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자, 누구냐?

산방한담 2011/03/14 20:24 Posted by 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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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는가?
누가 말하고, 생각하고, 보고, 듣고, 맛보고, 행동하는가?

과연 이 '보는 놈'이 누군가?

볼 때는 보이지만,
보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고정된 성품을 가진 실체적 '보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언제나 무언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볼 때만 보이지,
보지 않을 때는 보이지 않은 채로 있다.

단지 볼 때만
'보는 자'가 있고,
'보여지는 대상'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보지 않을 때
'보는 자'는 어디에 있으며,
'보여지는 대상'은 어디에 있는가?

본다는 인연따라
보여지는 것이 존재할 뿐,
본래 자리에서는
'보는 자'도 없고,
'보여지는 것'도 없으니.

다시 묻는다!

'보는 자'가 누구인가?
'행하는 자', '말하는 자', '생각하는 자'가 누구인가?
고정된 실체로써의 '생각하는 자'가 있었다면,
언제나 생각되어지는 것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각할 때만
생각하는 자가 있고,
생각의 대상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
생각하는 자는 어디에 있는가?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으며,
다만 인연 따라 잠시 잠깐
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며 생각할 뿐
'보는 자,
듣는 자,
냄새맡는 자,
맛보는 자,
접촉하는 자,
생각하는 자'는 없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소식!

'나'는 없다.
'보는 놈'은 없다.

인생을 살고 있지만
'사는 자'는 없다.

없지만
볼 때는 보고,
들을 때는 들으며,
생각할 때는 생각하는 그 자를 찾으라.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는,
'보는 자'를 돌이켜 찾아 '보라'

이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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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촌놈  수정/삭제  댓글쓰기

    핵발언이네

    2011/04/13 10:09

감사와 사랑의 호흡명상

삶과 명상 이야기 2010/07/20 00:12 Posted by 법상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풍요로우며, 긍정적이고, 감사할 일로 넘쳐나는,

무엇보다도 무한한 사랑이 꽃피어나는

생활 속에서 실천 가능한 명상법이 있어 화재다.

 

불교의 기본적인 가르침으로 연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연기법이란 이 세상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연들이 화합함으로써
연하여 일어난다는 이 세상의 법칙을 말한다.

어떤 한 가지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장엄한 동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른 봄에 피는 꽃 한 송이 조차
저홀로 피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가 참여하고 도운 것이다.

연기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 삶 위에 놓여 있는 일체 모든 존재며
존재가 만들어내는 상황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우주법계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얽히고설킨 인연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나무에 초록의 새순이 돋아나는 것조차
그 나무 혼자서 초록을 틔우는 것이 아니라
흙과 물과 바람과 햇살과
나아가 일체 모든 존재가 크고 작은 연관관계 속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거기에서 그렇게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먹는 쌀 한 톨 조차
그 안에는 무수히 많은 유정 무정의 일체 모든 존재들이
도왔고 참여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하물며 지금의 나라는 존재는 어떠한가?
내가 이렇게 먹고 자고 입고 살아가는 것,
그것 또한 내가 잘나서, 내가 돈 잘 벌어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또한 조금 깊이 연기적으로 사유해보면
일체 모든 사람들과 하늘 바람 구름 햇살을 비롯한
이 우주법계 전체가 어머님의 품처럼 나를 돌보며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가.
우리는 과연 그러한 법계의 도움에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겠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그러한 우주법계의 크고 작은 도움들을
아주 당연하게 생각해 오면서
오히려 더 많은 도움을 주지 않는데 대해
탓하고 미워하며 원망만 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가?

그 일체 모든 존재의 무량한 베풂에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살기 보다는
더 많이 주지 않음을 원망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보편적인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기법을 이해하는 이라면
마땅히 이러한 연기적인 우주의 도움을
매 순간 감사하며 고맙게 여기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감사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우주의 은혜에, 법계의 도움에 보답하는 삶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서 ‘감사’가 중요한 이유다.

이러한 연기적인 ‘감사’의 실천은
생각하고 따져봐서 감사할만한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무조건적인 감사, 밑도 끝도 없이 대책 없는 감사를
온 우주에 펼쳐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이 우주의 드넓고도 깊은 차원의 전방위적인 도움을
도저히 다 헤아리고 알아차릴 수 없다.
어떻게 생각으로 그것을 다 보고 알 수 있겠는가.

그 우주법계의, 일체 모든 존재의 도움과 은혜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것보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넓고 깊다.
그것은 시작을 알 수 없는 영겁의 생과
전생에서의 업장과 인연들 전체를 아우르는,
시공을 초월하는 작용으로써 우리를 무한히 돕고 있으며,
우리를 살려주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 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삶의 핵심 키워드가 있다.

 



이러한 무한히 살려주는 연기의 법칙이 우주 법계의 방식이라면
그 우주법계의 진리와 하나되는 길,
법계의 진리를 깨닫고, 우주의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감사’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에 대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지금 나에게 갖추어진 상황과 조건에 대해,
완전히 받아들여 수용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의 에너지를 뿜어내고 방사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우주의 크나큰 도움에 보답하고
작게나마 회향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더구나 우주법계에서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고 도와 줄 준비를 항상 마치고 있다.
언제든 우리가 그 도움을 요청하고,
그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주법계는 모든 것을 내어 준다.

그래서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돕는 일만 하며,
항상 우리를 돕고자 하는 자비로운 방식으로
우리에게 100% 힘을 실어주고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들은 우주법계의 도움을
마땅히 뿌리친다.
뿌리칠뿐더러 우주법계의 도움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아쉬워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증오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는가?
먼저 첫째는 나를 열어놓아야 한다.
우주법계의 도움이 아무런 걸림 없이 나에게 도달할 수 있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해야 한다.
마음을 닫아두면 들어 올 수가 없다.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우주법계의 자비롭고도 밝은 힘은
나에게 와 닿으며 나를 변화시키고
내 주위를 변화시킨다.

그러나 여기 그 우주법계의 도움을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 법계를 감동시키고 움직여
나에게 더 많은 도움이 올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감사’하는 것이다.
감사한다는 것은
우주법계가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고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한다는 뜻이다.
일체를 받아들이되 대 긍정으로 감사로써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에 대해
충분히 만족스러우며 충분히 감사하다는 뜻이다.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 충분히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것이
이 우주법계로 인해
더 많은 감사와 더 많은 도움을
우리에게 오게 만드는 핵심적인 에너지이고,
마음 하나로 세상의 주인이 되는 방식이며,
이 우주법계와 하나 되는 진리의 방식이다.

만족과 감사는
그냥 단순한 도덕적인 덕목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리의 언어요, 참된 말 즉 진언(眞言)이다.

단순하다.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라.
만나는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느끼라.
그것이 어렵다면 그저 ‘감사’를 외치라.
그저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라.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밑도 끝도 없는 무조건적인 감사를 외치라.

나 자신을 향해,
이 세상과 우주를 향해,
법신 부처님을 향해,
풀 한 포기와 나무 한 그루를 향해,
그리고 자동차와 집과 하늘과 구름과
읽고 있는 책과 신고 있는 신발과
버스 기사님, 청소부 아저씨,
심지어 미워하는 사람이나, 싫어하는 물건이나
원수처럼 증오하는 대상에게까지
무작정 대책 없는 ‘감사’를 외치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붓다의 오랜 방식이며,
예수의 오랜 방식이기도 하고,
인류 모든 성인들의 방식이며,
호오포노포노를 비롯한 수많은 성인과 명상가와 영적인 교사들의
공통적인 방식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은 절에 가거나 교회에 가면
‘부자 되게 해 주세요’
‘진급하게 해 주세요’
‘좋은 성적 나오게 해 주세요’
하며 비는 기도를 하곤 한다.

그러나 비는 것은 진리의 방식이 아니다.
빌게 되면 사실은 거꾸로를 연습하게 된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은
돌아켜 보면 가난과 결핍을 연습하는 말이다.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비는 마음은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것은 결국 내 안에 가난과 결핍과 부족을 연습하게 되고,
우주법계는 내가 마음에서 연습한 것을 고스란히 보내주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기도의 참된 의미는
‘감사의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다고 외치는 것이다.
부족과 결핍에 집중하는 마음에서
감사와 만족에 집중하는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야말로 참된 기도다.

평소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감사한 상황으로 바꾸라.
모든 상황, 모든 사람, 모든 소유물, 모든 존재에게 감사하라.

내가 받고 있는 현재의 연봉과 월급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며 감사를 느끼라.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에게 온전히 감사하라.
더 나은 조건의 직업, 더 나은 성적을 가져오는 자식,
더 나에게 잘 해주는 아내, 더 많은 돈을 벌어오는 남편을 바람으로써
결핍과 부족과 불만족에 에너지를 집중하지 말고
그 모든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긍정과 만족과 감사한 것들에 마음을 모으라.

우주는 항상 우리 마음이 만들어낸 것을 100% 가져다 준다.
일체유심조, 우리의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능숙한 화가와도 같아
마음에서 그린 것은 분명히 현실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우주의 창조원리다.

내 마음이 부족과 결핍에서 만족과 감사로 바뀌게 되면
내 마음의 그릇이 감사하고 만족스러운 것으로 바뀌니까
우주법계는 내 마음의 요구를 100% 들어주게 된다.
전에는 부족과 결핍을 가져다 주다가 감사할 일들로 삶을 수놓게 된다.

진언을 외듯이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하루에 100번에서 1,000번 정도 반복해 외우라.
모든 상황에서 ‘감사합니다’라는 진언을
관세음보살 염불하듯, 아미타불 염불하듯 할 수 있는 모든 순간 외치라.
이 작은 외침이 우리 삶에 경이로운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모든 상황에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감사합니다’
심지어 나를 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최악의 상황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계산하거나 따지지 말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도저히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나
증오하고 미워하는 원수에게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다.
우주법계는 항상 나를 돕기 위한 일만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주법계의 본질적인 에너지는 언제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이 괴로운 상황이고, 꼬이는 상황이며,
답답하고 힘겨운 상황일지라도
법계에서는 나의 업장을 소멸시켜주기 위해서,
혹은 나를 조금 더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그 일을 벌인 것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모든 상황이, 모든 최악의 조건이
나를 위해 법계에서 준비한 최상의 자비로운 상황으로 바뀐다.

아무리 힘들고 괴롭고 답답한 상황일지라도
사실은 우주가 그것을 통해 나를 돕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인생의 오묘한 장치인 것임을 완전히 대긍정으로 받아들이라.
그러한 대긍정의 받아들임의 표현이 바로 ‘감사합니다’ 라는 외침이다.

‘감사합니다’라고 계산하고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적으로 외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우주의 근원적인 파장은 언제나 무한한 자비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어리석은 생각이나 얕은 의식에서는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우주법계는 언제나 우리를 넘치는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 주고 있다.
바로 그 사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감사할 이유로 충분하지 않은가!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배움이 있다.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사랑과 자비라는 바탕이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모든 종교와 사상, 성자와 현자들의 가르침에서
사랑과 자비를 그 가르침의 근원적 원리로 이야기하지 않는 이들은 없다.
이 우주의 바탕, 깊은 차원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는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자비와 사랑의 에너지 파장에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와 이치와 합일을 이루려면,
우주의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면,
우주적인 삶의 방식과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 또한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자비와 사랑이 넘쳐흐르는 삶,
그것이야말로 우리를 깨닫게 하고, 신에 이르게 하며
근원적인 차원과 연결해 주는 유일한 삶의 목적이다.

불교에서도 수행을 통해 해탈이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깨달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일체 중생을 자비로써 사랑으로써 구제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깨달음이 먼저가 아니라 중생구제라는 동체대비가 먼저 있다.

금강경에서도 ‘어떻게 마음을 머물러야 하고 다스려야 합니까?’ 하는 질문에
‘존재하는 일체 모든 구류중생들을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마음을 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체 중생을 참된 행복과 평화인 열반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수행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이유인 것이다.

결국 부처는 자비 그 자체이고, 신은 사랑 그 자체이다.
이 우주에는 오직 자비와 사랑 밖에 없는 것이다.
부처가 되고 싶다면,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밖에 없다.
사랑을 연습하고,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 진리이다.

오랜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도
이러한 자비의 중요성을 간파하여
자비심을 연습하는 수행법으로 자비관(慈悲觀)을 말하고 있다.

“수행자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외쳐야 한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어떤 생물일지라도, 강하거나 약하거나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태어났거나 앞으로 태어날 것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다 행복하라. 평안하라. 안락하라.

남을 속여도 안 되고, 경멸해서도 안되며,
화를 내어 남에게 고통을 주어서도 안 된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지키듯이,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온 세계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누워있을 때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져라.”

이것이 바로 자비와 사랑을 연습하는 오랜 방법이다.
이 세상 모든 존재를 향해 행복하라 안락하라 평안하라 하고 외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모든 존재를 향해 자비심을 연습하는 것이다.
위로 아래로 옆으로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자비를 연습하는 것이다.
온 세계를 향해 무한한 자비를 행하며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지키는 것이다.

이 오랜 자비관을 삶 속에서 연습하고 실천하는
아주 쉬운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에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라.
어머니가 외아들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온 우주를 향해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원한도 적의도 없는 무한한 사랑을 외치라.
잠들지 않고 깨어있는 한 이 사랑의 외침을 실천하라.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는 것 처럼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면 된다.
모든 상황에, 모든 사람에게, 눈 뜨고 있는 모든 순간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쳐보라.

이 두 가지 단어야말로
이 우주의 진리를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끌어당기는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참된 말, 진언(眞言)이다.

이 특별한 에너지를 가진 진리의 언어를
매일 매일 매 순간순간 염불하듯 독송해 나간다면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시작하게 될 것이다.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세상은 사랑으로 물들 것이다.

우주의 법칙에서 중요한 것은
보내는 것대로 받는다는 점에 있다.
나에게서 나가는 것을 고스란히 받는 업보의 원리다.

돈을 베풀면 돈을 얻게 되고,
병든 사람을 간호하면 건강을 얻게 되며,
나이든 분들을 공경하면 장수를 얻게 된다.
인색함을 내보내면 들어오는 것도 인색해지고
성냄과 다툼을 내보내면 싸울 일들이 줄을 선다.

마찬가지로
감사를 내보내면 감사할 일들이 넘쳐나고,
사랑을 내보내면 사랑할 일들이 많아진다.
감사와 사랑이 한없이 나를 향해 파도쳐 들어오는 삶을 상상해 보라.
그런 삶이 바로 정토고 극락이며 천상세계가 아니겠는가.

이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의 에너지 파장을 담고 있는
핵심적인 언어인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조금 더 수행과 연결지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아름다운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호흡관’이다.
숨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고,
숨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름하여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호흡관이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호흡에 모아 집중하고 관찰하는 오랜 수행방법이다.
호흡을 관찰하는 이 수행법은
불교에서뿐 아니라 모든 명상법에서도
필수적이면서도 근원적인 수행법으로 잘 알려져 왔다.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알아차림으로써
온갖 망상과 번뇌를 비우고, 탐진치 삼독을 비우고
지금 이 순간이라는 현재에 깨어있는 수행법이다.

호흡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의 일이며 과거나 미래의 일이 아니다.
호흡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과거나 미래로 끊임없이 끄달리는 마음을 다스려
지금 이 순간이라는 본질로 통하는 통로와 연결될 수 있다.

호흡은 언제나 자연스럽게 우리 삶과 연결되어 있다.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호흡과 함께 한다.
그렇듯 자연스럽게 삶과 연결되어 있는 호흡에
우리의 의식의 빛을 쏘아 줌으로써 의식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바로 이 수천년을 이어 온 수행의 전통인 호흡관에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연결시키는 수행법,
그것이 바로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라고 짧게 말하고,
숨을 내쉬면서 ‘사랑’하고 짧게 말해도 좋다.

호흡이 들어올 때 ‘감사합니다’, 호흡이 나갈 때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며
지금 이 순간의 호흡에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이렇게 호흡에 집중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한다.
과거나 미래로 혹은 생각이나 망상에 끄달리는 것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과 함께 연결된 호흡에 깨어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라는 텅 빈 명상의 장에 머물면서
우주와 연결된 그 현재의 순간을 통해
감사와 사랑의 파장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평소에 우리는 우주와의 연결고리를 잃고 헤맨다.
평소에 끊어져 있던 바로 그 우주와의 소통을 연결해 주는
유일한 때가 바로 ‘지금 여기’라는 때이고,
그 현재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는 우주 전체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영민하게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지금 여기’를 반영해 주는 가장 투명한 것이 바로 호흡인 것이다.
우리는 호흡관찰을 통해 지금 여기라는 우주와의 연결고리와
조화로운 소통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텅 빈 마음으로 지금 여기의 호흡에 머물면서
감사와 사랑의 진언을 우주로 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나에게 돌아오겠는가?
그것은 바로 우주법계의, 진리세계에서 보내주는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창조 에너지이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우주법계와 하나되는 차원에 연결되는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통해
우리는 ‘지금 여기’라는 명상의 장과 연결되고,
또한 감사와 사랑이라는 우주적인 아름다운 파장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근본법과 방편법을 아우르는 수행법이다.

본질적인 진리에 다다르는 수행법이자,
삶을 풍요로운 감사와 사랑의 에너지로 가득 차게 만드는
현상계와 본체계를 아우르는 수행법인 것이다.

숨을 들이쉬면서 ‘감사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오면서 이 단순한 숨을 들이마시는 것조차
무한한 감사로써 들어온다고 느끼는 것이다.
숨을 내뱉을 때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라.
숨이 들어왔다가 내 몸을 스치고 내 밖으로 나가면서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단순한 공기, 호흡 한 자락 조차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나를 스쳐 나갈 때는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호흡관을 통해 호흡만
감사함으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모든 것이 감사로 들어오고 사랑으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물질이든, 음식이든, 호흡이든, 말 한마디든, 행동이든, 생각이든,
그것들이 나에게 들어올 때는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내 존재와 함께 파도치고 흘러 나갈 때는 무한한 ‘사랑’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음식을 먹을 때도, 밥 한 공기 물 한 모금을 먹을 때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게 받아들여 먹고
음식을 통해 힘과 에너지를 쌓은 뒤
그 힘으로 세상에 사랑과 자비의 일을 행함으로써 내보내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한 마디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받아들일 때는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말이 나갈 때는 ‘사랑’스러운 말, 애어(愛語)로써 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사의 숨을 들이쉬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사랑의 숨을 내뒤는 의미는
나라는 존재에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흘러나가게 하는 상징을 담고 있다.

다시말해 내 삶에 등장하는, 내 삶에 나타나는 모든 상황, 조건, 사람 등
일체 모든 것들을 감사로써 받아들이고,
내가 이 세상에 내보내는 모든 행동, 말, 생각, 파장 등
일체 모든 것은 사랑을 내뿜고 자비를 방사하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다.

‘나에게 들어오는 모든 것은 감사로 받아들이고,
나에게서 나가는 모든 것은 사랑으로 나갑니다’ 하고 외치는 것이다.

이렇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10번만 해도 에너지가 바뀌는데,
하루에 10번씩 10번을 반복해 100번 이상을 실천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롭게 에너지가 바뀌게 된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이 수행법이 아주 단순한 것 같은데,
우리의 내면세계는 아주 민감하기 때문에
이 사소하고 단순한 것 같은 수행법에
우리의 생각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신비로운 힘이 붙게 되는 것이다.

말은 그 자체로써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그냥 헛소리처럼 지껄이는 말이라도 일정한 양의 파장이 형성된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도
찌그러진 물의 결정에 ‘감사’와 ‘사랑’이라는 말을 외쳤을 때
순식간에 물의 결정이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를 밝히고 있다.
그야말로 가장 아름답게 바뀌는 언어가 바로 ‘감사’와 ‘사랑’이라는 단어라고 한다.

우리 몸이 70% 이상이 물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리가 한 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하고 외칠 때
그 몸의 모든 결정이 한꺼번에 아름답게 바뀔 것이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세포 하나하나가
싱그럽고 이상적인 세포로 바뀌게 될 것이다.

하루에 100번만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실천해도
우리의 인생이 아름답게 바뀐다.
조금 민감하게 깨어서 지켜보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느낄 것이다.
이 작은 실천으로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같은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모든 상황에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을 연결해 보라.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순간 즉각 호흡을 관찰하며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을 붙여보라.
세수를 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옷을 입으면서도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으로 깨어나라.
운전 중이나, 지하철 안에서도,
일하다가 잠시 짬나는 시간 동안에도,
언제나 의식적으로 호흡을 관찰하며 감사와 사랑을 연습하라.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신호등에서 대기하는 시간,
커피를 뽑아 마시는 시간,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순간,
앞 차가 끼어들기를 하는 순간, 누군가에게 욕을 얻어먹는 순간 등
이 수행을 통해 하루 중에 만날 수 있는 모든 시간을
수행의 순간, 명상의 순간, 삶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바꿀 수 있다.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수행이란 그리 거창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몇 시간을 고통을 참아가며 좌선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3,000배나 1만배를 통해서 선정을 얻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작은 감사와 사랑의 호흡을 통해
즉각적으로 직접적으로 삶 속에서 명상과 수행을 실천할 수 있다.

그리고 수행이란 사실 그런 것이다.
이처럼 삶 속에서 삶과 하나되는 것이다.
삶과 동떨어진 수행은 참된 수행이 아니다.
좌선하고 앉아 있을 때만 고요하고
일어나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갈 때 흩어진다면
그것을 어찌 참선이라고, 명상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하루 중 만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해 감사하라, 사랑하라.
원수같은 사람에게 도저히 감사한다, 사랑한다는 말을 못 하겠다면
내 안에 무언가 좋지 않은 업이 그 원수를 만나게 한 것이므로
내 안에 있는 바로 그 업에다 대고 감사와 사랑을 외치라.

괴롭고 답답하고 힘겨운 그 상황을 만들어 낸
내 안의 꽉 막힌 어떤 에너지를 향해
무한한 감사와 사랑의 부드러운 호흡을 보내주라.
그랬을 때 막힌 기운은 뚫리고, 거친 업은 눈 녹듯 활짝 녹아내리게 된다.

몸에 병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병을 미워하고 바이러스를 죽여 없애려는 마음을 내지 말고,
그 대신 그 병과 바이러스를 향해
감사와 사랑의 따뜻한 호흡을 보내주라.

불교적인 방식은 암세포도 사랑하는 방식이고 자비로 감싸주는 방식이며
암세포 조차도 감사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내 업이 암세포라는 방식으로 밖으로 나와 줌으로써
업이 풀리고 소멸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구나 하고
고맙다고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방식이다.

암세포 또한 동체대비로써 나와 싸울 적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품어 주어야 할 세포인 것이다.
감사와 사랑의 힘을 호흡관을 통해 매 순간순간 암세포에게 보내줄 때
그 수행은 우주법계를 감동시키고 작동시킴으로써
작게는 내 안의 모든 세포들이 치유의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고
넓게는 암을 치유할 수 있는 의사나 치유자를 보내주는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이처럼 명상적이고 수행자적인 방식은
세상 모든 것을 사랑으로 안아주는 방법이다.
심지어 암세포 일지라도 사랑으로 품어주고 안아줌으로써
우리 안에는 사랑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좋지 않은 상황, 경계, 대상은
미워하고 싸워서 이겼을 때는 잠시 꺽일 뿐이지만,
감사로 받아들이고 사랑으로 녹여냈을 때는
완전히 그 근원까지 녹아내려 치유가 된다.

이처럼 감사와 사랑의 호흡관은
온 우주의 근원과 연결되어 있는 나의 본연의 힘을 이끌어 내어
온 우주가 함께 나를 도와주는 작용을 시작하게 해 준다.
내 안의 모든 세포가 나를 위한 사랑의 도움을 시작할 뿐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 일의 흐름 등을 바꿈으로써
우주 전체가 나를 돕는 일에 전체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명상을 삶 속에서 실천하라.
당장 실천하지 못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매일 절이나 교회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부좌를 틀고 몇 시간을 앉아야 하는 것도 아니며,
몇 시간씩 방석위에서 절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슨 준비물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부작용이 있는 것도 아니며,
시간과 장소에 그 어떤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내어 지금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수행법이다.

잠시 모든 것을 멈춰보라.
지금 당장 시작하라.

들어오는 숨을 지켜보며
‘감사합니다’
나가는 숨을 지켜보며
‘사랑합니다’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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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unny.com BlogIcon fleuriste st laurent  수정/삭제  댓글쓰기

    절이 참 아름답군여, 명상이 잘 되겠어여

    2010/07/20 01:14
    • Favicon of http://moktaksori.net BlogIcon 법상  수정/삭제

      감사합니다. 위에 있는 두 절은 설악산 백담사이고, 세 번째 절은 서울 북한산에 있는 어떤 절인데, 생각이 안 나네요.

