지혜는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내안에서 자성부처님께서 본래적인 참나가 나를 창조해내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맡겨놓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가 내 삶을 창조하도록 완전히 나를 내맡겨놓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창조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본질적인 지혜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껍데기 의식인 에고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무명(無明)이다 보니까 나 잘되고자 하는 아상(我相)과 이기심에 기초한 세상을 창조한단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방편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의업을 가지고, 마음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나의 삶을 창조 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아름답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창조된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창조에너지로 작업 해 놓은 것이 현재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지은 업들이 모여 그 업보라는 결과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라는 것은 곧, 불교적 표현으로 업을 변화시킴으로써 업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은 행위인데, 신구의 세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그 중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의업(意業)이고,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마음,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업, 그 중에도 뿌리인 의업, 즉 생각을 어떻게 조작하고 다스리며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업의 결과인 업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도 바로 이것입니다. 업을 내보내면 업보가 끌어당겨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중요한 건 내보내는 업에 있어요, 업을 내보내면 당연히 업보가 끌어당겨지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반대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끌어당겨지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했습니다. 불교는 나의 행위가 중심이고, 『시크릿』은 내가 받을 결과물이 중심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데서 조금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업을 잘 지어야 좋은 과보를 받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하면 업을 잘 짓고 과보를 창조해 낼 것이냐’를 말씀드렸는데요,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업이라는 것이 이 세상, 즉 껍데기 세상의 기본 원칙이지만, 근원으로 들어가면 업이라는 것도 공(空)합니다. 우리가 선업, 악업이라고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본질에서 보면 선악이라는 것도 공해요. 불교에서는 업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업이라는 공한 환영과 같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그 업 자체를 뛰어넘고, 선악 자체를 뛰어넘어 어떻게 업을 넘어선 본질적인 곳에 가 닿을 것이냐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쉽게 말해 불교의 핵심을 칠불통게(七佛通偈)에서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라는 의미인데요,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업의 영역이라면 불교는 선악 업을 뛰어넘어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즉 업이라는 구속에서 조차 뛰어넘는 것을 설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창조에너지를 가지고 좋은 업을 짓고, 우리가 마음을 잘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명예도 높아지고, 좋은 집, 좋은 차도 사고, 남들 돕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 된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으로 그냥 인생이 끝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부자로 살면서도 마음이 가난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를 창조하고 싶어서 부자를 창조할 수는 있겠지만 부자와 가난 그 양 극단을 뛰어넘어 부에도 가난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부자가 되고, 명예도 높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그 차원에서는 『시크릿』의 가르침, 업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공부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중심 잡히고, 여여한, 우뚝 선 지혜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착하게 사는 방법은 됐을지언정 착하게 사는 것이 도(道)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착한 것이 도는 아니다.’ 이를테면 제가 누군가에게 기분은 나쁘겠지만 꼭 해 주어야 할,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을 한 마디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그 사람하고 좋게 지내려면 날카로운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겠지만 진정 그 사람을 위한다면 당장은 조금 껄끄럽더라도 한 마디 해 줘야합니다. 착하게만 산다고 그것이 다는 아닌 겁니다. 선악을 뛰어넘고,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으며, 부와 가난을 뛰어넘는 더 큰 지혜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텅 빈 근원 위로 많은 것이 지나간다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것은 이 완전한 지혜, 내안에 있는 부처가 나를 창조할 수 있도록 전혀 뒤탈이 없는 그런 어떤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데요, 이런 말씀을 드리려면 우리가 먼저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졌는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걸 말씀드리자면 본래는 어땠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는 지금 나라는 아상에 얽매여서, 에고에 얽매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질은 어떠한가? 나라는 삶에 얽매이지 않았을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중생으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아니었을 때는 어땠을까 하는 얘기입니다. 이 우주법계의 본래 근본, 나라는 존재의 근본 마음자리, 그 바탕자리, 주인공자리, 그 자리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니, 완벽하고도 고요하고도, 청정하고도, 순수하고도, 텅 비어있는, 하여튼 맑고 텅 비어있는 어떤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원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나라는 존재를 원이라고 했을 때, 원 안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욕심과 집착과 삶의 계획과 판단과 온갖 것들로 내 것, 내 생각, 내 소리라는 것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거죠. 본래는 이 원이 텅 비어있었고 맑고 청정한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티 없는, 먼지하나 없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는 그러한 청정하고 맑은 텅 빈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이 우주법계도 그렇고. 본래의 우리 자신은 티 없이 맑고 깨끗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많은 때가 낀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본바탕은 항상 깨끗하고 맑고 청정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더러워 보여서 그렇지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더럽혀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마음자리는 항상 맑고 깨끗하고 청정하다, 텅 비어있다, 텅 빈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 이 맑고 깨끗한 텅 빈 자리에 수많은 것들이 지나갑니다. 흘러가고 지나갑니다. 삶이라는 것이 등장을 하고 사라지고, 스쳐 지나갑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가고, 갑자기 친구가 하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중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고등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20대 때 대학교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또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요. 여러분 삶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지금까지 내 존재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좋은 일도 스쳐 지나가고 나쁜 일도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가 도로에, 고속도로에 가만히 있으면 자동차들이 무수한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듯이 그렇게 지나간단 말입니다. 온갖 생각 생각들도 지나가고 우리의 어떤 감정들도 지나가고 수많은 에너지들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물질들이 지나가고 수많은 대상들이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고 사건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어떤 에너지의 파장들이 파동들이 지나갑니다. 제가, 물리학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본질은 모든 물질도 정신도 모두가 하나의 파동이었고 파장이었다 그랬거든요. 수많은 파동들 파장들이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사건이 되었든, 수많은 파동과 파장, 에너지의 파장이 그 본바탕 위를 지나간다 말이에요.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맑고 깨끗한 바탕 위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그것은 그냥 지나가니까 맑고 깨끗한 바탕에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물러있지 않는단 말이죠. 그냥 지나가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모든 것이 지나갈 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벌이기 시작했냐 하면, 그 중에 눈에 띠는 게 있단 말입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게 있어요. 뭔가 모르게, 모든 것들이 수많은 것들이 지나가는데, 수많은 자동차가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그 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맘에 드는 게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의식의 초점을 집중합니다. 처음의 텅 빈 자리는 수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더라도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그 스쳐 지나는 것들은 아무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았어요.


지나가는 것을 멈춰 세운다

우리의 의식은 다만 무엇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어요. 강가에 앉아서 강물 줄기가 지나가는 것을 다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좋고 나쁜 게 없었고, 나와 더 가깝거나 더 먼 것도 없었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었어요. 좋은 것 나쁜 것 없이 그저 존재 위를 스쳐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나에게 좀 더 관심이 있는 무언가가 눈에 띠기 시작했고, 거기에 관심의 초점을 갖다 보태게 된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냥 스쳐지나가야 될 것이 갑자기 나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나의 의식이 거기에 딱 머물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의식으로써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자, 다만 바라보는 자로서 머물렀어야 되는데, 다만 보는 자가 되지 않고, 거기에 내 생각을 개입시키고, 내 의지를 개입시켜서 내가 맘에 드는 것을 유독 관심을 가지고 봤단 말입니다. 쉽게 말해 아상을 개입시킨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멈추게 됩니다. 내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멈추게 만든 거예요. 그럼으로써 머무르게 됩니다.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바라보기만 해야 되는데, 그것이 나에게 와서 머물기 시작합니다. 그걸 보고 뭐라고 해요? 집착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집착이 하나 없었던 맑고 청정하게 티 없이 깨끗하던 본바탕에, 그저 그 위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것들을 그 가운데 일부분을 내 식대로 내 마음에 드는 것들만 채택해서 머물게 만들고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옆으로 껴놓고 사는 겁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집착하고, 좋아하고, 머물러 사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것과 관련된 것들, 또 다른 좋은 것들이 눈에 띠게 되고 그때그때마다 이제 집착해서 붙잡아 놓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집착의 덩어리들은 자꾸자꾸 덩치를 키워요. 점점 커지는 겁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사실은 그 본바탕이 본래 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아상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또 나머지 대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집착 없이 그저 지켜보는 자 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인 삶도 일부분 살고 있고 중생의 붙잡고 집착하는 삶도 살고 있습니다. 그냥 스쳐 보내는 것도 있고, 붙잡아두는 것도 있잖아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내가 좋다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상으로 붙잡아 놓고 집착해 놓고 내 것으로 만들려던 대상들을 나머지 대부분 그저 스쳐 보내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두고 스쳐 보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예, 자유로워집니다. 붙잡아 둘 것이 없어져요. 내 것을 빼앗길까봐 근심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집착한 것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그 모든 삶 위에 스쳐 지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되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크게 보면, 집착을 안 하고 살고 있습니다. 선택적으로 내가 관심이 있는 것들만 집착을 하고 살지, 관심 없는 것까지 집착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상, 아집의 형성

제가 앞에서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자동차가 휙휙 지나갈 때 빠른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은 집착 안 하거든요. 마음이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갈 뿐이에요. 근데 순간 어떤 한 차에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남자친구가 거기에 타고 있는데, 딴 남자하고 딴 여자하고 부둥켜안고 운전하는 것 같은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그럼 그것은 붙잡는 겁니다. 그 생각에 계속 머물러있어요. 그래서 몇날 며칠이고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 그 다음에 여자 친구를 만나 얘기도 못하겠고 그 생각에 자꾸 붙잡혀있는 겁니다. 이것처럼 뭔가를 붙잡아두면 그것이 나에게 와서 문제가 되고 그것이 나에게 집착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집착하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더 많지요. 더 많습니다. 즉 흘려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흘려보내듯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것 또한 흘러갈 수 있도록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흘러가는 것을 막아섭니다. 내 의지로써 내 생각으로써 그것을 거기에만 제한시켜서 관심을 둠으로써 막아서서 그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한단 말이지요. 그럼으로써 뭐를 창조하느냐 하면 이제 아집(我執)을 창조해냅니다.

나라는 집착덩어리, 내가 좋아서 선택적으로 붙잡아두었던 것, 그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어때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내거라고 생각해서 붙잡아두었던 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정이 드는 거예요.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자꾸 개입되니까 이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붙잡아 둔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다, 나의 정체성이 바로 내가 집착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집착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아니고 나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스쳐지나가는 것을 붙잡아놓았을 뿐입니다. 붙잡아놓았을 뿐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흘러가도록 돼있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나에게 와 있을 것이라는 고정된 믿음을 가지고 붙잡고 있는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아요. 꽉 부둥켜안고 절대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질이나 존재 뿐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가운데 어떤 한 가지 특정한 생각을 붙잡아서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내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고 내 견해라고 생각하고 내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자기 견해가 뚜렷한 것을 좋아해요. 나라는 견해가 뚜렷하게 있으니까 나라는 견해 그것을 가지고 또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 견해에 합당한 외부적인 대상을 찾아서 붙잡아 집착합니다. 그러면서 이 바깥에 있는 것들도 다양한 것들이 내 것으로 편입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안팎에서 내 것이 넘쳐나기 시작하고, 내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아집과 아상, 아견이라는 나의 집착 덩어리가 이 몸뚱이를 붙들게 됩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설정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방어벽이라는 것도 내 것이라는 집착, 어떤 생각에 대한 집착, 그것을 하나의 방어벽처럼 나라는 울타리, 나라는 울타리를 막고 있는 방어벽으로써 탁 틀어막고 있는 거지요. 그 방어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의 집착이고, 하나의 나라는 아견이고, 아상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정의하는 하나의 틀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다 제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요.

어떤 한 가지를 보고 누구나 집착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은 이것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그저 흘려보내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돌을 수집하는 사람에게는 강가에 있는 돌이 다 스쳐지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중 특별한 돌들을 붙잡아 ‘내 것’ ‘내 소유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아무리 봐도 내 거라는 생각이 안 들고 그냥 흘려보내기 밖에 안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자기가 만들어놓은 어떤 틀, 아집, 아상, 그 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세상을 내가 만들어 놓은 아집에 빗대어서 세상을 판단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잣대 짓고, 방향성을 설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그것에 기초해서 만들어지고, 삶의 방향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까 말했듯이, 돌을 수집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떠냐 하면 돌만 찾아다닙니다. 심마니가 산삼만 캐러 다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건 관심이 없습니다. 운동 좀 해볼래 해도 운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 좀 해볼래 해도 수행에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회사에 높은 자리를 준다고 해도 별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요. 내가 딱 틀 잡아 놓은 나라고 형성해 놨던 그 틀에 있어서 거기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를 정의하는 어떤 집착덩어리를 가지고 자기를 정해놨던 틀로 만들어서 그것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내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식을 전혀 다르게 키웁니다. 자식에게 정말 친환경 쪽으로, 정말 자연 그대로, 정말 지혜롭게 키워야 되겠다는 가치관을 가진 분들은요, 서울에 사는 대학교 교수님이 자기 자식이 서울의 좋은 대학, 고등학교, 좋은 대학을 다니는 애를 갑자기 데리고 시골에 내려와서 마음껏 뛰어놀라고 시골에 있는 허름한 대안학교 같은 데 보낸다 말입니다. 그 좋은 대학 그만 두고 서울대를 나오고 무슨 카이스트를 나오고 한 사람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 삶을 갑자기 때려치우고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서울대를 나왔던 사람들이 대거 몇 명씩 한꺼번에 출가를 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 어떻게든 공부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가치관을 가지고 키우는 사람은 모든 것의 기준을 공부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결정짓겠지요. 그러나 어떤 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면 뛰어놀게 해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과 하나 되어서 어울리게 해줄까 이런 거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삶의 방식 자체가 어디에 머물러 있고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이라는 그 직업이 바로 나와 동일시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 과목 어떤 과목을 담당한다고 하면 그 과목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 뭐가 관련되더라도 그 과목과 관련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바라보더라도 그 틀에 그 색안경에 입각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수학선생님은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보고, 과학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보고, 음악선생님은 어디를 가도 관련된 음악을 찾게 됩니다. 우스개로 직업병이라고도 하는데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평생 흙 가지고 무엇을 만들고 짓고 하셨다 보니까 어디 모처럼 여행을 가셔서도 흙만 보시면서 좋은 자재다, 아니다 하는 것만 생각하십니다.

스님이나 성직자 분들도 마찬가지죠. 자기종교라는 그 틀에 빗대어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색안경에 빗대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불교신자나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도 마찬가지죠. 자기의 종교적인 색안경, 집착하고 있는 그 종교적 견해나 사상 그 틀 속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갈등이 엄청나잖아요? 자기만이 집착하고 있는 하나의 덩어리가 딱 있어서 그것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환경론자와 개발론자 사이에 그 갭 또한 엄청 크거든요. 그것도 자기가 나름대로 틀 잡아 놓은 그것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나라는 생각에 탁 굳게 집착되어 있단 말입니다.


창조할 것인가 창조를 넘어설 것인가

이렇게 되다 보니까 처음에 애초에 텅 비어있던, 맑고 깨끗하던 그 공간을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 중 처음에는 하나를 붙잡아 두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개, 세 개, 수많은 것들을 붙잡게 되고, 그 붙잡아놨던, 머물게 집착해놨던 수많은 것들로 나라는 어떤 존재를 형성시키게 됩니다. 아상을 만들고, 존재의 집을 만들고, 어떤 존재의 성을 만든단 말입니다. 견고한 어떤 벽돌을 쌓아서, 방어벽을 쌓아서 나라는 것을 딱 만들어두는 작업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해왔던 작업이고, 그 틀에 기초해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행무상이라는 단순한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단순한 가르침을 변화하도록 내버려두질 않고, 막아서고 집착하고 붙잡아둠으로써 생겨난 일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그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 또는 시크릿이나 요즘 유행하는 다양한 책들에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창조해내라 라고 얘기하고 있는, 역설하고 있는 그 많은 가르침들, 그것이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말한 본질적인 가르침에서 얘기한다면,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것들을 내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붙잡아서 나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법을 말해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의 어떤 집착, 집착 덩어리를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것을 집착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그것에 집착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물론 이것도 방편이라고 했어요. 기왕 집착할 거면 나쁜 걸 집착하지 말고 좋은 걸 집착해라, 기왕이면 아주 그냥 지지리도 가난하게 못 살지 말고 부유하게 살아라, 이런 방편을 얘기해줬던 거예요. ‘나’라는 것, 아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을 ‘나’로 창조할 것이냐 하는 부분이 바로 지금까지 살펴봐 왔던 부분입니다. 쉽게 말해 창조 작업은 곧 아상을 견고히 하고 확장하는 방법인데, 어떤 방법으로, 어떤 부분으로 나를 창조할 것이냐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란 곧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 창조한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기에, 이런 아상을 창조해 내기 보다는 차라리 창조해내지 않는 게 더 윗자리입니다.

선행(善行)보다는 무위(無爲)의 행이 더 본질적이란 말이지요. 선행을 하는 것은 선의 과보를 받을지언정 끊임없이 윤회하는 토대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선의 과보를 통해 천상에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벗어나는데 있는 것입니다. 즉, 선악 자체를 뛰어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는 법을 방편으로 말씀을 드렸지만, 거기서 머물러서는 정체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얘기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생각은 항상 이기적인 것을 창조해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창조해내요. 우리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아집과 아상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본질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가 있습니다. 아상에 묶여 이기적인 것들만 만들어 내기 쉽습니다.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만을 위한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다보면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처음부터 실수하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처음부터 과한 욕심을 부려서 나쁜 짓까지 하게 되고 남들을 괴롭혀서라도 더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유함이 늘어나다 보면 점점 더 집착이 늘고, 차차 점점 더 삿된 생각으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상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창조 작업, 아상과 아집을 잔뜩 쌓는 작업을 잘하는 사람을 아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옹호하고,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줍니다. 온갖 상을 내려줍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하나 딱 일으켜서 부자가 된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그것이 아주 좋은 일인 것처럼, 아주 아름다운 일인 것처럼 당연히 이 세상에서는 알고 있고, 묘사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렇게 강력한 마음 에너지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을 때 업(業)조차 비껴갈 수 있습니다. 잠시 비껴갈 수 있다 이 말이지요.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업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업이라는 것은 과거에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입니다. 과거에 만들어놓은 창조의 행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가 지금 드러나는 거거든요. 지금 아니면 미래에 드러난다는 거예요. 즉 과거에 이미 해놨던 창조의 행위, 신구의로써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 그것을 우리는 업이라고 부릅니다. 근데 지금 이 순간 내가 한 창조의 행위, 그게 바로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자유의지 즉 현재의 업으로써 과거의 업에 대한 과보를 잠시 비껴갈 수는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과거의 과보를 받아야 하지만 현재의 자유의지, 즉 창조의 에너지가 강력해서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새로운 업을 짓고, 새로운 자유의지를 일으킨다면 이번에 받아야 할 업을 지금 당장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미 지어놨던 업은 반드시 받기는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언젠가 받아야 해요.

이 정도로 우리가 지금 생각한 어떤 마음 에너지가 강력하기는 하나, 업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거나, 업장을 소멸시키거나, 이럴 수 있지는 못하다는 말입니다. 창조 작업이 모든 것의 근원적인 해결책은 안 된다는 겁니다. 어차피 과거에 지어놓은 아주 큰 업이 있으면, 지금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했더라도 그것은 꿈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꾼 것과 동일한 것이지 결국에는 그 악업이 내 인생에 등장을 반드시 하게 될 때가 있단 말입니다.

지금 당장 등장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 에너지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현실세계에서는 승승장구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나쁜 짓도 하고 못된 사람인데도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때, 혹은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 다음 생에 결정이 됩니다. 그 다음 생에 바로 인색했던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날 수가 있고, 사람을 괴롭힌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 태어나도 괴롭힘을 당하는 인연을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죠.



아상이 아닌 참나가 나를 이끌게 하라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느냐?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이냐? 내 삶을 아상에 기초해 창조하며 사는 방법 말고,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앞에서 제가 잠깐 말씀 드렸는데, 내가, 나라는 아상 아집이, 나라는 에고가 내 삶을 창조해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해서는 안 돼요. 아상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주법계가,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참된 법신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얘기하기 좋아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불성, 주인공, 자성불, 본래자리, 참나, 신성(神性), 대지의 어머니, 어떻게 얘기해도 좋은데, 그 본연의 자리, 본바탕의 자리, 그 자리에서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그냥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더 깊은 본래의 내가 나를 끌고 가도록 맡겨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나는, 아주 나약한 나고, 아주 조악한 나고, 아상에 갇혀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아주 조잡스런 나가 아니겠습니까?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이잖습니까? 이런 지혜도 없고 빈약한 내가 아니라 내 안에는 더 큰 내가 있고, 엄청난 지혜의 덩어리가 있단 말입니다. 참나가 있다. 그 참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도록 하는 겁니다. 결정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주인공이 할 수 있도록, 모든 내 안에 있는 본래자리가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법계가, 우주법계가 스스로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조작해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에서 행하는 삶의 신비가 일어나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도록 내버려둔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가장 지혜로운 본연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내 안의 자성부처에게 믿고 맡긴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진리의 일이 펼쳐집니다. 아주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일들이 펼쳐져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우주법계는 나에게 근원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겉껍데기의 나라는 아상은 당장에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본질적인 도움이 아닌 일들을 벌입니다. 아상이 보기에는 남들을 돕기보다는 나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근원적 지혜에서 본다면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을 때는 당장에 조금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참된 지혜의 일들을 합니다. 이처럼 우주법계의 계획은 광대하고 무한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는 이기적인 성취를 잘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이익에 기초해 벌어들인 돈이고 성취이며, 타인을 밟고 일어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 죽고 나면 다음 생에 지옥 갈 게 뻔하단 말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우주법계에서는 그런 계획을 잡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음 생에까지 도움이 되는 계획을 잡는단 말입니다.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한 계획은 더 장대하고, 더 크고 넓으며, 시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계획은 지금 나의 계획과는 다를 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 당장 돈을 많이 버는 게 절대목표일 수 있으나, 법계의 계획은 그게 목적인 아닌 겁니다. 우주법계의 계획은 내 계획과 다를 수 있으나 항상 전적으로 옳은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우주법계에서는, 내 안의 자성부처는 나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 그것도 나 하나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써 전적으로 옳은 일만 하고 있는 겁니다.


우주법계의 본래의 계획, 금강경의 가르침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두 참다운 지혜, 참된 깨달음, 열반, 평화, 니르바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엄청나고 웅대한 우주법계의 계획을 위해, 부처님의 계획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즉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강경』의 사상이에요.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녀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구류중생 전부를 내가 모두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발원해야 하며 그 발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답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거기에 ‘내가 했다’고 하는 아상을 완전히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해 냈다는 아상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아상을 타파하고 우주법계의 계획에 따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 따라 그저 일체 모든 존재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그 큰 법계의 질서에 나를 내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보기에 그게 조금 틀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더라도, 좋든 나쁘든, 맞고 틀리든, 잘된 일이든 나쁜 일이든, 판단 없이 무조건 맡기고 가라는 겁니다. 더 큰 차원의 진리에서 더 큰 차원의 어떤 나를 돕는 계획의 일환에 모든 것을 맡기고 가라 하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아상이 무너지고, 뭐든지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믿고 맡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붙잡지 않겠지요? 이제부터는 막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내 걸로 만들어놓고 막 집착해서 붙잡던 삶에서, 모든 걸 믿고 맡기게 되니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게 됩니다. 그냥 거기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요. 흘러가는 것이 법계의 일이구나 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제행무상이 진리란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거예요. 이처럼 내 걸로 붙잡지 않고, 믿고 맡기게 됐을 때 저절로 집착이 놓입니다.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주의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맡기는 것이 바로 무집착(無執着),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겁니다.



창조할 것인가 내맡길 것인가

그러면 이즈음에서 궁금한 게 있을 것입니다. 앞 장에서는 내 삶을 내 스스로 창조하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보다는 온전히 맡기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 어떤 말이 맞는 겁니까?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앞에서 설명한 일체유심조, 즉 내 스스로 창조하는 작업은 방편의 지혜이고, 본질적인 지혜는 곧 내맡김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창조한다는 말은 업의 굴레 속에서의 일이고, 내맡김이라는 것은 업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또 창조 작업은 내 스스로 무엇이 창조되기를 바라고, 원하고,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고 나쁜, 옳고 그른, 원하고 원하지 않는 둘로 나누어지기 쉬워요. 의도한 바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때 우리는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결과에 집착하게 된단 말입니다.

물론 창조의 작업을 행하면서, 즉 마음으로써 무언가를 의도하고, 어떻게 되기를 바랄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그저 순수한 의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뭐랄까요 그것은 그저 선호의 차이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나는 이 두 길 가운데 이 길을 선호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쨌든 그 두 가지 길 모두가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결과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도 금방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죠.

이것처럼 우선 첫째로는,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창조하며 살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 첫째 보다 더 깊은 차원의 본질적인 지혜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모든 선호를 놓아버리고, 모든 의도를 놓아버리고,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언제나 지금 이대로 완전한 우주법계의 완전성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내 의도가, 내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이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굳게 믿고 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창조 작업에 비해 두 번째 내맡김의 길은 더없이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아니, 내맡김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구현해 가는 작업이 됩니다. 창조하겠다는 생각에는 창조될지 말지에 대한 구분이 있고, 원하고 원하지 않는 선호가 있지만, 내맡김은 그 어떤 구분도 없고, 분별도 없고, 오직 완전성만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겁니다. 내맡김의 길에서는 언제나 ‘지금 이 자리’가 최상의 자리가 됩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창조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것을 창조해야지만 완전해 지고, 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이 모습 그대로 완전히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해 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원하던 모든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내맡길 것인가, 관(觀)하라

그러면 이제 맡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에 일체를 내맡기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 잘났다고 내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우주적인 근원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겠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고 싶어도 잘 안 된다는데 있습니다. 맡기고 싶지만 맡겨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건가 싶다 말이에요.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맡겨지고, 어떻게 해야 흘러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답이 바로 똑바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어떤 것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것이 어떤 방식으로 스쳐지나가다가 내가 그것을 끌어당겨서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내 옆에 두려고 애써서 집착하고 있었는지까지 눈에 보이고, 이것을 놔버리게 됐을 때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이 흘러갔을 때 더 큰 자유가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고 집착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뒀을 때, 그때 아름다운 본연의 일이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관(觀)하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깨어있어야 된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려 하는지를 분명히 보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분명히 보고 있을 때, 또렷이 보고 있을 때, 스쳐지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내가 막아서고 있는지, 이 세상 이치가 제행무상이라는 것, 제법무아라는 것, 실체가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구나 라는 자각이 생기고, 이해가 생기고, 참된 지혜, 앎이 생기는 겁니다. 그랬을 때 저절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억지로 집착을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집착이 놓여지게 되죠. 저절로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나인가

그러면 보세요. 이제 방법을 말씀 드렸습니다. 관하라, 믿고 맡기라, 집착을 버려라 얘기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도,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없을까요? 이렇게 또 묻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조금 다른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어떻게 하느냐?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두는 스쳐지나가고 있는데, 스쳐지나가는 것을 내가 내 것으로 붙잡았고, 집착해서 묶어두었습니다. 그렇게 묶어 둬 놓고 수많은 것이 내 옆에 막 쌓여있는 것, 나라고 생각해서 막 쌓여있는 것, 그게 나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내 소유, 내 생각, 내 성격, 내 몸뚱이, ‘이것이 과연 나인가’, ‘이것은 누구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아놓고 그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었는데, 실제 그게 내가 맞는 것인가 냉정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되요. 다시 말해 내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집착해서 쌓아놓은 게 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나인가. 몸뚱이를 나라고 하지만 이것은 이번 생에 지나고 나서 다음 생이 되면, 남자가 여자로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남자로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신의 세계에 갈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럼 도대체 어떤 것이 나냐? 가만 살펴보면 내가 없단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구냐’, 이렇게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고 있는 ‘이것은 도대체 뭐냐’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된다 말이에요.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나에게 묻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꾸만 묻게 되면 어쨌든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지를 답을 내야 되잖아요. 물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답을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답을 찾게 됩니다. 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봐야 되거든요. 봐야 답이 나오잖아요.

문제를 냈는데, 어떤 도형을 하나 갖다놓고, 이 도형을 어떻게 하면 어떤 게 만들어져? 이거 한 번 만들어 봐라, 답을 내 봐, 하고 물으면 그 답을 풀기 위해서는 도형을 자꾸 봐야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봐야지만 답이 나오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봐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이 뭐꼬?’ 하면, 나는 누구인가, 이 뭐꼬 라는 화두에 답을 내려면, 봐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눈여겨보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편견 없이 봐야 합니다. 기존의 편견, 선입견 어린 시선으로 보면 답을 낼 수가 없어요. 새로운 문제를 냈는데, 기존의 편견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답을 풀 수가 있겠어요? 새로운 문제를 풀려면 완전히 과거를 놓아버리고, 편견을 놓아버리고,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봐야 됩니다. 편견의 시선으로 보면 똑같이 집착의 눈으로 보이니까 똑같은 편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편견 없이 무분별로써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게 됐을 때 답이 나온다 그 말입니다. 이게 바로 화두선(話頭禪), 간화선(看話禪)의 방법입니다.

화두선, 이 뭐꼬,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그 답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거예요. 그 물음을 자꾸 던졌을 때, 그것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지켜보게 되고, 그 결과 ‘아 이것이 흘러가는 거고 내가 붙잡아 놓은 것이구나, 이것이 붙잡아 놓은 것일 뿐이지 이것이 실체가 아니구나’라는 자각이 생겨서 법계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을 보게 된다는 관하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화두수행이나, 관하라는 수행이나, 집착을 버려라 하는 수행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겨라 하는 수행이나,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든 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여라, 거부하지 마라,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얘기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써 내가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법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또 그렇게 했을 때 집착이 놓이니까 집착을 하나하나 놓아보고, 또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나라고 생각했던 이 집착덩어리 이것이 과연 내가 맞는가 라는 물음을 자꾸자꾸 나에게 던지고, 그리고서는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관찰함으로써 과연 도대체 무엇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가 하고 바라보고 관찰하는, 그러면서 직접 온몸으로 답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수행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한번 실천해 볼만 합니까? 수행해 볼만 하지요?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당장에 실천해 스스로 맛보고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법상, 무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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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절에 나와서 불교를 공부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불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혹은 불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가 갖고 있는 종교의 근원적인 이유, 본질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그 부분을 오늘은 좀 이야기 해 볼까 합니다.

‘불교의 근원적인 목적이 무엇이냐’ 라고 한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불교는 해탈과 열반을 향해 가는 종교다, 그리고 ‘나의 해탈과 열반뿐 아니라 일체중생을 해탈과 열반으로 이끄는 종교다.’라고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던 금강경의 물음을 다시한번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금강경』에 보면 수보리가 수행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를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이 질문과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금강경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그런데 이런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는지’의 답변에 대해 우리 생각에는 부처님께서 수행법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수행해라.’라고 답을 할 것으로 일반적으로 예상하고 있는데, 부처님께서는 의외로 다음과 같은 답변을 하십니다. ‘존재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 구류 중생이라고 하는 일체 모든 중생들을 열반으로 인도하여 완전히 멸도에 들게 하리라’ 라는 마음으로 살라고 답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수행을 해야 되느냐?’ 라고 하는 이 질문에 ‘일체 중생을 완전한 행복인 열반으로 이끌어야 한다’라고 하는 동체대비의 마음, 자비의 마음, 사랑의 마음을 내야 한다 라고 답을 하고 계신다는 말이죠.