      2010/07/2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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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2/14 18:25


삶을 창조하는 네 가지 방법

빗소리가 아주 좋습니다. 지난 시간에 ‘내가 내 삶을 만들어내는 주인공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 내 삶을 아주 멋지게 만들어낼 수가 있다, 창조할 수 있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뭐랄까 좀 희망찬 그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전 같으면, ‘집착을 하지 마십시오, 욕심을 부리지 마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사십시오.’ 이런 말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내가 내 마음을 멋들어지게 창조해내고 자유자재로 쓰면서 살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보니까 아무래도 아주 상기가 되면서 ‘아! 이렇게 멋지게 내 삶을 원하는 대로 바꾸어 가면서 살 수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을 수 있는데, 오늘은 어찌 보면 이제 좀 찬물을 끼얹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말씀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해드리겠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일으켜서, 나의 삶을 만들어낼 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 하면, 업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창조의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내가 내 마음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생각과 말과 행동이 고스란히 내 삶을 만들어낸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구의 삼업의 세상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지요. 그래서 저마다 다른 삶을 사는 이유는 저마다 다른 생각으로써 다른 업을 지어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얘기했다 말이에요.

그런데, ‘어떻게 해야 내가 창조를 할 수 있느냐? 그리고 대부분 내가 내 생각으로 생각했던 것이 현실로 안 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로 된다는 얘긴가? 사실과 좀 다른 것 같다. 『시크릿』에서도 얘기하기를 마음을 일으키면 모든 것을 세상에서 끌어당길 수 있어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 나의 현실에서는 그게 아닌 것 같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해도 그 생각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더라.’ 라는 얘기를 한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는 그 이유에 대해 크게 4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첫째는, “이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가 아상을 스스로 만들어낸 것에 불과한 것이지 사실 이 우주법계에서는 나와 너의 차별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작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하면서 남들에게는 ‘너는 망해라’ 라고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동시에 두 가지 마음을 일으킨 거예요. 나는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에너지와 남들은 망해라 하는 에너지를 함께 일으킨 거니까 우주법계에서 볼 때는 이게 자꾸 이랬다저랬다 하는 겁니다. 우주법계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으니까, 그 두 가지 마음에 대해 똑같이 창조에너지를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되고 싶단 말인지, 망하고 싶다는 말인지 영 오락가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남들에게 하는 것이 고스란히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것으로써 나의 창조에너지로 바뀐다 이 말입니다. 남들에게 ‘너 좀 망해 봐라’ 라고 했지만 사실 그 말은 나를 망하게 하는 강력한 창조에너지로써 내 삶을 망하는 쪽으로 창조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 그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 말은 불교에서 말하는 동체대비(同體大悲), 너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오는 자비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세상을 창조하는 일체유심조의 원칙은 뭐냐 하면 바로 내 바깥 모든 존재를 향한 자비와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얼마만큼 사랑했느냐, 얼마만큼 자비롭게 대했느냐 하는 것이 내 삶을 결정적으로 만들어내는 아주 주 원동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 원리는 사랑과 자비에 있습니다.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면 할수록 내 삶은 자비와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것을 일종의 아상(我相), 아집(我執)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자기 스스로 자기 능력을 한정짓고, 한계를 지우기 때문에 그만큼의 범위 안에서만 창조가 되지 그 바깥의 더 많은 창조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스스로 나 자신은 이것 밖에 안 돼, 나의 능력은 이 정도야 라고 한계를 지움으로써 자기능력을 자기 스스로 그렇게 딱 제한을 하는 겁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능력을 딱 제한 해 놓으니까 그 능력을 결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자기 한계는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자신을 제한하고, 묶어두는데 쓰고 있으니 어떻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내 스스로 그 제한과 한계와 자기한정의 관념에서 놓여나지 않는 이상 그 어떤 외부적인 힘도 나를 바꿀 수 없고, 내 삶을 창조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내 안에 자기 한정의 관념만 깨버리면 무한한 자기 창조의 에너지로써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켜 갈 수 있는 무궁무진한 힘이 깨어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로는 ‘무언가를 창조하고 싶다면 그것이 생겨나기를 바라고, 빌고, 기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바라는 그 부분에 대해 오히려 감사해 하고, 만족스러워하고, 충분히 느끼고 누릴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즉, 빌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고 누리고 만끽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돈을 더 벌고 싶다고 한다면 돈을 더 벌려고 막 기를 쓰고 원하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내가 현재 지금 가지고 있는 그 재산 그 돈에 대해서 충분히 누릴 줄 알아야 되고 느껴볼 줄 알아야 되고 감사하며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할 줄 알면 그 감사한 것이 우주로 전달이 되어서 감사할 일들이 자꾸만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감사하지 않고 만족해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일으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창조의 원리에서 중요한 것은 감사와 만족에 있습니다.

그 다음 네 번째는 현실을 창조해 내려면 마음이 맑게 비워져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맑고 깨끗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깨끗하고 텅 비어 있을 때 어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강력한 에너지를, 힘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은 항상 혼란스럽고 망상이 들끓고 온갖 생각들이 막 죽 끓듯이 왔다갔다 오락가락합니다. 한 가지 판단을 가지고도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가지고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왔다 갔다 하듯이 그렇게 마음이 왔다 갔다 하니까 뭔가 한 가지 원하는 것에 힘이 집중되지 않는 것입니다. 요즘 잘 하는 말로 몰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마음이 흐트러지고 그러다보니 우리 마음에너지를 강력하게 쓸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명상과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명상과 기도 끝에 하는 발원이 힘을 받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정리하여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 삶을 멋들어지게 창조하고 싶다면, 네 가지가 중요합니다. 만약에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창조하고 싶은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다음의 네 가지 중에 무언가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내가 상대방에게 하는 것이 곧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내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고 자비로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랑과 자비의 방법이지요. 두 번째는 자기 스스로의 능력을 한정짓지 말아야 한다, 아견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의 무한능력을 굳게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바라고 빌기보다는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할 수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하는 참선과 명상 같은 그런 기도와 수행을 통해서 발원을 했을 때 그것은 큰 힘을 받는 것이라고 이렇게 네 가지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삶의 창조를 뛰어넘으라

그러면 이제 좀 어떻습니까? 이제 좀 현실에서 잘 이루어집니까? 이렇게 마음을 쓰면, 배운 것처럼 마음 내는 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삶이 창조되어 집니까? 물론 아직까지 의심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의심하는 그 크기만큼 거꾸로 내 삶을 창조해내지 못하고 있는 에너지를 끌어들이는 것이라는 얘기죠. 이렇게 이제 창조한다는 얘기를 했는데요, 그런데 지난 시간에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아마 이런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겁니다. 내가 내 뜻대로 세상을 창조한다 그것은 업이 아닙니까? 뭔가 내가 내 세상을 창조하려는 의지적인 행위이잖아요. 의지적인 행위가 곧 업(業)입니다. 의지적인 생각도 업(意業)이고, 의지적인 말(口業), 의지적인 행동(身業)도 업입니다. 아주 정확히 본 겁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지만 다른 말로 내가 나의 업을 창조해내는 거예요. 업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바대로 내가 뜻하는 바대로 좋은 에너지, 좋은 삶을 창조해내는 거죠. 쉽게 말해서 지난 시간에 내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이라고 설법을 했던 내용은 뭐냐 하면 “기왕 세상을 창조할 거라면 못살고 고통 받고 부정적인 에너지 가지고 세상을 살지 말고 긍정적인 삶을 창조하고 뭔가 아름다운 삶을 창조하고 부유하고 풍요롭고 남들에게 도움이 되는 아주 행복한 삶을 창조하십시오.” 라는 방편으로써 그런 말씀을 드렸다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럼 이것이 어디까지나 방편이라고 한다면 본질은 뭔가? 방편이 아닌 본질적인 지혜는 무엇이냐?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가 내안에서 자성부처님께서 본래적인 참나가 나를 창조해내도록 허용하는 겁니다. 맡겨놓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보다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가 내 삶을 창조하도록 완전히 나를 내맡겨놓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창조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요. 본질적인 지혜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껍데기 의식인 에고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무명(無明)이다 보니까 나 잘되고자 하는 아상(我相)과 이기심에 기초한 세상을 창조한단 말이죠.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방편일 뿐이지 본질은 아니다 이 말입니다.

의업을 가지고, 마음을 가지고, 생각을 가지고 내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나의 삶을 창조 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삶을 아름답게 내 방식대로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창조된 현실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계인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창조에너지로 작업 해 놓은 것이 현재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즉, 과거에 지은 업들이 모여 그 업보라는 결과의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라는 것은 곧, 불교적 표현으로 업을 변화시킴으로써 업보를 변화시키는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업은 행위인데, 신구의 세 가지 행위가 있습니다. 그 중 근간이 되는 것이 바로 의업(意業)이고, 이것이 우리가 쉽게 마음,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업, 그 중에도 뿌리인 의업, 즉 생각을 어떻게 조작하고 다스리며 움직이느냐에 따라 그 업의 결과인 업보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크릿』에서 말하는 끌어당김의 법칙도 바로 이것입니다. 업을 내보내면 업보가 끌어당겨진다는 것이에요. 그런데 불교에서 중요한 건 내보내는 업에 있어요, 업을 내보내면 당연히 업보가 끌어당겨지는 것이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시크릿』에서는 반대로 내보내는 것보다는 끌어당겨지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설명을 했습니다. 불교는 나의 행위가 중심이고, 『시크릿』은 내가 받을 결과물이 중심입니다. 이 부분은 다른데서 조금 더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업을 잘 지어야 좋은 과보를 받는 이야기에 대해 ‘어떻게 하면 업을 잘 짓고 과보를 창조해 낼 것이냐’를 말씀드렸는데요, 이제 조금 더 본질적인 부분으로 들어갑니다.

업이라는 것이 이 세상, 즉 껍데기 세상의 기본 원칙이지만, 근원으로 들어가면 업이라는 것도 공(空)합니다. 우리가 선업, 악업이라고 말을 쓰고 있지만 사실 본질에서 보면 선악이라는 것도 공해요. 불교에서는 업을 뛰어넘는 가르침을 가르칩니다. 업이라는 공한 환영과 같은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좋은 과보를 받을 것이냐가 본질이 아니라, 그 업 자체를 뛰어넘고, 선악 자체를 뛰어넘어 어떻게 업을 넘어선 본질적인 곳에 가 닿을 것이냐가 주된 관심사입니다.

쉽게 말해 불교의 핵심을 칠불통게(七佛通偈)에서는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고 표현합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 그리고 그 마음을 깨끗이 하면 그것이 바로 불교이다 라는 의미인데요, 악을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것이 업의 영역이라면 불교는 선악 업을 뛰어넘어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즉 업이라는 구속에서 조차 뛰어넘는 것을 설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아무리 창조에너지를 가지고 좋은 업을 짓고, 우리가 마음을 잘 사용해서 부자도 되고, 명예도 높아지고, 좋은 집, 좋은 차도 사고, 남들 돕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거기에서 다 된 것입니까?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으로 그냥 인생이 끝나느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죠. 부자로 살면서도 마음이 가난하고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많습니다. 부자를 창조하고 싶어서 부자를 창조할 수는 있겠지만 부자와 가난 그 양 극단을 뛰어넘어 부에도 가난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부자가 되고, 명예도 높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는 그 차원에서는 『시크릿』의 가르침, 업의 가르침이 훌륭하다고는 하지만, 우리의 공부는 그것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돈의 많고 적음에 휘둘리지 않고, 외부적인 그 어떤 경계에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중심 잡히고, 여여한, 우뚝 선 지혜를 닦아야 하는 것입니다.

좀 다르게 표현하면, 착하게 사는 방법은 됐을지언정 착하게 사는 것이 도(道)는 아니라는 거죠. 이런 말이 있습니다. ‘착한 것이 도는 아니다.’ 이를테면 제가 누군가에게 기분은 나쁘겠지만 꼭 해 주어야 할, 도움이 될 만한 어떤 말을 한 마디 해 주어야 합니다. 그냥 그 사람하고 좋게 지내려면 날카로운 조언을 해 줄 필요가 없겠지만 진정 그 사람을 위한다면 당장은 조금 껄끄럽더라도 한 마디 해 줘야합니다. 착하게만 산다고 그것이 다는 아닌 겁니다. 선악을 뛰어넘고, 성공과 실패를 뛰어넘으며, 부와 가난을 뛰어넘는 더 큰 지혜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텅 빈 근원 위로 많은 것이 지나간다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것은 이 완전한 지혜, 내안에 있는 부처가 나를 창조할 수 있도록 전혀 뒤탈이 없는 그런 어떤 삶의 방식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건데요, 이런 말씀을 드리려면 우리가 먼저 기본으로 깔고 있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도대체 이 삶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도대체 나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만들어졌는가? 그걸 알아야 됩니다. 그걸 말씀드리자면 본래는 어땠었는지를 먼저 알아야 되거든요.

우리는 지금 나라는 아상에 얽매여서, 에고에 얽매여서, 꼼짝달싹 못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질은 어떠한가? 나라는 삶에 얽매이지 않았을 당시에는 어땠을까요? 중생으로서의 나라는 존재가 아니었을 때는 어땠을까 하는 얘기입니다. 이 우주법계의 본래 근본, 나라는 존재의 근본 마음자리, 그 바탕자리, 주인공자리, 그 자리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하니, 완벽하고도 고요하고도, 청정하고도, 순수하고도, 텅 비어있는, 하여튼 맑고 텅 비어있는 어떤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원이 하나 있다면, 지금 나라는 존재를 원이라고 했을 때, 원 안이 가득 채워져 있어요. 욕심과 집착과 삶의 계획과 판단과 온갖 것들로 내 것, 내 생각, 내 소리라는 것으로 꽉 차있습니다. 그런데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거죠. 본래는 이 원이 텅 비어있었고 맑고 청정한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티 없는, 먼지하나 없는 티 없이 맑고 깨끗한 공간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본래는 그러한 청정하고 맑은 텅 빈 그런 공간이었습니다. 이 우주법계도 그렇고. 본래의 우리 자신은 티 없이 맑고 깨끗했는데 그러나 지금은 많은 때가 낀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본바탕은 항상 깨끗하고 맑고 청정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더러워 보여서 그렇지 사실은 단 한 순간도 더럽혀지지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의 마음자리는 항상 맑고 깨끗하고 청정하다, 텅 비어있다, 텅 빈 공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생기는고 하니 이 맑고 깨끗한 텅 빈 자리에 수많은 것들이 지나갑니다. 흘러가고 지나갑니다. 삶이라는 것이 등장을 하고 사라지고, 스쳐 지나갑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스쳐 지나가고, 갑자기 친구가 하나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중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 사라지고, 고등학교 때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20대 때 대학교 친구도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또 수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요. 여러분 삶에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지금까지 내 존재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습니까!

좋은 일도 스쳐 지나가고 나쁜 일도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가 도로에, 고속도로에 가만히 있으면 자동차들이 무수한 자동차들이 휙휙 지나가듯이 그렇게 지나간단 말입니다. 온갖 생각 생각들도 지나가고 우리의 어떤 감정들도 지나가고 수많은 에너지들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물질들이 지나가고 수많은 대상들이 지나가고 사람이 지나가고 사건이 지나갑니다. 수많은 어떤 에너지의 파장들이 파동들이 지나갑니다. 제가, 물리학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본질은 모든 물질도 정신도 모두가 하나의 파동이었고 파장이었다 그랬거든요. 수많은 파동들 파장들이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 되었든 물질적인 것이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사건이 되었든, 수많은 파동과 파장, 에너지의 파장이 그 본바탕 위를 지나간다 말이에요.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맑고 깨끗한 바탕 위에 그냥 스쳐지나가는 거예요. 그것은 그냥 지나가니까 맑고 깨끗한 바탕에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머물러있지 않는단 말이죠. 그냥 지나가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냥 모든 것이 지나갈 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벌이기 시작했냐 하면, 그 중에 눈에 띠는 게 있단 말입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게 있어요. 뭔가 모르게, 모든 것들이 수많은 것들이 지나가는데, 수많은 자동차가 지나가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데, 그 중에 눈에 딱 들어오는 게 있습니다. 맘에 드는 게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 의식의 초점을 집중합니다. 처음의 텅 빈 자리는 수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더라도 우리는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그 스쳐 지나는 것들은 아무 문제를 만들어 내지 않았어요.


지나가는 것을 멈춰 세운다

우리의 의식은 다만 무엇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어요. 강가에 앉아서 강물 줄기가 지나가는 것을 다만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것은 좋고 나쁜 게 없었고, 나와 더 가깝거나 더 먼 것도 없었습니다. 네 편 내편이 없었어요. 좋은 것 나쁜 것 없이 그저 존재 위를 스쳐지나갈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우리는 나에게 좀 더 관심이 있는 무언가가 눈에 띠기 시작했고, 거기에 관심의 초점을 갖다 보태게 된 겁니다. 그럼으로써 그냥 스쳐지나가야 될 것이 갑자기 나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나의 의식이 거기에 딱 머물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의식으로써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자, 다만 바라보는 자로서 머물렀어야 되는데, 다만 보는 자가 되지 않고, 거기에 내 생각을 개입시키고, 내 의지를 개입시켜서 내가 맘에 드는 것을 유독 관심을 가지고 봤단 말입니다. 쉽게 말해 아상을 개입시킨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멈추게 됩니다. 내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멈추게 만든 거예요. 그럼으로써 머무르게 됩니다.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가도록 내버려두고 바라보기만 해야 되는데, 그것이 나에게 와서 머물기 시작합니다. 그걸 보고 뭐라고 해요? 집착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집착이 하나 없었던 맑고 청정하게 티 없이 깨끗하던 본바탕에, 그저 그 위를 스쳐지나가는 많은 것들을 그 가운데 일부분을 내 식대로 내 마음에 드는 것들만 채택해서 머물게 만들고 집착하게 만들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옆으로 껴놓고 사는 겁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 놓고 집착하고, 좋아하고, 머물러 사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것과 관련된 것들, 또 다른 좋은 것들이 눈에 띠게 되고 그때그때마다 이제 집착해서 붙잡아 놓는 겁니다. 그럼으로써 우리의 집착의 덩어리들은 자꾸자꾸 덩치를 키워요. 점점 커지는 겁니다. 집착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금 사실은 그 본바탕이 본래 하는 일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내 아상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는 집착하는 자이기도 하지만, 또 나머지 대부분에 대해서는 그저 집착 없이 그저 지켜보는 자 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인공으로서 주체적인 삶도 일부분 살고 있고 중생의 붙잡고 집착하는 삶도 살고 있습니다. 그냥 스쳐 보내는 것도 있고, 붙잡아두는 것도 있잖아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내가 좋다고 내 것으로 만들려고 아상으로 붙잡아 놓고 집착해 놓고 내 것으로 만들려던 대상들을 나머지 대부분 그저 스쳐 보내는 것처럼 그냥 내버려두고 스쳐 보낼 수 있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예, 자유로워집니다. 붙잡아 둘 것이 없어져요. 내 것을 빼앗길까봐 근심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집착한 것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그저 그 모든 삶 위에 스쳐 지나는 것들을 바라보는 자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저 스쳐 지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되요.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본래의 고요함을 되찾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른다고 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방법을 모른다고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스쳐 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시 말해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사실 우리는 크게 보면, 집착을 안 하고 살고 있습니다. 선택적으로 내가 관심이 있는 것들만 집착을 하고 살지, 관심 없는 것까지 집착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상, 아집의 형성

제가 앞에서 그런 비유를 들었습니다. 자동차가 휙휙 지나갈 때 빠른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은 집착 안 하거든요. 마음이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그냥 지나갈 뿐이에요. 근데 순간 어떤 한 차에 내가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남자친구가 거기에 타고 있는데, 딴 남자하고 딴 여자하고 부둥켜안고 운전하는 것 같은 영상이 스쳐지나갔다, 그럼 그것은 붙잡는 겁니다. 그 생각에 계속 머물러있어요. 그래서 몇날 며칠이고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 그 다음에 여자 친구를 만나 얘기도 못하겠고 그 생각에 자꾸 붙잡혀있는 겁니다. 이것처럼 뭔가를 붙잡아두면 그것이 나에게 와서 문제가 되고 그것이 나에게 집착으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집착하는 것보다 흘려보내는 것이 더 많지요. 더 많습니다. 즉 흘려보내는 방법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집착하지 않는 방법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것을 흘려보내듯이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것 또한 흘러갈 수 있도록 흘려보낼 수 있도록 해주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흘러가는 것을 막아섭니다. 내 의지로써 내 생각으로써 그것을 거기에만 제한시켜서 관심을 둠으로써 막아서서 그것을 내 것이라고 착각을 한단 말이지요. 그럼으로써 뭐를 창조하느냐 하면 이제 아집(我執)을 창조해냅니다.

나라는 집착덩어리, 내가 좋아서 선택적으로 붙잡아두었던 것, 그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어때요. 좋은 거든 나쁜 거든 내거라고 생각해서 붙잡아두었던 것이 내 옆에 계속 있으니까 정이 드는 거예요. ‘내 것’이라는 집착이 자꾸 개입되니까 이제 그것을 나라고 착각하는 겁니다. 이제는 내가 붙잡아 둔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나다, 나의 정체성이 바로 내가 집착하는 것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집착하는 것이 나의 정체성이 아니고 나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스쳐지나가는 것을 붙잡아놓았을 뿐입니다. 붙잡아놓았을 뿐이라는 것은 언젠가는 다시 흘러가도록 돼있는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계속 나에게 와 있을 것이라는 고정된 믿음을 가지고 붙잡고 있는 거에 불과한 겁니다.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아요. 꽉 부둥켜안고 절대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질이나 존재 뿐 아니라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가운데 어떤 한 가지 특정한 생각을 붙잡아서 내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내 가치관이라고 생각하고 내 견해라고 생각하고 내 세계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세상에서도 자기 견해가 뚜렷한 것을 좋아해요. 나라는 견해가 뚜렷하게 있으니까 나라는 견해 그것을 가지고 또 ‘나다’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 견해에 합당한 외부적인 대상을 찾아서 붙잡아 집착합니다. 그러면서 이 바깥에 있는 것들도 다양한 것들이 내 것으로 편입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안팎에서 내 것이 넘쳐나기 시작하고, 내 것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제 아집과 아상, 아견이라는 나의 집착 덩어리가 이 몸뚱이를 붙들게 됩니다.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설정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방어벽이라는 것도 내 것이라는 집착, 어떤 생각에 대한 집착, 그것을 하나의 방어벽처럼 나라는 울타리, 나라는 울타리를 막고 있는 방어벽으로써 탁 틀어막고 있는 거지요. 그 방어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하나의 집착이고, 하나의 나라는 아견이고, 아상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정의하는 하나의 틀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다 제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잖아요.

어떤 한 가지를 보고 누구나 집착하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사람은 이것에 집착하고, 어떤 사람은 별 관심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그저 흘려보내고 또 다른 사람은 그것을 붙잡아 두려고 합니다.

돌을 수집하는 사람에게는 강가에 있는 돌이 다 스쳐지나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중 특별한 돌들을 붙잡아 ‘내 것’ ‘내 소유물’로 삼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걸 아무리 봐도 내 거라는 생각이 안 들고 그냥 흘려보내기 밖에 안 합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것을 보더라도 자기가 만들어놓은 어떤 틀, 아집, 아상, 그 틀에 의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만들어지는 겁니다. 세상을 내가 만들어 놓은 아집에 빗대어서 세상을 판단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고, 잣대 짓고, 방향성을 설정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성도 그것에 기초해서 만들어지고, 삶의 방향이 거기에서 만들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까 말했듯이, 돌을 수집하는 사람이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어떠냐 하면 돌만 찾아다닙니다. 심마니가 산삼만 캐러 다니듯이 말입니다. 다른 건 관심이 없습니다. 운동 좀 해볼래 해도 운동에 관심이 없습니다. 수행 좀 해볼래 해도 수행에 관심이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회사에 높은 자리를 준다고 해도 별관심이 없을 수도 있어요. 내가 딱 틀 잡아 놓은 나라고 형성해 놨던 그 틀에 있어서 거기에 입각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자기를 정의하는 어떤 집착덩어리를 가지고 자기를 정해놨던 틀로 만들어서 그것을 모든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내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느냐,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자식을 전혀 다르게 키웁니다. 자식에게 정말 친환경 쪽으로, 정말 자연 그대로, 정말 지혜롭게 키워야 되겠다는 가치관을 가진 분들은요, 서울에 사는 대학교 교수님이 자기 자식이 서울의 좋은 대학, 고등학교, 좋은 대학을 다니는 애를 갑자기 데리고 시골에 내려와서 마음껏 뛰어놀라고 시골에 있는 허름한 대안학교 같은 데 보낸다 말입니다. 그 좋은 대학 그만 두고 서울대를 나오고 무슨 카이스트를 나오고 한 사람들이 그렇게 잘 나가는 삶을 갑자기 때려치우고 시골로 돌아가서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서울대를 나왔던 사람들이 대거 몇 명씩 한꺼번에 출가를 하는 수도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울 때 어떻게든 공부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가치관을 가지고 키우는 사람은 모든 것의 기준을 공부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결정짓겠지요. 그러나 어떤 부모님들은 어떻게 하면 뛰어놀게 해줄까 어떻게 하면 좀 더 자연과 하나 되어서 어울리게 해줄까 이런 거에 더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삶의 방식 자체가 어디에 머물러 있고 무엇을 붙잡고 있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라면, 선생님이라는 그 직업이 바로 나와 동일시가 되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내 과목 어떤 과목을 담당한다고 하면 그 과목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 뭐가 관련되더라도 그 과목과 관련된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바라보더라도 그 틀에 그 색안경에 입각해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수학선생님은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보고, 과학 선생님은 과학적으로 보고, 음악선생님은 어디를 가도 관련된 음악을 찾게 됩니다. 우스개로 직업병이라고도 하는데요, 저희 아버님께서는 평생 흙 가지고 무엇을 만들고 짓고 하셨다 보니까 어디 모처럼 여행을 가셔서도 흙만 보시면서 좋은 자재다, 아니다 하는 것만 생각하십니다.

스님이나 성직자 분들도 마찬가지죠. 자기종교라는 그 틀에 빗대어서, 내가 집착하고 있는 그 색안경에 빗대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불교신자나 기독교 신자, 천주교 신자도 마찬가지죠. 자기의 종교적인 색안경, 집착하고 있는 그 종교적 견해나 사상 그 틀 속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보수주의자 진보주의자 갈등이 엄청나잖아요? 자기만이 집착하고 있는 하나의 덩어리가 딱 있어서 그것을 절대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환경론자와 개발론자 사이에 그 갭 또한 엄청 크거든요. 그것도 자기가 나름대로 틀 잡아 놓은 그것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나라는 생각에 탁 굳게 집착되어 있단 말입니다.


창조할 것인가 창조를 넘어설 것인가

이렇게 되다 보니까 처음에 애초에 텅 비어있던, 맑고 깨끗하던 그 공간을 지나가는 수많은 것들 중 처음에는 하나를 붙잡아 두고 그것을 시작으로 두 개, 세 개, 수많은 것들을 붙잡게 되고, 그 붙잡아놨던, 머물게 집착해놨던 수많은 것들로 나라는 어떤 존재를 형성시키게 됩니다. 아상을 만들고, 존재의 집을 만들고, 어떤 존재의 성을 만든단 말입니다. 견고한 어떤 벽돌을 쌓아서, 방어벽을 쌓아서 나라는 것을 딱 만들어두는 작업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삶을 살아오면서 해왔던 작업이고, 그 틀에 기초해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행무상이라는 단순한 부처님의 가르침,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단순한 가르침을 변화하도록 내버려두질 않고, 막아서고 집착하고 붙잡아둠으로써 생겨난 일들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그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 또는 시크릿이나 요즘 유행하는 다양한 책들에서 세상을 내 마음대로 창조해내라 라고 얘기하고 있는, 역설하고 있는 그 많은 가르침들, 그것이 본질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말한 본질적인 가르침에서 얘기한다면,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것들을 내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붙잡아서 나를 형성하도록 만드는 법을 말해주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의 어떤 집착, 집착 덩어리를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것을 집착할 수 있고,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그것에 집착해서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한 기술을 가르쳐주는 거예요.

물론 이것도 방편이라고 했어요. 기왕 집착할 거면 나쁜 걸 집착하지 말고 좋은 걸 집착해라, 기왕이면 아주 그냥 지지리도 가난하게 못 살지 말고 부유하게 살아라, 이런 방편을 얘기해줬던 거예요. ‘나’라는 것, 아상을 형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것을 ‘나’로 창조할 것이냐 하는 부분이 바로 지금까지 살펴봐 왔던 부분입니다. 쉽게 말해 창조 작업은 곧 아상을 견고히 하고 확장하는 방법인데, 어떤 방법으로, 어떤 부분으로 나를 창조할 것이냐에 대한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창조란 곧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그렇기에 마음으로 창조한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아상을 창조하는 것이기에, 이런 아상을 창조해 내기 보다는 차라리 창조해내지 않는 게 더 윗자리입니다.

선행(善行)보다는 무위(無爲)의 행이 더 본질적이란 말이지요. 선행을 하는 것은 선의 과보를 받을지언정 끊임없이 윤회하는 토대가 될 뿐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선의 과보를 통해 천상에 가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육도윤회를 벗어나는데 있는 것입니다. 즉, 선악 자체를 뛰어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는 법을 방편으로 말씀을 드렸지만, 거기서 머물러서는 정체가 되고 맙니다. 그것이 다가 아니다 라는 얘기를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 생각은 항상 이기적인 것을 창조해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창조해내요. 우리 생각이라는 것 자체가 아집과 아상에 묶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본질적이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 수가 있습니다. 아상에 묶여 이기적인 것들만 만들어 내기 쉽습니다. ‘전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만을 위한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다보면 누구나 실수를 합니다. 처음부터 실수하고 싶은 사람은 없거든요. 처음부터 과한 욕심을 부려서 나쁜 짓까지 하게 되고 남들을 괴롭혀서라도 더 부자가 되겠다고 생각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부유함이 늘어나다 보면 점점 더 집착이 늘고, 차차 점점 더 삿된 생각으로 기울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것은 아상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반드시 좋은 것만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닐 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는 창조 작업, 아상과 아집을 잔뜩 쌓는 작업을 잘하는 사람을 아주 적극적으로 칭찬하고, 옹호하고, 대단하다고 박수를 쳐줍니다. 온갖 상을 내려줍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을 하나 딱 일으켜서 부자가 된 사람에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박수를 쳐줍니다. 그것이 아주 좋은 일인 것처럼, 아주 아름다운 일인 것처럼 당연히 이 세상에서는 알고 있고, 묘사가 되고 있다는 겁니다.

심지어 이렇게 강력한 마음 에너지를 가지고 세상을 창조했을 때 업(業)조차 비껴갈 수 있습니다. 잠시 비껴갈 수 있다 이 말이지요. 비껴갈 수 있는 것이 업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업이라는 것은 과거에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입니다. 과거에 만들어놓은 창조의 행위가 지금까지 남아 있다가 지금 드러나는 거거든요. 지금 아니면 미래에 드러난다는 거예요. 즉 과거에 이미 해놨던 창조의 행위, 신구의로써 만들었던 창조의 행위, 그것을 우리는 업이라고 부릅니다. 근데 지금 이 순간 내가 한 창조의 행위, 그게 바로 자유의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자유의지 즉 현재의 업으로써 과거의 업에 대한 과보를 잠시 비껴갈 수는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과거의 과보를 받아야 하지만 현재의 자유의지, 즉 창조의 에너지가 강력해서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새로운 업을 짓고, 새로운 자유의지를 일으킨다면 이번에 받아야 할 업을 지금 당장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과거에 이미 지어놨던 업은 반드시 받기는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언젠가 받아야 해요.

이 정도로 우리가 지금 생각한 어떤 마음 에너지가 강력하기는 하나, 업 자체를 근원적으로 해소시키거나, 업장을 소멸시키거나, 이럴 수 있지는 못하다는 말입니다. 창조 작업이 모든 것의 근원적인 해결책은 안 된다는 겁니다. 어차피 과거에 지어놓은 아주 큰 업이 있으면, 지금 아무리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했더라도 그것은 꿈속에서 아름다운 꿈을 꾼 것과 동일한 것이지 결국에는 그 악업이 내 인생에 등장을 반드시 하게 될 때가 있단 말입니다.

지금 당장 등장하지 않는다면, 내 마음 에너지 때문에 등장하지 않는다면, 지금은 현실세계에서는 승승장구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어요. 나쁜 짓도 하고 못된 사람인데도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래의 어느 때, 혹은 그 사람이 죽고 나면 그 다음 생에 결정이 됩니다. 그 다음 생에 바로 인색했던 사람은 가난하게 태어날 수가 있고, 사람을 괴롭힌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 태어나도 괴롭힘을 당하는 인연을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얘기를 지금 하고 있는 거죠.



아상이 아닌 참나가 나를 이끌게 하라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되느냐?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이냐? 내 삶을 아상에 기초해 창조하며 사는 방법 말고, 본질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앞에서 제가 잠깐 말씀 드렸는데, 내가, 나라는 아상 아집이, 나라는 에고가 내 삶을 창조해내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게 해서는 안 돼요. 아상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주법계가, 내 안에 있는 자성부처가, 이 우주법계의 근원적인 참된 법신부처가 나를 이끌고 가도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얘기하기 좋아하는 내 안에 있는 어떤 불성, 주인공, 자성불, 본래자리, 참나, 신성(神性), 대지의 어머니, 어떻게 얘기해도 좋은데, 그 본연의 자리, 본바탕의 자리, 그 자리에서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그냥 맡겨버리는 겁니다. 내가 내 삶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내 안의 더 깊은 본래의 내가 나를 끌고 가도록 맡겨버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지금의 나는, 아주 나약한 나고, 아주 조악한 나고, 아상에 갇혀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아주 조잡스런 나가 아니겠습니까?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나이잖습니까? 이런 지혜도 없고 빈약한 내가 아니라 내 안에는 더 큰 내가 있고, 엄청난 지혜의 덩어리가 있단 말입니다. 참나가 있다. 그 참나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도록 하는 겁니다. 결정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주인공이 할 수 있도록, 모든 내 안에 있는 본래자리가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법계가, 우주법계가 스스로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거예요.

내가 무엇을 조작해서 얻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에서 행하는 삶의 신비가 일어나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는 겁니다.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도록 내버려둔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가장 지혜로운 본연의 자리로 갈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내 안의 자성부처에게 믿고 맡긴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진리의 일이 펼쳐집니다. 아주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일들이 펼쳐져요. 왜 그런가 하면, 이 우주법계는 나에게 근원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겉껍데기의 나라는 아상은 당장에는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본질적인 도움이 아닌 일들을 벌입니다. 아상이 보기에는 남들을 돕기보다는 나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것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우주의 근원적 지혜에서 본다면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을 때는 당장에 조금 부족해 보일지 모르지만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참된 지혜의 일들을 합니다. 이처럼 우주법계의 계획은 광대하고 무한한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는 이기적인 성취를 잘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이익에 기초해 벌어들인 돈이고 성취이며, 타인을 밟고 일어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 죽고 나면 다음 생에 지옥 갈 게 뻔하단 말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우주법계에서는 그런 계획을 잡지 않는단 말이에요. 다음 생에까지 도움이 되는 계획을 잡는단 말입니다.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한 계획은 더 장대하고, 더 크고 넓으며, 시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계획은 지금 나의 계획과는 다를 수가 있어요. 나는 지금 당장 돈을 많이 버는 게 절대목표일 수 있으나, 법계의 계획은 그게 목적인 아닌 겁니다. 우주법계의 계획은 내 계획과 다를 수 있으나 항상 전적으로 옳은 일만 벌이고 있습니다. 우주법계에서는, 내 안의 자성부처는 나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무한한 사랑, 그것도 나 하나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써 전적으로 옳은 일만 하고 있는 겁니다.


우주법계의 본래의 계획, 금강경의 가르침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누구 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두 참다운 지혜, 참된 깨달음, 열반, 평화, 니르바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엄청나고 웅대한 우주법계의 계획을 위해, 부처님의 계획을 위해 지금 이 자리에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즉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금강경』의 사상이에요. 『금강경』에서 수보리가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최상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선남자 선녀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여기에 부처님께서는 일체 모든 중생의 종류인 구류중생 전부를 내가 모두 완전한 행복인 열반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발원해야 하며 그 발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답변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도 거기에 ‘내가 했다’고 하는 아상을 완전히 놓아버려야 한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무언가를 창조하고 해 냈다는 아상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아상을 타파하고 우주법계의 계획에 따라, 더 깊은 차원의 진리에 따라 그저 일체 모든 존재를 열반에 이르게 하는 그 큰 법계의 질서에 나를 내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눈으로 보기에 그게 조금 틀린 것처럼 보일지 모르더라도, 좋든 나쁘든, 맞고 틀리든, 잘된 일이든 나쁜 일이든, 판단 없이 무조건 맡기고 가라는 겁니다. 더 큰 차원의 진리에서 더 큰 차원의 어떤 나를 돕는 계획의 일환에 모든 것을 맡기고 가라 하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아상이 무너지고, 뭐든지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믿고 맡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어요? 붙잡지 않겠지요? 이제부터는 막 스쳐지나가는 것들을 내 걸로 만들어놓고 막 집착해서 붙잡던 삶에서, 모든 걸 믿고 맡기게 되니까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게 됩니다. 그냥 거기 흘러가는 것은 흘러가도록 내버려둬요. 흘러가는 것이 법계의 일이구나 라는 걸 알게 됩니다. 제행무상이 진리란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진리를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거예요. 이처럼 내 걸로 붙잡지 않고, 믿고 맡기게 됐을 때 저절로 집착이 놓입니다. 집착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우주의 계획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맡기는 것이 바로 무집착(無執着), 집착을 버리게 하는 겁니다.



창조할 것인가 내맡길 것인가

그러면 이즈음에서 궁금한 게 있을 것입니다. 앞 장에서는 내 삶을 내 스스로 창조하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어떤 창조적인 작업을 하기 보다는 온전히 맡기라고 한단 말입니다. 그럼 어떤 말이 맞는 겁니까? 우리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까요?

앞에서 설명한 일체유심조, 즉 내 스스로 창조하는 작업은 방편의 지혜이고, 본질적인 지혜는 곧 내맡김에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창조한다는 말은 업의 굴레 속에서의 일이고, 내맡김이라는 것은 업을 뛰어넘는 일입니다. 또 창조 작업은 내 스스로 무엇이 창조되기를 바라고, 원하고,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좋고 나쁜, 옳고 그른, 원하고 원하지 않는 둘로 나누어지기 쉬워요. 의도한 바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때 우리는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결과에 집착하게 된단 말입니다.

물론 창조의 작업을 행하면서, 즉 마음으로써 무언가를 의도하고, 어떻게 되기를 바랄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 없이 그저 순수한 의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뭐랄까요 그것은 그저 선호의 차이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지만 나는 이 두 길 가운데 이 길을 선호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어쨌든 그 두 가지 길 모두가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결과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더라도 금방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겠죠.

이것처럼 우선 첫째로는, 내 스스로 나의 삶을 창조하며 살지라도 결과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 즉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그 첫째 보다 더 깊은 차원의 본질적인 지혜로 들어간다면 우리는 모든 선호를 놓아버리고, 모든 의도를 놓아버리고, 모든 집착을 놓아버리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언제나 지금 이대로 완전한 우주법계의 완전성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내 의도가, 내 계획이 아무리 치밀하고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이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보다 더 나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바로 그 사실을 굳게 믿고 맡기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첫 번째 창조 작업에 비해 두 번째 내맡김의 길은 더없이 완전한 깨달음으로 가는 첩경입니다. 아니, 내맡김 자체가 지금 이 순간의 완전성을 구현해 가는 작업이 됩니다. 창조하겠다는 생각에는 창조될지 말지에 대한 구분이 있고, 원하고 원하지 않는 선호가 있지만, 내맡김은 그 어떤 구분도 없고, 분별도 없고, 오직 완전성만이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 겁니다. 내맡김의 길에서는 언제나 ‘지금 이 자리’가 최상의 자리가 됩니다. 더 이상 무언가를 창조할 필요가 없어요. 어떤 것을 창조해야지만 완전해 지고, 더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대로, 이 모습 그대로 완전히 행복한 것입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창조해 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옵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미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원하던 모든 것이었음을 아는 것이 핵심입니다.


어떻게 내맡길 것인가, 관(觀)하라

그러면 이제 맡기고 갈 수 있겠습니까? 우주법계의 본래적인 계획에 일체를 내맡기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나 잘났다고 내 생각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우주적인 근원에 모든 것을 내맡기고 살 수 있겠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러고 싶어도 잘 안 된다는데 있습니다. 맡기고 싶지만 맡겨지지가 않는단 말입니다.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건가 싶다 말이에요. 어떻게 하는 게 맡기는 겁니까? 어떻게 해야 제대로 맡겨지고, 어떻게 해야 흘러지나가는 것들을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집착하지 않게 됩니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 답이 바로 똑바로 있는 그대로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어떤 것이 끊임없이 스쳐 지나가는지를, 분명하게, 똑똑하게,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럼 어떤 것이 어떤 방식으로 스쳐지나가다가 내가 그것을 끌어당겨서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을 내 옆에 두려고 애써서 집착하고 있었는지까지 눈에 보이고, 이것을 놔버리게 됐을 때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것이 흘러갔을 때 더 큰 자유가 나에게 어떤 방식으로 오는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믿고 맡기고 집착하는 것을 내버려두고 흘러가도록 내버려뒀을 때, 그때 아름다운 본연의 일이 무위로써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관(觀)하고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깨어있어야 된다. 깨어있는 정신으로 내 존재 위를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려 하는지를 분명히 보고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게 분명히 보고 있을 때, 또렷이 보고 있을 때, 스쳐지나가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내가 막아서고 있는지, 이 세상 이치가 제행무상이라는 것, 제법무아라는 것, 실체가 없이 그저 흘러가는 것이구나 라는 자각이 생기고, 이해가 생기고, 참된 지혜, 앎이 생기는 겁니다. 그랬을 때 저절로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억지로 집착을 버리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집착이 놓여지게 되죠. 저절로 집착을 버리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나인가

그러면 보세요. 이제 방법을 말씀 드렸습니다. 관하라, 믿고 맡기라, 집착을 버려라 얘기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해도, 좀 더 구체적인 방법이 없을까요? 이렇게 또 묻는 분도 있단 말입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서 조금 다른 차원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어떻게 하느냐? 아까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두는 스쳐지나가고 있는데, 스쳐지나가는 것을 내가 내 것으로 붙잡았고, 집착해서 묶어두었습니다. 그렇게 묶어 둬 놓고 수많은 것이 내 옆에 막 쌓여있는 것, 나라고 생각해서 막 쌓여있는 것, 그게 나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바로 나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내 소유, 내 생각, 내 성격, 내 몸뚱이, ‘이것이 과연 나인가’, ‘이것은 누구인가’ 하고 의문을 던져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내가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아놓고 그것을 나라고 집착하고 있었는데, 실제 그게 내가 맞는 것인가 냉정하게 물어볼 수 있어야 되요. 다시 말해 내가 누구냐 하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아니라면, 내가 집착해서 쌓아놓은 게 내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 나인가. 몸뚱이를 나라고 하지만 이것은 이번 생에 지나고 나서 다음 생이 되면, 남자가 여자로 될 수도 있고, 여자가 남자로 될 수도 있고, 우리가 신의 세계에 갈 수도 있고, 짐승이 될 수도 있단 말이죠.

그럼 도대체 어떤 것이 나냐? 가만 살펴보면 내가 없단 말입니다. 그럼 도대체 ‘나는 누구냐’, 이렇게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하며 생각하고 있는 ‘이것은 도대체 뭐냐’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볼 수 있어야 된다 말이에요. 내가 누구인가 하고 물어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내가 누구인지를 자꾸 나에게 묻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자꾸만 묻게 되면 어쨌든 잘은 모르겠지만 누군지를 답을 내야 되잖아요. 물었으니까 내가 누구인지 알려면 그 답을 찾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자연스레 답을 찾게 됩니다. 답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봐야 되거든요. 봐야 답이 나오잖아요.

문제를 냈는데, 어떤 도형을 하나 갖다놓고, 이 도형을 어떻게 하면 어떤 게 만들어져? 이거 한 번 만들어 봐라, 답을 내 봐, 하고 물으면 그 답을 풀기 위해서는 도형을 자꾸 봐야 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봐야지만 답이 나오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봐야 된다 하는 소립니다.

‘이 뭐꼬?’ 하면, 나는 누구인가, 이 뭐꼬 라는 화두에 답을 내려면, 봐야 됩니다. 나라는 존재를 눈여겨보고 지켜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것도 편견 없이 봐야 합니다. 기존의 편견, 선입견 어린 시선으로 보면 답을 낼 수가 없어요. 새로운 문제를 냈는데, 기존의 편견에 갇힌 사고방식으로 새로운 답을 풀 수가 있겠어요? 새로운 문제를 풀려면 완전히 과거를 놓아버리고, 편견을 놓아버리고,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살펴봐야 됩니다. 편견의 시선으로 보면 똑같이 집착의 눈으로 보이니까 똑같은 편견으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편견 없이 무분별로써 봐야 합니다. 그렇게 보게 됐을 때 답이 나온다 그 말입니다. 이게 바로 화두선(話頭禪), 간화선(看話禪)의 방법입니다.

화두선, 이 뭐꼬, ‘내가 누구인가’ 라는 물음을 통해서 그 답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거예요. 그 물음을 자꾸 던졌을 때, 그것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지켜보게 되고, 그 결과 ‘아 이것이 흘러가는 거고 내가 붙잡아 놓은 것이구나, 이것이 붙잡아 놓은 것일 뿐이지 이것이 실체가 아니구나’라는 자각이 생겨서 법계의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나 자신을 보게 된다는 관하게 되는 방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화두수행이나, 관하라는 수행이나, 집착을 버려라 하는 수행이나, 부처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겨라 하는 수행이나, 제가 말씀 드린 것처럼 모든 것을 허용하고 받아들여라, 거부하지 마라, 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얘기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방법으로써 내가 어떻게 하려고 생각하지 말고 법계에 모든 것을 맡기고, 또 그렇게 했을 때 집착이 놓이니까 집착을 하나하나 놓아보고, 또 끊임없이 내가 누구인지 나라고 생각했던 이 집착덩어리 이것이 과연 내가 맞는가 라는 물음을 자꾸자꾸 나에게 던지고, 그리고서는 끊임없이 나를 지켜보고 관찰함으로써 과연 도대체 무엇이 이런 짓을 벌이고 있는가 하고 바라보고 관찰하는, 그러면서 직접 온몸으로 답을 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바로 수행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만하면 어떻습니까? 한번 실천해 볼만 합니까? 수행해 볼만 하지요?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뛰어들어 당장에 실천해 스스로 맛보고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삶을 창조하는 행복수업] 법상, 무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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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하지 말라.

진실은,

두려워 할 것은 없다는 것이다.

두려워할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두려움을 만들어 낼 뿐!

 

이 우주의 근원의 에너지는

언제나 사랑이요, 무한한 자비다.

실체라는 말 자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그 말을 써야 한다면,

우리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자비와 사랑이라는 말 뿐일 것이다.

 

자비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우리라는 존재의

근원적 실체다!

나라는 존재의

근원을 이루는 에너지 파장은

오직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신도,

그 어떤 염라대왕이거나,

그 어떤 진리의 다르마도,

당신을

두려움에 떨게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 분들은,

성스러운 붓다며 신은,

우리 나약한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온갖 지옥을 만들어 내거나,

온갖 고통을 만들어 내거나,

인간을 단죄하기 위한

온갖 다양한 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이 두려움에 떨어야 할

그 어떤 장치도 만들어 내지 않았다.

 

인간답지 못한 인간,

도덕적이지 못한 인간,

신을 믿지 못하는 인간,

계율을 지키지 못하는 인간,

온갖 악행을 일삼는 인간,

성적으로 타락한 인간,

그 어떤 최악의 인간들을 처단하고 벌주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무시무시하며,

두려움에 벌벌 떨 만한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전율이 이는

그런 지옥을, 지하세상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일 뿐!

오직 인간의 생각일 뿐!

인간의 욕심일 뿐!

 

부처는

다만 무한한 자비 그 자체이며,

신은

무한한 사랑 그 자체일 뿐이다.

 

그 분들은

인간을 단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의지도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신은, 붓다는

오직 순수한 사랑일 뿐!

단죄하는 분이 아니다.

 

방편으로

계율을 율법을 지키라고,

죄를 짓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는 하셨을 지언정

그것을 어겼을 때

벌하기 위한

그 어떤 특단의 조치도 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분이시다.

 

다만 그 모든 인간의 악행들을

아무런 판단도 없이 지켜보실 뿐!

 

그 분들의 시선에서는

악행, 선행이라는 차별이 없다.

다만 사랑으로 지켜보실 뿐이다.

 

선악을 넘어선 분이

선악을 구분지어 놓고

그 가운데 악을 행한 자만을 단죄하고

선을 행한 자를 선물주기 위해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한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생각일 뿐이고,

우리 멋대로 지어낸 신에 대한, 절대자에 대한

바람이고 환상일 뿐이다.

 

신은, 붓다는, 절대자는

아무런 판단도 없이

일체 모든 이들을 위해

다만 오직 사랑과 자비만을 준비해 두고 있다.

 

아니 신은, 붓다는, 이 우주는

그 자체가 사랑이요, 자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의 의식 속에는

지옥도 있고,

두려움도 있고,

고통도 있으며,

무시무시하고 소름돋는

최악의 지옥이 있다.

 

가짜로 있다.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속에

인연 가합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것은 누가 만들어 냈는가?

 

그렇다.

신이 만들어 낸 것이거나,

붓다가 창조해 낸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었다.

 

가짜로.

생각으로 만들어 냈다.

그러나 생각은 에너지를 갖는다.

생각이 바탕이 되어 삶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렇게 창조된 가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인간들에게 마치 진짜 같이 느껴진다.

 

고통도 진짜고,

지옥도 진짜고,

모든 것이 진짜처럼 생생하게 이어진다.

 

그러나 더 깊은 차원의 진실은,

그 모든 것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없다.

오직 사랑만이 있고,

오직 무한한 자비와 연민만이 있을 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삶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것이 창조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삶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쏟으라.

두려워할 것이 없는 본연의 사랑이라는 세상에

생각으로 두려운 것들을 창조해 내지 말라.

 

세상이 당신에게 알려준,

종교가 당신에게 알려준,

사람들이, 선생님들이, 종교인들이 당신에게 알려 준

원죄에 속지 말라.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편이었다.

삶은 두려워할 무엇이 아니다.

죽음 또한 두려워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사랑이다.

무한한 아름다움이며, 무한한 지고의 기쁨이다.