여기에 아주 중요한 불교의 목적이자, 우리들 모든 존재의 삶의 목적이 드러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불교의 목적은 깨달아 부처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쉽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깨달음을 얻어서 무엇에 쓰려고 하겠어요. 깨달음을 얻어서 그것으로써 내가 돈 좀 벌어볼까, 명예를 높여 볼까, 내가 좀 큰 스님으로 대접받아 볼까, 유명세를 타 볼까, 깨달은 자로서의 어떤 대접을 받아볼까 라는 생각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나 홀로 깨달음을 얻어서 나 혼자 행복하게 살겠다거나 하는 그런 마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이유,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 스님들께서 깨달음을 얻으려고 했던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깨달음을 얻었을 때 일체 중생들을 구제하기가 쉬워진다는 이유입니다. 다시 말해 일체 중생들을, 많은 사람들을 행복으로 이끌고 평화로움으로 이끌고 자비로 이끄는 것이 훨씬 쉬워진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 거꾸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불교는 그냥 깨달음을 얻으면 끝나는 종교구나, 깨달음만 얻으면 되는구나, 이렇게 된다면 설사 지혜가 조금 증장된다 할지라도 자비를 소홀히 여기기 쉽게 됩니다. 물론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닙니다. 나중에는 결국 하나로 만나는데, 너무 깨달음과 수행에 집착하고 매진해 있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자비와 사랑을 조금 소홀히 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는 말이죠.


얼마만큼 공부가 되었는가를 보는 잣대

그런데 어찌되었든 간에 불교에서의 근본적인 목적, 우리가 절에 다니는 근본적인 목적은, 내가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겠다, 불교를 통해서 내 마음 좀 편안해 보겠다, 어떻게든 내 삶이 좀 아름다워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이런 목적으로만 절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목적은 불교를 공부함으로써 나의 행복도 행복이지만 나아가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내가 도움을 주기 위해서,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을 자비와 사랑으로 이끌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가 불교 공부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곧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린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인 것입니다. 바로 이 자각, 이러한 깨달음이 바로 지혜이고, 이러한 동체대비의 지혜가 생겨나면 저절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혜가 곧 자비이고, 깨달음이 곧 사랑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모든 목적이 자비와 사랑에 있다면, 사실 내가 수행을 해 나가면서, 마음공부를 해 나아가면서 또 절에 다니면서, 내가 어느 정도 마음공부가 되었느냐, 내가 어느 정도 영적으로 성숙되었느냐, 나의 삶에 어떤 진보가 있었느냐, 내가 조금 더 깨달음에 가까워 졌느냐, 이것을 살펴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얼마만큼 자비로워지고 있느냐를 살펴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절에 다니기 전보다 절에 다니면서 조금 더 자비로워 졌느냐, 무자비하고 악의에 찬 화와 증오에 물든 행동을 얼마만큼 더 줄여 나아가고 있느냐, 내가 많은 사람들을 볼 때 얼마만큼 더 사랑이 깊어지고 있느냐, 내 마음이 사랑과 자비로 넘쳐나고 있는지, 이것을 살펴보면, 내가 얼마만큼 수행이 되어가고 있고, 얼마만큼 삶을 바른 방향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그것을 판가름해 볼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잣대가 된다는 겁니다.



행위 자체보다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직업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어떤 의도에 의해서 행해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해 집니다. 똑같이 공무원일지라도, 똑같이 사회봉사단체에서 사회봉사를 하고 있을 지라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을 지라도, 또 똑같이 절에 와서 절을 하고 있을지라도, 어떤 의도로 하느냐, 이것이 내 개인적인 기복을 위한 것이거나 내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보다 많은 이들의 행복과 평화로움을 위해서 하는 것이냐 하는 그 의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행위 자체를 중요시 여기기보다는, 행위 이면에 있는 의도를 중요시 여깁니다. 어떤 마음의 의도로써 그 행동을 했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봤을 때는 아주 무자비하게 보이는 행동일지라도, 그것을 깨달음을 얻은 큰스님들이 했을 때는 그것을 우리가 무자비하다 라고 생각지 않거든요.

저의 은사 스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아주 엄하시단 말 이예요. 너무 엄하셔서 아주 소문이 자자하게 날 정도입니다. 그냥 뺨을 때리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때로는 거친 욕설도 하시고, 저 때만 하더라도 때때로 맞았는데, 저의 윗대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지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아주 유명하고 훌륭한 스님들, 그 스님들 또한 은사 스님 밑에서 공부할 때는, 거의 하루도 안 맞은 적이 없다고 그래요. 옛날에 군 생활 하다 보면, 하루라도 안 맞으면 잘 때 오히려 불안하다고 얘기를 하잖아요, 그야말로 그것처럼 하루라도 은사 스님께 안 맞은 날이 없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그랬다는데 지금에 와서 그 사형 스님들의 얘기를 들어보면요, 은사 스님이 그렇게 무서웠었고, 매서웠던 것에 대해서 증오를 품고 있다거나, 아주 미운 마음을 품고 있다거나,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라고 원망한다거나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 의도를 알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화를 내고, 때로는 매를 들고 하시는 그 의도,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우리를 이끌어 주기 위해서, 진리로 깨우침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그 무엇보다도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해서 마음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그 행위를 하느냐 하는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똑같이 직장 생활을 하더라도, 똑같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어떤 마음으로 할 것이냐, 그 이면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할 것이냐 하는 이것을 분명하게 명확하게 기준을 세워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의 의도에 따라 회사 전체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면, 똑같은 직장 생활에서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무한한 공덕이 붙고 무한한 복이 쌓인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똑같이 월급 받고 똑같이 일했는데 어떤 사람은 하나 복이 안 붙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마음으로 죄를 지으면서 그 일을 할 수도 있지요. 그러니까 겉에 드러난 일을 똑같이 하더라도 전혀 차원이 달라지는 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사랑을 나누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이면에서는 고통과 화와 짜증을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깨달음을 얻은 자를 볼 때 그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는지 아닌지 알 수가 있겠습니까? 알 수가 없다고 그래요.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자는, 너무나도 평범해 집니다. 우리와 다를 것이 없어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평상심으로 사는 겁니다. 지극한 평상심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길거리에서 휙휙 날라 다니거나,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신통 자재함을 부리거나, 여러분들 눈을 가만히 쳐다보고는 ‘내년을 조심하십시오. 사업에 투자하지 마세요!’ 라고 하거나 뭐 아는 소리 한다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너무나도 똑같고 평범해 지지만, 그 평범함 가운데 비범함이 스며 있는 겁니다. 그런데 중생들은 평범함 가운데의 그 비범함을 모르죠. 똑같이 밥 먹고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청소하고 똑같이 사니까 말 이예요. 그러나 이 이면에 담긴 의도는 우리와는 천차만별로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대비심, 동체대비의 마음으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이면의 의도가 어떠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동일한 행위를 하더라도,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행위 속에 이 우주를 먹여 살릴 만한 큰 대자비의 마음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또 똑같은 행위 속에 겉으로 봤을 때는 자비의 행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복을 까먹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게 중요한데, 우리가 보통 깨달음이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자비심 그것 자체를 의미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깨달음을 얻었다 라고 할 때는 그것 자체가 완전한 동체대비심, 완전한 자비심, 일체 모든 중생을 향한 완전한 자비심 이것을 의미한다는 것이죠.


참된 자비란 무엇인가

그러면 자비가 도대체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라고 하는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사랑, 자비심, 이것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라는 것은 어떤 한계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정된 것이 아니고, 선택적인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이런 사람들은 사랑하고, 저런 사람들은 사랑하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눠놓고 그 중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선택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것은 온전한 동체대비의 사랑이 아닙니다. 동체대비라는 말 자체가, 동체(同體), 같은 몸이라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여러분과 내가 이 우주의 모든 존재가 동체, 바로 내 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의미거든요. 그러니까 이 진정한 사랑,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온 우주를 하나 거르지 않고 모조리 사랑하는 것이지,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선택적인 사랑이 아니다, 조건부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는, 해석이 없고 심판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내가 어떤 여인을 사랑했고, 어떤 멋있는 남자를 사랑했다 했을 때 그것이 진정한 영적인 사랑이냐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 보통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아주 좀 뭐랄까요.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온전한 사랑이 아니라, 나라는 상에 갇힌 사랑을 하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사랑하는 이면에는 사실 증오와 믿음도 동시에 지니고 있어요. 깊이 사랑하면 깊이 사랑할수록 사실은 더 깊은 곳에서는 깊은 증오도 함께 품고 있다는 말이죠. 그러니까 너무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버리고 떠난다고 얘길 했을 때, 조금 사랑했던 사람보다, 내가 정말 믿었고 정말 사랑했다. 라고 생각한 사람이 바람을 피우면 더 큰 충격을 받고, 더 복수를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별로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 그냥 떠나가더라도 별 느낌이 없거든요.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것 이면에 사실은 증오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히 사랑할 뿐이라면, 내가 이만큼 사랑했으니까 이만큼 사랑 받겠지 라는 계산이 깔리지 않은 온전히 베푸는 사랑을 한다면 그냥 줬을 뿐이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되돌려주지 않더라도 그것이 억울하거나, 원망스럽지 않게 될 수밖에 없겠죠. 그러나 우리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정한 사랑인가를 살펴보려면, 여기에 분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차별심에 의한 사랑이냐, 아니면 무분별에 의한 무차별에 의한 사랑이냐를 알아야 된다는 말이죠. 차별이 생기면 이게 좋고 나쁜 게 생긴단 말이에요. 좋고 나쁜 게 생기면 좋은 것은 내 편이 되고, 나쁜 것은 적이 된다 말이죠. 적과 아군이 생겨요. 그래서 내 편 네 편으로 나눠놓는 마음이 생기고, 내 것 네 것으로 나눠놓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옳다 그르다 라는 마음이 생겨요.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 적과 아군이 생기면 어떻게 되겠어요? 서로 싸우게 됩니다. 다투게 돼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고,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 라는 생각이 있을 때 옳은 것과 틀린 것이 서로 싸우게 됩니다. 전쟁을 하게 되요.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온전한 사랑은 그 어떤 다툼도 없다는 거죠.



심판하지 않고 무한히 사랑하는 신

우리는 보통 ‘신은 우리를 심판하신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바른 일을 했는지 그른 일을 했는지를 신께서 심판하신다. 그래서 저 위에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분을 우리는 신으로 알고 섬기고 있다는 말이죠. 좋은 심판 받기를 바라면서, 또 나쁜 심판을 받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신은 심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뭐에요?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나누는 것이거든요. 이것은 죄다 이것은 선이다 하고 나누는 것을 의미하거든요. 그러니까 신은, 신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전적인 것이고 완전히 절대적인 것이지 나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사랑하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미워하고 이러는 분이 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신에 대해서 잘못 알아왔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하는 신으로 알다 보니까 어때요? 신 앞에 서면 떨게 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요.

그러나 사실 신은 무한한 사랑이고, 완전한 자비이며, 무분별 그리고 무차별로써 일체 모든 존재를 어머니가 자식을 품어 안듯 그렇게 사랑하는 분이십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못했다고 미워하고, 잘 한 자식만 선택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듯이, 신도 그 이상입니다.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좋아하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좋아하고 어떤 나라 사람들은 싫어하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주고 착한 일 한 사람은 선물을 주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존재를 완전히 품어주고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분이십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신 앞에 서서 두려움에 떨지 않고, 포근함을 느낄 수 있지 않겠어요? 바로 그게 신의 진실 된 모습입니다.

여기에서 제가 말하는 신에 대한 용어는요, 어떤 특정 종교의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과도 같은 용어입니다. 온 우주의 근원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심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겁니다. 차별이 있게 되면 너와 내가 생기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사실 어떤 종교에서든지 신의 사랑이 유대인들만 사랑하는 것이고 유대인들만이 신의 자식이라고 한정짓는 선민사상, 이것을 신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신을 모독하는 겁니다. 어떻게 신의 사랑이 어느 한 종족에게만 한정될 수 있겠어요. 또 신의 사랑이 어떤 특정 종교를 믿는 사람, 그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신의 사랑이 있다, 이것처럼 신을 무시하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가 절에 다니니까 저의 어릴 적 아주 절친했던 친구는, “이렇게 착하게 살아도 소용없다. 우리 신을 믿지 않으면 그렇게 착하게 살아도 지옥 갈 텐데, 네가 너무 안쓰러워서 내가 봐줄 수가 없다. 제발 좀 개종해라” 이렇게 하는 분이 있었단 말이죠. 그것은 진정한 신이 아니지요. 아니 신을 그렇게 작고 보잘 것 없는 분으로 만들면 되겠습니까. 어떻게 신이라는 분이 네 종교, 내 종교 나눠서 이 종교에 있는 사람만 올바르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사랑 안 한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겁니다. 참된 하느님께서는 불자들도 사랑하고, 참된 부처님께서는 기독교, 천주교 신자들도 똑같이 자비로써 대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많은 목사님 신부님 또 성직자 분들을 만나 뵈면, 지금 말했던 이러한 신을 섬기지, 어떤 한계 지어진 조건 지어진 신을 섬기지 않더란 말입니다. 신은 그 어떤 모든, 일체 모든 존재에 대해서 조건을 내세우지 않고, “네가 이 종교 믿으면 사랑할거야” 이런 것이 아니란 말이죠. 모든 존재를 완전하게 사랑하신다, 거기에는 전혀 차별이 없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자비라는 거죠. 그래서 진정한 자비라는 것은 전혀 분별하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데서 나온다 그랬어요.


사랑 없음을 탓하지 말라. 다만 차별하지만 말라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뭐냐 면요,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 하는 실천적 지침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그런 것이 있을 겁니다. 불교에서는 자비를 얘기하는데, 또 교회나 성당을 가도 사랑을 얘기하는데, ‘나는 너무도 자비심이 부족한 것 같아. 나는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이런 죄책감,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거든요. 우리 스님들, 성직자나 수행자들은 그것이 좀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저 또한 처음에 출가하고 나서 내가 진정한 수행자라면 끓어오르는 자비심을 주체할 수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단 말이죠. 그래서 ‘아 내가 이렇게 못난 사람인가, 한없는 자비심이 왜 없는 것이지?’ 하고 실망감과 죄의식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었단 말이죠. 그런데 ‘나는 왜 이리 사랑이 없지, 난 왜 이렇게 자비롭지 못하지’ 하고 자기 자신을 탓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랑이 없다고 해서 죄책감을 느끼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 하면,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끊임없는 판단이 일어나는 것, 이것을 걱정해야 된다는 말이죠. 판단과 분별과 시비와 이런 것이 일어나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 즉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야 될 것이다 라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만 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완벽한 사랑 그 자체입니다.

“아니, 스님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차별하지 않는 게 어찌 사랑입니까? 정말 아껴주는 게 사랑이죠”라고 말씀들 하시겠지만,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건 무슨 말이냐 하면, 있는 그대로 바라보되 차별하지 않고 바라봐 주는 것. 이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부모님이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보살의 사랑과는 조금 다른 사랑입니다. 자식을 바라볼 때 사랑하는 눈빛으로는 바라보거든요. 그런데 그 눈빛은 ‘내 자식’이라고 하는 아상이 개입된 사랑입니다. 완전한 무차별심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내 자식은 한없이 사랑하거든요. 그 때는 완전한 사랑 같아요. 그런데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러면 어떻습니까? 무조건 내 자식 편을 들거든요. 내 자식이 조금 잘못한 것 같아도, 내 자식의 편을 든다는 말이죠. 그건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을 나누는 차별이 있는 마음입니다. 그건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다만 ‘내 것’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아상, 에고가 개입된 사랑인 것입니다. 참된 사랑이라면 상대방과 나를 함께 사랑합니다. 남의 자식과 내 자식들 둘로 나누지 않고 그 모두를 사랑하는 거예요. 네 것과 내 것, 네 편과 내편, 내 가족과 다른 가족, 이렇게 둘로 나누는 차별심이 있는 마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한국축구가 중국에게 지면 기쁜 일?

우리가 예를 들어, 축구 경기를 본단 말이죠. 우리나라와 중국이 축구 경기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애국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기기를 간절히 바래요. 우리나라가 이기면 한 없이 기쁘고 신이 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조금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이긴다고 해서 무조건 좋아할 것도 없고 진다고 괴로워할 것도 없죠. 우리가 이겼을 때는 한국 사람들이 기쁜 거죠. 4천만이 기쁜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졌을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나와 너의 틀, 내 나라 너의 나라 이런 분별이 없이 완전히 툭 터진 마음으로 본다면 우리가 중국에 지면 어떻습니까? 지면 13억 인구가 기쁜 겁니다. 4천만 인구가 조금 기분이 나쁠지언정, 저 13억 인구가 기쁜 거예요. 그것은 지구 전체의 에너지를 놓고 본다면 훨씬 플러스(+) 에너지가 많아지는 겁니다. 4천만 인구가 기뻐하고 13억 인구가 괴로워하느니, 13억 인구가 기뻐하고 4천만이 조금 서운해 한들 우주 전체로 놓고 본다면 그게 더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과연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요? 우리 생각은 늘 ‘나’의 관념에 빠져 있고, ‘내 나라’의 관점에 빠져 있다 보니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 합니다. 그 모든 분리, 분별을 넘어서는 더 큰 생각을 못 한단 말 이예요. 이 말은 그렇다고 애국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응원을 하되 이기면 우리가 이겨서 좋고, 지면 중국이 이겨서 그것도 또 좋아해 줄 수 있는 드넓은 가슴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동체대비의 관점에서는,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관점에서는 이처럼 툭 터진 너른 가슴이 깨어나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렇게 동체적인 관점에서는 생각을 못 하지요. 내 나라 내 가족 내 자식만을 아끼고 사랑해요. 애국이라는 것 또한 내 나라라는 틀이 있는 겁니다. 내 나라 너의 나라라는 틀이 있는 거예요. 내 종교 네 종교, 인간과 자연, 이런 일체의 모든 틀로부터 벗어나서 분별과 차별 없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사랑입니다.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다

이처럼 진정한 사랑은 내 것과 네 것을 나누지 않습니다. 즉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싸움이 붙었어요. 그 때 맹목적으로 내 자식의 편을 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 자식을 위해서도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러면 내 자식이 조금 잘못이 있으면 잘못이 있다고 분명히 알려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인거죠. 맹목적으로 편드는 게 사랑이 아니고요.

예를 들어 우리가 자식에게 화가 나잖아요. 자식이 막 속을 썩입니다. 그럼 자식에게 욱 하고 버럭 화를 낸단 말이죠.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죠. 사랑의 행동이 아니죠. 그런데 진정한 사랑의 행동은 무엇이냐 하면, 그 상황, 내가 지금 화가 올라오는 상황, 자식이 화를 돋우는 상황,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겁니다. 분별하지 않고 고스란히 지켜보는 거예요. 지켜보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지켜보게 되면 욱 하고 화를 내지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그 화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화에 휘둘리지 않으면 자식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는 대신, 그 화를 지켜보게 되고 저절로 지혜로운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게 됩니다. 화를 내지르지 않게 되요. 있는 그대로 분별없이 지켜보게 된다면 화를 다스리게 되는데 그 화에 휩쓸리면 욱 하고 화를 낸단 말이죠. 한 템포 늦추고, 잠시 멈춰서, 우리 안에서 올라오는 화를 가만히 지켜보게 되면 우리 내면의 더 큰 나, 참나의 자리, 근원의 자리에서 그 화를 저절로 사라지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화나는 상황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를 알아서 이끌어 주게 됩니다. 한 번 해 보세요. 직접 해 보지 않고는 이 말 뜻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우스갯소리인데요, 얼마 전에 은행에 갔을 때, 어떤 아주머님이 어린 딸 하고 같이 은행에 왔다가 업무를 보는데 딸이 하도 옆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시끄럽게 하니까 “야 조용히 좀 해, 조용히 해!” 하고 화를 내면서 꼼짝 못 하게 옆에 잡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은행 창구에 서서 업무를 보는데, 딸이 옆에 서 있다가 뭐 재미있는 게 없나 찾더니 이내 엄마 뒤에 가서 있는 힘껏 똥침을 놓았어요. 이건 실제 제가 본겁니다. 제가 뒤에 앉아 있었는데, 엄마를 찌르는데 이게 너무 제대로 들어갔나 봐요. 아, 이 어머님께서 그 순간 너무 화가 났는지, 고개를 확 돌리더니 갑자기 딸을 보자마자 한 대 퍽 때리면서 화를 버럭 내는 겁니다. 딸이 그 전까지만 해도 막 즐겁게 떠들고 놀고 그러다가 장난 좀 친 걸 가지고 그 사람들 많은데서 크게 한 대 얻어맞았단 말이에요. 그 뒤에 딸은 갑자기 기가 확 죽어가지고, 풀이 죽어 앉아있단 말이죠.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사랑이냐, 그런 방식으로 욱 하고 내지르는 것이 그게 사랑이 아니지요. 진정한 사랑은, 전체적인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겁니다. 즉 내가 올라오는 화, 그것을 잠시만 지켜보고 있었어도 그런 식으로 대응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그래서요. 모든 상황에서, 이 상황에 어떻게 내가 대응해야 하는가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사랑으로써 대응하는 것이냐 이게 기준입니다.

즉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우주 전체에 보다 많은 자비와 사랑을 품어주는 뿜어주는 방식으로 삶을 살아나갈 것이냐를 결정하는 것, 그게 중요한 거예요.


결정을 내리는 기준, 사랑과 자비

내가 이 사업을 확장할 것이냐 말 것이냐, 이런 고민이 있을 때, 어떤 것을 고민으로 삼느냐. ‘내가 사업을 확장하면 돈을 많이 벌겠지? 그러면 좋은 집도 사겠지?’ 이런 이기적인 마음, 내 욕심이 개입이 된 것이냐, 아니면 순수하게 이것이 확장돼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고,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사회에 이득을 줄 수 있는 것이냐는 그 기준에서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결정이 안 나면 어떨까요? 이게 이기적인 욕심인지, 아니면 이타적인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그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마음을 관해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분별심 없이 차별심 없이 관찰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분별심 차별심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을 의미 하거든요.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생각. 그런데 그 생각은 항상 내 이기적인 마음, 아상에 길들여진 생각입니다. 있는 그대로 관하게 되면 생각이 잦아들면서 생각 그 이면에 있는 무심(無心), 더 깊은 차원의 어떤 직관적인, 더 깊은 차원의 불성과 불성에서 우려 나오는 어떤 본연의 직관적인 지혜를 만나게 된단 말이죠. 그렇게 관했을 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진정한 사랑으로써 이것에 해답을 놓는 방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단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하던 사랑과는 차원이 조금 다를 수가 있어요. 우리는 좋아하는 것, 편들어 주는 것, 그게 사랑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 분별없이 지켜봐 주는 것, 차별하지 않고, 네 편 내편 나누지 않고 지켜봐 주는 것, 그게 진정한 사랑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명상이라고 하는 것, 참선이라고 하는 것, 불교에서 말하는 관 수행,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을 찾는 방법입니다. 사랑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라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증장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했을 때, 사랑이 커지는 겁니다. 자비와 사랑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이 태양처럼 빛난다

마치 이 사랑과 자비라는 것은, 태양이 뿜어내는 빛과도 같습니다. 태양빛은 어때요? 온 우주에 골고루 비친단 말이죠. 어디에만 선택적으로 비치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비칩니다. 태양빛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비치고, 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비쳐요. 심지어 태양빛을 비추지 말라고 증오하고 욕하는 사람에게도 고스란히 비칩니다. 아무런 차별이 없어요. 분별이 없어요. 좋은 사람에게도 비추고 나쁜 사람에게도 비추고, 죄인에게도 비추고 성자에게도 비추고, 동일한 태양의 빛이 모든 존재에게 인간과 짐승 할 것 없이 자연만물 모든 것에 평등하게 비출 뿐입니다. 하다못해 동굴 속에 10년 20년 갇혀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굴 안에만 벗어난다면 언제든 그 빛이 비칠 수 있습니다.

“나는 빛이 싫어. 빛을 믿지 않아. 빛은 없어. 즉 진리는 없어. 신은 없어. 부처는 없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것을 믿지 않는다 하더라도 빛은 그 사람에게 비칩니다. 태양은 언제나 있지요. 태양이 비추는 것은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 우주 법계의 자비와 사랑이라는 근원적인 빛, 이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이 물결치고 있고, 부처님의 자비와 신의 사랑이 언제나 충만하게 우리에게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할 수는 있느냐면, 우리가 그것을 ‘안 보겠다. 난 믿지 않겠다. 태양을 보지 않겠다’라고 고개를 숙일 수는 있습니다. 고개 숙이고 안 보겠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태양이 없는 거죠.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 조차 고개를 들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고개를 드는 순간 태양은 바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어디 도망간 게 아니란 말이죠.

우리 모두에게 부처님은 한없는 자비로써, 법계는 언제나 완전한 자비로써 우리를 품어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심판하는 일, 우리를 미워하는 일 이런 일을 전혀 안 한다는 말이죠. 항상 사랑하는 일 밖에 안 합니다. 그야말로 ‘사랑밖엔 난 몰라’예요.

그러면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고, 나에게 괴로운 일이 생기는 이유는 뭡니까. 그건 내가 만들어 낸 거죠. 내가 만들어 낸 겁니다. 부처님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내가 그것을 만들겠다고 해서 작정하고 만드는 사람에게 이 태양빛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에게는 태양도 어쩔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자비와 사랑이 우리 삶 속에 끊임없이 물결 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일체 모든 사람을 내가 자비로 대하고 있느냐,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이것이 자비와 사랑이라는 것이 바탕 된 마음으로 하고 있느냐 이것을 봐야 됩니다.


최악으로 힘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

군에 몇 년 전부터 비젼캠프라고 해서 군 생활에 잘 적응을 못 하고 힘들어 하는 특별한 장병들을 열 댓 명씩 모아서 4박 5일 일종의 치유의 수련회 내지는 집단 상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군에 계시는 목사님, 신부님, 스님들이 같이 진행을 하거든요. 그런데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처음에 몇 번을 하면서 뭐랄까 상담을 할 때도 보면, 너무 힘든 경우가 있거든요. 정신적으로 아주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만 모아 놓으니까 막 힘이 드는 거예요. 너무 에너지가 소진되고 그 친구들과 하루 지내고 나서 저녁에 잘 때가 되면, 힘이 쭉 빠질 정도로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었거든요. ‘너무 힘들다.’ 이런 느낌이 들었단 말이죠. 그런데 너무 힘들어 하던 어느 날, 문든 한 생각 일어나면서 이 모든 것이 감사함과 복된 것으로 다가오데요. 정말 삶이 힘든 사람들은 힘이 들수록 빛을 너무 갈구하는 사람들이죠. 행복한 삶을 너무 갈구하는 사람들이죠. 너무 고통 받을수록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에너지가 너무 강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또 다르게 보면 어떻습니까? 내가 좀 힘들지언정 자비를 실천할 수 있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너무나도 기가 막힌 수행의 장이고 자비를 닦아갈 수 있는 장인데, 내 스스로 이렇게 내 마음을 어지럽혔었구나 그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한 다음부터 오히려 그들과 만나고 대화 나누고 하는 것들이 더 귀하게 느껴지고, 이게 너무나도 소중한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죠.

여러분들이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 만나면 행복한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만나기만 하면 나한테 번번이 하소연만 하고, 힘들다고만 얘기하고 답답하다고만 얘기하니까 조금은 짜증스런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한두 번 들어주는 것이 세 번 네 번 계속 얘기하면 짜증스럽고, “야 좀 그만 좀 와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그런 사람들일수록 우리의 자비심을 계발할 수 있는 아주 귀한 순간입니다.

평범하거나 위대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알려주고, 사랑을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힘들고 고되고 막막한 사람들에게, 즉 정말 간절히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최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에게 있어서 최상의 사랑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고, 그들이 사랑을 느끼고 감사를 받는 그만큼 고스란히 사실은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처는 자비로, 신은 사랑으로 바꿔 불러라

우리가 한 번 두 번 자비심을 연습하고 마음에 사랑을 연습하고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하나하나의 행위가 자비와 사랑이 바탕이 된 행동을 했을 때, 우주는 나를 위해서 한없는 자비와 사랑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줍니다. 왜냐하면 우주의 본질적 에너지가 바로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법계는 사실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어요. ‘오직 자비 밖에 없고 사랑 밖에 없다.’ 우리가 부처라고 표현하는 그 단어는 사실, 자비라고 표현할 수 있는 단어인 것입니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그 단어는 사실, 신이라는 용어보다는 사랑이라는 용어가 더 어울립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법계는 항상 자비 밖에는 없단 말이에요.

내가 우주법계의 본질과 주파수를 맞췄을 때, 자비를 실천하고 자비의 마음을 일으키고, 사랑의 마음을 실천했을 때 즉 우주법계와 주파수가 맞게 된다는 말이죠. 그래서 경전에는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자비심을 연습하면 보다 빨리 깊은 명상에 들기 쉽다.’ 자비가 바탕이 되어야지만 수행의 성취가 빠르다는 말이죠. 그러나 자비심을 연습하지 않았을 때, 마음이 흐트러지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을 했을 때 사랑이 나에게 올 수밖에 없겠죠.

그래서 우리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그 사람을 사랑으로 대하고 자비로 대하는 연습을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또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어떤 일을 하든지, 누구와 대화를 하든지, 직장 생활을 하든지, 자비와 사랑이 근원에 깔려 있느냐 이것을 항상 지켜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자비심, 사무량심을 닦으라

불교 경전에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이란 얘기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면 사무량심이란 것은, 네 가지 무량한 마음, 우리가 일으킬 수 있는 네 가지 무량한 마음을 말하는데, 무량한 마음이라는 것은, 무량한 부처님의 마음을 말하는 겁니다. 해탈의 마음, 그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우리가 일으켜야 될 네 가지 무량한 마음, 그리고 이 네 가지 마음을 일으켰을 때 무량한 공덕이 성취되는 마음, 그것이 바로 사무량심인데, 그게 바로 자비희사(慈悲喜捨)입니다.

첫째, 자심(慈心), 자무량심(慈無量心)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중생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더해주기 위해서, 행복과 평화로움을 더해주기 위해서 마음 쓰는 것, 이게 바로 자심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기쁘게 해줄까, 행복하게 해줄까 하고 마음 쓰는 것이 자심이에요.

둘째, 비심(悲心)이라는 것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통을 없애 줄까, 고통을 덜어 줄까, 내가 그 사람의 고통을 함께 감내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연민심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측은하고 가엾은 마음입니다. 힘들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에게 그냥 고개를 확 돌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든 함께 없애줄 수 있을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고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을 바로 비심이라고 합니다.

이 자심과 비심을 합쳐서 자비심(慈悲心)이라고 하죠.

그리고 세 번째 마음이 희심, 희무량심(喜無量心)인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한다는 것이에요.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 희심이라는 것을 쉽게 생각하기가 쉬운데, 우리가 아주 잘 못 일으키는 마음이 바로 희심입니다. 함께 기뻐하는 걸 우리는 잘 못해요. 오히려 남들이 잘 되면 배 아프고,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고 남들이 좋은 일이 생기고 대박이 나고 잘 되면 괜히 배가 아프단 말이에요. 괜히 꼴 보기 싫고 칭찬해 주기 싫고, 칭찬에 굉장히 인색하고 그렇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함께 기뻐해 준다, 이것을 수희동참한다고 하거든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함께 수희동참해줄 때, 함께 기뻐해 주면서 함께 동참해 주었을 때 내 마음 속에 연습 되는 것은 그 장점 그 좋은 점이 고스란히 내 마음 속에 남는 겁니다. 내가 함께 동참해 준다는 것은 곧 내가 함께 한 것과 다름없는 공덕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은요, 물질적인 것을 보시했을 때만 보시의 공덕이 있는 게 아니라, 보시하는 마음을 찬탄하고 수희하면서 함께 기뻐해 줬을 때 동일한 보시의 공덕이 지어지는 겁니다.