 

죄를 지으면 지옥 간다고 했던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계율을 범하지 말라는,

율법을 어기지 말라는

그 가르침이

우리에게 죄의식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거기에 속지 말라.

신이 우리를 단죄한다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심판을 한 뒤 몇몇은 지옥으로 던져버린다고?

계율을 어기면 지옥에 간다고?

 

지옥은 없다.

죄 또한 없다.

그렇기에

두려워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없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항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지옥이 없고, 죄 또한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도 되고,

악행을 저질러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상관이 있다.

물론 지옥에 떨어진다.

큰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준비해 둔 것이거나,

부처님께서 만들어 놓은 곳이 아니며,

더욱이 그 곳은 실체적인 곳이 아니다.

 

똑같은 상황이

어떤 사람에게는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천상을 경험하게 하지 않는가.

어떤 사람은 연봉 3,000만원이 괴로움이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이지 않은가.

 

배가 터지도록 부른 사람에게

자장면 곱빼기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배가 고픈 사람에게는

그것은 천국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받지만

그 고통은 자신 스스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지옥에 떨어지지만

그 지옥은 실체적인 어떤 영역에 신이 만들어 둔

절대적인 영역이거나, 절대적인 곳이 아니라

다만 스스로 만들어 내고

스스로 그 곳에 빠져 괴로워하기로 선택한 그런 곳이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지옥을 경험할 수 없다.

그러니 있지도 않은 지옥을 생각으로 만들어내어

그곳에 떨어지면 어쩌지?

죽고 나서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지옥을

스스로 만들어 내지 말라.

 

우리가 두려움에 떨면

그 두려움으로 인해

두려운 세상을 창조한다.

지옥에 가게 될까봐 걱정 근심을 한다.

 

누구나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는 지옥에 갈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지옥을 창조해 낸다.

 

그러니 두려움에 떨지 말라.

두려움으로 인해 지옥을 창조해 내지 말라.

두려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죄의식이 죄를 만든다.

 

마음 속에

지옥을 품지 말고,

두려움을 품지 말고,

죄의식을 품지 말라.

그것을 품음으로써 그것을 창조하지 말라.

 

대신에

마음 속에

무한한 사랑을 품으라.

무한한 동체대비의 자비로움을 품으라.

 

신은 무한한 사랑이며,

붓다는 무한한 자비로움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대신

죽음을 사랑하라.

죽음이 두려운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죽음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은

죽음은 경이로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을 두려워하는 대신,

미래를 두려워하는 대신,

지은 죄를 두려워하는 대신,

삶을

자신을 무한히 사랑하라.

 

삶도 죽음도 경이롭다.

그 둘은 둘이 아니며

그것은 사랑이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아무리 달려갈지라도,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쓸지라도,

혹은 아무리 도달하려고 애쓸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사랑을 향해 달려갈 수 있을 뿐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나 자신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주어진 삶을 사랑하라.

다가올 미래를 사랑하라.

진리를, 신을, 붓다를 사랑하라.

 

오직

다만

사랑이기만 하라.

 

두려움도,

고통도,

죄의식도,

근심 걱정도,

지옥도,

죽음도

모두

사랑으로 감싸 안으라.

사랑 안에 녹아내리게 하라.

 

본래부터 그것은 없던 것이고,

가짜일 뿐이니,

진짜로 가짜를 품어 안으라.

 

사랑할 때,

사랑이 창조된다.

아니 본래 사랑이었음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의 여정은

언제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랑을 향해 도착할 뿐이다.

 

영적인 진보,

수행의 완성,

그것은 곧 잊고 있었던 사랑을 되찾고,

사랑이라는 근원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숭고한 귀의(歸依)의 여정을 뜻한다.

 

우리 모두는

머지않아

사랑과 하나될 것이다.

무한한 자비로움을 체험할 것이다.

 

두려움이라고 불리우는

가짜에 속아오던 것을 깨닫는 순간,

바로 사랑과 자비의 파장으로 춤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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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미정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나 좋은 글,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2010/04/29 08:35







어떤 보살님께서
불법이 담겨 있는 책들을 항상 가까이 놓아두고
자주 읽어본다고 하시는데
때때로 신기한 것을 경험한다고 하신다.

때때로 자식 문제로 고민이 있다거나,
남편과의 다툼이 있었다거나,
혹은 사회생활에서 흔히 마주칠 수 있는 고민들로
답답해 하면서 답을 찾다가
우연히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볼 때,
종종 마침 바로 거기에 그렇게 궁금해 하던 답변이 쓰여져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나를 위해 설법한 것처럼 생생하게 말이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든 때때로 일어난다.
우리가 어떤 궁금한 것이 있어서 답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모처럼 켠 TV에서 그와 관련된 프로그램을 하기도 하고,
우연히 펼친 신문에서
평소 같으면 그저 지나쳤을 작은 기사 속에서 그 답을 찾게 되기도 한다.

또 우리가 새롭게 무언가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을 때,
그 전에는 그 공부한 것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가
내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공부하자마자
갑자기 그런 내용들이 TV를 켜면 TV에서 나오고,
책을 보면 책에서 나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 얘기를 하기도 하고,
내가 이것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망신당할 뻔 했구나 싶을 때도 있는 등으로
동시적으로 현실에 나타나게 되기도 한다.

아주 쉽게는 내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려고 수화기를 드는 순간,
바로 그에게 전화가 오는 것 또한 이런 작은 예일 수 있다.

이것을 칼 융은 동시성(同時性)으로 설명하고 있다.
칼 융이 한 여인을 치료하는데,
그 여인이 하루는 풍뎅이 꿈을 꾼 얘기를 하는 것이었다.
칼 융은 그것이 고대 이집트에서 환생을 상징한다는 것을 떠올리며
환자의 무의식이 심리적 재탄생을 겪을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있을 때
창문 밖에 풍뎅이가 날아온 것이다.
물론 융은 그 때가 그곳에서 풍뎅이를 본 유일한 때였다.

이러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동시성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질서에서 보면 우연이 아니다.

물리학자 데이비드 피트는 이러한 융의 동시성이
‘감추어진 질서’를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본다.
겉에 드러난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감추어진 질서가 있으며,
그 감추어진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봄의 견해에 따르면 만물이 비롯되는 근원인 감추어진 질서 속에서는
마음과 물질이 전혀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는
‘더 깊은 차원’ ‘감추어진 차원’에서 다루어진 일이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
우리 눈에 우연으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더 깊은 차원의 법계에서는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그 자리에 온 것이다.
우리의 깊은 차원은 인다라망 그물코처럼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정확한 인연으로 바로 그 자리에 오게 된 것이다.

더욱이 그 감추어진 질서라 불리우는,
우주법계의 근원적 질서에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다.

부처님은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 내신 분이 아니라,
온 우주의 더 깊은 이면에 담겨 있던 본래 완전했던 진리를
다만 발견하신 분이라고 했다.

사실, 진리는 온 우주에 충만하게 꽉 차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동시성이라는 방식으로 때때로 체험하곤 한다.

우리는 질문을 던지면 언제든 진리의 차원에서 그 답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뭣고’ 하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는
화두선의 방법 또한 이러한 바탕 위에서 성립되는 수행법이다.

그래서 피트는 동시성을 자연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광대한 질서를 힐끗 엿볼 수 있게 하는 찰나적인 틈새라고 믿는다.

바로 그렇다.
이 겉에 드러난 몽환포영(夢幻泡影)의 세계 이면에
완전하고 충만한 진리가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

다만 우리의 아상과, 아집, 탐진치 삼독과 무명이
그것을 바로 보는 것을 제한할 뿐이다.
그러나 잠시라도 마음을 쉬고, 내면을 살펴 본다면
그 무한한 진리의 세계를 힐끗 엿보게 될 수 도 있을뿐더러,
그 세계와의 깊은 연결을 이룰 수도 있으리라.

삶의 본질에 이르고 싶다면,
깨달음을 얻고 싶다면,
마음을 비우고 질문을 던지라.

세속적인 질문에서부터 진리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해답을 법계에서는 항상 준비해 두고 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할 뿐!

질문을 던지면 우주법계는 언제나 거기에 답을 할 것이다.
물론 그 답변은 꼭 현자의 입을 통해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책이나, 신문에서,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서, TV에서나,
아니면 문득 내면에서 올라오는 직관을 통해서도 나올 수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마음을 닫아 걸지 않는다면,
활짝 열린 맑은 정신 안으로 진리가 문을 두드릴 것이다.

스승에게 묻는 것, 부모님께 묻는 것,
친구들에게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이제부터 우주법계의 진리 그 자체에 직접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어떤가.

내면의 진리, 우주법계의 진리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직접적이며 본질적이다.

또한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법계 본연의 계획에 입각해
무한한 자비와 지혜로써 내리는 답변이 될 것이다.

에둘러 가던 버릇을 돌이켜 내면으로,
법계로 직접 노크 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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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나절,

하늘은 화창하고,

푸르름은 너무도 높고,

몽실몽실 떠가는 구름은 아름답고,

바다색은 너무도 짙고,

고개 들어 산을 바라보면 희끗희끗 눈덮인 산맥이 성스럽고,

그 청명한 하늘 위로 자유로이 갈매기 떼들이 떼지어 날고 있습니다.

 

아, 이 곳에서의 삶은

하루 하루가 여행이며 만행이고,

모든 걸음 걸음이 히말라야이며,

매 순간 순간이 휴가이자 휴식입니다.

 

시선 가는 곳마다

영적이고

고요하며

신비롭고도

경이로운

아니

그 어떤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특별한 빈 공간이 꽉 차게 느껴집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내가 발 딛고 살아가고 있구나!

매일 매일 흙냄새 맡으며 걷고

바닷바람과 포구를 거닐으며

저 고요한 산맥을 벗삼아 살고 있구나!

 

 

 

 

휴가나 여행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쉼, 설렘, 떠남, 평안 등의

일상적이지 않은 아주 특별한 상황을 의미하는데요,

가만히 생각해 보면

휴가나 여행은

어떤 몸이 떠나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보다는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매일 매일

우리는 잠시의 멈춤으로써

휴가와 여행을 경험해 볼 수 있습니다.

 

길을 걷고

길 위의 모든 존재에 눈빛을 보내며

따뜻한 사랑을 보내며

묵연히 걷기만 할 때

이 모든 존재와 하나됨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더라도

잠시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솟아오른 눈덮인 설악의 산맥을 보고 있자면

그 순간 바쁘고 정신 없던 일들은 사라지고

나는 지금 어느덧

히말라야 깊은 산 위를 걷게 됩니다.

 

아무리 해야 할 일로 번거롭다 할지라도

잠시 호흡에 마음을 모으고

맑고 시린 공기를 깊숙이까지 품어안았다가

내보내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나는 어느덧

2,500년 전 붓다의 영산회상 한 켠에 앉아있는

그 성스러운 제자들 중 한 사람이 되어있곤 합니다.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다가도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순간

이 곳은 익숙한 일터이거나

생존경쟁의 장이 아닌

호젓한 여행자가 머무는

인도의 시골마을 고즈넉한 게스트하우스가 됩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자리를

휴식으로, 쉼으로,

여행으로, 휴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아니 본래 우리의 삶이

그렇듯

고요하고 신선한

쉼이었고, 여행이었으며, 휴가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아주 단순하고도 간단합니다.

그것은 전혀 힘이 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저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구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바삐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돌려 길 가에 앙상하게 피어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책을 보다가도, 신문을 읽다가도

잠시 보고 읽는 것을 멈추고

호흡의 들고 남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행여 TV에 정신이 팔려 있었더라도

잠깐 TV를 끄고

그저 텅빈 빈 벽을 주시하며

내면의 아주 작고 여린 움직임을 관찰해 볼 수도 있습니다.

 

하루 중에,

하루 일과 중에,

익숙하던 반복되는 일상 가운데

잠깐 잠깐

단 10초라도 좋습니다.

 

몸으로 말로 생각으로 행하고 있던,

바로 그 모든 행위를

잠시 비우고, 멈추고,

아주 낯선 시선으로

전혀 텅 빈 시선으로

속 뜰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바로 그 ‘멈춤’의 순간

위대한 신의 사랑과 축복이 깃들고,

붓다와 모든 성인의 깨어있음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함께 하게 됩니다.

 

 

애써 한 시간, 두 시간 이상을

억지로 시간을 내서,

바쁜 가운데 짬을 내서,

절이나 선방에 찾아 가서

가부좌 트는 법을 배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잠깐,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참선을, 명상을 배울 수 있습니다.

 

아니 이것을 참선이나 명상이라고

애써 이름짓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은 그저 텅 빈 순수 그 자체이고,

깨어남이며,

모든 선각자들의 방법이었으며,

붓다의 방식입니다.

 

잠깐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휴가가 되고,

잠깐 숲으로 난 길을 걸을 때

그 순간이 곧 여행이 되고,

잠깐 생각을 멈추고 호흡을 지켜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명상이 되며,

잠깐 앙상한 겨울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순간

그 때가 바로 깨어남이 되고,

잠깐 내 앞의, 옆의 동료며 가족들을

편견 없이 마음을 비우고 낯설고 새롭게 바라볼 때

그 때가 바로 사랑이 되고,

이렇게 잠깐 잠깐 일상에서 멈추고 바라볼 때

우리는 지금 이 자리가 완전한 때임을 깨닫게 됩니다.

 

명상은 거창한 무엇이 아닙니다.

수행은 근기가 높은 특별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깨달음을 너무 멀리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구도의 길을 간다는 것에 너무 거창한 환상을 덧칠하지 마십시오.

 

본래 수행, 명상이라는 것이

그렇듯 피나게 노력하고 애쓴 끝에

소수의 사람만이 경쟁에서 승리해 쟁취해 내는

그런 논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그간의 편견을

완전히 놓아버리지 않고서는

나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 되고 말 뿐입니다.

 

그 편견을 놓으십시오.

백일 기도, 천일 정진, 동안거, 선방, 철야정진...

이 모든 거대한 편견들이 수행을 어렵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물론 그 또한 좋은 방법 중에 하나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어려운 길만이 가장 옳은 길이거나,

유일한 길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매 순간 순간

일상에서 잠시 멈추는 것만으로도,

자주 자주 멈춤과 바라봄의 때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고도 쉽습니다.

아주 쉽지만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질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 여기’라는 곳이야말로

모든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실은

나라는 존재야말로

완전하고도 충만하고 꽉 찬

더 이상 얻어야 할 또 다른 힘을 필요치 않는

무한한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본래 있던

힘과 지혜와 사랑을

없다고 착각하고 살다가

아주 작은 ‘멈춤’과 ‘봄’을 통해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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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아바타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아주 인상 깊었던 대사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제이크 설리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때 여주인공 네이티리가 했던 말이다.
 “어머니 대지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아. 다만 삶의 균형을 맞출 뿐이지”


이처럼 진리는 너와 나의 구분이 없고, 안팎의 차별이 없다. 다만 균형을 맞출 뿐이다. 누군가의 돈을 훔쳤다면 에너지는 불균형이 된 것이다. 그 때 우주법계는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훔친자에게서는 앗아가고, 빼앗긴 자에게는 되돌려 주는 작용을 만들어 낸다. 욕을 했으면 욕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고, 사랑하면 사랑을 받도록 균형을 맞추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나가는 것과 들어오는 것 사이에는 이처럼 정확한 균형이 맞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우주가 하는 일이며, 진리가 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말로 칭찬해 주고, 찬탄해 주어 보라. 무엇이 돌아오겠는가. 칭찬과 감사와 찬탄이 돌아온다. 칭찬해 주는데 욕이 돌아올 일은 없지 않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법칙도 이와 같다.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느냐에 따라 무엇이 다시 내게로 들어올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감사함을 느낄 때 더 많은 감사할 일이 찾아오고, 불만을 느낄 때 더 많은 불만스러운 일이 찾아오며, 화를 내보내면 화낼 일이 들어오고, 만족하면 만족할 일들이 생기고, 무시하면 무시 받을 일이 들어오는 것이다. 이처럼 우주의 에너지는 언제나 균형을 맞출 뿐이다.

불교의 업보(業報)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다. 업보의 법칙은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사이의 법칙인데, 나라는 존재인 육근이 무엇을 내보냈느냐에 따라 육경이라는 외부의 세상이 어떤 보를 끌어당기느냐 하는 법칙을 말한다. 이러한 업보의 법칙이 바로 삶의 균형을 맞추는 이치인 것이다. 즉 누군가가 돈을 훔쳐갔다면 우주는 얻은 자와 잃은 자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처럼 업보라는 삶의 균형의 이치에서 본다면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이다. 업이 곧 보와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낼 생각보다는 더 많이 얻고 바라며 가지려고만 한다. 내보내야만 들어온다는 우주의 평등한 이치를 모른 채 내보내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나누고, 베풀고, 보시하며, 내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벌고, 얻고, 빼앗고, 성취하고, 쌓을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지 않은가.

 한창 시크릿의 ‘끌어당김의 법칙’이 유행을 했지만 그것은 우주의 균형을 맞추는 작용 가운데 ‘내보내는 것’보다 ‘받는 것’에 중점을 둔 표현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열광을 얻어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나에게서 나가는 것 보다 들어오는 것에 더 관심이 많지 않은가. 그러나 끌어당기는 것에 중점을 두면 끌어당겨질 것에 대해 바라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그 의도가 순수해 지기 어렵다. 보시를 할 때도 바라는 바 없이 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의 중점은 끌어당겨질 것이 아니라 내보낼 것에 있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보다 ‘내보내는 법칙’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 무엇이 끌어당겨 질 것이냐를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사랑으로 다만 내보내기만 한다면 그것은 더 큰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무언가를 끌어당길 필요 없이 모든 존재는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부족하면 끌어당겨서 더 채워야 하겠지만 완벽하다면 넘쳐나는 풍요를 내보내고 나눌 수 있다. 끌어당김은 목표 지향적이고 미래 중심적이지만 내보내는 것은 지금 여기라는 현재의 문제이고 더욱이 지극히 실천적인 수행의 방향이다.

 매 순간 내가 무엇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고 있는가를 주의 깊게 살피라. 태어나서 죽는 그 날지 과연 얼마나 많은 것을 세상으로 내보냈는가? 얼마나 많은 것을 베풀고 보시하며 나누었는가? 내가 내보낸 것들로 인해 세상은 얼마나 밝아졌는가? 세상이 밝아질 때 곧장 내가 밝아지는데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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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은
집착하지 말고 다 버려라.


내 것이 아닌 것을
모두 버릴 때
세상을 소유할 수 있다.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와 같아서
자기 소유가 아닌 물건에 대하여
애착을 버려야 할 것이니
버릴 것을 버릴 수 있어야 마음이 평온하다.


[잡아함경(雜阿含經)]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경구 가운데 하나.

"만약 어떤 이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가진다고 했을 때
왜 나뭇잎을 가졌느냐고 그와 싸우겠는가."

뒷동산에 있는 나뭇잎을
나의 소유라고 하고
'내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이다.

어찌 뒷동산의 나뭇잎이
내 것일 수가 있는가.

마찬가지로
이 대지의 한 부분을 가지고
어찌 '내 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 대지 위를 걷는
소나 돼지를 가지고
어찌 '내 소' '내 돼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찌 한 사람을 가지고
'내 여자' '내 남자'라고 소유코자 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모든 존재는
저 홀로 존귀하며,
저마다가 자신의 주인일 뿐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완전히 독자적이고 독존적이지
'내 것'이라고 묶어 둘 수 있는 것은 없다.

잠시 인연따라
나에게로 왔다가
인연이 다 하면
내게서 멀어지는 것일 뿐.

과연
무엇을 가지고
소유라고 할 수 있겠는가.

본래부터
‘내 것’이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가는 무상한 존재인데,
하물며 ‘내 것’이라고 붙잡아 두고
집착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뒷동산의 나뭇잎이 어찌 ‘내 것’일 수가 있으며,
땅에 금을 그어 놓고 돈을 지불한다고
어찌 ‘내 땅’일 수가 있겠는가.

'내 돈'이라고,
'내 땅'이라고,
'내 집'이라고,
'내 사람'이라고,
'내 물건'이라고,
'내 자식'이라고,
'내 지위'라고,
'내 가족'이라고,
'내 권력'이라고,
'내 종교'라고,
'내 계급'이라고,
'내 소유'라고...

그것은 인간의 오만한 생각일 뿐.

이 세상에
내가 영원히 가질 수 있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것’이라고
붙잡아두고, 집착하려 할 때
모든 괴로움이 시작된다.

잠시 이 세상에 살며 소유하는 것일지라도
그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진데
내 것이 아닌 것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참된 행복은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용기에서 온다.

버리고 버리고,
비우고 또 비우고 나면 마음이 평온하다.

전체를 버렸을 때
비로소 전체를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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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의 삶을 사는 방법

삶과 명상 이야기 2009/12/21 12:00 Posted by 법상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골고 루 세상을 적셔 주듯,
우주 법계에서 내리는 법의 비도(法雨)
온누 리에 공평무사하게 내립니다.

우주 법계에서 내리는 법우를
우주 법계의 에너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고,
법 신 부처님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고,
충만한 성령이나 영성 이라 할 수도 있을 테고,
우주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 을 것 같습니다.

말이야 무어라고 해도 상관없 지요.
그것에 인격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하느님, 부처님이라 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주 법계의 에너지는
아무런 분별도 없고, 시공의 차별도 없습니다.
그저 그냥 충만하게 있을 뿐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사실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개념에 불과하지요.
'지금 이 순 간' 과거 현재 미래가 고스란히 있는 것입니다.
공간이 라는 개념 또한
사실은 나와 너, 자연과 우주 이 모두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공존하고 있는 것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 법계 의 에너지도
'지금 여기'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지,
과거나 미래 혹은 다른 장소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 니다.

우주 법계의 에너지는,
법 신 부처님의 힘이며, 성령의 강림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 만 온전하게 빛을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 금 이 순간 깨어있을 수 있다면,
즉 온전히 지금 이 순간 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아무런 결정이나 고 민이나 분별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끊임없이 순간 순간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 속에서
자성부처님이 그 삶을 진리로 이 끌어 갈 것이고,
가장 온전한 길로 안내할 것입니 다.

미래의 결정 때문에 고민할 일 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의 문제이며,
과거의 일들 때문에 걸 림이 있더라도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걸리는 일인 것입니다.
오직 지 금 여기에서 집중함으로써
과거와 미래의 모든 문제를 풀어 갈 수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 깨어있으면
모 든 법계의 힘이며 에너지가 전부 주어집니다.
그럴 때 정 확히 필요한 순간에
정확히 필요한 것이 진리에 걸맞게 나 투어 지는 것입니다.


원할 것도, 바랄 것도 없고
오직 깨어있 으면 법계에서 다 알아서 해 나갑니다.
오직 지금을 살아가면서
나머 지 것들은 그저 믿고 맡기기만 할 뿐
다른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 다.
[법구경]의 말씀에서 처럼
오직 순간을 살아가는 것이 최선의 길인 것 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매달리지도 말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기다리지도 말라.  
오직 현재의 한 생각만을 굳게 지켜보아라.  
그리하여 지금 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라.  
참되게 굳은 관찰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  
그것이 순간 순간을 살아가는 최선의 길이다.  
[법구경(法句經)]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 니다.
이 순간 깨어있을 때
우주는 나에게 무량한 힘 을 보태어 줍니다.
이 힘은 유위의 힘이 아닌 무위의 함 이 없는 힘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문제라도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는 모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의 근본은
바로 법계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나는
법계의, 이 우 주의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외롭다고 혼자라 고 느끼는 순간에 조차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 다.

내가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면
우주 법계로부터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져다 쓸 수 있습니다.
아니 가져다 쓴다는 말도 모 자랍니다.
만약 지금 이 순간
온전한 지금 여기에서의 나일 수 있다면
그 순간의 나는 그대로 법계와 하나가 됩니 다.

그랬을 때
좋고 나쁘고도 없고,
긍정 부정도 없는
무분별의 함이 없는 행이 이어지 며,
고스란히 진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 다.

아무런 분별이 없는 진리의 삶 이기 때문에
다른 결과를 초래할 것도 없고,
과보를 받거나 현실 을 만들어 낼 것도 없이
순간 순간이 그대로 진여의 나툼 일 뿐인 것입니다.

이 순간에는 앞뒤가 딱 떨어 져
과거며 미래를 만들지 않는 것이고,
업을 짓는 일도, 업보를 받는 일도 딱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행하는 나'도 없고, '행하는 것'도 없이,
오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일체를 놓고 가는 것이며,
놓았다는 생각 조차 다 놓고 가는 것 입니다.

바로 그 때
법신 보신 화신 이며,
성자와 성부와 성령 그 자체가 되는 것입니 다.
그야말로 법대로, 여법(如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신명을 다 하고, 마음을 다해 살아가십시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것을 하고 있느 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벽암록(碧巖錄) ]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 다.  
내 삶 에서 절정의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이다.  
내 생 애에서 가장 귀중한 날은 언제인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이다.  
어제 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이다.  
그러므 로 오늘 하루를 이 삶의 전부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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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오후, 길을 걷고 있던 사람이
대형 광고판이 추락하는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고,
또 다른 사람은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 하다가
광고판이 머리에 맞아 의식을 잃고 쓰려졌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복잡하던 길, 복잡하던 마트에서
수많은 사람이 그 광고판 아래를 걷고 있었는데
왜 하필이면 불행하게도 그 사람에게, 그 순간에
그 광고판이 떨어지게 되었을까?

일부러 어떤 사람이 광고판 위에 서 있다가
그 사람을 맞추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떨어뜨려
정확히 그 사람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불교에서는 우연이란 없다고 말한다.
그것 또한 그 사람의 인연이요 업이다.
다시말해 그 사람은 그 아래를 정확히 그 시간에 걷도록 되어 있었고,
그 때에 맞춰 그 광고판은 추락을 할 수밖에 없던 인연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아무런 인연도 없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 사람이 그 때 죽어야 할 업도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우연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사라는 것은 정확하게 인연 따라 오고 갈 뿐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어떻게 그 광고판은 그 사람이 그 때 죽을 업이란 것을 알고
그 순간, 정확하게 그 사람을 맞췄단 말인가?

그 인과응보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과관계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 어떻게 인과관계가 성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사람과 물질 사이에서도 인과관계와 인연법은 성립한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이 법계의 인연법이라는 법칙은
인간에게만, 혹은 생명이 있는 유정물(有情物)에게만 한정되는 법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뿐 아니라, 유정물 뿐 아니라
모든 무정물(無情物)에게까지 확장되는 우주의 법칙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유정물 뿐 아니라
무정물에게도 자비와 존귀함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마음을
보내야 하는 이유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그 차가 자체 엔진고장을 일으켜 시동이 꺼지면서
고속도로에서 차가 갑자기 서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자.
그래서 대형사고가 났고, 많은 사람이 사망하거나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면 그 사고에 연관된 많은 이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우연으로 그 사고를 당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고가 날 만한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사고가 날 인연을 가진 사람들이 마침 그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기고 인연 따라 소멸한다.
우연은 없다.

그렇다면 고장 난 자동차 엔진이
모든 인연법과 인과응보를 환히 알고,
사고가 날 모든 사람들의 운명과 업을 따져 본 뒤
그 순간에 그 일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꾸며낸 것인가?

그렇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더 엄밀히 말해
그 자동차 엔진이 그런 일을 직접 했다기 보다는
이 법계의 인과응보라는 이치가 그 일을 계획하고
자동차 엔진은 거기에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큰 틀에서
인연법이라는 법계의 큰 진리의 흐름 속에서
나고 죽으며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까.

이 쯤에서 가만히 생각해 보자.
광고판이나 자동차 엔진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몫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불교에서는 사람 뿐 아니라
동물과 식물, 나무와 풀과 개미와 이끼들조차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며,
그들을 결코 인간 아래에 두는 일을 하지 않는다.
그들과 인간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 인간에게 죽음을 당할 수 있듯,
인간이 동물에게도 죽음을 당할 수 있고,
식물에게도,
심지어 위에서 보았듯 무정물에게도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들과 인간은 인연법의 차원에서 서로 동등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고장 나기 직전의 차였는데 주행 중에는 괜찮았고,
다행히도 집에 도착하자마자 차량이 고장 났다”고.
그래서 사고 없이 집까지 무사히 잘 왔다고 말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아주 좋은 차를 타고 있었으면서도
차량이 문제를 일으켜 집까지 오는데
몇 시간이 더 걸렸을 수도 있다.

늦게 오는 것도 정확히 그럴 만한 인연이고,
사고 없이 빨리 오는 것도 그럴 만한 인연이다.

사업가가 아주 중대한 회사의 업무로
해외 사업가와의 미팅에서 차량 사고로 늦게 가는 바람에
그 큰 투자 사업을 망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차량이 하필이면 왜 그 중요한 순간에 고장이 나는가.
차량 결함만 아니었어도 그 사업가는 대박이 났을 것인데.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차 고장만 아니었다면 완전히 대박이 났을까.
혹시 법계에서 그 사업이 대박이 나기에는 아직 이른 때라서,
아직 그 사람이 성숙하지 않았거나,
복이 부족했거나, 아직은 그 그릇이 작았거나 하는 이유로
차량 고장이라는 인연을 통해 그 사업을 뒤로 미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바로 그 차는,
차의 고장난 엔진은
온전한 법계의 이치에 따라
아주 여법한 진리를 수행하게 된 것이리라.

사람만 법계의 이치를, 인과의 이치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유정물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처럼 무정물 또한 법계의 일부로써,
진리의 일부로써
바로 그 인연법이라는 우주적인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동참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차의 탓으로 돌린다.
흥분해서 차 바퀴를 발로 걷어 차거나,
혹은 그 차를 폐차시키고 새 차를 사는 것으로 울분을 풀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차의 문제가 아니라 순수한 내 문제다.
차가 바로 그 때 고장이 난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이 법계 우주가 각본을 쓰고 그 차는 단지 조연을 했을 뿐이다.
아니 법계와 차와의 공동감독에 공동주연의 연극이라는 편이 옳겠다.

어쨌든, 주연이었든 조연이었든
내 사업을 망친 직접적인 몫을 한 녀석은 자동차다.
그러니 자동차를 실컷 미워해도 좋다.
그렇지만 자동차를 미워하는 만큼
법계의 일부분인 자동차도 나를 미워할 것이다.

손가락이 내 몸의 일부분이듯,
자동차는 이 우주법계의 일부분이다.
손가락이 아프면 나 또한 아프듯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도 아프다.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프면 어떻게든 손가락에게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아프면 우주에서도
자동차를 아프게 한 원인제공자에게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다.
바로 나에게.

그러니 자동차에게 분풀이를 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우주에게 진리에게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할 것이다.
무슨 소리인고 하니,
무정물 또한 인간과 유정물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존재이며, 존귀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유정무정 유형무형(有情無情 有形無形)’의 모든 존재가
다 불성(佛性)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무정이란 나무나 돌 같이 감각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형이란 형체가 없는 것을 말한다.
그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옛 스님들은
“푸른 대나무숲 모두가 진여(眞如)요,
피어 늘어진 노란 꽃은 반야(般若) 아님이 없다.”고 했다.

[보장론(寶藏論)]에서는
“불성은 모든 것에 가득하고 풀이나 나무에도 깃들어 있으며,
개미에게도 완전히 퍼져 있으며, 가장 미세한 먼지나 털끝에도 있다.
불성이 없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또 『莊子』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문답이 있다.

동곽자가 장주에게 물었다.
"도(道)라고 불리는 것, 그것이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장주가 말했다.
"그것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동곽자가 말했다.
"그것이 있는 곳을 지적해주십시오."
"개미에게 있다."
"그렇게 비천한 것에 있습니까?"
"작은 풀에도 있다."
"그것은 더욱 비천하지 않습니까!"
"벽돌이나 기왓장에도 있다."
"어떻게 그렇게 비천한 곳에 있을 수 있지요?"
"오줌과 똥에도 있다"
동곽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현대 과학에서도 유정물과 무정물을
정확히 구분 짓기 어렵다고 그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유정물, 다시말해 생명체는 DNA라는 복제 가능한 유전물질 지니고 있어
생식활동을 통해 자손을 만들어 내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무정물, 무생물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광우병의 원인체를 규명하면서 밝혀진
프리온이라는 원인물질이 유전자가 전혀 없는 단백질에 불과하지만
생물체내에서 증식하고 전파되어 확산된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생물과 무생물의 구분은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 때 비로소 생명과학자들은
생물과 무생물, 유정물과 무정물이란 경계가 따로 없음을 깨닫게 된다.
유정, 무정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분류이자 분별이었을 뿐이지,
본래 그렇게 나뉘어 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큰 한 바탕으로부터 비롯되어
여러 원인과 결과에 의해 만들어진 모양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밝힌 미국의 프루즈너 교수는 97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것은 단지 이름일 뿐,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이 더 귀하고 천하다고,
더 우월하고 열등하다고 나누어 놓았을 뿐이지,
그 본 바탕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아무리 하찮다고 생각되는 무정물일지라도
그로인해 내가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또한 그로인해 내가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옛 스님들은 무정물이 언제나 법을 설하고 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오직 성인들 뿐이라고 했다.

하찮다고 생각되는 발 아래의 꽃을
신비로운 마음으로 지켜보기 위해 고개를 숙임으로써
나에게 날아오던 화살을 피하게 될 수도 있고,
밤길에 차를 타고 가다가 불쑥 나타난
토끼 한 마리를 피하려다가 사고가 나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사건 하나가 내 운명을 갈라놓을 수도 있다.

내 운명을 변화시키는 것이
반드시 인간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하찮다고 생각했던 무정물이 내 생사를 결정지을 수도 있고,
내 운명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 우주의 모든 유정물과 무정물들이 모두
나와 연결되어 있다.

어느 하나도 하찮은 것이 없다.
더 귀하거나 천한 것은 없다.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소중한 것 처럼, 사람이 소중한 것 처럼,
똑같이 나무와 풀과 산과 흙과
심지어 자동차와 의자와 집과 컴퓨터 또한 소중하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처럼,
존경하는 스승 앞에 섰을 때처럼,
부처님 앞에 섰을 때처럼,
그런 마음으로 모든 존재 앞에 서라.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모든 존재 앞에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마음으로 다가 서라.

일체 모든 존재를 존중하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존귀하게 여기라.
이 세상의 생명 있고 없는 모든 존재에게
무한한 공경심으로 엎드려 절하라.
매 순간 세상 만물에게 기도하라.

유정물과 무정물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안다면,
그 모든 것들이 인연법의 진리 안에서
동등한 입장으로 나와 인연을 짓고 있음을 안다면,
세상에는 더 이상 존귀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고,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은 경이로운 변화를 맞게 된다.

이 세상을 향한 지고한 공경심!!
모든 존재를 향한 평등한 자비심!!
이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이 세상을 향한 마음이다.

학창시절에 원소, 원소주기율표라는 것을 본 적이 있지 않은가.
그 때 나는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간 학교에서 가르쳤던 것은 인간이 우월하다는 것이었고,
도저히 인간과 자연, 인간과 무정물은 하늘과 땅 차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인간과 자연, 유정물과 무정물을 이루는 근본 원소는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동일한 원소들이 ‘어떤 인연으로 모였느냐’에 따라
인간도 되고, 동물도 되고, 식물도 되고,
심지어 자동차도 되고, 빌딩도 되고, 집도 되고, 물도 된다.
이것은 유정물과 무정물이 그 어떤 차별도 있지 않다는 반증이 아닌가.
우리는 결국 동일한 것들이 모여서 겉모습의 차이를 만들어 낼 뿐이지,
근원적인 어떤 높고 낮거나, 귀하고 천하거나 하는 차별은 없다.

나는 때때로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호젓하게 벗어나
홀로 산 길을 걸을 때,
아니면 낯설고 인적 드문 여행지를 거닐 때,
그럴 때조차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그 어떤 ‘존재’와 함께 하고 있다는 미세한 느낌을 받곤 한다.

우리가 완전히 혼자 있을 때조차 사실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우주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고,
내가 발딛고 서 있는 대지와 흙과 함께 있는 것이며,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유정물, 무정물이
내 곁에서 따뜻한 도반으로 나를 지켜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이러한 통찰 속에서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공경심과 찬탄과 신비 속에 머문다.
어찌 이런 세상이 신비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사소하거나, 하찮거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이러한 통찰은 우리의 삶을
모든 존재를 향해 활짝 열려 있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향해 존중과 찬탄과 감사와 공경심을 갖게 해 주며,
모든 존재를 평등한 부처로써 섬기고 시봉할 수 있게 해 준다.

자동차를 타고 멀리 출장을 갈 때
자동차를 향해 동료의식을 가지고, 도반의식을 가지고
존중하며 감사하고 공경스런 마음을 보내라.
내 마음이 자동차를 향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향한
한없는 자비심과 공경심으로 넘칠 때
오늘의 운행은 안전하게 법계에서 자동차와 공동으로 도울 것이다.

설령 오늘 자동차 사고가 날 업이었다고 할지라도
모든 존재를 향한 깊은 존중과 감사와 공경심으로
조금 더 주의 깊게 운전을 함으로써
그 차량사고의 인연이 소멸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이나 식물도 사람 마음이 존중과 사랑과 자비로왔을 때
그 결정이 아름다워지고, 식물도 고요한 파장을 보낸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사람 마음에 따라 세포와 원소의 차원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그러니 모든 기도의 핵심인 감사와 존중과 공경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그 주위의 모든 유정물, 무정물은
아름답고도 청정한 파장과 세포와 결정을 보여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감사와 공경심으로 충만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이
욕심과 화와 질투로 가득한 이가 운전하는 차량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말해 우리의 마음자세가 운명을 바꾸고 업을 바꾼다는 말이다.
업장소멸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불교는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거부하지 않은가.
그 이유는 그 어떤 업일지라도, 그 어떤 과보일지라도
마음에 따라, 기도와 수행과 복덕을 얼마나 어떻게 짓느냐에 따라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받아야 할 업장을 뒤에 받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보다 미세하게 받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아침 공양을 하기 전에
물과 쌀과 야채와 수저와 식탁과 이 집에게 감사하라.
길을 걸으며 길가에 피어난 들꽃과
보도블럭과 신발과 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들에 무한한 공경을 보내라.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컴퓨터와 의자와 책상과 볼펜과 자판기와 책들과
이 모든 것들이 나를 도와주고 있음에 감사하라.

이처럼 무정물조차 나보다 못할 것이 없는
법계의 스승이며, 도반이고, 소중한 길벗이라면
하물며 사람들 사이의 차별이겠는가.

더 귀한 사람, 더 천한 사람,
더 중요한 사람, 덜 중요한 사람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아무리 위대한 성인일지라도,
바보나 정신병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목련존자는 신통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이 생에서의 인연이 다했음을 알고 이교도들의 돌에 맞아 죽었다.
그것이 바로 목련의 인연이었음을 바로 보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하찮게 느껴지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에게서 내 인생의 가장 큰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아주 나이 어린 어린이가 내 생명을 구해줄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원수였던 사람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니 사실은 내 인생에 귀하고 천한 사람은 없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거나, 좋거나 싫다고 정해진 사람은 없다.
모두가 똑같은 비중으로 존중받아 마땅한
내 삶의 부처요, 관음이고, 내 생명의 귀의처다.

귀한 사람에게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은 평범하다.
그러나 천한 사람에게 그 본질을 알고 귀한 대접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의 이치를 몸소 깨닫고 실천하는 수행자다.

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게
내 삶에 가장 중요한 사람에게 행하는 존중을 보내라.
나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사람에게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을 주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교수님들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아주 유명했던 큰스님께서 감동스런 법문을 해 주셨던 적이 있다.
법문을 들으며 꼭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었지만
스님을 둘러싼 교수님들과 교직원분들의 눈치도 보이고
나 같은 한 명의 대학생의 질문이 거슬릴 것 같아 망설이다가
어렵게 나오시는 스님을 붙잡고 여쭈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스님께서는 자비어린 시선으로 오래도록
내 눈을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눈으로 마주보아 주시면서
나의 질문에 스님의 모든 노력을 다해 답변해 주셨다.
그 때 나는 너무도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어린 내 마음은 스님을 향해 완전히 열려 있을 수 있었다.
어쩌면 아주 당연하지만 그 일은 오래도록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자리잡으면서
내 삶의 지침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 그 때 내가 했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은 기억에 없지만,
그 때의 그 존중받는 느낌과
나에게로 향한 그 스님의 집중과 자비와 눈빛은
두고 두고 세상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게 해 주신
살아있는 법문으로 나를 밝혀주고 있다.

살아있는 지혜라는 것,
깨달음의 실천이라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마음을 보내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존재에게
나의 모든 공경심을 바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모든 무정물들에게 조차
찬탄과 공경과 감사의 마음을 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수행자의 세상을 향한 차별 없는 열린 마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부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부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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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을 없애는 명상법

삶과 명상 이야기 2009/11/10 14:34 Posted by 법상

괴로움,
그것은 곧 즐거움이다.
즐거움이자 성장이자
도반이자 스승이며
내 삶의 반려자요 수행의 재료이다.

아픔, 괴로움, 서글픔, 상처, 고통, 몸부림, 실수,
좌절, 패배, 슬픔, 공포, 증오...

이런 것들은 곧 우리를 성숙하게 해 주고,
내적으로 성장하게 해 주며,
우리 삶을 더욱 풍성하고 깨어있게 해 주는
스승의 죽비와도 같고 한줄기 목탁소리와도 같은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한복판에서
고통과 좌절과 슬픔, 아픔을 마주하게 된다.

지나 온 삶을 돌이켜 보라.
생의 어느 한 순간에 내 존재를 스쳐 간
수많은 아픔과 고통과 좌절들이야말로
내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지금의 나를 나일 수 있게 해 주는 소중한 감로였고 동반자였다.

그 때 그 아픔이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을까.
모든 아픔들, 모든 고통과 좌절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내 삶의 성장과 성숙을 가져다 준다.

어떤 것들은 내가 충분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성장을 가져다 준 것도 있고,
또 어떤 것들에서는 도저히 그 아픔 속에서 무슨 깨달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지 않은 기억만을 가져다 준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기억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분명한 기여를 했으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인생의 어느 때가 되고, 내적으로 어느 정도 삶의 통찰이 깊어지게 되면
그 때의 그 아픔이 나에게 어떤 성장을 가져다 주었는지,
어떤 도움을 주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날이 있을 것이다.



아픔 없는 삶, 괴로움 없는 삶, 순탄한 삶,
우리가 꿈꾸는 삶은 그런 삶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그런 삶 속에는 깨우침도, 성숙도, 지혜도, 자비도 꽃피어나기 어렵다.

원하는 것을 다 가질 수 있고,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있는 삶이란
고작해야 우리에게 어리석음과 얕은 정신과 공허한 내면을 가져다 줄 뿐이다.

‘자녀를 망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원하는 대로 다 해 주는 것’
이란 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넘어져서 어지간히 피가 나더라도
‘일어나자. 일어날 수 있어.’ 하고 응원을 해 주셨을 지언정
호들갑스레 달려와서는 일으켜주고 옷을 털어주지는 않으셨다.
학교 다닐 때에도 빠듯한 용돈을 쥐어 주시며
알아서 잘 쓰라는 말 외에는 어디에 무엇을 썼느냐고 묻지도 않고 맡겨주셨다.
대학 때는 될 수 있으면 알아서 학비며 용돈도 벌어 쓰고
정 힘들 때만 이야기를 하라고 하셨고,
우리 자식들에게 대학 입학 이후에는
알아서 학교도 다니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해야지
그 다음에는 손 벌릴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못하도록 늘 말씀해 오셨다.

괴로운 상황에서, 혹은 인생의 그 어떤 문제나 좌절 속에서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주는 것은,
그것은 무관심이나 냉정 그 이상의 지혜롭고 자비로운 배려이다.



수행자의 삶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영적인 삶, 명상적이고 선(禪)적인 삶이란 것은
그 어떤 삶의 고난과 역경과 좌절 속에서도
그 문제의 뒤뜰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꽃봉오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삶에서 어떤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겉에 드러난 표면적인 상황만을 보기 때문에
쉽게 상처받고, 아파하고, 좌절하며, 괴로워 할 뿐이지만,
보다 영적이고 깨어있는 삶을 사는 이는
그 문제의 깊은 심연에서 피어나는 의미를 지혜롭게 관찰하곤 한다.

언제나 문제는
그 이면에 우리를 돕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삶에 노크를 한다.
우리의 삶에서 어떤 문제가 생겨났다면
그것은 우리가 삶에서 어떤 배울 것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의미를 깨달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의미가 너무 깊고 심오하여 깨닫지 못하는 수도 있지만
존재의 깊은 곳에서는 그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문제나 아픔을 만났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제나 그 상황, 그 문제를 전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며
따뜻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듬어 주고 포용하는 일이다.

그 깊은 의미를 찾고자 애쓸 필요는 없다.
내 깊은 곳에서 알아서 깨달을 것이고, 알아서 이끌어 갈 것이니
그저 믿고 맡기면서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보통 사람들이 삶의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그 문제를 향해 취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회피이며 둘째는 투쟁이다.

회피는 괴로움과의 대면에 대한 두려움이다.
괴로움을 피해 도망칠 곳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그러나 다른 관심사나 일을 찾아 나서면 잠시는 그 문제를 잊은 듯 해도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고 인연을 만나면 다시 되살아 난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괴로운 문제를 어떻게든 이겨보려고 애를 쓴다.
괴로운 문제와의 투쟁을 선포한다.
괴로움을 향해 화를 내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기도나 수행을 통해 괴로움을 이겨보려고 애를 쓰기도 한다.
물론 전자보다는 조금 더 낳은 방법일 수도 있겠지만
이 방법 또한 그리 좋은 방법은 아니다.

기도나 수행은 그 문제를 없애기 위해,
그 문제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무기 같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몸에 병이 들었을 때
그 부분을 창으로 찌르고 칼로 자르는 상상을 하면서
그 부분의 병이 사라지기를 바라기도 하고,
또 어떤 수련단체에서는 이 몸이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는 것이라며
무아를 증득하려면 몸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몸을 칼로 자르고 폭탄으로 터치는 등
몸을 헤치는 각종 방법을 동원해 상상으로 몸을 죽여 없애라고 권하기도 한다.

이 두 방법은 모두 지혜로운 중도의 길이 아니다.
부정하면서 회피하고 도망치려는 것이나
그 문제와의 투쟁을 통해 이겨내려는 것 모두 극단의 방법일 뿐이다.



삶에서 부딪치는 그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지혜로운 중도의 길은
회피하거나 투쟁하는 양 극단을 떠나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止) 가만히 지켜보는 것(觀)이다.
아픔이 오면 아픔이 오도록 그저 내버려 두라.
아픔이 내 존재 위를 스치고 지나가도록 그저 놔두고
다만 어떻게 왔다가 어떻게 스쳐지나 가는지를 묵연히 바라보기만 하라.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어 놓고 나면
아픔으로부터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싸워 이기거나
둘 중 하나의 방법을 쓸 수 밖에 없지만,
아픔을 나와 둘로 나누지 않고 내 존재의 일부분으로,
내 삶의 하나로써 가만히 포개어 놓고 나면
더 이상 아픔과 싸울 필요도 도망 칠 필요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아픔과 괴로움과 좌절을 다루는 중도적인 수행방법이다.

사실 수행의 길, 명상의 길, 영적인 구도의 길은
괴로움이 없고 항상 즐거움만 있는 그런 길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상을 하면
괴로운 일이 사라지고, 장애가 사라지고
항상 즐거운 일만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오히려 구도의 길 위에는
온갖 가시밭길이 놓여 질 수도 있고,
일반인들 보다 더 큰 아픔과 좌절과 슬픔을 겪어야 하는 수도 있다.
아픔과 괴로움을 대항해 싸우려 하지도 도망치려 하지도 않으니
오히려 그들이 물밀듯 밀려들어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구도의 길을 돕기 위한 법계의 배려요,
신의 사랑이고, 붓다의 자비이다.
지혜로운 이는 문제 속에서, 아픔과 좌절 속에서
붓다의 자비로운 이끎을 보고 신의 사랑스런 도우심을 본다.



그래서 때때로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괴로운 상황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더욱 공부의 한 가운데로 몰아넣고
자신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런 괴로운 상황 속에서 자신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를 지켜본다.

실제로 티베트에서는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괴로움을 청하는 축원을 암송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런 수행을 통해 지혜와 자비와 인내와 정진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럴진데 우리의 삶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이 생겼다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회피하고 투쟁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
오히려 그 때를 소중한 공부의 기회로 알아야 한다.
내 삶이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내 정신의 지평이 한층 넓어질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알아야 한다.

물론 즐거운 일도 마찬가지다.
괴로움이 공부의 재료이듯 즐거움 또한 공부의 재료가 된다.
즐거움이 오더라도 거기에 집착해 더 많은 즐거움을 쟁취하려 애쓸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고행을 위해 즐거움을 죄다 내다버릴 필요도 없다.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다만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없고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인생에서는
‘어떤’일이 일어날 뿐이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 일어나는 법은 없다.

이 모든 ‘어떤 일’들은
항상 부처님의 자비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써
내 존재 위에 살며시 내려앉았다가 인연이 다하면 살며시 돌아 갈 뿐이다.

내 삶에는 괴로운 일도 없고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어떤 일’들이 우리를 돕기 위해
우리의 정신의 지평을 넓혀주기 위해
우리의 심심한 일상에 지혜의 기회를 던져 주기 위해
꿈처럼 환영처럼 잠시 그렇게 왔다 그렇게 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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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그램과 우주, 수행

     - 우주의 생성원리와 본질적 수행

.

                  - '09. 6. 21 일요법회

                            - 법상스님 설법

 

 

 




과학으로 본 시크릿, 과학으로 본 불교 

 

홀로그램의 이해

아마 여러분들께서 홀로그램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홀로그램이란 홀로그래피에 의해 생성된 어떤 대상 물체의 삼차원 입체상을 말하는데요, 아마도 때때로 현실의 대상과 똑같이 생긴 삼차원의 입체영상 같은 것들을 보았던 그런 기억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물질과 똑같이 생겼는데 막상 가서 만져보면 그저 투영된 허상일 뿐인 홀로그램 입체상 말입니다. 이 홀로그램을 어떻게 하면 이해하기 쉬울까 생각해보다 아주 쉽게 나온 한 가지비유가 있어서 그걸 한번 설명해 드릴까 합니다.