물질세계란 내가 직접 그 물질을 얻어야지만 물질세계가 아니라, 마음만 내어도 그 물질세계가 영향을 미친다 하는 것이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해야 근력이 강화되지만, 마음속으로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는 상상을 하잖아요. 그렇게 상상을 하고 나면, 동일한 시간을 상상했을 뿐인데 근력이 마찬가지로 강화됩니다. 상상밖에 안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우리 마음 작용의 본질이 그래요. 그렇게 마음을 내기만 했는데도, 그것이 이루어진단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희동참하는 마음, 누가 보시를 했을 때, ‘그래, 너 잘났다. 돈이 많으니 그렇게 보시하지. 난 하기 싫어서 안하냐.’ 이렇게 빈정거리기 보다는, 함께 기뻐해 주는 마음을 내는 것, 그것은 동일하게 함께 보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수희공덕, 수희의 수행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수희동참, 모든 기쁜 일이 있을 때, 남들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 그것을 아니꼽다는 눈으로 보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함께 기뻐해 주는 것, 그랬을 때 수희공덕이 생깁니다. 직접 한 사람만 공덕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수희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공덕이 생긴단 말입니다.

그래서 『화엄경』 보원행원품(普賢行願品)에 보면, 보원행원에 다섯 번째가 수희공덕이란 게 있습니다. ‘내가 평생 수희공덕 짓기를 발원합니다. 함께 기뻐해 주는 공덕을 짓기를 발원합니다.’ 하는 것이 다섯 번째의 발원 일 만큼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함께 기뻐해 주고 찬탄해 주는 것만으로도 큰 공덕이 되는 겁니다. 그걸 수희찬탄이라고 해요.

길거리에서 향을 파는 사람이 향을 하나 피워 놓으면, 향을 파는 사람도 향냄새를 맡죠? 향을 사려고 보는 사람도 향냄새를 맡습니다. 그곳을 지나가기만 해도 사람들이 향냄새를 맡습니다. 그것처럼 향을 직접 사지도 않았고 팔지도 않았지만 향냄새를 누구나 맡는 것처럼 수희를 하게 되면, 내가 직접 피운 향은 아닐지라도 향냄새를 맡는다 이 말입니다. 수희공덕, 수희찬탄, 모든 것을 보고 찬탄하는 마음, 공경하고 감사하는 마음, 함께 기뻐하는 마음, 이 찬탄심을 일으켰을 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다 하는 이야깁니다. 진정한 자비심이 있어야 그것이 찬탄이 되고, 수희가 됩니다.

그런데 그 수희가 되었을 때 중요한 것은, 내가 좋을 것을 보고 함께 수희동참을 했을 때 그것이 곧 나에게 벌어집니다. 돈 많이 버는 사람들, 남들 아파트 값이 올라서 두 세배 올랐다 그러면 배 아파 죽잖아요. ‘에이 난 그 옆에 있는 아파트를 샀는데 안 오르고, 왜 저사람 아파트 값만 오르는 거야’ 하지 말고, ‘와, 저 사람은 전생에 지은 공덕이 얼마나 많으면 저렇게 됐을까.’ ‘참 잘 되었다’ 하고 수희찬탄해 주면, 나에게도 그 공덕이 온다 이 말입니다. 그래야 함께 공덕이 쌓여요. 그래서 수희찬탄을 많이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네 번째로 사심(捨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아까 말씀드린 무차별심, 무분별심, 모든 평등심을 의미합니다. 사심은 좋고 나쁜 것을 완전히 놓아 버리는 완전한 평등심을 얘기 하거든요. 그래서 최고봉에 사심이 있다고 그럽니다. 자심과 비심만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희심이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심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희심과 사심에서 나옵니다.

모든 존재를 완전한 평등한 마음으로 보고, 네 편 내 편을 나누지 않고, 좋은 것 나쁜 것 나누지 않고, 좋은 것을 보고 수희동참하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 좋은 것을 보든 나쁜 것을 보든 분별하지 않고 관하고 받아들이는 것, 이게 바로 사심이고 최고의 자비심이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비희사를 연습하게 되었을 때 우리 안에 무량한 자비심이 생기고 무량한 공덕이 생기고 무량심이 생겨난다 이 소립니다. 그게 바로 사무량심의 의미입니다.


자비심의 실천력, 사섭법

사섭법(四攝事)이라고 하는 것은 네 가지의 사무량심보다 구체적으로 자비심을 어떻게 발현할 것인가를 의미하는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사섭법은 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를 말해요.

첫째, 보시섭은 이 자비심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첫째 보시해야 한다 그 말입니다. 나눌 수 있어야 된다, 자비를 입으로만 보시, 보시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미소를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물질을 나누고 가르침을 나누고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이 자비심을 실천할 수 있는 첫 번째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애어(愛語)인데요, 애어가 뭐냐 하면 사랑스러운 말입니다. 나누는 데서 중요한 것이 말 한마디를 나누는 것이란 말이죠. 말 한마디 따뜻하게 해주고, 아름다운 말 한마디 해주는 것, 그것이 중생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는 소립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 가지고도 천 냥 빚을 값 듯이, 말 한마디 갖고서도 그 사람에게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으며, 행복을 전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지만 말을 제대로 표현 못함으로써, 애어를 못함으로써 속으로는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미워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남자들이 주로 그런다면서요. 경상도 남자들이 주로 그런다고, 마음으로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겉으로는 말을 안 하니까 아내는 알 수가 없다 그러면서 막 툴툴거리잖아요. 사랑스러운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말에는 특별한 파동, 파장의 에너지가 있어서 이 말의 파장이 이 우주 법계 끝까지 퍼져나갑니다. 그 말의 에너지가 하나의 창조 에너지가 되어 우주 끝까지 전달되고,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말이든 만 번이고 십만 번이고 반복해 말하면 무조건 그게 현실이 된다고 하잖아요. 그게 바로 진언(眞言)이 된다는 소립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행(利行)입니다.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이로운 행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몸으로써 이타적인 것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에요. 애어는 구업을 말하고, 이행은 신업을 말합니다.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데 생각으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보시를 해야 하는데, 애어와 이행으로, 즉 말과 행동으로 직접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신구의 삼업 가운데 가장 직접적인 것이 바로 신업입니다. 행동이에요. 생각을 바꾸고 싶다면 먼저 행동을 바꾸면 생각도 뒤따라옵니다. 생각을 바꾸긴 쉽지 않지만 행동을 바꾸기는 쉬워요. 그래서 먼저 행동으로 저지르라는 것입니다. 보시를 실천하고 싶다고 말로만 할 것이 아니라, 직접 저질러 물질로써, 몸으로써 실천해야 합니다. 생각으로 얼마를 보시해야지가 아니고, 직접 저질러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가 동사섭(同事)입니다. 도움을 주고자 하는 그 사람이 하고 있는 그 일을 함께 하는 겁니다.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으면서 잘 하라고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일에 뛰어들어 고락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요. “불살생을 지켜야 하는 스님들이 어떻게 군대에 가십니까?” 이런 게 바로 하나의 동사섭입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군대가 누구 죽이는 단체에요? 살리는 단체죠. 살리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군대이지, 죽이기 위해서 만든 단체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한 군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죠. 여러분의 아들들이 군에 있단 말입니다. 이들을 행복으로 안내하고, 고통에서 구제하고, 이들에게 뭔가 진리를 알려주려면, 나는 아주 초월해서 그냥 저기 신선처럼 있으면서 “중생들아, 좀 잘 살아봐” “너희들 군 생활 힘내서 잘 해라” 이렇게 얘기한다고 그게 되겠습니까? 그곳에서 함께 훈련도 하고, 함께 뛰고 하면서 동사(同事)하면서 함께 그곳에 있어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비심의 발로라는 것입니다. 중생 속에 함께 뛰어들어서 그 일을 함께 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동사섭의 실천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뭔 일을 할 때, 설령 안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그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뛰어들어서 그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을 동사(同事)로서 구제해 주는 것, 그것이 아주 중요한 자비 실천의 덕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사무량심(四無量心)과 사섭법(四攝法)에서도 보듯이 우리가 자비심을 자꾸 계발할 수 있어야 되고, 삶 속에서 내가 얼마나 자비를 실천하고 있느냐, 사랑과 자비의 마음에 얼마나 귀 기울이고 있느냐, 나의 모든 행위의 그 이면에 있는 의도가 자비심의 발로이냐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의 발로이냐 하는 것을 끊임없이 지켜볼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것이 생각처럼 잘 실천되지 않더라도 그래서 무조건 저질러 실천하고 봐야 합니다. 처음에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그것을 어렵게 한 번 저질러 실천하고 나면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는 연습한 것이 그야말로 습(習)이 되어서 훨씬 더 쉬워집니다.

악행을 연습하고 부정적인 마음을 연습하면 동일한 상황에 처했을 때, 그 다음에 똑같이 화를 내고 욕을 하기가 더 쉬워지거든요. 이걸 습(習)이라고 그래요. 업이 습이 되는 겁니다. 업습(業習)이라고 그러죠. 그런데 선한 업을 짓는 것이, 의도적으로 연습을 하면, 그것이 처음에는 어려워도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로 갈수록 더 쉬워진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선업의 습의 물드는 거예요.

그러면 이 우주의 근원적인 에너지가 근원적인 힘이 우리에게 있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돕게 됩니다. 우주의 그 어떤 힘보다도 자비의 힘 사랑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인큐베이터에 쌍둥이 아이 둘이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한 명의 아이가 죽었어요. 그런데 간호사 한 분이 그 아이가 죽은 지 미처 모르고서 죽은 아이 옆에 살아 있는 쌍둥이 아이를 같이 두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조금 있다 살아있는 쌍둥이 아이가 죽어 있는 아이를 그냥 끌어안았단 말이에요. 그 사진 찍어 놓은 것이 인터넷에 많이 떠돌던데 보셨나 모르겠어요.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는데 이 죽었던 아이가 다시 살아났어요. 이것처럼 우리는 우리 마음 근원에 사랑이라는 아주 본질적인 흐름이 누구에게나 내포되어 있다는 말이죠. 그 어린 아이도 저절로 사랑을 향해 행동하게 되도록 만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근원은 사랑으로 물결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 사랑은 기적을 가능하게 하는 겁니다.

『지리산 스님들의 못 말리는 수행이야기』라는 책을 보니까 말이죠. 그 지리산의 스님 세 분이 독초를 먹고 죽을 지경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병원에서도 약이 없다고 그러고, 그런데 세 분 모두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스님 세 분이 자기 몸을 걱정하기는커녕 서로 다른 스님들의 몸을 걱정해 주고, 약이 한 사람 먹을 양 밖에 없었는데, 서로 내가 안 먹겠다, 다른 스님보고 먹으라고 하고, 모든 스님들에게 ‘나’라는 것은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나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오로지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 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보고 한 스님이, 당신도 아파 죽겠지만 다른 스님들의 그 마음 씀씀이의 사랑을 보고, 안 죽는다는 확신이 생겼다는 겁니다. ‘아, 우리는 죽지 않겠구나’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이렇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 마음이 있는 이상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다는 것이죠. 병원도 안 갔는데 그 날 밤에 수행을 하고 앉아서 참선도 하고, 밤을 꼬박 새었는데 죽지 않고 다들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를 살린 것이지, 이기적인 마음이 있었다면 나 먼저 살고자 했던 마음이 있었다면, 우린 다 죽었을 것이다 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시더란 말입니다.

사랑과 자비라는 것은 그 어떤 모든 덕목에도 제일 우선가는 것이고, 우리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최우선시 돼야 하는 것이고, 사랑과 자비가 있었을 때 우리 삶에는 기적 같은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사랑으로 병을 치유한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 칩시다. 암에 걸렸어요. 어떤 분들은 보니까 암세포와 싸워 이기는 상상을 하도록 시키기도 하던데요, 그렇게 암세포와 싸워 이기는 상상을 한다는 것은, 싸워가지고 전쟁으로써 적을 죽임으로써 내가 살아보겠다는 마음이거든요. 암세포라는 것을 왜 적으로 생각해야 합니까. 암세포는 적이 아니에요. 그 세포 또한 중생입니다. 우리가 구제해야 할 중생 이예요. 암세포를 죽이겠다는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 암세포가 바로 나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죽이려 하지 않듯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인 암세포를 죽이려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실 암세포가 문제가 아니지요. 내 안에 있는 어떤 부정적인 부분, 탁한 에너지, 어떤 악업 같은 어떤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암세포로 물질화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 원인은 나에게 있어요. 즉 내 안의 어떤 사랑이 아닌 부분, 자비가 아닌 부분, 지혜가 아닌 부분, 바로 그 부분이 세포를 기형적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이 아닌 것을 없애기 위해 그것을 죽여 없애는 방법을 쓴다는 것은 근원적인 방법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암세포, 종양 제거 수술을 무사히 마친 사람들도 삶의 방식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고, 본질적으로 그 병의 원인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또 다시 암이 재발하거나, 다른 부위로 재발하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현대의학의 기본개념이 어디가 아프면 그곳을 딱 잘라 버리는 거잖아요.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써는 온전한 치유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암세포를 사랑하고 내 몸 안에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를 사랑하는 큰 자비의 마음으로써 관하게 되었을 때 오히려 살 수 있는 진정한 치유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적으로 알아서는 안 돼요. 내 몸에 어디 안 좋은 부분이 있다는 것, 그것은 나를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고 자비로써 풀어줄 수 있어야 됩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비심이 바탕이 되면 그 어떤 문제도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이 발로가 되었다면 그 일은 망하기가 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나는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써 삶을 살아 나아가고 있는가, 사랑으로써 이웃을 대하고 있고 모든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가, 이것을 우리 수행자들은 끊임없이 삶 속에서 지켜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자비심으로 할 수도 있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할 수도 있어요. 어쩔 수 없이 모기 한 마리를 죽여야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화난 마음으로 짜증스럽게 죽일 수도 있고, ‘네가 미물로 태어나서 이렇게 고생스레 살고 있구나, 다음 생에는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하여 잘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자비스러운 마음을 내고 염불하고 기도해 주고 어쩔 수 없이 죽인다면 그건 앞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죽임입니다. 죽여도 된다는 말이 아니에요. 아무리 하찮은 미물도 죽여선 안 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죽여야 할 일이 생긴다고 한다면 마음을 이렇게 써야 한다는 거예요. 겉에 드러난 행위 이면의 의도가 ‘자비’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 얘기가 있어요. 깨달은 자는 살생을 해도 그 중생을 살리는 살생을 할 수가 있지만 중생은 중생을 살리면서도 죽일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행위 이면에 자비의 마음이 바탕이 됐느냐. 아니면 이기적인 마음이 바탕이 됐느냐 이 차이가 그렇게 중요하단 거예요.

그러니까 행위 그 자체를 문제 삼지 말고, 그 이면에 담겨있는 자비심, 사랑의 마음, 그것을 잘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마음의 근원에 사랑과 자비가 언제나 춤추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이 우주법계의 근원에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에너지와 파장이 언제나 빛나고 있을 뿐입니다. 탁한 에너지 같은 것은 없어요. 있다면 그것은 단지 내가 아상으로, 아집으로 환상을 만들어 낸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면, 사섭법과 사무량심을 연습하면, 바로 그 순간 우리가 우주법계의 근원과 연결이 됩니다. 그 순간 우주법계가 함께 기뻐하고, 우리를 돕게 됩니다. 그 연결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빛나게 해 줄 수 있는 근원적인 것입니다. 사랑과 자비가 여러분들 모두에게 파도처럼 밀려들어오기를 두 손 모아 발원하고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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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Tracked from tattermedia's me2DAY  삭제

    평범하거나 위대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알려주고, 사랑을 전해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힘들고 고되고 막막한 사람들에게, 즉 정말 간절히 사랑을 원하는 이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최상의 사랑인 것입니다.

    2010/05/2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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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수업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법상 (무한,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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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수업
카테고리 종교 > 불교 > 불교이야기
지은이 법상 (무한,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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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날씨가 봄 같지 않게

싸늘하네요.


바람도 많이 불고,

다시 겨울로 돌아가는 듯 한데,

법우님들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오늘은

신간 출간 소식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법우님들 모두 아시는 바와 같이

작년부터

설법을 녹음하여 이 곳에

소리파일로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올려 놓았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법우님들께서

설법 녹취록을 작성하여 주셨고,

그 녹취록을 바탕으로

구어체의 녹취록을 문어체로, 한 권의 책으로

다듬고,

또 부족하거나 추가 설명이 필요한 부분 등에 대해서

과감하게 자세한 설명을 보충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곳 목탁소리 카페와 홈페이지 '법상스님 설법듣기'에 올라와 있는

설법들 가운데 우선적으로,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쉽고, 감동이 있는 내용들을 선별하여

총 7편의 설법을

새롭게 다듬어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설법 녹취록을 읽으셨거나,

설법 내용을 소리파일로 들으신 분들께서

들으면서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있으셨다면,

이번의 책으로써

보다 쉽게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는

토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부모님들께 선물하거나,

아무 컴퓨터에서도 들을 수 있고,

차량에서도 들을 수 있도록 CD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에 의해

책 속에 MP3 설법 CD를 첨부하였습니다.


약 1시간 가량의 설법 소리 파일로

7개 설법이 CD에 수록되어 있으니,

총 6~7시간 가량의 설법 파일이

한 장의 CD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지요.


출판사에서

CD에 설법을 담고, 책에 포함해 발행 해 주셨고,

400여 페이지의 책에,

올컬러로 인도, 라다크, 히말라야 등지에서 찍어 온 사진을

컬러로 아름답게 편집도 해 주셨고,

이래 저래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물론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나오게 된 데는

우리 목탁소리 법우님들의 관심과 사랑과 애정의 도움이 컸습니다.

무엇보다도 설법을 듣고 녹취해 주신

많은 법우님들의 애정어린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나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쪼록 이 책이

법우님들의 공부에,

또 인터넷을 할 수 없으시거나,

책을 읽기 어려우신,

또 이래저래 불법과 인연짓기 어려우셨던 많은 분들께

작은 공부의 씨앗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발원합니다.


법우님들 모두에게

이 책의 감사함을 회향합니다.


아래는

출판사에서 만들어 베포한

책에 대한 보도자료와 자료화면입니다.


바로구입 -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 예스24 (판매가 13,500원, CD포함)


바로구입 -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 알라딘(판매가 13,500원, CD포함)


바로구입 -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 인터파크(판매가 13,500원, CD포함) 





1. 책 소개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 법상 스님의 영혼을 두드리는 가슴 벅찬 말씀


매주 일요일 아침, 스님은 성스러운 의식을 준비한다. 지난 일주일간 내면의 뜨락을 살펴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붓다와 신과 저 눈 밝은 선각자들의 정묘한 가르침을 들으면서 담아 둔 작은 이야기들을 펼쳐 낼 시간이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30분은 언제나 이러한 내면의 미진한 공부들을 끄집어내어 작게나마 깨닫고 느껴왔던 것들을 인연 닿는 분들과 소담하게 나누는 소통의 장이다. 그렇게 일요일마다 이야기를 나눈 지가 벌써 12년이 되고 있으며, 물론 지금도 또 아마도 당분간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스님은 이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이고,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순간들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일요법회는 어쩌면 세상을 향해 나눔과 회향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형식일 뿐이지만, 그것을 통해 스님은 우주와 연대하고 세상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그러한 연결과 소통을 통해 가장 나다운 방법으로 세상에 자비와 사랑이라는 근원의 꽃을 피우는데 거름 하나 보탤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삶이란 우주의 성스럽고 벅찬 연주다. 그 연주 속에 우린 누구나 자기다운 방식으로 묵연한 침묵의 선율 하나를 피워내고 있다. 이 책이 그러한 연주에 조화로운 음율 하나를 보태고 세상과의 연결을 조금 더 깊이 이어줄 수 있기를 바란다.


■ 마음학교에서 울려 퍼지는 행복수업 7교시


제1장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여라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중요한 본질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하지 못한 이유는 이 세상이 행복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행복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모든 가능성에 대해 거부하거나 막아서지만 않으면 됩니다. 막고 있던 방어벽을 허물고 마음을 활짝 열어 행복이 파도쳐 들어오도록 삶을 받아들이십시오.


제2장 새로운 무한 가능성에 나를 열어 두라
매 순간 우리가 느끼는 경험은 전혀 새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과거의 경험과 비교, 대조, 분석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의 새로운 경험을 익숙하고 진부한 것으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차단시키는 것이지요. 반복되는 일상일지라도 전혀 새로운 눈으로 새롭게 바라볼 때, 비로소 삶의 신비와 마주하게 되면, 꽃 한 송이가 당신을 압도하게 될 것입니다. 그 새로움 속에서 깊은 고요를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제3장 홀로그램적 창조를 넘어서라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정확한 인연에 따라 정확한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그 자리에 존재합니다.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것조차 우주적인 이유와 목적을 띄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주적인 홀로그램과 연기법은 삶의 모든 부분 속에서 성숙을 이루고 배움을 얻으라는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그 모든 것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배우고 받아들임으로써 우주와 하나가 되라는 다르마의 명령인 것입니다.


제4장 괴로움을 없애는 선禪적 방법
우리의 행복은 언제나 완전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다만 행복하지 않다는 생각과 판단이 있을 뿐이지요. 행복은 어떤 완벽한 상황이 갖춰졌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누릴 때 바로 그 완벽한 상황이 만들어집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무언가가 필요하고, 외부적인 어떤 특정한 조건 속에서만 가능하리라 믿어왔던 것은 완전한 환상일 뿐입니다. 행복이란 내 안에서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지 외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언제나 안의 문제이지 바깥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5장 세상을 창조하는 법
삶을 마음먹은 대로 멋지게 창조하고 싶지만 그것이 잘되지 않는다면 다음 4가지 중 어느 부분에 문제가 있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자비로 대해야 합니다. 사랑과 자비의 방법이지요. 둘째,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한정 짓지 말고,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굳게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바라고 빌기보다는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넷째, 산란한 수많은 생각으로는 삶을 창조하기 어렵습니다. 명상과 참선을 통해 마음을 비우고 나면, 그 텅 빈 마음속에서 일으킨 하나의 발원에 큰 힘이 붙게 됩니다.


제6장 스스로 창조하도록 맡겨라
내가 무엇을 조작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행하는 삶의 신비가 일어나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도록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진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진리의 계획이 나를 통해 꽃피어납니다. 그때야 비로소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일들만 펼쳐집니다. 삶에서 내 앞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멈춰 세우고 집착하던 삶에서, 모든 것을 믿고 맡기게 되니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게 됩니다. 내맡김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되찾고 우주법계와 하나가 되는 공부입니다.


제7장 우주의 창조와 하나 되는 힘, 사랑과 자비
우주와 나의 근원적 삶의 목적은 사랑과 자비로 동일합니다.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전 인류가 나아가는 길이고, 나아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우주법계는, 부처와 신은 언제나 한없는 자비로써 우리를 사랑하고 품어주는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미워하고, 심판하고, 지옥에 보내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자비심과의 연결이야말로 우리를 가장 빛나게 해주며, 우주와 나를 하나로 일치하게 만들어 줍니다.



2. 목차


프롤로그


제1장 방어벽을 허물고 삶을 받아들여라
삶은 고(苦)가 아니다
삶이 괴로운 이유 
자신이 친 방어벽 
배고파도 밥도 못 먹는 사람  
리더십이 부족한 사람 
영어를 못하는 사람  
나를 둘러싼 다양한 방어벽  
수련회에 못 가는 이유 
잠에 대한 강박관념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부모  
여자라서, 나이가 많아서 못한다고?
사회적 지위라는 감옥  
깨달음이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마음의 문을 열고 진리를 초대하라 
삶은 언제나 나를 돕고 있다  
방어벽을 허무는 방법
받아들임이 곧 깨어 있음이다 


제2장 새로운 무한 가능성에 나를 열어두라
뇌에서 받아들이는 정보
새로운 경험인가? 익숙한 경험인가? 
다 안다는 착각 
새로운 가능성을 닫지 말라
여행을 떠나는 것이 깨달음의 반이라고?  
익숙함을 넘어 새로운 것에 도전하라  
사업가에서 농부로, 자원봉사자로  
안철수에게 배운다 
새로움, 그것은 영적 성장의 길 
아이들 다 키운 중년 주부의 도전
반복되는 일상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라
뇌 가소성 
신경접속 회로 
200만 개의 가능성에 나를 열어 두라
우주법계의 계획을 받아들여라
무한한 새로운 가능성에 나를 내맡기라  
받아들이고 느끼고 자각하라  
업습(業習)을 완전히 끝내고 넘어가라 
일상적인 삶을 낯설고 새롭게 보라 
삶의 신비와 마주하다


제3장 홀로그램적 창조를 넘어서라
홀로그램의 이해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하나 속에 전체가, 전체 속에 하나가 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업(業)사상과 양자물리학 
마음이 물질을 창조한다는 과학적 증명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삶의 의문들에 대한 답변 
올림픽 금메달에 대한 연기적 해석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없으면 사랑하지만 많으면 퇴락한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제4장 괴로움을 없애는 선(禪)적 방법
삶이 괴로운 이유  
모두에게 존경 받을 수는 없다 
괴로움의 원인은 내면에 있다  
문제가 없길 바라는 마음이 문제
홀로 있음으로도 충만한 스님 
우리는 너무나도 이상적인 것을 꿈꾼다
고치려고 애쓰지 말고 다만 받아들여라 
아상(我相)에 밥 주지 마라 
한 발자국 떨어져 보라 
매 순간 휴가를 떠나라 
투명하게 사람을 사귀는 방법
연애하듯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 
모든 문제는 나를 돕기 위한 영적 성숙의 과정이다
깨어 있음에 담긴 우주적 힘  
자기 중심을 잡고 살라 
삶의 본질은 행복하게 사는 것 


제5장 세상을 창조하는 법
현실의 어려움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시크릿』을 보는 불교적 관점 
창조과정과 업보  
껍데기 마음과 거짓 나 
더 깊은 마음, 근원의식, 참 나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긍정적인 언어의 파장 
근원에 믿고 맡겨라 
우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동시성 
심상화기법 
플라시보 효과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
사실 많은 것이 이루어진다 
보면 사라진다 
끊임없이 오락가락하는 마음 
명상수행과 창조에너지 
자기 한정의 관념을 타파하라
상대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 
창조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 


제6장 스스로 창조하도록 맡겨라
삶을 창조하는 4가지 방법  
삶의 창조를 뛰어넘어라 
텅 빈 근원 위로 많은 것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을 멈춰 세운다 
아상, 아집의 형성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설정
창조할 것인가 창조를 넘어설 것인가
아상이 아닌 참 나가 나를 이끌게 하라 
우주법계의 본래의 계획, 금강경의 가르침 
창조할 것인가 내맡길 것인가
있는 그대로 똑바로 관(觀)하라
이것이 바로 나인가  


제7장 우주의 창조와 하나 되는 힘, 사랑과 자비
종교의 근본적인 목적  
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보는 잣대 
행위 자체보다 그 이면의 의도가 중요하다 
참된 자비란 무엇인가 
심판하지 않고 무한히 사랑하는 신 
다만 차별하지 말라  
한국축구가 중국에게 지면 기쁜 일?
분별없이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다  
결정을 내리는 기준, 사랑과 자비 
사랑은 태양처럼 빛난다 
가장 힘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라  
부처는 자비로, 신은 사랑으로 불러라 
구체적인 자비심의 실천법  
4가지 자비심의 발현  
사랑이 기적을 일으킨다
사랑으로 병을 치유한다  



3. 저자 소개


법상(法相) 
현재 강원도 운학사 주지로 있으며, 인터넷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www.moktaksori.org)’와 다음 카페 목탁소리(http://cafe. daum.net/truenature)의 지도법사로서 생활 속에서 마음을 닦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수행을 이끌어 가고 있다.
스님은 불교와 명상을 공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다 쉽고 실천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 시작했고, 수행과 명상, 자연과 환경을 주제로 쓴 진지한 깨침의 글들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렇게 스님의 글을 읽고 ‘생활 속의 수행’에 뜻을 모은 사람들이 만든 것이 사이버 생활수행도량 ‘목탁소리’이다. 이제 ‘목탁소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바쁜 생활인들이 서로 마음을 주고받으면서 자신의 내면을 살피는 소중한 정진의 공간이 되었고, 종교와 계층을 초월하여 마음을 맑히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고향과 같은 귀의처가 되면서 불교와 명상 분야의 대표적인 웹사이트로 자리 잡았다.
동국대와 동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했으며,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스님은 조계종 포교사이트 「달마넷」을 비롯 「한국일보」 「법보신문」 「월간불광」 등에 글을 연재하였으며, 2005년에는 「한국문인」에서 신인 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하기도 했다. 특히 저서 『반야심경과 마음공부』는 불교출판문화협회에서 주관하는 ‘2005년 올해의 불서’에 선정되기도 했다.
저서로는 『금강경과 마음공부』『부처님 말씀과 마음공부』『관심』『생활 속에서 마음닦기』 『마음을 놓아라 그리고 천천히 걸어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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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약간 컴맹이라 어디다 글을 남겨야 할지 몰라서 방명록/guest book 에 글을 남겼습니다. 꼭 읽어봐주세요.

    2010/04/15 06:25





[사진 : 인도 맥그로드 간지에서 만난, 인도에서 만났던 가장 예쁜 소녀^^]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다

돈으로 보시를 하면 내 돈이 나간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무리 많은 돈을 보시를 해도
언젠가 그 돈은 분명히 다시 들어오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언제나 영적인 균형을 맞추는
대평등의 일들만이 이루어진다.
그것이 이 우주의 운행 법칙이다.

나에게서 나간 것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언제나 다시 내게로 들어온다.

내가 상대방을 괴롭히면
상대방과 나와의 에너지는 불평등하게 되고
우주는 그 균형을 맞추기 위해
상대방이 나를 괴롭힐 일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욕을 하면
욕을 얻어먹을 일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조화로운 작용이다.

예를 들어 직장상사가 직원을 욕하고 괴롭혔다 치자.
그러면 우주적인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다.
상사는 화를 풀었지만 직원은 괴롭힘을 당했다.
상사는 +에너지가 되었지만 직원은 -에너지가 되었다.
둘 사이에 균형을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직원이 어떻게든 다시 상사를
욕하고 괴롭힐 일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불교적으로 표현하자면,
설사 이번 생에 두 사람이 다시 못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에너지의 불균형은 남기 때문에
두 사람은 다음 생에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
에너지의 균형을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교적인 표현으로는 인연이고 업보인 것이다.
‘저 사람과는 악연인가봐’라고 할 때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 다음 생에는 반대로 직원이 직장상사로 태어나고
상사가 부하직원으로 태어나게 된다.
상사는 에너지의 불균형을 균형 있게 맞춰야 하기 때문에
우주적인 작용으로써 이상하게 그 부하직원만 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상사가 부하직원을 괴롭히게 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로 이 만남과 상황을 주선하는 것이 바로 우주법계고,
아바타에서 말한 에이와고,
불교에서는 불성이라고, 기독교에서는 신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인디언들은 어머니 대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무엇이라고 부르든 상관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우주는 이와 같이
대 평등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을 언제나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세상이 불평등해 보일지라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서 보았을 때
이 우주는 지극히 평등하며
언제나 완전한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진행된다.

아주 쉽게 누군가에게 욕을 해 보라.
무엇이 되돌아오는지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사랑하고 칭찬하면
사랑받고 칭찬받을 일들이 생겨난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게 된다.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가 들어오고,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며,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우주의 평등하게 균형을 맞추는
영적인 작업인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그것은 우주의 작용, 혹은 법칙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저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작용을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그저 균형을 맞출 뿐이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오염시키면
자연은 균형을 맞추려고 기상이변 등을 일으켜
본래적인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 가려고,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사람도 몸을 함부로 다뤄 탁한 에너지가 몸 안에 쌓아면
감기몸살 같은 형태를 통해 내보내줌으로 인해
우리 몸의 자정작용, 균형작용을 돕는다.

이 우주 전체와 그 안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존재는
언제나 이와 같이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에너지가 흐른다.


삶의 균형을 맞출 뿐

일전에 보았던 아바타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제이크 설 리가
에이와에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에이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우주법계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오직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에너지의 불균형을 없애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법계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인 것이다.

한창 유행처럼 번지던 ‘시크릿’에서는
이러한 진실을 ‘끌어당김의 법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엇이든 내가 내보내는 것이 끌어당겨 지는 것이다.
생각하는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나,
불교의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일체유심조(一切有心造),
혹은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서
마음먹은대로 세상에 무엇이든 그려낼 수 있다는 말이
모두 이러한 법칙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법칙,
즉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은
언제나 증명되고 있다.

우주는 이처럼 다만 우리가 내보내는 것을 들어오게 할 뿐이지,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판단하지 않는다.

우주의 본질에는
좋고 나쁘거나 옳고 그른 것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생각에서, 판단과 분별에서 옳고 그름이 생겨나는 것이지
우주법계에는 그런 차별이 본래부터 있지 않다.
다만 내보내는 것을 분별 없이 들여보낼 뿐이다.


내보내는 것에 중심을 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우리가 이 우주를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에 있다.
진실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란 사실이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이 곧 나에게로 들어올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는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와 같은 말이다.
무엇을 나누고 베풀 것인가가
곧 무엇을 받을 것인가를 결정짓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들어오는 것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가,
내보내는 것을 통제할 수 있는가?
우리가 우리의 자유의지로 직접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내보내는 것 뿐이다.
내보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이지만
들어오는 것은 전적으로 우주법계의 의지일 뿐이다.

즉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들어오는 것이 아닌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니 더 많이 얻고,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더 크게 가져야겠다는 생각은
엄밀이 말하면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우리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

우리는 오직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내보낼까,
나눌까, 베풀까, 보시할까, 회향할까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들어오는 것에는 아예 관심을 갖지 말라.
들어오는 것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법계의 소관일 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내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니!


내보내는 것과 업보(業報)

불교의 업(業)사상도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과보를 받는지가 결정된다.
업에 따라 보(報)를 받는 것이다.
여기서 어떤 업을 지었느냐가
곧 어떤 것을 내보냈느냐를 말하는 것이다.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으로 몸과 말과 생각으로
무엇을 이 세상에 내보냈느냐에 따라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라고 말해지는 이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이라고 잘 알려져 있다.

육근이 바로 나 자신이고
육경이 외부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니
나와 세상 사이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다.
육근이 즉 내가 무엇을 육경으로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은 보를 보내주는 것이다.
그래서 육근은 업을 짓고 육경은 보를 받는다.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보를 받는다는 이 업보의 이치가
바로 내보내는 것을 필연적으로 들어오게 한다는 법칙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우주의 이치인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
업보라는 어떤 사상을 만들어내려고 애쓴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악행을 함으로써 악업을 지으면
둘 사이의 에너지는 불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 때 우주는 그 불균형을 균형과 조화로써 맞추기 위해
당연하게 과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업보니, 인과니 하는 것이 바로
이 우주법계의 대 평등성, 균형과 조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근은, 즉 우리는 오직 업을 지을 뿐이지
어떤 ‘보’를 받는지까지를 결정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보’라는 것은 ‘다르게 익어간다’는 의미로,
육근이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우주법계에서는 어떤 과보를 받을지를
천편일률적으로, 기계적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의 온갖 정보, 업력, 인연 등을 총괄적으로 따져
‘보’를 최종적으로 보내주는 것이다.

우주법계는 총체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전체적인 관점에서 판단한 뒤
무엇이 우리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떻게 언제 받아야
그나마도 그 사람에게 영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즉 우주법계는 ‘보’를 받을 때
항상 자비와 사랑의 바탕에서
그러한 결정을 바로 그 때 내려주는 것이다.

이렇듯 우주 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위한,
우리를 돕기 위한 자비와 사랑의 관점에서
순리롭게 행하는 바 없이 무위(無爲)로써 일을 행한다.

물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업을 지었느냐에 따라
어떤 보를 받느냐가 결정된다는 큰 틀은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처럼 과보를 받는 것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법계에서 어떤 과보를 언제 받을지를 결정한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떤 과보를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복을 받을까가 아니라,
어떤 업을 지을까, 어떤 복을 지을까,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어떤 행위를 할까,
즉 어떤 것을 이 세상으로 내보낼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나는 매 순간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기로 예정된 것이니
들어올 것에는 신경도 쓰지 말고,
아무 관심도 없는 것처럼 놓아버리고
오직 내보내는 것에만 마음을 모으라.


책 ‘시크릿’과 영화 ‘아바타’와 불교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과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
그리고 불교의 업보, 인과응보의 법칙은
모두 같은 진리를 다르게 표현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중심으로 정리해 보면,
나를 중심으로 내가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시크릿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보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끌어당기는 것인 것이다.

아바타에서는 이것을 전체적인 이치로써 설명하고 있다.
즉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주는, 에이와는,
불성은, 신성은 언제나 내보낸 것을 다시 받게 함으로써,
즉 내보낸 것을 끌어당기게 해 줌으로써
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표현에 의하면
내가 업을 지음으로써 과보를 받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인과응보, 업인과보, 업보의 법칙인 것이다.

그런데 아바타에서 말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업인과보의 법칙 등은 전체적인 진리를 표현한 말이고,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은
내보내는 것 보다는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며,
불교의 업사상은
받는 것 보다는 ‘내보내는 것’에 중점을 둔
실천적인 표현인 것이다.

우리가 시크릿에 열광하는 이유도 바로 이런 점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보다
나에게로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짓는 업(業)보다는 받을 보(報)에 관심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시크릿에서는
돈도 끌어당길 수 있고, 인간관계도, 건강이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끌어당길 수 있다는 점에
주안점을 두고 설명되어지고 있다.
물론 무엇을 내보냈을 때 끌어당겨질 수 있는지도
설명되고는 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점은
내 바깥에서 무엇이 들어올 것이냐가 아니라
내가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에 있다.

직접적으로 우리의 의지로써 바꿀 수 있는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놓고 보았을 때,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끌어당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내보내느냐에 있다.

끌어당기느냐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기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려운 점이 있다.

보시를 할 때나, 선을 행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내가 보시를 하면 많은 돈이 끌어당겨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한다면
그 보시는 큰 결과로 이어질 수 없다.
그 보시의 행위 자체가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가진 풍요를 누리고, 만족함으로써
부유함이 끌어당겨진다고 할 때라도
끌어당겨질 미래의 결과를 마음에 두고
풍요를 누리려고 애쓴다면
그것은 인위적이고 작위적이며 순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끌어당김의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라는 법칙에.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끌어당김의 법칙을 말했을 때에 비해
당황스러워 한다.
우리는 내보내기는 싫고 끌어당기는 것은 좋아한다.
끌어당긴다는 표현이 우리의 욕심을 더 충족시켜주며,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하기 쉽다.
그렇기에 ‘내보내는 법칙’에 대해 실망감이 들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말라.
내보내는 것이 곧 끌어당겨지는 것이다.
현재 속에 미래가 있다.
우리는 다만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만 생각하면 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 들어올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투명하게, 이타적으로,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우주적인, 불성과 영성에서 보내주는,
에이와의 무한한 에너지, 힘이 거기에 붙게 될 것이다.
무엇을 내보낼 것인가
바로 거기에 이 모든 법칙을
내가 주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운행시킬 수 있는
힘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오늘은 또 무엇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화와 증오와 미움과 욕설과 질투와 탐심과
집착으로 얼룩진 에너지를 세상으로 보내지는 않았는가?
그것은 곧 내가 내보낸 것이기에 곧 내가 받을 것이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 아내에게 자식에게 바라지 말라


아내에게 바라는 마음을 내보내지 말라.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라고, 좋은 성격을 바라지 말라.
그저 내가 먼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남편이 되어 줌으로써 좋은 남편의 모습을 내보내고,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내보내 주라.
그러면 내가 내보낸 것과 일치하는
좋은 아내, 좋은 자식이 딸려 올 것이다.
내보내는 것이 들어오는 것이니.

아내에게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결국 아내가 내조를 못 한다는 것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내조를 잘 하기를 바랄 때 우리는 우주를 향해
‘내조 못하는 아내’라는 메시지를 내보냄으로써,
결국 지금 보다 더 내조 못하는 아내를 과보로 받게 될 것이다.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바란다는 것은 결국
자식의 나쁜 성적으로 인해
실망스럽다는 마음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정확히 그것이 다시 들어 올 것이다.
자식의 성적이 더 나빠지기를
우주법계에 요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이대로에 만족하고 감사해 하라.
만족과 감사를 내보내라.
아내의 부족한 부분을 보고 그 점을 지적함으로써
‘부족한 아내’라는 부정적 에너지를 내보내지 말고,
그래도 잘 하는 부분을 보고
그 점에 감사해 하고 만족하는 마음을 내보냄으로써
아내에게 감사한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정확히 바로 그 만족스러운 점, 감사한 점이
내보낸 만큼의 크기로 들어오게 될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아내가 달라지겠지 하는
끌어당겨질 것을 미리 마음에 두고 행해선 안 된다.
끌어당김의 법칙이 아닌 ‘내보내는 법칙’에 마음을 쏟을 때
그 힘은 더욱 투명해지고 순수해져 우주법계의 힘이 붙을 것이다.

자신의 월급에, 연봉에 불만이 있는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연봉에 대한 불만을 내보내지 말라.
돈에 대해 작다는 불평어린 마음을 내보내면
우주는 고스란히 적은 돈을 되돌려 줄 것이다.
그러나 작은 월급일지라도
그 돈으로 인해 행복해 하고, 감사해 하고,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낸다면
우주법계는 고스란히 그 돈으로 인한 풍요로움을
더 많이 만들어 보내 줄 것이다.

당신이 회사 사장이라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사원들에게 혹은 고객들에게
적은 이익을 되돌려 주고 싶을 것이다.
그래야 회사가 부자가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회사가 부자가 되는 것, 더 많은 돈을 버는 것,
그것은 정확히 끌어당기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부자가 될 것에 대한 마음은 완전히 비워버리라.
그리고 내보내는 것에만 집중하라.
즉 사원들에게 회사가 번 이익을 아낌없이 나누고 베풀어 주라.
안철수 연구소의 안철수 사장은 아무런 조건 없이 회사의 지분을
자녀들이 아닌 직원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았나.

또한 고객들에게 돈을 끌어당기려는 마음을 버리고,
다만 고객들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를 고민하라.
고객들에게 어떤 것을 베풀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라.
무언가를 얻을 생각 없이 다만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고,
내보내 줄 것에 마음을 집중할 때
바로 우주법계의, 에이와의, 불성이며 신성의
사랑과 자비의 한량없는 힘이 붙을 것이다.


먼저 자신에게서 시작하라

자신의 삶에 전적으로 만족하라.
전적으로 감사를 표명하라.
자기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라.
그것은 곧 자신의 삶에 무한한 만족스러운 일들과
감사할 일들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 전적인 사랑을 보내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게 감사를 느끼는 자에게
무엇이 흘러나오겠는가?
또한 반대로 자신을 억압하고, 미워하고, 자괴감을 느끼며,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서 무엇이 내보내지겠는가?

아름다운 것, 지혜로운 것, 사랑과 자비, 만족과 감사와 같은
진리의 덕목들을 내보내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그것이 되어야 한다.
먼저 자신부터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만족하고, 예뻐해 주어야 한다.
그러면 저절로 끌어당겨질 것이 아닌
내보낼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끌어당겨질 것, 받을 것, 얻을 것에 집중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은 아직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을 뜻한다.
내가 부족하니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옴으로써
나를 채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언제나 완전하고 완벽하다.
삶은 언제나 풍요롭다.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한다면
미래의 그 어떤 순간에도 만족은 없다.

반대로 나 자신이 꽉 차 있어서 흘러 넘친다면 어떻겠는가?
나 자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감사와
풍요로움과 만족이 넘친다면
애써 외부에서 무언가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내 안에 자가발전소가 있어서
무한히 생산할 수 있는 자력의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무엇을 바깥에서 바라겠는가?
그 사람은 바깥에서 무언가를 끌어오려고 하기 보다는
내 안에서 생산한 것을 바깥으로 나누어 주고, 내보내 주고,
베풀어 주는데 더 큰 관심을 가질 것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주의 깊게 살펴보지 못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부주의 한 마음이 내보내는 것들로 인해
힘겨워할 일이 생길 것이다.

하루를 정리하며 매일 밤 ‘내보낸 일기’를 적어 보라.
오늘 하루 무엇을 내보냈는가를 돌이켜 보라.
물질이나 말이나 행동으로 내보낸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마음으로 내보낸 것이 없는지도 주의 깊게 살피라.
신업과 구업이 중요하지만 의업이 더없이 중요한 것처럼
마음으로 무엇을 세상에 내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야말로
‘내보내는 법칙’에 있어서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무언가가 내게 끌어당겨지기를 바라지 말라.
무엇을 얻을까, 벌까, 가질까를 생각지 말라.
무엇을 내보낼 수 있을지를 생각하라.

내가 태어나서 죽는 그 날까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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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8일 오후 6시

인천공항

 

출국수속을 마치고

인천공항의 거의 끝자락에 위치한

인도행 비행기 탑승 게이트에 앉아

깊은 감회에 빠진다.

 

 

 

 

아,

드디어 떠나는구나.

 

저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오고 가는 비행기들과

비행기 너머로

붉게 떨어지고 있는 노을도

내 마음을 아는지

뜨겁게 그러나 엄숙하게 대지를 비추고 있다.

 

 

28일 오후 늦게 출발하여

현지 시각으로 같은 날 밤 11시 50분에 델리 도착.

 

많은 인도 여행 가이드북이나 여행기

그리고 인터넷에서 찾아 본 자료를 종합해 보면

대부분의 여행자에게,

주로 밤 늦게 인도 델리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 밖이 많이 위험하니

공항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새벽에 출발하라고 하는

간곡한 권고가 천편일률적으로 나와 있다.

 

나 또한 그 권유를 따르기로 하고

공항 안의 의자 한 켠에 자리를 잡고 눕니다.

그런데 이상하다.

나만 여기 이렇게 자리를 깔고 누웠지

그 많던 여행객들이 모두들 썰물 빠지듯 공항 밖으로 밀려 나가고 있다.

 

가만 보았더니 대부분의 배낭여행객들이

첫 날 밤에 도착하다보니

미리 픽업서비스를 요청하였거나,

미리 숙소를 마련해 두어 숙소의 차량이 나와서

데리고 가던 것.

 

초보 배낭여행객들에게는 성경과도 같은

가이드북의 고구정녕한 말씀에 따르지 않고

저들은 어디에서 저런 방법을 익혀 온 건가

하는 상념에 빠지다가

침낭 속의 다소 불편한 온기에 의지해

어느덧 잠에 든다.

 

첫 여행지에서의 하룻밤이라 그런지,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

달랑 얇은 침낭 하나 펴고 잠을 자서 그런 건지

밤새 뒤척이다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공항 화장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공항을 빠져나간다.

 

별 생각 없이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공항 문을 박차고 나가다가

두 발자국 걷자마자

자동 반사적으로 뒤돌아 공항 안으로 휙 들어온다.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수십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뭐라고 뭐라고 말다툼을 벌이며

나를 놓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통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어 되돌아 들어왔다가

숨 호흡을 크게 한 번 한다.

 

모두들 자기 택시를 타라고,

손님을 끄는 호객행위인 셈이다.

 

다시 나가려다가

언뜻 가이드북에서 보았던

정액제 프리페이드 택시가 생각나

미리 돈을 주고 프리페이드 택시 바우쳐를 받아서

바우쳐에 적혀 있는 택시번호를 찾아 간다.

 

한바탕 쫒아오는 호객 택시기사들에게

바우쳐를 치켜들었더니

이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포기를 하고,

바우쳐 번호의 택시에 배낭을 싣고

일단 ISBT 라고 하는 카슈미르게이트, 즉 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한다.

 

델리에서 며칠 머물 계획이 아니라

오늘 중에 시외버스를 타고

맥그로드 간즈라는 달라이라마가 머물고 계신 곳으로

갈 계획이기 때문이다.

 

물론 가이드북 하나 달랑 들고 왔고,

대충 어디 어디를 가겠다고 생각만 하고 온 터라

가이드북에 써 있는데로

카슈미르 게이트에 가서 맥간가는 버스를 탈 요량이었다.

 

그런데 카슈미르 게이트를 몇 바퀴 빙빙 돌며

버스표를 끊으려고 아무리 묻고 찾고 해도

맥그로드 간즈행 버스표를 살 곳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일단 시외버스표는 포기하고

오고 가는 여행자에게 다른 방법도 묻고,

델리라도 조금 더 보자 싶어

올드델리 시내를 배회하며 걷는다. 

 

 

 

 

오전 한나절을 올드델리와 찬드니촉, 붉은성 주변을 걸으며

인도, 인도, 인도가 이런 곳이구나 하는 것을 대번에 감지한다.

 

델리 첫 날!

이토록 긴 하루가 있었던가.

완전히 낯선 세계, 낯선 곳에 나뒹구는 낙엽처럼

정처없이 떨어져 한 나절을 보낸다.

 

아, 인도, 이것이 인도구나.

하루 사이 인도 델리는

내게 그 속살들을 거침없이

심지어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동시에 너무도 많은 것을 내보여 주는 듯 하다.

 

인도를 오래도록

그것도 몇 번씩이나 여행했거나,

혹은 인도에서 삶을 사는 사람이 들으면

콧방귀를 뀔 소리이겠지만,

내게는 그만큼 단 하루의 마주침이

특별하고도 매우 진하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한나절을 정처없이 걷는데

인도인들은 잠시도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택시나 릭샤를 타라고 행선지를 묻는 사람,

'코리아!'를 연발하며 그저 호기심으로 불러보는 사람,

그저 곁에 따라와 연실 웃으며 이것 저것 묻는 사람,

물건을 팔려고 계속해서 쫒아오는 사람,

묻지도 않았는데 도와줄 것 없느냐며 달려와 말을 거는 사람,

행선지까지 데려다 주겠다며 무작정 내 앞으로 걷는 사람,

어린 아이 젖을 먹이며 구걸하는 사람,

손을 내밀며 한 푼 달라고 애절한 눈빛을 보내는 장애인,

아무 의미 없이 다가와 툭툭 치듯 쫒아오는 사람,

 

도저히 내 생각으로는 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만히 걷는 사람을 걷지 못하게 만들면서까지

계속해서 내게 다가오는지

다 짐작해 낼 수 없을 지경이다.

 


수도 없이 사람들이 몰려오고

하릴 없이 몰려 간다.

 

어디 그 뿐인가.

거리의 버스며, 승용차며, 택시, 오토릭샤, 사이클 릭샤,

오토바이 등이 경쟁하듯 혹은 싸우듯

귀를 찢는 경적소리를 울리며 귓전으로 질주하며 혼을 빼 놓는다.

 

그런가 하면

올드델리의 찬드니 촉이며

골목 골목까지 자동차와 온갖 탈것들

그리고 가축과 사람들이 합창으로 만들어내는

뿌연 먼지와 분진, 매연들은

눈과 코 그리고 온 몸에 찰싹 찰싹 달라붙듯

본드처럼 와 박힌다.

 

그뿐이 아니다.

오늘 저녁 곧장 맥간으로 떠나려다 보니

어느 숙소에 무거운 배낭을 맡길 수조차 없어

하루 종일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업과 욕심의 무게를 감당하며 걷다 보니

온몸에서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쏟아지는 땀줄기를 타고 먼지 먹은 땟국물이 줄줄 흐른다.

 

몸을 조금 쉬자 싶어 붉은 성 광장 나무 아래

잠시 배낭을 내려 놓고 앉는다.

쉼.

잠시 쉬어야 겠다는 생각.

 

 

 

 

광장 한 켠에 앉아 있자니

오고 가는 사람들의 행렬이 줄을 잇는다.

성 안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고 간다.

 

 

 

 

 

그 와중에도 꼬마 아이들이며 학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주위를 맴돌며

쿡쿡 찔러 본다.

나 참.

동물원 원숭이가 된 느낌이랄까...

 

 

 

 

모든 것이

인도에서는 처음이라

배는 고픈데,

밥도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모르겠고,

길가에서 파는 구운 옥수수를 하나 물어 뜯으며 다시 걷는다.

 

 

 

 

켁켁!

목이 메여 온다.

그러고 보니 한 바가지 땀을 흘리면서도

물 한 방울 먹지를 못했다.

어디에서 물을 사야할지 도무지 보이지를 않는다.

 

마침 길건너에 현대식 빵집이 있고,

유리창 너머로 물과 음료가 진열되어 있어서

그 집으로 들어간다.

먼저 생수를 하나 시켜 단번에 생수 한 통을 먹어치운다.

빵도 하나 시켜서 먹고.

 

잠시 화장실에 가 있는데,

밖에서 한국말이 환청처럼 들려온다.

'참 벌써 환청이 들리는거야!'

밖으로 나갔더니 진짜 한국인 여행자를 처음 만나다니.

 

이들에게 물었더니

누가 공영버스를 타고 가느냐고

여행자들은 모두 여행사의 사설버스를 타고 간다네.

 

그럼 그렇지.

 

오토릭샤를 타고

바로 빠하르간지로 향한다.

 

 

 

 

기차역을 지나

 

 

 

 

빠하르간지의 사설여행사에서

맥그로드 간즈행 버스표를 구입한다.

 

에어컨 나오는 최신식 리무진 버스라며

600루피면 아주 싼 가격이라고 해서 산 뒤,

3시 30분까지 오라는 말을 듣고,

빠하르간지를 돌다 정확한 시간에 도착.

 

이게 웬말인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차.

결국 6시가 되어 출발한 것도 모자라

에어컨은 아예 고장이 났고

버스는 너무 오래된 구닥다리 버스.

 

어디 그 뿐인가.

나는 600루피를 주고 버스표를 끊었는데,

다른 여행자들은 대부분 400루피~500루피 정도를 주었다.

그도 사람마다 다르고

어느 여행사에서 끊었느냐에 따라 다 다르게 값을 치른 것이다.

첫 새내기 여행자 티를 내가 그렇게 내었었나 보다.

 

400루피를 내고 표를 산 사람도

표를 살 때는 에어컨 나오는 최신 리무진 버스라고

똑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

버스가 2시간 이상 늦게 오고,

최신식 시설을 갖춘 버스도 아니고,

에어컨도 나온다고 했는데 전혀 안 나오고,

이런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이상하게 버스 안의 모든 여행자들은

불평 하나 없이 당연하다는 듯 평화로와 보였다.

 

아무도 그런 것들에 대해 따져 묻지 않는다.

이럴수가!

누구 하나

'왜 에어컨이 나온다고 해 놓고 나오지 않느냐?' 거나

'처음 말 한 것과 다르지 않느냐?'거나,

'왜 이렇게 차가 늦게 온 거냐?' 혹은

'왜 나만 이렇게 버스비를 비싸게 받은거야?'

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 아주 당연하다는 듯

아무런 동요 없이

모두들 평화롭게 버스 안에 앉아 있다.

 

 

 

 

한 한국인 여행자에게

이런 상황이 참 대단하구나 싶다고,

이래서 인도에 오는 것이구나 싶다고,

이런 것을 배우는 것이구나 싶다고 말했더니,

인도를 먼저 여행한 선배로써

해 주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단다.

 

"인도에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다!"

 

이런 외부적인 상황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그것부터를 배우는 것이

인도의 첫 날이 내게 준 직접적인 교훈이다.

 

모든 것은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란 말인가.

 

한국에서 같았으면

모두들 노발대발 난리를 치며,

버스회사가 사기를 쳤다느니

돈을 환불해 달라느니 난리가 났을 상황이지만,

이 외부적인 상황이

인도에서는 전혀 문제시되지 않는다.

 

아니 그게 바로 인도인 것이다.

 

버스는

해가 저무는

노을지는 창밖으로

델리를 떠나보내며

조금씩 어둠 속으로

가다 서다를 반복하면서 떠밀려 가고 있다.

 

달라이라마의 고장

맥그로드 간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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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지난 1년의 기록

산방한담 2009/12/18 20:56 Posted by 법상

관음사를 떠나오면서

신도님들께서

사진 찍은 것좀 보여달라고 그러셨는데,

계속 미루다가 이제서야 몇 장 올립니다.

 

 

이 때가 아마 올초

전반기 불교아카데미를 마치면서

예비군승 스님들과 함께 한 수계법회 때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전반기 성지순례로

대흥사에 갔다가 찍은 사진이네요...

 

 

불교 아카데미 강의 사진입니다.

 

 

후반기 쌍계사, 화엄사 성지순례 사진

 

 

이 사진은

관음사 떠나오던 날

아쉬움에 몇 컷 찍었네요...

 

 

 

이 사진은

작년 겨울, 막 관음사에 와서

신도님들과 찍었던 사진.

 

 

 

 

이 사진도 전반기 성지순례 때네요.

 

 

 

저와 함께 관음사의 1년을 함께 보내 준

마음이 따뜻하고 순수했던

그 웃음이 오래 기억될

홍철이 명수

노홍철, 박명수 아닙니다. ^^

 

 

이 사진도 전반기 성지순례.

아카데미 법우님들.

이 법우님들은 천주교 신자분들이셨는데,

관음사에서 종교를 초월해서

마음을 활짝 열고 불법공부에 함께 해 주신 분들이십니다.

 

 

매일 새벽예불에 함께 동참해 주신,

수진, 법화심

아름다운 수행자 도반 부부.

 

 

가을 산사순례 때 화엄사에서...

 

 

 

이 사진도 떠나오던 날

보살님들과 아쉬움에 찍었던 사진들.

 

 

태양렬, 유수연

아름다운 수행자 도반 부부.

 

 

 

관음사 거룩하신 부처님 상호가

아련하게 떠오릅니다.

 

 

법회 끝날 때마다

모두 함께 마주 보고

'성불하세요' 하고 인사를 나누었었습니다.

관음사에서의 지난 1년의 기록들을 

감사와 사랑으로

진한 감사함으로 회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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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단순하게 생각해서
누구나 잘 살기 위해 세상을 살아간다.
또 누구나 삶의 목적은 잘 사는데 있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라는 정답이 있고 체크리스트가 있어서
매일같이 잠자리에 들기 전, 또 매 해를 보낼 때마다
그 표를 하나하나 내 삶과 대조해 보면서 체크해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삶이라는 것이 그렇게 딱 정해진 것 만은 아니기에
그런 것이 있을리 만무하다.

그러나 조금 큰 틀에서 본다면
어떤 종교에서든, 어떤 사상이나 가르침에서든
공통적으로 적용될 법한 일반적인
‘잘 사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를테면 부처님도 하느님도
또 수많은 인류의 성자, 사상가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사랑을 베풀라' '자비를 베풀라' '이웃과 나누라' '보시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 본질은 어느 종교에서도 다르지 않다.
보시와 베풂이라는 그 본질은 진리의 영역이다.
베풀고 보시하는 길은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라면
누구나 가야할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요 진리인 것이다.

다만 각 종교별로, 사상가별로 그 구체적인 방법은 다를 수 있다.
십일조를 내든 자유롭게 보시를 행하든,
절이나 교회에 내든 불우한 이웃에게 내든,
사람에게만 사랑과 자비를 베풀든
풀이며 나무 산천초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에게 베풀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서로 다를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기답게 저마다의 개성으로써 실천 해 나가야 할
세부적인 부분 보다는
전체적인 진리의 본질로써
우리가 삶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어떻게 참된 삶을 살아 나갈 수 있는가 하는
실천의 정신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어느 종교에서든, 어느 사상에서든,
진리의 본질을 관통하고 있는 가르침이라면
대부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만한
그런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언급함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한
최소한의 사유의 뜰을 제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가지를 적어 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 목록을 펴 들고
하나 하나 내 마음과 비추어 보며
사유의 뜰을 넓혀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혹은 매 순간 순간 시간 날 때도 좋고,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괴롭거나 힘겨운 경계를 당해 마음이 휘둘릴 때
그 때 이 목록을 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르긴해도 아래에 열거된 마음공부 목록만 잘 점검하더라도
어지간한 괴로움이나 경계는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쌓일 것이라고 본다.

또 기독교나 혹은 또 다른 종교의 신자나 종교가 없는 분이더라도
이 목록의 가르침들은 대부분이 수용 가능한 것들일 것이다.

법정스님의 말씀처럼
사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끊임없는 복습의 연장이다.
가르침의 본질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마음을 비우고 이웃과 나누며 욕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가르침들이 항상 내 가까이에서 살아 움직이고
실천의 힘이 되며 내 존재 안에 숨쉬도록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복습만이 우리 내면에 힘을 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래의 목록은 한번 읽고 그만 두기 보다는
가까운 곳에 두고 '잘 사는 방법' 체크리스트처럼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목록의 구체적인 이해와 방법들, 깊은 이해는
이 목탁소리의 글들을 읽어 내려가면서
하나씩 터득해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일체를 다 받아들이라. 수용하라.

내 삶에 등장하는 그 어떤 사건도, 사람도
모두 온전한 진리의 목적을 가지고 온다.
이 세상에는 정확히 필요한 일만이 정확히 필요한 바로 그 때에
정확히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찾아온다.

또한 그 모든 것들은 좋은 것이든 싫은 것이든
모두가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내게로 온다.
그 모든 일들이 부처의 자비요 신의 사랑이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대 긍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좋다고 너무 붙잡지 않고 싫다고 버리려 애쓰지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괴로울 일이 없다.

삶을 전체적으로 받아들이라.

∎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고 말하라.
∎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들이 되돌아보면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없는가. 괴로운 상황이나 미운 사람이 내게 주는 긍정점을 찾아보라.
∎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고 외치라.



2. 집착을 버려라. 놓아라. 비워라.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괴로움의 씨앗이 있다.
돈도 명예도 사랑도 소유도 성공도 지식도 가치관도 집착할 것이 못 된다.
모든 수행의 핵심, 모든 행복한 삶의 핵심은 무집착에 있다.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부처자리요 영성이 충만해지는 자리다.
아상을, 집착을, 욕망을, 번뇌를, 소유를, 생각을 놓고 비워라.
비우면 채워지고, 놓으면 잡히며, 버렸을 때 전체를 잡을 수 있다.

텅 비면 충만하다.

∎ ‘지금 죽을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다면 이유를 10가지 적어보라. 그것이 바로 가장 큰 내 집착의 실체다.
∎ 괴로운가? 그렇다면 그 원인은 무언가에 대한 집착에 있다. 집착의 실체를 찾아보라.
∎ 내 욕망과 집착의 목록을 만들라. 욕망을 버리기 쉬운 것부터 지워본다.



3.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으라. 관하라.

생각을 과거나 미래로 내보내지 말라.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지켜보라.
‘지금 여기’에 집중하라.
객관의 관찰자가 되어 나를 바라보라.
한 발자국 뒤에서 나를 지켜보라.

내 생각, 느낌, 몸, 호흡, 그리고 대상을 아무 판단 없이
다만 지켜보고 관찰하라.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비로소 내 안 깊은 곳의 신성을 불성을 일깨우게 된다.
영성이 충만해지고 존재는 깊은 휴식에 든다.

깨어있는 관수행이야말로 깨달음의 요체다.