우리가 아주 큰 냄비를 하나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주 큰 동그란 냄비가 하나 있습니다. 물이 담겨 있는 냄비인데 거기에다가 세 개의 조약돌을 세 곳에 정삼각형으로 동시에 탁 떨어뜨립니다. 동시에 조약돌 세 개를 냄비에다 탁 떨어뜨리면 이게 풍덩 떨어지면서 파장을 형성하겠지요. 세 개가 나름대로 파장을 형성해 나간다 말입니다. 그 파장이 냄비 끝까지 나아가겠지요. 이것이 만약 호수였다면 그 파장은 어쨌든 호수 끝까지 퍼져갈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세 개의 파장이 서로 서로 간섭현상을 이루어낸다 말이지요. 그렇게 물의 표면에는 간섭현상의 무늬가 형성되는데, 우리가 간섭현상이 이루어 질 때의 그 냄비 물의 가장 위의 표면, 돌은 이미 떨어졌고 그 위 냄비의 표면을 얇게 급속으로 냉각을 시켜서 얼린다고 생각을 해 본단 말입니다.

급속으로 얼려서 냉각을 딱 시켰습니다. 냉각시킨 냄비의 물 표면만 얇게 잘라내 하나의 얼음판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물결치는 간섭현상 무늬의 얼음판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지금 우리에게 있는 것은 얼음판 하나뿐입니다. 조약돌이 어디에서 어떤 지점으로 몇 개가 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우리는 알 수가 없고 단지 그 얼음판 하나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얼음판의 한쪽 편에서 빛을 쏘아주면 반대편에서 빛을 바라볼 때 무엇이 나타날까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단지 얼음 판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곳에 빛을 쏘아 주었을 때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타나느냐하면 애초에 떨어뜨렸던 조약돌 세 개가 등장하게 됩니다. 어느 지점에, 어떻게 생긴 조약돌이, 정확히 세 개가 떨어졌다는 것까지의 모든 정보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조약돌의 입체상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빛을 쏘아 주었더니 분명히 조약돌은 없고 얼음판만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조약돌의 입체상을 나타내 준다는 말입니다. 그 말은 겉에 있는 얼음판이 단지 간섭무늬의 파장의 형태일 뿐이지만 그 조약돌 세 개가 떨어졌던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간섭무늬는 어떤 정보의 형태로써 그 판에 기억되고 저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이것도 참 신기한 노릇인데 이제 이 얼음판을 팍삭 깨어 봅니다. 얼음판이 완전히 조각이 나 버렸어요. 조각이 나 버렸는데 그 조각난 얼음판 중 하나의 작은 조각을 들고서 동일하게 똑같이 한쪽에서 빛을 쏘아 줍니다. 그 반대편에서 무엇이 보일까요? 아까 동그랬던 원판과 동일한 현상이 벌어집니다. 원래의 둥그런 큰 원판을 볼 때와 똑같이 작은 하나의 조각만을 가지고 빛을 쏘아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쪽에 보이는 것은 처음과 똑같이 정확히 세 개의 조약돌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져 보인단 말이지요.

 

우주가 하나의 홀로그램 허상

이게 바로 조금 쉽게 홀로그램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인데요. 다시말해 어떤 간섭무늬의 파장은 정확하게 그 입체의 정보를 기억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심지어 파장 전체가 아니라 그 파장의 일부분에 어떤 한 부분의 조각만 가지고도 그 전체의 정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것이 홀로그램을 이해할 수 있는 조금 쉬운 방법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현대 과학에서는 이러한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 영상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 물질 우주가, 이 세계가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즉 홀로그램의 삼차원 입체영상이 실재인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실재가 아닌 환영이요 허상이고 마야이듯이 이 세상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무아(無我)나 금강경에서 말하는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과 일치하는 견해인 것입니다. 이 세상이 겉으로 보기에는 실재하는 것 같고, 물질 우주가 실재로 존재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이며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아 비실체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홀로그램에서 보자면 이 우주가, 나와 여러분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가, 이 세상 모두가 형성된 것이 사실은 그것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그램이라는 어떤 비실체적인 것의 투영이요 허상이라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파동, 파장 속에 다양한 정보를 저장했다가 그 정보가 입력된 파장이 마치 실제 존재하는 현실의 모습인 것처럼 투영시켜 보여주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우리 몸도 쪼개고 쪼개어 들어가면 분자, 원자, 양성자, 중성자, 원자핵, 전자 해서 계속 쪼개어 들어 가 보면 결국 파동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물질 우주의 모든 존재는 파동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파동은 홀로그램처럼 모든 정보를 저장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 더 확장해 보면, 아까 파장을 담고 있는 얼음판 조각 하나에서 조약돌 3개의 입체상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조각과 파장 하나에서 전체를 볼 수 있듯이, 나라는 존재 속에서 이 우주 전체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 뿐만 아니라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 어떤 물질이든, 사람이든, 생명이든, 공간이든 그 모든 것은 다양한 형식의 파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 속에서 온 우주의 모든 전체 정보를 다 볼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모든 파장은 우주 끝까지 전해져 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일으키는 생각의 파장 하나 조차 우주 끝까지 전해집니다. 그렇기에 우주는 그 모든 파장의 정보들을 한 조각 얼음이 그랬듯이 그 파장 안에 전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우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서 우주가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다 쫒아 다니면서 낱낱이 조사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연구하고 그래서 이 우주의 모든 이치를 깨달으신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자리에 앉아서 내 마음자리 하나 깨달았더니 우주 전체를 깨닫게 되었다고 그러잖아요, 그것과 다르지 않은 겁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 속에서 전체를 볼 수 있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하나가 전체를 내포하고 있다는 홀로그램의 이치를 주위에서도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몸이 아프다 그랬을 때, 손만 딱 보면 손바닥 안에 우리 몸의 오장육부가 다 들어 있고 연결 되어 있다 그러잖아요. 그래서 수지침을 할 때도 몸의 어느 곳이 아프든 손바닥과 손가락에 침을 놓으면 그 몸의 아픈 부분도 곧 회복이 됩니다. 어릴 적에 언치거나 소화가 잘 안된다 싶으면 어머님께서 손의 특정부분을 눌러 주심으로써 금방 치유되는 것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손바닥 안에 우리 몸 전체가 고스란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신도님 중 한 분은 귀를 연구하는 분이 계신데요, 귀, 작은 귀 요거 하나에 우리 몸을 구성하는 머리, 몸통, 사지와 그 속에 들어 있는 각종 장기에 해당하는 혈자리가 분포되어 있고, 오장 육부가 다 담겨있기 때문에 귀만 보면 그 보살님은 어지간히 다 아신다는 겁니다. 귀의 모습은 어머니 자궁 내에 거꾸로 들어 있는 태아의 자세와 같아 인체의 축소판처럼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이 보살님께서는 그 사람의 몸 상태가 어떤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체질은 어떤지, 정력은 어떤지, 심지어 성격이나 심성은 어떤지 여부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하시데요.

또 다른 예로 DNA라는 것도 보면 하나의 어떤 작은 DNA속에 나라는 존재 전체의 모든 정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도 이론적으로 한다면 나라는 존재를 고스란히 다시 복재 해 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홀로그램에서는 이 세상이 고스란히 홀로그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에게 보여지는 모든 물질 세계는 사실 실체적인 물질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파장, 파동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물질은 입자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우주는 입자라는 것은 사실은 존재하지 않고 항상 파동의 형태로만 있다가 우리가 그것을 관찰했을 때 관찰하면서 입자라는 것을 원하고 요구할 때 그때서야 비로서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고 얘기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존재는 항상 수많은 가능성을 가진 파동의 모습으로 존재하다가 우리가 관찰 했을 때 비로소 입자의 모습을 나타내 준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현실세계의 모든 것은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공간이나 모든 물질이나 일체 모든 것들 일체 만유는 파동의 형태로 정보를 저장하고 있다 이겁니다.

사실 조금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이 우주에 파동 아닌 것은 없습니다. 생각의 에너지도 하나의 파동이구요. 라디오 전파 같은 것도 하나의 파동이고 전파, 전자파, 전자기파, 마이크로파, 음파, 지진파, 중력파, 빛 등 모든 것이 파동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양한 파동 파장들이 이 우주를 형성시키는 모습인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물질도 딱딱한 물질이 아니라 파동이 끊임없이 진동하는 그것들이 다만 물질처럼 우리 눈에는 보일 뿐인 것이지요. 홀로그램의 입체상처럼 진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인 것입니다.

허상이면서 그 허상을 이루는 하나의 파동은 이 우주의 전체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 속에 우주 전체의 정보를 담고 있고, 한 티끌 속에도, 심지어 우리가 무정물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속에도 우주의 모든 정보가 고스란히 그 속에 담겨 있다, 그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과학적인 증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는데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적 사실과 실체가 없다는 무아, 공의 가르침, 일즉일체다즉일이나 일미진중함시방이라고 하는 화엄경의 가르침과도 일맥 상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비국소성과 홀로그램, 그리고 연기법

이러한 우리가 우주 전체와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하는 연기적인 사실을 양자물리학의 비국소성, 비국지성이라는 말로도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잠시 비국소성과 홀로그램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온 우주의 모든 존재가 연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몇몇의 실험과 원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일전에 『물은 답을 알고 있다』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의 물의 결정 연구에서 걸프전쟁이 있었던 날 모든 물의 결정이 찌그러들었던 실험이나, 『식물의 정신세계』에서 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멀리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교통사고가 날 뻔하던 바로 그 순간에 연구실에 있던 식물의 검류계 단추가 파르르 떨었던 실험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실험에서 살펴보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물 한 방울 조차 지구 반대편에서 있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식물 또한 자신에게 물을 주고 키워주던 주인이 교통사고가 나던 바로 그 순간의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물리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증명되고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또 하나의 실험을 살펴보지요. 물리학자 라즐로는 거짓말탐지 전문가인 백스터와 함께 한 실험에서 진주만 전쟁 당시 해군 포병으로 참가했던 피실험자들 입에서 백혈구 세포를 채취하여 몇 십, 혹은 몇 백 k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겨 배양체에 거짓말 탐지기를 부착해 실험한 결과, 피실험자들에게 진주만 기습 TV 프로를 보여주자 마자 마치 피실험자에게 부착된 것처럼 세포들이 격렬하게 반응을 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이 실험 또한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와 입자들 하나 하나는 공간적인 이격에도 불구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증명해 주는 수많은 실험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수많은 실험에서 이러한 연기적인 연결성은 입증되었으며, 수많은 물리학자, 과학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연결성을 밝혀내었습니다. 이처럼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결시키는 상호작용의 능력 혹은 특성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비국소성(non-locality)’, ‘비국지성’ 혹은 초공간성 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국소성은 공간적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을 넘어서서 시간적으로도 하나의 장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봅니다. 이것이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상의상관성이라는 연기법의 세계, 일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과학을 통해 증명해 보여주는 아주 작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야기 한 김에 조금 더 나아가 보지요. 이처럼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근본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을 영점장(zoro-point energy) 혹은 정보장(field of information)이라고 말합니다. 영점장이란 양자물리학의 주요개념으로 허공이 텅 비어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비국소성을 가능하게 하는 온갖 정보와 능력, 특성을 다 갖추고 있으며 우주의 모든 것을 연결시키는 장일 뿐 아니라 시간 공간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장이기도 합니다. 이 영점장, 정보장을 불교식대로 표현하자면 연기법이라는 상의상관성, 업보, 인과응보가 펼쳐지는 장인 법계(法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법계 즉 영점장은 온 우주에 꽉 차 있으며 모든 물질, 정신, 세포, 원자, 유전자 등 일체 모든 세계와 존재계에 두루 가득 차 있는 근원적인 차원의 에너지 장이자 정보의 장인 셈입니다. 영점장으로써 일체 모든 존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완전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요. 또한 앞서 말했듯이 이 영점장에는 공간적으로 이 우주의 모든 정보가 가득 차 있으며, 시간적으로 이 우주 역사와 인간 개개인의 모든 역사적 정보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그 어떤 물질이든, 세포든, 허공의 공간이든, 마음이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아주 작은 일부분 조차 이 우주의 시공을 초월하는 일체 모든 정보, 업, 역사 등 그 모든 총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1982년 알렌 아스펙트(Alain Aspect)가 파리에서 행한 실험에서 쌍둥이 광자가 우주 끝에서 다른 끝까지 연결되어 있음이 증명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를 머금고 있다는 일미진중함시방의 이치가 영점장과 비국소성의 원리를 통해 양자물리학에서 증명이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비실체적 현실세계가 영점장이라는 바탕 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 모습이라고 양자물리학에서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홀로그램 영상이라는 물질현실은 서로 서로가 따로 따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하나의 파동 속에 우주 전체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구조를 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을 『홀로그램 우주』라는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로그램의 모든 부분들이 전체상을 담고 있는 것과 똑같이 우주의 모든 부분이 전체를 품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접근할 방법만 안다면 왼손 엄지손톱 속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 우리는 클레오파트라가 카이사르를 처음 만나는 장면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왜냐하면 원리상으로는 모든 과거와 미래를 시사하는 모든 내용들이 시공간의 미세한 영역 구석구석에도 깃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낱낱의 세포들도 그 속에 우주를 품고 있다.’

 

업사상과 양자물리학

불교의 업사상을 보면 과거 전생에 지은 업을 이번 생에 받는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실 또한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해 우주적인 일체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근원적인 장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강풍이 불어 빌딩위에 메달려 있던 간판이 떨어졌고, 그 간판에 맞아 한 사람이 죽었다고 쳐 봅시다. 그것은 업입니까 아니면 우연입니까? 그 또한 업이라면 어떻게 그 사람이 지금 바로 그 순간 죽어야 할 업을 간판이 어떻게 알고 바로 그 순간에 정확히 그 사람을 맞출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필 바로 그 순간에 강풍이 불어 간판을 휘청이게 했으며, 또 어떻게 간판을 지탱하고 있던 쇠고리가 바로 그 순간 끊어질 수 있었겠습니까? 이 모두가 철저한 인과응보를 완전히 계산하고 있는 영점장의 일이요, 법계의 계획이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영점장, 정보장의 개념에 의하면 사람 뿐 아니라, 모든 물질 세계의 모든 원자 하나 하나, 그리고 이 우주의 모든 존재, 비존재의 일체 우주가 고스란히 영점장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홀로그램의 영점장, 정보장에는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의 정보가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그 안에는 인간 개개인의 과거 전생, 그 전생을 넘어 시간적인 모든 정보와 업과 행위들의 정보 즉 업장이 낱낱이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간판도, 바람 한 점도, 간판을 지탱하는 쇠고리도 물질적, 정신적 일체 모든 존재는, 이 우주의 모든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와 일체 모든 존재의 업과 행위와 개개인의 업장까지를 모두 다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목숨을 다해야 하는 그 업장에 의해 우주 법계는, 즉 영점장에서는 바로 그 순간 강풍이 몰아치게 했고, 그 간판 또한 바로 그 순간 바로 그 자리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우주적 영점장의 정보들의 정확한 운행 법칙에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 바로 그 순간 불어 온 강풍과 간판을 지탱하던 쇠고리와 간판, 이 모든 것이 그 안에 시공을 초월하는 우주적 정보인 파장의 형태로 담겨 있다가 바로 그 순간 법계의 인과응보적인 계획에 의해 모든 정보가 정확히 움직여 준 것입니다. 사람 개개인 뿐 아니라, 동식물과 심지어 돌과 건물 등의 물질적인 모든 것들 조차 전부 영점장이라는 시공을 초월하는 정보의 장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나라는 존재 안에는 이 우주 전체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일체 모든 정보가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적 공간적인 일체 모든 정보들을 이 자리에 내가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분명히 보는 분을 우리가 부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모든 정보를 완전히 자유자재로 꺼내어 쓸 수 있고, 꺼내 볼 수 있는 그 상태를 깨달음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 발 더 나아가기 위해 파장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지요. 이 파장을 잘 사용하는 것으로 박쥐가 있는데요. 박쥐는 음파 탐지기 같은 기능을 몸 속에 가지고 있어서 높은 진동의 소리를 밤에 계속 발산을 한다고 합니다. 그 진동의 파장을 방출하다가 박쥐의 먹이가 되는 곤충이 그 파동에 감지가 되면 그 소리 파장이 곤충에게 전해졌다가 되돌아오는 반작용의 파장을 박쥐가 감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아, 저기에 내가 먹을 거리가 있구나’, ‘내가 먹을 만한 것이 있구나’ 라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벌레가 얼마나 큰지, 어느 정도의 속도로 날아가고 있는지, 지금 어디쯤 날아가고 있는지 등의 정보들을 그 되돌아오는 파장을 통해서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 박쥐는 파장이 전달 되었다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파에 의해서 그 벌레나 곤충이 얼마나 맛있는 것인지 맛이 없는 곤충인지 조차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파장만 가지고도 파장 안에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고 앞에서 얘기했는데요 박쥐 같은 경우는 일부분 그 파장 안에 담긴 정보를 해석하는 능력이 주어졌다고 볼 수가 있는 거지요.

아까 냄비의 얼음판이 파장속에 모든 정보를 담고 있다고 그랬고 이게 이차원인데 삼차원으로 본다면 우주의 모든 공간속에 온 우주의 시간적 공간적인 모든 존재, 모든 사람, 모든 역사, 모든 어떤 정보가 총체적으로 다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제가 업보 이야기를 했지요. 지나가던 간판이 갑자기 강풍이 몰아쳐서 간판을 달고 있던 쇠고리가 떨어졌고 갑자기 거기에 맞아 죽었다 했을 때, 그 모든 것이 그 간판을 메달고 있던 그 쇠고리나 강풍이나 간판이나 이 모든 것이 정확하게 모든 물질속에는 시간적인 총체적인 모든 업의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처럼 이 우주 인류 모든 생명들이 지어왔던 업장, 업의 정보라는 총체를 우리 주위의 모든 물질세계나 생명, 공간, 바람, 꽃 한 송이나 나무 한 그루, 세포 하나와 원자, 전자 하나에 조차 그리고 저 하늘의 별 조차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 전체에 그 업이라는 것은 기록 되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아뢰야식에만 기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업식이 이 우주 전체에 기록 되어 있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남들 몰래 혼자 저 깊은 산속에 가서 아무도 안 볼 때 죄를 지었다고 죄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우리의 오판이요, 판단 착오인 것입니다. 사실은 주변의 일체 우주법계가 그대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설사 아무리 완벽한 완전 범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 시공이 있고 법계가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물질세계를 창조한다

여기까지 잘 따라 왔나요? 그럼 다음 진도를 나가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파장이 이 세상과 우주를 만들어 내는 근간이고 그 파장 속에 정보가 담겨 있다면 그러면 그 파장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지겠는가 이것이 궁금해집니다. 그 파장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알면 우주의 어떤 원리를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다시 양자물리학으로 넘어 가 봅니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했던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임이 밝혀졌다고 했습니다. 원자보다 작은, 원자를 구성하는 기본입자인 아원자들은 고정된 물질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여러 가능성 즉 하나의 잠재적인 가능성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비춰졌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 공(空)의 원리의 일부를 과학에서 밝혀낸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물리학자들은 아원자를 단지 입자나 파동의 어느 한 쪽으로 분류해서는 안 된다고 보며, 그 양쪽에 속해 있는 단일범주의 어떤 것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양자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일부 물리학자들에 의해서 이러한 양자들은 관찰되고 있을 때는 입자로 보이지만, 관찰되지 않을 때는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즉 ‘양자가 입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보고 있을 때’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파동으로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관찰자가 보고 있을 때는 물질이지만 보고 있지 않을 때는 에너지인 것이지요.

이것은 곧 관찰한다는 그 행위 자체가 양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과학자들이 어떤 특정 전자를 찾을 때마다 관찰자가 기대하던 바로 그 위치에 나타나곤 했습니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관찰자가 어떤 의도와 생각을 일으키기만 해도 그 입자는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반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물질적인 대상은 그 자체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이 실험에서 물질적인 객관적 대상이 사실은 그 대상을 바로 보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 변하는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물질, 사물을 구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그것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라는 주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 사물을 보는 내가 바로 보이는 사물을 구성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아주 충격적이고도 신선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쉽게 말해 이 세상의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다는 겁니다. 우리의 의지, 의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 의업, 한 생각이 물질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결정적인 요인이더라는 겁니다. 다시말해 물질은 고정된 물질일 뿐이지 내 의지로 물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싶겠지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단순한 기계 조차 우리가 그 기계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며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낼 때와 자비로운 에너지, 감사와 사랑의 말을 보낼 때는 전혀 그 결과의 양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예를들어 자동차를 타고 가는 운전자가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릴 때와 긍정적이고도 밝은 에너지로 넘칠 때 자동차가 사고 날 확률, 자동차가 고장 날 확률은 전자가 훨씬 높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날지라도 집 앞에 다 도착해서 사고가 날 것이냐, 아니면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중에 고장이 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따라, 의지와 마음 씀에 따라 달라진다는 과학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마음하나 일으켜서 물질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것이 과학에서 명백하게 밝혀졌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더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을 병에 걸렸거나, 큰 빚더미에 올라앉았거나, 큰 괴로움 속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아름다운 사람을 보더라도 그것이 아름다움으로 다가올 수 없을 것이겠지요. 그 사람에게 보여지는 세계는 전혀 아름답지 않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와 비판적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보는 세상은 언제나 불평불만이 가득할 것이며, 그러한 부정적 에너지와 불평 불만과 비판의 습관은 계속해서 그 사람 앞에 나타난 물질세상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이 부정적이기 때문에 세상이 부정적으로 보였다면 비판적인 습관이 계속될수록 이제부터는 그 부정적인 마음이 세상을 어둡게 변화시키고, 이 우주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임으로써 그 사람앞에 나타난 물질세계가 부정적이고 혼탁하며 온통 좌절과 고통스런 현실로 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앞에서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불교의 연기법과 영점장, 홀로그램, 비국지성이라는 이론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 안에, 심지어 나의 모든 세포 하나 하나에도 이 우주적인 시공을 초월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과 힘이 고스란히 주어져 있으며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으키는 의도적인 생각 하나 하나가 고스란히 내가 바라보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물질의 특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했단 말입니다. 즉 내 마음 하나로 내 밖에 있는 물질세계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그 세상을 창조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일체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어 냈다는 화엄경의 가르침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일으키는 마음, 생각, 의도 하나 하나에 따라서 이 우주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를 내가 얼마든지 가져다 쓸 수 있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우주는 영점장으로써, 연기법으로써 완전히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나와 연결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을, 또 내 안에 영점장의 형태로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보면, 이 물질적인 세상은 원자로 만들어졌고, 그 원자는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입자와 파동으로 바뀌며 그것은 물질이기도 하지만 에너지의 특성으로 언제든 변환될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그 가능성의 장에서는 원자를 관찰하는 자의 주관성이 곧 그 원자와 물질을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질과 에너지, 입자와 파동은 언제든 서로서로 변환될 수 있습니다. 즉 우리의 마음, 생각, 의도가 곧 현실의 물질세계화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유명한 심리학자 브루노 클로퍼의 보고에 따르면 도저히 살 가망성이 없는 림프절 말기 암이었던 라이트라는 환자에게 획기적인 신약을 시험 복용 시켰더니 라이트는 3일 만에 걸어다니더니 10일만에 퇴원을 했고 두 달 후에는 완전히 암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신약이 사실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바로 병이 똑같이 재발이 되어 다시 입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가 먼저번 것은 잘못된 약이었고, 이번에 고농축된 새로운 신약을 구입했으며 이것으로 치유가 가능하다고 확신을 심어 준 뒤 환자에게 약이 아닌 그저 증류수를 주사했습니다. 그런데 극적으로 종양 덩어리가 녹아내리고 가슴의 복수도 사라졌으며 두 달 간 아무런 증세도 보이지 않을 만큼 회복이 빨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찬가지로 이 약이 암 치료에 효과가 없다는 것이 의사협회로부터 발표가 되자마자 암은 다시 발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플라시보 효과입니다.

마음에서 약을 먹었으니 나을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 실제 약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의 믿음 때문에 낫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플라시보 효과는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보다 훨씬 큰 작용을 하며 광범위한 거의 모든 병에 적용된다고 합니다. 병으로 곧 죽을 것이라고 믿는 생각과 이제 약을 먹었으니 분명히 나을 것이라는 생각 사이에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하며, 후자 쪽으로 마음을 굳게 바꿈과 동시에 내 몸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 암 세포 하나하나가 완벽하게 치유의 작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포의 변환을 완벽하게 도울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마음이 물질을 변화시키고, 마음이 우리 몸의 모든 세포를 기적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물론 그 원자나 물질적인 세상 또한 영점장이라는 근원적인 바탕의 장 위에 그려진 환영과도 같은 것입니다.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하나의 물질이 아니라 영점장의 근원 바탕에 펼쳐진 하나의 총체이자 정보체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이루는 물질세계를 내 의지에 따라서, 내 마음으로써 움직일 수 있고, 변화시킬 수 있으며, 창조할 수 있고, 때에 따라서는 영점장의 모든 정보들을 내가 끌어당겨 쓸 수 있기도 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그러면 이렇게 내 의식으로서, 내 의지로서, 내 생각으로서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는데 그 마음이 세상을 창조하는 힘의 크기는 얼마나 될까요? 즉 의식으로써 파동을 만들어 낸다고 했을 때 그 파동, 그 파장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가 될까요? 만약 의식으로 만들어내는 파동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힘의 크기를 측정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음, 우리 의식이 가진 창조 에너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측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질을 쪼개면 쪼갤수록 우리는 에너지가 더 작아지고, 덩치가 큰 것일수록 더 큰 에너지를 가지게 될 것 같잖아요. 그런데 입자가 작으면 작을수록, 더 미세하게 쪼개면 쪼갤수록 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그럽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을 쪼개서 기관, 기관을 쪼개서 세포, 세포가 분자가 되고 원자로 쪼개지고 전자와 양성자, 중성자로 쪼개지고 그리고 또 양자로 혹은 보존이니 중간자, 광자, 레톤 등 물리학에서는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부분까지 쪼개놓은 것을 이렇게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무엇으로 붙이든 간에 쪼개고 쪼개서 단위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그 안에 든 에너지 힘의 양은 무한하게 커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자력 발전소니 원자탄이니 하는 것을 생각해봐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원자의 힘,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힘, 그 힘만 봐도 이것이 얼마나 어마어마 한지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심지어 그 원자핵이 가지고 있는 원자력이나 원자탄, 이런 원자핵의 힘보다 더 작은 단계인 양자가 가진 힘을 살펴보면 그것에 비해 원자핵의 힘은 아주 미미하다 싶을 정도로 작다는 것입니다. 더 어마 어마하게 큰 힘을 그 양자는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물질은 쪼개고 쪼개면 쪼갤수록 작은 입자가 되고 작은 입자가 될수록 더욱더 어마 어마한 힘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더라 이말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완전히 쪼개서 입자나 파동으로 바꾸게 된다면 그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어마 어마하다는 것입니다. 이 우주는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파동이 가지고 있는 힘이 이만큼 어마 어마하다는 거지요.

이 힘을 양자물리학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1cm³라는 작은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파동의 힘이 1094erg라고 하는데요, 이것이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에 담겨있는 전체 힘 보다 다시말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우주 속의 모든 물질 에너지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 많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1cm³ 안에 들어 있는 파장의 힘이 우리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한 어마 어마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 파장이라는 것은 우리 의식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움직인다 했습니다. 창조된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떤 생각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어떤 생각을 일으켰을 때, 그것은 부정적인 파장이든 긍정적인 파장이든 내 안의 어떤 에너지이자 파장의 형태로 이 우주 끝까지 펴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화를 한번 버럭 냈을 때 그 부정적인 에너지의 파장이 우리가 아까 호수에서 돌을 던졌을 때 처럼 파장이 점점 넓게 퍼질 것 같잖아요. 그런데 내가 생각이라는 에너지를 탁 하나 일으켰을 때 사실은 지금 일으킴과 동시에 우주 끝까지 이미 퍼져나갔다고 말합니다. 파장이 일어남과 동시에 우주 끝에 이른다는 겁니다. 이 말은 조금 있다가 뒤쪽에서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어쨌든 이처럼 내가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온 우주 전체에 그 생각의 파장은 영향을 미친다는 겁니다. 내가 부정적이고 성내는 마음, 욕심, 화, 증오, 질투 이런 마음을 일으킬 때 그 파장은 1094erg의 힘으로서 이 우주에 알려진 물질 전체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의 더 큰 힘으로 시간의 힘을 빌지 않고서도 즉각 우주 끝까지 미쳐 나간다 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쉽게 쉽게 생각하지만, 쉽게 쉽게 화도 내고, 쉽게 쉽게 싸움도 하고, 쉽게 쉽게 어떤 사람을 생각으로 죽이고 살리고를 반복하거나, 쉽게 생각으로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세상을 마구마구 창조해 내지만, 사실 우리가 그렇게 쉽게 쓰고 있는 생각이라는 그 에너지가 얼마나 큰 에너지이고 더욱이 생각을 일으킴과 동시에 이 우주전체 끝까지 가 닿음으로써 그 에너지가 바로 내 삶을 창조해 내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엄청난 일들을 무의식인 생각으로 벌이고 있는 것입니까? 이 엄청난 일을 벌이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을 조심해서 쓰지를 못해요. 대충 대충 생각하고, 쉽게 쉽게 생각하고, 너무 안이한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관하고, 말을 관하고, 의지를 관찰하며, 느낌을 관찰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깨어있는 정신으로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난 왜 이렇게 가난하지, 난 왜 이렇게 부족하지, 난 왜 이렇게 불쌍하지"라고 한 생각 일으킨 것이 어머 어마한 파장으로 실제 물질 세계에 가난한 삶을 창조해 내고야 말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가난을 창조하느냐 하면 1094erg라는 무지막지한 힘으로서 내 삶을 급격하게 창조해 내는 거란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 마음의 능력은 무한한 것입니다. 일체유심조, 일체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들어내는 것이지요. 그럴진데 마음 하나 바꾸어서 운명을 바꾸는 것이 왜 불가능합니까? 업을 뛰어넘는 것이 왜 불가능해요? 인간이 우주의 이치를 깨달아 붓다가 되는 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같은 생각의 주파수를 공명시킨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 재미있는 공명의 법칙이라는 것을 소개 해 볼까 합니다. 이 우주는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같이 공감한다 그럽니다. 같은 주파수의 파장은 함께 공명을 한다는 것이지요. 쉽게 말해서 바이올린 두 개나 기타가 두개가 있다고 했을 때 도, 래, 미 같은 어떤 하나의 음을 탁 튕겼을 때 이것이 바이올린 두 개가 같이 조율이 되어 있다면, 이쪽 하나의 음을 튕겼을 때 동일한 음이 저 쪽에서도 같이 움직이는 현상이 벌어지는데 이것을 공명한다고 그럽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보면, 우리 벽에다가 자명종 시계를 이쪽 벽에 하나 저쪽 벽에 하나, 또 다른 벽에 하나 이런 식으로 벽면마다 시계 추가 움직이는 자명종 시계를 갖다 놓았다 말입니다. 그리고 전부 다 다르게 추를 움직이게 시켰어요. 어떤 건 왼쪽으로 가고 하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다르게 움직였단 말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들어와서 그것을 살펴보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그 자명종의 추는 모두가 다 정확히 같은 방향, 같은 움직임을 띄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같은 자명종이고 시계추의 무게라거나 길이 등이 동일한 같은 조건이라면 말이지요. 처음에는 다르게 시작했더라도 그 작은 떨림의 파장이 서로에게 전달이 되어 공명하게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 속에서도 그 공명이라는 것은 아주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그럽니다. 예를 들어 어떤 활자가 개발된 시점을 보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전혀 연결 고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비슷한 시기에 활자가 계발되었다거나, 비슷한 발명품이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거나, 또 다른 예로 세계사 차축의 시대라고 하는 부처님 당시의 시기에 붓다와 노자, 공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등이 함께 정신사의 축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 등도 그와 비슷한 역사 속의 공명현상이라고 말해 봄직하다. 그 또한 일종의 정신적인 공명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집에서 혼자 기도할 때 기도의 힘을 받는 에너지와 절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서 함께 동일한 기도를 함으로써 동일한 주파수의 파장을 일으켰을 때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내 힘이 별로 없더라도 기도 열심히 하는 도량에 가서 힘 있는 도반들, 법력이 선 스승님을 모시고 기도를 하고 수행을 한다 그랬을 때, 그 에너지, 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깨달음을 얻은 자, 법이 선 자가 가까이 함께 있다면, 혹은 같은 시기를 살고 있다면 그 정신적인 공명의 힘을 우리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님 같은 큰 스승이 몇 분 계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지구라는 한국이라는 전체 땅 덩어리의 어떤 에너지의 힘이 전혀 다른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하나 있는 그곳은 아주 수승한 파장, 깨달음의 파장과 서로 공명을 하기 쉽다 그래요. 시계추가 다르게 움직였지만 하나로 움직이듯이 하나로 결속해서 몰아가듯이 그 밝게 깨어있는 자의 파장이 있었을 때 그 주변은 그 파장과 일치를 이루게 된다, 쉽게 말해서, 깨닫기가 쉽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격 나쁘고 아주 욕도 잘하고 화를 내기 좋아하고 이런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닮아 가잖아요. 파장이 같아지는 겁니다. 파장의 주파수가 같아지는 거예요. 나는 그걸 배우고 싶지 않아도 욕을 그냥 맛깔나게 입에 딱 붙게 하는 사람 옆에 가서 며칠만 살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런 똑같은 욕이 툭툭 튀어 나오거든요.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 파장이 나한테 공명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 파장으로 바뀌어 버린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하는데 있어서는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나은 도반과 함께 가라 이런 말씀을 하신 겁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고 하니, 내가 어떤 생각을 하나 일으키지 않습니까? 내가 어떤 한 가지 생각을 일으킬 때 그 생각은 우주 전체와 공명한다, 그 생각 하나는 우주 끝까지 일시에 전파 되어서 우주 전체에서 그 생각과 비슷한 주파수를 가진 에너지와 공명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와 비슷한 생각, 비슷한 주파수, 비슷한 파장을 가진 에너지를 끌어당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 모인다고 유유상종이라 그러잖아요. 비슷한 것들 끼리 모이게 된다, 공명을 한다, 내가 기대를 하고 어떤 바람을 가지고 있게 되었을 때, 그 강력한 에너지를 보내게 되면 내 안에 있는 이 주파수 이 에너지와 동일한 주파수대의 사람, 동일한 주파수대의 물질, 상황, 조건들이 나와 함께 공명을 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을 보태주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게 되면 내 주변에 있는, 내 지구상에 있는 기도하는 자의 주파수가 나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짜증을 내고 화를 내고 욕을 하게 되고 범죄를 저지르게 되면 범죄를 저지를 자들의 주파수가 나와 일치를 이루게 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때때로 수행을 하다보면 어떤 경계를 경험하게 되거든요. 혹은 어떤 경우에는 어떤 존재, 어떤 정신적인 존재를 만나게 되기도 하고 다양한 어떤 경계를 만나는데, 그건 어떤 파장이 일순간 맞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이 돌아가신 영가를 볼 수 있습니까? 못 보는게 당연하지요. 사람의 주파수와 영가의 주파수는 다르니까요. 그런데 그 주파수대가 일순간 어떤 이유로 인해 달라지게 되면 또 다른 어떤 존재나 영가와도 마주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파수에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 정진을 통해서 우리의 기운 주파수가 수승해지면 저 천상 세계의 아주 맑은 정신들과 어떤 공명을 가져올 수가 있게 되기도 합니다.

그만큼 내가 생각하는 그 의업, 어떤 하나의 의업을 일으키는 것, 그것은 이 우주 전체와 공명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 힘을 주고 받기 때문에 에너지의 엄청난 힘으로서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쉽게 쉽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짜증을 내고 욕심을 내고 이런 일들을 함부로 할 수가 있겠어요?

앞에서 입안의 혀 세포를 떼어 몇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거짓말탐지기를 연결시켜 놓고 사람과 세포를 연구해 보았던 얘기를 했잖아요. 멀게는 약 500km까지 떨어진 곳에서도 배양된 세포와 사람의 손에 연결된 거짓말 탐지기가 정확히 같은 반응을 그것도 정확히 같은 시간에 보인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것이 빛의 속도로 간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먼저 반응을 보이고 연이어 먼 곳의 세포가 반응을 보여야 하잖아요. 그 곳에까지 가는 시간이 걸리니까 말이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 둘의 반응 사이의 간격이 0초더라는 겁니다. 동일한 시간대에 같은 일이 벌어지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시간을 초월한다는 이야기예요. 우리가 생각 하나 일으킨 것이 저 우주 끝까지 가는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게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화엄경을 축소시켜 놓은 법성게를 보면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량한 겁 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대가 바로 일념 가운에 있다, 한 생각 가운데 있다고 하거든요. 그것이 바로 이말입니다. 내가 일으킨 어떤 한 생각 하나의 파장이 우주 끝까지 전달 되는 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전달 된다 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일으키게 되었을 때 그것이 영항을 미치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직바로 우주 전체와 연결되어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겁니다.

예를들어 내가 몸이 안 좋아서 안 좋은 병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아, 이것이 다 치유되었다’ 라고 스스로 그냥 믿고 ‘그래, 난 치유되었다’ ‘부처님께서 다 치유해 주셨다’ 라고 굳게 믿는 어떤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면 그 에너지가 모든 내 주변의 물질 세계 전체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동시간대의 내 몸에 있는 암세포, 종양등 모든 세포, 내 몸에 있는 모든 물의 결정, 세포 하나 하나와 직접적으로 순간 연결이 되고 그뿐 아니라 내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전달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마음을 바꾸는 순간, ‘나는 죽으니까 내 인생이 끝이구나’ 라고 좌절하는 마음에서 한 생각 돌이켜서 밝은 마음을 일으킴과 동시에 갑자기 그날따라 외출했다 들어오는 남편이 평소와는 다르게 따뜻하게 대해 주거나, 공부도 안 하고 말도 안 듣던 자식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게 되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도 평소보다 더 관심을 보이며 잘 해주고, 우연히 TV를 틀었는데 불치병에서 극적으로 살아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오거나, 마음을 비우고 이웃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뛰어난 대체의학자나 신의(神醫)라고 불릴 법한 사람과 인연이 되거나 하는 방식으로 우주법계가 나를 도와주게 된단 말입니다. 죽을 것 같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뀜에 따라 긍정적인 파동, 긍정적인 주파수와 공명을 하게 되고, 그 긍정적인 치유의 주파수와 공명된 다양한 치유의 방법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나와 연결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의식, 마음, 생각, 의업이 가진 힘입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우주를 만들어 낸다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의업이구요 이 의업이 나아가서 구업으로 말로 바뀌고 구업이 나아가서 몸으로 행동으로 바뀌고 신업으로 바뀝니다. 이 생각 하나가 말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과 말과 행동, 우리들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내 세상을 창조하는 겁니다. 나아가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이 우주를 창조 해 내는 겁니다. 그 창조의 힘이라는 것이 너무나도 어마 어마하다 이 소리입니다.

 

마음 올바로 쓰는 법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를 알았습니다. 이 세상이 창조되는 이치는 바로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창조를 하는데 이 신구의 삼업이 생각도 파장이요 말도 파장이고 몸의 행위도 파장이다, 파장으로서 이 우주 끝까지 퍼져나간다, 더욱이 파장이 퍼져 나가는데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퍼져 나갈 뿐더러 그 퍼져 나가는 그 힘, 그 힘이 1094erg로써 기존 알려진 모든 힘의 총합보다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의 억만배 보다도 더 큰 어마 어마한 힘으로써 시공을 초월해서 퍼져 나간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파장에 담긴 정보는 우주의 모든 정보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우리의 업, 우리의 병, 치유방법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다고 하는 소식입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세상입니까! 이 얼마나 엄청난 소식입니까!

어마 어마한 세상 속에서, 우리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엄청난 삶을 우리가 살고 있고 그러한 큰 힘으로서 마음을 쓰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내가, ‘나’라는 작은 나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내가 아는 나의 전부가 아닙니다. 나는 능력 없고, 나는 돈도 없고, 나는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능력 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본질은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나의 생각이 ‘나는 능력없어’, ‘나는 공부도 못하고 운동신경도 없고 가난하다’고 내 스스로 한정짓는 마음, 그 생각이 나의 능력을 한정짓게 하는 겁니다. 1094erg라는 그 어마 어마한 힘으로 말이지요.

그 내 생각이라는 파장이 주는 어마 어마한 힘으로 한편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으나 한편으로는 ‘나는 가난해’ 라는 그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겁니다. 그 엄청난 에너지로 자기의 힘을 꽃 피우는데 쓰지 않고 자기의 힘을 스스로 한정짓는데 쓰고 있다 이 말입니다. 내 스스로 내 능력을 한정짓고 있으니까 그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제한하는데만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의 잠재된 무한한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습니다. 활짝 꽃 피우는데 쓰지 못하고.

‘부자가 되길 부처님께 비나이다’ 하고 아무리 빌어 봐야 그 비는 행위는 거지 마음을 연습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자가 되고자 비는 마음은 사실 ‘나는 지금 가난합니다’ 라는 마음에 힘을 주는, 에너지를 주는 일이 됩니다. 지금 가난하니까 앞으로 올 미래에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말 아니겠어요. 그러니 비는 마음은 사실 구걸하는 마음이고, 그렇기에 비는 마음은 비는 방향과는 달리 거꾸로 결과를 맺게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비는 기도를 하지 말고, 감사의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는 ‘지금 이대로 감사합니다’ 하는 거니까 더 이상 바랄게 없어요, 그냥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감사하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떤 파장을 연습하는거냐 하면 부유함의 파장, 부자의 파장, 풍요로움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부자되게 해 주세요’는 구걸의 파장, 가난의 파장을 연습하는거고, 오히려 ‘나는 지금 부족하고 결핍되어 있습니다’하는 파장을 엄청난 에너지 주파수로 이 우주를 향해 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 이 연봉에 대해 감사합니다’하는 것은 부유함과 풍요로움과 부자의 파장을 연습하는 것이겠지요.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허망한 일들을 벌여오고 있는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마음 써야 하는지, 마음 쓰는 거 하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이렇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중생들이 어리석다고 하는 겁니다. 무명중생이라고 하는거예요. 똑똑하면 뭐 합니까. 지식만 늘였지 지혜는 바닥을 치는 헛똑똑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또 다른 예를 들어 드릴까요? 병이 난 사람이 어디 한 가지 몸이 안 좋단 말입니다. 심장이 안 좋아요. 그런 사람이 마음 속으로 ‘아, 이 심장을 어떡하지’ ‘심장이 더 나빠지면 어떡하지’ 하고 항상 고민한단 말입니다. 항상 근심하고 걱정하고 뭘 먹어도 이게 심장에 좋은가 안 좋은가 따지고, 계속 심장이 안 좋다라는 것에 마음이 붙잡혀 있게 된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으로는 ‘빨리 나아야 하는데’ ‘빨리 나아야 하는데’ 하고 바라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이 무엇을 연습시키냐 하면 ‘심장이 안 좋다’는 에너지, ‘심장이 나쁘다’는 주파수의 파장과 자꾸만 공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심장은 더 안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차라리 심장에 붙박혀 있는 그 노이로제 같은 마음에서 놓여나고, 그 마음을 비워버리면 되는데 오히려 더 나쁘게 마음을 연습한단 말입니다. 비우지 못하겠고 놓아버리지 못하겠다면 오히려 반대로 이 생각, 이 의업, 이 의지라는 것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심장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혹은 ‘심장이 건강해지게 되어 감사합니다’라고 해도 좋습니다. 감사와 사랑이야말로 이 우주의 모든 밝고 건강하며 청정한 모든 파장과 공명하는 최고의 진언이기 때문입니다.

뚱뚱한 사람이 ‘다이어트 해야 되는데’ 하는 그 한 생각에 집착하고 ‘먹지 말아야 하는데’하는 그 한 생각에 붙잡히게 되면 그 생각 때문에 안 먹어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각에 집착이 되어 음식에 대한 집착이 더 커지고 더 꾸역꾸역 먹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런식으로 우리는 엄청난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힘을 가지고 거꾸로 쓰고 있는 겁니다.

 

성공과 부자, 그 너머의 이야기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 막바지 결론에 다달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생각, 말, 행동이라는 신구의 삼업으로서 이 우주를 창조해 내고 내 세상을 창조해 낸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요즘에 씨크릿 이란 책이 아주 유명하고요, 부자가 되는 길,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는 책들이 우우죽순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 많은 것 들이 이야기하고 있는게 지금 제가 말씀드린 여기까지 입니다.

생각의 힘으로 마음의 힘으로 부자가 되라, 마음에 부자를 그리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마음의 힘은 엄청나기 때문에 마음의 힘으로 성공하려면 성공 할 수 있다, 그것을 마음에 그리면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진다 하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까지도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을 부자가 되는 쪽 성공하는 쪽으로 자꾸 돌리려고 애쓰는 것이 요즘 나온 수많은 책들의 한결같은 결론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끝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우리가 그 마음 에너지를 써서 부자가 됐어요. 성공했어요. 큰 인기를 누리는 연예인이 됐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우리 행복도 거기서 끝날까요? 부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곧 나의 행복을 의미하겠습니까?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샀다, 그것이 곧 나에게 완전한 만족을 가져다 주고, 완전한 행복을 가져다 주고, 아주 자유로운 깨달음과 지혜를 가져다 줄까요? 그렇지가 않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습니까?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부자가 다가 아니고, 성공이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이 소유하면 더 많이 소유할수록 우리 마음은 더 혼탁해 집니다. 혼탁해 지기 쉽습니다. 많은 것을 소유할 수록 우리는 더 삿된 마음으로 치닫기 쉽습니다. 욕심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괴물과도 같은 엄청난 힘으로 우리를 장악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 조금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집에 별 문제가 없잖아요. 서로 단결해서 어떻게 하면 밥이라도 한 끼 더 먹고 내 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내 동생 더 먹이려고 애쓴다 이말입니다. 가족 전체가 아내는 남편 걱정 하고 남편은 아내 걱정 하면서 산다 말이지요.

전에 이런 말씀 드렸잖습니까. 아프리카 어디에 네 살 정도 된 아기가 쓰러져 죽어가고 있더란 말입니다. 사진기사가 가서 사진을 찍고는 미안했는지 초코파이 같은 먹을 것을 하나 던져 주었더니 그걸 들고는 그 힘없는 몸으로 걸어가서는 허름한 집안에 있는 다 죽어 있는 한 살 정도 아기를, 죽어 있는 냄새가 진동하는 아기를 끌어 안고서는 그 먹을 것을 자기가 먹지 않고 아기에게 물려주고 자기 동생이 이미 죽은 동생이지만 동생이 먹지 않으니까 턱을 잡아 가지고는 막 억지로 먹는 시늉을 해 주더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 한 장을 찍고 그 사진작가는 무슨 상을 탔다고 해요. 자기가 죽을 지경이 되면서도 네 살짜리 아기가 한 살된 동생을 위해서 자기는 죽더라고 그것을 나눠 주거든요. 없을 때 이런 어떤 본질적인 사랑, 자비, 인간애 같은 것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많은 것을 소유하면 소유할수록 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지요. 평범한 행복한 집안에서 로또가 당첨됨과 동시에 집안이 파탄나고, 남편이 아내와 싸우고 이혼하고, 부모가 자살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단 말입니다. 이뿐인가요?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들끼리 서로를 죽이는 세상이 어디 상상 속에서라도 가능한 이야기겠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런 일은 상상 밖의 이야기이고, 도저히 생각으로조차 해 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어때요? 높은 권력이나 많은 경제력 앞에서는 그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아니 그런 권력 암투, 왕권을 둘러싼 죽고 죽이는 일들 같은 것들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처럼 드라마 같은데서도 묘사되고 있잖아요. 권력이 없는 곳에서는 권력의 암투가 일어나지 않지요.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부모형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네팔에 갔을 때 보니까 왕족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형제 자매, 부모, 친척들을 다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었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이게 다 많이 가진 자들 속에서나 있을 법한 일들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부자나 성공이나 권력 같은 것을 많이 소유하는, 그런 소유만이 전부가 아니라는게 분명해 졌습니다. 아니 큰 소유는 오히려 정신을 타락시키고, 도저히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 만들기까지 합니다.