∎ 아침 저녁으로 10분 좌선에 들어 마음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 하루 일과 중 ‘3분호흡관’으로, 들숨과 날숨에 숫자를 붙이며 호흡을 관찰한다.
∎ 화날 때 화부터 내지 말고 화내기 직전 호흡을 10번 크게 들이 쉬고 내쉬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난 뒤에 화를 내더라도 낸다.



4. 부처님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 자연의 흐름에 맡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을 버리라.
나는 없다. 오직 본연의 성품이 있을 뿐.
내가 한다고 하면 내가 괴롭고 즐겁지만
모든 것을 맡기면 괴로울 것도 즐거울 것도 없다.

늘 한결같이 살 수 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살라.
자연의 흐름, 진리의 흐름에 내 몸을 맡기라.
일을 할 때도 자연스런 분위기와 흐름을 타고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 가장 좋다.

∎ 3번 이상 권유하고 시도해서 안 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포기할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 모든 것을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 ‘하느님 일’이라고 생각하고 맡긴다.
∎ 잘 되든 못 되든 상관하지 말고 당신이 하시는 일이니 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라.



5.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 나누어 주라.

‘내 것’이란 없다.
잠시 나에게로 흘러왔다가 흘러갈 뿐이다.
그것을 흐르도록 두라.
내 안에 가둬 쌓아두지 말라.

소유든, 사랑이든, 마음이든, 가르침이든 이웃과 함께 나누라.
끊임없이 자비와 사랑을 베풀라.
베풀되 베풀었다는 상 없이 베풀라.

베풀어도 사실은 베푼 것이 아니라
잠시 이쪽에서 저쪽으로 인연따라
정확히 필요한 곳에 가 닿을 뿐이다.

준다는 것은 곧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면 받게 되고,
준 바 없이 주면 무한한 복을 받게 된다.

∎ 월급을 받으면 일정액을 떼어 순수하게 베풂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라.
∎ 돌려받을 수 없는 곳, 받을 수 없는 사람에게 베풀자.
∎ 매월 좋은 책을 10권씩 사서 버스기사, 회사 동료, 이웃들에게 아무 이유 없이 주자.



6. 적게 생각하고 많이 행동하라. 생각날 때 바로 저질러라.

될 수 있다면 머리를 적게 굴리는 것이 좋다.
생각은 본연의 진리를 막아선다.
생각과 판단을 줄이면 삶이 선명해지고 명료해진다.

많이 생각하기 보다는 많이 저질러라.
행동은 깨달음의 지름길이란 말이 있다.

∎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면 바로 주라. 생각이 많으면 주지 못한다.
∎ 한 생각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바로 저질러라.
∎ 오랫동안 마음만 있었지 용기를 내지 못한 것이 있다면 저질러보라.



7. 내 생각을 남에게 주입하지 말라. 고집을 버리고 활짝 열려있으라.

어떤 한 가지 생각에도 전적으로 고집하지 말라.
언제든 바꿀 수 있는 유연성을 키워라.
어떤 가르침도, 어떤 사상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가슴을 열어라.

어떤 사람에게도 배울 수 있는 자세를 가지라.
내 생각이 옳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다.
내 생각을 상대에게 주입하지 말라.

∎ 전혀 새로운 분야의 책도 한번쯤 사서 읽어 보고, 나와 생각이 맞지 않는 사람의 말도 한번쯤 수용하는 자세로 들어보라.
∎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 배울 수 있는 점을 찾으라.
∎ 다른 종교의 성전을 읽어보라.



8. 부족하게 불편하게 산다. 아끼고 절약한다.

자식을 실패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지고 사는 것 보다
조금 불편하고 부족하게 절약하며 사는 가운데에서
사유의 뜰이 넓어진다.

몸이 불편하면 정신이 깨어나지만,
몸이 게으르고 편한데 익숙해지면 정신의 지평이 축소되고 만다.

또한 아끼고 절약하는 가운데 충만한 복이 깃든다.

∎ 집에 있는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 필요한 곳에 나누어 준다.
∎ 무언가를 살 때는 이것이 욕망에 의한 것인가 필요에 의한 것인가를 살피라. 사고 싶은 것을 바로 사지 말고 좀 나둬 본다.
∎ 아끼고 절약한 만큼을 돈으로 환산하여 저축하고 보시한다.



9. 매일 기도의 시간을 가진다. 수행과 명상을 실천한다.

기도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행위는 없다.
물질은 육신에게 필요한 것이지만 기도는 정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물질은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기도는 다음 생까지 이어진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라.
아침의 기도는 낮 동안의 재앙을 없애주고
밤의 기도는 밤 동안의 재앙을 소멸시킨다는 말이 있다.

기도와 수행의 시간을 가지는 자에게 충만한 평화가 깃든다.

∎ 매일 아침 기도는 거르지 않는다.
∎ 기도의 본질은 감사다. 매 순간 순간 아무리 작은 일에도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 주 1회 이상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성전에서 기도를 한다.



10. 적게 말하고 많이 들어라. 침묵하라.

말이 많아지면 그만큼 허물도 늘어난다.
입이 가벼우면 생각도 가벼워지고 행동 또한 가벼워져
자기 중심을 잡기 어렵다.
입이 화의 근원이고 번뇌의 근원이 된다.

침묵하는 자는 쉬 들뜨지 않으며 가볍지 않고 쉽게 행동하지 않는다.
내 생각과 견해를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리라.
침묵 속에 기도와 명상이 있고, 신과 부처와의 대면이 있다.

∎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공감해 주라.
∎ 때때로 말하지 않는 ‘묵언’의 시간을 가지라. 묵언의 하루를 보내는 것도 좋다.
∎ 대화중에 말을 관찰하고, 내가 하루 종일 했던 말의 목록을 적어보라.



11. 자연의 먹거리로 소식하라. 자연치유력을 높인다.

인공적인 것, 가공된 것, 인간의 욕심이 개입된 먹거리는
곧 우리 몸을 혼탁하게 만드는 주범이 된다.
몸이 맑아져야 마음도 함께 맑아진다.

될 수 있다면 자연 그대로의 먹거리가 좋다.
자연의 생명이 담긴 음식은 곧 우리 몸의 자연치유력을 높여주어
온갖 병을 예방해 준다.

또한 음식을 먹을 때는 소식을 원칙으로 한다.
많이 먹을수록 식복이 다해 수명도 줄어든다.
많이 먹으면 정신이 둔해진다.

∎ 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이라도 찾아 가 자연의 먹거리를 직접 생산해 먹어본다.
∎ 가공식품, 인스턴트식품, 탄산음료 등을 먹지 않는 날을 정하라.
∎ 하루 한 끼 이상은 잡곡밥과 야채, 콩, 감자 등만으로 소식한다.



12.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라. 외롭고 고독한 시간을 즐기라.

외롭게 홀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안의 참나를 만나는 소중한 통로가 되며,
그 때 비로소 신과 부처와 대면할 수 있는 시간이 된다.

홀로 있다는 것은 곧 전체와 함께 있다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정신이 내 안에 뿌리를 내린다.

∎ 때때로 홀로 여행을 떠나라.
∎ 하루 중에 아무 생각 없이, 일 없이 다만 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가지라.
∎ 일주일에 몇 일은 집에서 TV를 꺼 두고 지내라.



13. 매일 숲길을 걸으라. 산책의 시간을 가지라.

숲길이나 산길을 홀로 걷는 산책의 시간은
더없이 소중한 자기와의 대면이며
걷는 일 자체가 경행의 수행이 된다.

걸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마음을 관찰하며 걸으라.
서서 두 발로 대지 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몸 건강에도 정신 건강에도 큰 도움을 가져온다.

아침 저녁 조용한 산책의 시간에
가장 창의적인 아이디어도 떠오르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도 된다.

때때로 산을 찾으라.

∎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때를 정해 가까운 산으로 산책을 나서라.
∎ 주말이면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산을 찾으라. 때때로 지리산을 홀로 종주해 보라.
∎ 숲길을 걸으며 발바닥에 마음을 모아 집중하고 그 느낌을 알아차린다.



14. 자연의 변화를 살핀다.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유심히 지켜본다.

자연이야말로 가장 진리와 합일을 이루며 사는 생명이다.
자연과 가까이할수록 우리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자연의 지혜를 배우게 된다.
자연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곧 마음을 비우는 일이 된다.

∎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나무나 야생화를 하나 정해 유심히 관찰하라.
∎ 계절의 변화를 오감으로 느껴보고, 자연 관찰 일기를 적으라.
∎ 식물도감을 가까이 하고 식물의 이름을 알아본다.



15. 자기다운 삶을 살라. 누구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라.

남처럼 살려고 애쓰지 말고 독창적인 자기 자신의 길을 걸으라.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유일무이한 진리의 표현이다.
진리가 '나'로써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나로써 피어나는 진리를 꽃피워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이다.

누구처럼 사는 것은 억지스럽지만
나답게 사는 것은 자연스럽고 쉽다.
자기다운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나온 진리의 목적을 이뤄내는 것이다.

∎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에너지를 쏟으라.
∎ 사소한 것일지라도 나의 긍정점을 100가지 이상 찾아보라.
∎ 무엇이든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라.



참된 앎은 곧 존재를 변화시킨다.
수첩에 적거나 프린트를 하여
눈이 자주 가는 곳에 붙여 놓고 틈틈이 읽기라도 해 보라.
분명 삶에 변화가 찾아 올 것이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은은히 삶 속에 스며들 것이다.
하나 하나의 목록이 어찌 생각해 보면 별 내용 아닌 듯 느껴질 지 모르지만
이 안에 우주의 신비로운 지혜의 소식이 담겨 있다.

모르긴 해도 수많은 종교나 사상, 철학, 성인들의 가르침이
이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을 것이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다르겠지만,
어떤 사람은 이 가르침들 안에 깨달음의 씨앗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삶을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실천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무슨 거창한 수행을 한다거나,
삶을 변화시키겠다거나 하는 노력을 기울일 것도 없다.

쉽고 단순하게 실천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다만 틈틈이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이 목록이 가지는 좀 더 본질적인 의미를 삶 속에서 찾다보면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작은 깨우침이 찾아 올 지 모른다.

이해되지 않거나,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떻게 현실에서 실천해야 할지 모르겠더라도 괜찮다.
점차 이해는 깊어질 것이다.

우리 안에 본연의 깨달음이 항상 자리하고 있음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자기 자신의 본래 능력을,
우리 안의 불성이며 신성을 너무 쉽게 무시하지 말라.
반드시 안에서 깨우침의 향기가 피어오를 것임을 믿어도 좋다.

다만 반복해서 읽고 사유해 보라.
그것도 어렵다면 그저 읽기만 해도 좋다.
반복해서 읽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내면 깊은 곳에
몇몇 언어들이 생명력을 일으키며 물결을 일으킬 것이다.

수행이란, 마음공부란 사실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들은 수행과 명상에 대한 너무 높은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억지스런 노력과 애씀은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수행을 오히려 나와 멀어지게 만든다.

고행주의를 버리라고 했던 부처의 말은
이미 2,500여 년 전에 있어왔지만
그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수행은
고도의 고행과 노력을 감당해 낼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수행은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어떤 고난도의 기술이 아니다.
가장 단순하고 쉬운, 너무 쉽고 단순해서 오히려 어렵게 느끼는 것이
수행이요 명상이다.

그러니 그동안 가져왔던 수행에 대한,
명상에 대한 벽을 깨라.

아주 자연스럽게, 아주 쉽고 단순하게,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을 풀기 바란다.
그랬을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될 수 있다.
내 안의 깊은 휴식의 공간이 비로소 본연의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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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현철  수정/삭제  댓글쓰기

    깃발마저 다르게 느껴집니다.

    2009/10/08 09:21
    • 법상  수정/삭제

      예...
      그 곳의 풍경이
      그러합니다.
      사진을 보니 또 다시 떠나고 싶어지네요...

      2009/10/08 15:25
  2. Favicon of http://www.unny.com BlogIcon montreal florist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름다운 영상에 좋은 말씀이시네여

    2010/01/19 05:28




제 20, 이색이상분
형상과 모습을 여의다


離色離相分 第二十
須菩提 於意云何 佛 可以具足色身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 見 何以故 如來 說 具足色身 卽非具足色身 是名具足色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 可以具足諸相 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諸相 見 何以故 如來說 諸相具足 卽非具足 是名諸相具足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이색이상이라는 것은 형상과 모습을 여읜 자리에 부처님은 계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부처님을 형상과 모습으로써 생각하곤 한다. 전국의 어느 사찰을 가 보더라도 부처님의 모습이 형상으로써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본다. 그리고 우리는 그 법당의 형상불에 예배한다. 물론 그것이 완전히 잘못되었으니 다 그만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임을 완전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법당에 모셔진 형상의 부처님은 어디까지나 색이고 상일 뿐이다. 본질은 색과 상을 떠나 있다. 법당에서 절하고 예불을 올리면서도 항상 이 참된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분에서는 부처님을 또 진리를 형상이나 모습으로써 바라보지 않을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구족한 몸을 갖춘 것만을 보고 부처라고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몸을 갖추었다고 여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구족한 몸은 곧 구족한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히 구족한 [32상]상을 가졌다고 하여 여래라 할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구족한 상을 갖춘 것을 여래라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상이 구족되었다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구족된 상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여래는 구족한 색신의 몸을 갖추었으며 32상 80종호를 구족하고 계신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의 상호를 말로 표현하는 순간 사실은 그것과는 멀어지고 만다. 그 말이 부처님을 그대로 나타내 줄 수는 없다. 말로 표현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말로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중생들에게 어떻게 부처님과 가르침을 전해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부처님의 진리성을 표현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말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을 표현한 말이 바로 구족한 몸이고 구족한 상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구족한 상이나 구족한 몸이라는 것은 곧 구족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구족되었다는 이름일 뿐 ‘구족’이라는 언어 자체가 구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족은 곧 구족이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구족일 뿐인 것이다.

부처님은 이와 같이 형상과 모습을 떠나서 계신다. 부처님을 어떤 모습을 가지신, 어떤 형상을 구족하신 존재로써 생각지 말라. ‘부처님은 어떤 분이실까?’ ‘부처님은 인자하신 할아버지 같은 분이실거야?’ ‘부처님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부처님의 몸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가? 아직도 형상과 모습으로써 부처를 구하고 있는가? 부처님은 형상이나 모습이라는 틀에 갇혀 있는 분이 아니다.

부처님이란 진리 그 자체이며, 생명 그 자체이고, 우주 그 자체이며, 허공 그 자체이고, 완전한 무(無)요, 공(空) 그 자체이다. 크고 작은 것도 아니고, 잘나고 못난 것도 아니며, 남자도 여자도 아니고, 그 어떤 한정이나 표현으로도 나타낼 수 없다. 물론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이 말들이 부처님을 나타낼 수는 없다. 다만 표현을 그렇게 했을 뿐 이 표현은 더 이상 부처님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습관적으로 부처를 틀 속에 가두느라고 애를 쓰고 있다. 법당에 계신 부처님의 모습을 보라. 대부분이 비슷비슷하다. 비슷한 모습으로 부처님의 상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다 보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법당의 부처님의 모습을 부처님이라고 믿고 있다. 은연중에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러나 법당의 부처님 형상 안에만 부처님이 담겨 있을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교의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을 생각해 보라. 그 상은 부처가 아닌가? 왜 그 상을 보면 거부감을 느끼고 불상을 보면 흡족한 마음을 가지는가. 절에 가서 불상을 보고 탱화를 보면 편안한 느낌인데 교회의 예배당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가. 그것이 바로 부처를 색과 상으로 관념화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부처는 어떤 특정한 색과 상에 갇히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색상에서 벗어나 있지도 않다. 법당의 불상도 부처요, 예수상이나 성모마리아상 또한 부처일 수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저 하늘의 구름도 부처요, 바람도, 흙도, 자연도, 저 산과 바다 또한 부처의 몸이다. 나무와 풀꽃들과 새와 들짐승에서부터 곤충이나 미생물들에 이르기까지 생명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 형상 있고 없는 일체 모든 것은 그대로 부처를 담고 있다.

부처는 형상이 아니다. 불상 안에만 부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는 불교 안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불경 안에만 부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만 부처가 있다거나, 진리가 있는 것일 수 없다. 불교는 다만 온 우주의 진리를, 법을, 도를, 참을 이름하여 ‘불교’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불교’라는 이름이 불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불교’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불교는 불교가 아니라 다만 이름이 불교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불교의 특성이다. 그것이 바로 모든 불교 신자들의 자유로움이요 유연함이다. 그것이 진리의 전일성(全一性)이요, 전체성이다. 불교는 불교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불경만을 진리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고집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것이 바로 불교다. 불교이기 때문에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진리를 불교라고 이름지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불교 신자들은 ‘불교’ 속에 갇혀 있고, ‘부처’ 속에 갇혀 있다. 불교라는 이름에 갇혀 있고, 부처라는 형상에 갇혀 있다. 갇혀 있으면 자유롭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할 때 대립과 갈등이 일어난다. 타종교 신자들과 갈등을 만들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만이 진리이고 다른 가르침은 불교보다 열등하다는 상을 만들어 낼 이유가 무엇인가.

불교는 불교를 종교로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진리를 종교로 내세우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라는 종교 속에, 혹은 ‘조계종’이라는 교단 속에, ‘불경’이라는 경전 속에만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 속에 혹은 코란 속에 혹은 도덕책 속이나 소설책 속에, 혹은 할머니 할아버님의 말씀 속에, 노자나 장자의 고전 속에, 인디언들의 말들 속에, 어린 아이의 행동 속에, 목사님과 신부님들의 말씀 속에도 진리는 담겨있다. 불교는 담겨있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말들이, 모든 고전들이,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 모두 다 진리라는 것은 아니다. 이 말의 핵심은 ‘불교’ 속에서만 진리를 찾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불교 안에만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불교는 순수한 진리의 보고라는 점은 어쩔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다른 가르침 속에도 불교는 담겨있다. 어떤 종교는, 어떤 사상은 다른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그대로가 진리를 담고 있으며 부처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니 불교가 불교이기 때문에 믿어서는 안 된다. 불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 불교이기 때문에 불교를 믿는다는 것은 목적이 오직 ‘불교’에 가 있다는 말이고 그랬을 때 ‘불교’ 그 자체에 갇히거나 집착되기 쉽다. 그러나 진리이기 때문에 믿는다는 말은 ‘불교’라는 이름이나 틀을 믿는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진리성을 믿는다는 말이기 때문에 참된 진리를 믿는자는 거기에 어떤 이름을 가져다 붙이더라도 그것이 진리를 대변하고 있다면 마땅히 믿을 수 있는 열려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리라면 노자나 장자를 공부해도 좋고, 성경을 공부해도 좋으며, 인디언의 가르침이나, 옛 어르신의 가르침이라도 전혀 편견이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말에 갇히고, ‘불교’에 갇히고, 어떤 틀에 갇혀 있는 사람은 일단 다른 종교, 다른 사상, 다른 사람의 가르침이 오면 일단 내 안의 문을 자물쇠로 콱 틀어 잠그고 본다. 그뿐 아니라 그러한 가르침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한 마디 했다고 치자.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그것이 왜 우리의 질투심을 유발하고, 그것이 부처님이 아닌 것에 왜 서운함을 느껴야 하는가. 참으로 하느님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부처님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성경을 온전하게 지혜로써 이해한 사람이라면 그는 성경 안에서 불경을 진리를 이해한 사람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라고 했을 때 그 하느님을 잘못 믿고 잘못 이해하며 하느님이란 상에 갇혀서, ‘기독교’란 상에 갇혀서 믿는 사람을 측은한 자비심으로 바라봐야 한다.

물론 성경 특히 구약 속에 수많은 오해의 구절들이 있고, 말 그대로 이해했을 때 진리를 무색하게 할 만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 코란도 마찬가지다. 그 가르침을 잘못이해하거나, 근본적으로 그 경전들이 만들어질 때의 시대적 상황, 편집한 사람들의 잘못 등이 후대에 큰 악영향을 끼친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많은 반성과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들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불행으로 이끌어 갔는가. 그러나 문자의 틀에 갇히지 않고, 문자라는 방편, 언어라는 방편이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오류들을 올바로 이해함으로써 그 종교의 그 경전의 언어 이전에 담긴 참 진리를 온전하게 이해했던 수많은 성인들, 종교인들은 여전히 그 모든 종교들의 순수성과 진리성의 전통을 이어왔다. 바로 그들은 성경을 문자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성경의 수많은 말들이 말이 아니라 다만 이름이 말이었음을 온전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언어가 가지는, 형상이 가지는 모순과 오류들을 이해한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몸이나 상에 치우치지 않고, ‘성경’이라는 상에 치우치지 않고 이해한 사람들이다.

물론 불교 또한 마찬가지다. 참된 불교의 정신을 이끌어 온 사람들은 ‘불교’라는 틀에 갇힌 사람들이 아니라 그 틀을 뛰어넘은 사람들이다. 불교가 불교가 아님을 바로 보고, 부처의 형색이 형색이 아님을 바로 본 사람들이 바로 그 진리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바로 그 정신, 그 진리의 참된 정신을 있는 그대로 내포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금강경’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보배요, 불교 정신을 이어 온 요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렇게 금강경이 아니기 때문에 참으로 금강경인 이 금강경을 받아들임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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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일체동관분
일체를 하나로 보라


一切同觀分 第十八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肉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肉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天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天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慧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慧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有佛眼不 如是 世尊 如來有佛眼 須菩提 於意云何 如恒河中所有沙 佛說是沙不 如是 世尊 如來說是沙 須菩提 於意云何 如一恒河中所有沙 有如是沙等恒河 是諸恒河 所有沙數 佛世界 如是 寧爲多不 甚多 世尊 佛告須菩提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 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 不可得 現在心 不可得 未來心 不可得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체동관(一切同觀)이란 삼라만상 일체 모든 것을 둘로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관찰하여 본다는 뜻이다. 그렇게 차별하여 나누지 않고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보는 눈이 바로 부처님의 오안(五眼)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이 오안으로 보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을, 또 중생들의 마음을 차별하여 나누어 보지 않고 한바탕, 한생명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오안으로 일체를 동관하여 알 수 있는 이유는, 항하의 모래알 수만큼의 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이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며, 즉 그것은 과거나 현재나 미래라는 삼세의 어떤 마음도 고정된 실체가 없어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처님은 오안의 눈으로 일체를 동관함으로써 모든 중생의 마음을 다 알 수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육안이 있습니다.”


육안이란 말 그대로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눈을 말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과거나 미래의 것도 보지 못하고, 공간적으로 다른 장소의 것 또한 보지 못하며, 눈을 가리기만 해도 보지 못한다. 육신의 눈으로는 다만 빛의 도움을 통해 내 눈 앞 사물의 모양과 색깔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 평범한 중생이 가지고 있는 눈은 오안 가운데 바로 첫 번째 눈인 이 육안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모든 갈등과 시비와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생겨나곤 한다. 그러나 여래에게는 이 육안 뿐 아니라 천안, 혜안, 법안, 불안 등의 또 다른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
여기에서는 오안 가운데 첫 번째인 육안을 모든 중생들처럼 부처님 또한 가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천안이 있습니다.”


두 번째 눈, 천안에서부터는 평범한 인간계의 사람이나 축생들이 가지지 않고 있는 눈이다. 천안은 말 그대로 하늘의 눈, 천상세계 신들의 눈으로 인간의 육안을 넘어 시공을 초월하는 눈의 기능이 있다. 천상 신들은 육신이 없기 때문에 육신에 걸리지 않는다. 육신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막힘이 없다. 그러니 천안이란 공간에 걸림이 없는 눈이며, 이 곳에서 어느 곳이든 볼 수 있는 눈을 말한다. 또한 천상 신들은 그 종류에 따라 인간계의 몇 백년이 그 하늘의 하루인 경우가 있는 것 처럼 시간적으로도 인간계에서와 같은 틀에 갇혀 있지 않다. 그렇기에 천안은 시간적으로도 걸림이 없어 과거와 미래에 있을 생사의 모양을 미리 알 수 있는 눈이기도 하다.

[지도론]에서는 ‘천안으로 보면 땅에서부터 하지(下地)의 육도와 중생 제물(諸物)을 본다. 가까운 것이나 먼 것이나 큰 것이나 작은 것 등 모든 사물이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또한 이 천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하나는 수행(修)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인간계에 태어나 선정을 닦고 수행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천안이 있고, 다른 하나는 과보(報)에 따라 얻어지는 것으로 색계의 하늘에 태어나 스스로 천안을 얻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법안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혜안으로 말 그대로 지혜의 눈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지혜’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한다. 혜안은 지혜의 눈이고, 법안은 법의 눈이며, 불안은 부처님의 눈이라고 한다면 간단하게 끝나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도무지 어떤 차이가 있는지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일체 모든 존재의 본바탕에 있는 본질, 불성, 참성품을 깨달아 아는 지혜로, 삼독심 등 일체 모든 번뇌가 사라져 근본불교에서 말했던 무상, 무아, 고, 중도, 연기의 이치를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이 눈은 성문(聲聞)과 연각(緣覺) 같은 근본불교 아라한들이 지니고 있는 눈이다.

성문은 부처님께서 가르치는 음성을 듣고 수행하는 수행자를 뜻하며, 스스로 깨닫기 보다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야 비로소 수행할 수 있는 제자를 말한다. 이에 비해 연각은 독각(獨覺)이라고도 하며, 성문과는 달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를 말한다. 이 두 수행자의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서 대승불교에서 강조되고 있는 보살은 자리이타의 정신으로 자신의 깨달음 보다 중생구제에 더 큰 원력을 세움으로써 원력이 성취되기 전까지는 성불도 뒤로 미룰 정도의 굳은 서원을 가진 수행자를 말한다.

혜안은 바로 성문과 연각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을 중시하는 이들의 지혜의 눈을 말하고, 법안은 보살 수행자, 즉 자신의 깨달음 보다는 중생구제에 원력을 세운 이들의 눈을 말한다. 대승불교에서는 그동안 성문과 연각 등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하면서 법안을 구족한 대승의 보살승을 완전한 이상적 수행자상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불교의 근본 사상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고, 생사와 열반을 나누지 않으며, 중생과 부처를 차별하여 나누지 않는 가르침을 볼 때 자신의 깨달음을 성취하고자 수행하여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을 소승이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아라한의 입장에서는 나의 깨달음이 곧 온 우주 법계의 깨달음과 둘이 아니다. 나라는 한 생명은 곧 온 우주 법계의 전체 생명과 둘이 아니다.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며[一卽一切多卽一], 한 티끌 속에서도 시방세계를 담을 수 있다[一微塵中含十方]고 한 법성게(法性偈)의 게송을 생각해 보라. 한 사람이 깨달음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한 사람의 소승이 자신만의 깨달음을 위해 수행한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 법계의 깨달음이며, 전체 생명이 함께 깨달은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혜안을 구족한 아라한은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모든 생명의 모든 중생의 깨달음을 실현해 보인 사람이다. 아라한의 지혜인 혜안을 통해 일체 모든 생명과 존재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육조스님도 금강경 해설에서 ‘반야바라밀의 진리가 능히 삼세의 일체법을 낸다고 여기는 것을 혜안이라 한다’고 했다. 즉 하나의 진리가 삼세의 일체법을 내기 때문에 애써 삼세 일체법을 다 깨닫겠다고 나설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진리 그 하나를 깨닫게 되면 일체 모든 법을 깨닫겠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혜안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혜안이란, 지혜의 눈으로써, 진리의 세계에서 모든 중생들이 결국 하나임을 보는 것이며, 무분별의 세계에서 모든 분별상들을 하나로 회통하는 것이고, 하나가 곧 전체임을 깨닫는 것이며[一卽一切], 이치가 곧 현상계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理事無碍法界], 공의 세계에서 색이 하나임[空不異色]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반대로 법안을 구족한 대자대비의 보살은 일체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을 통해 자신 또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이다. 일체 모든 중생들이 깨닫지 못한다면 곧 내가 깨닫지 못한것과 다를 것이 없으며, 일체 모든 중생이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자신도 완전한 깨달음의 향기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즉 보살은 법안을 통해 일체 모든 존재의 깨달음이 곧 나의 깨달음임을 실천하는 수행자인 것이다. 육조스님의 해설에 보면 ‘일체 불법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고 여기는 것을 법안이라고 한다’고 했다. 즉 일체 불법은 모든 생명과 모든 존재들 내면에 본래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보살은 그 모든 중생들의 본래 갖추어진 불법을 일깨워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는 대자대비의 법안을 구족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법안은, 자비의 눈으로써, 모든 중생들의 깨달음에서 곧 진리를 보는 것이며, 분별상의 세계에서 무분별의 진리를 보는 것이고, 전체가 곧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며[多卽一], 현상계와 현상계가 둘이 아니게 걸림 없음을 깨닫는 것이고[事事無碍法界], 색의 세계에서 공이 하나임[色不異空]을 일체동관하는 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는 불안이 있습니다.”


불안은 말 그대로 부처님의 눈이다. 부처님의 눈은 소승에도 대승에도 치우침이 없으며, 하나에도 전체에도 치우치지 않고, 부처에도 중생에도, 아라한과 보살에도, 생사에도 열반에도, 색에도 공에도 치우침이 없는 완전한 무차별, 무분별의 눈이다.
불안은 모든 중생들 개개인 속에서도 깨달음을 보며 깨달음 속에서 다시 중생들의 삶을 본다. 그렇기에 깨달아 부처가 되어도 구제할 중생이 없고, 중생을 다 구제하면서도 하나도 구제하는 바가 없다. 차별상 속에 무차별이 있고, 또한 무차별 속에 차별로써 무한히 나툴 수 있다. 전체가 곧 하나이며 하나가 다시 전체를 품고, 현상계와 진리계라는 나뉨을 뛰어넘었다. 색이 공과 다르지 않으며 공이 색과 다르지 않고, 색이 곧 공이며 공이 곧 색임을 동관한다. 일체 모든 나뉨들을 거두어들여 동관하는 눈이 바로 일체동관의 부처님의 눈, 불안인 것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에 대해 여래가 말한 적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항하의 모래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하나의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의 수만큼 많은 항하가 있고, 그 모든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부처님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를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저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는 다 아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하는 모든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항하의 모래의 비유는 법계의 세계가 한량없이 많으며, 그 많은 국토 가운데 있는 그 많은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로 드신 것이다.
여래는 모든 국토의 모든 중생들의 갖가지 마음을 다 안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그 모든 중생들과 그 많은 중생들의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부처에서 나왔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부처와 마음과 중생 이 셋은 다르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 그 나온 곳이 서로 다르지 않다. 일체를 한성품으로, 한바탕으로 관해 본다는 것, 일체동관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의미다. 일체가 둘로 셋으로 천으로 만으로 갖가지로 나누어 볼 수 없으며, 돌이켜 관해보면 한성품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한량없이 많고, 그 많은 사람들이 쓰고 사는 마음 또한 팔만사천을 넘을 것이지만 그 모든 마음, 그 모든 중생은 모두 한바탕에서 나왔다. 나뭇가지며 잎사귀들은 한없이 많고 다양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은 다 뿌리가 근원이 되어 나왔듯이, 이 세상의 모든 중생과 중생의 마음 또한 나온 곳은 하나다. 그 하나를 이름하여 부처라고도 하고, 불성, 신성, 하늘, 주인공, 일심, 본래면목, 어머니 대지, 도, 깨달음 이라고도 하는 것일 뿐, 그러나 어느 하나를 고정지어 이름을 명명해주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한 가지는 그 모든 곳은 하나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중생들의 마음이야 얼마나 많고 다양하고 복잡하며 상황따라 경계따라 인연따라 끊임없이 오고 가는가. 그러나 그 모든 마음이 저마다 실체가 있어서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어떤 인연이 오느냐에 따라 그 인연에 응하여 한 마음이 일어나고, 하나의 번뇌가 일어나는 것이며, 또한 그 인연이 다함에 따라 자연스레 그 마음은 소멸되는 것이다. 육신도, 마음도, 생각도, 번뇌도, 업(業)도 모두 인연따라 잠시 왔다 인연이 다하면 소멸되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것에도 고정된 실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듯 실체가 없이 인연따라 오고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인 것이다. 마음이라고 명명한 이름이 있을 뿐이지 마음의 실체는 없다.
그러나 그렇게 일체 모든 마음도, 물질도, 업도 수도 없이 내고 들이지만 그것을 내고 들이는 본 바탕은 허공과도 같은 한성품이요, 여래일 뿐이다. 그러니 어찌 여래가 모든 중생의 갖가지 마음을 모를 수 있겠는가.