 

근원적인 실천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어떤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일까요? 어떤 것이 분명한 것일까요? 어떻게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지혜롭게 사는 것일까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라는 것은 사실은 그 성공 이면에 실패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틀린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불법이 진리이지만, 불법이라는 진리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도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집착해서 그것만이 진리라고 고집하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고 이야기합니다. 전적으로 옳다라는 것은 전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가 너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사실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이면에 증오를 항상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서 다른 남자에게 갔을 때 더 큰 괴로움과 좌절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이라는 것, 성공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옳다는 것, 이 모든 것은 극단적인 이면을 항상 함께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은 근원이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 의업, 생각이 만들어 낸 모든 작용들은 옳고 그르거나 맞고 틀리거나 성공과 실패, 좋다 나쁘다 하는 그 이면에 극단적인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근원적이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근원적이지 못한 양 극단의 분별심, 차별심을 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이 세상을 창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창조해 낸 현실에서는 늘 긍정과 부정이 함께 공존합니다. 즐거운 일 끝에는 괴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고, 풍요로움의 바탕에는 가난의 그늘이 존재합니다. 과도한 부유함을 누리는 사람들이 있는 대신에 과도한 가난 속에서 기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크게 성공하는 한 사람을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은 실패를 맛보아야 합니다. 문명의 이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이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기상이변이나 환경오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은 발전하고 아파트가 만들어지고 에어콘이 만들어지고 이 편리한 것들이 만들어 지는 것이 좋은거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다 근원적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엄청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도시화, 산업화 이런 것들이 이 지구를 멸망으로 이끌고 있지 않습니까? 인위적인 어떤 에너지, 힘 그것이 성공적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가능성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문명의 이 길을 누리고 있지만 그 이면에 지구가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언제 지구가 기상이변으로서 나를 몰아칠지 모르는 두려움도 함께 껴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근원으로 가는 것이냐, 본질적인 삶, 근원적인 삶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것이냐, 그건 바로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하는 모든 분별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두 가지 양 극단의 선택 가운데 어느 한 쪽을 선택하는 그 습관적인 방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것을 2,500여 년 전 붓다는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중도의 삶에서는 어느 것도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없고, 네 편과 내 편으로의 나뉨도 없으며, 절대적으로 옳고 그름도 없습니다. 이 우주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가 서로를 살려주고 도와주며 사랑해주는 관계로써 상의상관적으로 존재합니다. 연기와 자비의 정신이 고스란히 인간 존재의 삶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꿀벌이 없으면 인간도 없고, 네가 없으면 나도 없다는 그런 상의상관적인 불이(不二)의 지혜만이 우리 모두를 한 가족으로, 한 생명으로 만들어줌으로써 동체대비의 사랑, 둘이 아닌 자비의 실천으로 생활방식을 이끌어 갑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야 그런 삶에 한 발자국 다가설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분별심과 차별심을 놓아버릴 수 있을까요? 그게 바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라는 존재가 일으켜 내는 생각들, 움직임들, 행동들, 느낌들, 이 모든 것을 관찰해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이 되어 나를 지켜보십시오. 지켜봄은 그 무엇도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지켜봄은 어느 한 쪽을 선택하지도 않고, 어느 한 쪽을 고집하지도 않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관(觀)수행, 지관(止觀), 비우고 관찰하는 그 지관의 수행, 알아차림의 수행, 깨어있음의 수행, 그 수행이야말로 나라는 이기적인 마음, 아상이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근원에 있는 말하자면 불성, 자성불, 주인공, 본래면목, 참나의 자리인 우주의 근원적인 힘이 나를 이끌고 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근원으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좋고 나쁜 쪽 가운데 좋은 쪽을 선택해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좋고 나쁨을 넘어서는 무분별의 근원적인 치유의 길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나를 이끌고 갑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생각으로 판단 했을 때는 언뜻 좋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본질적으로 근원적으로 갔을 때는 항상 완전한 근원적인 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간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이면에 행복 이면에 불행, 사랑 이면에 증오 이런 것을 내포하지 않는, 다시말해서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어떤 인연이 오더라도, 내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항상 여여(如如)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휘둘리지 않을 수 있고,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자기 중심이 잡힌 그런 어떤 힘으로 나를 이끌고 가고 내 삶을 이끌고 가고 이 지구를, 이 우주를, 인류를 이끌고 가는 힘 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가 나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본래면목이 나를 이끌고 가려 하는 삶,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해 보겠다’ 라는 생각을 버리고 완전히 내 맡기는 삶 그리고 다만 지켜보는 삶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다만 지켜보는 자로 남게 되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모든 삶의 모습들을 아주 흥미로운 눈으로서 아주 새롭고 흥미진진하며 그렇다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한 발짝 떨어진 여여한 마음으로 모든 일이 내 삶에 내 존재위에 삶이 그저 파도쳐 흘러갔다 흘러올 수 있도록 내버려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아상으로 삶에 개입하지 않게 됩니다.

질병과 괴로움 속에 깊이 빠져서 그것에서 울고 웃게 하지 않게 되고 항상 흥미롭게 새롭게 아주 조화롭게 삶을 충분히 누릴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삶을 아주 흥겹게 완전히 받아들이고 즐겁게 누리면서 아주 충분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랬을때 아주 자연스러운 껄끄럽지 않고 인위적이지 않은 아주 자연스러운 삶이 내 삶 속에 저절로 등장을 하게 되면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두려움과 번뇌와 괴로움은 놓여지게 되는 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것이 어찌보면 우리 삶의 근원 그리고 이 현상세계의 본질과 근원세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린 부분이예요. 이 부분을 조금 더 사유를 깊이 해 보시고 수행을 통해서 이 자리가 과연 어떤 자리인가를 스스로 직접 느끼고 체득할 수 있는 그런 계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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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목적 지향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오직 마음은 목적의 성취에 가 있습니다.

끊임없이 목적을 세우고 세우고 또 세우기만 하고 삽니다.
세워 둔 목적을 성취하였을 때라도
그 성취의 순간만이라도,
행복을 즐기질 못하는 것 같습니다.

목적을 세우는 이유는 목적이 성취되었을 때
행복하기 위해서이지만,
그 순간 조차 우리는 여유롭게 행복을 느끼지 못합니다.
목적을 성취하는 순간 또 다른 새로운 목적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목적 세움과 목적 성취의 끊임없는 반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 있는 목적만을 지향하며 살다보면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놓치며 살기 쉽습니다.
그 목적만을 따라 가다 보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즐길 수가 없습니다.

수행이란 ‘지금 여기’에서 깨어있는 일이지
무언가를 성취하는 일이 아닙니다.
순간 순간이 그대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순간 순간이 그대로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순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닫고자 애쓰면
깨달음에서 자꾸 멀어지는 일이 되고 맙니다.

깨달음은 언젠가 성취해야 할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온전히 깨어있음입니다.
목적을 지향하려 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순간이 그대로 목적임을 깨달으면 되는 것입니다.
목적 지향이 아닌 순간 순간 온전한 목적으로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순간 순간을 온전히 깨어있게 되면
그 순간이 그대로 법신(法身) 부처님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어리석은 중생으로 살지 말고,
‘아상’으로 살지 말고,
부처님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깨어있음이 바로 부처님으로 사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 수 있게 되면
현실이라는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어떤 경계 속에서라도 우리는 깨달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온전히 지금 여기에서 깨침을 즐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따로이 산사로 수련회를 떠나는 일 보다
어쩌면 매일 하고 있는 삶 속에서,
이를테면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밥 먹는 순간,
운전을 하는 순간, 지하철을 타는 순간, 일 하는 순간들 속에서
충분히 큰 깨달음을 얻게 될 수 있게 됩니다.

운전을 할 때
어디 어디까지 도착하는 수단이 되지 않도록 하셔야 합니다.
운전 그 자체가 온전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도착하기 위해 운전을 하게 되면
내 마음은 도착지라는 목적에 가 있기 때문에
운전하는 순간 순간에는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랬을 때 운전하는 순간의 나는 이미 내가 아닙니다.
나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목적지에 가 있는데
몸은 도중에 있으니 얼마나 조급하겠습니까.
더구나 빨간 신호등에 자꾸 걸리거나,
차가 막히거나 했을 때,
마음은 이미 목적지에 있지만 몸이 따라가지 못하니
얼마나 화가 나고 조급할 것입니까.

운전하고 가는 순간 순간 그대로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운전하는 그 자체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운전하는 순간 순간 알아차림을 놓쳐선 안 됩니다.

운전하는 순간 알아차리게 되면
내 마음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온전히 운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빨간 신호등이 켜 지고 차가 멈춰 서면
그 순간이 바로 내 수행을 살찌우게 하는 소중한 경계인 것입니다.
그 순간이 나에게 목적인 것입니다.
빨간 신호등이나, 차막힘이 짜증나고 조급하게 하는 경계였지만,
수행자에게는 그 경계가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됩니다.

매번 차를 몰고 절을 나설 때 마다
나를 놓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래서 한 번은 운전 중에 일어나는 마음을 알아차리려는
오직 그 목적만을 위해 차를 몰아 보았습니다.

빨간 신호들이 나타나면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가,
차가 막히면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까,
하는 집중하여 바라보는 마음 연습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니
빨간 신호등이 켜 지면 조바심 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잘 되었구나’ ‘올 것이 왔다’ 싶은 것입니다.
목적이 빨간 신호등, 혹은 차막힘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조급할 것도 없고, 답답할 것도 없이
온전히 그 순간 알아차림만이 있을 뿐입니다.
빨간 신호등, 차막힘 그 자체가 목적일 때
우리의 마음은 평온합니다.

빨간 신호등에 걸리면
그 순간 조급한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순간 신호등 앞에서는 서 있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지
빨리 가는게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순간 순간 그 자체가 목적일 때
그 어떤 순간도 조급하거나, 괴롭거나, 답답하지 않게 됩니다.
목적이 다른 데 가 있을 때,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을 때,
그 때 몸과 마음이 따로 따로이니 괴로운 것입니다.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여 온전히 알아차릴 뿐입니다.

걷는 것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걸어서 목적지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우리 마음은 걷는 데는 관심이 없고
오직 도착하는 데만 마음이 가 있게 마련입니다.
빨리 도착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걷는 일은 시원찮은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돈을 들여 수련장을 찾아가
‘경행’ 수행을 한다고 했을 때는 어떠합니까.
걷는 그 자체가 온전한 목적입니다.
걷는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일이 됩니다.
걷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아예 목적지가 없고
오직 걷는 그 자체만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랬을 때 우린 온전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비로소 걷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펼쳐진
그 어떤 일이라도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지금 여기’에서 그 순간 알아차림이
온전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은 다시 말해
목적을 버리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목적 없음’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즉한 순간 깨어있으면
그 순간 우리는 온 우주와 하나됩니다.
우리의 몸은 그대로 법신(法身)이 됩니다.

아무리 괴로운 일이 있더라도
순간이 괴로운 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괴로움이거나,
목적에 대한 두려움이거나,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걱정이거나,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거의 그렇습니다.

그러나 순간 순간을 온전히 깨어있게 되면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의 거의 90%는 사라지게 됩니다.
그만큼 과거나 미래로,
혹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놓은 환영에게로
마음을 빼앗기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10%도 안되는 괴로움과 맞닥뜨렸을 때,
그 때도 온전한 알아차림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괴로운 ‘나’를 온전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괴로움 또한
고정된 실체가 없이 잠시 스쳐지나가는 인연임을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즉한 순간의 괴로움을 잘 다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욕을 얻어 먹는 순간,
상대에게 배신 당하는 순간,
억울함을 당하는 순간,
그 순간 순간들에 온전히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알아차리고 있으면 괴로움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습니다.
실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체 없는 경계에 휘둘려 괴롭다고 느끼지만,
그 실체를 온전히 관해보면
우린 실체 없음(공)의 진실만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을 살아가며
순간 순간에 맞닥뜨리는(촉) 즉한 경계
그 순간의 경계가 가장 중요한 시점이 되도록 하세요.
지금 여기라는 이 순간 말고는 없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면 내 삶 전체를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때는
오직 ‘지금 여기’라는 순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과거를 그렇다고 미래를 살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일체 매 시간, 매 초가
내 앞에 펼쳐진 그 모든 경계가
그대로 나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목적 성취를 위해 애쓸 필요는 없습니다.

오직 지금 이 순간 순간이 목적이며,
알아차리는 순간 순간이 그대로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적 없음의 목적’이고,
‘성취 없는 성취’만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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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속도를 늦추라

삶과 명상 이야기 2009/10/30 14:15 Posted by 법상

마음이 여여하지 못하고
이리 뛰고 저리 뛸 때,
괴롭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고 올라올 때,
나태한 마음이나 급한 마음이 올라올 때,

마음의 고요를 방해하는
한 치의 움직임이라도 있을 때라면
그 때가 바로
업식의 불길이 치솟을 때입니다.

차를 몰고 가면서
급한 마음에 속도를 올리게 되고
빨간 신호등에 조바심과 성내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면
이미
우리 마음은 업식의 불길에 크게 휩싸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면서
떨리고 두근 두근 거린다거나,
부담을 느낀다거나
만나기 싫은 마음
혹은 너무 보고픈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업의 불길이 장난을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해 나가면서
급한 마음이 앞선다거나,
꼭 이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거나,
가슴에서 뜨거운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다거나,
목표를 성취한 이후의 행복감에 빠져 있다거나
이런 것들 또한
내 안의 업의 불길이 치솟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
급한 마음, 서두르는 마음은
가장 경계해야 할 수행의 재료라 생각하세요.

마음이 급하고, 서두르게 되는 이유는
바라는 바가 크기 때문이고,
바라는 바에 대한 욕심과 집착이 크기 때문이며,
‘꼭 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 때문이고,
마음이 미래로 먼저 가 있기 때문이며,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알아차림을 놓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이 나는 순간,
업의 불길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휩쓸어 버립니다.

급한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 나가면
그 일은 자연스럽고 여여한 흐름이 되지를 못합니다.
여법한 일과가 되지를 못하고,
업의 불길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조급한 마음이 앞서게 되면
빨리 빨리 성취하려는 섯부른 욕심 때문에
그 사이 삿된 마장이 끼기 쉽고,
그로인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삿된 쪽으로 흘러갑니다.

바라는 바 욕망이 없다면
아무런 서두를 일도 마음 급할 일도 없습니다.
그냥 한가로이 노닐 뿐입니다.
마음은 늘 휴식 중이며,
한낮 나른한 오후의 여유로움을 평화로이 즐기고 있음입니다.

모름지기 수행자는
언제나 여유롭고 한가해야 합니다.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여유롭게 한가로이 온전히 일을 해 나가라는 것입니다.

조금 느리게 살면
느림, 그 자체만으로도 큰 공부가 됩니다.
느려지면 저절로 나를 비추어 볼 수 있게 되고,
일을 하는 순간 업의 불길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차를 타고 운전을 할 때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가 있지만,
마음이 급하고 조바심 날 때가 있게 마련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격이 급해
그리 바쁜 일이 없는데도 저도 모르게 차를 빨리 몰고 갑니다.

빨리 가려는 그 마음은
업의 불길입니다.

본래 자리 텅 빈 우리 마음은
바쁠 것도 없고, 성급할 것도 없습니다.
바쁘게 갈 일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속도를 조금 줄여 보세요.
그리고 가고 있음을 온전히 느껴 보세요.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챙겨 보시란 말이지요.

속도를 늘이나 줄이나
삶의 속도는 늘고 주는 법이 없습니다.
진리의 속도는 빠르고 느리고가 없습니다.

마음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내 안에 어지러운 마음, 번잡한 마음,
그리고 바라는 마음, 욕심내는 마음만
자꾸 늘어갈 뿐입니다.

차 속도를 줄이듯
삶의 속도도 조금씩 줄여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수행의 속도도 조금 줄여 놓으세요.

오고 갈 곳이 없는 이 텅 빈 법계 속을
아무리 속도를 낸들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우리의 감각에만 속도가 있는 것이지
내면의 본래 뜨락에는 속도가 있지 않습니다.

조금 느리게 여유로운 마음을 내면,
우리의 속 뜰은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여여해 질 수 있습니다.

급한 마음에 일을 하면
업의 불길에 휩쓸리기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 쉽지만,
조금 바쁘더라도
느긋한 여유로움으로 일을 하게 되면
자연스런 법계의 흐름을 타고
순리대로 일을 풀어 나갈 수 있습니다.

언제나 여유로우세요.
마음을 턱 놓고 살면
지금 이 순간 그리 바쁠 것이 없습니다.

바쁘고 급하다는 것은
바라는 것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고,
욕심과 집착이 그만큼 크다는 것이며,
그만큼 놓고 비우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 놓고 가는데
바쁠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지금 이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자성불 여여한 존재입니다.

자꾸 어디를 가려하고,
자꾸 무엇을 찾으려고 하시는지요.
그리 급하게 어디를 가고 계신가요?

우리가 바라는 일은
이미 다 이루어져 있으며,
찾고자 하는 것은
내 안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고,
급하게 가고 있는 그 목적지는
다름 아닌 ‘지금 여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가고 오고도 없고,
나고 죽고도 없으며,
성취되고 말고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 이대로
여여하고 텅 비어 있거늘
바쁜 걸음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빨리 걸어도 ‘그 자리’이며,
천천히 걷는다 해도 여전히 ‘그 자리’이고,
그냥 가만 있어도 언제나 ‘그 자리’일 뿐입니다.

지금 이 자리,
자성불 본래 자리
이 자리가 우리가 그렇게 바라던 자리이며,
그렇게 찾으려고 애쓰던 자리이고,
급하게 뛰어 다다르려 했던 바로 그 자리인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가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발걸음을 멈추세요.
조금 천천히 가도 늦지 않습니다.

우린 언제나
도착지에 여유로이 머물러 있거든요.
그런데 분별을 지어
또 다른 도착지를 자꾸 찾으려 하니 답답한거지요.

그만 가세요.
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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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3, 정심행선분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보리를 얻으라


淨心行善分 第二十三
復次 須菩提 是法平等 無有高下 是名阿뇩多羅三먁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須菩提 所言善法者 如來說卽非善法 是名善法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정심행선이란 깨끗한 마음이란 선을 행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앞서 6분 정신희유분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선법이란 악의 반대되는 개념으로써 선한 법이 아니라 ‘지혜로운 주의’ 즉 ‘지혜로운 마음 집중’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심이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뜻하고 있다. 무상정등정각의 완전한 깨달음이야말로 깨끗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심행선은 깨끗한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는 의미이기 보다는, 마음 집중의 수행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의미로 이해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일 것이다.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차별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무상정등정각이라 하는 것이다. 진리의 법에는 그 어떤 차별도 발 붙일 틈이 없다. 높고 낮다거나, 옳고 그르다거나, 선하고 악하다거나, 크고 작다거나, 잘나고 못났다거나, 나고 죽는다거나, 나아가 어리석고 지혜롭다거나, 중생과 부처라거나, 생사와 열반이라는 개념조차 방편으로 이름 붙여진 개념일 뿐 진실한 법의 바탕에서는 그 모든 차별이 대 평등의 용광로 속에 녹아내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을 보라. 모든 것이 차별과 나뉨이 세상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높고 낮은 구분을 두어 차별하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 세우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수능시험을 보더라도 전국의 모든 수험생을 일등부터 꼴지까지 등수로써 높낮이를 매겨 차별하고, 기업도 대학들도 무슨 무슨 평가의 틀에 따라 등수를 매겨 세계에서 몇 위의 기업인지, 대학인지를 가늠하곤 한다. 그것이 이 사회의 차별된 어리석은 현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람들 모두가 직장에서 서열에 의해 등수가 매겨지고, 점수화되어 관리되고, 나아가 먹거리들 또한 어떤 틀에 맞춰 몇 등급인지가 정해진다. 이처럼 우리 사회는 수많은 잣대와 기준을 정해놓고 그 틀에 따라 높고 낮은 차별을 정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렇게 높고 낮은 틀을 정해두고 그 결정에 따라 사람들의 등수가 정해진다. 또 그 등수에 따라 사람들 서로간에 차별이 일어나고 불화와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그런 높고 낮은 차별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흔들고 있다보니 모든 사람들이 서로 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자 투쟁하고 싸우고 심지어 국가간 인종간에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제 이 사회는 사랑과 자비의 장이 아닌 무한 경쟁과 투쟁의 장이 되어버렸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면 곳 낮은 계층으로 떨어지고 다른 사람을 밟고 일어서야만 보다 높은 계급으로 상승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의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우위를 점할 것인가에 달려있고, 반대로 괴로움의 크기는 얼마나 다른 사람에 비해 비교 열등에 놓여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 상대적 박탈감이란 무엇인가. 바로 높고 낮음을 나누는 차별심에 기인하는 것이다. 어리석음에 기인하는 이 차별이 모든 세상의 괴로움을 몰고 왔고, 세상의 모든 사랑과 자비를 빼앗아갔다.

그러나 여기 부처님 말씀을 들어보자. 법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은 그렇듯 높고 낮음을 차별하는 거기에 있지 않고 대평등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높고 낮음을 차별하지 않는 만인, 만생명 대평등의 가르침 속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즉 최상의 깨달음은 나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차별 뿐 아니라 사람과 동식물, 사람과 자연간의 높고 낮은 차별의 마음이 지금 이 세상을 극단적인 환경 악화로 인한 멸망 위기까지 몰고 왔다. 신과 인간도 차별되어선 안 되고, 인간과 동식물도, 인간과 자연도 차별되어선 안 된다.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는 이 세상은 완전한 하나의 생명이요, 온전한 법이고 불이고 신으로써 대평등의 공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대 평등의 가르침, 높고 낮은 차별이 없는 대평등의 가르침만이 이 세상을 완전한 평화의 땅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를 완전한 깨달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데려가 줄 수 있다.


아도 없고 인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이 일체의 선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수보리야, 이른바 선한 법이란 여래가 선한 법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선한 법일 뿐이다.”

높고 낮은 차별이 없어 대 평등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온 존재가 차별이 생기는 것은 어디에 기인하는가.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들이 저마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상을 내세우기 때문에 너와의 차별이 생겨난다. 나와 너의 차별이 생겨남으로써 나아가 우리나라와 남의나라, 인간과 자연, 중생과 부처 등의 모든 부가적인 차별들이 연이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든 차별의 원인은 바로 아상에 있다. 아상을 타파하면 나와 너를 나누지 않기 때문에 높고 낮은 차별도 생길 수 없다. 내가 있어야 나를 더 높이고 상대를 낮추고 싶으며, 내가 높아졌을 때 오는 기쁨도 누릴 수가 있는 것인데, 나라는 아상이 소멸되고 나면 내가 남보다 더 높아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와 남이란 차별이 없다면, 그래서 나와 남이 서로 둘이 아닌 한생명이란 자각이 있다면 나와 남 사이를 높고 낮게 나눌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높고 낮은 차별 없이 일체만유, 만생명이 대평등이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일체의 선법을 닦아야 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는 구마라집의 한역의 의미로 보자면 착한 법을 닦는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지만 이를 착한 법으로 본다면 이 또한 악한 법에 상대되고 차별되는 선한 법이기에 이 또한 높고 낮은 차별에 빠지게 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선법의 산스크리트 원전의 본래 의미는 ‘지혜로운 마음 주의집중의 가르침’ 즉 ‘마음 집중’의 수행을 말한다고 했다. 그러니 여기서 이 문장을 해석해 보면 아도 인도 중생도 수자도 없이 일체의 마음 집중 수행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처음부터 이해해 보면, 이 법 즉 진리의 가르침은 높고 낮음도 없이 대 평등이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한 높고 낮음 없는 대 평등의 가르침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타파에서 온다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일체 상의 타파는 마음 집중의 수행을 통해 온다. 그러니 다시 돌려 말하면, 높고 낮음 없는 대평등의 진리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마음집중의 수행을 통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한다고 요약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일목요연한 가르침이 바로 금강경이다. 왜 불교의 가르침이 무차별이요 무분별인지, 무아이며 무아상인지, 왜 대평등인지, 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해야 하는지, 그 실천방법이 무엇인지, 그 모든 것을 분명하게 정리해 보여주는 분이 바로 정심행선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또다시 부처님은 자비로운 우려의 말씀을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고 났더니 ‘아! 그러면 마음 집중의 수행만 하면 바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마음집중’의 수행에 집착하고 있을 중생들을 위해 선법 즉 마음집중의 수행 또한 그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 거기에 집착할 어떤 고정된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즉, 이 말은 마음집중의 수행, 구체적으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이라는 수행을 실체화하거나, 절대화하여 그 어떤 정해진 ‘수행법’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것도 이름 뿐인 것이지 거기에도 빠지면 안 된다. 요즘 위빠사나니 관수행이니 정념, 사띠, 알아차림, 비추어 봄, 깨어있음 등 마음 집중의 수행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자칫 그 말에도 집착하여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짚어주고 있는 부분이다.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을 공부하는 수행자들과 간화선을 공부하는 수행자 혹은 염불이나 진언, 독경이나 절 수행 등 나름대로 실천하고 있는 수행자들이 요즘도 많이 있는데 때때로 어떤 수행법이 더 우수한가를 놓고 왈가왈부하면서 자신의 수행법이 더 우수함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경우를 더러 보게 된다. 이런 다툼도 어디에서 나왔는가. 바로 대평등의 법을 거스르는, 높고 낮은 차별심에서 나왔으며, 나아가 어떤 한 수행법에 집착하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이런 우려를 위해 부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해 금강경에서 말하고 계신 것이다. 선법도 선법이 아니니 이름이 선법일 따름이다. 즉 마음집중이란 수행도 마음집중 수행이 아니니 다만 이름이 마음집중의 수행일 뿐임을 일깨워 주신 것이다. 부처님 열반 후 2천 5백 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금강경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이처럼 분명하고 자비롭다.

높고 낮은 일체의 차별심을 거두어 대평등으로 향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어찌 수행법의 높고 낮음을 논할 것인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모든 수행법은 다만 방편에 있어 서로 다를 뿐이지 그 본질은 높고 낮음이 없는 대평등의 마음 집중 수행법에 다름 아니다. 즉 위빠사나도 간화선도 염불도 참선도 진언도 독경도 절 수행도 그 모든 수행도 모두 그 중심은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에 있다. 염불하는 수행자가 마음을 염불에 모아 주의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과 번뇌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어찌 염불수행일 수 있겠으며, 절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 마음을 주의 집중하지 않고 몸만 일어났다 앉았다 한다면 그것이 어찌 수행이 될 수 있겠는가. 절을 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절 수행이 아니라 단순한 다리운동에 불과할 것이고, 염불하면서 마음 집중을 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입 운동이고 소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간화선도 마찬가지다. 화두를 의심하며 그 의심에 마음을 집중하지 않고 머릿속으로 분별하고 따지거나 마음이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면 어찌 그 사람을 화두 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모든 수행법의 본질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 주의 집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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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탁소리
스님, 그저 나 자신, 순간의 여행자, 자연주의자, 사상적 자유인, 편견 없는 삶의 관찰자, 목탁소리(moktaksori.org/net/kr) 지도법사, [날마다 해피엔딩]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행복수업] [부자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라][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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