바다가 물결을 모를 수는 없다. 물결은 제각기 인연따라 다 다르지만 결국 물결 또한 바다의 한 모습일 뿐인 것과 같다. 물결은 수도 없이 많은 인연을 만나 수도 없이 다양한 물결의 모습을 만들어내지만 그 물결의 바탕은 바다이지 별도로 물결이 있는 것이 아니다. 별도로 물결의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물결의 성품은 바다일 뿐이다. 물결은 실체가 아니다. 다만 물결이라 이름 지었을 뿐, 그 근본은 바다다. 그러니 어찌 바다가 물결을 알지 못하겠는가.


그 까닭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그 이름이 마음일 뿐이라고 했다. 마음은 그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모두가 꿈과 같고 환영과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물거품과 같은 것이다. 그 까닭은 바로 과거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지만 단 한 번도 과거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온 적이 없고, 또한 미래의 마음을 쓰면서 살아 온 적도 없다. 오직 우리가 쓸 수 있는 마음은 순간 순간이었을 뿐이다. 즉 과거라고 생각하고 미래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만이 있을 뿐이지 실제로 과거나 미래의 마음은 본 적도 직접 써본 적도 없다. 과거에 쓴 마음도 사실 그 때는 그 순간이었지 결코 그것이 과거의 마음이 아니었다. 과거나 미래라고 하는 것이 본래 없다. 다만 우리가 과거다, 미래다, 현재다 하고 이름지어 놓았을 뿐이지 우리는 늘 순간을 살고 있었을 뿐이다.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시간이 흐른다는 개념을 만들어 놓고는 우리 스스로 그 개념에 얽매여 과거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하고 미래 때문에 걸려서 괴로워할 뿐인 것이지 본디 시간이란 개념 또한 텅 비어 공할 뿐이다. 오직 순간 순간 즉(卽)한 상황만이 있을 뿐 우리에게 시간은 없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다. 그건 그냥 지어놓은 이름일 뿐이다.

과거라고 애써 이름지어 놓았지만 그 실체가 있는가. 과거를 살아 본 적이 있는가. 과거는 지나가지 않았다. 과거가 내 앞에 지나갔던 그 때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과거를 살아와 지금이라는 현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순간 순간을 살아왔을 뿐 과거를 살아온 적은 없다. 과거는 텅 비었다. 실체가 없다. 백 번 양보 해 과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과거는 지나갔다. 과거의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그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마음을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는 없다. 과거라는 개념 자체가 말 그대로 개념이고 이름일 뿐 실체가 없는데 어떻게 과거의 마음이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말장난일 뿐이다.

미래 또한 실체가 없다. 미래라는 이름이 있을 뿐. 도대체 그 누가 미래를 본 적이 있단 말인가. 미래에 가 본 적도 미래를 살아 본 적도 없다. 백 번 양보해 아마도 언젠가 미래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고 한들 그것은 언젠가 있을 예정일 뿐 현존인 것은 아니다. 예정이라는 것은 꿈이라는 말이고 환영이라는 말이며 물거품이란 말과 무엇이 다른가.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지 않은 것은 말 그대로 오지 않은 것이다. 실존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오는 순간은 이미 그것은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 내일이 있을 지 없을 지 그걸 어찌 알겠는가. 지금까지 살아오며 나를 살게 한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이었지 결코 과거도 미래도 아니었다. 그렇듯 미래라는 것이 텅 빈 환상일 뿐인데, 어디에서 미래의 마음을 찾을 것인가. 미래의 마음을 얻을 것인가.

이렇듯 과거도 미래도 텅 빈 비실체적 관념일 뿐, 다만 이름일 뿐이다. 그러니 과거의 마음도 미래의 마음도 없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떠한가. 우리는 과거나 미래를 살 수 없고 오직 순간의 현재를 살 뿐이니 현재의 마음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현재의 마음이 무엇인가. 현재의 마음은 순간 순간 인연따라 상황따라 조건따라 찰나로 생했다가 그 인연이 다하면 찰나로 멸하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 저 혼자 실체가 있어 만들고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다. 현재라는 찰나 또한 마음은 없다. 본 바탕은 오직 무심(無心)이다. 본래 아무것도 없는 바탕에 인연의 바람이 한바탕 휘몰아치면 인연에 따라 마음이 잠시 움직일 뿐이다.

자 이 사람의 일상을 보라. 아침에 동이 틈과 동시에 자연스레 일어나 자연스럽게 씻고 밥 먹고 출근을 한다. 그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해가 뜨니 내 눈도 떠졌고 눈이 떠지니 일어나 씻었으며 배가 출출하니 밥을 먹었을 뿐이다. 그건 애써 억지로 마음을 찍어 눌러 한 행위가 아니다. 다만 무심에서 무위(無爲)로 한 것일 뿐이다. 자연의 이치대로, 자연스럽게 함이 없이 한 것이다. 그런데 출근을 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차를 몰고 출근을 하는데 앞에 차가 끼어드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안에서 화가 치민다. 불같이 마음이 일기 시작한다. 화나는 마음으로 욕도 하고 싸움도 건다. 분한 마음을 잡을 수 없다. 출근해서도 마찬가지다. 쌓인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괴로운 마음이 생겨난다. 그로인해 하루 종일 기분이 상하고 답답하다. 신경이 곤두서고 예민해진다. 그러다가 또다시 직장 상사에게 칭찬을 받고 일에 대한 포상을 받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심은 사라지고 즐거운 마음이 생겨난다. 진심은 더 이상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이제 남은 마음은 행복감이다. 그러다가 또 다른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괴롭고 즐겁고, 외롭고 들뜨고, 수도 없는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진다.

우리 마음이 이와 같다. 일상에서는 다만 자연스럽게 행동한다. 일반적일 때, 별 일이 없을 때 우리 마음은 없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본래 마음이고 본성이다. 본래 우리의 최초는 텅 빈 무심이었고 무위였으며 무작(無作)이고 무주(無住)였다. 그러나 조건이 생겨날 때 자연스럽게 우리 마음도 함께 일어난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독자적이지 않고 조건적이다. 평상심은 조건과 상황을 만나면 그 상황에 따라 온갖 마음을 만들어 낸다. 문제는 마음이 아니라 조건이고 상황이다. 마음 안에서 스스로 온갖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조건과 상황에 따라 잠깐 그 상황에 맞는 마음을 만들어 내는 것일 뿐이다. 그렇듯 마음엔 실체가 없다. 현재에 일어나는 이 마음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상황과 조건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 상황이 지나고 나면 그 마음도 사라지고, 다음 상황이 올 때 또 다른 마음이 생겨난다. 그렇게 조건에 따라, 인연 따라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서 현재의 마음을 찾겠는가. 그 마음은 실체가 아니다. 환영처럼, 꿈처럼, 물거품처럼 파도쳤다가 사라져갈 뿐인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과거의 마음에도 현재의 마음에도 미래의 마음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 마음이 없는데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집착할 주체도 없고 집착의 대상도 없다. 일으킬 마음도 없고 집착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일으켜 마음에 집착한다. 그러니 우리가 괴롭다, 혹은 즐겁다, 외롭다, 슬프다 하는 그 마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 또한 그런 마음에 스스로 얽매여 꼼짝달싹 못하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과거에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지금까지 붙잡고서는 그 과거의 마음에 얽매이고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일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의 일을 먼저 분별하고 계획하고 상상하고 추측하면서 거기에 울고 웃는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한 현재에 주변 상황에 따라 실체없이 찰나생 찰나멸하는 마음에 휘둘리는 것은 또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이 모두가 마음 없음, 무심의 도리를 어기는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이 모두가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는 금강경의 이치에 어두운 데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공연히 마음을 스스로 만들어 내어, 공연히 스스로 그 마음에 빠지고 집착하며, 또한 공연히 그 마음으로 인해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다가 그 마음이 다하면 아쉬워하고 서글퍼하는 이런 어리석고도 공허한 일들이 우리 삶에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아니 일어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삶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다. 그러니 우리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금강경에서는 바로 그 점을 올바로 볼 수 있도록 이끌고 있다. 마음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은 다 개시허망일 뿐이며, 마음 그 자체도 없다. 오직 무심만이 이 허공같은 세상에서 환히 빛을 비추고 있을 뿐이다.

마음 없음. 무심의 이 도리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무심하게 모든 일을 다 하면서도 무심하여 걸림 없을 수 있어야 한다. 본래 없던 마음을 애써 만들어내어 그 만들어 낸 것에 한껏 휘둘리다가 수행을 통해 그 마음을 없애고 비워야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무심이었음을 보면 된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닦을 것이 없다고 했다. 본래불이라고 했다. 깨닫고자 하거든 공연히 수행하고 마음을 닦고자 할 것이 아니라 본래 마음 없는 도리를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까닭은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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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 구경무아분
구경에 내가 사라지다


究竟無我分 第十七
爾時 須菩提 白佛言 世尊 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 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當生如是心 我應滅度一切衆生 滅度一切衆生已 而無有一衆生 實滅度者 何以故 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卽非菩薩 所以者何 須菩提 實無有法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者 須菩提 於意云何 如來於燃燈佛所 有法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不 不也 世尊 如我解佛所說義 佛於燃燈佛所 無有法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佛言 如是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若有法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者 燃燈佛 卽不與我授記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以實無有法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是故 燃燈佛 與我授記 作是言 汝於來世 當得作佛 號釋迦牟尼 何以故 如來者 卽諸法如義 若有人言 如來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實無有法 佛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如來所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於是中 無實無虛 是故 如來說一切法 皆是佛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 名一切法 須菩提 譬如人身長大 須菩提言 世尊 如來說 人身長大 卽爲非大身 是名大身 須菩提 菩薩 亦如是 若作是言 我當滅度無量衆生 卽不名菩薩 何以故 須菩提 實無有法 名爲菩薩 是故 佛說一切法 無我無人無衆生 無壽者 須菩提 若菩薩 作是言 我當莊嚴佛土 是不名菩薩 何以故 如來說莊嚴佛土者 卽非莊嚴 是名莊嚴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名眞是菩薩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17분 구경무아분은 금강경의 가르침이 구경에는 무아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임을 지금까지 앞서 설했던 예들을 들어가며 설하고 있다. 발심한 보살들은 마음을 항복받고 수행하며 일체 중생을 제도할 때에도 ‘나’라는 상에 머물지 말아야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한 법도 얻은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하고, 불국토를 장엄했다는 것도 실은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는 비유를 들어가면서 그 어떤 경계에도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되고, ‘나’라는 상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하고 있다. 여래는 ‘무아법’ 즉 ‘내가 없다’는 법에 완전히 통달하였을 때 그 사람을 보살이라 부르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내가 깨달았다’ 혹은 ‘내가 법을 얻었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하는 등 일체의 ‘내가’라고 하는 감옥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 분에서 끊임없이 설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내가 한다’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을 때 비로소 보살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금강경에서 지금까지 설해 온 가르침은 오직 한 가지로 귀결된다. 아상을 타파하라는 그 한 가지의 가르침에 다름 아니다. 아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나’라는 것이 고정된 실체가 아니며 항상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나라는 것이 항상하고 실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을 위해 온 존재를 바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것은 실체적인 것이 아니며 항상하지 않는다. 즉 무아(無我)이며 무상(無常)이다. 그러므로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동반한다. 다시말해 ‘나’의 실체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삼법인(三法印)의 법칙을 따른다. 나는 항상하지 않고[諸行無常],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으며[諸法無我], 그렇기에 나라는 것은 곧 괴로움[一切皆苦]인 것이다.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바로 ‘나’라고 하는 집착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나’ 이외의 것들에서 괴로움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나’를 근원으로 하고 있다. ‘나’라는 집착에서 ‘너’라는 상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나’라는 주관의 성품이 삼법인으로 공(空)하기 때문에, ‘너’라는 상대 또한 삼법인의 성품으로 똑같이 공한 것일 뿐이다. ‘나’도 삼법인이며, ‘너’도 삼법인이고, ‘일체제법’ ‘삼라만상’ ‘우주’ 전체가 모두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으며 괴로움인 삼법인의 성품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처럼 ‘나’라는 주관도, ‘상대’라는 객관도 모두 삼법인으로 항상하지 않고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렇기에 ‘나’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엔 괴로움을 가져오며, ‘상대’에 집착하는 것도 괴로움을 가져온다. 돈이나 명예, 지위, 권력, 이성, 사랑, 학벌, 소유물 등 그 어떤 것이라도 집착하는 것은 곧 괴로움을 의미한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항상하거나 실체적인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깨달음, 멸도, 해탈, 그리고 불국토를 장엄하는 일 까지도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즉 ‘내가 수행한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제도한다’거나, ‘내가 법을 얻었다’거나,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거나 하는 등의 말에도 ‘내가’라고 하는 아상이 전제되어 있는 한 그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며 무아법의 통달이 아니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내가’라는 상도 붙어서는 안 된다.

결국에는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은 ‘무아(無我)’라는 진리를 깨닫는 데 있다. 무아의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은 삼법인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공성(空性)을 깨닫는다는 말이고, 연기법, 중도(中道)를 깨닫는다는 말과도 같다. 또한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무소득(無所得)’을 깨닫는다는 말이기도 하며, 화엄경의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諸法宗本來 常自寂滅相)’, 열반경의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諸行無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의 가르침과도 같으며, 조주스님의 ‘방하착(放下着)’이나, 무소유(無所有), 무분별(無分別), 무자성(無自性), 무소득(無所得)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의 가르침,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등의 사구게의 가르침이기도 한 것이다.
이 말을 간단하게 풀어보자. 항상하지 않고 실체적인 것이 없으며 그렇기에 일체가 괴로움이라는 삼법인의 가르침 때문에 무아인 것이고, 공인 것이다. ‘나’와 ‘세상’을 비롯한 일체의 삼라만상(森羅萬象) 오온(五蘊)이 결국에는 다 항상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무아이고 공이다.[照見五蘊皆空] ‘나’라는 실체가 있으려면 항상해야 하고 고정되어 있어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하니 ‘나’가 아닌 ‘나 없음’ 즉 무아(無我)인 것이다. 항상하고 실체적인 것이 없으니 집착할 것이 없고[無執着, 放下着], 얻을 것이 없으며[無所得], 언제까지고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없다.[無所有] 집착이란 언제까지고 항상하길 바라는 마음인데 존재의 본질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고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니 집착은 결국 괴로움을 부를 뿐이다.

그러면 그렇게 일체가 다 공(空)이고, 무아(無我)라고 한다면 도대체 이렇게 움직이는 ‘나’는 무엇이고, 눈에 보이는 ‘대상’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무아라면 내가 없다는 말인데, 분명 우리 눈앞에는 내가 있고 상대가 있지 않은가. 그것은 다 인연[緣起法]의 나툼일 뿐이다. 수많은 크고 작은 인연들로 인해 잠시 ‘나’도 만들어지고, ‘대상’도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이 다 하면 누구든 사라지고 또한 다시 인연이 모이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즉, 내 눈앞에 펼쳐지는 생사와 윤회 또 이 모든 존재들과 그 존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꿈과 같고 신기루와 같으며 환영과 같은 것일 뿐이다.[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모든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앞서 말했듯 그 허망한 상이 여러 모양으로 나투는 법칙이 바로 연기법, 인연법, 인과응보인 것이다. 바로 이 점, 일체 모든 존재는 다 환영과 같이 허망한 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을 바로 관(觀)하는 것이 바로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상이 허망하며 무아이고 공하여 상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보면 바로 여래를 보는 것이다.[若見 諸相非相 卽見如來]

이와같이 다만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인연따라 잠시 모였다가 흩어질 뿐이다. 고정된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인연따라 많이 베풀었다면 부자로 태어나는 것이고 인색하게 살았다면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이다. 인연따라 생사가 벌어지고, 아름다움과 추함, 크고 작음, 옳고 그름이 생겨날 뿐이다. 그것은 고정된 실체가 아니다. 아름다움도 영원하지 않고 추함도 영원하지 않다. 크고 작다는 것도 옳고 그르다는 것도 다만 인연따라 그렇게 보일 뿐이지 고정된 것은 없다. 그렇기에 연기법의 세계, 무아의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분별할 것이 없다.[無分別] 그렇기에 어느 한 쪽으로 고정 짓는 극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하는 극단은 어리석은 견해일 뿐이다. 그렇기에 연기법, 무아의 세계에서는 어디에도 치우쳐서는 안 된다. 오직 중도만이 지혜를 전해 줄 뿐이다.[中道]

나고 죽는 것 또한 인연따라 잠시 변화하는 것 뿐이지 영원한 마지막과 시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생사가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사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생사는 껍데기의 변화에 불과하다. 그 본질에는 변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며 나고 죽지 않는 영원한 안식처가 있다.[生死卽涅槃] 일체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적멸의 모습이다.[諸法宗本來 常自寂滅相] 그렇기에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른다.[生滅滅已 寂滅爲樂] 바다는 항상 고요하지만 물결은 날씨에 따라 항상 변화하는 것 처럼, 우리의 본질에는 대 열반의 적요가 있지만 우리의 껍데기는 항상 울고 웃고 변화한다. 우리의 저 깊은 존재의 심연(深淵)에 있는 바다와 같이 고요한 그것을 열반(涅槃)이라고도 하고 해탈(解脫)이라고도 하며 적멸(寂滅), 혹은 깨달음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즉 삼법인(三法印)이지만 그 본질, 근원에는 무상(無常), 무아(無我), 고(苦)를 완전히 여윈 대 열반의 적멸이 있는 것이다.[涅槃寂靜]

바다의 물결은 인연따라 거세게 몰아쳤다가 잔잔해지기를 반복한다. 마치 우리의 삶과 같이 인연따라 울고 웃고, 행복하고 불행하고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물결도 결국에는 바다 그 자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울고 웃으며 중생으로써 살고 있는 듯 보여도 사실은 지금 이 모습 그대로가 바로 참부처인 것이다.[自性佛] 본래부터 부처인 것이다. 물결이 바다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이 물결도 본래는 바다와 하나이듯, 우리도 중생이니 부처가 되겠다고 애쓸 것 없는 본래부처인 것이다.[本來佛] 그런데 전도된 몽상[顚倒夢想] 때문에 우리는 물결의 움직임에 울고 웃는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물결이 곧 바다인 것을, 중생이 바로 부처이며, 생사가 곧 열반인 것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그 방법은 오직 잘 지켜보는 길[觀] 밖에 없다. 물결이 바다가 되겠다고 자꾸만 애쓰고 고생하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다만 물결 스스로 자신의 성품을 잘 관찰해 보기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 인연따라 변화하는 자신의 모습을 잘 관찰했을 때 결국 잠시도 가만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그 이면에는 본래부터 고요했던 대 적멸의 자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결이 곧 바다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눈에 보이는 일체 모든 존재들은 대 적멸이라는 본 바탕 위에 잠시 인연따라 나고 죽고, 울고 웃으며, 온갖 행복과 불행의 연장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이다. 인연에 따른 변화가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에 순응해야지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음을 내되 머무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應無所住 而生其心] 즉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無執着, 放下着] 그렇기 때문에 그 변화를 타고 흘러야 한다. 그 흐름을 타야 한다.[須陀洹] 변화[諸行無常]야 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인 것이다. 그러니 그 인연의 변화에 일체를 내맡길 수 있어야 하고 순응하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攝受] 일체의 인연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곳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放下着], 오직 순간 순간 비추어 보고[觀照], ‘나’라는 고정된 집착을 놓아버려 본래 자성부처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自性佛]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가르침과 경전의 핵심 경구들을 풀어 보았는데, 이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경전이든, 어떤 교리든, 또 어떤 선지식의 말씀이건 모두가 하나로 회통(回通)되는 가르침이다. 수많은 불교 교리가 다 따로 따로 떨어져 다른 가르침이거나, 팔만사천의 수많은 경전이 다 다른 가르침이거나, 스님들의 온갖 다양한 방편설법이 다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하나로 회통되는 가르침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수많은 방편과 경전과 교리가 나오게 된 것은 모두가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근기와 다양한 수준에 맞게 방편의 설법을 하다보니 그렇게 복잡 다단해 지게 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불교가 복잡하고 어렵다고 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과 생각이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바로 보아야 한다. 불교는 아주 단순한데 사람들이 너무 복잡하고 정신 없으며 어렵게 살다 보니 부처님 가르침도 그 복잡한 사람들의 근기에 일일이 맞추어 법을 설하시다 보니 불교가 어렵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어쨌거나 불교를 공부하는 수행자는 단순하고도 명확하게 잘 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한 가지 가르침을 붙잡고 그 안에서 일체 모든 경전과 교리가 다 나온 것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이 경전이 더 좋으냐 저 경전이 좋으냐라고 따진다거나, 이 교리가 더 훌륭한지 저 교리가 더 훌륭한 지를 따진다거나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수행법이 더 좋은가 저 수행법이 더 좋은가를 따질 것도 없다. 모든 수행법도 다 방편일 뿐 결국에는 그 궁극의 한 곳으로 가는 수많은 길일 뿐이다.

이 분에서는 그 가운데에도 ‘무아법’을 가지고 지금까지 설했던 금강경의 가르침을 회통시키고 있다. ‘무아’ 이 하나에서 일체 모든 가르침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본문으로 들어가 보자.


그 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발한 선남자와 선녀인들은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면 마땅히 다음과 같이 마음을 내라. ‘내가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 그러나 이렇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하였지만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다’라고.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은 앞서 본문에서 나온 바이다. 앞서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 말씀하신 무아의 도리를 펴기 위해 수보리의 이심전심 염화미소의 질문이 시작되었고, 그 질문에 부처님께서는  앞서 설했던 가르침 가운데 몇 가지의 비유로써 무아의 가르침을 펴고 계신다.

금강경의 가르침은 상(相)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라고 했다. 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본래 고정된 상이란 없기 때문이다. 즉 무상(無常)이기 때문에 상에 얽매이고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체 상의 근본은 바로 ‘나다’하는 아상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금강경은 끊임없이 아상 타파를 위한 법문을 내리고 있다. 아상을 타파해야 하는 이유는 무아이기 때문이다. 본래 고정된 실체로써의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의 ‘나’라는 상이라도 생겨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보살이 되기에는 거리가 멀다.

이 분에서 부처님께서는 3가지 비유로써 무아를 통달하도록 이끌고 있다. 첫 번째 비유는 수보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수보리가 처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있는데는 바로 이러한 이유가 있다.

똑같은 말이 두 번 반복된다면 그것은 그저 무의미한 같은 말의 두 번의 반복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같은 말을 열 번, 아니 스무 번, 백천만 번을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 같은 말의 반복이 아니다. 말은 같은 말일 지 몰라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전해 새로운 말이다. 내 안에 과거가 꽉 들어 차 있고, 과거의 기억과 판단이 꽉 들어 차 있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다만 같은 말의 반복에 불과할 것이다. 같은 말을 듣는 순간 벌써 내 안의 과거는 말할 것이다. ‘저 말은 이미 들었던 말이야. 나도 다 아는 말이야.’ 그러나 과거의 견해나 분별로써 지금의 말을 판단하려 들지 말라. 지금의 말은 ‘지금 여기’라는 시공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혀 새로운 경험이고 설법이다. 이유가 있고 제 몫을 가지고 그 말들은 반복된다. 그러나 내 안이 과거의 분별로 꽉 차 있다면 그 말의 이유를 한 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3가지 비유가 이 분에서 똑같이 반복되는 이유는 무아법의 깨달음을 위함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선남자 선녀인은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한 명도 제도한 자가 없다’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고 답하고 있다. 왜냐하면 참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 보살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내가 제도한다’는 상이 있게 되면 그것은 벌써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이다. 보리심을 발한 수행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상이 바로 ‘내가 제도한다’는 상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을 내가 제도하여 멸도에 들게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참된 수행자는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하면서도 스스로 제도한다는 생각이 없다. 일어나더라도 있는 그대로 지켜볼 수 있는 수행력이 있어야 한다. 우리들 또한 제도하고 포교하며 주변 사람들을 부처님 가르침으로 이끌더라도 ‘내가 포교한다’ ‘내가 제도한다’ ‘내가 복을 짓는다’ ‘내가 보시했다’ 는 상을 잘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스스로 ‘나는 수행한다’거나, ‘나는 깨달았다’거나, ‘내가 제도한다’ ‘내가 보시한다’ 거나 하는 등의 ‘내가한다’는 상을 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금강경의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무아의 가르침에 통달하지 못한 것이다.

혹 요즈음의 세상을 보면 스스로 견성을 했다거나 깨달았다는 사람도 많이 등장하고, 또 어떤 단체에서는 돈 얼마를 내면 몇 일 안에 부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얼마를 더 내면 부처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하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러나 옛 말씀에, 이번 생에 한 번 얼핏 자신의 성품을 본 사람, 그것을 초견성이라고 하거나 수다원이라고 하거나, 견도라고 하거나 그렇게 어떤 이름을 지어 놓고 스스로 그 지위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번 생 공부의 진척은 더 나아가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 이유는 스스로 ‘나는 견성을 했다’거나, ‘나는 이만큼의 깨달음을 얻었다’거나, 혹은 ‘나는 이만큼 깨달았는데 너는 그렇지 못하구나’ 하는 등의 스스로를 높이고 상대를 낮추는 분별심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내가 돈이 많다’ ‘내가 잘났다’ ‘내가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것도 매혹적인 큰 상일진데, ‘내가 깨달았다’고 하는 아상이야 얼마나 유혹적이고 매력적인 목표인가. 그러나 ‘내가 깨달았다’는 미세한 아상은 곧 상대방과의 차별을 가져오고 그 차별은 나를 더욱 어리석은 아상의 나락으로 몰고 갈 것이다. ‘나는 어리석다’는 아상이나, ‘나는 깨달았다’는 아상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전히 아상임에는 변화가 없다. 그러나 어쩌면 ‘나는 깨달았다’는 아상이 더 큰 장애를 가져올 수도 있다. 수보리의 질문과 이어지는 부처님의 답변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아상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미세한 마음이라도 그 마음은 여전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반증일 뿐이다. ‘내가’ ‘깨달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없다. ‘내가’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지만 얻을 그 어떤 법도 없다. 얻을 깨달음도 없으며, 얻을 주체인 ‘나’ 또한 없다. 완전한 무아, 완전한 텅 빔, 완전한 공만이 있음과 없음을 초월해서 있다. 보통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고 못 얻고 하는 어떤 법으로 착각을 하곤 한다. 법을 깨닫고 못 깨닫고 하는 이분법으로 진리를 나누고 있다. 그 어떤 나뉨도, 그 어떤 이분법도 진리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깨달았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깨달은 나’에 대한 환상은 쓰레기 통에 집어 넣는 편이 낳을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은 도무지 성립할 수 없는 말이다. 깨달음에는 ‘나’가 없다. 깨달을 ‘나’가 없었을 때, 얻어야 할 어떤 ‘깨달음’이 없었을 때 참된 깨달음은 드러남도 없이 드러난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환상을 버리라. 이것이 첫 번째 부처님의 무아 법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리라고 서원하며 실천해야겠지만 일체 중생을 다 멸도에 들게 했더라도 실로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고 설하신 것이다. 일체 중생을 멸도에 들어 깨달음에 이르게 했으면서도 한 중생도 제도한 바가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수행을 하는 많은 이들은 ‘내가 깨달았다’ 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나는 수행자다’ ‘나는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이다.’ ‘나는 수행력이 높다’ ‘나는 수행하지 않는 다른 이들에 비해 우월하다’ 하는 등의 비교, 판단, 분별이 끊임없이 고개를 치켜들고 올라 오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탓할 것은 없다. 다만 그런 생각에 스스로 빠지는 것을 경계할 일이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런 모습이다. 다만 그런 생각이 일어났음을 놓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생각에 휘둘리지 말라. 다만 깨어있는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잘 살피라. 그러한 생각이 일어나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다만 잘 살피기만 하라. 잘 살피고 관해야 거기에 속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그 우월감에 기뻐하거나, 열등감에 고개 숙이고 있지는 않은지 잘 살필 일이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하며 자문해 보자. 스스로 ‘나는 금강경을 공부했다’ ‘불법의 지혜를 요달했다’고 하는 등의 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금강경을 좀 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금강경의 핵심에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말로만 글로써만 받아들일 뿐 내 안에 그 의미가 온 존재로써 와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수보리야, 그 까닭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한 법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오직 불성(佛性) 밖에 없다. 모든 것이 부처님 마음의 나툼일 뿐이다. 불성이라고 이름짓는 것도 그저 이름을 붙이자니 그렇게 붙여 놓은 것일 뿐이지, 불성이라는 말 또한 어디에 붙을 데가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도 어떤 실체적인 ‘깨달음’의 모양이 있어서 깨달음이란 말이 나온 것이 아니다. 깨달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 부처님은 어떻게 생기셨을까? 또 깨달았다고 하는 큰스님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계실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잘생겼을까 못생겼을까? 마른체형일까 아니면 통통하실까? 눈은 어떤 모습이고, 귀와 코, 입은 어떻게 생겼을까? 키는 클까 작을까? 몇 cm 정도가 되실까? 옷은 어떤 옷을 입으시고, 신발은 어떤 메이커의 신발을 신고 다니실까? 밥은 무엇을 드실까? 햄버거나 콜라, 커피도 드실까? 과연 어떤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깨달은 자의 모습인가?

정답은 없다. ‘어떤’ 모습일거라고 모양을 만들어 두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일 뿐이다. 우리의 바램일 뿐이다. 어떤 모양도 없기 때문에, 어떤 형식이나 틀에도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투실 수 있고, 자유자재하게 나투실 수 있는 것이다. ‘깨달은 자’를 어떤 성격일거라고 규정짓지 말라. 어떤 외모일거라고 규정짓지 말라. 남자 혹은 여자일거라고 고정 짓지 말라. 그것은 깨달음의 본 모습이 아니다. 깨달음은 어떤 것에도 고정되게 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스님’은 어때야 한다고 고정짓지 말라. 점잖아야 한다거나, 말도 느려야 한다거나, 외모가 자비롭게 생겨야 한다거나, 화도 내면 안 된다거나 하는 등의 고정된 관념으로 ‘스님’이라는 관념을 내 안에 만들어 두지 말라. 그것은 스님이 아니다. 어떤 틀에 갇힌 정형화된 스님은 스님이 아니다. 참된 수행자는 어떤 틀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틀에도 담길 수 있는 것이다. 수행자란 ‘수행자다운’ 어떤 틀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다운’ 사람이다.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자적이고, 창조적인 ‘자기 자신’만의 특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수행자다. 획일적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길을 가는 자가 수행자다. 그러한 자기 자신의 길은 어디에도 갇히지 않은 자유로운 길이다.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어떤 ‘틀’에 가두지 말라. ‘누구’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거나, ‘부처님’처럼 살려고 애쓴다거나, ‘누구’처럼 돈 벌려고, 좋은 차 살려고, 좋은 직장에 다니려고, 혹은 ‘누구’처럼 예뻐지려고 온갖 노력을 쏟지 말라. 그것은 참된 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법은 ‘어떤 틀’ 속에 갇히지 않는다. 어떤 한 법도 없는 것이 참된 법이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나 자신’이 되는 것이고, 그랬을 때 우리 안에 있는 본래불의 모습은 비로소 빛을 발하게 된다.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법신불(法身佛)로써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법신불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법신불이 무엇인가. 산도 부처요, 강도 부처요, 나무며 풀에서부터 태양과 바람과 구름과 시내물과 짐승과 곤충과 사람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살인자에게도 부처의 본래 모습은 원만하게 구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부처는 그 어떤 모습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한 법도 없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규정짓는다거나, 어떤 모습으로 만든다거나, 어떤 법으로 정한다거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즉 부처는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경계를 말한다. 그러니 깨닫겠다는 마음을 일으킬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킨다는 것도 표현이고 말일 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킬 어떤 정해진 법이 있는 것이 아니다. 정해진 법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경계에서 그 모든 일체법을 다 나툴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지지 않아야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물은 그 모양이 정해지지 않았다 보니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어지고, 네모 그릇에 담기면 네모가 되며, 날이 추워지면 얼고, 너무 더워지면 수증기로 날아가지 않는가. 물의 모양이 이미 어떻게 정해져 있다면 그렇게 나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법도 마찬가지다. 깨달음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나’라고 정할 것인가. 이번 생에 사람이었다가 다음 생에 짐승으로 윤회를 했다면 짐승이 고정된 ‘나’인가, 아니면 사람이 고정된 ‘나’의 실체인가. 어떤 것도 고정된 것은 없다. ‘나’가 없기 때문이다. ‘나’라는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에 나는 사람도 될 수 있고, 동물도 될 수 있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다. 무아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인연따라 그 어떤 것으로도 나툴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이 말해주는 ‘정한 바 없는 법’이고, ‘한 법도 없는 법’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연등 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이 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에는 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있지 않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법이 있어서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라면 연등 부처님께서 나에게 수기하시기를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에 연등부처님께서 나에게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과거 인행시에, 연등부처님께서는 미래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깨달음의 법을 얻어 석가모니라는 부처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셨다. 연등부처님은 과연 석가모니부처님께 어떤 법을 전해 주셨던 것일까? 또 어떤 법을 전해 주었기에 미래에 깨달을 것을 그 먼 과거에 미리 알고 수기를 내려 주셨던 것일까? 그 ‘법’은 과연 무엇인가?

여기에서 부처님께서는 그 답을 주고 계신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법을 받으셨다고 알고 있었지만 이제 부처님께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만한 어떤 법도 받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어떤 법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받았기 때문에 다음 세상에 석가모니 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셨다는 것이다. 즉 석가모니부처님이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법’이라고 생각할만한 ‘어떤 법’을 생각하거나, 그 법에 갇혀 있었다면 연등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께 수기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어떤 한 법도 있지 않은’ ‘어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있지 않은’ 경계에서 ‘법 아닌 법을 받음 없이 받으셨기에’ 훗날 석가모니부처가 되리라고 수기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무엇인가. 과연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법을 말씀하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법문을 설해 주셨다. 사성제, 삼법인, 연기법, 십이연기, 사념처 등 수도 세아릴 수 없이 많은 법을 설해 주셨다. 일평생 수많은 설법을 하시면서 수많은 중생에게 법을 설해 주셨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실 때 ‘나는 단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평생을 중생을 위해 법을 설하셨지만 ‘단 한 법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신 바는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에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어떤 한 법’이라고 할 만한, ‘이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그 어떤 고정된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다. 그런데 어떤 것을 진리라고, 법이라고 고정지을 것인가. 고정 지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항상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고정된 실체로써의 자아가 없다는 것, 그렇기에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것, 그것이 부처님 말씀이고 법일진데, ‘고정지을 것이 없다’는 진리를 고정화 할 것인가, ‘항상하는 것이 없다’는 진리를 항상하는 법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자아가 없다는 무아법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울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말씀에 집착할 것인가. 그 어디에도 집착하고, 머물고, 고정짓고, ‘진리’라고 이름짓고, ‘한 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집착하지 말라는 말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나다’하고 고정지을 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나를 내세워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 어떤 법도, 그 어떤 ‘진리’도, 그 어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내세우거나, 집착하거나, 머물지 않는다. 그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법’이기 때문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는 결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없는데, 또 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내가 없는데, 어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가 있겠는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있지 않음을 바로 깨달았기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수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연등부처님께 ‘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습니다.’라고 했다면 연등부처님은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어떤 법이 있지 않은 경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기 때문에, 즉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이름할 그 어떤 법도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연등부처님께서 ‘네가 다음 세상에 마땅히 부처를 이루어 석가모니라 하리라’고 수기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라 함은 모든 법에 여여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래라 하는 것은, 부처라 하는 것은 모든 법에 있어 여여(如如)한 것을 말한다. 여여하다는 것은 어떤 법에도 집착함이 없고, 어떤 법에도 머물지 않지만 그 모든 법을 나투고 그 어떤 법도 자유자재하게 거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나툰 모습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툴 수 있지만, 늘 한결같이 본래의 바탕자리를 잃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의 본 바탕은 늘 여여하다. 여여한 불성 그대로이다. 우리 자신이 그대로 부처요, 자성불이며, 법신불인 것이다. 여래로써 늘 여여한 본래 그대로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 모든 법에 있어 늘 여여하다. 어떤 모습에서도, 어떤 곳에서도, 어떤 법에서도 본바탕에서는 늘 한결같은 여여한 성품을 잃지 않는다.
어리석은 중생이 언젠가 수행을 통해 깨달아 여여한 부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여여한 부처인 것이다. 본래불이고, 본래 자성이 청정하니 사실은 수행도 필요없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왜 불가에서는 수많은 수행 방편을 이야기하면서, 참선, 염불, 간경, 주력, 절 등의 수행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본래불이라면 수행할 필요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가 본래부터 부처인 것을 모르고 있다. 스스로가 여여한 여래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면서 스스로 번뇌를 만들고, 욕심을 만들어 그 욕심과 번뇌에 스스로 얽매이는 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스스로 ‘나’라는 허상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나’라는 허상에 얽매여 ‘내가 잘나고 싶고’ ‘내가 돈 벌고 싶고’ ‘내가 유명해지고 싶고’ ‘내가 깨닫고 싶다’는 등의 온갖 욕심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나’라는 허상만 만들지 않는다면 ‘내 욕심’이 어디 붙을 자리가 있겠는가. ‘나’만 완전히 놓아버려 무아법을 깨닫고 나면 본래 여여한 여래가 목전에 당도해 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부처이고 여래라는 사실을 ‘나’라는 아상 때문에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구경무아분에서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 처럼 무아법을 구경에 바로 보게 되는 순간 ‘내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본래 여여한 여래였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스스로 이렇게 ‘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있다보니 부처님께서도 방편을 써서 ‘나’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있는 데서 벗어나도록 도와두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며, ‘나’를 벗어나도록 하는 실천행을 일러주시니 그것이 수행이다. 본래부처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은 사람이라면 수행도 필요없고, 설법도 필요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나’에 갇혀 있고, 괴로워하고 있으며, 삶에 아파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수행이 필요한 것이고, 법문이 필요한 것이다. 괴롭지 않다면, 한없이 자유롭고 평화로우며 어떤 법에도 걸림이 없다면 불교도 필요 없고, 수행도 필요 없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다 쓰잘데 없는 말일 뿐이다. 그 어떤 한 법도 붙을 자리가 없는 것이다.
구경에 무아법을 깨닫게 되면 모든 법에 여여한 여래임을 바로 보게 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며,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았다고 할 그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일체법이라 함은 곧 일체법이 아니니, 그 까닭에 이름이 일체 법인 것이다.
수보리야, 예컨대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 같다.”
수보리가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사람의 몸이 아주 크다는 것도 실은 큰 몸이 아니라 그 이름이 큰 몸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라고.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말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맞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금강경을 보라. 금강경에서는 이 당연한 말까지도 부정을 하고 있다. 금강경이야말로 일체 모든 방편을 거두어 들여 온전한 진리로 이르게 하는 가르침이다. 조금이라도 참 진리와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전부 부정하고 파하여 진리를 드러나게 하는 파사현정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사용하던 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부처님에 대해 설명하고 표현하며 사람들에게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려다 보니까 그렇게 표현했을 뿐이다. 언어라는 것의 조악함 때문에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편을 버리고 진리의 편에서 이 명제를 관찰해 보자.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거나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에 어떤 모순이 있는가. 과연 여래는 깨달음을 얻으신 분인가. 그렇지 않다. 깨달음을 얻을 ‘여래’, ‘부처’가 없다. 깨달음을 얻은 ‘나’가 있다거나, 깨달음을 얻은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벌써 상대성에 빠진 생각이다. 깨달은 부처가 있고 깨닫지 못한 중생이 있어서 어리석은 중생이 깨달은 불세계로 나가기 위해 수행한다는 생각은 벌써 부처와 중생을 둘로 나누어 놓은 생각이다. 부처는 그 어떤 분별의 세계에도 몸을 담고 있지 않다. 생사와 열반, 중생과 부처라는 두 가지 극단 어디에도 부처는 없다. 부처는 ‘어디에’ 있어야 한다거나, ‘어떤 상태로’ 있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깨달은 ‘자’라는 어떤 존재적인 틀에 부처를 가둘 수는 없다.

부처는 ‘깨달은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음’을 의미한다. 깨달았다는 것은 완전히 무아를 깨달았다는 뜻이다. 즉 ‘내가 없음’을 온전히 자각한 것, 구경무아인 것이다. 무아가 곧 깨달음일진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나’가 없는데, 어디에 깨달은 ‘나’를 내세울 수 있는가. 깨달음이라는 것은 어떤 존재에게 오고 말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누구든 깨어있는 순간 바로 부처인 것이다. 깨어있는 순간, 오직 깨어있음의 빛만이 있을 뿐 나와 너라는 상대개념도 사라지고 생사, 중생과 부처라는 분별 또한 사라진다. 바로 그 것, 깨어있음, 그것이 바로 부처다.

만약 스스로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깨달음을 얻은 ‘나’에 갇혀 있기 때문에 깨달았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아(我)는 깨닫지 못한다. 무아(無我)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무아는 말 그대로 무아, 내가 없음이며 텅 비어 있음이고 무상과 무아, 무자성과 공이기 때문에 주체를 내세울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는 말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깨달을 내가 없음을 아는 것이 깨달음일진데 스스로를 깨달음을 주체로 생각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것은 스스로의 무명을 밝히는 일일 뿐이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다. 여래라는 주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깨달음의 상태를 얻어 가질 수는 없는 일이다. ‘여래’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음’도 없다. 그렇기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은 완전한 거짓이다. 언어 자체에 큰 모순이 담겨 있는 표현이다. 그렇게 말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깨달음’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며, ‘깨달은 자’에 집착해 있는 것이고, ‘얻음’에 집착해 있는 것이다. 그는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여 여래를 비방하는 것과 같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어떤 ‘자’가 있다면 그는 여래가 아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런 여래는 없다. 또한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그 어떤 ‘법’도 없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어떤 특정한 ‘법’이 아니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할 만한 그 어떤 ‘법’이 없다. 여래가 얻은 법이라는 것은 실다움도 없고 헛됨도 없는 것이다. 여래가 어떤 ‘법’을 얻었다면 그것이 참된 것, 실다운 것이라는 말인데, 여래가 얻은 법은 실다운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헛된 것 또한 아니다. 실다운 법에 집착해도 안되고, 헛된 법에 집착해도 안 된다.

우린 누구나 말할 것이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라고. 얻을 깨달음이 없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어떤 실체적인 것, 진리다운 어떤 것으로 생각지 말라. ‘어떤 것’으로 고정지어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깨달음이 아니며 진리도 아니다. 그 어떤 ‘법’이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왜 법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일까. 깨달았다고 할 어떤 법도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일체법이 곧 불법’이기 때문이다. 일체 모든 것이 불법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것만이 불법이라면 어떤 깨달을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일체 모든 법이 다 불법이라면 거기에 어떤 것만을 정하고 택해 깨달아야 한다고 할 특정한 ‘법’이 없지 않겠는가. 진리 아닌 것이 따로 있고 진리가 따로 있다고 한다면, 99%는 진리가 아니고 1%가 진리라고 한다면 그 1%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애써야 하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완전히 100% 전부가 다 진리이고 불법이라면 어떤 특정한 1%를 깨닫고 얻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불법이란 그와 같다. 일체 모든 법이 다 불법이기 때문에 별도로 실다운 법과 헛된 법을 나눌 수가 없다. 100% 모두가 그대로 불법이다. 100% 모두가 그대로 실다운 법이다. 그러니 거기에 몇 %를 실답다고 나누고, 몇 %를 헛되다고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실다운 것을 찾는 노력은 필요치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는 말이 불필요한 것이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주체가 없으며, 여래가 얻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그 어떤 특정한 ‘법’이 없다면 어찌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말하고 나면 분명 다시 ‘일체법’에 집착하는 이가 생겨날 것이다. ‘일체법이 다 불법’이라고 하니 그 ‘일체법’에 집착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다시 일체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일체법에 대한 집착을 타파하도록 이끌고 있다. 일체법에 집착해서도 안 되는 이유는 일체법이라는 것은 일체법이 아니며, 그 이름이 일체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몸집이 아주 큰 사람의 비유와도 같다.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둘을 나누어서 그 가운데 큰쪽을 택한 큰 몸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은 크고 작은 것을 초월한 절대 큰 몸집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곧 어떤 한 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한 사람의 몸집을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크고 작은 분별이 생겨난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의 육신이 아닌, 온 우주 법계를 다 담아낼 수 있는 삼라만상의 당체인 법신에서는 그 어떤 크고 작은 분별도 다 사라지고 만다. 온 우주의 어떤 한 부분을 차지하는 몸집을 가졌다면 크고 작다는 분별이 생기고 따라서 ‘어떤 한 몸’ ‘큰 몸집’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온 우주 법계 그대로인 법신은 따로 떼어 내어 얼마만한 몸의 법신이라고 말할 것이 없다.

우주 법계의 크기를 100 이라고 보았을 때, 그 가운데 몸집이 1이나 2 정도의 크기라면 그것은 크다 작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법신의 몸은 그대로 우주 법계의 크기인 100이기 때문에 크다 작다고 분별할 수 없으며 별도로 얼마만큼 크냐 작으냐를 논할 수 없다. 어떤 한 큰 몸이 아니라 법신은 전체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는 말처럼, 일체 모든 법계가 그대로 법신으로서의 큰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큰 몸이라는 것도 이름을 큰 몸이라 이름 붙였을 뿐 따로 큰 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큰 몸은 큰 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없기 때문에 큰 몸일 수 있는 것이다. 작은 몸, 큰 몸 하고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큰 몸을 택하는 큰 몸은 참된 큰 몸일 수 없다. 그것은 상대적인 큰 것일 뿐, 절대로서의 큰 몸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내가 마땅히 한량없는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실로 어떤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이를 보살이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일체법은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다’고 한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한다면 이는 보살이라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라 그 이름이 장엄이기 때문이다.


무아의 설법은 계속되고 있다. 보살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내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했다’거나 ‘내가 깨달았다’거나 ‘내가 중생을 깨닫게 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가’라는 아상에 빠져 있다면 그는 보살이라 이름할 수 없다. 보살은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주체가 없다. ‘나’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는데 어찌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할 내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보살은 한없이 중생을 멸도에 들게 하지만 단 한 명의 중생도 멸도에 들게 한 적이 없다. 보살이란 어떤 한 법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자를 이름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멸도에 들게 했다’라는 상에 갇혀 있다면, ‘중생을 구제했다’는 법에 집착해 있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는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중생에게는 부처와 중생이 나누어져 있고, 생사와 열반이 나누어 져 있지만 이미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그 어떤 종류의 나뉨도 없다. 부처와 중생도 없으며, 생사와 열반도 다 헛된 꿈에 불과하다. 이 세상은 이미 활짝 핀 한 송이 연꽃이다. 모든 사람에게 깨달음의 씨앗 불성이 있으나 아직 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성을 싹틔워야 한다는 말은 다 방편일 뿐이다. 무아법을 깨달은 보살에게는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깨달음에 이르게 할 중생도 없으며, 이미 깨달음에 이른 부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무아법의 증득이 가져다 주는 대 해탈, 대 자유의 깨달음이다. 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은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 중생과 부처, 생사와 열반, 삶과 죽음 등의 그 어떤 나뉨도 용납하지 않는 진리를 대변한다. 그렇기에 무아법을 체득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을 가질 수가 없다. 구제할 중생이 없고, 구제할 내가 없으며, 그렇기에 구제라는 말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보살은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깨달음의 회향인 ‘중생구제’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상구보리에도 머물지 않고 하화중생에도 머물러 있는 않는 이가 보살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서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하는 이가 바로 보살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일체법이 곧 불법이라고 했는데 일체법, 즉 불법에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그 어떤 상도 용납되지 않는다. 즉 그 어떤 ‘나다’라고 하는 상도 용납지 않는다는 말이다. 깨달을 ‘나’도 없고, 중생을 구제할 ‘나’도 없다. 지혜를 증득할 ‘나’도 없으며, 자비를 베풀 ‘나’도 없다. 상구보리할 내가 없으며 하화중생할 내가 없는 이가 바로 보살이다. 일체법은 한 치의 아상도 인상도 중생상도 수자상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보살이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한다면 그는 보살일 수가 없다. ‘내가 불국토를 장엄하리라’고 하는 말이 그대로 스스로 보살이 아님을 대변하는 말일 뿐이다. 내가 없고, 장엄할 불국토가 없으며, 장엄할 것도 없는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상에 머무를 수 있단 말인가. 무아법을 깨달았다는 것은 ‘내가 없음’을 깨달았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일체 모든 법, 일체 모든 존재에 고정된 실체적인 관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말이다. 그 어떤 것도 실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나도 너도 없으며, 중생과 부처도 없고, 예토와 정토도 없다. 오염된 예토인 중생의 국토가 없고, 장엄된 불국토가 따로 없다. 무아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분별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깨달음일진데, 어찌 ‘내가 불국토를 장엄한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여래가 불국토를 장엄한다고 했던 말은 어디까지나 방편일 뿐이다. 여래가 설한 불국토의 장엄은 실질적인 그 어떤 장엄이 아니라 이름이 장엄일 뿐이다.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다. 그러므로 장엄인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어떤 보살이 무아의 법에 통달하였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진실로 보살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구경무아분의 핵심이며, 나아가 금강경의 핵심이 되는 구절이다. 무아법의 통달이 바로 금강경에서 줄기차게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핵심이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가 바로 무아법의 이해를 위한 설명이며,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게송 또한 무아법의 통달을 위한 사구게다.

반야 지혜를 증득한다는 말이 바로 무아법을 깨닫는다는 말이며, 무아법이 바로 무자성, 공, 중도, 연기법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이 세상에 펼쳐져 있는 이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모두 다만 인연따라 잠시 그렇게 모습을 보인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내 눈 앞에 있는 것처럼, 고정된 실체적인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안을 깊이 살펴보면 어디까지나 연기적인 현상으로 잠시 꿈과도 같이, 환영과도 같이, 그림자와도 같이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인연을 만났느냐에 따라 물이 소를 만나면 우유를 이루고, 독사를 만나면 독을 만들 듯 그렇게 인연따라 겉모습이 끊임없이 변화될 뿐이지 결코 고정된 실체인 것은 아니다. 또한 물은 계곡에서 시내로 강으로 바다로 흘렀다가 수증기로 변하고 구름으로 변하고 또한 인연을 만나 비로도 우박으로도 눈으로도 내리는 것이다. 그렇게 내린 눈비가 또다시 계곡을 지나면서 나무도 되었다가 식물도 되었다가 사람 몸으로도 변했다가 또다시 시내로 계곡으로 강으로 흘러 흘러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럴진데 어떤 하나를 선택하여 ‘이것이 실체다’고 고집할 수 있겠는가. 다만 연기법에 따라 겉모습을 바꿀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아법이라고 하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아’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할 것인가. 고정된 실체가 없고 다만 꿈처럼 신기루처럼 몸을 바꾸면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를 뿐인데, 어떤 하나를 붙잡고 집착하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집을 부릴 수 있겠는가. ‘나다’라고 고집하여 내 몸에 혹은 내 생각에 집착할 것인가.

내 몸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지수화풍의 변화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 몸의 지수화풍의 구성원들은 흘러 흘러 바다고 되고 강물도 되고 산도 되었다가 나무도 풀도 되고, 또한 짐승도 되고 풀벌레도 되고 바람도 구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 몸에 집착할 것인가.
내 생각이라는 것도 가만히 살펴보면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어떤 생각을 ‘불변하지 않는 내 생각’이라고 할 것인가. 모든 생각은 변화한다. 흐를 뿐이다. 이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 생각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고 저러한 가치관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어떤 생각도 관념도 가치관도 고정된 실체로써 ‘내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도 ‘내 것’이라고 고집할 만한 것이 없다. 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학벌도, 배경도, 사랑도, 가족도, 결국에는 내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디에 머물러 집착할 것인가. 집착은 곧 괴로움을 불러올 뿐이다. 돈에 집착하면 돈으로 인해 괴롭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 그로 인해 괴로울 뿐, 결국에는 괴로움을 가져올 뿐이다.

‘나’라는 것이 없는데, 어디에 ‘내 것’을 붙일 것이며, 집착할 것인가. 이 구경무아분에서는 바로 이 점을 설하고 있다. 구경에는 모든 것이 무아라는 것이다. 무아이기 때문에 비관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니라, 무아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것이다. 어떤 물질에도, 어떤 존재에도, 어떤 깨달음에도, 어떤 생각에도, 어떤 사상에도 얽매임 없이 자유롭게 살라는 말이다.

한 평생 잠시 왔다가 갈 뿐이다. 인연따라 잠시 어떤 한 몸으로 왔다가 갈 뿐이다. 죽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고 산다고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인연따라 끊임없이 몸을 바꿀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 집착하며 살겠는가. 집착할 것이 하나도 없는데 과연 어디에 집착하며 살 것인가. 다만 인연따라 법계의 몸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돌려줘야 할 일이고, 인연따라 법계의 돈도 잘 쓰다가 법계로 잘 회향시켜 줘야 할 일이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돈도 명예도 권력도 지위도 사랑도 모두가 잠시 인연따라 응해 줬다가 인연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집착하지 않을 수 있어야 인연이 다 해 사라질 때 자연스럽게 놓아줄 수 있다. 붙잡고 조마조마 하며 살 것인가 놓아버리고 자유롭게 살 것인가. 자유롭게 사는 방법이 바로 무아법의 터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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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 능정업장분
업장을 깨끗이 맑힘


能淨業障分 第一六
復次 須菩提 善男子 善女人 受持讀誦此經 若爲人輕賤 是人 先世罪業 應墮惡道 以今世人 輕賤故 先世罪業 卽爲消滅 當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我念 過去 無量阿僧祗劫 於燃燈佛前 得値八百四千萬億 那由他諸佛 悉皆供養承事 無空過者 若復有人 於後末世 能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於我所供養 諸佛功德 百分 不及一 千萬億分 乃至 算數譬喩 所不能及 須菩提 若善男子 善女人 於後末世 有受持讀誦此經 所得功德 我若具說者 或有人聞 心卽狂亂 狐疑不信 須菩提 當知 是經義 不可思議 果報 亦 不可思議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업을 깨끗이 맑히는 법을 설해 놓은 이 분이야말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떻게 마음을 쓰고 살아야 하는지를 인과(因果)와 업보(業報)의 관점에서 쉽게 설해주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수행을 하고 금강경 공부를 하고는 있지만 그것으로 이미 나는 깨끗해졌고 맑아졌으며 모든 괴로움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지 말라. 수행과 기도를 하며, 절에도 다니고, 경전 공부도 하니까 나에게는 괴로움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제 막 수행을 시작해 놓고, 혹은 이제 겨우 몇 년에서 몇 십년 마음공부를 실천해 놓고 ‘이제 나는 행복해 질 것이다’라고 바라지 말아야 한다. 절에 다니니까 나쁜 일은 모두 사라질 것이고 좋은 일만 올 것이라고 믿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은 새벽에 기도를 하고 출근했으니 오늘 하루 재앙은 말끔히 소멸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도 수행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진리란 그렇게 단편적이지 않다. 물론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다. 지금 이 순간 수행하고 있고, 마음을 관(觀)하고 있으며, 순간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영락없는 깨달음의 향기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느 한 쪽으로 고정 지으면 안 된다. 내가 바라는 쪽으로, 좋은 일만 있겠지 하는 마음으로, 수행 잘 하고, 마음 관찰 잘 하면 좋은 일만 있을 것이라는 쪽으로 고정을 지으면 그 어리석은 마음으로 인해 깨어있음의 향기는 곳 사라지고 만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더라도 업(業)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업이란 과거 우리가 몸과 말과 뜻으로 지어 온 온갖 행위이기 때문에 그 업의 힘은 여전히 남아서 우리의 현실을 투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해 마음을 비추어 보고, 수행하고,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업의 문제까지 다 소멸시킬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이다.
경전을 통해 조금 더 깊이 살펴보자.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데도 만일 다른 사람에게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 이유는 응당히 악도에 떨어질 만한 전생의 죄업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렇게 사람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곧 소멸될 것이고, 따라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열심히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 금강경을 열심히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한다고 하자. 금강경을 늘 수지독송하며 깨어있는 마음을 유지하고 있다. 분명 이 사람은 지금 이 순간 진리 속에서 숨쉬고 있으며, 진리 안에서 환희심과 기쁨에 넘쳐 있을 것이다. 매일 금강경을 사경하고 7독씩 독경 하면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금강경을 공부하고 수행하며 남을 위해 해설해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사람들은 ‘내가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니까 좋은 일들만 많이 생길 것이다’ 라거나,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 나쁜 일이 설마 일어나겠어?’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이만큼 수행하니까 그만한 보상은 따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그리고 그 보상은 내 관점에서 내가 좋은 쪽의 일들이 많이 일어나 주고, 나에게 나쁜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비켜가기를 바라는 쪽으로 생각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 ‘좋은 일’ ‘나쁜 일’이라는 것은 ‘내 생각’일 뿐이다. 내 생각에 좋은 일이고 나쁜 일일 뿐이지 법계(法界)의 생각이거나, 진리의 생각이 아니다. 내 생각에는 돈도 잘 벌리고, 남들에게 칭찬도 많이 들으며,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을 생각하고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견해가 항상 ‘내 생각’과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지 말라. 진리의 생각은 다를 지 모른다. 물론 진리 또한 그러한 내 생각과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도울 수도 있다. 그리고 물론 때때로 기꺼이 그렇게 해 주곤 한다. 기도하는 자의 밝고도 간절한 서원(誓願)은 법계를 감동시킬 수 있기 때문에 분명 진리의 세계에서는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듣고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법계의 견해는 당장에 ‘내 생각’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내 생각’이란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우며, 좋고 나쁜 두 가지를 나누어 놓고 그 가운데 좋은 것을 선택하는 데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에서는 좋고 나쁨이 없는 대긍정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법계에서 수행하는 자의 원을 들어주는 방식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좋은 쪽일 수도 있지만 나쁜 쪽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분명 그것은 대긍정을 위한 일시적인 나쁨이란 말이다. 법계란 늘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무분별(無分別)의 진리만을 나투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경전을 독송하고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도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며 미워하고 심지어 욕을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수행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길까?’하고 괴로워할 것이다. ‘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런가’ 싶기도 할 것이고, ‘수행을 해도 별 소용 없구나’ 싶기도 할 것이며, 때때로 ‘이 수행이,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리석은 중생들의 마음이다. 어리석은 중생들은 당장에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만 좋은 일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계의 입장은 다르다. 당장에 눈앞에 보이는 좋은 일이 다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인과응보의 이치, 업보의 이치를 관통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근원적인 ‘좋은 일’ 다시 말해 좋고 나쁨을 뛰어넘는 대 긍정의 진리를 나투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수행을 열심히 하는데도 사람들이 업신여긴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에 대한 결과일 수 있는 것이다. 전생에 내가 지은 업을 언젠가는 받아야 할 터인데, 금강경 수행을 열심히 할 때 받음으로써 그 업은 금강경의 밝은 광명에 녹아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가. 금강경 독경을 열심히 하는데도 업신여김을 당한다면 그것은 업이 녹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업장이 소멸되느라 그러는 것이란 말이다.

수행하지 않고 그냥 놔두었다면 마땅히 악도에 떨어지는 과보를 받아야 할 것인데, 다행히도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수행공덕으로 가볍게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에서 그칠 수 있는 것이다. 악도에 떨어질 만한 업장을 과거에 지어 놓았다면 그 결과를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업이란 반드시 그 과보를 받아야 녹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행을 하는 사람이라고 업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수행하는 사람은 업보를 받지도 않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인과응보를 모르는 어리석은 이의 얄팍한 이기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악도에 떨어질 만한 악업을 지었지만, 이렇게 금강경 밝은 가르침을 얻어 듣고 수지독송하게 되면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정도로 그 과보를 받음으로써 업장을 말끔히 소멸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업신여김을 당했기 때문에 전생의 죄업은 소멸될 것이고 전생의 죄업이 모두 소멸되어야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업장이 무겁게 남아 있는데 어찌 깨달음과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이처럼 진리는 항상 무량수 무량광의 시공간을 뛰어넘는 절대 긍정의 차원에서 모든 일을 진행시킨다. 당장에는 욕을 얻어먹거나, 남의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듯 해 보여도 사실은 그것이 ‘능히 내 업을 맑히는’, ‘능정업장(能淨業障)’의 길임을 이 분에서는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이다. 일반적으로 수행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면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난다고는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수행을 시작하면서 더욱 마장(魔障)도 많이 생겨나고 자꾸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능정업장, 업장을 능히 맑히기 위한 법계의 배려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100일 기도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기도하지 않을 때보다 더 좋지 않은 일들이 자꾸만 생긴다면 그것이야말로 기도의 힘으로 업장을 녹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는 셈이다. 가만히 놔둔다면 지옥에 떨어질지 모르는 업장을 기도 중에 오는 온갖 마장을 받아들이고 내 안에서 기도로써 녹임으로써 맑게 해탈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수행자는 일체 모든 것을 맡기고 당당히 가야할 길만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한다. 사사로이 눈앞의 좋고 나쁨을 따져 좋은 일만 생기기를 바란다면 대장부의 걸림 없는 지혜의 길이라 할 수 없다. 참된 지혜는 좋고 나쁨을 초월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하는 구도자는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 앞에 펼쳐지고 있는 좋고 나쁜 그 모든 일이 모두 다 진리의 길이며, 부처님께서 우리를 진리로 이끌기 위한 길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당당해 진다. 완전히 내맡기면 자유로우며 걸림이 없다.

사사로운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참나, 내 안의 자성 부처님께 일체 모든 것을 완전히 내맡기고 살아간다면 우리 앞에 놓인 그 어떤 경계나 그 어떤 역경과 괴로움 조차도 즐거운 대 긍정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수행자의 힘은 이와 같은 마음에서 온다. 이 같은 대 긍정의 마음, 대 수용의 마음, 대 신심의 마음에서 오며, 나를 놓아버리고 내 안의 본래자리에 완전히 믿고 맡기는 데서 오는 것이다.
이 정도의 마음이 수행자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면 얼마나 걸림 없고 자유로울 것인가. 그 어떤 일이 우리를 휘두를 수 있으며, 우리를 괴롭힐 수 있겠는가. 이처럼 금강경 수행자의 길은 당당하고 훤칠하며 걸림 없는 지혜의 길이다.


수보리야, 내가 과거 무량 아승지 겁 전의 과거를 생각해 보니 연등부처님 뵙기 전에도 팔만 사천만억 나유타 수의 여러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어 헛되이 지냄이 없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내가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도 미치지 못하며 천만억분과 내지 어떤 산술적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것이다.

아승지(阿僧祗)란 도무지 산수(算數)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한량없이 많은 수를 뜻하며, 겁(劫)이란 마찬가지로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무량한 시간을 말한다. 나유타(那由他) 또한 우리가 헤아릴 수 있는 숫자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아승지처럼 무량한 수를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다시말해 부처님께서는 과거 연등부처님 뿐 아니라 그 이전에도 무량한 시간 동안 무량한 수의 부처님을 만나 뵙고 모두 다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되 헛되이 보내지 않았을 만큼 그 공덕이 무량하신 분이다. 한 부처님께만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더라도 그 공덕이 한량없을 터인데, 무량한 세월동안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었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셀 수 없이 많을 것인가. 이 비유는 그만큼 부처님의 공덕이 많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면 그가 얻는 공덕은 부처님께서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긴 그 공덕으로는 백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며 산술적인 비유로도 능히 미치지 못할 만큼의 더욱 무량한 공덕이 있다는 말씀이시다. 다시 말해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야말로 도무지 말이나 그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렇게 금강경 수지독송의 공덕을 크게 말씀하시고 찬탄하는 이유는 금강경이라는 경전에 그 어떤 상을 두고 절대시하거나 금강경만 독송하면 모든 공덕을 다 얻는다는 등의 그런 단편적인 말씀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금강경이란 ‘아상을 타파하는 가르침’이며, ‘완전히 아상을 깨고 참나를 발견하는 가르침’인 것이다. 불법의 대의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이 가르침을 수지하고 독송해야 한다는 말이다. 수지란 완전히 체득하여 그 가르침의 지혜를 깨닫는 것이며, 독송이란 그러한 깨달음의 바탕 위에서 그 가르침을 끊임없이 읽고 외움으로써 보다 완전히 체득하며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일은 곧 우리를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인 것이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유위의 공덕도 깨달음이라는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무궁무진한 산술적인 비유로 그 공덕을 표현하더라도 그것이 유위의 공덕인 이상 그 어떤 수학자의 비유라도 무위의 공덕에는 미치지 못하는 법이다.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 선녀인이 앞으로 오는 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는 공덕을 내가 다 말한다면 어떤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아마도 금강경을 처음 공부하는 이들은 이와 같은 금강경의 표현을 보고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는 것이 한량없는 세월동안 한량없는 부처님을 공양하고 받들어 섬기는 것에 천만억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하는가. 또 앞서 말했듯, 형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는 공덕이 동서남북과 네 간방과 위아래의 가히 생각할 수 없는 허공과도 같이 셀 수 없다고 하시는가. 처음 금강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똑같이 하는 말이 너무 어렵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뿐인가. 금강경에서는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나’를 놓아버리라고 말하고 있다. 또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 되었던 욕심과 집착을 다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해 보시하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 왔던 삶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에 어찌 마음이 혼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몹시 혼란하여 의심하여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고 계신다. 위에서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말씀하셨지만, 아직도 모자란 것이 있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전부 다 말한다면 아마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부처님께서는 말이라는 것이 진리를 전부 담을 수 없음을 잘 알고 계신다. 그렇기에 그렇게까지 말로써 수지독송의 공덕을 표현하시고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다 말한다면’ 이라는 표현으로 여전히 말로써는 다할 수 없음을 나타내고 계신다. 무위(無爲)는 어디까지나 말 그대로 ‘함이 없는’ 무위이기 때문에 말로써 표현할 수 없다. 말로써 표현하는 순간 벌써 어긋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방편을 빌리지 않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표현하고 계시는 것이다.

계속해서 부처님의 당부는 이어진다. 마땅히 알라. 이 경은 뜻도 가히 헤아릴 수 없으며,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다. 이렇게 금강경을 해설하고는 있지만 이 해설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해설 속에 금강경의 뜻이 잘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면 벌써 어긋나고 만다. 이 경은 그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경은 머릿속으로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수지독송이라는 수행을 통해, 즉 완전한 내적인 깨달음으로써 수지하고, 그러고 나서도 끊임없이 독송함으로써 완전히 가르침이 나와 하나가 될 수 있을 때만이 그저 체험되어지고, 하나되어지는 것이지, 이 경은 뜻을 헤아린다고 헤아려 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실천과 수행만이 그 뜻과 하나될 수 있게 한다.
다시 말해, 완전히 나를 놓아버리고 아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으로써 내가 곧 전체가 되었을 때 그 때 이 뜻이 그대로 내가 되고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 뜻을 헤아릴 ‘나’라는 주체가 완전히 소멸해야지만 이 뜻은 전체로써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이 뜻을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 뜻을 헤아리는 ‘나’가 있는 이상 이 뜻은 여전히 이해되지 못한다.

과보(果報)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수지독송의 과보는 깨달음이라거나, 무량한 복덕이라거나 하는 등의 원인과 결과로써의 어떤 과보를 생각하겠지만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완전한 무(無)이다. 완전히 무이기 때문에 완전히 전체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도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많을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있다면 그것은 셀 수 있는 것이며, 있고 없음의 틀 안에 갇힌 과보일 뿐인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유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과보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과보를 헤아리는 순간 이미 그 과보는 참된 과보일 수가 없다.

과보를 받을 ‘나’가 없어졌을 때,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완전히 공(空)하다. ‘나’가 없다면 내가 받을 과보 또한 어디에 붙여 둘 것인가. ‘나’만 사라진다면 이 세상은 항상 무량한 과보로써, 무량한 복덕으로써 충만한 곳이다. 이 세상은 항상 부처님의 무량한 광명으로 충만한 곳이며, 무량한 복덕이 넘치는 곳이다. 아니 광명 그 자체이며, 복덕 그 자체이고, 부처 그 자체인 것이다. 다만 거기에 광명을 받으려는 내가 있고, 복덕을 누리려는 내가 있으며, 부처가 되려는 내가 있는 이상 참된 광명도 복덕도 부처도 사라지고 말 것이다.

아상을 완전히 타파했을 때, 그 자리가 금강경 수지의 자리가 되며, 그 때 헤아릴 수 없는 뜻도, 헤아릴 수 없는 과보도 그대로 하나로 어우러져 광대한 법해(法海)를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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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5, 지경공덕분
경을 지니는 공덕


持經功德分 第十五
須菩提 若有善男子 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後日分 亦以恒 河沙等身 布施 如是無量 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 受持讀誦 爲人解說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 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如來 爲發大乘者說 爲發最上乘者說 若有人 能受持讀誦 廣爲人說 如來 悉知 是人 悉見是人 皆得成就 不可量 不可稱 無有邊 不可思議功德 如是人等 卽爲荷擔 如來 阿뇩多羅三먁三菩提 何以故 須菩提 若樂小法者 着 我見 人見 衆生見 壽者見 卽於此經 不能聽受讀誦 爲人解說 須菩提 在在處處 若有此經 一切世間 天人 阿修羅 所應供養 當知 此處 卽爲是塔 皆應恭敬 作禮圍요 以諸華香 而散其處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이 분에서는 경을 베껴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연설해 주는 데 대한 공덕을 설하고 있다. 경의 말씀을 아무리 설명해 주고 설해 주었더라도 훗날 경을 공부하는 수행자가 경전을 참되게 수지독송하지 못한다면 그 경전은 별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경전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공덕이 있는 경인가를 거듭 설명하시면서 진리의 길을 걷는 수행자들에게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해 줄 것을 요청하고 계신 것이다.

이 분에서 말씀하고 계신 금강경 수행법은 첫째 서사(書寫)이고, 둘째 수지독송(受持讀誦)이며 셋째 위인해설(爲人解說)이다. 다시 말해 첫째는 사경이며, 둘째는 독송이고, 셋째는 설법이요 법보시인 것이다. 이 세 가지 금강경 수행을 통해 금강경의 깊은 의미를 더욱 깨닫게 되고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글로 베껴 씀으로써 하나 하나의 의미를 더욱 면밀히 공부하며 공경하게 되고, 입으로 독송함으로써 잊지 않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며, 법을 전하는 설법과 법보시를 통해 진리가 널리 일체 중생에게 회향될 수 있도록 하는 수행이다.


“수보리야,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아침에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 다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며, 저녁에 또한 항하강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백천만억 겁 동안 몸으로써 보시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아니하면 그 복이 앞의 것보다 수승할진대,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 수행자가 있어 수도 없는 몸으로써 나고 죽고를 반복하며 백천만 억 겁을 윤회하면서 끊임없이 보시하기를 매일같이 한다 하더라도 이 경전을 듣고 진심으로 믿어 거스르지 않는다면 그 복이 더욱 수승하다. 하물며 이 경전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법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는가.
항하사 모래알 수만큼의 몸으로써 아침과 낮 또 저녁으로 보시하기를 백천만억 겁 동안 하더라도, 아니 그 이상의 엄청난 보시를 행하더라도 자신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유위(有爲)의 공덕이 될 뿐이다. 즉 ‘내가 했다’는 상이 남아 있는 이상 그 어떤 보시를 행할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어리석은 중생의 유위복일 뿐이다.

내가 무엇을 얼마만큼 누구에게 보시했다는 그러한 일체의 상을 다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아무리 셀 수 없는 무량한 보시를 했더라도 그것은 깨달은 자가 숨 한 번 쉬는 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일체의 상을 여의고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된다면 그 자체가 무량한 복덕이고 공덕이 된다. 일체의 상을 여의게 되면 내가 곧 우주이고 우주법계가 그대로 내가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 베풀 내가 없으며 베풀어 줄 대상도 없고 베풀 것도 없다. 베풀 주체인 ‘나’도, 베풀어 줄 대상인 ‘상대’도, 또한 베풀어 줄 ‘것’도 전부 공(空)했으며, 전부가 그대로 나와 둘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전체가 둘이 아닌 하나로써 그대로 나이고 그대로 우주인데, 주고받을 일이 무엇인가. 보시라는 말 자체가 성립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공덕이란 말 또한 텅 비어 사라지고 만다.

그랬을 때, 본래 성품을 깨닫게 되었을 때, 존재 자체가 그대로 공덕이 되고, 보시가 되며, 지혜가 된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언설로도, 그 어떤 표현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텅 빈 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할진데 어찌 물질적인 보시로써 상을 타파한 깨달음의 세계와 견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언설로써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만큼 보시를 한다고 표현할지라도 그것은 유위복 밖에 되지 못할 뿐이다.

유위복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양이 정해져 있을 뿐이지만, 무위복은 그 양이 없다. 그 양이 전체이기 때문에 있다고 할 수도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복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일체의 상을 타파한 공덕이며, 금강경에서 설하고 있는 깨달음의 세계이다. 그러니 금강경을 올바로 수지하는 공덕은 도무지 그 양을 셀 수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 담긴 진리의 크기를 어찌 유위의 양으로써 셀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의 가르침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인해설하는 공덕은 도무지 셀 수 없는 것이다. 몸으로써 백천만억 겁을 보시하는 것은 아무리 하더라도 유위의 공덕에 머물 뿐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무위의 공덕이기 때문이다. 유위의 공덕을 아무리 많이 쌓더라도 그 결과 육도 윤회 가운데 천상세계를 갈 수는 있겠지만, 육도 윤회 그 자체를 떠날 수는 없다. 그러나 금강경을 깨닫는 공부를 무위라고 하는 이유는 이 공부로써 윤회의 수레바퀴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백천만 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더라도 그 결과는 고작 육도 가운데 천상세계에 조금 더 오래 머무는 것이지만,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은 육도 윤회 자체를 벗어나 대 해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이 경을 사경하고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해 준다면 그 복은 얼마나 크겠느냐.

그러면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닫는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어떻게 금강경을 배우고 수행해야 하는가. 금강경의 가르침을 깨달아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 대 해탈을 얻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을 통해 이를 수 있겠는가. 금강경에서는 서사와 수지독송 그리고 위인해설이라는 세 가지 수행법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이렇게 금강경을 공부해 오고 있지만 여전히 머리로써는 언뜻 이해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아직 내 안에서 금강경이 춤을 추고 흘러들어오고 흘러나오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내가 금강경 자체가 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내 삶에 완전히 녹아들지 못할 것이다. 아상을 타파하고, 일체의 상을 타파한다는 것이 말로써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제 우리의 삶 속에서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얼마나 어려운 실천인가.

그래서 이 경에서는 금강경의 가르침을 우리 삶 속에서 끊임없이 체험되어지도록 하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 세 가지 실천법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실천 수행법을 하나 하나 알아보자.

첫째, 서사(書寫)라는 것은 베껴 쓴다는 말로 다시 말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경(寫經)수행을 말하는 것이다. 경전의 가르침을 하나 하나 베껴 쓴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가르침에 집중하고 몰두할 수 있는 방법이다. 보통 사람들은 경전을 보더라도 소설책을 읽듯이 그저 읽어 내려가곤 한다. 그러나 경전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니다. 경전은 단순히 읽어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하나가 되는 작업이다.
경전의 가르침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면 온 마음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이나 판단, 혹은 이전에 배워 온 것들로써 경전을 해석하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저 있는 그대로 하나도 남김없이 베껴야 하는 것이다. 책을 베낀다는 것은 똑같이 다시 쓴다는 말이다. 그처럼 우리가 경전을 볼 때도 마음에 똑같이 베껴야 한다. 내 안의 생각이나 판단, 관념들로써 걸러 들어서도 안 되고, 내가 원하는 부분만을 가려 읽어서도 안 된다.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듣는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내 생각이며 편견들을 경전에 비춰 보다 견고히 하는 아견을 증장시키는 일 밖에 되지 못한다.

경전을 볼 때는 반드시 사경을 해야 한다. 스승의 가르침을 들을 때도 사경을 해야 한다. 사경이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베끼는 작업이다. 의심하지 말고, 해석하지 말고, 판단하지 말라. 다만 있는 그대로 내 안에 베껴야 한다. 그래서 그 가르침이 그대로 내가 되도록 해야 한다. 내식대로 가르침을 취사선택해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글자 하나 빼놓지 말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경 수행을 하는 이유다.
다만 글로써 베끼고 쓰는 것만이 사경인 것은 아니다. 마음 안에 베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내 견해를 다 놓아버리고, 맑고 텅 비게 한 다음 아무런 시비 분별이나 판단 없이 다만 경전을 내 안에 베껴 새기라. 경전을 올바로 베껴 사경할 때 그 사경은 그 어떤 고정된 견해가 아니다. 그대로 베꼈을 때 자유롭다. 내 견해로써 색안경으로 투사한 것을 베꼈을 때는 내 견해 속에 스스로 빠지게 되지만, 완전히 베끼고 사경했을 때 그 가르침은 물처럼 유연하며 허공처럼 활짝 열려있는,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의 가르침으로 물결친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는 사경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처님께서 몸소 행하셨던 사경을 설해 주고 계신다.

“선남자여, 항상 부처님을 본받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사바 세계에 오시기까지 법신(法身)인 부처님께서 처음 발심한 때로부터 정진하여 물러나지 않으시고 수없이 많은 몸과 목숨을 보시하고,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이렇게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거늘 하물며 왕의 자리나 궁전, 정원 등의 일체 소유와 갖가지 어려운 고행이 무슨 장애가 될 수 있었겠느냐.”

살갗을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쪼개 붓을 삼고 피를 뽑아 먹물을 삼아서 경전 사경하기를 수미산만큼 하셨으며, 그만큼 법을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에 사경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으셨다. 목숨은 유위이며 다만 인연따라 오고 가는 것일 뿐이지만, 부처님의 법을 지니고 사경하는 공덕은 무위이며 일체 윤회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수지독송(受持讀誦)을 말씀하셨다. 수지독송은 말 그대로 잘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는 말이다. 서사하고 사경함으로써 내 안에 법이 있는 그대로 편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나더라도 그것을 그대로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잘 받아지닌 것을 독송함으로써 항상 잊지 않아야 한다. 신구의 세 가지로써 업을 짓고 사는 우리들은 몸과 말과 생각을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간다. 수행 또한 이 세 가지를 방편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몸으로써 서사하며 마음으로써 수지하며 말로써 독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듯 몸과 말과 뜻으로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써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이 맑게 정화되고 진리로써 하나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금강경을 수지하고 독송하는 공덕은 유위가 아닌 무위이다. 그렇다고 수지하지 않고 독송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유위의 공덕에 머물고 만다. 즉, 내 안에 그 참 뜻을 올바로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나날 동안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흡사 이해하지도 못하는 책을 입으로만 외워대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것은 참된 수지독송이 아니다. 그래서 독송에는 꼭 수지라는 말이 함께 따른다. 마음으로 온전히 그 뜻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참된 앎과 이해, 즉 경전에 대한 밝은 지혜 없이 입으로만 독송한다 한들 그것이 어찌 무위의 공덕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금강경의 수지독송 수행법 때문에 오래도록 불가에서는 금강경 독송을 주요한 수행법으로 알고 실천해 왔다. 매 예불과 기도 때마다 1독, 3독, 7독, 혹은 21독에서 108독씩 늘 독송하며 정진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금강경 독송 수행이 내려져 오다 보니, 자칫 금강경 수행이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공덕이 있고 영험이 있는 것인 줄 착각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금강경의 뜻을 전혀 모르더라도 매일 3독, 7독을 하면 그 자체에 엄청난 공덕이 쌓인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 뜻을 모르고서라도 마음을 맑게 비우고 또한 밝게 비추면서 금강경을 독송하게 된다면 지관(止觀)수행의 공덕이 있다. 그러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수지독송이란 금강경의 참 뜻을 올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 독송 수행을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새겨볼 필요가 있다.
혹 금강경 독송만 매일 하면 무조건 업장이 소멸된다거나, 밝아진다거나 하고 금강경 독송 그 자체에 그 어떤 상을 가져다 붙이고 있지는 않은가 비추어 볼 일이다. 그것은 금강경에 또 다른 상을 부여하는 일이다. 일체의 상을 타파하도록 이끄는 금강경의 가르침에 또 다른 상을 가져다 붙이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셋째로 위인해설(爲人解說)의 수행법이다. 이것은 서사와 수지독송으로 우리 안에 금강경이 물결치고 꽃피우는 것을 일체 모든 중생들을 위해 회향(回向)하도록 이끄는 수행방법이다. 진리가 우리 안에 꽃피어날 때 저절로 우리 안에는 일체 중생을 향한 대자비의 동체대비심이 함께 꽃피어 나게 된다. 지혜는 곧 자비와 한 몸이기 때문이다. 금강경 수행을 통해 일체의 상이 타파되면, ‘나’와 ‘너’를 나누는 분별이 사라지고, 일체는 모두가 ‘전체로써의 하나’가 된다. 그러니 그 이전에는 내가 배고플 때만 나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데, 전체가 그대로 내 몸이 되다 보니 그 어떤 중생이 배고플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일이 되며, 일체 중생이 어리석을 때 그것이 그대로 나의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 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체대비심이란 말 그대로 동체, 즉 같은 몸이라는 자각에서 나오는 대자비의 마음이다. 동체대비심은 일체의 상이 타파되는 금강경의 실천에서 나온다.

완전히 금강경을 깨닫게 된다면 물론 위인해설이라는 수행법을 따로 만들어 둘 필요도 없다. 저절로 동체대비가 성숙해 지면 남을 위해 연설하고자 하는 마음은 저절로 따른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 남을 위해 설법해 주면 된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분별일 뿐이다. 완전히 깨닫고 난 뒤에는 그런 생각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 서사와 수지독송이 완전해 지지 않은 중생들에게는 위인해설로써 동체대비심을 기르는 연습이 필요하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 때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자가 바로 나의 위인해설의 대상이다. 일체 중생에게 법을 설해주겠다거나, 법보시를 하겠다거나 하는 생각도 다 부질없는 어리석음일 뿐이다. 다만 지금 이 자리에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가 바로 내 전법(傳法)의 대상이다. 유위의 세상에서는 유위의 공덕이 뒤따른다. 남에게 설법을 많이 해 주는 공덕을 짓는다면 설사 그 사람이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일지라도 유위의 공덕은 뒤따른다. 위인해설과 법보시, 전법의 공덕은 대선지식을 스승으로 삼을 수 있는 공덕이 뒤따른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법을 전하라. 법보시의 공덕은 스승을 얻는 공덕을 얻고 나아가 깨달음의 공덕이 된다. 저 많은 수행자들이 스승이 없어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것을 보라. 인류의 수많은 수행자들의 공통된 소망은 바로 참스승을 찾는 일이었다. 참스승을 바로 찾게 되면 애써 돌아가지 않고도 바로 성품을 볼 수 있지만, 스승 없이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내가 누군가에게 법보시로써 스승이 되어줄 때 그 유위의 공덕이 무르익는 어느날 저 인도의 석가모니와 같은 부처님을 나의 스승으로 모실 수 있는 열매가 열릴 것이다.

어쩌면 앞서 금강경 1분에서 금강경의 설법은 이미 끝마쳐졌다. 또한 구구절절한 설명 또한 14분까지 오면서 이미 다 설해 마쳤다. 지금부터의 금강경 강의는 앞서 했던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 정도이거나 부처님의 자비심에 의한 되풀이 되는 법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독자 수행자들에게 금강경의 가르침은 저 깊은 심연에서의 어떤 나직한 떨림 혹은 아직 활찍 피지 않은 봉우리로써 꽃피울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우리가 우리 가슴 속에 몽우리져 있다. 물론 그것은 금강경을 공부하기 전에도 그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도 그랬으며, 우리 뿐 아니라 온 우주 삼라만상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가 다 그러하다. 그러나 금강경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그 꽃봉우리는 더욱 선연한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서는 이 중요한 지금의 시점에서 금강경을 우리 안에서 완전히 꽃피우도록 할 이상의 세 가지 수행법을 제시해 주고 계신 것이다. 이제 앞으로 남은 금강경의 가르침을 주시하면서 한편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우리 안에서 고동칠 수 있도록 이 세 가지 수행법을 실천하는 일이 남아 있다.


수보리야, 한 마디로 말하면 이 경에는 생각할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니,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며, 최상승을 발한 이를 위해 이 경을 설한 것이다.

이 경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헤아리거나 생각으로 따져볼 수 없는 가르침이다. 이 경전을 머리로써 이해하고 생각하며 분석함으로써 깨닫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머리로써는 도무지 담을 수 없다. 머리로써 다 이해했다고 생각할지라도 그것은 이해했다는 생각에 불과하다. 그 이해는 생각의 틀을 넘어 서지 못한다. 또한 이 가르침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아상 타파의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인지, 대 해탈의 깨달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헤아리려 하지 말라. 그 헤아림은 절대 내 경험과 생각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든 따지려 들거나 연구하고 분석하고 생각하여 정리하려는 습관이다. 그런 과학적인 연구 분석을 통해 무엇이든지 다 체계화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떤 거사님께서 말씀하시길 불교가 상당히 과학적인 듯 하여 10년을 넘게 생각해 보고 연구해 보았는데 도무지 확연해 지질 않는다고 답답해 하셨다. 도무지 알 수 없을 뿐 확연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신경질적으로 말씀하시면서 도대체 해탈이 무엇이고, 불성이 무엇인지, 공이 무엇인지, 아상타파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가르쳐 달라는 말만 되풀이 하셨다. 10년 동안 도무지 모르겠고 답답해서 유명한 스님들은 다 찾아가 물어보고 했지만 머릿속에서 확실하게 정리시켜 줄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생각과 정리, 분석과 연구로써는 언제까지고 그 답을 알아낼 수 없으니 ‘지금 거사님께서 도무지 모르겠고 답답한’ 그 속으로 들어가서 ‘답답해 미치겠는’ 그것과 하나 되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다. 도무지 모르겠는 그래서 막막하여 오리무중인 그것이 바로 화두다. 그 화두를 따지거나 분석하는 것으로 풀고자 한다면 앞으로도 10년이 아닌 100년을 두고도 그 답은 얻을 수 없겠지만, ‘오직 모르는’ 그 속으로 들어가 ‘모르기만 할 뿐’ 다른 그 무엇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모르기만 할 때 그 때 완전히 알게 되는 수가 있을 것이니 그것이 화두인 것이다.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고 머리로써만 헤아리려 하고 생각하려 한다면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이렇듯 이 경에는 생각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는 가없는 공덕이 있으므로 여래는 대승을 발한 이에게, 또 최상승을 발한 이에게 이 경을 설하신 것이다. ‘대승을 발한 이’는 사사로운 아상에 갇혀 ‘나’라는 틀 속에서 이기심으로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 아닌 진정 일체 중생을 위한 동체대비의 마음을 발한 이를 말하며, ‘최상승을 발한 이’는 소소하게 공덕을 키우겠다거나 복을 많이 짓고 착한 일을 많이 하겠다는 등의 이유로 수행하는 사람이 아닌 걸림없는 대자유와 대해탈의 열반을 얻고자 발심한 이를 말한다.

대승을 발한다는 것과 최상승을 발한다는 것은 수행자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발심의 요소가 된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선 첫째, 대승을 발심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보통 수행자라면 누구나 깨달음을 추구하게 마련인데, 그것이 자칫 이기적인 마음에서, 아상에 갇혀 있는 마음에서 발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즉, ‘내가 깨닫겠다’ ‘내가 깨달아 부처가 되겠다’ ‘내가 깨달아서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겠다’는 아상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마음은 어찌보면 아주 미세하게 일어나는 아상이기 때문에 자칫 놓치기 쉽고, 스스로 ‘나는 일체 중생을 위해 깨닫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상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상이 있는 중생인 이상 ‘내가 깨닫는다’고 하는 상은 언제까지고 따라다니게 마련이다. 그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아상이 없다면 발심할 필요가 없다. 아상이 없다면 이미 깨달았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러한 아상을 끊임없이 놓치지 않고 주시할 수 있어야 하며, 원(願)을 세울 때 자칫 아상에 물들지 않을 수 있도록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위한 동체대비심을 바탕으로 하는 대승의 원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마음을 예민하게 돌이켜 비춰보라. ‘깨닫겠다’는 원 아래에는 ‘내가’라고 하는 아상과 이기가 바탕이 되어 있다. 끊임없이 올라오는 그 아상을 비추어 보고 놓아버림으로써 일체 중생과 일체 만 생명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이야말로 동체대비의 대승의 원을 발하는 것이다.

둘째로, 최상승을 발한다는 말은, 자칫 수행자가 복이나 짓고 착한 일이나 함으로써 선한 곳에 태어나길 바라기만 해서는 안 되며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 대 자유, 대 해탈을 성취하고자 하는 원을 세워야 한다는 말이라고 했다. 사실 사람들의 발심이 이처럼 투철한 최상승의 발심이 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원칙적으로, 또 표면적으로는 최상승의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발심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현실에 있어서는 선을 행하고 복을 지음으로써 천상에 나겠다는 이유로 수행을 하는 이들도 많다. 다시 말해 수행을 하는 이유가 내 몸 편하고, 내 마음 즐거우며, 좋은 곳에 나고, 좋은 인연 만나며, 다만 이 생이나 다음 생에서 행복하고 편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기복적으로 기도하고, 유위의 복만을 짓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절에 다니는 신도님들 가운데 최상승의 원을 발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반적으로는 보다 부자되길 바라고, 보다 높은 자리에 오르길 바라며, 보다 안정적인 월급과 노후를 바라고, 적당히 복도 짓고 수행도 해서 편안하게 살길 바라며, 가족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거나 하는 등의 지극히 세속적이고 작은 안락에만 만족하여 수행하는 이가 많다. 대 해탈을 위해 깨달음을 얻겠다는 최상승의 발심하였는가 스스로 돌이켜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여 널리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볼 것이니, 모두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곧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과 같다.

이상에서와 같은 금강경 설법을 듣고 능히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한다면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본다. 여래는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 안에 깊은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본래의 성품이며 참마음이다. 우리가 마음 내어 발심했다면 그 순간 이미 여래의 마음에도 전해지게 마련이다. 여래는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본다.
또한 이 사람은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헤아릴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며, 가이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공덕이란 바로 무위의 공덕을 말하는 것이다. 무위의 공덕을 말로써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에 이렇게 긴 수식으로 방편을 써서 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이다. 즉, 이처럼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며 전법하는 이야말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여래의 깨달음이란 누구나 항상 지니고 있다. 우리 깊은 마음 자리에는 누구라도 여래의 깨달음을 간직하고 있다. 이미 우리는 깨달아 있다. 다만 미혹할 뿐이다. 다만 모를 뿐이다. 미혹하여 스스로 착각하고 있다. 미혹 즉, 어리석음이 우리를 스스로 아상이라는 감옥에 가둔다. 그렇게 스스로 만든 아상이라는 감옥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감옥은 누가 만들어 놓은 것도 아니고, 누가 가둬 놓은 것도 아니다. 스스로 실체 없는 감옥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그 감옥에 가둬 놓았으며 그로인해 스스로 아파하고 고통당할 뿐인 것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그 사실을 일깨워 주고 계신 것이다. 스스로 만든 상이기 때문에 스스로 그 상을 깨고 나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법을 설해주고 계신다. 스스로 그 상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수행법을 알려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수행법대로 수행하는 이가 바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미 깨달아 있지만 그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수행법을 알려주셨고, 그 수행법대로 실천하는 자야말로 여래의 깨달음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짊어지고 있다면 다시 찾을 필요가 없다. 그렇게 금강경을 수행하는 이는 이미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깨달아 있다는 사실을 확연히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므로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소한 법을 즐기며 따르지 말라. 작은 법에 머물러 기뻐함으로써 대승의 원을 발하지 못하거나, 소소한 선과 복을 따르는 법에 집착함으로써 최상승의 원을 발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는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에 집착하는 것이 된다. 참으로 금강경을 알아듣고 독송하며 전법하는 자라면 대승의 원을 발해야 하며, 최상승의 원을 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란 앞서도 설명했듯이 전부 ‘아견’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아견에 대한 다른 표현이고 서술방식이기 때문이다. 즉 ‘나라는 견해’에 집착하는 사람은 나를 즐겁게 해 주는 법을 즐긴다. 다시말해, 아견을 강화시키는 법, 나를 내세울 수 있는 법, 소승의 원과 선과 복을 짓는 소소한 법을 즐기게 된다. 대승과 최상승이 아닌 법이 바로 소소한 법이다. 그런 소소한 법을 즐기는 자는 곧 ‘나라는 견해’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결코 이 금강경의 가르침을 능히 알아듣고 독송하며 남을 위해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수보리야,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리니 마땅히 알라. 이 곳은 곧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어떤 곳이든 이 경이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할 것이다.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진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진리의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오를 것이다. 진리가 있는 곳에는 늘 공양과 공경, 찬탄과 예배가 있다. 인간이 삼보에 예배하고 공양 공경하듯 일체 세간의 모든 존재들 또한 응당 공양 공경하며 찬탄 찬양하게 될 것이다. 마땅히 이 곳은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기꺼이 공경하고 절하며 에워싸고 돌면서 가지가지 꽃과 향을 그 곳에 뿌릴 것이다.

진리는 항상 청정한 수행자로 장엄된다. 진리가 있는 곳은 늘 청정한 수행자의 공양과 공경 그리고 찬탄과 예배가 항상한다. 내 안에 진리가 살아 숨쉬게 하라. 이 경전을 서사하고 수지독송하며 위타연설하게 되면 곧 내 안에 이 경전이 꽃을 피운다. 또한 그곳은 탑을 모신 곳 처럼 여겨질 것이니 모두가 공경 공양하며 에워써고 돌면서 꽃과 향을 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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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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